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현수와 미연 : 가족인형 3
작년
현수와 은서
카페를 개점하고 나서는, 딱히 돈이 부족한 삶은 아니었다. 현수에게 부족한 것은 언제나 시간뿐이었다. 가게 매출은 제법 괜찮아서 두 사람이 먹고 살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카페를 개점하기 전까지는 아니었다. 어린 은서를 안아 든 현수의 팔은 두 개뿐이었고, 돈과 시간은 각각 하나의 팔을 요구했다. 은서와 돈을 안으면 시간이 없었고, 은서와 시간을 안으면 돈이 없었다. 돈과 시간을 택하면 은서는 다른 손에서 키워야 했다. 은서를 위해 돈을 벌어야 했지만, 그러면 은서를 돌볼 시간이 사라졌다. 은서를 돌보면 돈을 벌 수가 없었다. 이 딜레마가 현수를 미치게 했고, 영혼 깊숙한 곳까지 뿌리를 뻗쳐 그의 모든 것을 지배했다. 결국 은서가 어느 정도 앞가림을 하기 전까지는 현수는 은서를 다른 사람 손에서 키워야 했다. 은서를 돌보는 사람의 몫까지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했다. 실상,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현수가 매년 최 사장님의 묘에 가서 기일을 챙기는 것도, 지나가다 만난 임 형님께 무릎에 닿을 만큼 인사를 하는 것도 그래서였다. 그들이 은서를 자랄 수 있게 베풀었고, 은서를 살리는 일로 현수조차 살 수 있게 해 줬으니까. 카페를 열게 도와주고, 그 후로도 여러 편의를 봐주며 부녀가 모자람 없이 살게끔 해줬으니까.
그래서였을지도 모르겠다. 돈보다는 시간에 쫓겨 아등거리던 시절 탓인지, 가난에서 한 걸음 멀어진 현수에게는 지금도 낭비를 배척하려는 묘한 버릇이 남게 되었다. 불가항력의 압박으로 쥐어 짜인 시절은 존재의 채취가 강해서 원하든 아니든 사람의 습성에 배게 된다. 그것은 현수 스스로도 인지 못한 부분이었고, 오히려 가까운 거리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은서에게 무의식 중에 스며드는 교육이 되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은서는 어렸을 때부터 뭔가를 조르지 않았다. 친구가 가진 것을 자기도 사달라고 하지 않았고, 물건을 보며 가지고 싶다는 티도 내지 않았다. 겉으로 보면, 물욕 자체가 매우 약해 보였다. 실상 그럴 리가 없는데. 어린아이는 절대 그럴 수 없다. 반짝이는 것을 보면 눈이 가고, 누군가 쥐고 있을 것을 보면 나도 만져보고 싶은 마음이 아이로서 당연한 거였다. 그럼에도 은서는 그러지 않았다. 뭔가를 사달라고 하지 않았고, 현수가 먼저 사주기 전까지는 일절 말하지 않았다. 아홉 살이 되면서 자신을 돌보는 사람도 필요 없다고 했다. 그때부터 이미 카페에서 오후를 보냈다. 지폐를 들고 가 시장에서 장을 봤다. 그 와중에 시장을 온통 돌아 500원 싼 애호박을 찾아오기까지 했다.
어리고 경험이 없던 현수는 그런 은서를 대견하게만 느꼈다. 얌전한 아이라 다행이라 여겼고, 키우기 쉬운 성격이라 고맙게만 생각했다. 뒤늦게 보면 땅을 치고 후회할 판단이었다. 너무 일찍부터 자신이 가진 근원적인 결핍을 깨달은 은서는, 성격 상 울고 난리를 치는 대신 그 작은 몸 안으로 삭혔을 뿐이었다. 막 자라나는 기대의 새순을 뽑고,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감정의 가지를 꺾으며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 것이다. 어린 은서가 봐도 어제와 내일이 버거워 보이는 현수를 위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의 눈치로 봐도 슬프고 미안한 웃음을 짓는 이십 대의 어린 아빠를 위해. 그때부터 은서는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고, 현수에게 피해를 주거나 현수가 응하기 어려울 감정을 없는 걸로 취급하며, 그렇게 스스로를 관리했다.
현수에게 은서가 유일한 자식이자 가족이었다면, 은서에게 현수는 이 세상 그 자체였으니까. 없다고 막연히 느낀 반쪽 세상 외에, 떠나서도 버려져서도 안 되는 자신의 유일한 세상이니까.
그래서 은서는 자신 스스로가 점차 하나의 세상으로 자라나기 전까지, 갈색 소파에 조용히 앉아서 바삐 움직이는 현수의 뒷모습을 두 눈으로 쫓아왔다. 슬픈 미소를 품은 세상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하며. 혹은 세상이 은서를 찾으면 그 즉시 달려갈 수 있도록.
은서는 그렇게 현수의 딸이자 세상의 일원이 되어갔다. 착한 심성과 꾸준한 끈기로 무의식 중에 기다렸다. 현수가 은서의 아빠가 되고 은서라는 세상의 일부가 될 때까지.
*
가을, 검사 측 이은서
열여섯의 가을이었다. 중학교 삼 학년의 계절은 알게 모르게 많은 것들을 뒤바꾸고 지나갔다. 고만고만하던 친구들의 키가 들쑥날쑥해지고, 이목구비와 옷차림이 눈에 띄게 달라지기도 했다. 아직은 어색한 화장을 하고, 방학에는 처음 보는 색으로 머리를 물들이기도 했다. 연애를 하는 아이들이 부쩍 늘어났고, 몇몇 아이는 마치 자랑삼아 술과 담배 등 어른이 금지했기에 멋있어 보이는 경험에 대해 공공연히 흘리기도 했다. 드러나는 방향과 결과는 여럿이지만 근본인 원인은 동일한 곳에서 출발했다. 즉, 아이들에게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이 무렵 은서는 그리 극적인 변화를 체감하지 못했다. 주변에서 느끼기도 그랬고, 무엇보다 스스로 그랬다. 고작 인지할 수 있는 변화라고는 옷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것뿐이었다. 그것조차 겨우 알아챌 수 있을 만큼만, 전혀 없던 관심이 조금 생긴 정도였다.
어렸을 때부터 스스로를 억누르던 영향이었겠지만, 현수도 은서도 그 점을 주의 깊게 여기지 않았다. 그저 현수는 달라진 은서를 보며 기뻐할 뿐이었다. 여전히 사달라는 말은 없지만, 함께 길을 걷다 쇼윈도를 힐끔거리는 시간이 조금 늘어났다. 지나가는 또래의 옷차림을 약간 더 유심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미묘한 차이지만, 둔한 현수도 알아차릴 수 있는 수준이었다. 무엇이 정답인지 모르는 현수는 틈만 나면 은서에게 기대를 밀어붙였다. 저 옷 예쁘다. 마음에 들어? 살래? 유경이 만약 그 모습을 봤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렇게 물으면 은서가 퍽이나 끄덕이겠다! 네 딸내미를 아직도 그렇게 몰라?”
그 말대로 은서는 족족 고개를 저었고, 현수도 은서의 눈치를 보며 조금씩 자제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적당한 시기가 온다. 옷에 대한 은서의 관심은 조금씩 늘어나고, 그에 떠보는 현수의 기대 섞인 말은 점점 은근해졌다. 그러다 관심과 기대가 좁은 교집합 안에서 함께 묶일 무렵이었다.
은서는 하교 후 자연스레 카페로 향했다. 이층으로 올라서려던 걸음은 문득 멈춰서 뒤를 돌았다. 은서의 시선은 길 건너편의 옷가게에 있었다. 2주 가까이 공사 중인 곳이었다. 며칠 전 달아놓은 간판을 봐도 어떤 가게가 들어올지 예상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오늘이었다. 간판에는 대낮부터 하얀 네온 전등이 켜져 있었고, 통유리 안에는 형형색색의 옷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은서는 홀린 듯 길을 건넜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옷걸이에 걸린 옷들이 은서를 향해 어서 오라는 듯 손을 흔드는 것 같았다. 유리 바로 앞에서 확인한 옷들은 꽤나 고급스러워 보였다. 주 소비층도 수진 언니 정도의,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을 위한 옷 같았다. 하지만 그중 은서의 눈을 끄는 옷이 있었다. 하늘하늘한 초콜릿색 블라우스와 아이보리색 치마 곁에 있는 갈색 니트였다. 계절에 맞게 적당히 도톰한 니트는 패션쇼의 메인 모델처럼 쇼윈도 중앙에 우뚝 매달려있었다. 키가 작은 은서에게는 거의 허벅지 위쯤까지 내려올 길이였다. 하지만 목으로 올라오는 시보리를 어깨 쪽으로 접는 특이한 모양새와 피트라인이 적당히 드러나는 질감이 은서의 마음에 쏙 들었다. 쇼윈도에 바짝 붙어선 은서는 난생처음으로 물건이 탐이 났다. 그간 가볍게 스쳤다가 금세 사라지는 그런 미풍 같은 충동이 아니라, 웬만하면 이걸 꼭 갖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였다. 가능하다면 저금해놓은 용돈으로, 혹시 부족하면 아빠한테 말해서라도. 그때 가벼운 종소리와 함께 유리문이 열렸다. 화들짝 놀라 물러선 은서는 유리문을 붙잡고 선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고압적인 시선에 무표정한 얼굴, 그리고 불만이 가득해 보이는 입모양까지. 지금까지는 접하기 드물던 기세였다. 시장의 마스코트 같은 은서는 이 근처 어딜 가나 웃어주는 사람들만 만났으니까. 주눅이 든 은서가 인사와 도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이, 여자가 먼저 불쑥 말했다.
“뭐하니?”
표정만큼 건조한 목소리였다. 은서의 직감은 옷 가게 사장이라 말하는데, 머리는 아니라고 했다. 개점 첫날에 쇼윈도를 들여다보는 중학생에게 이렇게 공격적으로 말하는 사장이 어디 있냐고. 복잡한 속내와 달리 대답은 반사적으로 튀어나갔다.
“옷을 보고 있었어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여자의 마뜩잖은 표정이 한결 진해졌다. 하지만 죄송하다고 소리치고 도망가려는 은서보다, 들어오라는 여자의 말이 먼저였다. 기세에 밀려 은서는 안으로 들어섰다. 어른들이 자주 쓰는 향수와 어디선가 맡아본 디퓨저 향이 뒤섞여 가게 안을 맴돌고 있었다. 처음 들어온 옷 가게에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에 여자는 은서에게 대뜸 뭔가를 내밀었다. 돌아보니 방금까지 쇼윈도에 걸려있던 니트였다. 뜨악해진 표정은 아랑곳없이 여자는 입어보라고 했다. 계속 쳐다보지만 말고, 빨리 한 번 입어보고 가라는 건지. 건네받은 은서는 반사적으로 가격표부터 확인했다. 일십백천만십.... 은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건 아니다. 잘못 들어왔다. 하지만 여자는 은서를 그대로 탈의실로 밀어 넣었다.
사지 못할 거 입어나 보자. 한 번 입어서 거울을 확인하고, 그걸로 만족하고 포기하자. 은서는 교복 상의를 벗고 니트를 착의했다. 조금 큰 느낌은 있었으나 니트를 놀랍도록 어울리고 마음에 들었다. 순간 마음이 흔들렸지만 은서는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나중에.”
어렸을 때부터 거의 모든 상황에서 유용했던 마법의 단어를 외며 은서는 니트를 벗었다. 허물처럼 올라가던 니트가 어디쯤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동시에 머리가 뽑힐 듯이 아팠다. 왜 이러지. 어디 걸렸나. 은서는 좁은 탈의실 안에서 몸을 비틀었다. 니트를 끌어올려도 머리가 아팠고, 내려도 아팠다. 중심을 잡지 못해 몸을 뒤뚱 일 때마다 벽과 부딪히는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숨이 가빠졌다. 앞은 보이지 않고 치켜든 팔이 아팠다. 숨을 고를 요량으로 어딘가에 등을 기댔다. 그때 벌컥 문을 열렸다. 은서는 그대로 뒹굴었다. 뭔가 찢어지는 소리와 극심한 통증이 동시에 발생했다. 잠시 기댄 곳이 하필 문이었나 보다. 이때쯤 은서는 패닉 상태였다. 니트와 머리가 느슨해진 느낌 따라 니트를 벗어젖혔다. 은서가 먼저 니트부터 확인했다. 니트의 겨드랑이 부분은 길게 찢어져있었고, 그 시작점에 머리 몇 가락을 집은 머리핀이 박혀있었다. 은서는 고개를 들었다. 조명을 등진 채 내려다보는 여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은서는 울음이 터졌다. 여자는 주저앉아 어쩔 줄 모르는 은서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은서의 손에서 니트를 빼앗아 테이블에 올려두고, 은서의 팔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끌려가는 동안 은서는 계속해서 죄송하다고 반복했다. 은서를 길거리에 두고 여자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거리에 서서 울고 있는 은서를 수진이 발견했다. 놀라 뛰쳐나온 수진은 건널목까지 갈 여유도 없이 무단횡단으로 은서에게 다가갔다.
“은서야.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익숙한 목소리에 은서는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수진의 팔을 붙들고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언니’와 ‘죄송해요’를 반복했다. 당황하기는 수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때 앞에서 문이 열리며 여자가 나왔다. 수진은 처음 보는 여자였지만, 여자의 손에는 은서의 가방이 들려있었다. 삼십 대 초반쯤의 여자.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 반사적으로 수진의 얼굴의 일그러졌다. 곁에선 은서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눈앞의 여자는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수진은 여자가 건네는 가방을 뺏다시피 낚아챘다.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여자에게 무슨 일인지 따져 묻고 싶었다. 왜 은서가 울고 있고, 왜 은서 가방을 가지고 있냐고. 하지만 녹슨 수도꼭지처럼 잠긴 목에선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수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은서를 안은 손이 덜덜 떨렸다. 그때까지도 여자는 무표정하게 서있을 뿐이었다.
“은서야!”
그때 머리 위에서 우렁찬 고함이 들렸다. 수진과 은서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놀란 현수의 표정과 마주한 수진은 마음이 턱 하니 놓였다. 아빠의 얼굴을 확인한 은서는 안도감과 미안함에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울고 있는 딸. 곁에서 당황하고 화가 난 지인. 둘과 마주한 채 무표정하게 서있는 모르는 여자. 주변으로 잔뜩 모인 시장 사람들. 눈이 뒤집힌 현수는 앞치마를 벗어던지고 아래층으로 달려갔다.
*
오후, 유경의 가게
그쯤에서 미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수진과 은서도 옛 기억이 떠오른 듯 소리 없이 웃고 있었고, 오직 유경만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아니, 그때는 나도 당황해서.”
유경이 짧은 손톱으로 옆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렇게 소탈한 이모인데, 그때는 왜 그렇게 무서웠는지. 은서는 웃어서 배가 아픈 척 유경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말없이 은서의 뒷머리를 쓸어내리는 유경의 손은 참 따듯했다.
*
가을, 변호사 측 최유경
오해라면 익숙했다. 어릴 적부터 수도 없이 받아왔으니까. 오해받지 않도록 고쳐보려도 했으나 잘 되지 않아 금세 포기했다. 대신 더 뻔뻔해지기로 했다. 말 그대로 오해니까. 진의가 아니었고, 악의도 아니었다. 오해를 받지 않으면 더 좋은 사람이 되겠지만, 오해를 받는다고 더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나쁜 사람처럼 보일 뿐이지.
그래서 대부분은 무시로, 나름 일부는 극복하며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나이를 먹었다. 그간 나아진 것도 있었고, 여전한 것도 있었다. 애당초 오해를 받지 않는 방법은 잘 늘지 않았으나, 오해를 받아도 끝내 풀어내는 기술은 늘었다. 상처 받지 않는 방법도, 이해해줄 때까지 기다리는 요령도 생겼다.
그럼에도 어지간히 고쳐지지 않는 것은, 미경험에 대한 당황이었다. 경험해본 것에 대해서는 빠른 속도로 대처법을 찾는 반면, 경험하지 않은 것은 남들보다 더 당황하고는 했다. 그러다 보면 습관적으로 굳었다.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모르니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아무 표현도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많이 오해가 생겼지만, 이것만큼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얼마 전 이사를 했다. 오래 살았던 동네였지만, 점점 흉흉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특히 어린 딸이 자라면서 그 느낌을 무시하기 어려워졌다. 집 주위로 술집이 드러났고, 밤늦게까지 번쩍이며 꺼지지 않는 간판도 함께 늘어났다. 당연히 술에 취한 사람도 자주 보였고,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없던 외국인도 많이 늘었다. 그래서 무슨 직접적인 피해를 봤는지 묻는다면 아직은 없다고 답해야 했다. 하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다. 부모 마음이면 더 그렇고, 어린 여자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는 더욱 그랬다.
유경은 이런저런 이유로 이사를 결심했다. 밤에도 동네가 조용하고, 학군도 나쁘지 않고, 번화가 없이 주택가만 밀집된 동네. 서울 동쪽에 적당한 곳이 있었다. 서울 중심과 강서로 가기 어렵다는 단점은 있었으나 유경에게는 불편할 리가 없었다. 왜냐면 집과 가게만 오가는 집순이였으니까. 어린 희주는 말할 것도 없고, 동현 역시 바삐 돌아다니는 성격이 아니었다. 연회비를 내고 자주 가던 대형마트가 멀어졌다는 점만 빼면 온통 장점뿐이었다.
지하철 종점 근처에 아파트를 구하고, 가게 자리도 구했다. 간단한 인테리어 후에 가게를 다시 열었다. 개점 첫날이었다. 이곳에서 또 얼마나 지낼지는 모르겠지만, 도드라지는 단점이 없는 이상 유경은 쉽게 터를 옮기지 않았다. 어쩌면 오래 지낼지도 모르는 동네였다. 시장 장사라는 건 바꿔 말하면 동네장사였고 단골 장사였다. 이번에는 되도록 적은 오해로 시작하고 싶었다.
카운터에 앉은 유경은 통유리를 브라운관 삼아 거리를 멀거니 구경했다. 잡지를 쥐고 있었지만 사실 신경은 다른 곳에 있었다. 주변 상인에게 먼저 인사를 가는 게 나을까. 아니면 오면 과자라도 내며 인사를 할까. 어쨌든 떡이라도 맞춰야 할까. 맞추는 김에 떡집부터 인사를 하고, 소개를 받으며 안면을 익힐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벌써 오후였다. 아직까지 개점 손님은 오지 않았다. 주 타겟층이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인 직장인 여성이니 저녁은 돼야 올 터였다.
그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 통유리 앞에 검은 실루엣이 졌다. 유경은 깜짝 놀라 쥐고 있던 잡지를 놓쳤다. 작은 체구였지만 유리창에 너무 가깝게 붙어있었다. 어둡게 그늘진 얼굴이 일견 무섭게도 보였다. 옷 장사를 오래 한 유경이지만 당황하기 시작했다. 첫날인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유경을 당황시킨 것은 상대가 성인이 아닌 교복을 입은 학생이라는 점이었다. 그것도 여학생. 유경에게는 경험이 없는, 미지의 대상이었다. 가서 아는 척을 할까. 들어온 것도 아닌데 그러면 부담스럽지 않을까. 어쩌면 불쾌한 얼굴로 이 아줌마는 뭐냐고 퉁을 놓고 갈지도 모르겠다.
유경의 고민이 짧지 않았음에도 여학생은 쇼윈도 앞을 쉬이 떠나지 않았다. 어쩌면 옷을 아주 좋아하는 학생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패션이나 의상에 관심이 있는 학생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마음에 드는 옷을 발견했는데 나이 대에 맞지 않는 가게 분위기 탓에 섣불리 들어오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유경은 용기를 내서 문을 열었다. 여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괜히 잔기술 걸지 말고 용건만 간단히.
“뭐하니?”
최대한 평온하고 간결하게 물었음에도 여학생은 대꾸가 없었다. 경계하는 듯했다. 다시 들어가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뒤늦게 여학생이 대답을 했다.
“옷을 보고 있었어요.”
낮고 모나지 않은 억양에 유경은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이 건을 연결해서 어느새 시장상인 사이에서 인기 있는, 시원시원하고 멋진 옷 가게 사장이 되어있는 자신의 모습도 상상해봤다. 들어와. 유경은 무심한 척 내뱉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혹시 뒤따라오지 않으면 어쩌지. 돌아보니 여학생은 유경의 뒤를 따라왔다. 유경은 쇼윈도에서 여학생이 보던 니트를 꺼냈다. 그리고 그 또래의 여학생과 많은 교류가 있었던 것처럼, 익숙한 척 니트를 내밀었다. 입어봐. 여학생은 잠시 망설였지만 니트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슬쩍 목 뒤를 확인했다. 자재도 좋고 박음질도 직접 한 수제였다. 부모에게 말하면 어렵지 않게 살 수 있는, 그리 비싼 제품은 아니었다. 유경은 일단 입어보라며 여학생의 탈의실로 떠밀었다. 옷을 갈아입는 소리가 들렸다. 그동안 유경은 다음 대화에 대해 궁리하는 중이었다. 처음은 ‘어디 학교니?’ 그게 무난하겠다. 그러다 문득, 동현과 비슷한 교복임을 깨달았다. 그럼 ‘강온고 다니니? 우리 아들도 거기 다니는데. 2학년이야.’ 여기서 한 번 놀라고. ‘아줌마 꽤 젊지?’ 여기서 같이 웃으며 아이스 브레이킹. 그 후 ‘어디 사니?’로 넘어가면 되겠다. 충분한 연습이 끝났음에도 여학생은 탈의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아까부터 안에서 쿵쿵 거리는 소리도 들렸던 것 같았다. 뭔가 문제가 생겼구나. 문이 고장 나서 안 열리나. 다른 생각을 하던 유경은 화들짝 놀라 탈의실로 다가섰다. 문을 벌컥 열자 여학생이 쓰러지듯 밖으로 굴렀다. 동시에 옷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뾰족한 비명이 울렸다. 유경은 당황해서 여학생을 살폈다. 여학생은 찢어진 옷과 머리가 뽑힌 곳을 동시에 만지며 울상이었다. 내 잘못인가. 내가 문을 열어서 넘어졌나. 그러다 옷이 찢어졌나. 아니면 원래 머리핀에 옷이 걸려있었나. 유경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여학생은 옷을 보며 울기 시작했으니까. 죄송하다고 하는 듯했다. 유경은 일단 옷을 받아 테이블에 올려놨다.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 어떡해야 하지, 를 다섯 번쯤 생각하다가 일단 이 자리를 벗어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섣불리 의자에 앉히면 옷 변상에 대해 따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니까. 유경은 여학생을 데리고 가게 밖으로 나갔다. 우선 진정시킨 다음에 어찌 된 일인지 물을 생각이었다. 그러다 문득, 가게 안에 가방을 두고 나왔음을 떠올렸다. 가방을 담보 삼아 부모님을 불러오라는 뜻으로 보이지 않을까. 유경은 들어가 가방까지 들고 나왔다. 그때 이미 여학생은 혼자가 아니었다. 아마 언니인 듯한, 처음 보는 젊은 여자와 함께 있었다. 주변은 이상을 감지한 사람들이 싸움구경을 하겠다며 오밀조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유경은 저 사람들의 저 눈이 너무 싫었다. 그리고 마주 선 눈은 무서웠다. 여자는 벌게진 얼굴에 무서운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유경은 직감적으로 오해가 시작되었음을 느꼈다. 거의 모든 오해가 이런 상황과 시기에 태동하여 확산했다. 유경은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여기선 섣불리 말을 꺼내기보다 상대가 따지는 부분에 대해 핀셋 해명을 하는 것이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여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화가 끓어오르는 듯 손까지 떨기 시작했다. 먼저 입을 열어야 할까 고민하던 찰나, 유경은 뒷골이 울리는 고함소리에 어깨가 움츠려 들었다. 건너편 이층에서 얼굴을 내민 남자는, 곧 곰과 같은 걸음으로 순식간에 유경의 앞까지 다가왔다.
“내 딸한테 무슨 짓이야.”
목소리로 사람을 때린다는 게 이런 거구나. 유경은 짐승 같은 고함에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눈물이 울컥 솟았으나 억지로 삼켰다. 그리고 처음으로 남자와 눈을 맞추며 소리쳤다.
“이 자식아. 내가 뭘 어쨌다고 난리야.”
남자 못지않은 우렁찬 목소리가 유경의 입에서 나왔다.
*
오후, 유경의 가게
미연은 아까부터 테이블에 이마를 대고 있었다. 간헐적으로 흔들리는 어깨가 잠들지 않았음을 알려주었다. 말을 하던 유경의 표정이 억울해질수록, 곁에 앉은 수진과 은서의 얼굴은 반비례하듯 미안해졌다.
유경은 말을 하며 슬쩍 두 사람의 분위기를 살폈다. 처음 가게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미연과 수진은 초면인 게 무색할 정도로 서로를 강하게 경계했다. 마치 다람쥐와 고양이가 중간에 있는 도토리를 두고 대치하는 모습이었다. 유경의 입장에서는 묘하게 재밌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불편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시작해서 차를 마신 지 얼추 한 시간. 다행히 분위기는 많이 풀려있었다. 여전히 서로를 의식하는 듯하지만, 처음처럼 은서도 눈치챌 만큼 드러내지는 않았다. 비유를 하자면 다람쥐는 가지고 있던 땅콩을 까먹고, 고양이를 앞발을 핥고 있는 것 같았다. 여전히 중간의 도토리는 신경 쓰고 있지만, 상대가 먼저 낚아채려는 움직임만 없으면 자신도 자중하는 모습이었다. 여자들 사이의 직감적으로 흐르던 불꽃이 사라지니 은서도 훨씬 자연스러워졌고, 각자 앞에 놓인 허브도 훨씬 좋은 풍미를 드러냈다. 미연은 삶의 부대비용, 특히 먹고 마시는 것에 쓰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유경으로서는 득을 톡톡히 보는 부분이었다.
세 번째로 내린 차도 어느덧 바닥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여자 넷이 모였을 때 생기는 효과 덕인지, 초면과 거의 초면인 사이에도 대화는 끊김 없이 화기애애하게 흘러갔다. 대화의 지분은 칠할 이상 유경이 쥐고 있었다. 은서가 물어보면 유경이 얘기하고, 그에 미연이 옛날 유경에 대해 폭로하거나 반박하는 식이었다. 수진은 종종 맞장구를 치거나 들으며 대화에 참여했다. 그러다 보면 여자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으레 그렇듯, 시선의 방향성이 생겨났다. 은서는 유경을 주로 보고, 미연은 은서를 주로 봤다. 수진은 미연은 주로 훔쳐봤으며, 유경은 그런 미연과 수진을 훔쳐봤다. 가슴을 간질이는 뭔가가 있는데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유경이 더 바보 같은 얘기와 표정을 드러냈다. 그럴수록 은서는 크게 웃었고, 미연은 은서를 더 훔쳐봤고, 수진은 미연을 훔쳐봤다. 왠지 지금 여기서 말끔히 즐거운 것은 우리 은서뿐이구나. 유경은 문득 그런 자조 섞인 생각을 했다.
대화가 어느 정도 끊기기 시작하고, 다들 막연히 자리를 마칠 때임을 깨달았다. 유경이 먼저 남은 차를 들이켜자 다들 각자의 잔을 비웠다. 은서는 카페로, 수진은 분식집으로 가겠다고 했다. 즐거웠어요. 다음에 또 봐요. 진심과 의례적인 인사들이 섞이고 둘은 팔짱을 끼고 가게를 나섰다. 원래부터 자매처럼 친한 사이였지만, 유경의 눈에 오늘은 왠지 딸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엄마의 모습처럼 보였다. 미연도 둘의 뒷모습을 막연히 쫓고 있었다.
방금까지 왁자하던 가게에 유경과 미연 둘만 조용히 남았다. 유경은 문득 미연과 눈이 마주쳤다. 미연은 아무 일도 없었고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슬쩍 웃었다. 스스로 알고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유경은 저 웃음이 언제 나오는지 알고 있었다. 상처 받았거나 속내를 숨기고 싶을 때의 미연이 으레 짖는 가면 같은 웃음이었다.
하지만 유경 역시 평소처럼 왜 그러냐고, 무슨 일 있냐고 묻지 않았다.
*
오후, 현수의 가게
“아빠. 딸내미 왔어요.”
“아이고! 우리 은서 왔어?”
부녀는 의례적으로 포옹을 하고 나서야 떨어진다. 생각보다 늦었네. 말을 꺼내려던 현수의 시선이 커다란 봉투를 거쳐 작은 뭉치에 멈춘다.
“딸, 그건 뭐야?”
“이거요? 오늘 말이에요.”
은서가 가까운 테이블에 가방을 풀고 앉자 현수도 맞은편에 따라 앉는다.
“짠!”
은서가 찻잎 묶음을 꺼내 머리맡에서 흔든다. 현수는 보자마자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웬 허브?”
“지난번에 공연 보고 돌아오다 만났던 이모 후배 있잖아요.”
은서의 말에 현수의 눈가에 급격히 색이 빠진다.
“아빠 기억하죠? 아까 이모네 가게에 놀러 왔거든요. 선물 받은 차인데, 커피밖에 안 드신대요. 그래서 이모한테 주러 왔다가 여기 건널목에서 만났어요. 그래서 이모네 가게에서 차 마시고 놀다가 남은 거 조금 받아왔어요. 아! 수진 언니도 같이 놀았어요.”
현수는 앞으로 숙였던 상체를 뒤로 물린다. 왼쪽 눈가가 떨리는 느낌에 급하게 얼굴을 문지른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과거의 정보들. 멀쩡한 가게에 폭탄이라도 떨어진 기분이었다. 현수가 말을 잇지 못하자 은서는 의아한 표정이 된다.
“아빠. 왜 그래요?”
“응? 아니야.”
“설마 아빠만 빼고 놀았다고 삐졌어요?”
설마 하니 뱉은 말을 현수는 입 꼬리를 늘어트리며 재빨리 받아 챙긴다.
“하아. 아니야.”
“뭐야? 진짜 삐진 거야?”
“아니야, 아빠는 삐지지 않았어. 이모도 수진 씨도, 그리고 우리 은서도 있는 티타임에 참가하지 못해서 좀 슬프긴 하지만, 그래도 삐지진 않았어. 말도 안 해주고 다들 모이긴 했지만, 하아, 그래도 삐지진 않았어.”
“그런 게 아니래도!”
“그래, 그래.”
“그게 아니라, 금요일 오후인데 아빠 바쁘실 거라고, 오늘은 여자끼리 먹자고 했었어. 대신 다음에 꼭 여기 커피 마시러 오겠다고 나랑 약속하고 갔단 말이야.”
진짜 의도는 그게 아니겠지. 비웃음이 음습하게 번졌지만 은서 앞이라 마음속에서만 갈무리한다. 어쨌든 고비는 넘겼다. 페이스를 찾은 현수는 적당한 선에서 상황을 마무리한다.
“알아. 아빠 진짜로 안 삐졌어.”
“진짜지?”
“당연히 진짜지. 원래 가끔은 그렇게 여자들끼리만 모여서 노는 것도 재밌어.”
현수가 평소처럼 웃자 은서의 표정도 함께 풀린다.
“오늘 진짜 재밌었어. 이모 옛날 얘기도 많이 알게 됐어. 두 분이 계속 말하고, 나랑 수진 언니는 거의 듣기만 했다니까.”
“진짜 재밌었겠네. 나중에 이모 약점 잡을 만한 비밀은 알려주기다?”
“아빠한테 말 안 하기로 이미 이모랑 약속하고 왔지요. 네! 가요.”
손님의 주문에 은서가 달려간다. 앞자리가 비는 순간 현수의 표정이 낮게 가라앉는다. 습관적으로 눈가를 문지른다. 네 명의 티타임이라니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정말 말도 안 되는 조합이었다. 우연으로 치부하기엔 뭔가 찜찜하다. 자리에서 일어난 현수는 자연스레 건너편 옷가게로 눈길이 간다.
옷가게 앞에는 유경이 서있다. 뭔가를 막연히 쫓던 그녀의 표정은 자신의 쇼윈도를 거쳐 현수 쪽으로 넘어온다. 허공에서 눈이 마주치는 순간 현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지금 유경의 보내는 시선은 저 사람에게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원망? 비애? 안타까움? 어느 하나로 설명할 수 없는 눈빛을 하고 있다. 현수는 그 시선에서 도망치지 않는다. 하지만 평소 같은 반응을 보이지도 못하고 그저 시선 앞에 서있을 뿐이다. 담담한 표정들 사이로 수많은 의미들이 오간다.
“아빠.”
“응.”
고개를 돌린 현수는 평소처럼 웃고 있다.
“저쪽 테이블, 더치 두 개랑 토마토 하나.”
“이런. 지금 키위 밖에 없는데.”
“그럼 내가 얼른 가서 사 올게.”
“그래. 넘어지지 말고 조심해서.”
현수가 앞치마에서 지폐를 꺼내 주자 은서는 그것을 받으며 현수의 귀에 낮게 속삭인다.
“저 테이블에 아줌마 좀 깐깐해.”
“왜? 진상이야?”
“그 정도는 아닌데. 이건 어떻고 저건 어떻고. 주문 사항이 많아.”
“어쩐지 주문받는데 오래 걸리더라. 알았어. 아빠가 알아서 할게.”
“역시 우리 아빠. 든든해.”
은서는 뿌듯한 얼굴로 현수의 등을 두드린다.
“그리고 그 심부름만 하고 집에 들어가. 어제 늦게까지 연극 준비하느라 피곤할 거 아냐.”
현수의 걱정스러운 말에 은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녀올게”라며 가게를 나간다. 달려가는 뒷모습에 손을 흔들던 현수는 은서가 사라지자 힘없이 손을 내린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옷가게 앞은 아무도 없었다.
*
오후, 유경의 가게
“나도 갈게.”
“그래. 멀리 안 나간다.”
유경의 인사를 눈짓으로 대꾸한 미연은 가게를 나서다 말고 다시 들어온다. 의아한 유경의 눈을 뒤통수에 붙인 미연이 멈춘 곳은 좁은 쇼윈도 한쪽, 골반을 살짝 덮을 길이의 갈색 니트가 걸린 자리였다. 지난번 봤을 때는 그저 계절에 맞지 않아 의아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유경의 이야기 속에 등장했을 때는 그저 재밌는 매개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서 다시 본 니트는 미연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어쩌면 이 니트를 처음 발견한 은서도 이런 비슷한 기분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미연은 쇼윈도 앞에서 니트를 만져본다. 은서가 느꼈을 재질을 같이 느껴보고, 독특한 모양의 목 부분과 옆태를 따라 굴곡지며 떨어지는 전체적인 모양새도 꼼꼼히 살펴본다. 유경은 쟤가 뭐 하는 건가 하는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미연은 목 뒤를 뒤집어본다. 유경의 가게 간판과 같은 브랜드가 찍혀있다.
“언니. 이 니트 언니가 직접 만든 거야?”
미연이 니트를 들고 돌아보자 유경의 눈이 반짝인다.
“그럼! 역시 명품은 어딜 가도 돋보이네. 다들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계절에 안 맞아서 그런 거 아냐?”
“아니거든. 들어오는 사람마다 족족 물어보거든.”
“그런 거치고 아직 안 팔렸네. 작년부터 걸어놨을 거 아냐.”
“예약 걸려있어서 그래.”
“무슨 예약?”
“은서가 가장 먼저 찜해놓은 거야.”
은서라는 말에 옷걸이를 잡은 미연의 손끝이 파르르 떨린다. 그런 미연의 속내를 모르고 유경은 아까 하다 만 말을 잇는다.
*
가을, 그 사건 후
작년 시장거리에서 고성방가가 오간 뒤로도 좀 복잡하게 됐다. 뒤늦게 오해가 풀린 후 현수는 사과와 함께 옷값을 지불했다. 그대로 옷을 던져줘도 무방 했겠지만, 거의 새로 만들 듯 밤을 꼬박 새운 유경은 다음날 멀쩡한 옷을 가져다줬다. 현수는 받으려 했지만 은서가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 옷값을 주고, 옷과 수선공임을 받을 수 없다는 이유였다. 유경은 당황했다. 사실 반쯤은 칭찬받을 생각으로 퀭한 눈으로 간 거였으니. 현수가 그럼 수선비도 추가로 주겠다고 했지만 은서는 요지부동이었다. 유경은 처음에 은서가 시쳇말로, ‘꼬장’을 부리나 했다. 기분이 나빠서, 입고 싶지 않아서, 치기 섞인 고집을 부리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유경으로서는 아쉬운 부분이었다. 이사 후 첫 만남이었다. 건너들은 바에 따르면 현수는 시장에서 마당발이기도 했고, 이 동네 큰손인 임 사장이라는 사람과 막역한 사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제 오간 한두 마디로 인해 서로 비슷한 처지인 것도 알게 되었다. 혼자 은서를 키우는 현수와, 혼자 동현과 희주를 키우는 유경은 어떤 의미로 동지였다. 어쩌면 좋은 친구가 될지도 몰랐다. 첫 단추부터 꼬였구나. 낙담한 유경은 결국 옷을 들고 돌아왔다.
다음 날, 현수와 은서는 유경의 가게를 찾았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왜 왔나 싶어 당황한 유경과 마주 앉았다. 두 사람은 어제저녁 서로 차분하게 나눴던 생각들을 유경에게 들려줬다. 결과적으로 은서는 ‘꼬장’을 부린 게 아니었다. 어제 그 일이 일정 부분 은서에게 트라우마처럼 남은 듯했다.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자신으로부터 그렇게 큰 소동이 벌어졌던 경험이 없어서, 그와 관련된 모든 일을 충동적으로 밀어내고 싶어 했다. 옷을 받지 않겠다고 한 것도 미안해서라고 했다. 안 받을 이유도 없지만, 그대로 받으면 내내 마음이 불편할 것이고, 점점 그 옷을 입고 싶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유경은 왠지 알 것 같았다. 은서의 마음을 전부 이해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어떤 부분이 가장 크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지금 은서는 무의식 중으로 동의를 구하는 중이었다. 그것은 용서의 옷을 입은 동의였고, 이해의 모자를 쓴 동의이기도 했다. 현수에게, 그리고 어제 모였던 시장 사람들에게, 그리고 유경에게도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터였다. ‘네 잘못이 아니야.’ 아니, 아니다. 유경이 본 은서는 막연히 그만큼만 바랄 정도로 생각이 짧거나 이기적인 아이가 아니었다. 훨씬 더 생각이 깊지만 마음이 여린 아이였다. 더 정확히는, ‘네 잘못이어도 우리는 너에게 실망하지 않아.’ 이것일 것이었다. 그 순간 유경은 은서와 눈이 마주쳤다. 덫에 걸린 사슴처럼 데굴데굴 굴러가는 눈동자가 유경의 시선에 덜컥 잡혔다. 긴장이 역력한 얼굴이었지만 쉽게 시선을 피하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그때 유경은 이 아이가 안쓰러웠다. 지금 곁에 앉은 현수가 이 아이의 심정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현재 유경만큼은 느끼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현수의 잘못이 아니었다. 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여자아이는 같은 여자만이 알 수 있는 신호를 내뿜는다. 남자아이는 같은 남자만 받아들일 수 있는 의식을 드러낸다. 아이의 대한 사랑과 관심의 정도와 관계없이, 레이더 자체가 없기에 알 도리가 없는 그런 정서적 교감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유경은 문득 동현이 떠올랐다. 너는 아빠가 없는 설움을 스스로 어찌 해결하고 있는지. 현수에게 시선이 갔다. 우리가 친해진다면, 어쩌면 나중에는 그럴지도 모르겠다. 지금 고작 어제 초면이었던, 심지어 나쁜 첫 만남이었던 자신이 은서의 마음을 이해하듯, 현수도 동현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일도 있지 않을까.
이럴 때 유경은 아주 똑똑해졌다. 필요 이상의 걱정도 하지 않고, 눈치가 비상해지며, 행동도 재빨라졌다. 지금 이 순간에 필요한 것은 두 가지였다. 현수는 눈치도 못 채고, 은서는 바라지만 정확히 뭔지 모르는 것도 마찬가지로 두 가지였다. 오직 유경만 원인과 결과에 대한 최선의 답을 알고 있었다. 첫째는 이 옷 문제를 바르게 풀지 못하면 무슨 수를 써도 눈앞의 부녀와 가까워지지 못한다는 것. 둘째는 옷 문제를 서로 원만하게 풀려면 마음의 부채를 지고 있는 아이에게 과도할 정도로 리스크를 씌워야 한다는 것. 두 번째부터 해결해야 첫 번째도 해결된다. 그리고 두 번째를 해결하려면 우선 은서가 지고 있는 걱정부터 끊어내야 했다.
“우선, 나는 어제 일로 인해 너에게 선입견을 갖고 있지 않아.”
담담한 유경의 목소리에 부녀의 시선이 입가로 모였다.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고, 어제 일은 어느 한쪽의 잘못이라고도 할 수 없어. 그리고 설령 어제 일이 네 실수였다 하더라도, 나는 그걸로 너를 판단하거나 너에 대한 행동이 달라지지 않아.”
그리고 그건 네 아빠나, 어제 일을 봤던 사람들도 역시 그럴 거야. 유경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은서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곁에서 당황한 현수는 왜 우냐며 투박한 손으로 아이의 얼굴을 거듭 닦았다.
“당연한 얘기지. 절대 그럴 리 없지.”
현수는 이렇게 말하며 하하 웃었다. 그리고 유경에게 동의를 구하듯 은서와 유경을 번갈아 봤다. 멍청한 놈. 유경은 독기 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멍청한 년. 자조적인 웃음이기도 했다.
“실수할 때마다 움츠러들면,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돼.”
유경의 말에 은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주친 눈을 보니, 유경의 뜻을 온전히 이해한 듯 보였다. 아이는 어제와는 전혀 다른 눈빛으로 유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계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감탄 역시 아니었다. 예컨대 배가 아프지만 남에게 얘기 못하고 혼자 끙끙대고 있는데, 누군가 지나가는 말로 ‘너 배 아프니?’라고 물었을 때 조금은 놀란 얼굴로 상대를 바라보는 그런 눈빛이었다. 해결을 바라는 것이 아닌, 그저 알아줌으로써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게 도움을 준 상대에게 보내는 신뢰 섞인 인지였다. 이 사람은 내가 원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음을 상대도 알고 있다. 찰나의 순간에 이어지는 정서적 교류였다. 유경은 마음이 찌릿해짐을 느꼈다. 타인과의 은밀하고 세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을 때 드물게 느낄 수 있는, 일종의 환희와 같았다. 나는 세상에 온전히 연결되어 있고, 지금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고 있다는 자각이자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위안.
“그래서, 수선비를 더 받고 가져가는 건 아직도 싫어?”
유경의 말에 은서는 대답이 없다. 하지만 여전히 부담스러워한다는 것은 현수 말고는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걱정을 끊어냈으니 마음의 부채를 상쇄할 시간이었다. 잠시 말이 없던 유경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우리 집에는 너처럼 큰 딸이 없어.”
보리자루처럼 앉아있는 현수를 제쳐두고 유경은 은서에게 직접적으로 말을 걸었다. 무슨 얘기인가 싶어 은서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대신 작고 귀여운, 천사 같은 어린 딸이 있지.”
눈 속에 당황이 조금이나마 가셨을 무렵, 유경은 입술을 길게 늘여 웃으며 말했다.
“아이 좋아하니?”
*
오후, 유경의 가게
“결국 수선비 대신, 나 없을 때 희주 서른 번 돌봐주는 걸로 합의 봤어. 입기 적당한 계절이니 먼저 받고 천천히 서른 번 채우라니까 또 그럴 수는 없다네. 은서 걔가 고집은 제 아빠보다 강하거든. 그래서 알았다고 했지. 그 후에 서른 번을 채웠을 때는 이미 계절이 지나간 후더라고. 아무 때나 가져가라니까 가을이 되기 전에는 걸어놓고 싶대. 본인이 그게 좋다니까 그러라고 했어.”
서른 번이 뭐야. 벌써 백 번은 더 봤겠다. 유경은 말로는 이러쿵저러쿵 하면서도 귀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은서의 이야기를 할 때의 유경은 언제나 이렇게 들뜬 모습이다. 한참을 떠드는 동안 미연은 고개를 숙인 채 묵묵부답이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유경이 미연을 내려다본다.
“야. 너 왜 울어?”
미연은 손끝으로 눈가를 꾹꾹 누른 후 고개를 든다.
“그냥, 언니 얘기 듣다 보니 감정 이입해서.”
미연은 유경과 눈을 맞추지 않고 니트를 살핀다. 유경은 덧붙이는 말없이 가만히 있다. 그러던 중에, 미연의 눈이 유경에게 가 꽂힌다.
“언니, 이거 나한테 팔아.”
미연은 흡사 선언이라도 하는 말투였다.
“얘가 얘기를 들은 거야, 만 거야? 그거 은서 거라니까. 마음에 들면 따로 만들어줄게.”
“내가 입으려는 거 아니야. 내가 사서 은서한테 줄게. 그러니까 나한테 팔아.”
“이미 준 건데 그걸 어떻게 너한테 다시 팔아. 그건 말이 안 되지.”
단호한 유경의 말에 미연의 어깨가 떨어진다. 내가 선물로 주고 싶은데. 아이의 첫 물욕을 내가 충족해주고 싶은데. 아쉬운 마음에 손가락으로 니트만 문지른다. 풀이 죽은 미연의 모습에 유경은 슬쩍 미연을 불러본다.
“야.”
미연은 니트에 시선을 둔 채 대꾸가 없다.
“야, 미연아.”
옛날부터 미연의 침묵은 왠지 무서웠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주눅이 들었다. 머리를 긁적이던 유경은 모기만 한 소리로 말을 잇는다.
“사실은.”
유경이 거절 말고 다른 말을 꺼내려는 듯하자, 미연의 고개가 유경을 향한다.
“은서를 위해 필요한 과정이었다 해도, 현수한테 돈도 받았는데 희주까지 봐주는 건 확실히 노동력 착취잖아. 보니까 은서가 그런 니트 스타일을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 내가 비슷한 디자인으로 그린이랑 아이보리도 만들었는데.”
주섬주섬 말하는 유경의 말꼬리를 미연이 급히 잡아챈다.
“그거 나한테 팔아.”
“아직 말은 안 했지만 그것도 다 은서 주려고 했던 거라.”
“나한테 팔아. 내가 선물해줄게.”
“아니 근데, 네가 왜 선물을 해준다는 거야?”
유경의 기습적인 질문에 공격적이던 미연의 태도가 주춤한다. 잠시의 침묵 후에, 미연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담담해진다.
“한두 번 봤는데 너무 귀엽잖아. 싹싹하고 애교 있고, 어른들한테도 잘하고. 언니도 예뻐하는 것 같고. 나랑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인데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이번엔 유경이 대꾸가 없다. 그저 미연은 빤히 바라볼 뿐이다.
“그리고 나도 이제 나이 먹어서 그런지 그런 애 보면 딸 같고 막 그래. 결혼할 때가 됐나 봐.”
“아니, 때는 이미 5년 전쯤에 지났지.”
“아무튼. 이거 나한테 팔아. 어차피 은서 주려고 만든 거잖아. 내가 입겠다는 것도 아니고, 선물로 준다는데 그냥 팔아.”
“그렇긴 한데.”
“언니, 내 성격 알지?”
“알지.”
“줄 때까지 조를 거야.”
“그래도.”
“언니.”
“아, 그래! 알았어! 알았다고!”
어휴, 내가 정말 저놈의 고집은. 투덜대며 창고로 들어간 유경은 이내 두 벌의 옷을 들고 나온다. 옷걸이에 나란히 걸린 녹색과 미색의 니트는 하나는 길이가 짧아 골반 위로 올라오고, 다른 하나는 한쪽 어깨 쪽으로 지퍼가 달려있다. 모양도 예쁘고 하나 같이 은서에게 잘 어울릴 색이다. 미연의 표정이 환하게 펴진다.
“네가 은서 줘라. 나는 어린애 노동력 착취하는 악덕 업주나 될 테니까.”
투덜거리며 옷을 포장하는 유경을 놔두고 미연은 지갑을 꺼내 카드를 긁고 마음대로 숫자를 찍는다. 그 모습을 본 유경의 눈썹이 쑤욱 올라간다.
“야! 너 뭐해?”
“계산하잖아.”
“내가 돈을 왜 받아! 그리고 이거 두 벌에 무슨 백오십이야?”
“마음 같아선 더 찍고 싶은데, 이 카드 한도가 거기까지라.”
“얘가 오늘 왜 이래. 주는 것도 마음에 걸리는데 돈을 어떻게 받아.”
“그럼 언니가 그만큼 은서한테 뭐 사줘.”
유경은 붙잡은 손을 놓는다. 눈매와 표정이 거름망으로 거르듯 낮게 가라앉는다. 유경은 차분한 눈빛으로 미연의 옆얼굴과 마주한다.
“미연아.”
거칠게 사인하는 미연을 유경이 조근한 목소리로 부른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미연은 밀려 나오는 영수증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너 왜 그래. 지금 너 되게 이상한 거 알아?”
거슬리는 전자음이 끝나고 밀려 나오던 영수증도 멈춘다. 유경은 포장을 마무리하지 않는다. 미연도 영수증을 찢어내지 않는다. 누구보다 장난기 많은 유경이지만 지금은 진지한 표정이다. 이럴 때의 유경은 자신을 설득시키거나 혹은 스스로 납득하지 않고서는 절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정지화면 같던 미연은 이내 기계에서 영수증을 찢어낸다.
“미안해, 언니.”
그리고 유경의 단단한 눈빛과 마주하며 간절한 목소리로 호소한다.
“내 행동이 이상하다는 건 알아. 하지만 오늘은 그냥 넘어가 줘.”
유경이 한참을 더 응시해도 미연은 아예 눈을 감아버린다. 결국 눈길을 거둔 유경은 조용히 포장을 마무리한다. 이내 미연의 손에 쇼핑백이 쥐어진다. 미연은 미안한 눈빛으로 고개를 돌린다.
“고마워, 언니. 옷은 꼭 은서에게 선물할게.”
미연은 그렇게 나간다. 문에 달린 종소리를 끝으로 전쟁터 같던 가게가 먹먹한 정적 속에 가라앉는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도망치는 등을 쫓던 유경은 한숨을 내쉬며 카운터에 널브러진 갈색 니트를 쇼윈도에 건다. 그리고 꺼내왔던 녹색과 미색의 옷걸이를 넣으러 창고로 가던 중 불시에 번개라도 맞든 표정으로 그 자리에 박힌다.
“아.”
유경의 손에서 떨어진 옷걸이가 바닥을 치고 좌우로 흩어진다. 급히 가게 밖으로 달려 나가지만 이미 보이지 않는다. 유경은 막차를 놓친 것처럼 하염없이 미연이 사라진 쪽을 바라본다.
“세상에. 설마 했는데.”
급히 눈가를 훔치지만 벌써 바닥으로 떨어졌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듯 발로 바닥을 문지르며 쇼윈도로 고개를 돌린다. 곱게 걸려있는 갈색 니트. 그 위에 한동안 머물던 유경의 시선은 자연히 반대쪽 이층으로 향한다. 마침 창가에 있던 현수와 눈이 마주친다. 평소처럼 웃지도, 장난스럽게 찡그리지도 않은 담담한 현수의 표정. 수많은 의미들이 허공에서 엉킨다. 이내 은서가 달려와 현수의 어깨를 치자 둘은 평소처럼 화기애애하게 말을 주고받는다. 평소라면 마냥 좋게만 보였을 그 모습이 지금만큼은 못내 야속해 보인다.
“현수야. 미연아. 이 세상은 왜 우리에게만 이렇게 얄궂을까.”
한참 동안 부녀의 옆모습을 눈에 담던 유경은 시선을 거두고 가게로 들어간다.
*
오후, 은서의 집
집에 돌아온 은서는 손에 걸리는 족족 불을 켠다. 현관에 가방과 커다란 봉투부터 던지듯 내려놓은 은서는 뛰듯이 방으로 걸어간다. 문을 열자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지만 교복도 벗지 않고 은서는 책상 아래를 뒤진다. 이것도 아니야. 이것도 아니야. 쪼그려 앉은 은서와 책상 곁으로 작은 박스들이 하나씩 쌓인다. 박스는 크기도 색깔도 각각이었지만 하나 같이 세월의 무게만큼 낡아있다. 박스는 많았다. 고작 16살인 은서가 벌써 꽤 많은 추억을 쌓아왔다는 증거였다.
“어디 갔지. 분명 있었는데.”
은서도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분명 있었다. 예전에 그것을 발견했을 때 크게 충격을 받았던 게 아직도 생생했다. 분명 어딘가 꼼꼼하게 보관해뒀을 것이다.
“아빠가 절대 보지 않을 곳. 그게 어디지.”
없다. 이 집에 현수의 손이 자의적으로 닿지 않는 곳은 없다. 그럼 어디에 뒀을까. 자의적이지 않으면 타의적으로 현수의 손이 닿지 않는 곳.
“아빠가 절대 볼 수 없는 곳.”
은서는 벌떡 일어난다. 베란다로 달려간 은서는 구석 선반에서 상자를 찾는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구석은 청소를 해도 금세 먼지를 쌓아둔다. 은서의 손이 바삐 헤집는 만큼 먼지 위로 고스란히 흔적이 남는다. 몇 개는 내리고 몇 개는 밀어 두고, 키가 모자라 식탁 의자까지 힘겹게 끌어온 은서는 끝내 하나의 상자를 발견한다. 내려서 열어보니 노트가 가득하다. 이천 몇 년이라고 적힌 년도는 각각이지만, 그 아래에 적힌 문구는 하나 같이 같다. ‘아빠 절대 금지’ 삐뚤삐뚤한 글씨가 연도가 늘어남에 따라 점점 둥글고 균형 잡힌 모습으로 변한다. 글씨를 배운 후부터 꾸준히 써온, 은서의 일기들이었다.
“오 년 전, 오 년 전.”
중얼거리며 박스를 헤집던 은서의 손에 이내 노란색의 노트가 잡힌다. 분명 이쯤이었다. 많이 놀랐지만 용케 울지 않았던 날. 현수의 졸업사진을 뒤지다가 어느 페이지에서 발견한 물건. 없어질까 두렵고 무엇보다 현수에게 상처일까 두려워서 숨겨놓은 물건. 그래서 어린 마음에도 현수에게 들키지 않게 찾아낸 장소. 은서는 노트를 접어 빠르게 펼친다. 어느 순간 턱 하는 느낌과 함께 어느 페이지가 드러난다. 그 사이에 오롯이 꽂힌 납작하고 작은 종이. 인화지였고 스티커로 된 사진이었다. 여덟 개로 분할된 앵글 안에는 교복을 입은 남녀가 다양한 포즈와 표정으로 붙어있다. 남자는 현수였다. 스티커 사진 특유의 과한 노출과 감도로 인해 코가 날아가고 피부가 하얗게 번졌지만 현수 곁에 선 여자의 이목구비 정도는 확인할 수 있었다. 예전에 막연히, 어쩌면 이 사람이 내 엄마일 수도 있겠구나 했던 그날처럼.
은서는 사진을 손에 쥐고 그대로 주저앉는다. 눈보다 가슴에서 먼저 눈물이 흐른다. 사진과 창밖 하늘을 번갈아 보던 은서는 사진에 이마를 묻는다.
“왜?”
결국 울음이 터진 은서에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
*
저린 다리를 주무르며 은서는 일어선다. 방으로 들어간 은서는 지갑에 사진을 넣는다. 가방 깊숙이 지갑을 넣고 다시 나온다. 베란다에 늘어놓은 짐들을 다시 처음처럼 정리하고, 걸레를 빨아 위에 쌓인 먼지와 손자국을 깨끗이 닦아낸다. 방에 널브러진 상자들도 책상 아래 다시 집어넣는다. 거기까지 마치고 나니 은서는 온통 땀과 먼지투성이가 된다. 내내 찜찜하게 괴롭히던 교복을 벗은 은서는 옷을 챙겨 화장실로 들어간다. 깨끗이 씻은 은서가 편한 옷차림으로 화장실에서 나온다. 그제야 던져놓은 가방과 봉투가 눈에 띈다. 가방과 봉투를 챙겨 온 은서가 침대 곁에서 봉투를 뒤집자 인형들이 우르르 쏟아진다. 오래 가지고 있었지만, 오래 가지고 있었기에 이제는 의식에서 한 걸음쯤 벗어나 있는 인형들. 이번 연극 준비를 하면서 오랜만에 다시 만지는 일이 많아졌다. 은서는 하나씩 집어 서랍장 위에 올려둔다. 벽과 맞닿아있는 왼쪽부터 첫 번째와 두 번째 자리는 당연히 아빠와 아이 인형. 그다음부터는 손에 잡히는 대로 무작위로. 인형 두 개를 세 번째와 네 번째 자리에 놓으려던 은서의 손이 순간 허공에서 멈춘다. 쥐고 있는 건 고양이 로봇과 두발로 걷는 사슴 인형이었다. 은서는 두 인형을 다시 내려놓고 인형 더미를 뒤적인다. 금세 예쁜 공주님 인형과 공룡 인형을 찾아낸다. 아빠와 아이 인형을 옆으로 치우고 첫 번째 자리에 공주님 인형을, 두 번째 자리에 아빠 인형을 둔다.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진 여섯 번째 자리에는 빨간 혀를 내민 공룡 인형을 내려둔다. 그리고 그 중간인 네 번째 자리에 아이 인형을 끼워 넣는다. 세 번째와 다섯 번째 자리는 비워둔다. 마치 공주님 커플과 공룡 사이를 아이 인형이 중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적당한 간격을 가지고 배치된 인형 네 개를 바라보던 은서는 만족한 듯이 웃는다. 그리고 일곱 번째 자리부터는 나머지 인형을 무작위로 세워놓는다.
은서가 인형 정리를 마칠 무렵, 책상 위에 올려둔 휴대전화가 울린다. 액정을 들여다본 은서는 미묘한 웃음이 짓는다. 반사적으로 서랍장을 보게 된다. 아빠 인형 곁에 붙은 예쁜 공주님 인형. 너무 걱정 마세요. 공주님을 다독이듯이 말을 건 은서는 목을 가다듬고 전화를 받는다.
“언니!”
“은서야. 집이야?”
“네. 언니는 어디예요?”
“나는 분식집인데. 지금 혹시 바쁘니?”
“아니에요. 저녁 뭐 먹을까 하고 있었어요.”
“그래? 언니는 지금 분식집에 혼자 있는데, 오랜만에 분식 어때?”
“어제도 먹었지만 좋아요! 할머니가 하신 떡볶이 진짜 맛있으니까!”
전화를 끊은 은서는 휴대전화와 지갑만 챙긴다. 확인 차 지갑을 열어본다. 문화상품권 뒤로 곱게 누워있는 사진의 끄트머리가 살짝 보인다. 지갑을 닫고 나가기 전에 문득 서랍장 위를 다시 한번 응시하던 은서는 불을 끄고 방을 나선다.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시각, 옆 건물에 반사된 붉은빛이 아빠와 아이 그리고 공룡을 비추고 있다. 창틀로 의해 벽에 붙은 공주님 자리는 아직 그늘이 져있다.
*
저녁, 미연의 동네
혜인의 차가 멈춘 건 미연이 사는 아파트 단지 근처였다. 둘 사이에 특별한 일이 없을 때면, 혜인은 미연을 집 앞까지 데려다줬다. 미연은 자신이 차를 사기 전까지 만이라고 못 박았지만, 사실 미연은 차에 대한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오랫동안 살았던 외국의 도시에 비하면 서울의 대중교통은 깨끗하고 정확하고 쾌적했으니까. 집에서 회사까지 먼 거리도 아니어서 여차하면 택시를 타면 됐다. 택시도 또 얼마나 많고, 얼마나 저렴한지. 그런 미연의 성격 상 짧게 끝나지 않을 카풀이지만 혜인 역시 상관없었다. 혜인은 오히려 미연이 차를 사지 않기를 바라니까. 집이 같은 방향이기도 했고, 미연과 함께 집에 가는 것도, 종종 함께 저녁을 먹거나 집 근처에서 맥주 한 잔을 하는 것도 혜인에게는 소소한 기쁨 중 하나였다.
손을 흔들어 혜인을 보낸 미연은 길을 건너기 위해 건널목 앞에 섰다. 빨간 신호등을 멍하니 보던 미연의 시선이 문득 뒤를 향했다. 길을 기준으로 건너편은 미연이 사는 아파트 단지였고, 지금 미연이 서있는 쪽은 번화가였다. 미연의 시선이 닿은 곳은 어느 옷가게였다. 이 동네에도 유경의 가게만큼 작은 옷가게들이 많았고, 분위기 역시 유경이 가게와 비슷했다. 미연은 뭐에 홀린 듯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유경의 가게보다 더 캐주얼한 옷이 많은 가게였다. 유경의 가게에는 없는 하얀 면 티셔츠도 있었다. 평소 잘 입지도 않는 티셔츠에 왜 신경이 쏠렸는지는 미연 스스로 몰랐다. 그저 자연스럽게 행거에 걸린 옷을 하나씩 살피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레터링이 된 티셔츠였다. 캐릭터 티셔츠도, 아무 무늬가 없는 무지 티셔츠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입기 적당해 보였다. 고딕 체나 흘림체로 굵고 얇게 프린트된 모양은 같은 것 하나 없지만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이 천편일률적인 모양 때문에 미연은 티셔츠를 즐겨 입지 않았다.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조금 입다 보면 늘어나고 늘어지는 게 싫어서였다. 그래서 미연은 합성유로 된 블라우스나 셔츠를 더 선호했다.
손으로는 옷을 뒤적이며 미연은 습관적으로 은서를 떠올렸다. 니트는 은서에게 잘 어울렸다. 하지만 어떻게 봐도 그 나이 대의 아이를 위한 옷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대학생쯤을 위한 옷이었다. 이제 성인이 된 아이가, 스스로 성인이 됐음을 뽐내고 싶어서 옷차림을 고급스럽게 바꿀 때 어울리는 아이템이었다. 니트에 집착하는 은서의 이면에 하루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다고 미연은 생각했다. 일방적으로 걱정받지 않고 서로 걱정할 수 있는, 오직 부양받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와 현수를 부양할 수 있도록, 어서 어른이 되고픈 아이의 마음. 다시 찔끔 눈물이 스몄다. 이제 고작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만으로 따지면 세상에 태어난 지 고작 15년밖에 안 된 어린아이였다. 압도적이고 일방적으로 쏟아지는 사랑 속에, 다른 걱정 없이 세상을 보고 우애를 나누며 반짝이는 매일을 즐기기만 해도 족한 시절이었다. 하얀 티셔츠를 쥔 미연은 뒤늦게 다시 한번 절망했다. 자신의 이기심이 현수의 부채가 되었다. 자신의 이익이 은서의 결핍이 되었다. 달라질 스스로를 받아들이지 못해 내팽개친 과거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고 연기처럼 소멸했다. 미연 스스로에게도 깊은 좌절과 흉터를 남기고 사라졌다. 하늘이 무엇을 바라고 우리는 다시 만나게 했을까. 만약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모습 그대로, 모자라지만 넘어지지 않으며 계속 살아갔을까. 아니면 더 훗날, 더 큰 후회를 안은 채 온전히 늙고 완전히 커버린 둘 앞으로 내동댕이쳐졌을까. 하지만 그런 만약은 의미가 없다. 어찌 됐을지 알 수도 없다. 미연이 닥친 것은 지금 이 상황뿐이었다. 그렇다면 이 만남의 의미는 아직 알지 못한다 해도, 분명한 것은 지금 미연이 해야 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터였다.
눈을 감아 넘치는 눈물을 잘라낸 미연은 고개를 들었다. 찾는 옷이 있는 듯이 눈앞의 옷들을 하나씩 헤집기 시작했다. 공연장 앞에서 처음 만났을 때 은서는 커다란 박스티를 입고 있었다. 그나마 또래다운 옷이다. 아니다. 박스티에 또래가 어디 있어. 프린트조차 캐릭터가 아닌 레터링이었다. 그건 은서의 호불호일까 아니면 환경이 안겨준 취향일까.
마땅한 옷을 찾지 못한 미연은 다음 가게로 건너갔다. 그리고 다음 가게, 다시 다음 가게. 찾지 않을 때는 곧잘 나타나던 옷이 막상 찾으면 눈에 띄지 않았다. 한참 동안 번화가를 헤맨 결과, 미연은 마음에 드는 옷을 발견했다. 캐릭터가 프린트된 티셔츠였다. 유치하지도 않고 감각적인 그림들이었다. 그 또래들이 입으면 너무나 잘 어울리지만 다른 또래가 입으면 조금 이상한, 딱 그 나이를 위한 옷들이었다. 유경처럼 전문가의 눈썰미는 없지만 미연은 최대한 은서의 머리스타일, 피부색, 키와 체격, 평소 즐겨 입은 바지와 신발에 맞춰 티셔츠를 골랐다. 늘어놓은 열 장 중에 미연의 마음에 든 것은 세 장뿐이었다. 하나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생쥐 캐릭터가 있었고, 다른 하나는 고양이와 쥐가 익살맞은 표정을 하고 서로 기대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옷은 하얀 바탕에 검은 선만으로 그려진, 꿀단지를 안은 곰과 꼬리가 스프링인 호랑이와 작은 돼지가 하늘을 보고 있는 뒷모습이었다.
얘처럼 오래도록 즐겁게, 이 둘처럼 툭탁여도 사이좋게, 그리고 이 셋처럼, 이 셋처럼.......
고른 티셔츠를 잠시 내려다보던 미연은 이내 니트가 담긴 쇼핑백에 함께 넣었다.
*
밤, 은서의 동네
단 두 개뿐인 그네 중 하나에 은서는 앉아있다. 이 그네에서는 아파트 단지 울타리와 건물들 사이로 가게 앞 신호등이 보인다. 은서는 이 자리를 좋아한다. 저 신호등이 보이는 모든 장소 중에 오래 기다리기 가장 편한 자리니까.
은서는 저 신호등을 지켜보는 것을 좋아한다. 내내 빨간불이던 신호등은 아주 짧은 주홍색 신호만 주고 녹색으로 바뀐다. 그에 맞춰 기다리던 사람들이 일제히 출발한다. 마치 경주를 보는 듯하다. 녹색이 된 신호등 아래에 녹색 숫자도 함께 켜진다. 꽤 큰 숫자로 시작하지만 꾸준히 줄어들다 결국 0이 된다. 그럼 신호등은 다시 빨갛게 변한다. 언제 멈춰야 하는지, 왜 건너가면 안 되는지 설명해주는 친절한 도우미인 셈이다. 어렸을 때부터 은서는 저 신호등을 봤다. 저 신호등을 보며 자라왔다. 어렸을 때는 가게 안에서 소파에 앉아서, 조금 크고 나서는 가게 앞에서 아빠를 기다리며, 더 자란 은서는 지금 이 그네 위에서 다른 누군가를 기다리며. 신호등은 은서의 지난 삶이자 역사와 맞닿는 부분이 있었다. 기다리다 보면 빨간불은 끝이 난다.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예고 없이 시작된다. 만남은 잠시 스쳤다가 다시 멀어진다. 우리가 멀어지는 과정과 속도는 친절하게 숫자로 알려준다. 언제쯤 녹색불이 끝나고, 언제쯤 이 길을 건널 수 없는지 예상할 수 있다. 그러면 다시 기다려야 한다는 것도, 그러다 보면 다시 녹색불이 되어 만나거나 스칠 수 있다는 것을 은서는 일찍부터 알았다.
그런 신호등을 기다리는 일은 은서에게 괴로운 일은 아니었다. 기약이 없는 기다림은 괴롭지만, 은서는 다행히 규칙적인 기다림에 길들여졌고 익숙해졌다. 조금 힘들어도 기다리다 보면 반드시 누군가 은서를 찾아왔다. 웃는 얼굴로 맞이하러 왔다. 카페 소파에 앉아 신호등을 보고 있으면 문득 현수가 고개를 돌려 은서와 눈을 맞췄다. 가게 앞에 쪼그려 앉아 신호등을 보고 있으면 마감을 끝낸 현수는 반드시 내려와 은서의 뒤에 존재를 드러냈다. 작년부터는 이 그네에서 신호등을 보다 보면 희주의 손을 잡은 유경이나 혹은 선약하지 않은 동현이나 수진을 만나기도 했다. 그렇기에 은서에게 기다림은 언제나 약속이었다. 반드시 너를 만나러 오겠다는 약속. 끝까지 기다리게만 하지 않겠다는 약속. 한 번도 그 약속을 받지 못한 적은 없다. 아직 오지 않은 기다림도 있지만, 그건 끝내 오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기다리다 보면 분명 올 거라고 믿었다. 서로 눈을 마주한 채 약속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은서는 그 약속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신호등은 은서가 가진, 사람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상징하는 매개체였다. 저걸 보고 있으면 반드시 온다. 아빠도, 친구도, 그리고 다른 누구도.
*
밤, 동현의 동네
인사를 한 동현은 유리문을 밀고 나온다. 한 손에 치킨과 콜라를 든 동현은 괜히 멋쩍어서 짧은 옆머리를 긁적인다. 이 치킨 가게는 오래되었다고 했다. 이 자리에서 오래 장사를 했다는 뜻이다. 당연히 주인인 강 사장은 현수와도 친했고, 수진과도 친했으며, 덩달아 유경과도 친했다. 그래서인지 유경은 주로 이곳에 주문을 했고, 그걸 찾아오는 것은 으레 학원이 끝난 동현이었다. 그 시간에 맞춰 유경이 주문을 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가게를 방문한 동현을 강 사장 내외는 반갑게 맞아준다. 그게 자연스러운 일임을 알면서도, 아직 고등학생인 동현은 때때로 그 친절이 부담스러울 때가 많았다. 고맙지만 쑥스럽고, 좋으면서 부대끼는 그런 기분. 오늘도 이런저런 질문에 대답을 하고, 불쑥 건너온 농담에 객쩍은 웃음을 흘리고, 치킨무와 소스를 더 넣어준다는 것을 극구 사양하면서 힘겹게 가게를 빠져나왔다. 아직 현수나 유경처럼 넉살 좋게 대꾸하고 받아들이는 요령은 동현에게 없었다. 그러니 괜한 머리만 긁으며 웃음으로 때울 뿐이다.
치킨 가게는 유경의 옷 가게와 집의 중간쯤이다. 길을 건너지 않아도 아파트 상가와 작은 놀이터 사이로 들어가면 곧장 집에 나온다. 샛길로 접어든 동현은 놀이터에서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하다. 그늘져있어도 체형, 고개를 숙인 정도, 그네가 앞뒤로 흔들리는 속도나 범위 등으로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챈다. 내내 바위처럼 단단하던 동현의 표정이 묽게 풀린다. 스스로 깜짝 놀라 손바닥으로 얼굴을 두드린 동현은, 마치 어느 옷가게 사장이 그러는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놀이터로 다가간다. 동현은 괜히 마음이 울렁거린다. 탄력 있는 우레탄 바닥이 고운 모래처럼 푹푹 빠지는 기분이다. 그네에 가까이 다가간 동현이 동그란 정수리 위로 그늘을 드리운다. 그제야 은서는 고개를 돌려 얼굴을 확인한다. 잠시 놀랐던 얼굴은 상대가 동현임을 확인하자 꽃처럼 활짝 편다. 그 표정 따라 동현의 마음속에서도 가로등 같은 하얀 꽃이 핀다.
“뭐해?”
짐짓 무뚝뚝하게 동현이 묻는다. 치킨을 든 손을 몸 앞으로 할까, 아니면 뒤로 할까, 그런 고민을 하면서. 동현의 말에 은서의 미소가 한층 진해진다.
“오빠 기다렸어.”
은서의 얼굴과 마주 한 동현은 두 가지 이유로 명치가 찌릿해진다. 원래라면 치킨을 미끼 삼아 함께 집으로 갈 것이다. 유경은 모르는 일이지만, 반대로 중간에 만난 은서를 데려가지 않으면 오히려 불 같이 화를 낸다. 유경의 화보다 더 무서운 것은 희주의 삐진 얼굴이다. 안 만났으면 모를까, 만났으면 함께 가야 했다. 치킨이 모자라면 유경이 만두라도 튀길 테니까. 하지만 동현은 치킨을 든 손을 엉덩이 뒤로 숨긴다. 지금 동현을 올려다보는 은서의 미소는 아주 예뻤지만, 왠지 모르게 아주 아프기도 했다. 보는 사람의 마음 바닥을 두부처럼 으깨는, 외진 골목에 홀로 선 가로등 같은 미소였다. 동현은 순간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고민한다. 빠르게 대화를 마무리 짓고 사라져야 할까. 아니면 왜 그러냐고 물으면 될까. 아무리 눈치가 없는 동현이라도 후자는 아니라고 확신했다.
“치킨 샀어?”
동현의 고민을 아는 것처럼, 은서가 먼저 말을 꺼낸다.
“응. 엄마가 사 오라고 해서.”
대화가 이렇게 진행된 이상, 은서의 성격 상 뒷말은 뻔하다. 식으면 안 되니 얼른 가라고 할 것이다. 그럼 오늘의 동현은 ‘같이 갈래?’라고 묻지 못한 채 애매한 인사를 남기고 퇴장할 것이다.
“그럼 잠깐만 앉을래?”
벌레 물리니 얼른 들어가. 생각 있으면 너도 와. 끝인사를 이 두 개까지 좁힌 동현에게 은서가 불쑥 묻는다. 동현은 꿀 먹은 듯 대꾸하지 못하다가, 이내 엉거주춤 옆 그네에 엉덩이를 걸친다. 치킨은 들고 있기도 안고 있기도 이상해서, 바닥에 슬며시 내려놓는다.
잠시 말없는 바람만 둘 사이를 지나간다. 동현은 문득 담배가 피고 싶어졌으나, 가장 보이기 싫은 사람 옆이라 주먹을 꼭 쥔다.
“근데 진짜 뭐 하고 있었어?”
동현의 물음에 은서는 그네를 앞뒤로 흔들며 대꾸한다.
“진짜 오빠 기다렸어.”
동현은 대꾸 없이 같이 그네를 흔든다.
“정확히는, 누군가가 오길 기다렸는데. 그게 오빠였으면 가장 좋겠다고 생각했어.”
은서가 이런 말을 할 때면 동현은 종종 혼란스러워진다. 하지만 섣부른 생각을 하기에는 언제나 말하는 내용에 비해 은서의 눈빛이 너무 맑았다.
“왜?”
“내가 예를 들어볼게.”
동현의 말에 은서는 마치 중간을 건너뛴 것처럼 대꾸한다.
“오빠 연애해본 적 있어?”
동현은 뜨끔한 심정을 최대한 숨기며 고개를 저었다. 은서는 동현의 대답을 예상한 것처럼 말을 잇는다.
“그럼 예를 들어 오빠가 누군가와 사귀었다고 하자. 그러다 상대가 싫어서든,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든 오빠 쪽에서 상대에게 헤어지자고 했어. 상상했어?”
동현은 고개를 끄덕인다.
“근데 나중에, 어디선가 헤어진 그 사람과 우연히 만난 거야. 정말 예상 못하게 우연히. 그려져?”
동현은 다시 끄덕인다.
“만났으니 인사 정도는 하겠지. 인사만 하고 헤어져. 그러고는 어지간하면 다시 만날 일은 없겠지. 근데 오빠가 그 여자를 찾아간 거야. 다시 우연히 만난 게 아니라, 만나겠다는 의지를 가진 오빠가 여자를 찾아가. 가서 얼굴을 보고, 같이 차를 마시며 대화를 해.”
동현은 곁눈질로 은서를 살핀다. 지금 은서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럼 그때 오빠는 무슨 심정일까?”
“뭐?”
“왜 찾아갔어? 우연히 만난 후에, 왜 굳이 다시 만나러 갔냐고.”
은서와 눈이 마주친 동현은 마음이 덜컥 내려앉는다. 그런 적도 없고 그럴 사람도 없지만, 마치 그랬던 것처럼 추궁받는 기분이 든다. 자칫 사과할 뻔한 동현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은서의 이야기에 몰입한다. 나는 왜 다시 찾아갔을까.
“미련이 남았나.”
“무슨 미련?”
“글쎄. 그 여자와 다시 잘해보거나 거기까진 모르겠지만, 다시 보고 싶어서 간 거 아닐까.”
은서는 동현을 뻔히 보고 있다.
“어쨌든 우연히 만난 그 한 번으로는 만족이 안 되니 찾아간 거겠지.”
그게 아니면 이유가 없잖아. 말을 잇던 동현의 목소리는 점차 작아진다. 제 갈 길을 찾아간 은서의 얼굴만큼 끝부분은 거의 속삭이듯 말한다. 은서는 대꾸 없이 정면을 보고 있다. 시선을 따라가니 아마 신호등, 이 자리에 앉은 은서가 어제도 그제도 보고 있던 그 신호등이다. 동현은 본능적으로 입을 다문다. 지금 은서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것을 확보해주기 위해 기척도 내지 않고 있다.
다시 조용한 바람만 몇 차례 지나간다. 은서는 눈은 은하수처럼 반짝이다가 죽어가는 별처럼 암울하게 젖어든다. 공전에 따라 흘러가다가 별똥별처럼 떨어져 내린다. 곁에서 그 모든 것을 지켜보던 동현은 순간 화들짝 놀란다. 주머니에서 진동을 빙자한 소리가 적막한 놀이터 가득 울린다. 고개를 돌려보니 퍼뜩 깨어난 은서가 어서 받으라는 손짓을 보내는 중이다.
“여보세요.”
“야! 병아리 많이 컸냐!”
수화기 너머에서 우렁차게 울리는 목소리에 동현의 미간이 깊게 떨어진다. 이 마녀는 진짜 분위기 파악 좀. 그 표정이 어지간히 처참했는지 은서는 오늘 처음으로 맑은 소리를 내며 웃는다. 동현은 이를 가는 목소리로 낮게 속삭인다.
“가는 길이야.”
“개뿔. 강 사장이 너 가고 나서 스포츠 하이라이트를 다 봤다더라! 놀이터에서 담배 피우냐!”
“아니야. 은서랑 같이 있어.”
“그러면 담배는 안 폈겠고! 끌고 와!”
유경의 뒤에서 ‘끌고 와! 끌고 와!’ 노래하는 희주의 목소리도 들린다. 동현이 슬쩍 옆을 보자, 은서는 고개를 길게 내밀어 휴대전화 가까이 입을 댄다. 그로 인해 동현과 은서의 얼굴이 부쩍 가까워진다.
“이모! 오늘은 일이 있어서 다음에 갈게요!”
“희주야! 은서가 우리를 버렸다!”
모녀의 가짜 울음소리에 은서가 다시 웃음을 터트린다. “끊어!”라고 외친 동현은 서둘러 전화를 끊는다. 밤이라 선선한 바람이 부는데도 얼굴이 벌겋게 뜨겁다. 동현은 부랴부랴 치킨을 쥐고 일어선다.
“다 식었겠다. 미안해.”
은서는 동현을 올려다보며 미안한 얼굴을 보인다. 동현은 뭐라 대답할까 궁리하다가 그냥 손을 내젓는다.
“그리고 고마워. 얼른 들어가. 이모랑 희주 배고프겠다.”
“벌레 물리니 얼른 들어가.”
둘 중 하나만 남은 인사말을 남기고 동현은 등을 돌린다. 한참을 걸어가다 돌아본 놀이터에서, 은서는 아까와 같은 포즈로 동현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