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매]
오래 못 자는가? 아님
푹 잠들지 못하는가? 아님
중간에 깨거나 자주 뒤척이는가? 아님
요즘 나는 ‘깊은 수면’이 충분히 긴 상태로, 중간에 깨지 않고, 적정 수면 시간 이상을 푹 자며 살고 있다.
다만 그래서 요즘 근심 없이 마음이 편한가? 그것은 아님
스트레스가 없는 삶을 살고 있는가? 그것은 아님
괴로움이나 외로움이 없는 시간인가? 그것은 아님
나는 내 하루에 근심, 고민, 스트레스, 괴로움, 외로움, 생각 등 잠을 방해할 법한 요소가 있다 한들 그것이 비상식과 비일상의 선을 넘어가는 극단적인 상황이 오지 않는 이상 잠을 잘 자도록 훈련했을 뿐이다. 잠만큼은 제대로 잘 수 있도록. 하루 종일 스트레스를 받았어도, 오후 내내 고민으로 근심 했더라도, 방금까지 괴로움에 뒹굴 거리며 눈물과 콧물을 쥐어짜고 있었더라도, 외로움과 반복되는 생각에 사로 잡혀 잠들기 전까지 뒤척이더라도, 일단 잠에 들면 최선을 다해 자도록 스스로를 다그쳤을 뿐이다. 그래서 잔여 단백질을 말끔히 청소한 뇌가 내일 다시 고민과 생각을 할 수 있게, 자는 동안 최대한 회복한 근육과 내장과 연골이 다시 스트레스를 견디고 괴로움으로 몸부림칠 수 있게, 다시 평평히 펴서 다림질한 마음이 어제 끝내지 못한 근심과 외로움의 부하를 견딜 수 있게. 그러기 위해서는 잠을 잘 자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잠을 제대로 자지 않으면 내 성향과 성격과 습관과 사는 방식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오랜 노력이었고 지난한 과정이었지만 해야 하는 일이었고 다행히 제법 잘 되어가는 중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안부 인사에 몇 마디 뻔한 말 대신 이런 스크린샷을 대신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이 사람 요즘 어찌 지내나? 잘 살고 있나?’라는 궁금증과 애정에 ‘뭐? 여덟 시간 동안 깊은 수면만 두 시간이 넘는다고? 사람이 아니라 곰이었나? ㅋㅋ’라는 안심과 미약한 기쁨을 되돌려 줄 수 있으니까. 애정이 없으면 가끔이나마 안부를 물을 일이 없다. 그런 상대가 멀리서라도 잘 지내고 있음을 알게 되면 조금은 기쁘기도 하다.
5년 전에 시작한 <꿀잠 프로젝트>는 이 나이가 되어서야 여러모로 도움이 되고 있다. 물론 앞으로의 삶에도 큰 버팀목이 되어줄 것이고. 잘 잔다는 것은 어제와 오늘을 명확히 끊어내어 분리한다는 말이기도 하니까. 내가 중요시하는 인과의 격리에도 꼭 필요한 과정이다. 게다가 소재 창고인 꿈을 더 다양하게 꾸고, 더 오래 꾸고, 더 많이 기억하는 일에도 도움이 된다. 다양한 꿈은 탐방할 장소를 추가하는 일이고, 오래 꾸는 꿈은 탐험할 깊이를 늘리는 일이고, 많이 기억하는 꿈은 탐찰할 소재를 늘리는 일이니, 숙면에는 도통 단점이 없다. 우울증을 앓던 중에도 혈색이 워낙 좋아서 사람들에게 별 고민 없이 산다는 오해를 받기는 하지만, 뭐 그쯤이야 지극히 사소한 단점이다.
여기까지 쓰다가 문득 깨달았다. 작년 말부터 올 초까지, 우울증을 앓는 것 치고는 예년과 비교하면 별로 힘들거나 괴롭다고 느끼지 않았다. 반면 그리 느낀 것에 비해 쏟아내는 글의 양은 훨씬 많았다. 내 삶은 심리 상태와 글의 양이 늘 반비례했다. 괴로울수록 글이 늘어나고 평안하면 줄어들었는데 왜 이번에만 괴로움에 비해 글만 많아졌을까. 요 몇 주 특이점의 원인을 찾고 있었는데 왠지 알게 된 것 같다. 내 수면 점수가 95점을 처음 넘기고, 대체로 그 근처에서 유지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 가을부터였다. 커다란 우울증에 휩쓸렸던 것은 작년 초 이후로는 작년 말이 처음이었고. 그 말인 즉슨, 극단적으로 질 높은 수면 습관을 가진 후 처음 우울증을 맞이했다는 뜻이다. 작년 초에는 깊은 수면이 40분 남짓이었고, 5년 전 이맘때는 깊은 수면이 고작 20분 남짓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무의식이 많은 양의 글을 쏟아내고 있음에도 의식이 그만큼의 괴로움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것도 이해가 된다. 피폐함이란 정서적 감정적 신체적 손실이 반복되어 괴로움이 누적된 결과물인데, 피폐해지기 전에 감정적 신체적 손실이 자꾸 수복되니, 가진 괴로움에 비해 미약한 정서적 손실만을 느끼며 내가 지금 많이 힘들지 않다고 착각했었나 보다.
25. 02.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