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현수와 미연 : 가족인형 4
유월 팔일
저녁, 유경의 가게
둘 뿐인 옷가게에는 묘한 기류가 흐른다. 카운터 안에 앉은 유경이 멍하니 잡지를 보고 있다. 가게 중간에 둔 테이블에 동현이 앉아 있다. 휴대전화를 만지는 척 하지만 실상 유경의 눈치를 살피는 중이다. 어제오늘 유경이 좀 이상하다. 가게에서 멍하니 반대쪽 이층을 바라보고는 하는데, 따라 고개를 돌려보면 항상 현수나 은서가 보인다. 처음에는 유경이 현수에게 엄한 마음을 품은 걸까 걱정이 들었지만, 눈빛을 보아하니 그런 종류의 일은 아닌 듯하다. 그럼 싸우기라도 했나. 은서에게 들어보니 딱히 그럴만한 일도 없었다는데. 유경에게 물어봐도 대꾸조차 없다. 뭔가는 있는데 영 답답한 상태다.
혼자 생각에 빠진 동현이 손 안에서 휴대전화를 돌리고 있을 때, 유경이 보던 것을 덮고 일어난다. 퍼뜩 정신을 차린 동현이 자기도 모르게 따라 일어나자, 유경의 의아한 눈이 동현에게 박힌다.
“뭐야, 너 왜 일어났어?”
“아니. 그, 어디 가게?”
동현이 횡설수설 하자 유경은 싱겁다는 얼굴로 지갑과 핸드폰을 챙긴다.
“희주 데려올게.”
“내가 갈게.”
“아니. 엄마가 간다.”
이 아줌마가 가게까지 비워놓고 어딜 간다는 거야. 평소 같으면 나한테 시켰을 일을. 의아했지만 유경의 눈빛이 너무 확고해서 동현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 다녀와.”
“누가 와서 엄마 찾으면 똥 싸러 갔다고 해.”
“이 아줌마가 농담에 레벨이 없어!”
“으하하! 갔다 올게.”
유경은 평소처럼 웃으며 가게를 나간다. 이렇게 보면 별일 없어 보이는데. 사실 고민해봤자 소용없는 일이긴 했다. 아버지 없이 셋만 사는 가정이라 그들 특유의 찐득한 정은 있지만, 유경도 동현도 워낙 개인주의라 직접 입 밖으로 내지 않은 일은 되도록 캐묻지 않는다. 캐묻는다고 뱉어낼 사람들도 아니고.
찜찜한 기분으로 눈썹을 긁는데 종소리가 들린다. 뭘 놔두고 갔나. 고개를 돌려보니 유경이 아닌 웬 여자가 가게 안으로 들어서고 있다.
“어서 오세요.”
동현의 인사에 들어오던 여자는 그 자리에서 멈춘다. 왜 멈추지. 목소리가 좀 심드렁했나. 잠시 동현과 여자의 눈이 마주쳤지만, 여자의 눈은 금세 동현을 지나 빈 카운터로 넘어간다. 그 모습에 문득 지금 들어온 여자가 손님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실례지만 어떤 일로 오셨죠?”
동현의 딱딱한 말에 여자가 짧게 웃음을 터트린다.
“동현아. 아무리 3년 만이지만 못 알아보는 게 말이 되니? 희주는 바로 알아보던데.”
여자의 목소리에 동현의 머리가 급히 돌아가다 어느 순간 반짝하니 불이 켜진다.
“아! 이모!”
“이모 조금 상처 받았어.”
“아니, 죄송해요. 아! 내가 어떻게 이모를 못 알아봤지?”
동현은 한 걸음에 미연의 앞으로 달려간다.
“한동안 안 찾은 이모 잘못이지, 누굴 탓하겠니.”
장난스러운 미연의 말에 동현의 얼굴이 벌게진다.
“제가 요즘 생각에 빠지면 주변을 잘 안 살펴서요. 게다가 머리까지 기르셔서 순간 못 알아봤어요. 정말 진짜로 상처 받으신 건 아니죠?”
“설마. 우리 동현이인데.”
미연이 팔을 벌리자 동현이 어색하게 안긴다. 그리고 서로 가볍게 등을 두드려준다.
“옛날에는 먼저 뛰어오기 바빴는데, 이젠 쭈뼛거리네.”
“고새 컸다고 또 어색하네요.”
팔을 푼 동현이 앉으라는 듯 테이블의 의자를 빼주자 미연이 웃으며 자리에 앉는다.
“우리 동현이 신사 다 됐구나. 마지막으로 본 모습이 중학생이었는데.”
“벌써 이 학년이에요. 시간 참 빠르죠?”
“그러게. 사실 이모도 순간 네가 맞나 고민했어. 역시 이 나이 때 애들은 쑥쑥 크는구나.”
올려다보는 미연의 눈빛에 동현은 괜히 머리를 긁적인다.
“고등학교 올라오고 갑자기 키가 컸어요. 이모는 어쩜 그대로네요.”
“그래 놓고 못 알아봐?”
“하하. 죄송해요.”
평소 모습과 다르게 동현은 서글서글하게 말을 건넨다. 동현을 대하는 미연도 마찬가지. 평소 성격과 다르게 자상하고 재치 있게 동현의 말을 받는다. 둘 다 옛날부터 원래 성격과 다르게 서로를 대했다. 미연은 유독 동현을 예뻐했고, 동현도 어렸을 때부터 미연을 유난히 따랐다. 유경이 늘 신기하게 생각하던 부분이었다. 어쩌면 동현은 털털한 유경에게 없는 엄마로서의 부분을 미연에게 찾았을지도 모른다. 미연 역시 잃어버린 부모의 지위를 동현을 통해 약간이나마 느꼈을 수도 있다. 서로가 원하는 부분이 명확하고 또 그것이 잘 맞아떨어진 관계. 그 독특한 관계성이 둘에게 있었다.
“잘 지냈니?”
“저야 건강하고 올바르게 잘 크고 있죠. 이모는 잘 지내셨어요?”
“몇 년 외국에서 지낸다고 얼굴을 못 봤네. 가끔 들어와 네 엄마 볼 때도 낮에만 시간이 나서 넌 학교 가있고.”
“안 그래도 학교 갔다 오면 이모 왔다 갔다는 얘기만 몇 번 들었어요. 이젠 아예 들어오신 거예요?”
“그래. 한 달쯤 됐어. 주변 정리 좀 하다 보니 금방이더라.”
“그럼 이제 자주 뵙겠네요.”
동현의 말에 미연은 대답 없이 옅게 웃는다.
“엄마는 어디 갔니?”
“희주 데리러 잠깐 나가셨어요.”
동현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미연이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난다. 동현도 급하게 따라 일어선다.
“가시게요? 엄마 금방 오실 텐데.”
“동현아. 오늘 오랜만에 네 명이서 저녁 먹을까?”
“당연하죠. 그럼 오셨는데 그냥 가실 생각이셨어요?”
동현이 웃자 미연도 따라 웃는다.
“그럼 이모 근처에서 볼일 좀 보고 다시 올게. 저녁 뭐 먹을지 생각하고 있어.”
“네. 조심히 다녀오세요.”
따라나서려는 동현을 만류하고 미연은 가게를 나선다.
*
가게를 나선 미연은 아까 이곳에 도착했을 때처럼 잠시 거리에 방치되었다. 어제보다 오는 길은 쉬웠지만 오늘은 마땅한 핑곗거리가 없었다. 내가 너를 만나는데 왜 눈치를 봐야 해. 어떤 핑계로 무장한다 한들 너를 볼 낯이 있을까. 상반되는 두 개의 생각 사이에 끼어 몸은 어디로도 움직이지 못했다. 스스로 만든 기준 간의 거리. 자신의 안에서 일어나는 혼자만의 입장 차이. 오답은 없지만 정답도 없었다. 어쩌면 지금 미연에게 필요한 건 물렁한 참보다 강철 같은 거짓일지도 몰랐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보니 카페 창가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어쩌지. 어떻게 할까. 머리로는 고민을 하면서 몸은 한 걸음씩 착실하게 카페로 향했다. 계단을 올라 유리문 앞에서 슬쩍 안을 들여다봤다. 일단 다른 손님은 없었다. 현수는 없고 은서만 있는 그런 입맛에 맞는 상황은 너무 욕심이겠지. 예상대로 둘은 나란히 서서 무언가 만드는 중이었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미연은 이내 어깨를 내려트리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얼굴이 보고 싶었으나 카페 입구에선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쉬운 시선이 문득 위를 향했다. 카페 맞은편 건물, 유경의 가게가 있는 빌딩의 삼층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과 비상계단이 만나는 자리에, 마치 베란다 같은 야외 테라스가 있었다. 신기한 구조였다. 아마 흡연실 및 휴게실의 용도인 듯했다. 비상계단과 이어져 있으면 들어가는 것도 문제가 없을 터였다. 그 테라스와 카페를 번갈아 보던 미연은 유경의 가게 옆으로 나있는 건물 입구로 들어갔다.
*
한차례 바람이 불고 난 가게에 남은 동현은 괜히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들뜬다. 그런 사람이 있다. 특별히 뭔가를 하지 않아도 그저 같이 있는 것만으로 마음이 따듯해지는 사람. 안 보면 생각나고 보면 기분 좋은, 이유 없이 끌리는 사람. 동현에게는 미연이 그런 사람이었다. 이제 삼촌이라 부르는 현수도 그렇지만, 그 둘은 느낌이 조금 달랐다. 현수가 자상한 아빠 같다면, 미연은 꼭 현명한 엄마 같았다. 정작 엄마인 유경은 철없는 누나 같고, 은서는 뭐랄까, 어느 하나로 종잡을 수 없는 느낌이다. 굳이 따지자면 현수와 미연, 유경과 희주를 전부 섞어놓은 중간쯤.
폭넓은 관계를 터부시 하는 동현이기에 반대급부로 가까운 사람에게 쏟는 정성이 클 수밖에 없다. 몇 개의 우물만 좁고 깊게 파는 성격인 셈이다. 그중 한 사람이 몇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선물처럼 불쑥 나타났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앉아 있기 힘든 동현은 괜히 걸려있는 옷들을 정돈하고 가게 소품을 다시 배치한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액자의 각을 맞추고 있는데 또 한 번 종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려보니 은서다.
“뭐해?”
“왔어?”
해맑은 웃음으로 반기자 들어오던 은서가 그 자리에서 멈춘다. 왜 저러지. 요즘 가게에 들어오다 한 번씩 멈추는 게 유행인가. 동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은서가 어색하니 웃는다.
“오빠. 무슨 일 있었어?”
은서의 말에 하나씩 점이 늘어나던 동현의 대화창에 느낌표가 뜬다. 오랜만에 이모를 만나 너무 들뜬 모양이다. 괜히 귀가 빨개진다. 낮게 헛기침을 하고 일단 은서를 자리에 앉힌다.
“아니. 그게, 방금 누굴 좀 만나서.”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오빠 이렇게 들떠있는 모습은 처음 본다.”
“그게.”
분명 동현이 맞는데, 오늘 온통 낯선 반응이다. 껍데기만 그대로고 알맹이는 꼭 다른 사람 같다. 은서가 장난스럽게 눈을 흘기자 동현이 얼른 표정을 가다듬으며 목소리를 진중하게 낸다.
“오랜만에 엄마 친구 분이 찾아오셨어. 어릴 적부터 잘 따랐던 분이어서 반가웠나 보다.”
해명에도 은서의 눈빛은 못 미덥다는 투다. 얘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동현은 재빨리 화제를 바꾼다.
“근데 어쩐 일이야?”
“슬슬 희주 데리러 갈 시간이잖아. 내가 갈까 해서 왔는데, 이모가 벌써 가셨나 보네.”
“엄마 똥 싸러 갔는데.”
“뭐?”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장에서 출발한 말이 뇌를 거치지 않고 입 밖으로 튀어나간다. 그런 동현의 말에 은서는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눈이 된다.
“아니, 그게 아니고. 응, 맞아. 희주 데리러 가셨어.”
잠시 둘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흐른다. 무표정한 동현이 속으로 비명을 지르는 동안 은서는 무너진 표정을 수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렇구나. 오빠 지금 농담한 거지?”
동현은 가타부타 대답이 없다.
“오늘따라 진짜 의외의 모습 많이 보네. 재밌었어. 그럼 나중에 봐.”
평소라면 잠시 수다라도 떨다 갔을 은서는 인사와 함께 곧바로 가게를 나간다. 잡지도 못하고 가는 등을 향해 녹슨 기계처럼 손을 흔들던 동현은 이내 은서가 있었던 의자에 무너지듯 주저앉는다.
*
“너 뭐하냐? 신종 시체놀이?”
유경이 희주의 손을 잡고 가게로 돌아왔을 때까지도 동현은 같은 자리에 변함없는 자세로 앉아있다. 유경의 말에도 동현에게 대꾸가 없자 희주가 달려가 오빠를 흔든다.
“오빠!”
동현의 넋 빠진 눈을 살피던 희주가 유경을 돌아보며 외친다.
“엄마! 오빠 죽었어!”
“안 죽었어.”
정신을 차린 동현이 희주를 무릎에 앉히며 대꾸한다. 유경은 남매를 지나쳐 카운터로 들어간다.
“뭐야, 근데 왜 그러고 있는 거야?”
“이게 다 아줌마 때문이잖아.”
동현은 괜히 유경에게 심통을 놓는다.
“뭐? 내가 뭐?”
“됐어. 아, 맞다. 이모 왔었어.”
“이모? 무슨 이모?”
“미연 이모. 아까 왔었다고.”
반쯤 열리던 잡지책이 유경의 손을 벗어나며 요란한 소리와 함께 도로 덮인다. 동현이 힐끗 돌아보니 유경의 표정은 태연하다. 동현이 다시 고개를 돌려 희주와 가위 바위 보를 하는 동안, 유경은 잠시 허공에 뜬 손을 어쩌지 못해 놔두다가 이내 한 움큼씩 잡지를 넘긴다.
“그래? 오랜만에 봤겠네.”
“되게 반가운데, 이상하게 어색하더라.”
“고새 컸다고 티 내긴. 그래서 어디 갔어?”
끝까지 다 넘긴 잡지를 도로 덮고 유경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묻는다.
“근처에 잠깐 볼일 있다고. 좀 있다 같이 저녁 먹자는데?”
유경은 들뜬 동현을 지나쳐 쇼윈도에 가까이 붙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보니 카페엔 현수와 은서만 보인다. 어딜 간 거지. 시선이 돌리려는 순간, 카페 유리창에 반사된 이쪽 건물의 모습이 눈에 잡힌다. 삼층의 휴게실, 거기 미연의 모습이 보인다. 유경이 바라보는 위치로 인해 한 유리창에 웃고 있는 부녀와 웃지 않는 미연이 겹쳐있다.
실재 위에 투영된 그림자란 얼마나 얄팍한지. 미연은 지금 연못에 비친 달을 움켜쥐는 심정일까. 실상 유경 자신도 연못에 비친 지붕 위의 고양이면서.
가슴이 거칠게 긁히는 기분에 유경은 쓰게 웃는다. 평소 창문을 깨끗이 닦는 현수에게 욕이라도 한바탕 해주고 싶은 마음이네. 유경은 한숨을 내쉬며 삼층으로 올라간다.
*
남자와 아이가 창가에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말하는 내내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아이가 입을 오물거릴 때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준다. 그 반응에 아이는 더 신이 나서 제스처가 커진다. 손님이 들어온다. 아이가 벌떡 일어나 메뉴판을 들고 손님이 자리 잡은 곳으로 뛰어간다. 남자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며 카운터로 들어간다. 이내 아이가 돌아와 남자에게 귓속말을 하더니 남자는 기계를 만지고 아이는 냉장고에서 빵을 꺼낸다. 네 개의 손에 메뉴는 뚝딱 만들어진다. 완성된 메뉴를 가지고 잠시 툭탁이던 남자와 아이는 결국 가위 바위 보를 한다. 곧 아이가 만세를 부르고 남자는 머리를 감싸고 주저앉는다. 하지만 그런 것도 무색하게 메뉴판을 들고 가는 아이의 뒤를 남자가 조심스럽게 따라간다. 무사히 메뉴를 내가고, 아이가 남자에게 주먹질을 하며 쫓아가자 남자는 웃으며 도망친다. 그렇게 남자와 아이는 창가로 돌아와, 다시 이야기를 시작한다. 한참 말을 하던 아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창밖을 향해 크게 손을 흔들다. 그 모습에 남자도 함께 손을 흔든다. 남자와 아이의 시선이 닿은 곳은 사거리의 건널목. 분식집의 그 여자가 품에 뭔가를 한 아름 안은 채 길을 건너는 중이다. 남자와 아이를 발견한 여자도 마주 손을 흔든다. 그리고 일층 분식집 앞에서 남자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품에서 커다란 무를 꺼내 흔드는 폼을 보니 저녁 이야기인 듯하다. 여자는 이내 분식집 안으로 들어가고, 아이는 손목을 들여다보더니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 남자에게 몇 마디를 건네고 가게 밖으로 나간다. 길을 건너 옷가게로 들어가는 아이를 보며 남자는 흡연실로 들어가 담배를 빼어 문다. 담배를 피우는 남자는 아까와 또 다른 느낌이다. 열린 창문으로 하얀 연기가 줄지어 피어오른다.
마치 한 편의 무성 연극 같다. 아니, 개입할 여지가 없는 걸로 치면 연극보단 영화였다. 미연은 그 모든 것을 그저 지켜보고만 있다. 낮고 무거운 정적이 귀와 가슴에 먹먹히 스며든다.
*
문을 열자 미연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 옆의 테이블에는 물을 받아놓은 재떨이와 미연이 애용하는 담배 케이스만 놓여있다. 유경은 재떨이 안의 꽁초 개수로 미연이 있었던 시간을 가늠해본다. 문소리에도 미연은 돌아보지 않는다. 인기척은 미연의 지척까지와 멈춰 서고, 곧 알싸하게 퍼지는 담배 향으로 자신을 밝힌다. 미연도 따라 담배를 꺼내 문다. 같은 것을 손에 든 두 여자가 같은 자세로 같은 곳을 바라보는 시간은 한동안 계속된다.
“여기서 뭐하냐?”
유경이 먼저 한숨처럼 연기를 뱉어낸다.
“영화 관람.”
“볼만하냐?”
“음소거로 음악프로 보는 기분이야.”
피식거리는 미연에게서 웃음과 연기가 함께 나온다.
“그건 무슨 기분이야, 도대체?”
“미치겠는데 고개를 못 돌리는 그런 기분?”
유경이 미연의 정수리를 빤히 내려다본다.
“아니면 아픈데 자꾸 만지게 되는 그런 기분?”
“잘났어, 정말.”
유경이 혀를 차며 재떨이에 재를 턴다. 그리고 재떨이를 길게 밀어 마침 떨어지려던 미연의 재도 받아낸다. 자신의 재가 떨어졌는지도 모르고 미연은 건너편만 바라본다. 유경은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 결국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건너편에 시선을 둔다. 남자와 아이가 창가에서 사라지자 그제야 미연의 입도 열린다.
“언제 알았어?”
담담한 목소리를 덤덤한 척하는 목소리가 대꾸한다.
“지난번 너 나가고 나서.”
“어떻게 알았어?”
“쇼윈도에 은서 걸고, 동현이와 희주를 챙겨 창고로 들어가다가.”
재를 털던 미연의 손가락이 잠시 멈칫한다.
“엄마란 참 대단해.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일 가지고 결국 거기까지 유추해내는 걸 보면. 난 눈치는 빨라도 추리력이 좋은 편은 아닌데 말이야.”
유경은 손을 길게 뻗어 재를 털어내며 말을 잇는다.
“동현이 만났다면서?”
“응.”
“지금 애 들떠서 자리에 앉지를 못하더라.”
대꾸 없는 미연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유경이 손을 턴다. 칙, 하고 피어오르기 무섭게 사그라지는 소리로 담배는 재떨이 안에서 젖어든다.
“적당히 하고 내려와. 저녁 먹으러 가야지.”
“응.”
“질질 짜지 말고. 눈 부어서 저녁 먹으러 갈 순 없잖아.”
“응.”
손이라도 잡아 주지 않고, 어깨라도 한 번 두드려주지 않고 유경은 먼저 자리를 뜬다. 계단을 내려가기 전에 슬쩍 돌아본 유경의 눈에, 필터만 남은 담배를 들고 고개 숙인 미연의 뒷모습이 도장처럼 찍힌다.
*
유월 구일
저녁, 혜인의 차
혜인은 하루 종일 미연의 눈치를 보는 중이었다. 아침에 출근했을 때부터 미연은 필요한 말만 하면서 퇴근 시간을 맞이했다. 누구든 말이라도 걸라치면 마치 걷어찰 것 같은 눈으로 쏘아보았다. 결국 다들 자기들끼리 수군거릴 뿐 미연을 건드리지 못했다. 그건 혜인도 마찬가지였다. 퇴근 후 같은 차를 타고 집으로 향하면서도, 혜인 역시 미연에게 말 한마디 붙여보지 못한 상태였다.
혜인의 옆에 앉은 미연은 멀건 눈으로 창밖을 훑고 있다. 그러다 어느 사거리에 멈췄을 때, 미연은 신호가 바뀌는 신호등을 오래 지켜본다. 빨강. 잠깐의 주황. 그리고 녹색. 왼쪽 방향의 녹색 화살표. 다시 주황. 그리고 빨강.
“혜인아.”
미연이 불쑥 혜인을 불렀다. 신호에 걸린 동안 창밖을 향한 미연의 뒤통수를 곁눈질로 훔쳐보고 있던 혜인은 잘못하다 걸린 것처럼 어깨를 움츠렸다.
“네.”
미연은 여전히 창밖을 보며 말을 이었다.
“너한테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빨간색 엄마 인형이 있어.”
“네?”
“근데 어느 날 창고에서 파란색 아빠 인형과 노란색 아이 인형을 찾게 된 거야. 이 기회에 한 가족을 만들어줘야겠다 싶어. 그럼 넌 아빠와 엄마 인형에 맞춰 보라색 아이 인형을 살래, 아니면 엄마와 아이 인형에 맞춰 주황색 아빠 인형을 살래?”
마침 신호가 바뀌고 혜인이 차를 출발하며 대답했다.
“왜요? 그냥 그 셋이 한 가족 하면 되잖아요.”
“색이 안 맞잖아. 색 다루는 애가 왜 그러니.”
혜인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내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이 사람이 이런 특이한 이야기를 하는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었다.
대답을 바란 물음이 아니었는지 그 뒤로 미연은 더 말이 없었다. 미연의 머릿속에서는 색색 별의 인형들이 둥둥 떠다니며 이리저리 섞이고 나뉘길 반복했다. 파란색과 빨간색. 빨간색과 노란색. 삼원색의 조합처럼 여러 가지 색이 만들어지고 사라졌다. 하지만 어떤 색도 미연의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빨강을 어디에 섞어도, 심지어 파랑과 노랑을 섞어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없는 현수와 은서는 빛나는 녹색이었다. 그들에게는 찬란한 색이겠지만, 미연에게는 아픈 색이었다. 마치 파란색 약품을 탄 변기에 노란 소변이 섞인 듯이 찜찜한 녹색이기도 했다.
떠올린 비유조차 말끔히 못해 미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미연은 그동안 자신이 왜 결혼하지 못했는지 깨달았다. 새로 낳을 아이가 자라지 않을 것 같던 두려움 뒤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파악했다. 색이 맞지 않았다. 어린 시절 정해진 미연의 가슴에는 파랑과 빨강과 노랑이 모두 있어야 했다. 현수와의 첫사랑이 끝난 이후로는 최소한 빨강을 제외한 파랑과 노랑, 둘 중 하나는 있어야 했다. 그러니 남색이든 갈색이든 다른 누구를 만날 수가 없었다. 노란 은서와 새 남편이라면 괜찮았다. 아니면 그럴 리는 없겠지만 파란 현수와 낳은 새 아이면 괜찮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현수와 은서가 함께 할 수도 없었다. 그건 이미 끝난 인연이니까.
현수에 대한 마음은 그때 모두 끝났다. 남은 미련도 없고, 다시 해보겠다는 생각도 한 적 없었다. 하지만 그 이후 현수보다 나은 사람을 찾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결혼을 하지 않을 거면 모를까, 한다면 보다 못난 사람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마음이 온통 뒤흔들린 것도, 가슴이 그리 뛰었던 것도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물론 아랫배를 쥐어짜는 사랑 없이도 누군가를 만나 결혼할 수 있었다. 그게 어떤 새로운 남자든. 하고자 하면 같은 집에서 얼마든지 살아갈 수도 있었다. 그게 설령 현수든 누구든. 단지 미연은 그러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미연의 생각이 깊어지는 사이 혜인의 차가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 퍼뜩 정신을 차린 미연이 혜인을 돌아봤다. 움츠린 어깨로 미연의 눈치를 보는 혜인에게 문득 미안해졌다. 미연은 오늘 처음으로 혜인에게 웃으며 인사를 전했다.
“고마워. 내일 보자.”
차에서 내려 현관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혜인의 차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
밤, 미연
불 꺼진 집안은 어둑했다. 그리 크지 않은 거실에 간혹 구름을 벗어난 달빛만 잠시 들렸다 나갈 뿐이었다. 미연은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창틀에 잘린 조명으로 인해, 맨다리를 끌어안은 미연의 절반은 어둠 깊이 묻혔다.
거실 한가운데는 얇은 이젤 하나가 소파에서 TV까지 가는 길목에 버티고 서있었다. 그 위에 걸려 있는 그림 한 장. 지난 미연의 몇 시간은 망연히 그것을 바라보다가 간혹 손을 뻗어 쓰다듬는 것의 반복이었다. 종종 울던 것이 무색하게 이제는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그저 먼 산을 내다보는 것처럼 그림을 바라볼 뿐이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미연의 시계는 제멋대로 흘러갔다. 어느 것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무엇도 가슴으로 느끼지 못하던 시간들. 혜인의 차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온 미연은 지금까지 그대로였다. 휴대전화도 꺼두었다. 씻지도 먹지도 않고 미연은 그저 그림과 마주 앉아 있었다. 주방의 작은 조명과 TV마저 전부 꺼버렸는데 오히려 그것이 영화관처럼 되어버렸다. 어제 삼층 테라스에서 봤던 무성영화가 그림 위에서 끊임없이 상영되었다. 미연은 멀거니 그것을 보다가, 끝이 나면 비디오를 앞으로 돌리듯이 잠시 그림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시작. 그것이 반복될수록 미연이 앉은 소파 옆에는 젖은 휴지와 꽁초가 쌓여갔다.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 같던 그 시간도 결국 끝이 났다. 어느 순간 더 이상 무성영화가 상영되지 않자 미연은 스스로 정한 시간이 다 채워졌음을 느꼈다. 낯빛이 암울하게 가라앉은 미연은 담배를 하나 더 빼어 물었다. 불을 붙여 연기를 피워 올리고, 여러 번 그것을 빨아내다가 옆의 젖은 휴지 위에 비벼 껐다. 그 사이 눈물 한두 방울이 무릎 위로 떨어졌다. 휴지를 뽑아 그것을 닦아내고 방금 버린 꽁초 위에 던져놓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으로 들어가 불을 켜자, 주인에게 방치된 집안 곳곳은 무질서가 멋대로 쌓여있었다. 제멋대로 말려있는 이불은 곰팡내가 났고, 화장실로 걸어가는 길목은 벗어놓은 옷들이 지뢰처럼 발치에 걸렸다. 미연은 그 자리에 입고 있던 옷을 벗어놓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샤워기를 걸고 물을 틀었다. 그리고 보일러가 데워지기도 전에 머리부터 들이밀었다. 차가운 물이 두피를 타고 머리카락과 어깨를 거쳐 발뒤꿈치까지 달려갔다. 소름 돋은 손으로 한 올씩 정성스레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고, 몸도 구석구석 꼼꼼히 닦은 미연은 화장실에서 나왔다. 서랍장에서 속옷을 꺼내 입고, 새로운 스타킹을 뜯어서 신고, 그 차림으로 화장대에 앉아 공을 들여 화장을 했다. 기초와 크림을 바르고 눈과 입술까지 찍고 나니 그것만으로 퀭하고 푸석한 여자는 사라졌다. 젖은 머리를 충분히 말리고 옷장을 열어 예식용 정장을 꺼내 입었다. 이 주 전에 입었을 때보다 치마가 헐렁한 것이 그새 살이 빠진 것 같았다.
옷매무새까지 가다듬고 전신 거울 앞에 서자, 친구 결혼식장에 갈 법한 여자가 보였다. 미연은 몸을 이리저리 돌려 이상한 곳이 없는지 살펴보고, 화장대 서랍에서 몇 개의 핀을 꺼내 머리를 틀어 올렸다. 좌우에 두 개씩, 뒤통수 위아래에 하나씩 고정하고, 마지막으로 커다란 나비 모양 집게로 올린 머리를 잡았다. 그리고 뒤통수 아래에 고정해놨던 핀을 도로 빼서 화장대에 올려놓고, 휴대전화가 든 작은 파우치와 쇼핑백 하나를 들고 집을 나섰다.
아직 할증이 붙지 않을 시간. 하이힐 소리와 함께 도로에 서자, 택시 한 대가 머뭇거리다가 미연의 앞에 와서 섰다. 그리고 미연을 태우고 출발했다. 택시는 작은 도로에서 넓은 도로를 거쳐 한강과 나란히 달리기 시작했다. 이 시간에 차려입고 멀리 나가는 여자의 정체가 궁금했는지 기사가 몇 마디 붙여보지만, 지나가는 가로등에 비친 미연의 얼굴은 묵묵부답이었다.
들뜬 공기가 자리를 잡고 한 겹 가라앉는 시간. 원래 유동인구가 많지 않은 사거리는 자정이 가까워지자 사람도 차도 뜸해졌다. 그 한복판에 주황색 택시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차선을 애매하게 점거한 택시 꼬리에 비상등이 들어오고, 이내 뒷좌석에서 미연이 내렸다. 그리고 다른 때처럼 어물거리거나 멈춰있지 않고, 횡단보도를 향해 직선으로 걸어갔다. 고개를 돌려보니 유경의 가게는 이미 닫혀있었다. 반대로 돌려보니 카페도 깜깜했다. 미연은 예상했다는 듯 유경의 가게 쪽으로 걸어가며 손 안의 휴대전화를 켰다. 전원이 들어오자마자 쏟아지는 문자들과 부재중 전화. 전부 무시한 미연은 목록에서 유경의 번호를 찾았다. 그러다 문득, 카페를 다시 올려다봤다. 작은 전등이 켜져 있고, 얼핏 사람 실루엣이 보였다. 아까 사거리에서는 각도로 인해 보이지 않았던 불빛이었다. 미연은 누르던 번호를 지우고 길을 건너 카페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철제 계단을 하나씩 올라갈 때마다 높은 하이힐 소리가 울렸다. 개선장군처럼 여기까지 왔는데, 올라갈수록 미연의 다리는 점점 흔들렸다. 출입문 앞까지 겨우 올라가니 깜깜한 배경 위로 미연의 얼굴이 유리창에 비췄다. 내심 마음을 잡고 왔음에도 잔뜩 긴장한 얼굴. 미연은 딱딱하게 굳은 눈꼬리를 한동안 들여다봤다. 지금 내게 무엇이 남았을까. 그 생각이 들자 피식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모든 것을 순리에 맡기기로 하였지만 미연이 할 수 있는 준비는 턱없이 부족하기만 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미뤄둘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유리에 비친 자신과 마주 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미연의 표정은 점점 가라앉았다. 가면을 계속 덧씌우다 이내 담담해 보이는 얼굴이 되었을 때, 미연은 출입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적막한 가게 안으로 방울 소리가 울렸다. 마감을 끝낸 듯 불 꺼진 실내와 비어있는 테이블. 카운터 쪽의 작은 LED 조명 아래에는 현수와 은서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현수만 있기를 바랐는데. 반갑지만 지금은 거북스러운 은서의 존재. 며칠 전과는 반대의 마음.
미연은 놀란 눈의 부녀를 보며 살짝 웃었다.
*
밤, 은서
“오늘따라 아이스크림이.”
“안 돼. 살쪄.”
“아직 말도 다 안 끝났는데.”
현수의 우는 시늉에도 테이블을 정리하는 은서의 손은 망설임이 없다. 쟁반 위로 빈 잔을 한데 모으고, 들고 간 행주로 테이블을 닦으며 은서는 말을 잇는다.
“분명 한 개만 먹는다고 해놓고 가면 또 잔뜩 살 거잖아.”
“한 개 가지고 기별도 안 간단 말이야. 적어도 두 개는 먹어줘야지.”
“안 돼. 살쪄.”
“아빠는 원래 살 안 찌는 체질인 거 알잖아?”
“근데 나는 왜 이렇게 잘 찌냐고!”
쟁반을 들고 온 은서가 카운터 한쪽에 행주를 팩 던져버린다. 설거지를 하던 현수가 놀라서 급하게 고개를 돌려보니 은서는 싱글벙글 웃고 있다. 진짜 화난 게 아니라 장난치는 거구나. 현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뒤로 지나가는 은서를 어깨로 툭툭 건든다.
“우리 은서는 한 개만 먹고, 아빠는 두 개 먹고.”
“아빠 먹으면 나도 먹고 싶단 말이야!”
“알았어. 그럼 진짜 한 개만 먹을게!”
“참나. 잘도 그러시겠어요, 아버님.”
은서가 웃으며 현수의 등을 세게 밀치고 지나간다. 아이쿠. 현수는 과장되게 비틀거리며 설거지를 마무리하고 수도꼭지를 잠근다. 걸어놓은 행주에 손의 물기를 닦아내고 카운터 밖으로 나오니 은서는 금연석 구석에서 삐져나온 테이블과 의자를 정리하는 중이다. 현수가 카운터 쪽 조명 하나만 남기고 다른 불들을 전부 꺼버리자, 캄캄해진 금연실에서 은서가 비명을 지른다.
“이럴 거야?”
“아이스크림!”
“안 돼!”
“아이스크림!”
은서가 씩씩 거리며 달려 나오니 현수는 괴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테이블 사이로 요리조리 도망간다. 얼마쯤 쫓아가던 은서는 지쳤는지 유경이 자주 앉는 카운터 앞 높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아빠가 하도 노래를 부르니, 이젠 내가 먹고 싶잖아요.”
“그것을 노린 거지.”
현수는 도망간 곳부터 창문을 하나씩 닫으며 카운터로 들어온다. 마감 정리는 끝이 났다. 앞치마를 벗어 카운터 한쪽에 걸어놓고, 아래 숨겨놓은 은서의 가방을 꺼내 주니 은서는 그것을 건네받으며 입을 연다.
“이모네 자려나?”
“그 야행성이 이 시간에 설마.”
“하긴. 동현 오빠도 오늘 늦게 끝난다니까.”
“그럼 희주까지 아직 안 자고 있겠네. 아이스크림 사서 잠깐 들렀다 갈까?”
“아무튼 핑계는.”
타박을 놓으면서도 이미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는지 은서의 표정은 풀려있다. 그 반응에 현수는 신이 나서 결제용 컴퓨터를 끈다. 은서도 일어나서 가방을 둘러메는데 순간 가게의 정문 입구에서 딸랑, 방울 소리가 울린다. 마감 시간을 모르는 지나가는 손님인가. 순간 둘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가 동시에 입구 쪽으로 향한다. 부드럽게 거절하려는 두 사람의 눈은 이내 들어오는 사람에게 멈춘다. 잠시의 간격이 있고 나서 은서가 먼저 입을 연다.
“어!”
“안녕.”
놀란 목소리를 미연은 부드럽게 받아준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약속 지키러 왔지.”
약속이라는 단어에 은서의 눈빛이 의문스러워지자 미연은 한 마디를 덧붙인다.
“그때 커피 마시러 온다고 했잖아.”
기억이 난 듯 끄덕이면서 은서는 현수의 눈치를 본다. 현수의 표정은 놀란 것도, 그렇다고 의문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그냥 낮게 가라앉은 눈빛. 최근 종종 보아오던 낯선 얼굴이었다.
“은서야.”
“네?”
“먼저 들어갈래? 아빠는 커피 한 잔 드리고 갈게.”
둘이서요? 라는 말이 울컥 튀어 오르다가 목구멍을 넘지 못하고 다시 가라앉는다. 그 말을 끝낸 현수는 카운터 안으로 들어간다. 고개를 돌려보니 미연은 그저 웃고만 있을 뿐이다. 잠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은서는 이내 카운터 위에 놓인 자신의 휴대전화를 챙겨 주머니에 넣는다.
“그럼 먼저 가볼게요.”
대상이 불분명한 인사를 하고 은서는 미연과 눈을 맞춘다. 미연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미연을 지나치며 카운터 안쪽을 슬쩍 들여다보니 에스프레소 기계 앞에 선 현수의 등이 보인다.
“아빠.”
왠지 불안한 마음에 현수를 불러본다. 돌아선 현수는 평소처럼 웃고 있다.
“우리 은서, 좀 있다 아빠가 아이스크림 사서 갈게.”
“알았어요.”
은서는 겨우 대꾸하고 가게를 나온다. 한 칸씩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니 금세 일층이다. 가게에서 멀어질수록 은서의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진다. 내가 있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같이 이모 집에 가기로 했는데, 아이스크림은 어쩌지? 이모한테 연락해볼까? 이 시간에 갑자기 웬일이지? 수진 언니는 어떡해? 꼬리를 무는 생각 마지막에 엉뚱한 것이 끼어든다. 습관적으로 이층 창문을 슬쩍 올려다보니 조명은 LED에서 할로겐으로 바뀌어서 선명한 백색 대신 은은한 주황빛만 창밖으로 새어 나온다. 은서는 고개를 거둬 건널목을 향해 몇 걸음 더 걸어가다 그 자리에 멈춰 선다. 다시 돌아본 이층에는 하얀 연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은서는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 왔던 걸음을 다시 돌아간다.
*
밤, 현수
들어온 사람이 미연임을 확인한 순간부터 현수의 눈은 미연에게 머물러있다. 순간적으로 너무 많은 생각들이 휘몰아쳐 얼굴이 쩍쩍 갈라지는 기분이다. 표정을 숨기기 위해 현수는 서둘러 카운터 안으로 들어온다. 껐던 기계를 다시 켜고 한동안 그 앞에 서있으니 등 뒤 은서의 목소리가 들린다. 웃는 얼굴로 돌아보니 은서의 얼굴에는 불안이 가득하다. 다독이며 은서를 먼저 보낸다. 나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안 열리고 닫히는 문. 한 칸씩 내려가던 은서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순간 현수의 속에서 불길이 치밀어 오른다. 미연의 등장으로 평온하던 삶이 빠르게 일그러지고 있다. 미연이라는 존재는 모든 평면을 입체처럼 바꾸어버린다. 평화로운 풍경을 그린 유화 속을 각진 조각상 하나가 제멋대로 뛰어다니는 꼴이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미연은 처음 있던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있다. 눈이 마주치자 이글거리는 현수와 상반되게 미연은 담담하다.
“거기서 뭐해? 앉아.”
한 글자씩 씹는 것처럼 내뱉으니 미연은 그제야 방금 은서가 앉아있던 그 자리에 앉는다. 옆자리에 쇼핑백을 두고 자신의 오른쪽에 파우치를 내려놓다가 그 옆에 있는 현수의 담배에 시선이 멎는다. 말도 없이 하나 쓱 빼내어 입에 물더니 순간 깨달은 듯 눈으로 주변을 뒤적인다. 그 모습에 현수는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카운터 위에 소리 나게 내려놓는다.
“참 대단해.”
현수의 말에 미연은 대답하지 않고 라이터를 주워 든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종잡을 수 없는 여자야.”
“칭찬이야?”
연기와 함께 미연이 내뱉듯 웃는다. 현수는 대꾸하기 싫다는 듯 거칠게 담뱃갑을 낚아챈다. 자신도 하나 빼어 물고 미연이 내려놓은 라이터로 불을 붙인다. 그리고 싱크대에 기대앉는다. 담배가 타들어가는 잠시 동안 둘 다 말이 없다.
“커피 한 잔 하러 왔어. 그렇게 화낼 건 없잖아?”
“정 먹고 싶으면 다른 데서 먹어! 당신이 지금 이 시간에 여길 왜 와!”
노래하듯 낮게 울리는 미연의 목소리에 현수는 버럭 소리를 지른다. 놀란 표정도 없이 미연은 아래로 연기를 길게 뱉어내고는 씩씩거리는 현수를 똑바로 바라본다.
“약속했거든.”
“무슨 약속?”
“은서한테. 커피 마시러 오겠다고 했어.”
태연한 목소리에 현수의 왼쪽 눈 밑이 거칠게 떨린다. 조금씩 끊어가며 대꾸하는 목소리가 거칠게 갈라진다.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은서랑 약속을 해?”
“커피 안 줄 거야?”
담배를 비벼 끄며 다른 소리를 하는 미연의 모습에 현수의 머리는 새하얗게 달아오른다.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던져 버리고 같이 죽어버릴까. 파괴적인 생각들이 머리를 가득 채운다. 누가 되었든 먼저 입을 여는 순간 현수는 터져버릴 것이다. 십육 년 동안 쌓아두고 억눌렀던 모든 감정들이 사방으로 폭발해서 지금껏 지켜온 모든 것을 무너트릴 것 같다. 잠시지만 은서마저 잊어버릴 만큼 화가 난 현수의 눈에 담배를 끄는 미연의 손이 들어온다. 태연한 얼굴에 비해 담배를 든 손끝은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떨리고 있다. 한 번에 잘 꺼지지 않은 꽁초가 재떨이 안에 담긴 원두 가루들을 밖으로 밀어내는 중이다. 그것을 보는 순간 현수는 빠르게 식어 내린다. 몇 번 재떨이를 뒤적이던 미연은 현수의 시선이 머문 곳을 확인하고는 급하게 카운터 아래로 손을 숨긴다. 현수는 고개 숙인 미연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자신의 꽁초도 재떨이에 비벼 끈다. 간단하게 손을 헹구고, 기계에서 에스프레소를 뽑아낸다. 생각해보면 미연은 옛날부터 저랬다. 자존심에 강한 척은 하지만 속으로는 늘 다른 사람보다 더 떨고 있는, 지극히 내유외강인 사람. 연애 초기 그 점에 대해 잘 모를 때 참 많이 싸워야 했다. 한 번은 머리끝까지 열이 오른 현수가 정말 짐승처럼 화를 냈을 때, 겉으로는 태연한 척 버티던 미연은 결국 그 자리에서 쓰러져버렸던 일도 있었다. 그리고 다시 제대로 대화를 하기까지 거의 한 달 동안, 현수가 무슨 말이라도 할라치면 미연은 이미 울어버렸다. 물을 끓이고 커피를 만드는 동안 현수는 빠르게 자신을 정리했다. 미연은 무엇인가 할 말이 있어 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또 그녀에게 중요한 말일 것이다. 표현이 적을지라도 허투루 행동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현수는 묵묵히 커피를 만드는 동안 미연 역시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내 커피 두 잔이 그들 앞에 놓인다. 미연이 현수 앞에도 놓인 커피 잔에 시선을 둔 사이에 현수는 덤덤해진 얼굴로 미연의 맞은편에 자리 잡는다.
“잘 마실게.”
“조심히 마셔.”
무미건조한 문과 답. 미연은 커피 잔을 들어 슬쩍 입에 가져다 댄다. 방금 나온 거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커피는 따듯한 정도이다. 여전히 세심한 배려에 미연의 입 꼬리가 슬쩍 올라간다.
“왜?”
“뭐가?”
“왜 웃어?”
“아니. 여전히 맛있어서.”
맥없는 미연의 말에 치켜 올라갔던 현수의 눈꼬리가 다시 내려온다. 그렇게 잠시, 미연이 커피를 마시고 현수가 새로운 담배를 태우는 동안 둘은 말이 없다. 이내 재떨이에 두 번째 담배를 끄는 현수에게 미연이 먼저 말을 꺼낸다.
“원래 이 시간에 닫아?”
“아니.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늦었어.”
“왜?”
“은서랑 놀다가.”
“은서도 같이 마감하는 거야?”
“그럴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고.”
미연은 잠시 머뭇거리며 묻는다.
“은서 학원 안 다닌다면서?”
“원래 올해 초까지 다녔는데, 그만 둔지 몇 달 안됐어.”
“왜?”
“혼자 하는 게 더 편하다고 해서.”
현수의 말에 미연은 뭐라 말을 덧붙이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금세 다시 다문다. 그 모습을 보고 현수가 변명하듯 말을 잇는다.
“요즘 학원 안 다니는 애들 거의 없긴 하다는데. 은서가 허튼소리 하는 애는 아니라서.”
“그래. 본인이 알아서 잘 결정했겠지.”
그 말을 끝으로 둘은 담배 하나씩을 빼어 문다. 미연이 뒤늦게 불을 붙이는 동안, 현수는 둘 사이로 재떨이를 끌어온다.
“어떻게 지냈어?”
조심스러운 현수의 목소리에, 미연은 잠시 담배를 든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린다.
“별 거 없었어. 지난 십 년은 한국과 외국을 오가면서 회사 생활을 했고, 입사 전에는 프랑스에서 대학을 다녔고. 고등학교 졸업하고는 일 년 쉬었고. 당신은?”
“나는 그때 졸업하고 은서 키우면서 닥치는 대로 일 했지. 그러다가 연이 닿아서 수행비서로 몇 년 있다가, 돌아가시고 나선 이 가게 열었고. 보자, 벌써 구 년째네.”
“누구랑?”
“예전에 내 할아버지께 신세를 지신 분이셨는데, 내가 은서 업고 뛰어다닐 때 갑자기 나타나셨어.”
“그렇구나. 어디 아픈 데는 없고?”
“응. 당신은?”
“나도 그다지. 은서는?”
“은서도 건강해.”
“예쁘더라.”
“예쁘지. 얼굴은 당신 닮았잖아.”
“밝고 싹싹한 성격은 당신 닮았나 봐.”
흘러가는 연기를 타고, 탁구를 치는 듯 짧은 문답들이 계속 이어진다.
“결혼은 했어?”
“아직. 당신은?”
“은서 키우느라 정신이 없어서. 당신은 왜?”
“나도.”
말을 흐리는 미연의 대답에 재떨이를 향하는 현수의 손이 잠시 멈칫 하지만, 이내 다시 재를 털어내며 묻는다.
“그럼 쭉 혼자였어?”
“할 뻔은 했는데 하진 못했어.”
“유경 씨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야?”
“대학 선배.”
“아. 유학도 갔다 왔나 보네, 그 아줌마.”
“둘이 친한가 봐.”
“아무래도. 동지애가 있으니까.”
“어떻게 알게 됐는데?”
“처음에 은서가 실수를 좀 해서. 싸우다가 정들었지.”
“니트?”
“들었나 보네.”
현수의 대답에 미연은 옆자리에 놔두었던 쇼핑백을 카운터 위에 올려놓는다.
“뭐야?”
“은서 선물.”
현수는 어제 은서가 들고 온 허브를 떠올린다.
“티tea야?”
현수의 말에 미연의 표정이 연한 의문으로 물든다.
“언니가 말했을 리는 없는데.”
“뭘?”
“아냐. 티T 맞아.”
미연은 고개를 끄덕인다. 눈으로만 슬쩍 쇼핑백을 훑던 현수는 건드리지 않고 시선을 거둔다. 사정 청취 같은 건조한 문답은 잠시 끊어진다. 현수는 담뱃값에서 새로운 담배를 하나 꺼내고, 남은 갑을 미연에게 슬쩍 내밀자 미연은 작게 고개를 저으며 커피 잔을 든다. 현수가 담배를 태우는 동안, 미연은 두어 모금 머금으며 생각을 정리한다.
“참 간단하네.”
원두 가루에 재를 깎아내던 현수가 불쑥 입을 연다.
“뭐가?”
“말 몇 마디로 얼추 지난 십육 년을 추려내는 게.”
“서로 별 일이 없었으니까.”
담담한 미연의 대꾸에 현수는 피식 웃는다.
“그래. 우리가 길게 말할 사이도 아니고.”
“그러게. 이런 얘기 하러 온 것도 아닌데.”
“그럼 무슨 얘기 하려고 왔는데?”
낮게 가라앉은 현수의 목소리에 미연은 커피를 홀짝이며 뜸을 들인다.
“오늘 무슨 얘기 하려고 왔는데?”
현수는 들고 있는 담배를 버리고 새로운 것을 꺼내며 참지 못하고 덧붙인다. 그럼에도 미연은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답답한 지 두어 번 거칠게 라이터를 튕기자 발간 불꽃이 솟아올랐다. 담배 끝에 옮긴 후 내려놓고, 현수는 양팔로 카운터를 짚으며 상체를 슬쩍 앞으로 기울이며 묻는다.
“뭔데?”
“그냥. 보고 싶었다고.”
“뭐?”
불시에 펀치라도 맞은 양, 앞서던 현수의 상체가 슬쩍 뒤로 빠진다. 이 여자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그런 표정으로 미연을 노려보자 미연은 웃으며 현수와 눈을 마주친다.
“한 번 보고 싶었어. 당신도, 그리고 은서도. 잘 지내는지도 궁금했고. 어찌 지내는지도 궁금했어.”
현수는 힘이 빠진 듯 싱크대에 기대 앉는다.
“지난번 지나가며 보고, 오가면서 듣기도 했지만 실제로 보고 직접 대답도 듣고 싶었어. 생각보다 잘 지낸 것 같아 다행이네.”
정말 별 거 아니라는 식으로, 미연의 목소리는 가볍다. 고개를 처박고 잠시 대꾸가 없던 현수는 이내 조그맣게 중얼거린다.
“생각보다 잘 지낸 것 같아 다행이라고?”
부들부들 떨리는 현수의 목소리를 담담하게 받아내며 미연은 말을 잇는다.
“그리고 갑자기 이런 말 하는 건 좀 그렇지만.”
미연은 이글거리는 현수의 눈과 똑바로 마주 보며 말한다.
“은서, 나 달라고 하면 줄 거야?”
현수는 잠시 말이 없더니, 이내 고개 숙인 어깨가 잘게 떨려온다. 그러다 갑자기 벌떡 일어난다.
“너! 이…….”
미연을 내려다보는 현수의 눈은 핏발이 가득 서있다. 현수는 절규하듯 고함을 질렀다.
“그게, 그게 우리 둘을 버리고 간 당신이! 당신이 할 말이야?”
“역시 안 되겠지?”
반쯤은 예상했다는 태연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지만, 미연의 손에 쥐어진 커피 잔은 이미 달그락달그락 흔들리고 있다.
*
밤, 동현
뭘 했다고 벌써 자정 무렵이다. 공부에 뜻이 없어 하루 종일 무엇을 했는지 벌써 기억에도 없다. 하지만 그래도 학교는 가고 학원도 다녀오는 게 대한민국 고등학생이다. 우르르 몰려나가는 애들과 달리 동현은 느릿하게 가방을 챙겨 강사보다 늦게 교실에서 나온다. 이놈의 학원 때려치우겠다고 하면 마녀가 가만히 안 있겠지. 그것도 그렇지만 지금 당장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딱히 할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무엇을 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더 괴롭고 힘들다. 비싼 돈으로 딱딱한 의자를 빌려 하루 몇 시간씩 갇혀 있는 것이 나을 정도로. 하지만 그 시간을 지나도 남는 것이 없다. 그래서 건물 출구로 나오는 동현의 표정은 평소보다 더 뚱했다.
좀 걷고 싶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는 타지 않았다. 학원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이십 분. 여름밤에 적당히 걷기 좋은 거리이다. 동현은 가방을 둘러메고 학원 옆 시장 길로 들어선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라 몇 개의 술집을 제외하고는 어두운 골목. 학교나 병원, 시장처럼 낮에 활기찬 장소일수록 밤은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동현은 이런 분위기를 좋아한다. 들떠있던 공기가 차분히 가라앉아 익숙하지 않은 풍경. 순간 담배가 생각났으나 아무리 사람이 없어도 교복을 입고 걸어가면서 담배를 피우기는 좀 꺼려진다. 집 앞 놀이터에서 피우고 들어가면 냄새가 많이 날 텐데. 여기서 피우고 가야겠다 싶어 시장 골목 한쪽으로 들어가는 와중에, 주머니 속 휴대전화가 낮게 울린다.
“왜?”
“어디야?”
전화기 너머 유경의 목소리가 높게 울린다.
“시장이야.”
“버스 안 타고 왜?”
“걸어가게.”
“담배 피우고 있냐?”
그 말에 담배를 꺼내던 손이 멈춘다. 담배를 피운다는 것을 서로 알고 있지만, 괜히 현장에서 들킨 것 같아서 마음이 철렁한다.
“아니. 왜 전화했어?”
“올 때 아이스크림 사 와.”
“나 지갑 안 가져왔어.”
동현의 대꾸에 유경이 크게 혀를 찬다.
“직접 사 먹어. 손이 없어 발이 없어.”
“희주도 먹고 싶대.”
“괜히 멀쩡한 애 팔지 말고. 희주 지금 자고 있을 시간인데 무슨 소리야.”
동현의 말에 전화기 너머는 잠시 조용했다가 이내 “오빠!”라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희주야. 왜 아직 안 잤어?”
“엄마랑 텔레비전 보고 있었어!”
“안 졸려?”
“응! 근데 엄마가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고 하래!”
“알았어. 오빠가 가서 얼른 사줄게.”
동현의 입에서 원하는 말이 나오자 유경이 냉큼 끼어든다.
“빨리 와라.”
“시끄러워.”
동현의 뿔난 목소리에 유경은 웃으며 전화를 끊는다. 왠지 담배를 피우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 동현은 도로 주머니에 욱여넣고 길을 마저 걷는다.
시장 어귀를 빠져나와서 몇 개의 골목을 더 가로지르니 유경의 가게가 있는 거리가 나왔다. 생각 없이 지나치려고 하는데 문득 현수의 카페에 아직 불이 켜져 있는 것이 보인다. 삼촌이 아직 퇴근 안 하셨나? 아니면 이 아줌마도 저기 있나? 동현은 카페 쪽으로 걸어가면서 다시 휴대전화를 꺼낸다.
“난데. 지금 삼촌 카페야?”
“아니. 집인데.”
“그래? 카페 아직 불 켜져 있어서 혹시 거기 있나 하고.”
“잘됐네. 지금 마감하면 아이스크림 사들고 오라고 그래.”
그래 놓고는 유경은 전화를 툭 끊어버렸다. 삼촌이 시종도 아니고. 툴툴거리면서도 내심 은서도 있을까 싶은 마음에 카페 입구로 다가간다. 입구 앞에 조명을 등지고 작은 사람이 쪼그려 앉아 있다. 누구지 싶었는데 더 다가가니 은서였다.
“여기서 뭐해? 이제 마감…….”
퍼뜩 고개를 든 은서의 표정을 본 동현은 순간 말을 잇지 못한다.
“웬일이야? 아. 학원 끝났구나.”
“어. 근데 여기서 뭐해?”
“아빠 기다려.”
“근데 왜 여기 있어?”
은서는 대답 없이 웃는다. 그 얼굴에 동현은 왠지 마음이 낮게 가라앉는다. 어쩔까. 더 물어볼까. 아니면 그냥 입을 다물까. 고민하던 동현은 결국 그냥 입을 다문다.
“오빠는 웬일이야?”
“학원 끝나고 집에 가다가, 가게에 불이 켜져 있어서.”
“맞다. 방금 물어봤지.”
은서는 왠지 조금 횡설수설하는 것 같다. 걱정된 동현이 괜찮으냐고 물어보려는데, 은서가 조금 더 빠르게 말을 잇는다.
“난 아빠 기다렸다가 같이 갈게. 오빠 먼저 들어가.”
은서의 축객에도 동현은 잠시 그 자리에서 머문다. 이미 아이스크림 생각은 저 멀리 사라졌지만, 은서의 표정이 마음에 걸려 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괜찮은 거지?”
동현의 말에 은서는 무슨 말이냐는 듯이 올려다본다. 그때 은서의 눈가에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진다. 은서가 서둘러 눈가를 가린다. 그 모습에 놀란 동현이 급하게 한 걸음 다가간다.
“왜 울어? 진짜 무슨 일 있어?”
고개를 숙인 은서에게서 아무런 대꾸가 없다. 그러다 잠시 후, 아주 조그마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둘이 서있는 모습을 봤을 때 알겠더라. 이렇게 셋은 안 되겠구나 하고.”
동그랗게 웅크린 은서의 어깨가 바르르 떨린다.
“나는 둘 다 존중해. 우린 셋이 모두 원하지 않으면 함께 있을 수가 없어. 셋이 아니라면 나는 지금처럼 살래. 그러고 싶고, 그래야 해. 하지만 포기하는 건 아니야. 그럴 수가 없어. 셋은 안 되지만, 둘과 둘은 될 거잖아.”
동현의 손이 앞으로 나서다 멈춘다. 동현은 차마 손대지 못하고 그저 서있다.
“둘과 둘과 둘일 수는 없지만, 이렇게 둘과 저렇게 둘은 되겠지. 그럼 그건 셋이라고 치면 안 될까. 온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셋이라고 하면 안 되나.”
은서의 목소리는 바람에 촛불이 꺼지듯 점차 사그라진다. 동현은 이를 악 무는 걸로 섣불리 벌어지려는 입을 간수한다. 건드리지 말고, 말을 걸지도 말고. 그저 독백극을 보는 관객처럼, 혼잣말 앞에 서있는 인형처럼 그렇게 하자. 동현의 억눌린 마음이 허공에서 정처 없이 나부끼는 동안 은서가 먼저 눈가를 훔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미안해. 괜찮으니까 오빠 먼저 가. 난 아빠랑 같이 가야 해.”
내가 아빠랑 같이 가야 해. 은서는 어느새 웃는 얼굴로 동현의 등을 떠민다. 동현은 별 수 없이 떠밀려 큰길로 내려온다. 집 쪽으로 걸어가며 몇 번씩 뒤를 돌아봐도 은서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크게 손을 흔들고 있다.
결국 동현은 심란한 마음으로 건널목을 건넌다.
*
밤, 유경
TV에선 지금 막 짜장면이 도착했다. 주인공인 여자는 그릇의 비닐을 벗기고 능숙하게 양념과 면을 비빈다. 그 손놀림에 유경과 희주의 고개가 함께 움직인다. 꿀꺽. 모녀가 동시에 침을 삼키는데 그때 번호 키 기계음과 함께 현관문이 열린다. 그 소리에 희주는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달려간다.
“오빠!”
“우리 희주, 잘 놀고 있었어?”
“응!”
달라붙는 희주를 안아 들고 동현이 안으로 들어서자 거실에서 대자로 누워있던 유경은 상체만 벌떡 일으켜서 동현에게 소리친다.
“짜장면!”
그에 들어오던 동현의 한쪽 눈썹이 쑤욱 올라간다.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짜장면?”
“아니, 지금 TV에서 나오기에. 근데 아이스크림은? 콜라는?”
“지금 아들이 들어왔는데 아들보다 먹을 거 세 개가 먼저야? 게다가 콜라는 또 뭐야?”
동현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변을 살피던 유경은, 동현의 손이 비어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실망하며 도로 자리에 눕는다.
“뭐야. 없잖아. 근데 현수는?”
“빨리도 찾는다. 근데 삼촌이랑 은서 오늘 싸웠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까 가게로 갔는데 일층에 은서 혼자 앉아있더라고. 아빠 기다린다는데.”
“근데 왜 거기서 기다려?”
“그래서 물어봤는데 대답을 안 해. 같이 기다릴까 했는데 은서가 먼저 가라고 해서 먼저 왔어.”
“근데 그게 싸운 거랑 무슨 상관이야?”
“아니, 은서 울던데.”
“네가 울렸냐!”
“오빠 나쁘다!”
유경이 힘차게 동현을 가리키자, 곁에 서있던 희주도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유경을 따라 한다.
“내가 울린 거 아니야! 그냥 갑자기 울면서 뭐라더라, 둘이 서있는 걸 봤을 때부터 셋은 안 되겠다? 아무튼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나 먼저 가라고 등 떠밀잖아. 나도 그래서 아무것도 모른 채로 왔어.”
“그럼 내 아이스크림은!”
“몰라! 알아서 해! 안 그래도 심란한데.”
동현은 울컥한 마음에 문을 쾅 닫고 방으로 들어간다. 중간에 서있던 희주는 닫힌 방문을 잠시 지켜보다가 유경에게 묻는다.
“엄마. 오빠 화났어?”
“아니야. 희주가 들어가서 볼에 뽀뽀해주면 금방 풀릴 거야.”
유경은 희주를 동현의 방에 들여보내고 자리에 풀썩 드러눕는다. 뭐야, 또. 괜히 명치 부근이 시큰한 게 느낌이 좋지 않다. 양손으로 머리를 벅벅 긁던 유경은 잠시 후 벌떡 일어난다. 얇은 외투를 챙겨 입고 머리를 빗고 휴대전화와 지갑을 챙기는데 방에서 희주가 나온다.
“엄마! 어디 가!”
“엄마 가서 아이스크림 사 온다!”
“와! 아이스크림!”
“금방 다녀올게. 오빠랑 놀고 있어!”
희주의 볼에 뽀뽀해주고 유경은 밖으로 나선다. 생각을 정리하기에 상가까지는 금방이다. 만약 미연이 와있는 거라면 유경이라 한들 가서 뭘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하물며 남이 낄 자리도 아니었다. 유경은 잠시 상가 앞에 서서 갈팡질팡한다. 그냥 현수랑 은서랑 다툰 거면 좋으련만. 가서 은서만이라도 데려올까. 그렇게 혼자 초조하게 상가 앞을 왔다 갔다 하는데 순간 누군가가 유경을 부른다.
“아니, 옷가게 사장 아니여?”
퍼뜩 고개를 돌려보니 수진의 어머니가 순대 한 아름을 품에 안고 유경을 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지금 들어가시는 거예요?”
“응. 이거 누구 좀 주고. 근데 옷가게 사장은 여기서 뭐혀?”
“전 아이스크림 좀 사러 나왔어요.”
“나이 먹고 입맛은 애 같어. 이 오밤중에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서 나온 거여?”
“하하. 네. 그렇게 됐네요. 근데 오늘 늦게 끝나셨네요?”
“열 시쯤부터 손님은 없었는디, 수진이랑 수다 좀 떨다 보니까 시간이 이렇게 됐네.”
“그럼 수진 씨는요?”
“몰러. 아까 무슨 볼일 있다고 이층 카페 올라가던데?”
그 말에 유경은 화들짝 놀란다.
“언제요? 그게 언젠데요?”
“방금? 한 오 분 십 분 됐나?”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희주 기다리는데. 어머니. 저 얼른 아이스크림 사서 들어갈게요!”
“응? 그려, 내일 봐.”
유경은 서둘러 수진의 어머니를 보내고 상가 안으로 들어온다. 일층 슈퍼에서 되는 대로 아이스크림 몇 개를 주워서 계산을 한다. 일이 꼬이려니 이렇게 꼬인다. 유경은 수진이라도 데려올 심산으로 서두른다. 마음이 급한 유경은 영수증도 제대로 받지 않고 상가를 벗어난다. 핑곗거리를 품에 안고, 자연스러워 보이기 위해 멜론 맛 하나를 얼른 까서 자신의 입에 물린다. 지금 이게 잘하는 짓일까. 확신은 없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맞닥뜨린다면 누군가는 크게 상처 입는 것으로 끝이 난다. 유경이 감정을 다듬으며 상가를 나서는데 문득 저 멀리서 누군가가 비척거리며 걸어온다. 미간을 찌푸리며 눈에 힘을 주니 수진이다. 걸어오는 폼을 보는 순간 마음이 철렁 내려앉는다. 유경이 일단 목을 한 번 가다듬고 손을 들어 수진을 부른다.
“수진 씨!”
*
밤, 수진
자정에 가까운 시간. 수진은 가게를 정리하고 엄마를 뒤따라 나온다. 습관처럼 올려다본 이층은 아직 불이 켜져 있다. 오라버니가 아직 퇴근을 안 하신 건가.
“엄마, 먼저 들어가.”
“이 시간에 어디 가게?”
“이층 좀 들렸다 갈게. 먼저 가 계세요.”
“그려. 엄마는 순대 남은 거 임 씨 좀 갖다 주고 가야겠다.”
수진은 엄마의 등을 떠밀어 먼저 보내고 가까운 뒷문 쪽 건물 계단을 뛰듯이 올라간다. 유리문 너머의 실내는 카운터 위의 조명만 켜져 있고, 예상대로 두 명의 실루엣이 보인다. 오랜만에 오라버니랑 은서랑 같이 퇴근해야지. 가면서 아이스크림도 먹고. 들뜬 마음에 문을 열려던 수진의 손이 이내 손잡이 앞에서 멈춘다. 한 명은 현수가 맞다. 하지만 은서일 거라 생각했던 실루엣은 익숙한 모습이 아니다. 유리문에 가까이 붙으니 얼마 전 옷가게에서 함께 차를 마셨던, 유경 언니의 후배라는 그 여자다. 실루엣의 정체를 파악한 순간 수진의 목 뒤에 소름이 돋는다. 가게 안의 분위기는 며칠 전 미연이 찾아왔던 그 날보다 훨씬 무거웠다. 어떡해야 하지. 수진의 손끝이 굳는다. 제삼자가 끼어들 분위기가 아님은 분명했지만 궁금증이 돌아서려는 발걸음을 붙잡는다. 결국 수진은 슬쩍 문을 열어 문 사이에 발을 끼운다. 열린 문틈으로 울리는 격양된 현수의 목소리. 수진으로선 처음 보는 현수의 모습이다. 미연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것들을 전부 받아내고 있다.
“당신이랑 헤어졌을 땐 너무 갑작스러워서 사실 제정신이 아니었어. 멀쩡한 바닥이 꺼진 것처럼 매일 비틀대면서 살았지. 그러다 당신이 떠난 지 반년 정도 되니 받아들일 수 없던 현실이 차츰 와 닿더라. 당신이 내게서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 내가 어렸기에 부족했던 부분들,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은 후회되던 순간들. 매일 밤 좁은 골목길을 끝없이 헤매는 기분이었어. 당신 만나면 꼭 미안하다고 말해야지. 많이 힘들었지, 부족한 나 때문에 고생 많았어, 그렇게 말해야지. 그렇게 매일 밤 되뇌면서. 그러다 팔 개월 만에 당신이 내 앞에 나타났어. 품에 은서를 안고. 자긴 도리를 다했다며, 은서와 함께 그 한 마디만 남기고는 훌쩍 가버렸어.”
현수의 악을 미연은 묵묵히 듣고만 있다.
“그리고 지금이지. 십육 년이었어, 십육 년. 그때 당신이 내게 안겨준 은서가 벌써 고등학생이야. 당신은 그렇게 떠나면 그만이었겠지만, 그럼 우리는? 그때부터 안 해본 일이 없어. 24시간이 부족해서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면서 정말 남의 시간이라도 훔치고 싶었어. 천운으로 은인을 만나 이렇게 가게까지 낼 수 있었지만, 그전까지 나는 낭떠러지 위에서 은서를 안고 외줄을 타는 하루하루였어. 그래도 나는 괜찮아. 하루 종일 마라톤 하는 것처럼 살았지만 고되던 몸도 은서가 웃는 모습을 보면 힘을 낼 수 있었으니까. 근데 우리 은서는? 그 아이는 무슨 죄야. 당신도 당신 나름대로 힘든 시간을 보냈겠지만, 은서가 어쨌을지 생각은 해봤어? 당신 없는 아이가 어떻게 자랄지 생각해봤어? 아니, 안 해봤을걸. 당신은 원래 당신밖에 모르는 사람이니까. 은서는 왜 엄마라는 단어를 모르고 살아야 했지? 남들은 모두 당연하다시피 양 손에 쥐고 크는데, 그 아이는 왜 한 손은 빈손으로 커야 했지? 그 아이는 존재 자체만으로 행복이고 기쁨인데. 왜 내가 일하는 시간에 은서가 모르는 사람의 품에 안겨서 크고, 초등학교 가정 조사서에는 왜 멀쩡히 살아있는 엄마 자리에 사망이라고 써야 했지? 날 그렇게 떠나버렸지만 당신을 많이 사랑했으니까 지금껏 원망 한 번 못했던 병신 같은 나였어. 하지만 은서까지 나 몰라라 내팽개쳤던 걸 생각하면, 그 마음만 모으면 정말 지금도 당신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 근데 이제와 이렇게 불쑥 나타나서 뭐? 어쩌자고.”
현수는 어느새 울고 있었다. 대꾸도 없이 시선을 내리깐 미연을 잠시 내려다보다 무너지듯 의자에 앉는다. 담배 쪽으로 가던 손이 도중에 돌아와 얼굴을 엉망으로 부비고 내려오니, 앞머리가 잔뜩 헝클어진 현수의 얼굴이 보인다.
“나는 모르겠어. 당신이란 사람, 우리 사이에서 이미 지워버렸는데, 이젠 당신 자리는 이곳에 없는데. 이제와 당신을 어떤 얼굴로 맞이하고, 은서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나는 모르겠어. 우연히 한 번쯤은 스쳐 지나가듯 만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었지만, 그것뿐일 거라 생각했는데.”
높이 올랐던 현수의 목소리가 점점 낮게 사그라진다. 미연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토하듯 쏟아내는 현수의 말을 모두 듣고 있다. 현수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다. 멀리서도 선명히 보일 정도로, 담배 끝의 불꽃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수진은 문틈에 끼웠던 발을 빼고, 열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문을 닫는다. 그리고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으로 계단을 내려온다.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색의 물감이 섞여, 휘저을수록 점점 검게 변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꿈을 꾸듯 걷다 보니 신호등과 골목을 지나 아파트 상가까지 오게 됐다. 그 앞에서 수진은 유경과 마주친다. 유경은 입에 아이스크림을 하나를 물고 다른 한 손에는 한 보따리의 아이스크림을 들고 서있다. 멀리서 보이는 수진의 실루엣에 유경이 먼저 손을 흔든다. 그러다 가까이 온 수진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흠칫 놀란다. 유경은 급하게 다가가 수진의 어깨를 흔든다.
“수진 씨. 수진 씨!”
“응?”
잠에서 깨듯 수진이 유경을 올라다 본다. 눈에 점점 초점이 돌아오며 당황한 유경이 수진의 동공에 담긴다. 눈앞의 사람이 유경임을 확인하자 수진은 다리가 풀려 자리에 주저앉는다. 눈가를 짓누른 손등 아래로 눈물이 타고 흐른다.
“수진 씨!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언니. 언니.”
“그래. 나 여기 있어.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죄송해요. 죄송해요.”
“뭐가? 뭐가 죄송해?”
“그냥 눈물이 나요. 죄송해요, 언니.”
수진은 그렇게 유경에게 안겨 아이처럼 운다. 유경은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두 손은 끊임없이 수진의 등을 쓰다듬는다. 바닥에 널브러진 아이스크림들이 초여름 밤 기온에 전부 녹을 때까지, 수진은 눈물을 그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