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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작가가 된 어느 사상가

[15매]

by 이한얼






매번 다시금 깨닫는 거지만, 나는 글을 쓰며 살아야 사람답게 사는 사람이다. 뭐 대단한 글이나 완성도 높은 글, 재밌는 글이어야 하지는 않다. 그저 글을 쓰는 행위가 내 삶에 꼭 필요할 뿐이다. 한 장의 글을 쓰기 위해 오늘 내가 했던 생각을 나열하고, 그중에 고르고, 그 구조와 모양새를 다듬고, 결국 활자를 통해 글로 정제하는 일은 그대로 내가 오늘 하려는 일을 나열하고, 하고 싶은 일을 고르고, 해야 하는 일을 다듬고, 결국 어떻게든 해내는 삶의 모습하고 서로 통한다. 글을 쓰는 일과 사는 일은 서로 구조와 방식이 크게 다르지 않고, 글을 쓰는 행위와 살기 위해 하는 행위도 서로 영향을 준다. 그래서 단적으로 글을 매일 쓰면 나는 사는 일도 더 잘하게 되고, 매일 쓰지 않으면 삶도 엉망이 된다. 반대로 내가 하루를 잘 살아내면 그만큼 글을 쓰기 용이해지고, 내 일상이 체계적으로 단단해지면 내 글 역시 매끈하고 유려해진다. 혼자 오래 지내도 정신적이든 신체적이든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글이듯, 반대로 내가 더 나태하고 헤플 수 있음에도 그렇게 살지 않는 이유 역시 더 좋은 글을 짜내고 싶기 때문이다.


살다 보니 어쩌다 이런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러고 보니 나는 열아홉 그때, 머리와 마음이 터질 것 같아서 버둥거리던 그때, 속에서 썩어가던 것을 꺼내기 위해 시도한 첫 수단이 왜 글이었을까. 어째서 많고 많은 수단 중에 연필을 잡아서 종이 위에 ‘답답하다’라는 네 글자를 적었을까. 하고 싶은 말은 넘치게 많은데 당장 적을 수 있는 글자가 ‘답답하다’뿐이어서 나는 그조차 답답했다. 이대로 꺼내놓지 못하면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아서, ‘답답하다’는 지극히 단순한 네 글자 말고 다양한 어휘와 문장으로 마음속에서 들끓던 것을 꺼내놓고 싶어서 글쓰기에 빠져들었다. 그러다 결국 이 나이가 되었고. 근데 만약 그때 내가 처음 시도한 방식이 글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당시 내가 잡은 것이 연필이 아니라 붓이었으면 어떻게 달라졌을까. 물론 붓으로 선을 그렸어도 당시에는 그림으로 ‘답답하다’ 네 글자 이상을 표현할 수는 없었겠지. 만약 연필이 아니라 기타였으면? 그 역시 마찬가지의 수준이었겠지. 그럼 하고 많은 오브제 중에 나는 왜 연필을 잡았을까? 그것이 그때까지 나에게 가장 익숙해서? 혹은 과정이 가장 저렴해서? 아니면 이유가 있기는 했을까. 그냥 여러 가지 오브제 중에, ‘마음 속에 있는 것을 꺼내놓아야 내가 살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순간 우연히 내 손에 연필이 먼저 닿은 것은 아닐까. 그때 먼저 닿았던 것이 연필 바로 옆에 꽂혀있던 붓이었으면 지금 나는 유명하든 아니든 화가가 되어있겠지. 아니면 연필꽂이가 아니라 책상 옆에 세워져있던 클래식 기타에 먼저 손이 닿았다면 나는 지금 잘 나가든 아니든 음악가가 되었을 것이고. 만약 그때 마침 서랍장이 열려있어서 그 안에 넣어둔 조각칼을 먼저 잡았다면 나는 지금 나무를 깎거나 점토를 덧붙이는 조각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글을 쓰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가. 아니면 단지 글을 쓰게 된 사람인가. 전자가 아니라 후자라면 내 정체성은 작가인가 사상가인가. 내가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바는 마음과 머리 안에 너무 생겨나서 나를 괴롭히던 생각을 밖으로 꺼내놓고자 함이 아닌가. 그 과정을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지에 대해 나는 단지 글이라는 방식을, 연필이라는 오브제를 선택했을 뿐이고.


스물일곱 살의 겨울, 아주 춥고 눈이 많이 내리던 날, 집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오르다가 별안간 벼락같은 깨달음을 얻고 나는 눈 내리는 가로등 아래 멈춰 섰다. 걸어오는 내내 줄줄 흘려 보내야 했던 눈물은 어느덧 말라있었고, 머리 위로는 하늘이 활짝 열리고 있었다. 나는 이러려고 태어났구나. 이런 식으로 살아야 만족하겠구나. 그러지 않으면 지금까지 계속 느껴왔던 불만족을 품은 채로 평생을 살아야 하는구나. ‘개벽’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내게, 그때까지 착각하고 있었던 나의 정체성도 함께 알려줬다. 마치 글을 쓰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글을 너무 좋아해서 글을 쓰고 있는 것처럼, 글을 쓰지 못하면 큰일이 나는 사람이라 대했던 생각은 틀렸다고. 너는 글을 쓰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글 쓰는 일을 좋아하는 것은 맞지만 글을 쓰다 보니 글이 좋아진 것이다. 그 반대가 아니라. 글을 쓰지 못해도 대안이 있다면 어떤 큰일도 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너는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생각을 꺼내놓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너의 본질은 작가가 아니다. 작가는 단지 구현의 방식일 뿐, 너의 본질은 사상가다. 생각을 정제해서 세상에 드러내는 사람. 개벽의 순간, 하늘에서는 눈과 함께 이 모든 깨달음이 정수리로 쏟아졌다. 다시 눈물이 났다. 다만 아까까지 흘렸던 괴로움의 눈물이 아니라, 내내 컴컴한 동굴에서 처음으로 빛을 발견했을 때 느낀 환희의 눈물이었다. 어쩌면 깨달음과 함께 내려온 눈이 눈가 근처로 떨어져 녹은 물일지도 모르고.


그때 연필이 아니었다면 지금 나는 죽었을까. 그럴 리 없지. 아마 사상과 마음을 그림에 담는 화가거나, 조각에 담는 조각가거나, 음률에 담는 음악가거나, 그도 아니면 표정과 몸짓에 담는 배우가 되었을 테지. 뭐가 되었든 대중적인 목적이 아니기에 아마 어떤 장르에서도 여전히 무명일 가능성이 높겠지만 어떤 삶의 나여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사상적 활동을 하며 살았을 것이다. 반대로 표현하면, 그러지 못한 세계의 나는 전부 이 나이가 되기 전에 죽었을 테니.


스스로의 정체성을 깨닫고 나면 어째선지 삶이 부쩍 쉬워진다.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은 깨닫기 이전과 다르지 않지만, 거의 모든 일을 마음 가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되니까. 사회의 시선과 주변에 눈치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점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은 이가 가진 장점이자, 자신이 원하는 삶을 오롯이 살아갈 수 있도록 세상이 그에게 준 선물과도 같다.





25. 0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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