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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5

[18매]

by 이한얼






≡ 반

숨결이 차다. 콧날 근처부터 얼어가는 것을 느낀다. 낮은 온도와 그로 인한 건조한 공기는 보일러와 만나 빨래를 버석하게 말린다. 햇살을 고루 펴 발라 바삭하게 말린 느낌과는 다르다. 분명 물기는 없는데 섬유 사이사이 혹은 그 너머에 축축한 한기가 스며있는 버석함이다. 겨울에 말린 옷은 늘 여름옷보다 차갑고 또 약간이나마 무겁게 피부에 들러붙는다. 건조함이 억지로 벌린 틈새로 냉기가 비집고 들어온다. 오늘은 평소보다 하나 높게 보일러를 올렸다. 발목이 계속 시리다 못해 거슬리기 시작해서 마치 한복을 입듯 밑단을 곱게 접어 양말 안으로 넣었다. 보일러를 올려도, 털모자를 써도, 밑단을 동여매도, 찜질팩을 넓적다리에 얹혀놔도, 담요로 다리를 둘둘 감아도 도통 채워지지 않는 겨울밤이다.

배는 방금 가득 채웠는데 대신 마음이 허했던가. 그럼 마음을 채워야 할 터. 가능하지 않으니 애먼 배에만 더 쑤셔 넣는다. 감자칩 한 봉지를 털어 넣고, 어제 남은 빵과 두유 하나도 밀어 넣는다. 마음과 배는 같은 공간을 점유한 것도 아닐진대 배가 부를수록 마음은 설 자리를 더욱 잃어간다. 마음이 비어 허한 것인데 마음을 쪼그라트려 어차피 들어갈 자리도 없노라고 선언해봐야 무슨 소용일까. 비루한 자기기만이다. 군데군데 담배로 점을 찍어 놓아도 시간은 그 자국을 따라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다. 선은 더 짧은 선이 되고, 이윽고 점인지 선인지 모호한 무엇이 된다. 스타카토처럼 생각에서 생각으로 뛰어넘는 시간. 어떤 사유를 할 때만 자신이 인지되고 생각 속에 머물러 있을 때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유사 데카르트가 된다. 그런고로 하늘은 금세 밝아진다. 여섯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나는 여섯 시간을 살지 않았을 테니. 자려고 누웠을 때 윗배에서 둔탁한 공이 구르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위산이 뿜어지는 찌릿한 감각도. 숨에 섞여 나오는 그 알싸한 향이 입천장을 맴돈다. 이대로 세상을 향한 유리창을 내리면 나는 평행세계로 떠날 기차에 올라탈 준비가 끝났는데. 결국 벗어둔 안경을 다시 쓰고 대기실 밖으로 나섰다. 따듯한 장조림과 비빈 밥은 욕이 나올 정도로 맛있었다. 없어도 되지만 굳이 곁들인 차가운 열무 얼갈이김치도 끔찍하게 맛있었다. 김치가 이미 짜니 장조림 밥은 조금 심심해도 되었을 텐데 단독으로 먹을 수 있을 만큼 짭짤하게 국물을 부었다. 짠 음식에 짠 반찬을 우걱우걱 씹어 먹고, 찬물 한 잔을 가득 마셔 전체 염도를 맞춘다. 아무리 잠들기 직전의 식사라지만 음식물이 위산 위에 둥둥 떠서 어설픈 가스를 뿜어내도록 하고 싶지 않다. 내가 먹었던 것이 소금이 아니라 설탕이었던가. 어찌 이리 기분이 좋아졌을까. 까무룩 눈이 감기는 와중에도 더듬더듬 이불 끝자락을 찾았다. 목 뒤쪽을 꼼꼼히 덮었는데도 어디에서인지 자꾸 흉추로 한기가 들어온다. 길지 않았을 밤이 이윽고 끝났다. 남은 것은 사흘쯤 잠 못 든 듯한 생체기관 하나뿐. 푸쉭 푸쉭 메마른 증기를 토한다.




≡ 정

어젯밤, 정확히는 오늘 새벽 잠들기 전까지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재밌는 유튜브 영상을 여럿 봤고, 밥 먹을 때 영화 리뷰 영상도 몇 편 봤다. 짧은 글을 썼고, 중간 중간에 간식도 맛있게 먹었으며, 빨래도 돌렸고, 설거지도 말끔히 했다. 시간이 늦어 청소기 대신에 밀대로 바닥 청소도 하고, 양말도 가지런히 예쁘게 개고, 세탁이 끝난 빨래감을 각을 맞춰 널어놨다. 잠들기 전이라 적절한 시간은 아니었지만 참지 못하고 먹은 장조림 밥은 정말 끝내주게 맛있었고, 그에 곁들인 열무 얼갈이김치 또한 끝장나게 맛있었다. 전자레인지에 데운 장조림은 적당히 짭짤하고 달큰해서 쌀밥에 찰떡이었으며, 먹을 때마다 골라 먹을 수 있는 열무와 얼갈이는 씹는 맛이 다양해서 혀가 즐거웠다. 밥 한 숟가락에 질겅질겅 씹을 수 있는 열무 한 점을 먹고, 다음 밥 한 숟가락에는 아삭하게 베어 물 수 있는 얼갈이 한 조각은 더없이 훌륭한 조합이었다. 하여 잠들기 전에 배를 빵빵하게 채웠음에도 평소 같은 불쾌함과 부대낌보다는 적당한 포만감과 만족감으로 기분 좋게 양치를 하고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지난 하루를 돌려봤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난 거 하나만 아쉽네. 그것만 빼면 오늘 나는 글도 열심히 썼고, 커피와 메밀차도 맛있게 마셨고, 안부 인사에도 훌륭한 답장을 보냈고, 부모님과 짧지만 통화도 했어. 집에 와서 먹은 첫끼는 된장국과 양배추 찜으로 건강한 식단이었고, 새벽에 과자와 빵을 먹기는 했지만 뭐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니 자책하고 반성할 만한 일은 아니야. 잠들기 전에 음식을 먹고 잔 것은 반성할 부분이기는 해. 다만 너무, 너무, 너무 맛있었으니 오늘은 통과. 글을 다 쓴 후에 오늘 치 뉴스도 챙겨봤고, 영화와 애니 소개 리뷰도 재밌게 봤고, 쇼츠는 많이 안 봤고, 뭐야 이 정도면 꽤 괜찮은 하루였네! 말 그대로 나쁘지 않은, 오히려 꽤 훌륭한 하루였다. 하고자 했던 것을 하면서 내가 정해놓은 경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일탈도 했던, 점수로 치자면 엑스 세모 동그라미 중에 동그라미에 가까운 그런 하루. 그렇게 잠이 들었다. 그리고 9시간 후에 일어났다.




≡ 합

이것을 하기 위해 어제 잘 지낸 것은 아니었다. 단지 어제 꽤 괜찮게, 나쁘지 않게, 혼자 즐겁게 잘 지냈기에 이것을 하기로 한 것이다. 조만간 해보자고 결심한 후 마침 적당한 날이 된 것이다. 카페에 앉아 하얀 화면을 꺼냈다. 지금부터 나는 두 입장을 대변할 거야. 하나는 무의식의 나고, 다른 하나는 의식의 나야. 무의식인 나에게 어제 하루는 어떤 하루였을까. 의식인 나에게는? 두 뭉치의 글을 비교해보면 현재 무의식과 의식이 어느 정도의 편차를 가지고 있는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겠지.

요 몇 달 내가 정해놓은 기준보다 둘의 괴리가 크다. 잠시야 활용하고 감수해도 언제까지 방치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내 의식이 무의식보다 멍청한 거야 일상이니 새로울 일도 아니고 문제랄 것도 없다. 서로 바라 보는 세계의 폭과 겹에 차이가 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 맥락 자체가 다르면 안 된다. 그 색깔이, 뉘앙스가, 방향이 달라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단지 다른 것이 아닌 어긋난 것이다. 비틀린 것이고, 괴리된 것이다.

지금 내 의식과 무의식은 초점이 맞지 않아 분리된 상처럼 서있다. 어떤 연유로 잠시라도 급격히 눈이 나빠졌거나, 혹은 이전까지 안경 역할을 하던 무엇이 잠시 기능을 잃었거나, 혹은 안경 자체가 소실되었다는 뜻이다. 셋 중 무엇이든 나는 이 어긋난 상을 다시 맞추는 방법을 안다. 사는 동안 몇 번이나 해왔던 일이고, 서로의 위치를 ‘새로고침’ 할 수 있는 아주 훌륭한 수단 역시 가지고 있다. 이럴 때 내가 화가였거나 음악가였다면 지금보다 조금 더 헤맸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글을 쓰는 인간이라 다행이다. 반면 다른 문제에 있어서는 작가보다 화가나 음악가 쪽이 더 풀기 쉽겠지. 어쨌든 최소한 이런 F5에 대한 문제, 새로고침 버튼을 연타해야 하는 과정에서 가장 좋은 수단은 글이다. 같은 대상에 대한, 같은 주제에 대한 서로 다른 글은 '있어야 하는' 위치와 '실제 있는' 위치간의 차이를 찾아내는 일에 적합하고, 양쪽으로 갈라서 있는 상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초점을 맞추는 일에도 유용하다.





25. 02.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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