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현수와 미연 : 가족인형 5
밤, 아빠 인형
현수의 길었던 말이 끝나고, 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오랫동안 침묵을 유지한다. 그렇게 재떨이에 현수의 꽁초 하나가 더 늘어났을 때쯤, 미연이 나지막이 입을 연다.
“너한테 많이 미안해. 변명할 수도 없고, 할 생각도 없어. 네 말대로 난 내 생각만 했었어. 너를 떠났을 때도, 아이를 안겼을 때도, 그 후 십육 년 동안에도. 그리고 이번 일주일까지도 난 나만 생각했어. 어쩔 수 없나 봐. 아마 난 평생을 이렇게 살겠지.”
현수는 묵묵히 듣고 있다.
“그래서 미안해. 늘 내 생각만 한 것도. 너한테 모든 것을 떠넘긴 것도. 이렇게 마지막까지 내 마음대로 하는 것도.”
여전히 현수는 말이 없다.
“그리고 고마워.”
고맙다는 미연의 말에 떨어졌던 현수의 시선이 미연의 얼굴로 올라간다.
“은서. 잘 키워줘서 고마워.”
미안해, 라는 단어에 한 번, 그리고 고맙다는 말에 또 한 번 가슴이 찌릿하다. 달랑 두 단어뿐인데, 속에서 울렁거리던 울분과 원망의 많은 부분들이 사그라진다. 어쩌면 현수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은 이 두 단어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만약 만나게 된다면 가장 하고 싶었던 말도 역시 이 두 단어였을 것이다.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현수는 질끈 눈을 감는다.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사람과 사람이 만나 사랑을 했고, 또 이별을 했다. 그 과정 중 둘은 셋이 되었다. 그 셋 중 한 명은 한 사람의 인생을 살았고 다른 두 명은 두 사람의 인생을 살았는데 무엇이 일을 이렇게 만든 걸까. 어쩌면 떨어져 있었을 뿐, 미연 역시 홀로 두 사람의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어쩌면 현수보다 미연이 더 괴로웠을지도 모른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위로하고 위로받으며 살았던 둘과는 달리 미연은 그 세월 동안 홀로 모든 과정을 견뎌야 했을 테니. 따로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세 명이 세 사람의 인생을 살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자 현수의 마음속에서 불던 바람이 점차 잠잠해진다. 십육 년을 묵혀놨던, 밑바닥에 켜켜이 쌓여있던 말들을 쏟아냈지만 전혀 개운하지 않다. 오히려 하기 전보다 마음은 더 무겁다. 아직 모든 말을 다하진 못했으니까. 현수는 새로운 담배를 빼어 문다. 불꽃은 아까만큼 흔들리지 않는다.
“다 쏟아내면 시원해질 거라 기대하진 않았지만, 또 이렇게 쏟아낸 빈 공간이 무거워질지도 몰랐네.”
미연은 대답 없이 시선을 떨어트린다.
“그래. 이젠 옛날이야기지. 되돌릴 수도 없고, 되돌릴 일도 없는 그런 지나가버린 일. 이제와 이런 말을 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변하는 건 없고, 자꾸 더 해봐야 구차해 지기만 하겠지.”
백방으로 수소문해도 찾을 수 없던 사람이 어느 날 벼락처럼 자신의 앞에 떨어졌다. 많은 시간이 흘렀고 이제는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현수의 마음 한편에는 묻어뒀던 기대가 자꾸 솟아난다. 이제는 미연이 왜 떠났고, 그동안 연락도 없었고, 그거야말로 정말 옛날 일이다. 지금 현수에게는 미연이 왜 떠났는지 보다, 미연이 왜 십육 년 만에 돌아왔는지가 더 중요했다. 현수는 실낱같이 솟아난 희망이 바람에 날리지 않게, 두 손으로 곱게 감싸 쥐며 입을 연다.
“그래. 지나간 옛 일은 추억으로 넘기자. 십육 년 만에 만난 것도 우연이 만들어준 해프닝이라고 치자. 근데 거기서 끝나지 않고 지난 일주일 동안, 이곳을 찾은 이유가 뭐야?”
미연이 고개를 들자 현수가 미연의 눈을 보며 묻는다.
“여기 왜 온 거야?”
은서를 달라고 한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아이를 뺏겨서가 아니다. 미연이 뻔뻔해서도 아니다. 미연이 은서와 처음으로 함께 있게 된다면, 그럼 그 그림은 셋이어야 한다. 은서 곁에 미연과 현수가 모두 있는 모습이어야 한다. 둘이어서는 안 된다. 엄마 없이 자란 은서에게, 지금껏 모르고 살았던 아빠 없는 삶까지 알려주어서는 안 된다. 현수에게 이제 미연은 지나간 사람이었다. 이제와 사랑이 남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일말이라도 미련이 남았다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보다 중요한 것은 은서였다. 미연에게 그럴 마음이 있다면 현수는 함께 은서를 설득할 생각이었다. 미연과 나란히 원죄를 고하고, 은서가 미연을 용서하고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결국 셋이 될 수 있으면, 내내 비어있던 은서의 한 손이 처음으로 제 주인을 찾을 수 있다면 현수는 무엇도 버리고 무엇도 할 수 있었다. 미연에 대한 미움과 원망도, 수진에 대한 미안함도, 주변의 수군거림도, 스스로의 마음도 전부 없는 셈으로 여길 수 있었다.
현수의 질문에 미연은 말간 눈으로 현수를 응시한다. 현수도 정갈하게 다듬은 마음으로 그 시선을 마주한다.
*
“여기에 왜 온 거야?”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 현수의 입에서 미연의 귀로 전해진다. 현수는 미연의 눈을, 미연은 현수의 입 언저리를 쳐다보며 아까보다 긴 침묵이 흐른다. 커피 잔도 담뱃값도 움직이지 않고, 창밖의 헤드라이트로 인해 두 사람의 그림자만 벽을 타고 좌우로 이동한다. 미연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것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지나간다. 처음 현수를 만났을 때. 사랑하고 익숙해지다가 멀어진 순간들. 불러오는 배와 갓 태어난 아이. 아이의 품에 안겨있던 파란 아빠 인형과 노란 아이 인형. 돌아오는 택시와 떠오르는 비행기. 낮을 좀먹는 밤과 유화로 만든 방. 버리지 않고 노란 상자에 담아둔 엄마 인형. 지난 십육 년의 시간들. 그리고 최근 일주일까지. 그 모든 것들이 끊임없이 서로 합쳐지고 갈라지며 명멸한다. 그러다 이내 미연의 머릿속에는 단 한 장의 그림만 남는다. 초등학교에 막 입학했을만한 여자아이. 그 얼굴이 미연을 가득 채운다. 힘껏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은 아이. 신기루처럼 그저 눈앞에 있는 그 아이. 미연이 아무리 소리치고 울며 보채도 그림 속 아이는 그대로다. 결국 뻗은 손을 감싸 안고 미연은 떨어지듯이 운다. 나는 누구에게 손을 뻗을 수 있을까. 내민 내 손을 그 아이는 잡아줄까. 만약 그 아이마저 뿌리치면, 유화로 만든 방 속의 아이에 이어 실제로 훌쩍 커버린 은서에게마저 내민 손을 거절당한다면 미연이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가지고 싶어도 손조차 내밀지 못한다. 먼저 네가 다가와 내 손을 잡아주면 좋을 텐데. 먼저 내 눈을 바라보며 엄마라고 불러준다면. 끝내 이기적인 기대 말고는 미연은 무엇도 할 수 없다. 지금 마주 보고 있는 현수의 눈도 마찬가지. 미연이 먼저 손을 뻗으면 저 우직하고 착한 남자는 나를 받아줄지도 몰라. 함께 은서를 설득하고 같이 있도록 도와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아니면 어쩌지. 그렇다한들 은서가 끝내 거절하면 나는 어떡해야 하지. 납덩이같은 공포가 미연의 기대를 내리누른다. 유학 중에 두 사람을 보러 오지 못하게 막았던 그 두려움.
이곳에 올 때 내심 각오하고 있던 그 끝. 그래. 이곳이 우리의 끝이구나. 나는 누구도 구원하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구원받지 못하겠지. 십육 년 전 그날 택시 안에서 그랬듯.
그렇게 세상이 멈춘 듯 영원 같던 시간은 미연이 두 눈을 감음으로서 깨진다. 눈을 뜬 미연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입 언저리에 있던 시선을 현수에게 맞춘다.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미연은 이미 살짝 웃고 있다. 그 모습에 현수의 이마가 출렁인다.
“그냥?”
“응, 그냥. 그럴 때가 있잖아, 갑자기 생각날 때.”
현수는 잘못 들은 듯 멍한 표정이 된다.
“그때 우연찮게 마주친 이후에 생각나서 온 거야.”
미연의 말에 현수에게 잠깐의 틈이 끼어든다.
“그게 다야?”
현수의 물음에 미연에게 조금 긴 틈이 끼어든다.
“응. 그게 다야.”
현수가 허탈한 웃음을 내뱉자 미연이 말을 마무리한다.
“앞으로도 잘 지내.”
말을 마친 듯 다시 눈을 감은 얼굴을 보며 현수는 상체를 등받이에 기댄다. 잘게 갈린 심장을 공기에 실어 보내듯 현수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공중으로 흩뿌려진다. 둘 사이에 또다시 침묵이 끼어들지만, 그것을 내쫓듯 현수가 담배를 빼어 문다. 불은 붙이지 않고 물고만 있는 동안 미연은 남은 커피를 입에 털어 넣는다. 싸늘하게 식은 커피.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커피가루가 입천장과 잇새에 달라붙는다. 혀를 굴려보니 입천장의 화상은 아직 낫지 않았는지 상처가 찌릿하다. 미연은 파우치만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갈게.”
미연의 인사에 현수는 대답하지 않는다. 미연 역시 현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출구 쪽으로 걸어간다. 텅 빈 가게 안에 높은 구두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종소리가 울리고 나서야 현수는 입에 문 담배를 도로 내려놓는다. 몇 바퀴 데구루루, 나도 모르게 걷어찬 돌멩이처럼.
“그때도 지금도, 결국 그 두 마디는 못했네.”
자조 섞인 목소리도 테이블을 함께 구른다.
*
밤, 공룡 인형
은서와 둘이 지낼 수 있어. 나는 간절히 그러길 바라. 만약 은서가 없었다면 너와 둘이 지낼 수 있을지도 몰라. 우리 사이에 그런 마음이 다시 생긴다면. 하지만 너와 은서와 셋이 지낼 수는 없어. 나는, 이제와 그럴 수는 없어. 너희를 버린 건 나거든. 그래서 나는 그걸 원할 수 없어. 너희가 괜찮은 것과 관계없이, 나는 그걸 원하면 안 돼. 그래서 어찌해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어. 은서와 새아빠도 되고, 너와 새 아이도 되는데. 우리 셋은 안 돼.
그럼에도 살아야 하잖아. 너와 은서가 살 듯이, 나도 살아야 하잖아. 그럼 나는 이제 어떡해야 할까. 현수야, 알려줘. 방 밖으로 나온 은서와 만난 나는 이제 어찌 살아야 할까. 은서야, 알려주렴. 유화가 묻지 않은 너를 세상 어디에 둔 채로 나는 어떤 마음으로 지내야 할까.
가게를 나서는 걸음걸음 뒤로 세상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뾰족한 발끝에만 시선을 박고 계단을 내려오다가 발치에 그림자가 걸린다. 순간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는다. 위태로운 걸음으로 계단을 마저 내려오니 누군가가 서있다. 작은 어깨로 가방을 이고 있는 은서였다. 시선이 마주치고,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마주한다. 어두운 밤, 왼편에 매달린 조명으로 인해 둘의 얼굴은 한쪽씩 명암이 진다. 밤거리는 공기를 가르는 차 소리만 가득하다. 머리를 흐트러트리는 바람, 입 안에서 느껴지는 찝찔한 피 맛. 은은하게 풍기는 커피와 담배 냄새까지. 모든 것이 미연을 무겁게 짓누르지만 미연의 가슴을 가장 날카롭게 찌르는 것은 은서의 눈이다. 자신과 닮은 그림 속의 그 눈. 마음을 짐작할 수 없는 은서의 눈빛에 미연은 덜컥 겁이 난다. 입술에 점점 힘이 들어간다. 머릿속에 수백 개의 생각이, 가슴속에 두 개의 감정이 주체할 수 없이 휘몰아치고 있다. 미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뜬다.
“가시는 거예요?”
영원할 것만 같았던 순간은 작은 의미에도 쉽게 바스러진다. 은서의 나지막한 말에 미연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이 순간이 지나면 난 분명 다시는 여길 찾지 않겠지. 그래, 현수 말대로 우연이 허락하지 않는 한 너와 이렇게 마주하는 일도 더는 없을 거야. 정말 끝이라고 실감하는 순간 그것은 주체할 수 없는 무게가 되어 미연의 혀를 붙잡는다. 십육 년 동안 꿈에서조차 늘 그리던 그 모습. 그리고 일주일간의 짧은 조우. 모든 것이 깨고 나면 사라질 한낱 꿈처럼 느껴진다. 내가 네 엄마야. 예전에 내버린 생명에게 이제와 어찌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차라리 네가 먼저 알아차려주길. 엄마, 라는 단어로 내 발걸음을 붙들어 주길.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스스로 말고는 손을 뻗지 못하는 미연이었다. 평생을 멍울진 가슴으로 살망정, 뻔뻔스럽게 욕심내지 못했다.
“잘 지내. 아빠 말씀 잘 듣고.”
은서는 말간 눈으로 미연을 들여다본다. 은서의 눈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속으로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을까.
“조심히 들어가세요.”
갈수록 작아지는 은서의 목소리에, 사진을 찍듯 은서의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는다. 그리고 은서의 곁을 스쳐 밤거리로 나선다. 은서의 마음은 끝내 읽지 못했다. 알아챘을까. 아니면 끝까지 몰랐을까. 점점 빨라지는 미연의 발걸음 뒤로 젖은 점들이 후드득 떨어진다.
*
밤, 아빠와 아이 인형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은서는 뛰듯이 걸어가는 미연의 뒷모습을 응시한다. 미연은 점점 작은 점으로 변하다가, 큰 트럭이 지나간 후에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그제야 고개를 숙인 은서는 양어깨에 매달린 가방끈을 힘주어 쥔다. 신호등이 일곱 번 정도 바뀔 시간이 흐른다. 고개 숙인 은서의 등 뒤로 철제 계단의 신발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려보니 현수의 발끝이 보인다. 무표정하게 내려오던 현수도 발치에 걸리는 그림자에 고개를 든다. 눈앞에는 담담한 얼굴의 은서가 서있다. 당황한 현수가 곁눈질로 은서의 주변을 훑는다. 아무도 없다. 공원을 산책하듯 아주 약간의 간격이 둘 주변을 맴돈다. 현수가 웃자 은서 역시 거울처럼 따라 웃는다.
“집에 먼저 가랬더니.”
“기다렸어. 그냥.”
은서는 웃으며 현수의 팔을 잡는다.
“얼른 가자. 내일 또 각자 출근해야지.”
현수는 자신을 잡아끄는 은서를 잠시 내려다보다, 피식 웃으며 끌려간다.
“딸. 우리 가면서 아이스크림 사 먹을까?”
“안 돼. 지금 시간에 먹으면 살쪄.”
“그러지 말고 하나만.”
“그럼 제일 작은 거.”
“어이구. 우리 은서 최고.”
집으로 가는 길에 있는 슈퍼에 들려 가장 조그만 것으로 산다. 웬일로 아이스크림을 다 먹느냐는 사장의 말을 어설픈 웃음으로 넘기고 슈퍼를 나온다. 슈퍼 앞에서 숟가락의 포장을 뜯어 은서에게 쥐어주고, 자신도 포장을 뜯어 한 입 떠먹으며 걸어간다. 커피에 비해 시리고 단, 커피와 달리 시간이 지나도 먹을 수 있는 차가움이 입 안에서 맴돈다. 차가운 냉기는 분명 이를 찌르는데 자꾸 마음이 시려 잔기침이 난다. 현수의 옆에서 같은 아이스크림을 우물거리던 은서가 갑자기 현수의 팔을 당긴다.
“아빠, 발.”
“와. 밟을 뻔했다.”
“누가 흘렸나 보네.”
“떨어트린 사람 울었겠다.”
아스팔트 위에 동그랗게 고여 있는 연둣빛 액체를 돌아보는 현수에게 은서가 묻는다.
“아빠.”
“응?”
“아빠는 결혼 안 해?”
“갑자기 웬 결혼? 아빠는 우리 은서만 있으면 되는데.”
“하나뿐인 딸내미 결혼도 안 시킬 셈이에요?”
“무슨 소리야. 너 분명 일곱 살 때 평생 결혼 안 하고 아빠랑 산다고 했잖아.”
“아이고, 아버님. 그 얘기 두 번만 더 들으면 천 번이네요.”
“각서라도 써둘걸.”
“아무튼 아빠는 어떨지 몰라도 난 수진 언니 저렇게 못 놔둬.”
“여기서 수진 씨가 왜 나와?”
“우리도 이제 셋이서 놀러 가자, 이모네처럼.”
“이모네 셋은 그 셋이 아니잖아.”
“어쨌든. 응? 아빠.”
“은서야, 그게.”
“아빠! 우리도 셋! 응?”
사람 없는 여름밤, 아이스크림을 손에 든 부녀는 가로등 아래를 그렇게 걸어간다. 톡. 톡. 성급한 빗방울 몇이 두 사람 뒤를 쫓듯 떨어져 내린다. 그리고 곧, 눈에 닿는 모든 곳은 직선으로 가득 찬다.
*
유월 십일
아침, 엄마 인형
한결같다는 것은 여러모로 좋은 점이 많다. 일단 예측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는 뜻이니까. 양 손에 커피 잔을 들고 탕비실에서 나온 혜인은 가장 먼저 미연의 책상부터 확인한다. 역시 핸드백과 쇼핑백이 있다. 근데 이 언니 어디 갔대. 화장실을 가도 커피는 받고 갈 사람인데. 뜬금없는 변수에 커피를 들고 멍하니 서있는데, 혜인의 어깨 위로 손 하나가 지나간다.
“혜인 씨. 여기서 뭐해?”
“박 주임님. 혹시 조 과장님 못 보셨어요?”
혜인이 평소처럼 묻자 박주임이라 불린 남자가 혀를 차며 혜인의 등을 떠민다.
“이 아가씨가 아직 소식을 못 들었나 보네.”
“무슨 소식이요?”
내 몸에 손대지 말고 그냥 말로 해. 튀어나오려는 말을 억누르느라 웃는 얼굴이 가늘게 떨린다. 하지만 그 가면도 이내 따라 나온 박주임의 대꾸에 힘없이 벗겨진다.
“조 과장님 사표 냈대. 그래서 직원들 지금 다 부장실 앞에 모여 있어.”
떠밀리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선다. 의식보다 고개가 먼저 돌아가고, 비어 있는 나머지 자리들보다 한 자리가 눈에 박힌다. 주인이 부재중인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핸드백. 그때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사람들이 코너에서 튀어나온다. 그때까지도 양손에 커피를 들고 있는 혜인에게 무리의 중심에서 걸어오던 사람이 먼저 말을 건다.
“그거 내 거지?”
혜인이 멍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인다.
“가지고 있어. 본부장실 다녀와서 마실 거니까.”
미연은 그 말만 하고는 혜인을 지나쳐 사람들과 함께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진다. 혜인은 박 과장까지 가버린 텅 빈 사무실에 홀로 남는다. 꿈같이 짧은 조우. 혜인은 미연의 자리에 앉아 핸드백 옆에 커피들을 올려놓는다. 아직은 따듯하다. 하지만 이내 식어버릴 것들. 종이컵이 말랑해질 시간쯤이 지났을까. 정수리로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고개를 드니 차갑게 식은 커피를 들이켜는 미연이 보인다.
“으. 달아.”
“선배.”
“역시 식은 커피는 아메리카노 만한 게 없어.”
“언니.”
“담배 피우러 가자.”
미연은 핸드백과 쇼핑백을 챙겨 먼저 사무실을 나간다. 끈이라도 묶인 듯 미연 뒤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옥상 팔각정이다. 뭐라 말도 없이 태연하게 다리를 꼬고 담배를 피우는 미연의 모습에 혜인은 순간 머리로 열이 모인다.
“악!”
갑자기 터져 나온 소리에 재를 털던 미연의 어깨가 화들짝 올라간다.
“깜짝이야. 뭐야, 너? 갑자기 왜 소리는 지르고 그래?”
“아니 내가 소리를 안 지르게 생겼어요?”
단어를 씹듯 대꾸하는 모습에 미연은 멋쩍은 표정으로 입맛을 다신다. 혜인은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미연의 옆에 앉는다.
“어떻게 된 거예요?”
“나 사표 냈어.”
너무 태연한 얼굴이어서 순간 뭐라 대꾸할 말이 궁색해진다. 얼핏 들으면 십 년 다닌 회사가 아닌 아르바이트 자리라도 때려치운 느낌이다.
“아니 멀쩡히 잘 다니다가 갑자기 웬 사표?”
“멀쩡히 잘 다니진 않았지. 너도 알잖아.”
“그래서 결국 퇴사하겠다고? 왜? 부장이 언니 사랑한대?”
“그럴 것처럼 굴더니 끝내 그러진 않더라.”
“그럼 갑자기 왜요?”
“글쎄, 뭐랄까.”
미연은 대답 대신 발끝을 까닥인다.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대답해.”
“나 갑자기 모나리자가 보고 싶어 졌어.”
미연의 대답에 혜인의 표정이 십 분 전으로 돌아간다.
“뭐?”
“모나리자. 몰라?”
“눈썹 미인 그 모나리자?”
“응.”
“루브르에 있는 그거?”
“응. 그렇다니까.”
“아니 그게 갑자기 왜!”
“보고 싶은 거에 이유가 있냐. 그냥이지.”
이게 무슨.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아 자연스레 혜인의 자세가 삐딱해진다.
“그래서 지금 그걸 보겠다고 회사에 사표 내고 파리로 간다고?”
“응.”
“지금 언니가 쥐고 있는 계약 다 놔버리고?”
“아, 그렇다니까 뭘 자꾸 물어.”
혜인은 한숨을 푹 내쉰다. 지금 하는 이 대화가 마치 사춘기의 딸과 갱년기 엄마가 하는 그것 같다.
“언니. 그거 지금 스위스 가있어서 파리 가도 못 봐.”
“어? 왜?”
“오십일 동안 빌려줬어.”
“그래? 그럼 스위스로 가지, 뭐.”
태연하게 담배를 비벼 끄는 미연의 모습에 혜인은 뭐라 할 말이 없다. 언니 도착할 때쯤이면 도로 파리 가있을 걸. 이런 소리는 이미 씨알도 안 먹힐 타이밍이다. 아니, 사실 그건 둘 중 누구에게도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눈썹 미인 초상화가 어디에 있든 십 년 다닌 회사에 용감하게 사표를 던졌든. 설령 회사를 때려치우고 갑자기 독도를 사수하러 간다 해도 그거야 미연의 자유니까. 지금 혜인의 불만은 이 사태가 흘러가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알 수 없게 불안한 이 마음까지. 그러니 놀람과 서운함으로 뒤섞인 말들이 빙빙 돌기만 하는 것이다.
현실이란 꼭 빨랫감 같다. 귀찮아서 외면해도 결국 처리해야 한다. 계속 외면하다 보면 결국 입을 옷이 하나도 없게 되는 것처럼. 사회생활도 자취생활도 오래 한 혜인은 가장 먼저 잡히는 현실부터 하나씩 수긍이란 바구니에 집어넣는다.
“회사에는 뭐라고 그랬어?”
“똑같이 말했어. 모나리자 보러 간다고.”
“그랬더니?”
“부장이 미쳤냐고 하더니, 계속 그러니까 농담이 아닌 걸 느꼈는지 결국 본부장한테 전화 넣더라고. 그래서 본부장실 찍고 왔어.”
“본부장한테는 뭐라 그랬는데?”
미연이 담배를 하나 더 빼어 문다.
“모나리자.”
대답을 들을수록 바구니가 빠르게 묵직해진다.
“그럼 본부장은 뭐라고 그래?”
“처음에는 다른 이유가 있나, 갑자기 왜 그러나, 그러더니 내가 계속 갈 거다, 사표다, 란 말만 하니까 결국 한 달 쉬다 오래. 책상 안 빼놓는다고.”
“그럴 만하지. 지금 언니 손에 걸려있는 계약들이 얼만데.”
본부장도 바보는 아니었구나. 하나쯤이라도 의도대로 흘러가는 일이 있어 혜인은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머리는 그게 뭐야?”
혜인은 그제야 미연의 머리에 대해 물어본다.
“지난번에는 내 머리 보기 힘들다더니, 무슨 심정의 변화래.”
혜인의 말에 미연은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있었지”라며 슬쩍 웃는다.
“그러게 말이다. 거울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니까.”
“어디 미용실이야? 신고해야겠네.”
“내가 직접 자른 거야.”
미연의 머리카락은 목덜미에서 댕강 잘려있다. 혜인과 비슷한 스타일의 단발로.
“어때? 어울려?”
“하나도 안 어울려. 언니는 롱 웨이브가 가장 낫다고.”
“아니야. 안 익숙해서 그렇지, 이게 얼마나 잘 어울리는데. 젖살이 좀 있어야 더 어울리긴 하지만.”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미연의 눈이 순간 아련해진다.
“언니 나이가 몇인데 젖살이야.”
“그러게. 근데 너 생각해보니 은근슬쩍 말이 짧다?”
“지금 내 정신에 그런 게 신경이나 쓰이겠어.”
혜인의 던지는 듯한 말에 미연이 대답 없이 쓰게 웃는다.
“그래서, 돌아오기는 하는 거야?”
“몰라. 모나리자가 생각보다 마음에 안 들면.”
미연은 담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갈 채비에도 혜인이 움직이지 않자 미연이 혜인의 정수리를 쓸어내린다.
“미리 말 안 해서 미안.”
“내가 어제저녁, 아니 오늘 아침에 문자라도 하나 해줬으면 안 이래. 내가 왜 언니 소식을 박가 놈한테 처음 들어야 하냐고.”
“미안. 미안해.”
미연이 혜인을 잡아 일으킨다.
“가자. 배웅해줘.”
올라올 때와 마찬가지로 내려갈 때도 어느새 회사 정문이다. 길든 짧든 헤어짐은 항상 이런 식이다. 느닷없이 와서 어어 하는 사이에 아무렇지 않게 떠나버린다. 다시 만날 거란 기약도 없이 말이다. 그 횡포에 먼저 치이는 건 늘 마음을 더 많이 준 쪽이다. 혜인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미연이 입을 연다.
“너한테 부탁 하나만 하자.”
대답도 듣지 않고 대뜸 쇼핑백부터 건넨 미연은 이게 뭐냐고 묻기도 전에 말을 덧붙인다.
“가져가기도 뭐하고, 놔두고 가기도 그래서 믿을만한 사람에게 맡기고 간다. 혹시 내가 돌아오면 그때 도로 줘.”
그렇게 말하며 직접 혜인의 손에 쇼핑백을 쥐어준다. 혜인의 눈이 잠시 쇼핑백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온다.
“언니 갑자기 성격이 바뀐 것 같아. 말투도 그렇고.”
혜인의 말에 미연은 의미 없는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본다. 출근 열기가 막 가라앉은 거리는 행사가 끝난 강당처럼 허전한 한산함으로 가득하다.
“나도 이제 아는 언니처럼 좀 자유롭게 살아볼까 해서. 과거에 매이지 않고.”
“솔직히 진짜 이유가 뭐야?”
미연은 파랗게 깜빡이는 보행자 신호등을 보며 짧은 숨을 내쉰다.
“이미 했어야 했는데 지금까지 미뤄둔 일이 있어.”
“그게 뭔데?”
혜인의 말에 미연은 옅게 웃는다. 매듭. 혹은 센 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그릴 열여섯 장의 그림. 혹은 돌아오지 않는 것. 어느 것도 혜인에게 가닿지 않을 이야기다.
“그럼 잘 지내고 있어.”
그 말을 끝으로 미연은 돌아선다. 그리고 한 걸음씩 차분히 멀어진다. 아지랑이에 흔들리는 그 뒷모습이 왠지 슬퍼 보여, 우물쭈물하던 혜인은 결국 뒤통수에 대고 인사를 한다.
“건강히 잘 다녀와. 회사 안 와도 연락은 꼭 하고.”
혜인의 당부에 미연은 돌아보지 않은 채 손만 흔든다. 그리고 이내 홀몸의 그녀는 아침의 햇살 어딘가로 사라진다. 미연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자, 혜인은 길게 뺀 목을 쇼핑백 쪽으로 내린다. 안에는 빨간색 인형과 둘둘 말린 종이 한 장뿐. 고무줄을 조심스레 벗겨 펴보니 그곳에는 막 초등학교나 입학했을 법한, 미연을 닮은 여자아이가 있다.
그림 속 아이는 환하게 웃고 있지만, 어딘가 묘하게 슬퍼 보였다.
- 가족인형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