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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머물던 자리

by 이한얼











1. 100%

나는 이야기하는 데 재주가 없다. 본디 이야기를 모으는 존재지 만드는 존재는 아니니까. 하지만 전부 잊어버리기 전에 그들에 대해서는 남겨놓고 싶다.




2. 0% 의지엉킴현상

그들을 처음 만난 것은 병원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들었을 뿐 기억은 없다. 그래서인지 평생을 함께 보낸 그들을 언제 만났는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말대로 병원이었는지 아니면 그 전이었는지. 그도 아니면 그들이 서로 달라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는지.

아무튼 그들은 같은 병원에서 태어났다. 당연한 일이다. 세쌍둥이였으니까. 한 번에 셋이나 나왔지만 부모는 마치 기다린 것처럼 놀라지 않고 그들을 맞이했다. 하물며 나까지도.

나는 그들을 낳은 부모에게서 태어나지 않았다. 다른 곳에서 그들 곁으로 온, 말하자면 입양아였다. 부모가 그들을 데리고 퇴원한 밤에 내가 집으로 찾아왔다고 했다. 문을 열어보니 포대기에 쌓인 채 편지를 베고 누워있었다고. 새하얀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었다.

‘이 아이는 병원에서 귀댁 아이들 바로 옆에 있었어요. 나란히 누워있는 모습이 꼭 쌍둥이 같았습니다. 다른 곳으로 보내는 것보다 다정해 보이는 부부께 맡기는 게 나을 것 같아 부탁드립니다.’

터무니없는 일임에도 부모는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외면할 방법이 어찌 없었겠냐만 나를 본 순간 거절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정신없이 우는 막내나 버둥거리는 둘째와 달리 상대적으로 얌전한 첫째 옆에 나를 뉘였다.

그렇게 우리는 네쌍둥이가 됐다. 가장 먼저 태어난 심이. 다음으로 태어난 신이. 마지막으로 빛을 본 정이. 서로 한 몸처럼 아끼라는 뜻에서 낳기 전부터 그렇게 지어놨다고 했다. 그리고 뒤늦게 끼어든 나까지.

내 몸이 멀쩡하지 않다는 사실은 반년 가까이 지난 후에야 밝혀졌다. 우렁차게 울어대는 심이와 쉴 세 없이 꼼지락거리는 신이에 비해 정이는 정서적으로 조용했다. 거의 울지 않고 잘 웃지도 않았다. 종종 버둥거리긴 했으나 하루 대부분을 말똥말똥한 눈으로 주변과 부모를 둘러보기만 했다. 그에 비해 나는 신체적으로 아주 조용했다. 심이가 울면 따라 울고 신이가 웃으면 같이 웃었지만 거의 움직이지 않았고 뒤채지도 않았다. 심이는 시끄럽고 신이는 활발한데 정이는 조용하고 너는 얌전하니, 참 다양하게 모였어. 처음에는 부모도 그렇게 웃어 넘겼다.

반년쯤이 지나니 그제야 부모도 이상함을 느꼈다고 했다. 빠른 신이는 벌써 몸을 뒤집고 고개를 들었다. 심이는 딱 평균이었고 느린 편인 정이마저 다리를 버둥거렸지만 나만 여전히 곱게 누워있었다. 유독 느린가 싶어 팔다리를 주무르고 비벼도 하루가 다르게 힘이 붙는 신생아 특유의 성장감이 없었다. 팔을 들어 올렸다 놓으면 축 떨어졌고 등을 받쳐서 앉게 해도 넘어가지 않으려고 허리에 힘을 주는 반응이 없었다. 깨닫고 나니 그전까지 얌전하게 보였던 행동들이 모조리 이상증세가 되었다. 다양한 검사를 받아봤지만 의사는 모두 고개를 저었다. 이상은 없다. 병원이 커지고 과정이 길어져도 마찬가지였다. 원인을 모르겠다. 좀 더 지켜보자.

그렇게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팔다리를 쓰지 못했다. 목을 버둥거리며 겨우 젖을 빨 뿐 나머지는 그저 달려만 있었다.

나만큼 심각하진 않았으나 정이의 발달 역시 다른 둘에 비하면 많이 느린 편이었다. 둘이 뛸 무렵에야 겨우 걷기 시작했고 둘이 단어를 연결하여 유창한 문장을 만들 때 겨우 떠듬거리며 단어를 짚었다. 나처럼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극단적으로 느릴 뿐이었다.

그렇기에 부모는 느린 정이에게, 특히 멈춰버린 나에게 거의 모든 신경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를 챙기느라 멀쩡한 둘에게는 상대적으로 엄하게 대해야 했다. 어리광부리는 심이는 자주 야단을 맞았고, 들러붙으며 보채는 신이는 다그침을 당했다. 분명 억울했겠지. 가만히 누워만 있는 나를 보며 둘은 어린 마음에도 나름대로 납득을 한 듯 보였지만 그뿐, 부모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해가 지나도 전혀 차도가 없는 나와 달리 정이는 부모의 노력이 쌓일수록 빠르게 괜찮아졌다. 다른 형제와의 격차를 점점 좁히다가 어느 순간부터 구분하지 못할 만큼 비슷해졌다. 그제야 부모는 한 시름 놨으리라. 사실 나 하나로도 이 가족에게 얼마나 큰 짐이었으니. 그리고 부모가 느낀 안도에는 이제 나만 챙기면 된다는 생각고 함께 정이가 괜찮아졌듯이 나 역시 점차 나아지리라는 희망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후로도 나는 나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몸을 쓰지 못했고, 누워만 있어야 했다. 그나마 몸이 정상적으로 자라는 것이 다행이었다. 쉽게 놓지 못하는 것이 희망이지만 온전히 쥐고 있기 힘든 것도 희망이라 부모는 틈날 때마다 아이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너희끼리 잘 챙겨야 한다. 우리가 없어도 너희가 몸이 아픈 형제를 끝까지 보살펴야 한다. 고마운 부모에 귀한 형제들이다. 내가 지금껏 살아있는 것은 오로지 그들 덕분이다. 문자 그대로, 그들 중 누구 하나라도 없었다면 나 역시 온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기억은 없다. 나는 그 무렵을 기억하지 못하니까.

당시 우리는 일곱 살이었다. 서있는 아이 셋과 누워있는 아이 하나. 이변이 어느 정도 정리된 줄 알았으나 실상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3. 50% 첫날

어느 날 유치원에서 돌아온 심이가 우리가 모인 자리에서 외쳤다.

“나는 의사가 될 거야!”

무엇이 되고 싶다는 말은 전에도 종종 있었지만 저런 표정으로 말하기는 처음이었다. 그때 심이는 뭐랄까, 환희에 가득 차 스스로 주체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집에 누워만 있던 나로서는 출처를 알지 못했다. 아마 대단한 이유는 아니었을 것이다. 장난감이 아닌 실물 응급차를 처음 봤는데 그 위용이 엄청났다거나, 유치원에서 특별학습을 하게 된 의사 학부모와의 대면이 인상적이었다거나, 그런 사소한 일이었겠지. 내가 이 일을 지금까지 기억하는 이유는 그 전까지 형제간에 각자 갈리던 대상이 처음으로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말수가 적은 정이도 뒤늦게 의사가 되고 싶다고 외쳤다. 심이보다 먼저 외치지 못해서 억울해 보이기까지 했다. 뒤이어 신이마저 외쳤다. 나는 의사가 될 거라고. 그때 그런 생각을 했다. 이들은 나중에 정말 의사가 되겠구나. 동시에 그런 바람도 생겼다. 왠지 나는 의사가 되고 싶다고. 재밌는 것은 방금까지 한 번도 의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런 나는 언제부터 그들과 형제였을까. 태어나면서. 아니면 그들과 같은 집에서 살면서. 아니면 자나라면서. 의미 없어 보이는 이 질문은 그때도 지금도 내게 가장 큰 의미로 남아있다.

내 삶의 첫 기억은 이 장면부터다. 네 형제의 생각이 하나로 통일되었던 그 순간. 그래서인지 그 전부터 함께 지냈던 그들을 형제로 느낀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복사한 것처럼 나란하던 그들이 성장에 차이를 보이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깨달은 것은 열한 살 무렵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1년이 지났을 때 아홉 살만큼 지라난 신이와 달리 심이는 의사가 되겠다고 외쳤던 일곱 어림부터 전혀 자라지 않았다. 반면 일곱까지 발달이 느렸던 정이가 신이를 대신하듯 자라기 시작했다. 내적 발달뿐만 아니라 외적으로도 그랬다. 처음에 부모는 쌍둥이끼리도 이만큼 차이가 나냐며 놀랐다. 다음 해인 열 살 때는 아무리 그래도 너무 많이 난다며 웃었다. 그리고 1년이 더 지나 열한 살이 되니 더 이상 농담으로 웃을 수 없을 만큼 격차가 벌어졌다.

열한 살이 된 신이는 딱 또래 같았다. 같이 열한 살이 된 심이는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하나 싶은, 일곱 살 때와 거의 차이가 없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문제는 또 정이였다. 열한 살이 된 정이는 대략 중학교 2학년, 좀 작은 고등학생으로 볼 수 있을 만큼 커버렸다. 또래 중 그만큼 키가 자란 친구는 종종 있었으나 얼굴만은 모두 제 나이였다. 하지만 정이는 키와 나란히 외모까지 자랐다. 마치 정상적으로 자란 중학생처럼. 어릴 땐 늦어서 걱정이더니 자라서는 너무 빨라서 걱정이 됐다. 정말 심이의 나이를 정이가 대신 먹는 것 같았다.

형제들 사이에 이유 모를 현상이 끊이지 않으니 부모는 적지 않게 속을 끓였을 것이다. 우리에게 티내지 않으려 했지만 시시때때로 얼굴 구석에 그늘이 스며드는 것이 보였다. 그 와중에 좋은 소식은 내 원인 모를 상태가 약간이나마 차도를 보인다는 점이었다. 어느 날 평소처럼 내 잠자리를 준비하는 부모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내가 처음으로 팔을 움직였다. 팔을 움직이는 감각이라고 깨닫기도 전에, 늘 써온 것 마냥 눈앞에 있는 부모의 얼굴의 만졌다. 마침 이불을 덮어주던 움직임이 멎었다. 손이 닿은 자리에 애써 짓던 웃음이 사라졌다. 충격으로 굳었던 부모는 내 손을 잡고 그대로 울음을 터트렸다. 이불 위로 떨어지는 것은 분명 기쁨이었고 동시에 슬픔이기도 했을 것이다. 원인 모를 아이들의 이변 속에 부모로서 느끼는 무력감과 혹시 자신에게 문제가 있어서 그런가 싶은 자책감. 그리고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는 고단함과 개인으로서 느끼게 되는 지난함. 그 모든 것이 뒤섞여 천천히 썩어가는 마음에 처음 내 손이 닿은 것이다. 심이도 신이도 정이도 아닌 내 손이 부모가 지난 십여 년간 애써 추슬러 올리던 둑을 무심하게 밀어버렸다.

발달이 느리던 정이도 끝내 형제들을 쫓아갔다. 낫지 않을 것 같던 내 몸도 드디어 움직였다. 그럼 지금 너무 앞서 나가고 있는 정이도 언젠가 괜찮아지겠지. 혹시 심이나 신이에게 닥칠지 모를 어떤 일도 결국 괜찮아지리라. 그날 부모는 무심코 움직인 내 작은 손에서 그런 것을 엿보지 않았을까.

움직인 것이 무색하게 내 팔은 금세 힘을 잃고 떨어졌다. 그 뒤로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조금씩 나아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컨디션이 좋으면 잠시라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4.

성장속도 외에는 거의 차이가 없던 그들은 초등학교를 다니며 성격마저 판이하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성격이 달라지는 만큼 갈등과 다툼도 늘어났다. 하지만 그 무렵쯤 자연스럽게 간격을 두는 다른 형제와 달리 그들은 그 후로도 모든 순간을 함께 보냈다. 형제끼리 보살피라는 부모의 말 때문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 때문인지 그들은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늘 같이 다녔고, 모든 걸 함께 결정했으며, 같은 것을 했다.

모든 집단이 그렇듯 각자 성격이 강해진 그들 사이에도 어느 순간 몇 가지 규칙이 생겨났다. 누구도 그렇게 하자고 꺼내지 않았지만 모두가 자연스럽게 인지하고 당연하게 행하기 시작했다. 보통 이랬다.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심이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자주 말했다. 반면 계획적이고 이성적인 정이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주로 말했다. 성격이 다른 만큼 둘은 자주 부딪혔다. 많은 순간 서로 반대 의견을 냈고 늘 그걸로 다퉜다. 그래서 결국 무엇을 할지는 자기주장이 거의 없는 신이가 정하기로 했다. 이게 첫 번째 규칙.

두 번째는 의견이 갈리면 다수결로 정하기로 했다. 하나같이 고집스런 그들이었지만 다른 두 형제가 반대하면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 다수결에 끝까지 어깃장을 놓는 일이 한 번도 없지는 않았으나 아주 큰 일이 아니고서야 소수가 된 아이는 적당한 선에서 물러났다. 이 역시 다수결정표는 대부분 신이가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알고서 이런 규칙을 만든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신이는 꽤 공정했다. 공부나 청소처럼 하기 싫은 일에는 정이에게 표를 줘서 심이가 억지로나마 하도록 했고, 장난이나 놀이 같이 하고 싶은 일에는 신이와 뜻을 맞춰 내빼려는 정이를 끌고 갔다. 그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는 꽤 형편 잡힌 상태가 유지되었다.

그 균형이 깨진 것은 중학교 무렵, 정확히는 정이의 외모만 현저히 달라지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들은 마치 외견을 따라가려는 듯이 어느 순간부터 본래의 나이를 잊고 외모의 나이를 좇기 시작했다. 열다섯인 신이는 열다섯처럼 살았다. 여태 열한 살처럼 보이는 심이는 아직 초등학생처럼 굴었다. 그리고 이제 스물셋처럼 보이는 정이는 성인처럼 행동했다. 정이는 어느 순간부터 마치 맏형이 된 자신이 어린 동생들을 이끌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했다. 이성적이던 성격은 계산적이 되었고, 계획적이던 성격도 강압적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주변 상황과 눈치를 과도하게 신경 쓰는, 정이의 가장 큰 단점도 이때부터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변한 정이의 모습에 강하게 반발하는 심이와 달리 신이는 정이를 형처럼 따랐다. 이미 어른의 모습이 된 정이에게 신이는 많은 부분을 의지하려 했다. 노는 문제는 여전히 심이와 의기투합했지만 그 외에는 정이의 의견을 대부분 수용했다. 그러며 신이의 성격도 점차 변했다. 예전보다 더 격렬하게 다투는 정이와 심이 사이에 껴서 자기주장은 더 사라졌다. 그만큼 남의 의견에 쉽게 휘둘렸다. 자신이 결정을 하지만 남이 쥐어준 결정인 경우가 많아 모든 일은 남의 일처럼 했다. 하기 싫은 것도 잘 따랐지만 습관이나 관성처럼 했다. 그리고 금세 지치고 질리는 단점도 이때 드러났다.

그리고 심이는 외모 탓인지 은연중에 무시당하는 경우가 잦았다. 특히 정이가 그랬다. 논리적이지 못한 심이를 곧잘 말로 억눌렀고 신이도 자신을 따르니 형제의 일이라면 대부분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졌다. 나쁜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중요한 의사결정을 앞두고 심이를 존중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홀로 유독 다른 의사를 말하거나, 상황이나 맥락에 맞지 않은 말을 불쑥 내뱉는 심이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 역시 심이의 잘못은 아니었다. 심이는 원래 그런 아이니까. 심이의 편을 들지 않고 정이를 따르는 신이가 잘못된 것도 아니었다. 심이의 말은 대부분 정론이지만 선뜻 하기는 어려운 일이거나, 또는 옳지만 하기 귀찮은 말이 태반이었으니까. 아무리 바른 말이어도 주변 상황은 전혀 개의치 않고 저 하고 싶은 말만 하니 둘 입장에서는 짜증날 법도 했다.




5. 80% 첫 싸움

성격의 50%는 일곱 살까지 만들어진다. 그를 기반으로 스무 살까지 30%가 더 채워진다. 80%면 이미 그 인간이라 칭해도 된다. 이후 평생에 남은 과정은 하나뿐이다. 가진 80%를 어떻게 사용하여 남은 20%를 채울지. 그렇게 스물이 된 그들은 이미 각자의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평생을 함께한 그들의 역사는 싸움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그들은 사는 동안 늘 싸워왔다. 어릴 때부터 싸웠고 커서도 여전히 싸웠으며 늙어서까지 시시콜콜하게 계속 싸웠다. 하루에도 몇 번씩 싸웠다. 그러면서도 떨어지지 않고 평생을 함께 지냈다. 대부분은 싸움이라고 부르기도 아쉬운, 작고 소소한 다툼이었다. 뭘 먹을 건지, 어딜 갈 건지. 왜 하는지 또는 안 하는지 등의 차이가 빚어낸 갈등. 하지만 인생에 걸쳐 큰 싸움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총 세 번이었는데, 첫 번째는 그들이 열아홉에서 스물로 넘어설 때 심이와 정이의 싸움이었다.

언제나처럼 방에 우리 넷만 모였다. 각자는 지정석처럼 정해진 자리가 있었다. 나는 당연히 침대였고, 정이는 일인용 소파, 신이는 책장 의자, 심이는 침대 곁에 둔 이동식 의자. 모두 그 자리에만 앉았다. 무거운 물건을 들 수는 없지만 오른팔 정도는 뜻대로 쓸 수 있게 된 내가 책장을 넘기고 있을 때, 원서를 손에 든 심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왜 안 돼?”

심이와 자주 다투는 상대는 정이였다. 이번에도 심이는 소파에 앉은 정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정이 역시 심이처럼 대학 원서를 들고 있었다. 감정적으로 소리치는 심이와 대조되어 평소보다 더 차분해보였다.

“의대는 안 갈 거야. 건축 쪽이 나아.”

“갑자기 왜? 그리고 그걸 왜 네가 정해?”

“같이 정하니까 이걸 들고 있지. 아니면 벌써 냈겠지.”

요지는 이랬다. 심이는 일곱부터 계속 의사가 되고 싶어 했다. 정이는 반대로 그것을 모든 아이가 몇 번씩 바꾸게 되는, 어렸을 때 잠시의 꿈으로 치부했다. 벌이에 비해 일이 고되고, 연봉이 늘수록 시간을 뺏기며, 아직은 대우받고 있지만 그마저 곧 저물 거라고. 반면 건설 쪽은 대우가 어쨌든지 지금도 호황이고 향후 30년은 계속 유지될 것이라 예상했다. 지나고 보면 정이의 예측은 꽤 들어맞았다. 의사는 몰라도 건축은 향후 30년 동안 정말 호황이었으니까. 입사를 해도 승진이 빨랐고, 개인 사업을 해도 일거리가 많았다.

어느 쪽도 옳았다. 각자는 자신을 주장할 수 있으니까. 다만 낱낱이 늘어놓는 정이의 근거에 비해 심이가 가진 동기는 단순했다. ‘하고 싶으니 할 것이다.’ 감탄이 나올 만큼 최고로 멋진 말이다. 동기로서 그것만큼 훌륭한 것은 달리 없었다. 전혀 부족하게 느낄 이유가 없었으나 심이는 왠지 정이의 근거에 비해 자신의 동기가 부족하다고 느꼈나 보다. 눈에서 불똥을 쏘아내던 심이가 내내 말없는 신이를 노려봤다. 방에서 신이만 빈손이었다.

“너는 왜 말이 없어?”

“하지만 정이 말도 맞고. 아니면 좀 덜 힘든 과 있잖아.”

“절대 싫어. 원래 하려던 쪽도 아니잖아.”

“하지만 다 떠나서 너무 오래 걸려. 빨리 졸업해서 얼른 취직하고 싶고.”

그러며 신이는 나를 봤다. 신이를 따라 둘의 시선도 내게 왔다. 책장을 넘기던 나는 고개를 들었다. 왜 나를 봐. 묻기도 전에 심이가 먼저 말했다.

“너는? 네 의견은 어때?”

그때까지 누구든 내 의견을 묻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답은 정해져 있었다. 난 방관자다. 나는 똑바로 쏟아지는 시선들에게 말했다.

“내 역할은 결정하는 게 아니야. 지켜보는 거지.”

잠시 침묵이 고였다. 정이를 창밖을, 신이가 자신의 손톱을 들여다보는 동안 바로 곁에 앉은 심이가 작게 중얼거렸다.

“가끔은 네가 내 편을 들어줬으면 좋겠어. 맨날 이대일이라 힘들어.”

그 말에 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

“나는 사실 언제나 너와 가장 가까워. 그렇다고 늘 네 편인 건 아니지만.”

심이는 웃지 않았다. 이해를 바란 말은 아니었다. 얼마간 내가 들고 있는 책을 내려다보던 심이는 결국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도 곧바로 어떤 행동 없이 한동안 조용한 숨소리만 바닥으로 내던졌다.

“마음대로 해.”

심이는 그 말만 남기고 방을 나가버렸다. 문 닫히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몇 달 후, 셋은 나란히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반대하긴 했으나 입학한 심이는 열심히 했다. 기왕 시작했으면 최선을 다하는 성격이니까. 정이나 신이도 열심이었으나 심이만큼은 아니었다. 대학생이 된 신이는 연애 쪽으로 몸이 기울었다. 정이는 새로 접하는 문화, 특히 술자리에 자주 정신을 뺏겼다. 군대에 다녀온 후 정이는 정신을 차리고 학업에 집중했지만 신이는 고된 군생활의 후유증으로 몸 상태가 많이 나빠졌다. 그 둘을 달래고 이끌어 졸업시킨 것은 심이였다. 졸업과 동시에 회사에 취직하고, 근무연수를 채워 자격증을 따게 한 것 역시 심이와 정이였다.

그렇게 그들이 서른을 향해 다가가는 동안에도 나는 여전히 침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차이점은 오른팔뿐만 아니라 왼팔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느리지만 확실히 나아가는 중이었다.




6. 85%

두 번째 큰 싸움은 그들이 서른일 때였다. 이번에도 그들은 내가 있는 방으로 왔다. 이전에도 한 번 물은 적 있었다. 왜 여기로 몰려와서 싸우는지. 각자에게 따로 물었지만 셋은 같은 답을 들려줬다. 큰 싸움일 때는 다른 데서는 끝이 안 난다고. 내가 있는 이 방에서 싸워야만 어떻게든 결론이 난다고 했다. 절충점을 찾든 아니면 어느 한쪽이 물러서든. 나는 아무 말도 안 하는데? 그러니 처음엔 듣고 싶었으나 이젠 괜찮다고 했다. 내가 의견을 내지 않아도 내 앞이면 어떻게든 해결된다고. 반대로 우리가 눈앞에서 싸워서 싫으냐고 물어서 아니라고 답했다.

두 번째 싸움의 주제는 결혼이었다. 그들 중 결혼 이야기를 가장 먼저 꺼낸 것은 의외로 정이가 아닌 신이였다. 사실 신이는 꽤 일찍부터 결혼하고 싶어 했다. 아마 이십대 후반쯤, 졸업하고 취직해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되었을 때부터 기색을 보였다. 심이는 조금 달랐다. 안 할 마음은 없어보였으나 그렇게 서두르지도 않는 듯했다. 의외로 결혼 문제에 거세게 반대한 이는 가장 먼저 말할 것 같았던 정이였다. 그 무렵 정이는 새로 시작한 일에 완전히 몰입한 상태였다. 사회인으로 인정받는 감각과 스스로 가진 포부에 심취해있었다. 일을 잘하고 싶다. 인정받고 싶다. 위로 올라가고 싶다. 정이는 그쪽으로만 뚜렷한 의식을 내보였다. 그만큼 결혼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아직 너무 이르다. 지금은 일에 집중해야해. 좀 더 자리 잡고 해도 되잖아. 그런 이유로 신이의 의견을 반대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것만으로 반대하는 것 같지 않았으나 정이는 딱 그만큼만 말했다.

드물게 주장을 밝힌 신이와 정이와 싸움은 심이와 정이의 첫 번째 싸움처럼 짧은 순간 전기가 튀는 싸움은 아니었지만, 잿더미 안 불꽃처럼 은은히 오래 지속되었다. 신이는 심이처럼 대놓고 어깃장을 부리지 않았다. 다만 매사를 기력 없이 대했다. 더 빨리 지쳤고 금세 질려했다. 신이에게도 정이 같은 생각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인정받으며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신이는 서른 살이 되도록 개성 강한 형제 사이에 끼어있느라 이미 너무 지쳐버렸다. 이제는 제대로 불이 붙지 않은 장작처럼 매캐한 연기만 뿜어냈다. 정이가 다그쳐도, 심이가 놀자고 해도 반응이 없었다. 기계처럼 일을 하고 잠을 자며 시간만 보냈다. 결국 먼저 물러난 것은 정이였다. 별 수 없었다. 다수결로도 자신이 소수였고, 무엇보다 결혼을 할지 말지 결정하는 것은 신이였으니까. 정이는 결국 찬성도 반대도 아닌 곳으로 뜻을 물렸다.

그렇게 서른한 살이 된 신이는 회사에서 만난 사람과 결혼했다. 같은 해에 심이도 따라 결혼을 했다. 정이만 끝내 결혼하지 않았다. 가정은 거추장스러워. 결혼식을 지켜보던 정이가 쉰셋쯤 된 얼굴을 짜증인 척 일그러트렸다.

신이가 아들 하나, 심이가 딸을 하나 낳았다. 신이는 대를 이을 수 있다며 기뻐했고, 심이는 너무 예쁘다며 좋아했다. 결혼한 그들은 여전히 한 집에서 같이 살았고 당연하다시피 나도 함께 살았다. 정이는 처음에 싫다며 강하게 거부했지만 길고 긴 설득에 못 이겨 끝내는 같은 집에 살게 됐다. 지금껏 붙어살던 그들이 따로 사는 것은 누구도 원하지 않았다. 정이 역시 평생 함께 했던 형제들과 떨어지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결혼을 반대한 이유에 어쩌면 이런 부분도 있을지 모른다.

군식구 같았지만 가족들은 나와 정이를 싫어하지 않았다. 나는 있는 듯 없는 듯 그렇다 쳐도 정이에 대해서는 오히려 좋아하며 함께 살기를 원했다. 정이는 금세 집안의 중심이자 가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아이들은 보지 못한 할아버지 대신 퇴근한 정이에게 매달렸고, 부인도 정이의 까칠한 주름살을 보며 먼저 가신 시아버지가 딱 이러셨을 거라며 농담을 했지만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7. 90%

세 번째 싸움은 신이와 심이의 싸움이었다.

그들 자신은 자라는 데 많은 사랑을 필요로 했고 또 받으며 자랐지만 그들의 자녀 역시 그렇다는 생각을 곧잘 잊어버렸다. 아이는 놔두면 알아서 자라나거나 누군가 대신 키워줄 것이라 착각했다. 그건 많은 부분을 관성대로 처리하는 신이에게 특히 두드러졌다. 가족을 이루고 가정이 유지되는 것을 습관처럼 여긴 다음부터 신이의 신경은 우습게도 일에 집중됐다. 결혼을 반대했던 정이의 주장처럼, 신이는 뒤늦게 일로서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했다.

그에 대해 마냥 신이를 탓하기는 어려웠다. 마흔을 넘긴 신이는 한창 생각이 많을 때였으니까. 고속으로 이어지던 승진도 어느 때부터 벽에 막힌 듯 제자리였다. 부장급이라 연봉은 많았으나 언제까지 이어질지 확약할 수도 없었다. 진급이 빠르다는 것은 그대로 퇴직이 이르다는 말과 같으니까. 눈에 띄게 늙은 정이도 마음에 걸렸다. 마흔 중반인 자신과 아직도 스물 초반으로 보이는 심이에 비해 정이는 벌써 일흔이 넘어보였다. 외모를 따라가는 그들로 치면 정이는 언제 일을 그만둔다 해도 이상하지 않게 느껴졌다. 그러니 은퇴한 맏형의 자리를 자신이 채워야 하는 것처럼 신이는 저 혼자 급해졌다. 짧지 않은 고민 끝에 신이는 퇴사하고 퇴직금으로 사무소를 차렸다. 그때만 해도 우리는 모두 신이를 응원했다. 잘 다니던 회사를 퇴직한 것도, 뜬금없이 사무실을 차리는 것도 괜찮았다. 건설 쪽은 끝물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호황이었고 일거리도 전국에 넘쳐났으니까. 실제로 신이의 사무소는 시작이 좋았다. 연달아 좋은 일거리가 들어왔고 연봉보다 많은 돈을 짧은 시간에 벌 수 있었다. 심이는 신이가 딱 그 정도였으면 했다. 여기서 더 욕심 부리지 않고 이렇게만 유지하며 가족들과 화목하게 지나는 것. 하지만 신이는 멈추지 않았다. 일거리를 계속 가져오고 직원을 늘렸다. 일의 규모도 점점 커졌고 오가는 액수도 낯설 만큼 높아졌다. 그때부터 심이의 불안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사무소가 잘못될까 싶어서가 아니었다. 사무소가 바빠질수록 그보다 훨씬 더 바빠지는 신이를 걱정했다.

심이의 우려대로 신이는 아주 바빠졌다. 퇴근이 늦어진 것은 당연했고 주말도 없이 사무소에 나가기도 했다. 사람을 만날수록 술자리가 많아졌고 결국엔 점심부터 술을 마셔야 해서 운전기사를 채용할 정도였다. 가정은 그만큼 빈자리가 생겼다. 그것은 오롯이 정이와 심이가 메워야 했고 그럼에도 채워지지 않는 부분은 그대로 가족의 결핍이 됐다. 안 그래도 한창 사춘기인 아이들과 급속도로 거리가 멀어졌다. 아이들과 멀어질수록 부부관계도 삐거덕거렸다. 그렇다고 신이를 탓할 수도 없었다. 물론 방법이나 과정으로 봤을 때 가족과 견해가 달랐지만 신이는 나름대로 가정을 위해 힘쓰는 중이었으니까. 이때 신이는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렸다. 나머지 가족들의 노력에도 관계는 나아지지 않고 점점 안 좋아졌다. 신이가 사업으로 일희일비할 때마다 가정이 출렁였다. 매번 맞추며 따라가기 어려운 아이들은 아빠와 거리를 벌렸고, 일이 풀리지 않을 때 하소연과 화풀이로 닦달하는 것은 배우자였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초등학생이던 아이들은 고등학생이 됐고 신이는 마흔여섯이 되었다. 그동안 가정은 바람이 멎지 않는 강 표면처럼 일렁였다. 그 연속된 파동의 정점은 신이가 지금껏 없던 커다란 사업에 끼어들려고 할 때였다. 이미 벌려놓고 마무리 안 된 일거리도 많았다. 정이와 심이는 거듭 말려보았지만 신이는 이번 사업을 일생의 역작으로 삼을 셈인지 앞뒤 가리지 않고 밀어붙였다. 그렇게 내내 참던 심이가 터졌다.

“너 적당히 좀 해.”

퀭한 눈으로 물에 하얀 위장약을 타던 신이가 돌아봤다. 아이들은 이미 등교한 오전에 집에는 형제들뿐이었다.

“너 지금 미친 사람 같아.”

심이는 전에 없이 심각한 목소리였지만 신이는 또 그 소리냐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하얀 알약이 투명한 기포를 내며 금세 물속으로 사라졌다. 단번에 들이킬 순간이었지만 신이는 컵을 쥐고 가만히 있었다. 마른세수를 한 심이가 신이와 정이를 방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언제나처럼 각자의 자리에 앉았고 신이만 컵을 든 채 탁자 근처에 서있었다.

“그렇게 안 해도 우리 충분히 먹고 살아.”

신이는 대답이 없었다.

“더 늦으면 되돌릴 수도 없어.”

신이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거 하지 말자. 지금 하던 것부터 정리하고, 하나씩 차근차근 하자. 너 지금 일에 매몰되고 있어. 가족은 놔둔다고 알아서 굴러가지 않아. 아이는 특히 그렇고. 아직 성인도 안 됐잖아. 너 사업 시작하고부터 집안이 내내 얼음판이야. 너 최근에 아내 얼굴은 제대로 살펴봤어?”

“하지만 정말 좋은 기회야. 이제 와서 발을 뺄 수도 없고.”

오늘 신이의 입이 처음 열었지만 고작 그것만 뱉어내고 도로 닫혔다.

“왜 안 돼? 우리도 네 사정 잘 알아. 그래도 가족이 가장 중요하잖아.”

“나도 알아. 하지만.”

“그 ‘하지만’이라는 말 좀 그만해. 정이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너희는 왜 인생을 ‘안 돼’랑 ‘하지만’으로만 채우는 거야.”

신이는 내도록 들고 있던 약을 쭉 들이키고는 탁자에 힘주어 내려놨다. 탕 하는 소리가 음울하게 울려 퍼졌다.

“매사 ‘왜 안 돼?’라고 하는 것보단 낫잖아. 주변 상황은 신경도 안 쓰고.”

신이는 심이를 노려보며 그렇게 말했다. 신이는 어느새 정이처럼 생각하고 정이처럼 말하고 있었다. 소파에서 듣고만 있던 정이가 신이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그놈의 주변 상황, 주변 눈치. 넌 상황과 타인이 만든 조각상이냐.”

신이가 한숨처럼 내뱉었다. 그 점은 나도 동의했다. 평생 상황을 따지던 정이는 자신이 어떻게 얼마나 소모되는지 잘 몰랐다. 그걸 모르니 그에 휘둘리는 신이의 상태도 알 리가 없었다. 지금 정이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신이 역시 스스로 어찌 갈려나가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을 눈치 챈 심이만 안타까움에 발을 구를 뿐이었다.

결국 이긴 것은 신이였다. 이번에도 진 것은 심이였다. 되돌아보면 심이는 신이에게 늘 졌다. 정이와는 아득바득 싸우며 자신의 의사를 쟁취했지만 신이에게만큼은 자주 져주고 주로 져왔다. 마치 그게 자신의 몫이라는 듯이.




8. 95%

언제부턴가 밥을 먹어도 늘 허기가 졌다.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다. 조금만 먹어도 든든했고 특히 아이들이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불렀다. 그것이 가정의 힘이었다. 둘러앉아 함께 먹는 식구의 가치였다. 위장이 아닌 영혼을 채워주는 포만감. 몸이 추운 날씨에도 마음을 따듯하게 하는 가족의 온도.

넓은 집에 있는 이는 우리 형제뿐이었다. 아이들은 벌써 직장을 잡아 출가를 했다. 그보다 앞서 부인은 아이들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따로 살았다. 정식으로 이혼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 별반 차이가 없었다. 일 년에 한 번쯤 아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생일에 겨우 얼굴을 비췄다가 숟가락을 놓자마자 금세 사라졌다. 부인뿐만 아니라 장성한 아들과도 데면데면했다. 명절 때나 겨우 볼까. 딸애는 종종 찾아오지만 제 엄마에게 더 자주 가는 듯했다.

예상대로 정이는 일찍 은퇴를 했다. 심이와 싸운 신이가 그대로 큰 건수에 뛰어들었을 때, 교체하듯 일을 그만뒀다. 그렇다고 심이 때문은 아니었다. 더 하고 싶어도 정이는 외견만큼 너무 늙고 노쇠했다. 마흔여섯이 된 정이의 외모는 꼭 여든다섯처럼 보였다.

신이의 역작도 결국 모래성이 되었다. 여러 문제가 겹치며 장기간 표류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안 좋아졌다. 몇 년을 버텨보았지만 결국 빠져나오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그마저 뒤늦게 발을 빼느라 많은 손해를 봐야 했다. 다행히 파산할 정도는 아니었다. 막 사무소를 개업했을 때의 상태로 돌아왔을 뿐이었다. 결국 신이는 얻은 것 없이 가족만 잃은 셈이 됐다. 다행히 정이의 이른 은퇴는 문제되지 않았다. 사무소에서 버는 것으로도 우리 사형제 정도는 먹고 살 수 있었으니까.

나는 은퇴 후 한가해진 정이와 부쩍 친해졌다. 사랑하는 형제였지만 그간 우리 사이는 거의 대화가 없었다. 정이는 평생을 맏형처럼, 집안의 가장처럼 우리들을 위해 앞만 보며 달리기 바빴고, 나는 그 행렬의 맨 뒤쪽에 내내 누워만 있었으니까. 마치 무뚝뚝한 아버지와 조용한 막내아들처럼, 가족 중 심리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가장 거리가 먼 편이었다. 그래도 정이는 언제나 나를 챙겨왔다. 돌아보는 시선이 신이나 심이에게서 멎지 않고 매번 나에게까지 확실히 닿는 것을 느꼈다. 나도 늘 정이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고.

은퇴한 정이는 산책을 좋아했다. 조용한 호숫가를 걸으며 생각에 빠지기를 즐겼다. 그래서 그 무렵부터 조금씩 걷기 시작한 나와 자주 동행을 했다. 주로 정이가 미는 휠체어에 앉아 있었지만 몸 상태가 좋은 날은 나란히 걷기도 했다.

정이는 마음이 편해져서인지 하루가 다르게 달라보였다. 까칠하던 성격이 유순해지고 계산적이던 모습도 많이 사라졌다. 늘 찌푸리고 있던 미간도 어느 정도 펴지고 차갑던 말투도 다정해졌다.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정이는 진작부터 은퇴를 바랐을지도 모르겠다고. 지금껏 우리가 알던 정이의 성격은 원래 그의 것이 아니지 않을까 하고. 형제보다 먼저 자라나서 그만큼 빨리 소모된 정이는, 챙겨야 하는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만큼 버둥거린 것이다. 마치 태어났을 때처럼. 감정표현이 적은 대신 팔다리를 버둥거렸던 그때처럼. 그렇게 쌍둥이면서도 맏형이던 그는 도중에 그만 둘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 대신 동생 같은 형제들을 끝까지 보살피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할 때까지 달려왔고, 그러다 끝내 장렬하게 꺾인 것이다. 갈고 닳아 짧아진 연필심이 어느 순간 뚝 하고 부러지듯 달리던 중에 쓰러졌다. 더 깎을 나무조차 없게.

그러고도 십삼 년이 또 지났다. 이제 백한 살쯤으로 보이는 쉰아홉의 정이는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징조도 없이 모든 활동을 멈췄다. 은퇴 후 지금까지 유일한 낙이던 산책도 그만 두고 방 안, 그의 지정석인 소파에 앉아 온 하루를 보냈다. 그때 정이는 장작 같았다. 심지가 빠지고 나무만 남은 몽당연필에 불을 붙인 모습이었다. 아주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정이는 소파에서 타들어갔다. 우리 누구도 정이를 그 소파에서 끌어내거나 불을 끄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지 못했다. 그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었다.

정이가 그렇게 된 순간부터 평생 혼자만 이상 없던 신이에게 첫 이변이 생겼다. 정이를 뒤늦게 따라가듯 신이의 눈빛은 무섭게 늙기 시작했다. 정이가 빠르게 늙던 속도와 비교할 수 없게, 매주 일 년씩 나이를 먹는 듯했다. 쉰아홉이던 신이는 1년 후 예순의 외모에 백한 살의 눈빛으로 결국 침대에 누웠다. 우리 모두 이제 신이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침대에 누운 신이는 속 알맹이를 정이와 바꾼 것처럼 기운이 없었다. 겉모습은 고작 예순인데, 아직 환갑도 맞이하기기 전에 곧 떠날 사람마냥 생기를 잃었다. 정이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만 있었다. 하얗게 타버린 너머로 작은 불빛만 언뜻 보이는 잿더미처럼, 아직 간신히 모양을 유지하고 있지만 작은 바람에도 툭 하고 쓰러질 것 같았다. 이 방에서 멀쩡한 이는 60년을 살고도 여적 서른셋처럼 보이는 심이와 나뿐이었다.

“그러게 내가 뭐라 그랬어.”

심이의 말이 회한처럼 들렸다. 그마저도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랬잖아. 내가 말했잖아. 바보야. 다 늙어서 이게 뭐야.

“너희는 지금마저도 싸우냐.”

그렇게 말하며 나는 웃었다. 심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힘이 넘치는 몸으로 탁자 끝에 걸터앉았다. 지금 모습만 보면 몸을 못 쓰던 예전이 거짓말 같았다. 정이와 신이가 늙어갈수록 마치 옮겨오듯이 나는 빠르게 건강해졌다. 정이가 산책을 그만 두고 소파에만 머물 때 나는 높은 계단도 성큼 오를 수 있었고, 신이마저 침대에 누웠을 때는 장거리도 거뜬히 달리게 되었다. 그런 나를 보며 심이가 그랬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온갖 이상한 애들이 더 이상해지는 와중에 멀쩡해지는 애가 하나라도 있어서.




9.

마음은 언제나 몸보다 두 배 느리게 늙는다. 그래서 서른에는 열다섯 아이 같고, 마흔은 스물 청춘 같고, 예순에는 아직 서른인 마음이 한창 남아있다.

하지만 정신은 몸보다 두 배 빠르다. 사람의 정신은 마치 연필과 같다. 쉽게 마모되고 닳은 만큼 짧아진다. 어떤 장소에서 어느 속도로 어떻게 쓰는지의 과정이다. 소모된 것을 도로 채울 방법이 없다. 특히 마음과 조화가 맞지 않은 정신은 유독 우둘투둘한 표면 위를 구른다. 마음과 싸울수록 바닥은 거칠어지고 마음과 멀어질수록 구르는 압력은 강해진다. 정신차려보면 몸은 뒤에 남겨두고, 마음은 저 멀리 방치해두고 저 혼자만 달려가고 있다. 그러다 결국 몽당이 된 정신은 제풀에 굴러 쓰러진다.

젊게 날뛰는 마음과 쉽게 닳는 정신을 추스르는 것은 언제나 몸의 일이다. 몸은 단지 마음을 담는 그릇이자 정신이 사용하는 도구가 아니다. 스스로 의지를 가진 마음과 정신의 형제다. 몸을 도구로 여기는 순간 양쪽을 붙잡고 균형을 잡을 유일한 존재를 놓치게 된다. 서로 싸우지 않게, 생활이 어느 한쪽으로 쏠리지 않게. 신경 쓰지 않으면 쉬이 쏠려 관성이 되고 결국 습관이 되니까. 각자 다른 나이에 끼어 자신 안에 붕 떠있게 된다. 각자 다른 나이는 어떻게 다른지가 중요하다. 사이가 좋으면 세상을 다각도로 바라보게 되지만 사이가 나쁘면 혼란스럽게 살아간다. 스스로 혼란하다는 사실을 무시하면서.




10.

길고 긴 침묵 속에 신이가 눈을 떴다. 내 눈에 신이의 뇌에서 마지막 신경전달물질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것이 보였다. 여기가 어딘지 잠시 살피던 신이는 형제들을 봤다. 소파에 앉아 눈으로 허공 어디쯤을 움켜쥐고 있는 정이와, 침대 곁 이동식 의자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심이를 연달아 본 신이는 마지막으로 나와 눈을 맞췄다. 육십 년을 봐온 눈길이 거기 있었다.

“혼이야.”

백한 살이 된 눈 속에 내가 보였다. 신이의 입술이 힘겹게 열렸다.

-나 사실 의사가 되고 싶었어.

안다. 되돌릴 수 없다고 판단한 순간부터 지금 일에 더 파고든 것도. 나는 말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주름과 수염으로 얼룩진 둘째의 입가에 풀잎 같은 미소가 살포시 피었다. 둘째가 마지막 긴 숨을 내뱉자 첫째를 잡고 있던 손아귀가 침대 위로 흘러내렸다. 우리는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내내 반쯤 감은 눈으로 신이의 마지막을 지켜보던 정이의 얼굴이 우리를 향했다. 눈이 마주쳤다. 평생 맏형처럼 자상한 눈으로 우리를 쓰다듬던 정이의 시선은 곧 창밖을 향했다. 함께 걷던 산책로, 푸른 호숫가, 붉게 물든 하늘을 보던 정이가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한 번 더 산책하고 싶다.

그것이 마지막 말이었다. 정이는 소파에 앉은 채로 스르륵 사라졌다. 마치 호수를 밟으며 밀려오는 노을에 자리를 내어주듯이.

방에는 심이와 나만 남았다. 우리는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을 때 내내 침대와 소파를 바라보던 심이가 나를 봤다. 언제나처럼 단단한 직선 같은 눈으로, 서른셋의 얼굴이 나를 향해 말했다.

-그래도 즐거웠어.

그것이 마지막 말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첫째는 잠시 잠든 것처럼 침대에 엎드렸다. 그리고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방에는 결국 나만 남았다. 마지막으로 그가 머문 자리를 둘러보던 나는 조용히 일어나 문을 닫지 않고 나왔다.

노을에 흠뻑 물든 방에 침대와 소파와 이동식 의자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공기에 검정 물감을 덧칠하듯 모든 게 컴컴해졌다. 멀리서 바람을 탄 형제들의 웃음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는 것 같았다. 허나 그마저도 곧 사라졌다.






20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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