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매]
글쓰기는 확실히 습관의 영역 하에 있다. 지난 한 달 매일 글을 쓰다 보니 집중력이 점점 오르는 것이 몸으로 느껴진다. 오늘은 요즘 들어 처음으로 집중력이 먼저 흩어지지 않았다. 쓰던 글을 마저 쓰고 싶음에도 시간이 늦어서 아쉬운 마음으로 컴퓨터를 껐다. 그때가 새벽 5시 무렵이었으니 이미 자야 할 시간이 훌쩍 지났다. 생각해 보면 예전에는 매일 이렇게 살았다. 아직 잠들기 아쉬워서 계속 눈가를 비비다가, 어쩔 수 없이 침대에 눕고는 했다.
글을 쓰다 보면 으레 세 가지 상태와 마주하게 된다. 첫째는 집중력이 남았고 시간도 있는데 이야기가 먼저 끝나버리는 경우. 대표적으로는 쓰고자 했던 하나의 주제에 대해 마침표를 찍었을 때가 그렇다. 분명 지금 내가 이 주제에 대해 하고자 하는, 해야 하는, 할 수 있는 말은 다 썼는데 어설프게 집중력이 남았다. 그럴 때는 고민이 된다. 다른 주제를 잡아 다시 몇 시간 더 쓸 만큼 집중력과 시간이 남지는 않았다. 서두라도 열어두기 위해 조금만 써볼까 싶어도 집중력이 아직 이전 주제와 엉켜있어서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이럴 때는 어찌 하기도 모호해서 보통 방금 쓴 글을 다시 읽거나 마음에 안 드는 문장 정도를 고치고는 한다. 어쨌든 하나의 글을 마쳤으니 큰 미련은 없다. 집중력이 남아서 조금 아쉬울 뿐이지.
둘째는 집중력이 남았고 이야기도 끝나지 않았는데 시간이 없는 경우. 마치 오늘 같은 상황이다. 이럴 때가 가장 아쉽다. 머리는 여전히 팽팽 돌아가는 중이고 손가락이 근질거리는데 몸이 피곤하다며 당장 가서 누우라고 고함을 질러댄다. 보통 버틸 수 있을 때까지 어떻게든 버티려고 한다. 결국 뇌가 안 되겠다며 강제로 집중력을 끊어버릴 때까지. 그러면 어쩔 수 없다. 아쉽지만 내일 마저 써야지. 쓰고자 하는 내용은 이미 머릿속에 다 있으니까. 그렇게 다음 날이 되어서 어제와 같은 기세로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으면 괜찮다. 중요한 것은, 글이라는 생물은 고작 하루 차이로 분위기와 내용이 아주 미묘하게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노력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그날의 기세가 글에 반드시 묻게 되고, 특히 잘 드러난다. 단순히 분위기뿐이라면 괜찮다. 대부분의 글은 한 자리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쓰기 힘들 때가 더 많으니 글을 쓰기 위해서 어쩌면 감수해야 할 부분이다. 가장 문제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의 생각이 조금이나마 달라진 상황이다. 생각이 달라졌으니 어제 머릿속에 만들어둔 내용 중 일부를 고쳐야 한다. 일부를 고치면 그에 연동되는 다음 일부도 고쳐야 한다. 그렇게 글을 마치고 나면 어제 만들려던 것과 꽤나 다른 내용이 되기도 한다. 혹은 아예 다른 의미가 될 때도 있다. 잦지는 않지만 없지는 않은 일이다. 그래서 내가 ‘글쓰기’의 정의를 ‘그 시간, 그 공간에, 그 순간의 나를 꽂아놓는 3차원 교집합’이라 하는 이유도, ‘글’을 하이데거의 존재론에서 따와서 매 순간 달라지는 ‘현존재’로 취급하는 이유도, 그렇기에 무엇보다 초고를 중요시하는 이유도 모두 이런 점 때문이다.
다른 경우로는 선약이 있어서 나가야 하는 때도 있다. 내게는 이 부분이 가장 괴롭다. 주변의 사람을 여럿 두지 않고, 한 사람과도 자주 만나지 않게 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고작 둘 뿐인 친구도 한 명은 분기에 한 번, 다른 한 명은 몇 년에 한 번 꼴로 만난다. 지인들도 보통 1년에 한 번쯤 얼굴을 본다. 가장 자주 보는 사이라고 해봐야 한두 달에 겨우 한 번쯤이다. 그렇다고 남은 시간 동안 내내 글을 쓰느라 바쁘냐 하면 당연히 그렇지 않다. 글쓰기는 생각보다 가성비가 좋지 않은 작업이라 실제 글을 쓰는 시간은 의외로 적은 편이니까. 내게는 글을 쓰기 위한 준비 기간이 열두 배 정도 더 오래 걸리는 작업이다. 하루를 살고, 할 일을 하고, 와중에 생각을 하고, 그것을 분류하고, 다듬고, 배치하고, 그러고 나서야 글이라는 모양새로 밖으로 나올 수 있다. 나는 머릿속에서 일정 이상 정리가 되지 않은 생각은 하얀 종이 앞에 아무리 앉아 있는다 한들 거의 아무것도 적어내지 못한다. 내 식대로 표현하면 내부에서 먼저 블록으로 모형을 만들어 설계도를 복사해놓아야 비로소 그 설계도를 바탕으로 글을 찍어내는 식이다. 내 수필이 대부분 초고에서 크게 바꾸지 않고 발표되는 이유로 그러하다. 진짜 초고는 이미 머릿속에서 어느 정도 조립해봤기에 처음 종이 위로 나오는 작품은 초고가 아닌 퇴고에 가까우니까. 그렇게 한 번 퇴고를 거친 초고는 이후 여러 번 퇴고를 더 진행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물론 소설은 반대다. 퇴고를 미친 듯이 하지 않으면 도저히 내가 원하는 작품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머릿속에서 처음 잡아두는 설계 방식 차이일 것이다) 아무튼 그럴 때면 약속 장소에 나온 나는 약간 붕 떠있다. 가는 길에 스마트폰 메모장을 붙들고 최대한 쥐어짜놨지만 아직 불연소 된 집중력 탓에 상대와 대화를 하는 와중에도 미처 마무리 짓지 못한 글 쪽으로 빨려 들어가기 일쑤다. 나와 가깝지 않은 이는 왜 그러는지 모르니 ‘오늘 이 사람이 좀 정신이 어디 팔려있네’ 정도의 감상만 가진다. 나와 일정 이상 오래된 사람은 ‘너 글 쓰다 못 끝내고 왔구나’라며 바로 알아채기도 한다. 그 정도로 가까워서 바로 눈치 채는 몇몇은 스마트폰을 보고 있을 테니 저기 가서 마무리 짓고 오라며 다른 테이블로 쫓아내는 시늉을 한다. 타박의 모양새지만 실상은 배려인, 내게는 참 과분한 사람들이다.
마지막 셋째는 이야기도 끝나지 않았고 시간이 충분한데 집중력이 먼저 끝나는 경우다. 최근 나는 계속 이런 상태였다. 집중력이라는 것은 달리는 자전거의 페달과 비슷해서 매일 하나를 붙잡고 오래 노려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늘어나는 후천적 능력이다. 물론 집중력에도 선천적으로 타고 나는 부분이 있다. 얼마나 깊이 들어갈 수 있는지는 대부분 선천적 능력에 의존한다. 집중 상태로 얼마나 빨리 들어갈 수 있는지는 선천적 능력과 후천적 학습이 반씩 영향을 주고. 반면 얼마나 오래 집중할 수 있는지는 선천적인 능력보다 후천적인 훈련에 더 좌우된다. 오래 달리기처럼, 팔굽혀펴기처럼 매일 꾸준히 노력 위에 노력을 얹다 보면 질환이 없는 한 누구라도 늘려갈 수 있듯이. 나는 최근 매일 글을 쓰지 않았다. 집중력 근육이 당연히 줄어들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우울증이 특히 그렇다. 나는 우울의 반대말이 행복이 아니라 집중이라 믿는 이로서, 우울증을 앓을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모습이 어느 하나에 오래 집중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반대로 내가 어느 것에도 오래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지금 내가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진단하기도 한다. 이럴 때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 우울증을 먼저 가라앉힌 후에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다시 매일 글을 써가는 수밖에.
그럼 슬슬 회복 중인 집중력을 가지고 매일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지금 우울하지 않은가. 그렇지도 않다. 요즘 나는 충분히 우울하다. 그렇다고 지금 우울증을 앓고 있는가. 그 역시 그렇지 않다. 나는 열아홉 이후 평생을 영혼 바로 옆자리에 우울함을 앉혀둔 채 살아왔다. 우울하기에 집중을 못하는 이유는 그 우울함을 내 뜻대로 다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우울함에 끌려가고 있다는 반증이다. 가벼운 우울함이든 무거운 우울함이든, 날카로운 우울함이든 푼수 같은 우울함이든, 내 삶에서 우울함을 아예 떨쳐낼 수 없음을 깨달은 순간부터 나는 이것을 이용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해왔다. 가벼운 우울함으로 글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했고, 무거운 우울함으로 더 깊이 더 오래 무의식 속으로 파고들어가 생각에 대한 시동키를 건져오기도 했다. 날카로운 우울함으로 자가당착에 빠지기 쉬운 사상을 다듬고, 푼수 같은 우울함으로 자칫 오글거릴까 봐 스스로 검열하고 싶은 글귀조차 가리지 않고 받아들였다. 글뿐만 아니라 그 외의 삶에도 이제 우울함은 꼭 필요한 요소가 되었다. 나는 우울하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는 인간이다. 잠시 우울해야 이후 더 행복해지는 사람이다. 우울하지 않고 무난하기만 한 나는 행복하지도 않고 그저 살아갈 뿐인 식물과 같다. 이렇게 태어나지는 않았으나 그렇게 자라왔다. 그러니 우울한데 집중은 잘 된다? 그렇다면 나는 단지 우울할 뿐이다. 우울해서 집중이 안 된다? 그렇다면 그때는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뜻이고. 그래서 나는 지금 우울하지만 우울증을 앓고 있지 않다. 잔뜩 찌푸린 눈으로 하얗기만 한 종이를 노려보고 있지만 막막하지 않다. 의식의 주체를 뺏긴 채 하얀 무저갱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갈 것 같지도 않다. 그저 이 종이의 껍질을 벗겨서 속에 있는 글자를 드러내는 데 어떤 방식이 가장 좋을까, 어떤 문장들이 가장 적합할까 고민할 뿐이다. 마치 퍼즐 게임처럼 그 실마리를 금방 찾을 때도 있고, 한동안 헤맬 때도 있다. 그럼 제목처럼 저렇게 말하는 것이다. 일단 쓰고 생각하자. 첫 문장을 쓸 수 있으면 무의식에 이미 복사된 설계도가 존재한다는 뜻이겠지. 단지 의식인 내가 아직 모르고 있을 뿐. 그러니 아무거나, 일단 자음 하나를 찍어보자고.
25. 01.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