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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날씨

2. 현수와 미연 : 가족인형 2

by 이한얼






점심, 미연의 회사 옥상

회사생활을 한지는 벌써 십 년이 넘었지만, 이 회사로 이직한 것은 두 달 전이었다. 하지만 고작 두 달 사이에 퇴사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하는 순간이 매일 세 번쯤 찾아왔다. 첫 번째는 출근하는 부장을 보았을 때, 두 번째는 점심시간 지나 부장을 보았을 때, 세 번째는 어느 순간 훌쩍 사라졌다가 기름기 없이 보송보송해진 머리칼을 하고 사무실로 들어오는 부장을 보았을 때였다.

미연은 지금도 담배를 껌처럼 씹으며 퇴사를 고민 중이었다. 회사 옥상에 있는 팔각정 한편에서 마침 두 번째 담배가 재떨이로 들어갔다. 한 대를 더 피우고 그만둘지, 내일 아침에 그만둘지 고민하는 미연의 이마 위로 작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고개를 드니 역광을 등진 단발머리가 보였다. 여자는 웃는 얼굴로 미연에게 종이컵을 내밀었다.

“또 그거 피우고 그만둘까, 내일 아침에 그만둘까 고민 중이에요?”

누군지 확인한 미연은 우선 종이컵부터 받아 들었다. 그리고 평상 끄트머리에 담배 필터를 두드리며 말했다.

“혜인아. 내가 말이야.”

“네. 부장 골프채에다 똥을 싸고 퇴사하겠다고요?”

미연이 투덜거리려는 폼을 잡자 혜인은 재빨리 말을 잘랐다. 그리고 언제 꺼냈는지 라이터를 쥐고 미연에게 내밀었다. 밝은 한낮에 피어오른 불꽃. 담배도 안 피우는 애가 라이터는 왜 들고 다니는지. 뭐라 덧붙이려던 미연은 이내 웃으며 담배를 가져다 댔다. 연기가 연달아 올라오자 혜인은 라이터를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그리고 미연의 곁에 나란히 앉아 자신의 캔 음료를 땄다.

“또 왜 그래요? 부장이 과장님 사랑한대요?”

“그날이 진짜 골프채에 똥칠하는 날이야.”

“그럼 또 일정이랑 동선 개똥 같이 짜 놓고 과장님한테 수습하래요?”

준비한 대본을 읽는 듯한 혜인의 말투에 미연은 담배를 피우다 말고 혜인을 봤다. 혜인은 맑고 동그란 눈으로 미연을 보고 있었다. 그 넉살 맞은 표정에 미연은 웃음이 터졌다. 어깨가 들썩이는 만큼 벌어진 입에서 연기가 몽글몽글 새어 나왔다.

“솔직히 말해. 너 부장이 보낸 첩자냐?”

“박 주임 놈만 눈앞에서 치워주면 할 수도 있는데.”

혜인은 싱글벙글 웃으며 미연의 말을 족족 받아쳤다. 웃는 얼굴로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화난 부분을 다독일 줄 알았다. 감정의 맥락을 정확히 짚으면서 필요한 말을 그때그때 꺼내는 재주도 가졌다. 십 년 가까이 알고 지냈지만 여전히 대단한 후배였다. 귀국한 미연을 익숙한 제약 행사 회사가 아닌 연예행사 회사로 옮기게 한, 그리고 부장의 난장에도 퇴사하지 않게 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이기도 했다.

미연은 말없이 담배를 피웠다. 미연의 표정에 독기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혜인도 그제야 어깨를 늘어트리며 편하게 음료를 마셨다. 유월의 한낮은 언제나 묘한 날씨였다. 햇볕은 따가운데 바람은 시원했다. 움직이면 덥지만 그늘에 가만히 있으면 제법 쾌적하게 느껴졌다. 미연과 혜인은 나란히 앉아 불어오는 바람을 즐겼다. 좋아하는 담배와 자판기 커피, 그리고 애정과 역사가 가득한 친구 같은 후배와 함께 있으니 미연의 복잡하던 마음도 점차 성기게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곧 세 번째 담배도 끝이 나고, 종이컵도 비워졌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꺼내보니 화면에는 ‘유경 언니’라고 적혀있었다. 이름을 보자마자 왠지 불안감이 몰려왔다. 잠시 망설이는 미연을 혜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하긴, 고민할 일이 아니었다. 미연은 화면 하단의 녹색 버튼을 오른쪽으로 밀었다.

“나 지금 막 기분이 좋아졌으니 좋은 얘기만 해야 할 거야.”

미연의 선포에 수화기 너머에는 잠시 말이 없었다. 미연도 가타부타 덧붙이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곧 작은 목소리로 이어진 이야기는 이내 민망함을 때우려는 빈 웃음으로 끝이 났다. 유경의 말이 끝났음에도 미연은 여전히 대꾸가 없었다. 옆에서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던 혜인의 눈에 미연의 목 부분 깃이 뒤집혀있음을 발견했다. 가까이 붙어 앉아 그것을 바로 잡는데 미연이 긴 한숨을 바닥으로 쏘아 보냈다. 화들짝 놀란 혜인의 손이 재빨리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그래서 그 티켓으로 불우이웃을 도왔다고?”

“응. 그렇게 됐다.”

“언니가 구해 달래서 어렵게 챙긴 거 알지?”

“알지.”

“그럼 티켓 더 없는 것도 알고?”

“있는 줄 알았지.”

잠시 생각에 빠졌던 미연이 “잠깐만”하며 귀에서 휴대전화를 때어냈다. 그리고 시선을 혜인 쪽으로 돌렸다.

“오늘 부장 간대?”

“리허설까지만.”

“빈자리 없지?”

“없어요.”

“만들 자리 나와?”

“좁아서 안 나와요.”

미연이 다시 생각에 빠지려 하자 혜인이 생각을 잘랐다.

“그 언니라는 분? 티켓 누구 줬대요?”

미연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혜인이 걱정 말라며 웃었다.

“오늘 선배 없어도 되니까, 친한 사이면 콘솔 근처에 적당히 의자 두고 보세요.”

그렇게 말하며 혜인은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미연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휴대전화를 가져왔다.

“언니. 일단 오늘 다섯 시까지 공연장 앞으로 와. 달린 두 발은 누구 주고 싶어도 못줄 테니 오는 건 문제없지?”

시끄러워지는 수화기 너머로 알았어, 시끄러워, 끊어, 라고 연달아 뱉은 미연이 휴대전화를 팔각정 끝부분까지 길게 밀어버렸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네 번째 담배를 꺼냈다. 본인이 너무 나선 게 아닌가 싶어 미연의 눈치를 보던 혜인이 서둘러 라이터를 내밀었다. 눈앞으로 불쑥 들어온 라이터에 불을 붙인 미연은 연기를 한 번 길게 뿜어내고는 혜인을 바라봤다. 그리고 잠시 후, 대뜸 혜인의 머리를 끌어안으며 흔들었다.

“요 기특한 것! 어쩜 이리 하는 짓마다 예쁠까!”

“선배! 담배! 언니! 나 머리! 탄다!”

놀란 혜인이 품 안에서 버둥거려도 미연은 한동안 혜인을 놓아주지 않았다.


*


점심, 현수의 가게

안으로 들어서니 가장 먼저 커피 향과 마주친다. 담배 냄새와 섞여있는 오묘한 냄새. 현수의 몸에서도 늘 그 냄새가 났다. 그 향을 한 줌씩 들이키며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창가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궁상맞은 뒷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평소처럼 우물쭈물거리면 될 일도 안 될 걸. 지금 그 녀석에게 필요한 건 맹목적으로 믿고 매달릴 수 있는 확신이라고.’

헤어지기 전 유경의 마지막 말을 마음속으로 되뇐다. 주춤거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굽었던 어깨와 허리를 곧게 편다. 아랫배에 힘을 주는데 마침 현수가 낮게 한숨을 뱉어낸다.

“바닥 꺼지겠어요.”

평소 조근 했던 말투와 다르게,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힘 있는 목소리가 현수의 뒤통수를 두드린다. 그 소리에 현수는 고개를 돌린다. 품에 한 보따리 안은 수진은 마주 웃어준다.

“수진 씨 왔구나.”

노쇠한 닭처럼 인사한 현수가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거둔다. 수진은 근처 테이블에 짐을 내려놓고 현수 옆에 선다.

“오빠가 좋아하는 거 사 왔어요. 점심 아직 안 먹었죠?”

“그렇긴 한데 별로 생각이 없네.”

“좋아하는 밥을 다 마다하고. 무슨 일 있었어요?”

에이, 요리할 맛 안 나게. 식재료를 뒤적이며 수진은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현수를 떠본다. 현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아까 유경에게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한번 풀어놓는다. 수진은 중간중간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이거나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기도 하면서 최대한 현수의 말을 경청한다.

“오빠.”

이야기를 끝낸 현수가 다시 어깨를 늘어트린다. 수진은 조용히 현수를 부른다. 현수가 고개를 들자 수진은 의외로 별 거 아니라는 표정이다.

“뭘 그런 걸로 고민하고 있어요?”

“나한테는 심각해.”

“아무리 은서 일이라지만 너무 집중하셨네요. 잘못을 했으면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한다. 그게 평소 철칙이잖아요.”

이해도 가고 인정도 하지만 스스로에게 결부시키기 어렵다는 듯 현수는 미간을 구긴다. 워낙 자신에게만 금제가 많고 냉정한 사람이니까. 수진은 문득, 그런 현수의 표정에 욕심이 난다. 나에게도 그런 표정을 지어줄까요. 나였어도 그렇게 고민해줄까요. 은서만큼은 바라지도 않을 테니 그 반의 반만큼이라도. 꼬리의 꼬리를 무는 생각이지만 어쨌든 지금은 욕심을 부릴 때가 아니었다. 현수처럼 수진 역시 스스로보다 우선순위가 되는 자리를 가진 사람이었다. 비록 그 자리의 주인이 아직 자신의 위치를 깨닫지 못했다 하더라도, 수진에게 현수는 명확한 그 자리의 주인인 것이다. 수진을 그렇게 자신의 욕심을 잠시 접는다.

“좋아요. 그렇다면 제가 길을 제시해드릴게요.”

수진의 말에 퀭한 눈동자가 동그래진다.

“좀 있으면 은서가 돌아오죠? 그럼 가서 ‘오늘 잘 해결됐니?’라고 해요. 그리고 오늘 스케줄을 물어보고, 아무 일 없다고 하면 사과하는 의미로 놀러 가자고 해요. 요즘 은서랑 어디 간지도 한참 되었죠?”

“그렇지. 오월 셋째 일요일에 갔으니.”

어이구. 고작 이주 전이 오래라니. 수진은 다시 한번 얄궂은 사람에게 마음을 주고 있음을 자각한다. 언니 말대로 이 젊은 나이에 고생을 사서 하네. 스스로 아무리 고민해도 제자리일 생각을 하면서 수진은 말을 잇는다.

“그래요. 그러니 놀러 가자고 그래요. 어른답게. 아빠답게. 아! 생각해보니 얼마 전에 은서랑 얘기하다가 보고 싶다는 공연에 대해 들었는데.”

“나도 찾아봤는데 진작 매진이래.”

수진은 꼬마처럼 웃으며 주머니에서 팔랑거리는 종이 두 장을 꺼낸다. 인쇄된 글자와 사진은 은서가 보고 싶다고 하던 그 공연의 표다. 날짜는 오늘. 시간은 오후 여섯 시. 현수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수진은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표를 살랑살랑 흔든다.

“어때요? 이 정도면 되겠죠?”

“우와! 수진 씨. 그 표 어디서 구했어?”

“어, 그러니까.”

‘내가 줬다는 것은 절대 비밀이야!’

지금 현수가 짓는 표정으로 같은 질문을 한 수진에게 내린 유경의 엄포였다.

‘어이구. 내가 왜 그 녀석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건지.’

투덜대면서도 쑥스러울 때 보이는 유경 특유의 입 꼬리가 생각나 수진은 웃음이 나온다. 하지만 이 사실을 현수에게 말했다간 등골이 시원해지는 눈초리가 삼일 정도는 뒤통수에 붙어 다닐 것이다. 그 생각에 수진은 얼른 엄한 표정으로 바꾼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자요. 얼른 가서 점수 따와요.”

“그래도.”

손은 정직하게 앞으로 나오면서도 입은 여전히 망설이고 있다.

“아, 정말! 이번에는 내 말대로 해요. 이 강수진 님이 백 프로 장담하는데, 이걸로 한방에 만사 오케이라니까요.”

아무튼 이럴 땐 영락없이 애라니까. 속으로 툴툴거리며 현수의 손에 표를 꾹꾹 쥐어준다. 현수는 한동안 표를 내려다본다. 그리고 언제 궁상떨었냐는 듯 환하게 웃는다. 현수가 수진의 두 손을 꼭 쥔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수진의 어깨가 한껏 움츠려 드는 것도 모른 채 현수는 손을 마구 흔든다.

“수진 씨, 고마워. 내가 이 은혜는 꼭 갚을게.”

손을 크게 두어 번 더 흔든 현수는 수진이 들고 온 식재료를 안아 든다.

“오늘 하루 종일 공복에 고민만 했더니 배가 엄청 고프네. 수진 씨도 배고프지? 내가 정말 맛있는 점심 대접할게. 아, 이거 수진 씨가 사 온 거였지?”

요상한 웃음을 흘리며 카운터 안으로 향하는 뒷모습을 보니 긴장했던 어깨가 내려온다. 순간 혀끝에 걸리는 맛에 수진의 표정이 씁쓸하게 변한다. 눈치도 없고, 나이도 많고, 애도 있고. 바닥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혼자 투덜거린다한들 어쩌겠는가. 이미 쏘아진 화살인걸. 활만 든 채 무장해제된 수진으로서는 부디 그 화살이 목표물에 정확히 안착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


저녁, 공연장 앞

은서는 지금 세 명의 남자로 인해 싱글벙글하다. 보고 싶었지만 표를 구할 수 없어 포기해야 했던 공연을 보고 나온 직후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기쁜 것은 분명 하교한 은서의 등장에 혼자 쥐구멍이라도 찾으며 한껏 움츠리고 있을 줄 알았던 현수가 전에 없이 당당한 모습이었다. 물론 약간 자신 없는 표정이긴 했지만 그만 해도 얼마나 큰 발전인지. 게다가 정말 모든 일들이 알쏭달쏭했던 동현의 말대로 풀려간 것이다. 이러니 은서의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표정이 풍부한 은서이기에 자연히 현수도 은서 얼굴을 보며 푼수 같은 얼굴이 되는 건 당연했다.

“우리 딸. 엄청 마음에 들었나 보네.”

“그런 것도 있지만, 오늘은 기분 좋은 일들만 가득해서.”

아침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현수는 눈곱만큼 존재하는 눈치로 막 튀어나오던 말을 도로 삼킨다. 어쨌든 은서의 기분이 좋다면 더 바랄 게 없다. 은서보다 더 환한 얼굴로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가는 현수의 손을 은서가 살짝 잡아당긴다.

“근데 이 표 어디서 났어?”

“아, 그게, 그러니까.”

‘제가 줬다고 말하면 두 번 다신 안 도와줄 거예요!’

밥을 먹다가 눈앞으로 불쑥 들어온 숟가락이 그렇게 외쳤다. 고개를 들어보니 수진은 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왠지 의기양양해 보였다. 세 번쯤 고민하다 ‘왜?’라고 물어봤지만 수진은 ‘그냥 한 번 따라 해 보고 싶었어요’라는 알 수 없는 말을 할 뿐이었다. 현수로서는 눈만 몇 번 끔뻑이다가 알겠다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아빠?”

“그냥, 어디서 얻었어.”

“우리 아빠 능력 좋네.”

은서의 팔꿈치가 현수의 옆구리를 몇 번 찌르자, 현수가 상체를 뒤로 꺾으며 웃어젖힌다. 그런 모습이 창피한 은서는 주변 눈치를 살피며 현수를 얼른 끌어당긴다.

“아빠. 나 배고파.”

“그럼 이 근처에서 먹고 갈래? 뭐 먹을까? 맛있는 거 먹자.”

“많이 먹으면 살찌니까 적당히 만두 같은 거 먹자.”

“만두로 밥이 돼? 유경 씨가 우리 딸내미 입맛 다 버려놨구먼!”

“희주 덕분에 만두가 엄청 좋아지긴 했지.”

현수는 주변을 둘러보다 마침 적당히 깔끔해 보이는 만두집을 발견한다. 아마도 은서는 이미 이 집을 발견하고는 밥을 먹고 가자 말한 듯싶다. 현수가 은서의 손을 잡고 만두집으로 들어가려던 차에 안에서 나오는 여자와 입구에서 마주친다.

“어!”

셋은 동시에 이렇게 외친다. 시선이 엉킨 상태로 셋은 잠시 움직이지 않는다.

“나 참. 누가 부녀 아니랄까 봐 반응도 똑같데.”

회복이 빠른 유경이 먼저 농담을 던진다. 현수는 시선을 유경에게 두고 고개만 은서 쪽으로 숙여 다 들으라는 듯이 속삭인다.

“와!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은서야. 우리 오초만 늦게 욕했어도 이모가 다 들었겠다.”

그러자 은서가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나며 고개를 젓는다.

“이모. 우리는 오초 전에도 욕 같은 건 안 했지만, 만약 했다면 그건 아빠 혼자 한 거고 전 가만히 있었어요.”

이번엔 유경이 한 걸음 다가와 현수의 멱살을 잡는다.

“어이. 네 딸내미가 저리 말하는데? 그럼 난 너만 조지면 되는 거지?”

“은서야. 어떻게 아빠한테 이럴 수가.”

유경에게 잡혀 울상이던 현수의 시선이 유경의 뒤에서 전표를 접으며 나오는 여자에게 닿는다. 그 순간 급격히 말이 끊긴다. 그리고 평소에도 늘 희미하게 웃고 있는 얼굴에서 표정도 함께 사라진다. 현수의 뒤에 서있던 은서나 마침 뒤를 돌아본 유경은 현수의 표정을 보지 못한다. 뒤이어 나온 여자만 현수와 눈이 마주친다. 옷깃이 잡힌 상태로 무표정하게 서있는 남자를 잠시 살펴보던 여자의 눈 속에 순간 알 수 없는 빛이 터진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대한 당황과 불신. 불의의 사건으로 빗겨진 여자의 가면이 유경의 말에 빠르게 제자리로 돌아온다.

“아! 잘 먹었다.”

유경이 웃으며 다시 고개를 돌린다. 이제야 현수가 눈에 들어온다. 현수는 가만히 유경의 너머를 보고 있다. 아직까지 멱을 잡고 있음을 깨달은 유경은 화들짝 손을 놓는다. 현수는 시선은 그대로 둔 채 오른손으로 구겨진 깃을 문지른다. 우리끼리야 자주 하는 장난이지만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현수에게 망신을 줬다는 생각에, 세상 눈치를 다 집어삼킨 유경도 평소와 다른 현수의 표정을 놓친다.

“인사해. 이쪽은 내 대학 후배인 조미연 씨. 이쪽은 우리 가게 맞은편 카페 사장 이현수 씨. 그리고 현수 씨 딸이야.”

유경의 소개에도 현수에게 인사말이 나오지 않자 적당한 타이밍에 미연이 먼저 선수를 친다.

“요즘 옷 장사하는 사장님들은 맞은편 카페 사장님 정도는 이 사람 많은 장소에서 멱살도 잡고 그러나 봐?”

“아, 그게. 우리가 좀 친해서.”

당황한 유경은 현수의 표정에 이어 미연의 묘한 어투도 잡아내지 못한다. 유경이 뒷머리를 긁적이는 동안 미연은 현수를 바라보며 말한다.

“조미연입니다.”

미연의 인사에 한 박자 늦게, 현수도 인사를 맞춘다.

“이현수입니다.”

무난한 인사가 끝나고 미연은 현수의 뒤로 시선을 돌린다. 그곳에는 흰색 반바지에 노란색 박스티를 걸친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서있다. 노란 티에는 검정 흘림체로 ‘crescendo'라고 레터링 되어 있다. 미연의 눈길에 은서는 빨간색 운동화를 모으며 고개를 숙인다.

“안녕하세요. 이은서입니다.”

은서의 인사에 미연의 눈이 먼 산을 바라보는 것처럼 아득해진다. 미연은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드는 얼굴을 유심히 바라본다. 작은 얼굴과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살피느라 잠시 대답이 없다. 유경이 의아하게 느낄 정도로 공백이 흐르고 나서야 미연의 입술이 열린다.

“반가워. 몇 살이니?”

“열일곱이에요.”

“나이보다 더 어려 보이네. 나는 지금 서른일곱이야.”

“아. 언니, 도 많이 동안이신 것 같아요. 피부도 좋으시고.”

잠시 호칭에 대해 고민하던 은서는 결국 모날 리 없는 언니로 마무리한다. 언니라는 말에 미연의 얼굴이 이상해진다. 어색하면서도 웃긴 표정이다. 그 모습에 은서는 자신이 뭔가 잘못한 건지 슬쩍 현수의 눈치를 본다. 미연은 얼른 표정을 가다듬고 미소를 드러낸다.

“이제 아줌마인데 동안 소리도 듣고, 피부 좋다는 얘기도 듣고. 좋네.”

“여긴 웬일이야?”

불쑥 끼어든 말에 세 명의 시선이 현수에게로 향한다. 현수의 눈은 유경을 보고 있지만 손은 은서를 자신의 등 뒤로 끌어당기고 있다. 잠시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있던 유경이 현수의 말에 대꾸하는 사이, 미연은 철렁했던 마음을 진정시킨다.

“보다시피 아는 동생이랑 밥 먹으러.”

여기 만두집이 그렇게 유명했나? 동네 죽순이가 삼십 분이나 걸리는 여기까지 나올 정도로. 이상함을 느꼈지만 현수는 더 이상 묻지 않는다. 지금은 이 자리에서 벗어나는 게 가장 급했다. 알겠다는 듯 끄덕인 현수는 은서에게 고개를 돌린다.

“은서야. 생각해보니 점심에 수진이가 만두전골 끓였는데. 너 준다고 남겨놨었어.”

“응? 언니가? 그럼 진작 말하지.”

수진이? 아빠가 언니를 이름으로만 부른 적이 있던가. 은서는 잠시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반사적으로 대꾸한다.

“아빠가 깜빡했어. 우리 집에 가서 그거 먹자.”

“알았어요.”

은서의 대답을 들은 현수가 유경에게 묻는다.

“당신은 이제 집에 가는 거야?”

“좀 고민 중이야. 술 한 잔 할지 아니면 그냥 들어갈지.”

“오랜만에 나왔는데 좀 더 놀다 와. 오늘 동현이 학원 안 가는 날이니까 희주 혼자 있는 것도 아니고. 애들 저녁은 내가 먹일 테니까.”

“정말? 웬일로 알아서 예쁜 짓을 다 하실까?”

“난 원래 여기저기 다 예뻤어.”

“그럼 난 오늘 좀 놀다 가야겠다.”

“차키 줘. 택시 타고 와.”

“흠집 내면 네 얼굴도 똑같이 긁어준다.”

“내가 먼저 요구르트 뚜껑도 못 열 정도로 손톱을 바짝 깎아줄게.”

말을 마친 현수는 은서를 잡아끌며 유경의 옆쪽으로 작게 고개를 숙인다.

“그럼.”

“예. 다음에 또 봬요.”

불쑥 뱉은 미연의 말에 현수는 대꾸 없이 등을 돌린다. 현수가 먼저 걸어가자 현수의 손에 끌려가던 은서가 대신 고개를 숙인다.

“다음에 봬요, 언니.”

“그래. 또 보자.”

“은서야! 이모가 나중에 아이스크림 사 가지고 갈게.”

“네! 먼저 가있을게요!”

뒷걸음치며 인사를 나눈 은서가 현수와 함께 멀어진다. 남은 두 여자의 시선도 한동안 부녀의 뒷모습을 쫓는다.

“저 녀석이 오늘따라 왜 저러지. 똥 마렵나.”

사정을 알길 없는 유경만 머리를 긁적일 뿐이다.


*


밤, 미연의 집

유경과 술자리는 없었다. 부녀와 헤어지고 술집을 향해 가던 길에, 휴대전화를 확인한 미연은 다시 공연장에 가봐야 할 일이 생겼다며 유경에게 양해를 구했다. 유경은 그런 일로 예민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럴 수도 있지. 그럼 다음에 봐. 개의치 않고 미연의 등을 떠밀었다. 유경이 먼저 떠났고, 미연은 공연장이 아닌 도로로 향했다. 일이 생겼다는 건 거짓말이었으니까. 정확히는 일이 생긴 건 공연장이 아니라 미연 자신이었다. 미연은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다.

미연의 방은 여전히 적막했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소파 위에 방치된 미연은 문득 창밖에서 시선을 거뒀다. 아직 밝을 때 앉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해가 사라져 있었다. 파란 하늘은 검푸른 물감을 섞은 듯 점차 어두워졌다. 그에 따라 집안도 함께 컴컴해지기 시작했다. 끌어안은 발치에는 재떨이로 쓰는 접시뿐이었다. 아무렇게나 뭉친 휴지 위에 꽁초가 하나, 둘, 셋. 열두 개까지 세던 미연은 이내 덧셈을 집어치웠다. 부지불식간에 태워버린 꽁초의 개수를 세는 건 아무 의미도 없었다. 리모컨부터 찾은 미연은 TV를 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재떨이를 들고 바닥에 깔린 물건들을 피해 부엌으로 가던 중에 커다란 소음이 미연의 등을 덮쳤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터트리는 웃음소리. 마치 천둥 같은 울림에 놀란 미연은 재떨이를 떨어트렸다. 사방으로 흩어진 재와 꽁초보다 미연은 소파로 달려갔다. 허겁지겁 리모컨을 찾아 소리를 줄이기 시작했다. TV를 켜면 음소거가 풀려있다는 것을 깜빡했다. 삼에서 출발한 음량은 영까지 금방이었다. 완전히 음소거가 된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미연은 돌아와 꽁초를 주웠다. 다시 하나, 둘, 셋. 흩어진 꽁초는 모두 열세 개였다. 아까 하나만 더 셀걸. 그럼 전부 셌던 건데. 안 했으면 모를까 왜 항상 마지막 직전에 멈추는 건지. 미연은 콧등을 찡그리며 주방에 둔 쓰레기봉투에 꽁초와 젖은 휴지를 쓸어냈다. 그리고 불을 켰다. 머리 위에서 작은 할로겐 조명이 노란빛을 뿜어냈다. 조리대 위를 굴러다니는 휴지를 접시에 쑤셔 넣고 물을 받아 축축하게 재웠다. 묵직해진 재떨이를 소파 앞에 둔 미연은 근처 짐 더미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이 집으로 이사 온지도 벌써 한 달이었다. 필요한 건 이미 꺼내놓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아직 풀지 않았다는 건 그리 자주 사용하는 물건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혹은 이제는 필요 없는 물건일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저 놔둘 수만은 없었다. 하루에 한 상자, 혹은 일주일에 한 더미라도 정리할 생각으로 미연은 짐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구분 없이 쌓인 곳에서 온갖 물건이 튀어나왔다. 포장된 부피보다 더 많은 물건들이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그러다 미연의 손이 어느 상자 앞에서 멎었다. 박스 가장 아래, 위에 있는 물건을 모두 치워야만 겨우 꺼낼 수 있는 물건이었다. 노란 배경에 흰색 패턴이 찍혀있는 흔한 상자. 이제는 오래되어 누렇게 변한 상자를 미연은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마치 처음 보는 물건처럼 미연은 한동안 눈으로만 상자를 만졌다. 들고 있는 손끝이 잘게 떨렸다. 미연은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주 살짝, 뚜껑의 한쪽 모퉁이를 들어 올렸다. 그럴 리가 없음에도 미연은 아주 오래된, 퀴퀴하게 묵은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물건이 아닌 사람의 마음에서, 그중에서도 가장 밑바닥에 오래 고인 웅덩이에서 나는 냄새였다. 사람을 찌르고, 뒤흔들고, 등판부터 갈아 즙처럼 짜낼 수 있는 기억에서 만들어지고, 마음으로 맡을 수 있는 그런 냄새.

열린 상자 안은 단출했다. 둘둘 말아 고무줄로 잡아놓은 종이 한 장. 그리고 작은 인형뿐이었다. 빨간색 옷을 입고 있는 엄마 인형. 인형과 눈이 마주쳤다고 느낀 순간, 미연은 상자를 덮었다. 파도가 발치까지 치민 것처럼 앉았던 자리에서 화들짝 일어섰다. 전에 살던 집에서 이 상자를 어디에 두었던가. 곧 기억을 되살린 미연은 장롱 위로 상자를 밀어 넣었다. 손으로도 모자라 청소기 앞부분으로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 후 베란다 앞에 선 미연은 연달아 담배를 피웠다.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지고, 반대로 눈앞에 겹쳐진 아파트가 대부분 밝아질 때까지. 정신을 차려보니 새로 만든 재떨이에는 다시 여섯 개의 꽁초가 쌓여있었다. 미연은 잠에서 깬 듯 멍한 얼굴로 재떨이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사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까의 짐 더미 앞에 쪼그려 앉아 나머지 짐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머플러. 털모자. 그림도구. 팔레트. 미술용 장갑. 그리고 찻잎을 종이로 싸서 끈으로 묶은 뭉치. 미연은 손에 든 뭉치를 멀거니 내려다봤다. 허브가 어쩌다 미술 상자에 섞였는지.

왜인지 모르겠으나 정리하는 동안 미연은 조금 눈물을 흘렸다.


*


유월 육일


점심, 현수의 가게

“제 말 듣고 계세요?”

“응? 응.”

수진이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지긋이 노려본다. 현수는 멋쩍게 웃으며 담배를 빼어 문다. 몇 번의 부싯돌 긁히는 소리 후에, 담배 끝에서 파란색이 섞인 하얀 연기가 피어오른다. 창문 위쪽으로 줄지어 달려가는 연기 옆으로 현수가 내뱉은 도넛이 지나간다.

하늘이 맑은 초여름의 한낮, 햇살이 쏟아지는 통유리 앞에 현수와 수진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의자를 하나씩 꿰차고 있다. 테이블에 반쯤 눌어붙어 담배를 피우는 현수나, 현수를 향해 비스듬히 앉아 턱을 괸 수진이나, 자연스러운 폼이 하루 이틀 그러고 있었던 것이 아닌 듯하다. 가게 안에 늘 있던 소품처럼 둘 다 그 자리에 자연스럽게 진열되어 있다.

“날씨 좋다.”

“그러네요.”

“이런 날은 은서 데리고 어디 놀러 가야 하는데.”

“어제도 다녀오신 분이 무슨. 그렇게 자꾸 달라붙으면 은서가 싫어해요.”

“우리 은서는 절대 안 그래.”

평소 같으면 어쩔 수 없다는 듯 혀를 내두를 수진이지만 지금은 그저 현수의 옆얼굴을 유심히 볼뿐이다. 오늘따라 현수가 힘이 없다. 그에게 예민한 수진이기에 멀쩡한 척하는 현수의 행동에서 위화감 섞인 여운을 느낀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나. 아빠의 팔짱을 끼고 돌아온 은서의 표정이 밝아 보여 일이 잘 풀린 거라고 생각했다. 오늘도 분명 가게로 올라가면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어제 있었던 일을 들을 줄 알았는데.

그러고 보면 언제부턴가 은서에 대한 얘기를 듣는 것은 수진의 몫이었다. 은서 얘기를 하는 현수는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었고, 수진은 그 표정이 좋았다. 올 초, 날이 채 풀리기도 전부터였다. 수진이 현수를 다른 눈으로 보게 되고 얼마 후 현수도 그것을 느꼈을 때 둘 사이에는 선이 하나 놓였다. 현수는 수진의 마음을, 수진은 현수가 그어 놓은 선을 알고 있지만 서로 모른 척하는 애매한 관계가 고착되었다. 수진에게는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놓아버릴 수도 없었다. 그래도 이 사람의 이런 표정은 나만 보는 거야. 내가 그에게 특별한 존재는 아니지만 남들이 모르는 것을 나는 알고 있어. 잠정적으로 거절당한 그때부터 수진은 이런 생각들로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고 달랬다. 그것이 약자인 수진이 할 수 있는 최대의 공성이었다.

수진이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시선을 느낀 현수가 고개를 튼다. 둘의 눈이 마주친다. 왜 그러느냐는 현수의 눈빛에 수진은 퍼뜩 정신을 차린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수진은 반사적으로 웃는다. 발간 미소가 어색하다 느낄 틈도 없이 입구에서 종소리가 울린다. 둘의 시선이 입구로 향한다. 종소리에 이어 높은 하이힐 소리가 가게 안으로 걸어 들어온다. 보통 같으면 둘 다 벌떡 일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수진이 먼저 현수의 어깨를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확실히 이상하다. 평소라면 만류해도 카운터로 갈 사람이 오늘은 수진의 손길에 그대로 주저앉아 창밖만 보고 있다. 나중에 은서에게라도 물어봐야지. 생각을 접은 수진이 입구로 고개를 돌리자 청바지에 얇은 재킷을 입은 늘씬한 여자가 서있다.

“어서 오세요.”

수진의 인사를 간단한 고갯짓으로 받은 여자는 찾는 사람이라도 있는지 두리번거린다. 그러다 가게 벽에 걸린 문구에 시선이 멈춘다. 피식하며 웃는 모습에 수진은 본인이 괜히 부끄러워진다. 문구에서 시선을 뗀 여자는 가게 안쪽으로 들어온다. 왠지 느낌이 유경과 닮은 여자였다. 선이 가늘고 작은 체구지만 혼자 오래 지낸 여자의 냄새가 풍겼다. 코를 찌르는 악취 같은 게 아니었다. 자신을 보호하며 자존심을 지키고 스스로 당당해지려는 마음가짐이 한데 뭉쳐 나오는 냄새였다. 처음에는 인위적인 느낌에 어딘가 어색하지만, 오랜 세월 속에 차츰 다듬어지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손짓 하나와 표정 한 토막에도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되는 그런 향이었다. 평소부터 그런 여자들을 동경했던 수진이기에 유경과도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왠지 이 여자에게는 유경에게 느낀 끌림보다는 알 수 없는 거부감이 먼저 들었다.

“찾으시는 분이라도 있으세요?”

가게 안은 셋뿐이다. 둘러보던 여자는 창가 쪽에서 금세 현수의 뒤통수를 발견한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여자는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 곧장 현수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간다. 수진은 메뉴판을 들고 뒤따르려다 현수의 손님임을 깨닫고 걸음을 멈춘다.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도 현수는 요지부동이다. 하릴없이 창밖만 바라보고 있다. 여자는 현수의 뒤에서 걸음을 멈춘다. 커피 잔 두 개에 먼저 시선이 간다. 다음으로는 방금 말을 건 여자가 앉아 있었을 빈자리가 눈에 띈다. 순간 수진이라는 이름이 얼핏 떠오른다. 여자는 창밖을 향해 담배를 피우는 현수의 등을 잠시 바라보다 입을 연다.

“손님이 왔는데 사장이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거야?”

현수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간다. 여자를 보는 얼굴도 담담하다.

“전혀 안 놀란 눈빛이네. 호들갑이라도 떨 줄 알았는데.”

“그럴 나이는 지났지.”

현수는 꽁초를 비벼 끄며 대꾸한다.

“나이랑 상관없다 보는데. 조금 김샜다.”

“손님으로 왔으면 사장 반응 가지고 일일이 김 빠져하지 마.”

“오늘은 손님으로 온 게 아니라서.”

“그래서 안 돌아봤어. 계속 여기 서있을 거 아니면 카운터 쪽으로 와.”

내내 무표정한 현수는 일어나 카운터로 들어간다. 여자는 생글거리며 뒤따른다. 현수가 전기 포트에 스위치를 넣고 에스프레소 기계를 만지는 동안 여자는 카운터 바로 앞, 이제는 유경의 지정석이 된 기다란 스탠드 의자를 뒤로 잡아끈다. 저런 여자들은 본능적으로 알아보기라도 하는 건지. 보통 사람은 부담스러워 앉지 않을 자리건만, 처음 유경이 왔을 때처럼 여자도 자기 자리인 것 마냥 스탠드 의자에 앉는다. 수진은 여자의 뒤를 스쳐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반쯤 남은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켠다. 온 신경이 귀에 쏠려있어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랜만이네, 미연 씨.”

“거리감 느끼게 미연 씨가 뭐야. 옛날에는 내가 하지 말래도 곧장 미연아 했잖아.”

옛날이라는 단어에 현수의 미간이 살짝 구겨진다. 그래도 손은 계속 움직인다. 데운 커피 잔에 에스프레소 원액을 받고, 위에 끓는 물을 붓는다. 그리고 얼음 두 개를 넣은 후 미연의 앞에 내려놓는다.

“얼음 넣는 건 아직 기억하고 있네.”

“뜨거운 거 먹다 곧잘 데곤 했으니까.”

“그래서 옛날에도 너한테 많이 혼났지.”

“그놈의 옛날 소리는 그만 좀 했으면 좋겠는데.”

목소리 가득한 짜증에도 미연은 여전히 생글거린다.

“알았어. 알았어.”

양손을 어깨 옆에서 몇 번 흔든 미연이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한동안 커피 마시는 소리만 가게 안에 울린다. 현수는 미연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담배를 피운다. 잠시의 정적에 수진의 귀가 먹먹해진다. 공기가 불편하다. 방금까지 집보다 아늑하던 곳이었으나 순식간에 있으면 안 될 분위기가 된다. 나갈까, 말까. 수진은 의자 밖으로 빠져나가던 발을 다시 끌어당기고 커피 잔을 힘주어 잡는다.

“잘 지냈어?”

현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너 고등학교 졸업했을 때 이후 처음이니까, 십육 년 만인가?”

이번에는 고개조차 끄덕이지 않는다.

“기분 안 좋으면 입 다무는 건 여전하구나.”

“옛날 얘기나 하려고 온 거야?”

“그것도 궁금하긴 하고.”

현수는 재떨이 안 커피 찌꺼기에 담배 끝을 댄다. 필터를 잡은 엄지와 검지를 천천히 돌리니 찌꺼기와 부대낀 재가 조금씩 깎여나간다. 그 모습을 미연은 가만히 보고 있다. 한 번 들인 버릇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십육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도 함께 만든 습관은 서로에게 여전히 남아있다. 잠시 감상에 잠긴 미연을 현수가 깨운다.

“웬일이야, 갑자기? 당신 말대로 십육 년 동안 뭐하고 지냈나 궁금해서 왔을 리는 없고.”

“언니 보러 왔다가”하며 들고 왔던 쇼핑백을 노크하듯 두드리던 미연은 잠시 후 “뭐 겸사겸사”라고 말한다. 그 모습에 현수는 기가 차다는 듯이 웃는다. 담배를 물고 미연 너머 창밖을 보는 동안 미연도 현수 뒤쪽 선반 어딘가에 시선을 둔다.

“이름이 은서야?”

커피 잔을 만지작거리던 미연이 조심스럽게 묻자 담뱃재를 털던 현수의 손가락이 멈춘다.

“예쁜 이름이네. 직접 지은 거야?”

현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미연의 커피 잔이 점점 비어 간다. 또 한동안 말이 없다.

그때 수진이 다 마신 커피 잔을 한데 모아놓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더 이상 들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흔적 없이 나가려고 뒷문 쪽으로 걸어가는 수진에게 현수의 시선이 따라온다.

“내려가려고?”

“네. 슬슬 오픈해야죠.”

수진은 아까와 다르게, 스스로 봐도 어색하지 않을 웃음으로 대꾸하고 가게를 나간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수진을 배웅하던 현수는 문이 닫히는 모습에 도로 자리에 앉는다. 잠시 미뤄놨던 것들이 다시 몰려든다. 미연은 담배를 태우는 현수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현수는 재떨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가게 안은 숨이 턱턱 막히는 정적만 가득하다. 한동안 그렇게 있던 미연이 남은 커피를 모두 털어 마시고는 일어난다.

“갈게. 커피 잘 마셨어.”

“응.”

미련 없이 발을 떼던 미연은 몇 걸음 못 가 멈춰 선다. 뒤를 돈 미연이 현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묻는다.

“은서는 언제 와?”

“친구들이랑 연극반 연습이 있어서 아마 점심 먹고 올 거야.”

미연은 두어 번 고개를 주억거리다 “그럼”이라는 짧은 말을 흘리고 밖으로 나간다. 문이 여닫히는 종소리에도 현수는 묵묵히 앉아만 있다. 처음 불을 붙였던 담배가 필터만 남았다. 담배 하나 태울 짧은 시간. 훌쭉해진 필터를 재떨이에 쑤셔 넣은 현수는 카운터 안으로 들어가 손을 닦는다. 그리고 선반에서 깨끗이 말린 컵을 꺼내 물을 묻힌다. 마른 수건과 함께 자리로 돌아온 현수는 그때부터 컵을 닦기 시작한다. 노래도 틀지 않은 실내에 뽀드득거리는 소리만 울려 퍼진다. 적셔왔던 물기는 닦인 지 오래지만 내려놓지도 않고, 담배 쪽으로 손을 떼지도 않은 채 계속해서 컵만 닦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창가에 놓인 현수와 수진의 커피 잔이 가게 안으로 조금씩 그림자를 던질 때쯤, 다시 한번 종소리가 울린다. 양손에 종이를 잔뜩 든 은서가 등으로 문을 밀며 안으로 들어온다. 이상하다. 응당 들려야 할 “어서 오세요”라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보다 이 시간쯤 현수는 종소리만 들리면 문을 향해 고개를 길게 빼고 은서의 모습을 찾고 있을 텐데. 가게 안은 아무도 없는 듯 조용하다. 은서는 두리번거리며 들어오다 카운터에서 컵을 닦고 있는 현수의 모습을 발견한다. 반사적으로 말을 걸던 입이 어째선지 도로 닫힌다. 현수는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컵을 닦고 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은서는 조용히 다가간다. 인기척에도 현수는 여전히 미동이 없다.

“아빠.”

나지막한 은서의 목소리에 현수가 퍼뜩 고개를 든다.

“은서 왔구나. 언제 왔어?”

어느 때처럼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반기는 현수를 물끄러미 올려다본다. 은서의 표정에 현수는 내가 또 뭘 잘못했나 하는 얼굴이다. 현수가 컵을 카운터에 슬그머니 내려놓는다. 잠시 현수를 살피던 은서는 들고 있던 종이를 테이블에 올려두고 현수를 향해 양팔을 벌린다.

“아빠. 나 왔어요.”

“어이구. 우리 딸. 어서 와요.”

현수가 큰 키를 이용해서 카운터 위로 상체를 내밀고 은서를 끌어안는다. 등을 두드리는 현수의 손길에 은서는 퍼뜩 하나의 기억을 건져낸다. 아마 팔구 년 전쯤의 옛날, 학교에서 돌아온 은서가 난 왜 엄마가 없냐며 울었던 날이었다. 소파의 천과 카운터 안의 기계들만 조금 더 새 거였던, 바로 이 자리에서. 어린 은서가 들고 있던 종이는 한 장의 가족 소개서였다. 아빠 이현수, 엄마 사망. 서럽게 우는 은서를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현수가 안아 들었다. 그리고 울음이 그칠 때까지 등을 천천히 두드려줬다. 가게 소파에서 설핏 잠이 들었다 깼을 때, 현수는 지금처럼 컵을 닦고 있었다. 졸린 눈의 은서가 “아빠 뭐해?”라고 물을 때까지, 현수는 은서가 깬지도 모른 채였다. 그런 현수의 모습은 오직 그날 그때뿐이었다. 그 전에도 후에도 한 번도 보지 못해 어느덧 잊어버린 모습이었다.

오랜만에 떠오른 기억에 은서는 그때 현수가 은서에게 그랬듯이, 현수의 등을 천천히 두드린다. 우는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작은 손이 커다란 등을 위에서 아래로 쓸어내린다. 그리고 평소에 안 하던 말을 덧붙인다.

“이상하게, 나 오늘따라 아빠가 되게 보고 싶었어.”

은서의 목소리에 현수는 순간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안은 팔에 힘을 준다. 은서의 정수리에 코를 박은 현수도 천천히 대답한다.

“아빠야말로 오늘따라 우리 은서가 너무 보고 싶었어.”

이 순간 가게에 손님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부녀는 같은 생각으로 한동안 서로의 등을 다독인다.


*


오래되지 않은, 하지만 점점 오래될 날


미연

십칠 년 전, 스무 살의 나이에 벌어진 일은 어린 미연에게 큰 충격이었다. 축복받아 마땅한 생명이었지만 준비되지 않은 자에겐 그저 재앙처럼 느껴졌다. 혹시나 해서 들어간 화장실에서 하늘이 무너지자, 미연은 가장 먼저 엄마가 보고 싶었다. 공원 화장실부터 집으로 향하는 그 길은 왜 그리 먼지. 눈물범벅으로 달려간 미연은 결국 초인종을 누르지 못했다. 누군가 계속 뒷덜미를 잡아채는 느낌이었다. 매달릴 손이 절실한 스무 살의 아이였지만, 부모의 반응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 갓 성인이 된 미연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도 많지 않았다. 이래야 하는 건가. 다른 방법은 없나. 뭐가 맞고 뭐가 틀린 건지. 아이에서 어른으로 억지로 끌어올려진 미연은 모든 게 두렵고 무서웠다. 하얗던 머릿속을 수습해 정상적인 사고를 시작한 것은, 집 앞 놀이터의 그네 위에서 30분을 흩날린 후였다.

일단 현실을 받아들이고 나니 모든 게 한결 나아졌다. 기습적인 혼란에서 벗어나자 영민한 미연은 빠르게 사태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단 집에 가자. 난 아직 너무 어려. 그러니. 일단락된 마음을 이고 그네에서 일어나는데, 왠지 몸이 무거웠다. 고작 한 시간 만에 몸무게가 곱절로 늘어난 느낌이었다. 무심코 배에 손을 올리자, 알 수 없는 불안함이 두려움과 함께 치솟았다. 하지만 그 두려움의 끝자락에 알 수 없는 따듯함도 함께 올라왔다. 배꼽을 간질이는 그 무엇에 멈췄던 눈물이 다시 흘렀다. 하고 싶은 것과 꿈이 뚜렷했기에 반길 수 없는 생명이었지만, 그 생명을 무시하기에 미연은 용기가 부족했다.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인가도 미연의 뒤꿈치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한참을 더 울던 미연은 두 손으로 배를 감싼 채 집으로 들어갔다.

결국 일 년을 버린다는 생각으로 기껏 합격했던 대학교를 휴학했다. 자신의 일이었다. 무엇이 정답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부모의 뜻대로만 따라가다 훗날 문득 후회하게 되는 것은 싫었다. 후회를 하더라도 스스로 정한 길 위에서 하고 싶었다. 그렇게 마음을 정한 후 집에 들어갔다. 아이를 낳겠다고 선언했고, 아이 아빠를 데려오라는 부모의 말에는 고개를 저었다. 적지 않은 시일이 걸렸지만 결국 싸워서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그렇게 한쪽 길을 택하긴 했지만,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엔 미연은 너무 어렸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나날이 불러오는 배만 원망스럽게 바라보다 칠 개월이 지났다. 하얀색이 노랗게 보이는 세상 가운데 간호사가 안겨 주는 아이를 보았을 때, 미연은 왈칵 눈물이 터졌다. 그래. 네가 무슨 죄가 있겠니.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겠지. 그동안의 원망스러운 눈길을 알지 못하는지, 병원이 떠나가라 울던 아이는 자신에게 안기자마자 울음을 멈추고 작은 숨을 쉬고 있었다.

처음 일주일은 누워서, 다음 일주일은 앉아서, 좁은 방에서 아이의 얼굴만 바라보며 몇 주가 지났다. 자신의 아이였다. 대학생이 되기 전에 아이를 낳은 엄마가 먼저 되었다. 이대로 자란다면 그대로 가족이 될 것이다. 아이가 있는 미대생일 것이고, 남편이 없는 미혼모 화가일 것이다. 지금 이 순간부터 자신의 인생은 지금껏 스스로 그려왔던 모습과 점점 달라지고 멀어질 것이다. 이어진 천륜은 시간 따라 계속 강해지고, 어느 순간부터 놓을 수 없는 사이가 될 것이다. 나는 왜 처음부터 이 아이를 놓지 못했을까. 어찌 이 아이가 세상에 나오도록 했을까.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후회는 아니었다. 원망도 아니었다. 스스로 설명할 수 없지만 그런 감정은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두려움이었다. 이제부터 예상 못할 곳으로 흘러갈 스스로에 대한 두려움이었고, 그렇게 달라지다 보면 스스로 규정한 자신으로 돌아올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이었다. 결국 부정이었다. 스스로에 대한, 그 선택에 대한, 그 뒤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에 대한 부정이었다. 자신은 지금 갈림길에 있었다. 열 달 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지 모를 갈림길이었다. 뱃속에서 나와 눈앞에 있는 아이를 보며 미연은 막연히 깨달았다. 울지도 않고 곱게 누워 천장을 보는 아이를 보며 생각했다. 나는 이 아이를 키울 수 없다. 아이를 키울 수 있고, 키우게 되면 그건 더 이상 미연이 생각하는 ‘나’가 아니었다.

생각 위로 생각을 쌓던 미연은 어느 날 인형 두 개와 아이를 안고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현수에게 아이와 인형들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그대로 돌아섰다. 일방적인 이별 통보 후 팔 개월만의 만남이었기에 현수는 자신이 안은 아이보다 미연의 얼굴을 쫒기 바빴다.

둘이 나섰다 홀로 돌아오는 길에 미연은 텅 빈 마음으로 택시 창문에 붙어있었다. 왜 그랬는지 미연 스스로도 몰랐다. 왜 그래야 하는지, 이럴 거면 왜 낳았는지 어느 것에도 답을 내리지 못했다. 단지 몸속에 있다가 밖으로 나온 아이와 보낸 몇 주 동안의 결론이었다. 그래서 확신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현수가 그 아이를 어떻게 하든 이제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린 생명을 꺼트리지 않고 무사히 낳은 것만으로 자신의 도리는 다 했다고 생각했다. 미연은 그대로 유학을 떠나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었다. 새로운 땅에선 아무도 미연의 과거를 알지 못했고, 그렇게 평범하고 전도유망한 화가 지망생으로서 살아갔다. 하지만 현수에게 아이를 안긴 그 날 이후로, 미연의 머리 한 구석에는 늘 그 아이가 있었다. 몇 주 동안 아이만 보고 있었던 탓인지 눈만 감아도 쉽게 얼굴이 튀어나왔다. 처음에는 무시로 그다음에는 외면으로 애써 생각을 돌려 보아도, 시간이 지날수록 미연의 머릿속에서 그 아이는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울고 웃으며 미연과 함께 자라났다. 어느덧 기저귀를 떼고 아장아장 걷기도 하고, 입가에 밥알을 붙이면서도 밥공기를 뚝딱 비웠다. 그렇게 해가 지났다.

“엄마.”

아이가 서툰 발음으로 처음 그렇게 말했을 때, 미연이 감기로 수업을 결석하고 불 꺼진 방에 누워있을 때였다. 감은 눈 사이로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실제로 어떨까. 얼마만큼 자랐을까. 궁금하지 않을 리가 없었지만, 찾으러 가는 발걸음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처음은 무시와 외면으로 등을 돌렸지만, 이제는 보고 싶어도 그럴 자신이 없었다. 실제로 아이와 현수를 만나서 그 두 쌍의 눈이 자신을 바라보면, 어떤 표정으로 그들과 마주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마도 아무 말도 못 하고 턱만 덜덜 떨겠지.

그렇게 미연은 안에서부터 썩어 들어갔다. 낮에는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고 친구를 만나도, 밤에는 불 꺼진 방에서 머릿속에 집을 지었다. 아이의 방 하나만 있는 그 집에서 미연은 웃고 대화하며 아이를 길렀다. 처음에는 그렇게 반씩 균형을 맞추던 낮과 밤이었지만 아이가 점점 자람으로서 균형은 무너졌다. 낮에도 아이의 우는 소리에 부리나케 그 방으로 달려가기도 하고, 동기들과 밥을 먹다가도 그림을 들고 온 아이를 칭찬해주기도 했다. 그럴수록 미연의 낮은 점점 도태되었다. 관계에도 소홀해졌다. 물론 남자도 만날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뭐든 이해한다는 얼굴로 다가온 남자들은 결국 정신병자를 보는 눈빛으로 미연을 떠나갔다. 졸업할 무렵에는 쉬쉬 하면서도 귀신 들린 여자라는 소문도 퍼졌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얄궂게도 옛날에 내팽개쳤던 아이가 지금 미연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되어있었다. 이대로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주기만 한다면, 그 방을 제외한 나머지 세상은 어찌 되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학교를 졸업한 미연은 하루의 전부를 밤에 쏟아부었다. 하지만 문제가 터진 것은 미연이 졸업하고 얼마 후였다. 그 방에서 이상 없이 잘 자라던 아이가 어느 순간부터 자라지 않았다. 초조하게 기다려보기도 하고 다그치고 화도 내봤지만 아이는 어제처럼 그저 똑같이 웃고 배고프다고 떼를 썼다. 미연은 그 방에서 처음으로 묵직한 통증과 함께 이질감을 느꼈다. 잘 흘러가던 시계태엽이 거친 쇳소리를 내며 억지로 멈춰 섰다. 생전에 찍었던 홈비디오를 아이가 죽은 후에 몇 번이고 돌려보는 기분에 미연의 말수와 표정이 점차 사라졌다. 언제부턴가 아이를 안거나 말을 걸지도 않고, 방을 찾아올 때마다 한 걸음씩 덜 다가가게 되었다. 어느 순간 자신이 들어가지도 않고 방문 앞에서 놀고 있는 아이를 무표정하게 바라만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미연은 그대로 방문을 닫고 나왔다. 그걸로 마지막이었다. 머릿속 한 구석에는 언제나 그 방이 있었지만, 더 이상 그 문을 여는 일은 없었다.

밤이 사라지자 그동안 억눌렀던 낮이 봇물처럼 터져 나갔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졸업하고 팔 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미연은 밀린 숙제를 하듯 한 걸음씩 원래의 자리를 찾아 돌아갔다. 크게 대청소를 하고, 초췌하게 들어갔던 볼에 살을 찌우고, 연락이 끊겼던 사람들에게 다시 연락을 넣었다. 한동안 찾지 않았던 본가에 들러 걱정하던 어머니를 달래고, 팔 개월 만에 다시 붓도 잡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것 같았고, 미연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붓을 잡고 처음으로 그린 그림은 미연이 그토록 바라던, 갓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법한 여자아이였다. 그림을 완성한 날, 미연은 앉은자리에서 붓도 놓지 못한 채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울다 지쳐 잠이 들었는지, 어느덧 정신을 차려보니 바닥이었다. 비척거리며 일어나 커튼을 열자 동이 틀 무렵 파리의 시퍼런 하늘이 방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눈물과 함께 무언가도 떠내려 보냈는지 마음이 고요했다. 유화에 물을 부은 듯 머릿속의 방도 흐릿해져 있었다. 미연은 완성된 그림을 말아 고무줄을 감고, 옷장 위를 뒤져 노란 박스를 하나 찾아냈다. 인형 옆에 그림을 넣은 미연은 박스를 원래 있던 자리로 밀어 넣었다.

박스를 봉한 날부터 미연은 더 이상 어떤 그림도 그리지 않았다. 그릴 수 없었고, 그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 후 미연은 취업을 했다. 나이에 맞춰 경력을 쌓아가는 동안, 그 상자 위에도 차곡차곡 먼지가 쌓였다. 쫓기듯 바쁘게 살면서 많이 피곤하거나 우울할 때는 지나가는 아이를 보며 종종 물은 젖은 유화가 뚜렷해질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가슴 한쪽이 아려왔지만 미연은 한 번도 그 문을 열지는 않았다. 문을 열었을 때 더 이상 자라지 않는 그 아이와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남자 친구도 있었고 약혼까지 했지만 남자의 입에서 가족계획이 나올 때마다 미연은 번개라도 맞은 듯 눈앞이 아찔해졌다. 남자와 결혼하여 낳을 아이도 어느 순간 자라지 않을까 두려웠다. 말도 안 돼. 설마 그럴 리가. 그렇게 웃고 넘길 수가 없었다. 결국 남자와 파혼한 미연은 그 후로 결핍된 가슴을 안고 혼자 지냈다. 어딘가에 묶인 듯 미연에게도 그 상자처럼 먼지가 쌓여갔다.

그러던 중에 미연은 불쑥 한국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종종 오갔으나 어느 순간부터 외국에 있고 싶지 않았다. 왜인지는 미연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향수병을 앓거나 타향 생활에 염증을 느낄 시간은 이미 지나있었다. 그럼에도 미연은 지금 사는 곳을 더 이상 자유롭거나 아름답다고 느끼지 못했다. 결국 미연은 이직과 함께 완전히 귀국했다. 의약행사를 주로 하는 에이전시에서 연예행사 쪽으로 이직한 것은 오직 혜인이라는 후배 때문이었다. 긴 해외생활 동안 한국에 있는 친구는 이제 둘 뿐이었다. 혜인의 도움을 받으며 주변 정리와 적응을 하다 보니 한 달이 훌쩍 지나갔다. 미연은 그제야 다른 친구를 떠올렸다. 입국하던 날에 목소리만 듣고 여적 만나지 못한 유경이었다. 임신으로 인해 휴학한 미연은 한 발 앞서간 유경에게 직간접적으로 많은 위로를 받았다. 유경만이 학교를 떠도는 소문에도 태연한 얼굴로 미연을 대했다. 미연이 밤에 갇히기 전에 마지막까지 연락이 닿았던 것도, 낮으로 돌아와 가장 먼저 연락했던 것도 유경이었다. 미연이 해외를 떠도는 동안, 유경은 졸업과 함께 한국에 들어와 지금까지 가게를 꾸리고 있었다. 넌 들어온 지가 언젠데 이제 얼굴을 비춰. 보자마자 분명 그렇게 소리칠 터였다. 미연은 유경의 입을 막을 종이를 들고 작년에 이사했다는 가게로 찾아갔다. 첫 방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유경은 대뜸 고함부터 쳤다. 그리고 어린아이처럼 전신을 밀착하며 안아줬다. 어서 와. 돌아와서 기쁘다. 문자 그대로 온몸으로 미연을 반겨줬다. 쑥스럽지만 밀어낼 수 없었다. 주변정리를 하고 자신을 떠올리기를, 한 달 동안 묵묵히 기다린 마음이 온전히 전해졌다. 덕분에 티켓을 건넬 시기도 놓친 채 테이블에 앉았고, 인스턴트커피부터 받았다.

밀린 근황을 나누고, 돌아오기 전에 다행히 떠올려 티켓도 무사히 전해줬다. 미연이 아는 유경은 여전히 친구 없이 아이들하고만 지내고 있을 터였다. 알고 지내는 사람이야 물론 있겠지만 콘서트를 함께 보러 갈 만한 사람은 없을 거야. 두 장을 줘도 분명 한 장은 다시 내게 돌아오겠지. 그럴 수밖에. 언니는 나랑 똑같은 사람이니까. 미연은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기뻐하며 표를 챙긴 유경은 며칠 만에 미안한 목소리로 다시 미연을 찾았다. 한 장은커녕 두 장 모두 어딘가 버려두고서. 결국 미연과 유경은 VIP석과 스텝 콘솔 사이의 애매한 자리에서 공연을 관람해야 했다. 보는 내내 미안하다고, 대신 저녁은 책임진다고 가슴을 팡팡 친 사람은 유경이었다. 하지만 막상 공연이 끝난 후에 만두 가게 앞에서 미연을 향해 눈을 반짝이는 사람도 유경이었다. 유경은 늘 이런 식이었다. 제멋대로, 내키는 대로. 그럼에도 미연은 그런 유경이 싫지 않았다. 미연은 이런 사소한 변죽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커다란 것을 이미 유경에게 받아왔으니까.

계산을 마치고 나오는데 유경이 웬 남녀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전표를 든 손이 지갑 속으로 들어가는 동안 눈은 유경에게 잡힌 남자로 향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미연은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십육 년 전 핏덩이를 안은 채 자신을 바라보던 현수가 수염과 주름 몇 개만 덧붙인 채 서있었다. 들려오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대답을 하는 동안에도 미연의 머릿속은 전쟁터의 한 복판이었다. 십 년 넘게 짓뭉개져 있던 유화가 비디오를 되돌리듯 멀쩡해지기 시작했다. 문이 또렷한 빛을 내며 선명해졌다. 아무런 대비 없이 문과 마주친 것도 모자라, 문은 미연의 의지와 상관없이 천천히 열리는 중이었다. 그 짧은 순간, 미연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타올랐다. 시절 인연이라 했던가. 누군가의 고약한 장난인지. 아니면 결국 이렇게 될 운명이었는지. 설명할 수 없는 많은 상념들이 미연을 스치고 지나갔다. 약간의 두려움과 대부분의 기대를 가지고 현수 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각진 어깨 뒤에 그 아이가 서있었다. 흰색 반바지에 노란색의 커다란 티, 그리고 빨간색 스니커즈를 신은 폼이 중학생쯤 되었을까. 크레셴도라는 글귀처럼 미연의 심장소리가 쿵쿵 높아졌다. 아이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미연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 아이다. 그 아이가 맞다. 그토록 원했고 매번 절망했던 그 아이가, 미연이 늘 바랐던 염원보다 훨씬 더 자라 앞에 서있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아이의 눈은 무심한 손길처럼 미연에게 쌓였던 먼지를 쓸어냈다.

“안녕하세요. 이은서입니다.”

귀가 먹먹 해지는 전쟁터가 아이의 목소리에 새 캔버스로 덮이듯 새하얗게 변했다. 열일곱. 그 단어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미연은 아이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다른 곳은 모르겠지만 눈매만큼은 매일 아침 거울로 보던 그 눈매였다. 그 아이다. 미연의 결핍된 가슴의 주인이자 미연을 과거에 묶어 놓는 유일한 사람.

“반가워. 또 보자.”

미연은 깨진 거울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

점심, 현수의 가게 앞

미연은 복잡한 심정으로 카페에서 나온다. 내가 여길 왜 온 걸까. 계단을 내려가며 스스로에게 물어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순간 입 안이 아프다. 손가락으로 더듬어보니 그새 물집이 잡혀있다. 담배 하나 태울 시간에 그 뜨거운 걸 다 들이켰으니 충분히 그럴 만했다. 자조 섞인 웃음이 새어 나온다.

계단을 전부 내려오자 길 건너 유경의 가게가 바로 보인다. 그래, 원래는 저기에 용무가 있었지. 커피 이외의 차는 즐기지 않는 미연이기에 어제 미술 상자에서 나온 허브는 쓰임이 마땅치 않았다. 선물 받은 좋은 허브였기에 버리기도 난감했다. 이걸 어찌할까 고민하던 미연은 결국 유경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언니가 허브 종류를 좋아했지. 꾸러미를 받고 아이처럼 좋아할 유경의 모습에 웃음 짓던 미연은, 뒤따라 떠오르는 앳된 얼굴에 금세 웃음이 가신다.

옷가게에는 불이 켜져 있다. 문마저 열려 있다. 분명 몇 걸음만 옆으로 옮기면 카운터에 앉은 유경이 보일 것이다. 미연은 계단 끝에서 고민에 빠진다. 그러다 이내 쇼핑백을 챙겨 옷가게 반대쪽 횡단보도로 건너간다.


*


유월 칠일


새벽, 현수의 집

천장에 달린 공기정화기를 끄는 것으로 현수는 가게 정리를 마무리한다. 마지막까지 열어둔 뒷문을 잠그고, 입구 쪽의 불마저 끈 현수는 앞문을 열고 나온다. 열쇠로 유리문 위에 달린 자물쇠를 잠그고, 계단을 내려와 외부 철문도 닫는다. 시간은 자정이 막 지난 새벽, 유월의 밤거리는 아직도 조금은 쌀쌀한 기운을 품고 있다.

오늘은 오랜만에 홀로 퇴근이다. 종종 홀로 퇴근할 때는 있었지만, 돌아갈 집마저 비어있는 건 오랜만이었다. 은서는 연극 준비 막바지인 탓에 친구 집에서 자기로 했다. 외박은 아주 드문 일이었지만 오늘은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간만에 술이 생각난 현수는 습관적으로 좌우를 훑는다. 분식집은 어둡게 닫혀 있다. 현수의 가게 일층에 있는 분식집은 늦어도 열한 시면 문을 닫는다. 종종 모녀 사이의 수다가 길어지는 날에는 열두 시 가까이까지 불이 켜져 있는 날도 있었지만 그래도 자정을 넘기진 않는다. 그럴 때면 어머니를 먼저 보낸 수진이 종종 이층으로 올라와 은서와 셋이 마감하기도 한다.

현수는 반대쪽 옷가게를 살핀다. 옷가게는 더 일찍 문을 닫는다. 아무리 늦어도 아홉 시를 넘기지 않는다. 평소의 유경이라면 여덟 시가 조금 넘으면 오후 동안 옷가게와 카페를 오가던 은서나 희주와 함께 마감을 한다. 그리고 현수의 집이든 유경의 집이든 가서 저녁을 차려 먹는다. 학원이 없는 날이면 동현도 함께 하고, 가끔은 카페 금연석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현수가 만들어주는 볶음밥을 사 온 만두와 먹을 때도 있다.

지금 시간이면 희주는 물론이고 유경도, 수진도 모두 자고 있을 시간이다. 그나마 깨어 있는 건 동현 정도일까. 아직 고등학생이지만 마감한 카페에서 가끔 술 한 잔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 기분은 동현과 마주할 상태는 아니었다. 누가 있을까. 혼자 마시긴 싫은데.

“현수, 자넨가.”

그때 뒤에서 현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돌아보니 작은 키의 남자가 서있다. 나이는 쉰쯤 되어 보이고, 반 정도 벗겨진 머리에 배가 볼록하게 나온 중년 남자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사십 대 초반으로, 현수보다 여섯 살이 많을 뿐이었다.

“형님.”

남자를 발견한 현수가 먼저 달려간다. 그리고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허리를 깊이 숙인다. 남자는 사람 좋은 얼굴로 현수의 어깨를 잡아 올린다.

“이러지 말라니까.”

“아니, 형님.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잠이 안 와서 잠시 산보 중이었어.”

남자는 현수를 보며 선하게 웃는다.

“요즘 가게는 잘 돼?”

“덕분에요.”

“어디 문제 있는 곳은 없고?”

“없어요. 정말 형님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거듭된 현수의 인사에 남자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현수는 순간, 술 한 잔 하자고 권해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젓는다. 신세 진 일이 많은 은인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가게를 꾸리고, 은서까지 키울 수 있게 도와준 현수의 귀인. 권하면 거절하지 않겠지만, 현수에겐 늘 어렵고 조심스러운 사람과 같았다.

“이제 들어가나? 오늘 은서는 없구먼.”

“네. 오늘 은서는 친구 집에서 잔다네요.”

고개를 끄덕인 남자는 이내 “그래”하며 현수의 어깨를 두드린다.

“나도 조금만 더 돌고 들어가야겠네. 자네도 조심히 들어가게.”

“예, 형님. 살펴가세요.”

먼저 멀어지는 남자를 보며 현수는 두어 번 더 인사를 한다. 골목으로 남자가 사라지자 그제야 현수는 허리를 곧게 편다. 갑자기 등장한 남자로 인해 잠시 묻어두었던 옛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난다. 처음 누군가를 따라 이 동네에 왔던 일. 누군가의 소개로 저 남자를 만난 일. 그다음 은서를 안고 이 동네에 자리 잡은 일. 그 후로 꾸역꾸역 삶을 살아온 일. 덕분에 술 생각이 사라져 있었다. 현수는 마치 아무 일 없고, 아무도 만나지 않은 것처럼 집으로 향한다.

현관을 열고 들어간 현수는 불부터 켠다. 환한 거실은 은서와 함께 살고 있는, 현수가 매일 보는 집이다. 집에는 있어야 할 가구 빼고는 텅 빈 느낌이다. 물건을 쟁여두는 현수의 성격과 달리, 자잘한 쌓여두는 걸 싫어하는 은서의 성격 탓에 대부분의 물건이 현수에 방에 몰려 있다. 하지만 정리를 좋아하는 건 둘 다 같아서 거실은 휑한 느낌보다 단정히 정리된 인상을 먼저 풍긴다. 걸어가는 족족 불을 켠 현수는 습관처럼 가장 먼저 은서의 방을 찾는다.

당연하게도 방은 비어있다. 방의 조명까지 켜지 않아도 거실과 주방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빛으로 방 안은 이미 훤하다. 현수는 주인 없는 방을 한 바퀴 돈다. 개켜져 있는 침대보를 펴고, 책상 한편에 무너져있는 종이를 다시 쌓아 올린다. 그러다 문득, 서랍장 위로 시선이 간다. 일렬로 늘어서있는 인형들. 벽에 붙은 안쪽부터 아빠 인형과 아이 인형, 이 두 개의 위치는 항상 정해져 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손에 잡히는 대로 순서 없이 놓여있다. 서랍장 앞에 선 현수는 잠시 인형들을 훑는다. 잠시 후 중간쯤에 있는 공룡 인형을 빼서 아이 인형 옆에 있는 동그란 외계인 인형과 자리를 바꾼다. 그리고 공룡 인형 다음부터 나머지 인형들을 조금씩 옆으로 밀어낸다. 셋과 나머지로 나뉜 행렬. 각본 각색 때 엄마 역을 했던, 빨간 혀를 내밀고 있는 공룡 인형이 아빠와 아이 인형 옆에 나란히 선다. 그 모습은 마치 가족 같다.

잠시 세 식구를 바라보던 현수는 방을 나간다. 현수가 밀어낸 방문이 인형들 위로 그림자를 드리운다. 천천히 닫히던 방문이 한 뼘쯤을 남기고 멈추자, 거실에서 새어 들어오던 빛이 딱 공룡 인형까지만 그늘을 만들어낸다.


*


점심, 미연의 회사

“과장님. 재 떨어지겠어요.”

상념에서 깨어난 순간, 위태롭게 달려있던 재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한 입도 못 댄 아이스크림을 흙바닥에 떨어트린 것처럼 미연의 시선이 회색 뭉치에 머문다. 재 같은 희망과 꽁초 같은 감정. 불꽃을 피우는 순간부터 필연적으로 쉽게 부스러지고 결국은 버려야 하는 것들. 미연의 마음은 며칠 째 그 과정을 반복한다. 고개를 돌려보니 자신을 부른 이는 목에 걸린 사원증으로 떨어진 재를 조심스레 뜨고 있다.

“성공!”

미연의 시선이 머무는 것도 모르는지 여자는 말을 잇는다.

“저는요. 이럴 때가 참 신나요. 저희 아빠도 집에서 담배를 많이 피우시거든요. 근데 종종 이렇게 재를 흘리세요. 재라는 게 원래 부서지면 청소기나 물수건으로 닦지 않는 이상 치우기 힘들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깔끔하게 처리하면 왠지 뿌듯한 거 있죠.”

재떨이에 옮겨진 후에도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재를 보며 여자는 잠시 삽이었던 자신의 사원증을 탈탈 턴다. 요즘 어떤 젊은 애가 사원증으로 떨어진 재를 치울까. 그것도 치우지 않아도 되는 이런 옥상의 휴게실에서. 저런 모습은 미연에게는 없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특별히 아끼는지도 모르겠다.

미연은 대꾸 없이 재만 보고 있다. 여자는 미연의 옆에 앉는다. 선선한 바람과 적당한 햇살이 두 사람에게 떨어지는 초여름의 정오. 여자의 시선이 머리 위 지붕의 모서리를 따라간다. 팔각정의 모서리를 일곱 번 돌아 제자리로 올 때까지도 미연에게선 말이 없다. 결국 여자 쪽에서 먼저 입을 연다.

“선배.”

“응.”

“요즘 무슨 일 있어요?”

미연은 꽁초만 남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다. 그리고 탁한 냄새가 밴 손을 털며 담담한 어조로 대꾸한다.

“혜인아, 내가 오늘 아침에 말이야.”

“네.”

미연의 목소리에 혜인의 상체가 기운다.

“출근을 하려고 화장실에서 이를 닦고 나왔거든.”

“네.”

찰떡처럼 달라붙은 혜인의 대꾸에도 미연은 잠시 입을 다문다.

“무슨 얘긴데 그렇게 뜸을 들여요. 근데요?”

“근데 옷을 입고 구두를 신고 신발장에서 거울을 보는데, 이에 고춧가루가 그대로 껴있는 거야.”

“응? 이를 닦았는데도?”

“그래서 도로 들어가서 꼼꼼히 이를 닦고 다시 나왔어. 덕분에 지각했지만 말이야. 그렇게 버스를 타고 오는데, 뭔가 기분이 복잡하더라고.”

“뭐가요?”

“사실 이 닦는 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그런 일이잖아.”

“그렇죠.”

“근데 그런 본능적인 일도 신경 써서 하지 않으면 제대로 못할 만큼 요즘 내 일상은 온통 엉망이야.”

하던 말이 일단락되자 미연이 눈을 감는다. 그것이 미연의 버릇임을 아는 혜인은 그제야 “으음”하고 추임새를 넣는다. 팔짱을 끼고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혜인을 보며 미연은 웃는다.

“난 네 성격이 참 부러워.”

미연은 담배 케이스에서 새로운 담배를 꺼내며 말을 잇는다.

“나한테는 그런 게 없거든.”

“그래요? 저야말로 선배가 늘 부러웠는데.”

연기를 내뿜던 미연이 입 대신 눈으로 ‘왜?’라고 묻는다.

“일단 예쁘고, 멋지고, 능력 있고, 세련되고, 깔끔하고.”

‘깔끔하고’라는 혜인의 말에 미연의 눈꼬리가 살짝 떨린다.

“그런 것들도 다 좋은데, 무엇보다 전 선배의 일관성이나 솔직함이 참 좋아요. 사실 선배 말대로 선배는 남 시선 엄청 신경 쓰고, 또 뒤처리도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거야 이렇게 유능한 후배가 있으니 그런 거고! 선배는 뭐랄까요. 어쩌다 보니 서로의 얼굴에 금칠하게 되는데, 설령 실수를 했다 해도 다른 걸로 메우잖아요. 일할 때도 밴댕이 본부장한테 ‘제가 이만큼 실수했어요. 그건 인정. 하지만 다른 걸로 그 이상 만회할게요’라는 식으로요. 상대가 설령 본부장이 아니라 하느님일지라도 그렇게 당당하게 말하는 모습이 전 멋있어 보이더라고요.”

멋쩍은 혜인의 웃음소리에도 미연은 뭐라 대꾸가 없다. 고개를 돌려보니 미연은 뒤통수라도 맞은 얼굴이다. 내가 뭔가 말실수를 한 건가. 순간 초조해진 혜인이 말을 덧붙이려는 순간 미연이 혜인의 머리를 꽉 끌어안는다.

“잘못했어요!”

“아니야. 예뻐서 그래.”

“네?”

“그래. 난 그런 게 당연하지. 너도 아는 당연한 걸 내가 까먹고 있었네. 평생을 그렇게 살았으면서.”

미연의 말은 뒤로 갈수록 중얼중얼 작아진다. 혜인의 귓가에 울리는 미연의 목소리는 고스란히 미연에게 돌아간다. 잠시 눈을 굴리던 혜인은 이내 한 손으로 미연의 등을 두드린다.

“다행이네요. 저는 선배가 어제오늘 절 피하시기에, 제가 뭘 잘못했나 했어요.”

안도감 섞인 혜인의 말에 미연이 짧게 웃으며 팔을 풀어낸다. 그리고 케이스와 라이터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냥 네 짧은 머리가 보기 힘들었어.”

“네?”

“나 외근 나갔다 바로 퇴근할게. 부장한테 그렇게 전해줘.”

“네? 지금 시즌에 무슨 외근이에요? 선배!”

달려가는 미연의 귀에 혜인의 말이 점점 멀어진다. 서둘러 자리로 돌아온 미연은 핸드백과 쇼핑백을 챙겨 엘리베이터를 탄다. 톡톡. 초조하게 허벅지를 두드려도 줄어드는 숫자의 속도는 평소의 절반 같다. 참아도 소용없던 일이 참지 않아도 될 이유를 등에 업고 마음속에서 요동친다. 지금은 그저 보고 싶다. 수많은 다른 것들이 있지만 알 게 뭐야. 보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머리가 꽉 차 다른 생각들은 전부 뒤로 밀려난다. 문이 열리고 탈출하듯 건물을 벗어나 택시를 잡아탄다. 목적지를 말하고 조급했던 몸을 좌석에 뉘이고 나니 그제야 미뤄놨던 생각이 다시 몰려온다. 인쇄소에 원고를 넘기고 돌아오는 길에 오자가 생각난 것처럼. 철렁한 기분으로 기다려야만 하는 시간 속에 불안감과 걱정들로 차오른다.

공연을 봤던 날 밤, 하나의 짐 무더기를 처리한 미연은 치워낸 빈자리에 앉아 울기 시작했다. 밤새 울고 깨기를 반복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베란다로 해가 뜨고 있었다. 짐과 함께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도 치워내고 나니, 마음 빈자리에 남아있는 것은 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그렇지만 그와 아이는 어떨까. 오래전 두려워서 피했던 두 쌍의 눈을 지금은 견딜 수 있을까. 그것을 견뎌내며 보고 싶다는 마음을 충족시킨다 해도 그 후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얼굴로 집에 돌아오고, 다음 날과 그다음 주는? 보고 싶다는 마음을 매주 매달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처럼 매번 달려갈 수도 없고, 이제와 정말 뻔뻔하게 내놓으라고 말할 수도 없는데. 그렇다고 십육 년 전 그날로부터 훌쩍 자라난 셋이 함께 서있는 모습도 그려지지 않았다. 미연이 뻗어내는 생각의 가지는 이리로 가도 막히고, 저리로 돌아가도 막히기 일쑤였다.

요금이 올라갈수록 머릿속에 생각이 쌓이고, 풍경이 바뀔수록 어깨가 점점 내려간다. 하지만 얼굴이 터질 것 같은 생각의 압력에도 정작 세워달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그렇게 머릿속에 시소가 쿵쾅이던 미연은 앞으로 쏠리는 느낌에 상념에서 벗어난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목적지인 사거리였다. 덜컥 겁이 난 미연은 지불도 하차도 하지 못하고 앞좌석에 머리를 파묻는다. 잠깐의 위안을 위해 평생을 멍울져 살아야 한다니. 지금 그 아이에게 달려가는 이 걸음은 어쩜 이리도 담배와 닮아 있을까.

미연의 입에서 혼 없는 한숨과 헛웃음이 연달아 점멸한다.


*


내가 자격이 있을까. 도대체 무슨 낯으로 그 애를 보고 싶다 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발걸음은 목적지를 향한다. 두 걸음은 앞으로, 한 걸음은 망설이며. 그러다 보니 어느새 카페와 옷가게가 있는 사거리다. 보행신호에 따라 둑이 열리듯 사람들이 차도로 쏟아지지만 미연은 길을 잃은 듯 그 자리에 방치된다. 멍하니 서있던 미연의 눈에 멀리 아릿한 실루엣 하나가 들어온다. 짧은 머리와 교복. 뒤로 멘 가방. 품에 가득 안은 커다란 봉투. 모습이 뚜렷해질수록 심장이 요동친다. 머리 위로 환희와 당황이 쏟아져 내린다. 곁눈질로 쇼핑백을 뒤적여 찻잎 묶음을 확인하며 손바닥으로 가슴을 두드린다. 찻잎도 있고 안색도 괜찮다. 다섯까지 세고 고개를 드니 건널목 맞은편에 선 은서와 눈이 마주친다. 자신과 닮은 눈매가 의아에서 고민으로, 그 후 깨달음과 반가움으로 변한다. 신호가 녹색 불로 바뀐다. 사람들 선두에서 달려오는 은서에게 미연은 준비한 대로 웃는다.

“안녕하세요, 언니!”

‘안녕. 내 딸아.’

목을 타 넘지 못한 말이 가슴으로 추락한다.

“안녕. 은서였지?”

“네. 기억하고 계셨네요.”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름에 은서가 환하게 웃는다. 미연은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필사적으로 잡아 편다. 십육 년 만의 독대. 그리고 대화. 이 모든 게 꿈속에서 이뤄지는 일 같다. 평정심을 유지하려 집중할수록 미연의 뇌가 새하얗게 타오른다. 그런 미연이 눈에 세상이 이상하게 변해간다. 시야가 급격하게 좁아진다. 하늘과 건물은 하얗게 날아가고, 도로와 사람들은 검게 물든다. 이내 미연의 눈에는 은서를 제외한 모든 풍경이 반죽처럼 길게 늘어지다가 끝내 선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진다. 검은 세상에 서있는 둘. 그 신비로운 체험에 놀랄 여유도 없이, 잠시라도 긴장을 풀면 울음이 터질 것 같다.

“미연 언니 맞으시죠?”

‘언니가 아니라 엄마야. 자격은 없겠지만.’

“흔한 이름인데, 너도 용케 기억하고 있구나.”

“다행히 틀리지 않았네요. 이상하게 그때 듣는 순간 잊히지가 않더라고요.”

‘응, 내가 네 엄마야.’

은서의 모든 말이 엄마로 들린다. 아이의 고운 목소리에 가슴으로 추락했던 말들이 불쑥불쑥 튀어 오른다. 미연은 그물을 치듯이 은서의 말을 한 음절씩 쥐고 가슴에 곱게 펴 바른다. 내가 이 아이를 버렸구나. 이렇게 예쁜 아이를 그동안 방치하고 외면했구나. 그리움과 죄책감에 몸이 앞뒤로 흔들려도 표정만은 유지한다. 그물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것을 소화제처럼 삼킨다.

“근데 여긴 어쩐 일이세요? 이모 보러 오셨어요?”

‘아니. 너 보러 왔단다.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친구한테 귀한 찻잎을 좀 얻어서 유경 언니한테 주려고 왔어. 난 커피밖에 안 마시거든.”

“아! 그럼 이모랑 같이 저희 가게로 가셔서 커피 드시고 가세요. 딸인 제가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아빠 커피 맛은 우주 최고거든요!”

‘알아. 최고지. 엄마도 아빠한테 입을 데어가며 커피를 배웠단다.’

“그렇게 말하니 꼭 한 번 마셔봐야겠네.”

벚꽃이 날리듯 길 잃은 말들이 가슴속으로 떨어진다. 그 하나하나가 칼날처럼 메마른 바닥에 꽂히지만 미연에겐 그 아픔마저 단비처럼 달콤하다.

“미연아.”

그러나 영원 같던 오십구 초는 찰나 같은 일분에 쉽게 깨어진다. 예고 없이 옆구리를 치는 목소리에 미연의 검은 세상은 순식간에 원래대로 되돌아온다. 시야로 들어오는 도로와 건물들이 가슴에 박힌 칼날을 자루까지 밀어 넣는다. 미연은 평평해진 마음을 발로 다지며 고개를 돌린다. 그곳에는 여자아이의 손을 잡은 동그란 눈의 유경이 서있다.

“너 어쩐 일이냐?”

‘은서.’

“선물.”

미연이 찻잎 묶음을 꺼내 머리맡에서 흔든다.

“뭐야, 그건?”

‘은서.’

“허브.”

“맞다, 너 커피만 마시지. 아, 희주야. 이모한테 인사해야지.”

“이모, 안녕!”

‘은서야.’

“많이 컸구나.”

미연이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자 희주가 팔을 활짝 벌린다. 품으로 안아 들자 희주는 미연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빈다.

“이모 보고 싶었어.”

‘은서야.’

“나도 보고 싶었어.”

희주를 안은 채 시선을 돌리자, 눈이 마주친 은서가 미연을 보며 환하게 웃는다. 미연도 따라 활짝 웃어준다.

‘은서야.’

울고 싶다.


*

“온 김에 커피 한 잔 하고 가. 지난번에 본 남자 있지? 그 녀석이 저기서 커피숍 하거든.”

희주를 내려놓는데 유경이 먼저 제의를 한다. 그리고 대답도 듣지 않고 걸음을 뗀다. 앞서가는 유경의 소매를 잡아챈 미연은 따라가려던 은서에게 묻는다.

“그것도 좋지만, 은서는 이제 학교 끝난 거야?”

“네.”

“그럼 이제 학원가니?”

“아니요. 저 학원은 안 다녀요.”

학원을 안 다녀? 학원 안 다니는 고등학생이 대한민국에 있나. 의아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은서의 대답에 미연은 옅게 웃는다.

“그럼 언니. 카페는 다음에 가고, 언니 가게로 가서 차 마시자.”

“차 마시기엔 가게보다 카페가 나을 텐데. 그리고 너 커피밖에 안 먹잖아.”

“이거 비싼 거야. 나도 한 번 먹어봐야지. 은서도 다른 일 없으면 같이 가자.”

미연의 말에 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가게로 현수를 부를까?”

“바쁘실지도 모르잖아. 오늘은 우리 여자들끼리 마시자.”

미연은 자연스레 두 사람의 등을 떠민다. 순간 유경의 촉이 꿈틀거린다. 하지만 이내 아무렴 어떠냐는 마음으로 자신의 가게로 걸어간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유경은 문득 길 건너로 시선이 스친다. 맞은편 일층 분식집에는 수진이 멍하니 앉아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뭔가 알싸한 느낌이 척추를 타고 내려간다.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배에 힘이 들어간다.

“어이! 수진 씨!”

우렁찬 소리에 수진은 퍼뜩 고개를 든다. 길 건너에는 손을 흔드는 유경과 익히 낯이 익은 두 아이, 그리고 모르는 한 사람이 일렬로 서있다.

“내 친구 놀러 와서 우리 차 마실 건데, 수진 씨도 같이 마시자.”

이게 무슨 상황이지. 동그래진 눈이 대열을 따라가다 마지막 사람에게 멎는다. 처음 보는 사람인가 싶었는데 유심히 보니 이틀 전 현수의 가게에서 봤던 그 여자다. 여자의 정체에 반사적으로 일어났지만 일어난 것이 무색하게 잠시 제자리에서 방황한다. 그러다 이내 결심을 내린 수진은 가게 문을 열고 나온다.

“저도 껴도 돼요?”

“컴온!”

순간 유경과 미연의 표정이 수진을 사이에 두고 교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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