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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날씨

2. 현수와 미연 : 가족인형 1

by 이한얼






소나기가 내린 새벽에

미연에게 현수는 그랬다. 새벽에 잠시 내린 소나기처럼, 흔적으로만 자신이 왔다가 갔음을 알리는 존재였다. 미연에게 은서는 또 달랐다. 건물 사이로 조금씩 번지는 박명처럼, 사위가 밝아지고 나서야 문득 밤이 끝났음을 알게 하는 존재였다.


*


유월 일일


한낮, 유경의 가게

머리 위 조명이 무색할 만큼 좁은 실내는 환했다. 해는 분명 이 건물 뒤편에 있을 텐데. 미연은 고개를 돌려 통유리로 된 입구 너머를 살폈다. 1차선의 차도를 끼고 마주 보고 선 건물들, 그 앞으로 시장바구니며 유모차를 손에 쥔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걸어갔다. 짙은 남색 바지와 조끼를 입은 학생들이 통유리 왼편에서 나타나 오른쪽으로 사라졌다. 그 나이 또래의 왁자하고 높은 고함을 남긴 자리에 비상등을 켠 하얀 차가 미끄러지듯 멈춰 서며 불법주차를 했다. 어느 곳에서나 쉬이 볼 수 있는 보통 동네의 모습. 지금 미연이 들여다보는 통유리는 마치 브라운관처럼 일상의 단면을 상영하는 듯했다.

순간 바람이 불며 가로수 가지가 우수수 흔들렸다. 그에 맞춰 조각난 빛이 번쩍거리며 미연의 눈을 때렸다. 지나가던 행인을 살피던 미연의 눈이 위를 향했다. 지금 미연의 눈에 닿은 빛은 건너편 이층에서 쏘아지고 있었다. 정확히는 이층 유리창에 반사된 햇빛이었다. 미연을 향한 건물 한쪽 면이 여덟 개의 커다란 창문으로 되어있었다. 바람이 가로수를 헤집을 때마다 마치 반사판처럼 거리거리로 빛을 뿌려댔다. 해를 등지고 있음에도 지금 미연이 있는 곳이 밝은 이유였다. 윤슬처럼 일렁이는 광채의 오케스트라에 시선을 뺏긴 미연 뒤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오래 굽혔던 허리를 펴는 신음과 함께 한 여자가 반쯤 열린 문 뒤에서 튀어나왔다.

“마땅한 게 없네.”

여자는 양손에 들고 있는 것을 좁은 카운터 위로 늘어놓았다. 말과는 달리 수북이 쌓이는 것은 각종 옷들이었다. 옷을 감싼 비닐을 한참 뒤적여도 여자의 눈은 이거다 하며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을 힐끗 돌아본 미연은 다시 입구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됐다니까.”

“그래도, 계절 바뀌는데 뭐라도 하나 줘야지.”

그제야 여자는 미연의 신경이 다른 곳에 있음을 알아챘다. 향한 시선을 한 뼘씩 잡아채며 따라가니 건너편 이층 건물이었다. 가지가 흔들릴 때마다 산란하는 반짝임이 가게의 하얀 타일 바닥에 여러 무늬를 피워냈다.

“저긴 뭐하는 데야?”

“카페야.”

사층의 오래된 건물이었다. 처음은 분명 하얬을 타일이 세월만큼의 잿빛으로 물들고, 삼사층의 창문들도 뿌연 먼지로 화장하고 있는 평범한 건물. 그중에 검정 창틀에 깨끗하게 닦아놓은 이층 유리창은 과연 도드라졌다.

“십오 년 넘은 카페인데, 사장은 나보다 어려.”

“인수했나 보네.”

“아니야. 본인이 개점한 거래.”

대꾸하는 여자를 미연이 물끄러미 쳐다봤다. 왜 그렇게 보냐는 듯이 여자의 눈이 동그래졌다.

“자세히 아네.”

“나랑 친하거든. 거의 매일 놀러 가니까.”

“만나?”

미연의 기정사실 같은 어조에 여자를 빠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그냥 비슷한 처지기도 하고, 이런저런 사건도 있어서 친해진 거야.”

여자는 ‘사건’이라고 말할 때쯤 잠시 어물거렸다. 미연은 무슨 일이 있었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냥 고개를 돌렸다. 이 동네로 가게를 옮긴 지 일 년이 지나지 않았다고 들었다. 평소 누구보다 폐쇄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이 그 짧은 시간 동안 스스로 친하다고 말할 정도로 누군가를 사귀었다니. 성인이 되자마자 만나서 십칠 년을 알고 지낸 미연으로서는 믿기 힘든 말이었으나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누구나 예외는 있다. 그것은 일상이나 생각에도 그렇고, 성격이나 상황에도 그랬다. 비슷한 처지. 그 한 마디가 맴돌아 미연은 다시 카페를 살폈다. 밖이 밝아 내부는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키가 큰 누군가가 오가는 실루엣만 얼핏 스쳤다. 저 사람이 사장인가 보다. 여자보다 어리다면 많아봤자 미연과 동갑일 텐데, 그러고도 십오 년이 넘었다면 이십 대 초반에 가게를 열었다는 뜻이었다. 부유한 집안의 자식일 거라 미연은 생각했다. 더불어 스물 초반에 자신의 가게를 열만큼 스스로에게 뚜렷한 사람일 터였다. 만약 그렇다면 둘이 잘됐으면 좋겠다. 미연의 눈앞에서 괜한 손짓으로 옷더미를 뒤적이는 여자는 돈이 부족한 사람은 아니지만, 말끔한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었으니까. 스스로 중심이 서있는 사람이지만 오래 혼자 서있던 만큼, 다른 줏대를 가진 사람과 기대어 살고 싶어 했다. 본인은 극구 부정하지만 미연이 본 여자는 그랬다. 그런 점은 미연과 달랐지만, 그렇기에 좋아하는 언니였다. 그렇다고 대리만족은 아니라고 미연은 생각했다.

여자는 주제를 돌리려는 듯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옷을 뒤적이며 미연에게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라고 했다. 그리 애쓰는데 계속 엇박자를 내는 것도 못할 짓이라, 미연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자가 운영하는 옷가게는 3평 남짓이어서, 중간 테이블에서 카운터까지는 세 걸음이면 족했다. 미연은 여자가 고른 세 벌 중에 그나마 가장 시원해 보이는 옷을 골랐다. 속이 비치고 가오리처럼 넓게 펴진 모양새라, 끈으로 된 민소매 위에 입기에 적당해 보였다. 옷을 만드는 사람이라 그런지, 여자는 계절마다 옷을 주려고 했다. 지난달까지는 한국에 있는 시간이 많지 않던 미연이라 실제로는 일 년에 하나를 받을까 말까 했다. 근데 아예 한국으로 들어온 앞으로는 얼마나 더 주려고 할지. 옷을 받을 때마다 여자의 아이들에게 선물로 되돌려주긴 했다. 하지만 엄마가 옷을 만드는 사람인데 옷을 사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옷이 아니라면 이미 장난감을 가지고 놀 나이가 지난 아이들에게 계절마다 줄 선물이 궁색했다. 나름 배부른 고민이었다.

언제나처럼 계산을 하니 마니로 씨름하다가 미연은 결국 꺼낸 지갑을 도로 넣었다. 받을 거란 기대도 안 했지만 시늉이라도 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했다. 여자가 작은 쇼핑백에 포장을 하는 동안 미연은 가게 안을 둘러봤다. 곧 더워질 계절에 맞춰 가게 안은 온통 얇고 짧은 옷들이 걸려있었다. 그중 유난히 눈에 띄는 하나, 시선이 가장 많이 쏠리는 쇼윈도에 딱 봐도 계절이 다른 옷이 걸려있었다. 골반을 덮을 길이에 무늬가 없는 갈색 니트였다. 몸이 차갑고 더위를 못 느끼는 사람이라 해도, 선선해지는 가을은 돼야 입을 두께였다. 그런 옷이 여름옷 사이에 끼어있으니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저게 뭐냐고 물으려는 찰나 여자는 미연에게 쇼핑백을 불쑥 내밀었다.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미연은 속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또 저 표정이다. 선물을 주는 사람이 왜 부끄러워하는 건지. 지금 칭찬이나 겸양 같은 다른 말을 하면 여자는 눈을 돌리고 다른 말을 하며 시끄럽게 굴 터였다. 실력도 있고 스스로 자부심도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 보일 때면 초조해하는, 창작자의 공통분모를 충실히 가진 사람이니까. 여기서는 담백하게 감사인사만 해야 한다는 것을 미연은 지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고마워. 잘 입을게.”

여자는 짐짓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아랫입술을 살짝 밀어낸 상태로 고개만 끄덕였다. 저 표정은 미연이 집에 가서 실제 착의한 사진과 함께 예쁘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야 풀릴 것이다. 미연은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숨기며 쇼핑백과 핸드백을 챙겨 들었다.

유리문을 열고나오니 뜨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유월 시작부터 이러면 올여름은 어쩌려는 건지. 미연은 부쩍 짧아진 옷차림을 살피다 뭔가 생각난 듯 그대로 멈춰서 핸드백을 뒤지기 시작했다. 오늘 여기 온 목적은 세 개였다. 언니 나 아예 들어왔어. 언니 이사했다며. 그리고 이거. 금세 원하던 것을 찾아낸 미연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걸음을 멈춘 미연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여자에게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여자는 바람에 팔랑거리는 종이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번 우리 콘서트 티켓.”

미연이 먼저 정체를 밝히자 여자는 환한 얼굴로 웃었다. 마치 소녀 같은 얼굴이어서 미연이 퉁을 놓았다.

“조카뻘 되는 애들 쫓아다니기에는 너무 아줌마 아냐?”

“얘들 공연 재밌게 하니까 그렇지. 넌 일하느라 바쁘지?”

“내가 미니콘까지 책임질 짬밥은 아닌데, 뭐 뒤에서 살피긴 해야지. 그래서 두 장이잖아. 누구랑 같이 와.”

미연은 손가락을 비틀어 겹친 종이를 두 개로 분리하며 슬쩍 건너편 카페를 살폈다. 티켓에 적힌 ‘VIP’을 확인하던 여자는 미연의 시선에 기분 나쁘지 않게 정색했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알았어. 근데 달리 친한 사람도 없잖아.”

여자는 뭐라 대꾸하려다 마는 모양이었다. 미연도 그대로 입을 다물고 여자에게 티켓을 건넸다. 남의 연애는 자꾸 개입하고 싶어도, 본인이 원하지 않는다면 나설수록 민폐였다.

“갈게.”

“그래. 연락해.”

한 손에 티켓을 든 여자는 멀어지는 미연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점차 기온이 올라가는, 유월의 한낮 무렵이었다.


*


유월 삼일


밤, 미연의 집

미연의 밤은 적막했다. 분위기가 아니라 실제 그랬다. 직사각형 모양의 주방과 거실을 밝히는 광원은 두 개뿐이었다. 주방 쪽 작은 할로겐 조명과, 다른 하나는 그나마 전구도 아닌 TV였다. 양끝에서부터 번진 불빛으로 인해 주방과 거실의 경계쯤은 사물이나 겨우 인식할 만큼 어두웠다. 그마저도 시시때때로 바뀌는 TV 화면에 따라 일렁이기 일쑤였다.

어딘가에서 레버를 꺾어 물을 내리는 소리가 났다. 미연은 배수구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는 물소리를 들으며 화장실에서 나왔다. 열린 문틈으로 나오던 빛이 금세 사라졌다. 어두컴컴한 거실의 빈자리마다 짐들이 쌓여있었다. 풀다 만 종이박스, 배를 벌리고 있는 캐리어, 포장조차 뜯지 않은 바구니 등이 장애물처럼 박혀있었다. 미연은 그 틈새를 밟으며 주방으로 향했다. 이틀쯤 쌓아둔 설거지 사이에서 그나마 깨끗한 컵을 찾아낸 미연은 물로 적당히 헹군 후 정수기 앞에 섰다. 문득 허기가 느껴졌다. 컵 안으로 물이 떨어지는 동안 머리 위 선반을 뒤적여봤으나 이 밤중에 먹기엔 부담스러운 인스턴트뿐이었다. 결국 한 잔을 들이켜고 다시 한 잔을 채운 미연은 손바닥으로 명치 어림을 문지르며 거실로 넘어갔다.

도중에 만난 식탁 위는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종이들이 겹쳐져있었다. 이건 아니고, 이건 지난주 거. 명세서와 진단서, 인명부와 큐시트 사이를 한참 뒤적이던 손이 곧 VIP 좌석 배치도라고 적힌 종이 한 장을 찾았다. 잠시 내용을 들여다보던 미연은 다시 물건을 뛰어넘으며 소파에 앉았다. TV에선 마침 늦은 밤에 하는 가요프로가 나오는 중이었다. 중년 여자가 마이크를 앞에 두고 기다란 스탠드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오물거리던 여자의 입이 닫히자 화면이 넓어졌다. 박수를 치는 관객들의 브리지 샷 후에 진행자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인터뷰를 시작했다. 무슨 노래였는지, 무슨 말을 나누고 있는지는 미연도 몰랐다. TV는 아까부터 음소거였으니까.

미연은 시선을 거뒀다. 무엇을 찾는지 두리번거리던 시선 끝이 소파 앞 낮은 탁자에 도착했다. 하얗고 동그란 쟁반 안에 축축하게 뭉친 휴지가 깔려있는 접시와 담배가 담겨있었다. 컵을 내려놓고 쟁반을 끌어온 미연은 엉덩이에 닿은 펠트 천의 결을 따라 등받이에 바싹 기대앉아 담배를 빼어 물었다. 하얀 막대 끝에 불꽃이 피어났다. 그와 함께 솟아오른 연기가 베란다 창문을 타고 흐르다 열린 틈 윗부분으로 유령처럼 빠져나갔다. 흐릿한 TV 불빛으로 종이를 살피던 미연은 휴대전화를 찾아 ‘유경 언니’ 옆의 녹색 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두 번도 울리기 전에 전화가 연결됐다.

“안 잤지?”

받자마자 쏘아낸 말에 수화기 너머 상대가 버럭 성을 냈다.

“야 이년아. 지금이 몇 신데 전화질이야?”

미연은 TV 옆 시계를 힐끔거렸다.

“아직 열한 시잖아. 잤어?”

“아니.”

그럴 리가 있겠냐는 어투에 미연은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왜 전화했어?”

“같이 갈 사람 구했나 해서.”

미연의 말에 난감한 듯 상대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왜?”

왜라니. 묘한 방어기제가 느껴져 미연의 눈썹이 일자로 뒤집혔다.

“그냥 궁금해서. 친구도 없잖아.”

“알면 왜 묻냐.”

지음 관계이니 할 수 있는 농담에 양쪽에서 가볍게 웃음소리가 울렸다. 미연은 말을 고르다 다시 물었다.

“거기 시장에서 친하게 지내는 사람 있다며.”

“여럿이라 하나만 달고 가긴 좀 그렇다. 두 장 다 줘버리면 모를까.”

주긴 누굴 줘. 이 아줌마가 그 표가 얼마나 귀한 건지 모르네. 미연은 휴지에 담배를 돌려 재를 깎아내며 기분 좋게 웃었다.

“동현이는?”

“지금 시험기간이야.”

“정 없으면 그냥 나랑 보든가.”

“너 일하잖아. 그리고 갈 사람은 있어. 아직 말은 안 했지만.”

그 카페 사장? 미연은 그리 물으려다가 그만두고 질문을 멀리 돌렸다.

“누구?”

즉답이 성격인 유경이 이상하게 뜸을 들였다. 미연이 되묻지 않고 참을성 있게 기다리니 잠시 후 유경이 슬쩍 말을 흘렸다.

“카페 사장네 딸이 있는데, 걔랑 가게.”

“왜?”

“걔도 얘네 좋아해서.”

이 언니 봐라. 장수를 잡으려면 말부터라더니.

“이럴 줄 알았으면 셋이 가게 한 장 더 구해볼 걸 그랬네.”

미연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숨기고 짓궂은 소리를 했다.

“아서라. 안 그래도 뒷말 듣기 지겨워 죽겠다.”

넌더리를 내는 기색이 수화기 너머까지 전해졌다. 미연은 무슨 마음인지 알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남녀를 불문하고 나이가 있는 싱글에게 주변은 걱정을 빙자한 오지랖을 남발하기 일쑤였다. 처음 한 마디쯤이야 그러려니 넘겨도, 상대의 기색을 읽지 못하는지 않는 건지 무례할 만큼 뒷말을 덧붙였다. 그럴 때면 종종 미연은 참지 못하고 마주 쏘아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무례에 대한 응징으로 돌아오는 말은 사과가 아닌 무례하다는 불쾌감이었다. 자신조차 그럴진대 아이들까지 있는 언니를 두고 시장 사람들이 얼마나 수군거릴지는 보지 않아도 알만 했다. 더구나 비슷한 처지라는 또래 남자와 가깝게 지내는 것도 모자라 같이 공연을 보러 간다? 애까지 데리고? 기분 나쁜 침을 삼킨 미연은 맥락을 끊어냈다.

“아무튼 알았어.”

그때 수화기 너머에서 ‘엄마’하고 우는 소리가 났다. 어린아이 특유의 높고 얇은 목소리에 미연의 어깨가 굳었다.

“희주 깼다. 아무튼 모레 맞지? 그때 봐.”

상대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미연은 잠시 멀건 화면을 내려다보다가 소파 한쪽에 내려놓았다.

전화하는 사이 담배는 이미 필터만 남았다. 미연은 휴지에 꽁초를 꽂아놓고 물을 들이켰다. 그 무렵 TV 화면에서는 밴드가 나왔다. 노란 머리에 짙은 눈 화장을 한 어린 남자들이 일렬로 서서 정신없이 악기를 다루고 있었다. 그 모양이 우스꽝스러우면서 동시에 슬퍼 보였다. 소리를 키우면 아마 신나는 멜로디가 흐르는 중일 것이다. 미연이 듣기엔 약간 정신없고 머리 아픈 소리일 테지만.

그 순간 미연은 자신이 지금 사람의 목소리가 고프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순한 말소리가 아니었다. 그건 눈앞의 TV에도 넘쳐났다. 라디오나 인터넷에도 가득했다. 미연에게 필요한 건 대화였다. 언어를 구실 삼아 타인과 비언어적 감정과 정서적 어감을 실시간으로 상호작용하는 그런 행위가 그리웠다. 새벽까지 술 마시고 떠들다 오늘 아침에야 간신히 기어들어와 놓고, 자고 일어나 가장 먼저 고픈 것이 허기 다음에 목소리라니.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내일 해도 되는 용건으로 굳이 전화를 걸었으나 그조차 충분히 채우지 못하고 끊겼다. 서운한 듯 잠시 전화기를 바라보던 미연은 리모컨을 찾아 연달아 눌렀다. 드라마, 예능, 노래, 영화. 누구 하나 웃지 않는 이가 없었다. 미연이 TV를 꺼버리자 거실마저 컴컴하게 물들었다. 모든 게 조용했다. 집 안 가득한 물건에 비해 소리는 누군가 일부러 치운 듯 찾을 수가 없었다.

그때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한두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들은 금세 촘촘한 직선을 만들며 창문을 내리긋기 시작했다. 여름밤 갑자기 찾아오는 소나기였다. 볼륨을 빠르게 올리는 것처럼 적막한 거실에 빗소리가 가득 찼다. 성급한 몇몇은 열린 창문으로 뛰어들어 TV 근처까지 물방울을 뿌려댔다.

소나기는 금세 그쳤다. 그러니까 소나기였다. 아까 했던 통화보다 짧은 시간 동안 내렸던 비는 창문과 바닥에 흥건함만 내려두고 소리만 다시 걷어갔다. 물건이 늘어갈수록, 소리가 줄어들수록, 그만큼 미연의 집은 적막해졌다. 잠시 후 어두운 소파 위에 붉은 불꽃이 올랐다 사라졌다. 주방 할로겐 조명을 받은 담배연기만 한동안 천장 아래를 맴돌았다.


*


유월 사일


오후, 현수의 가게


‘은서 있으면 전체 금연’

언제 봐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패기 넘치는 문구다. 덕분에 은서는 시장상인들 사이에서 유명해서, 결국 시장거리에 마스코트처럼 되어버렸지만. 이제 단골들은 테이블 위에 재떨이가 없으면, 으레 다른 말없이 흡연실에서 담배를 태웠다. 종종 처음 오는 손님은 ‘은서가 누구예요?’라고 물기도 했다. 그때마다 은서는 창피하다며 현수에게 떼 달라고 했지만 딸 부탁이라면 잿물도 마시는 현수가 왜인지 매번 거절했다. 아마도 ‘은서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우리 딸입니다!’라는 식으로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겠지. 결국 은서도 포기했는지 떼 달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심지어 요즘은 카페 일을 도울 때는 유경이 장난스럽게 만들어온, ‘은서’라고 적힌 명찰을 달고 있기도 했다.


실제로는 은서가 등교한 후부터 정오까지만 전체 흡연이었다. 창문이 많아 환기는 금방이지만, 구석에 밴 냄새까지 빼려면 세 시간은 족히 걸렸다. 은서가 마감을 하지 않고 저녁쯤 들어가면 그 후로도 가능했다. 그밖에는 따로 마련해놓은 흡연실만 이용할 수 있었다. 물론 유리벽으로 공간을 나누어 시간과 상관없이 금연석인 자리도 삼분의 일쯤 되었다.


“쟤는 아까부터 뭐 하는 거라니?”

“몰라.”

바 안에 선 현수가 불퉁하게 대꾸한다. 그에 바 밖에 앉아있던 유경의 눈썹이 높이 솟는다.

“몰라?”

“아까 오자마자 가방만 내려놓고 쭉 저러고 있어.”

현수의 볼은 이미 퉁퉁 부어있다. 접시를 닦는 손짓이 삐죽한 게 불만이 가득해 보인다. 그 모습에 유경은 웃으며 놀리듯 말을 잇는다.

“네가 은서 일 중에 모르는 일도 있고, 신기하네.”

“나도 물어보고 싶었는데, 할 거 있으니 방해하지 말라는데 뭘 어째.”

“무슨 할 일?”

“아, 몰라! 묻지 마!”

현수가 한껏 낮춘 목소리로 버럭 성질을 낸다. 그러면서 혹시 누군가 듣진 않았는지 카운터 밖을 조심스레 살핀다.

“이놈이! 지가 안 물어봐 놓고 어디다 화풀이야!”

유경이 휴지를 뭉쳐 장난스럽게 던지자 현수는 흥, 코웃음을 치며 들고 있던 접시로 쳐낸다. 그러고는 닦던 접시를 찬장에 챙겨 넣으면서 계속 구시렁거리는 폼이 사뭇 웃기다.

요즘 이 젊은 사장을 놀려먹는 일은 유경의 새로운 소일거리 중 하나다. 평소 불같던 다혈질은 어디 가고 딸 상대로는 카운터 안에서 쫑알거리는 게 다라니. 못 말리겠다는 듯 웃던 유경은 몸을 뒤로 젖힌다. 무게중심에 따라 긴 스탠드 의자가 아슬아슬하게 기울어진다. 몸을 앞뒤로 흔드는 것으로 중심은 잡은 유경은 테이블 쪽으로 고개만 돌린다.

“어이. 아가씨.”

뒤에서 찔러 들어오는 유경의 목소리에 한창 분주하던 손이 멈춘다. 고개를 돌리자 유경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똑바로 보고 있다. 깜짝 놀란 아이는 작은 체구를 벌떡 일으킨다.

“이모. 언제 오셨어요?”

“어제.”

“죄송해요. 정신이 팔려서 인사도 못 드리고.”

예의 바른 정수리를 보며 유경은 웃는다.

“사과하라고 부른 건 아니고, 뭐 하는 거야?”

유경이 들고 있던 빨대로 테이블을 가리키자, 아이는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흩어져있는 종이를 한데 모으며 쑥스럽게 웃는다.

“이번 학교 축제 때 연극을 하는데, 제가 대본 각색을 맡았거든요.”

“너 연극부였냐?”

“예. 어쩌다 보니.”

유경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현수를 봐도 현수 역시 어깨를 으쓱 일 뿐이다. 유경은 다시 아이에게 고개를 돌린다.

“처음 알았네. 근데 너 정도면 여주인공 자리도 괜찮잖아. 웬 각색?”

“그게.”

연기를 하는 상상만으로도 두 볼을 발갛게 물들이는 아이를 보며 유경은 우문이었다고 속으로 중얼거린다. 아빠 낯짝은 코끼리가죽인데 애 엄마는 어지간히 숫기가 없었나 싶다.

“알만하다. 작업은 잘 되고?”

“열심히는 하는데, 잘 모르겠어요.”

“무슨 연극인데?”

“인형극이에요.”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잔뜩 좁아졌던 미간이 이내 침음 소리와 함께 연하게 펴진다. 고등학교 연극부에서 웬 인형극?

“내용이 뭔데?”

유경의 질문에 아이는 신이 나서 계속 조잘거린다.

“도박 중독인 아빠와, 바람난 엄마와, 불량학생인 딸이 전부 경찰서에서 만나서, 공권력의 힘을 통해 다시 화목해지는 내용이에요.”

그것 역시 고등학교에서 할 만한 내용은 아닌 것 같은데. 펴지는 듯하다가 다시 구겨지는 유경의 표정에 아이는 의아한 얼굴이 된다.

“왜 그러세요?”

“아니다. 그래, 열심히 해봐라.”

아이를 앉힌 유경은 다시 자세를 바로 해서 카운터로 돌아온다. 마침 현수는 한창 우유 거품을 내는 중이다. 유경이 짓궂은 얼굴로 한참을 바라보니 스테인리스 컵을 든 손이 바르르 떨린다.

“아, 왜!”

“그렇다는데?”

“뭐가!”

유경은 곁에 세워진 컵받침 하나를 꺼내 밀며 웃는다.

“다 들었으면서 시치미는. 너 지금 귀가 쫑긋거리는 게 영락없이 토끼야.”

“야한 농담은 애들 없는 데서 하세요. 할 일 없으면 여기서 죽치지 말고 가게로 가.”

현수는 유경이 내민 받침에 우유 거품을 부은 잔을 올려놓는다. 그러자 유경이 곁에 놓인 시나몬 가루를 뿌리며 말한다.

“그나저나 아쉽겠네. 딸내미가 연극부라서 내심 여주인공이길 기대했을 텐데.”

“해도 문제잖아. 바람난 엄마 역이거나 애들 때리는 학생 역이니.”

“하긴, 팔불출 딸 바보께선 둘 다 마음에 안 차겠어.”

유경은 대놓고 깔깔거린다. 현수는 투덜거리지만 별 다른 말은 없다. 자신이 팔불출인 건 시장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하니까. 몇 마디 더 놀리던 유경은 희주 올 시간이 되었다며 가게를 나간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손님은 어느 정도 빠져나간다. 손이 한가해지자 한동안 카운터 안에서 눈치를 보던 현수는 슬그머니 아이가 앉은 테이블로 붙는다.

“저기, 은서야.”

고개 숙인 뒤통수는 대꾸가 없다. 우물쭈물하던 현수는 잠시 후 조금 더 다가간다.

“그……, 잘 돼가?”

한 마디 덧붙이는 목소리에 한참 펜을 놀리던 은서가 현수를 돌아본다. 무표정한 얼굴에 당황한 현수는 한 걸음 물러난다.

“아빠가 방해한 거니?”

남자의 눈을 노려보던 은서가 갑자기 활짝 웃는다.

“궁금해 죽을 것 같은 표정 치고는 지금까지 잘 참았네.”

하고 있던 작업이 방해받아서 화가 난 게 아닐까 걱정하던 현수의 표정이 급격하게 펴진다. 그리고 그 위로, 거들어주고 싶으니 제발 도와달라고 말해달라는 간절한 표정이 가득 차오른다.

“아무튼 어쩔 수 없다니까.”

입 꼬리를 길게 늘인 은서는 자신의 옆 자리를 손바닥으로 두 번 내리치며 말한다.

“바쁘지 않으시면 도와주세요.”

“어? 으하하. 당연하지! 우리 딸내미가 도와달라는데 바쁜 게 문제겠어! 오늘 가게 접자.”

“그건 안 되고!”

현수는 허겁지겁 앞치마를 벗어 옆 테이블로 던져버리고 은서 옆자리에 앉는다. 싱글벙글한 폼이 어지간히 기뻐 보인다. 은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현수는 괜찮다는 듯 가슴을 두드린다.

“괜찮아. 오늘 하루 안 한다고 가게 안 망해. 뭐부터 할까?”

“안 돼. 손님 오면 도로 쫓아낼 거야.”

“손님을?”

“아니! 아빠를!”

“그럼 쫓겨난 아빠가 손님을 쫓아내고 다시 앉으면 되지!”

“안 되겠다. 아빠 가. 지금 가.”

은서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현수의 신발을 툭툭 차며 어깨를 밀어낸다. 그럼에도 현수는 여전한 미소로 은서 쪽으로 엉덩이를 들이민다.


*


유월 오일


밤, 현수와 은서의 집

“아빠! 엄마!”

노란색 옷을 입은 아이가 뒤뚱뒤뚱 달려와 외친다.

“우리 이제 남에게 상처 주지 말아요!”

그렇게 말하는 아이 곁으로 파란색 옷을 입은 아빠가 다가온다.

“오오! 그래! 내 아가. 그러자꾸나.”

그들의 곁에서 엄마 대신 빨간 혀를 내민 공룡이 말한다.

“앞으로 다 같이 행복하자 살자. 그러자.”

면 티에 편한 반바지를 입은 현수가 구부정한 자세로 고개만 든다. 은서는 손에 든 종이에 뭔가를 빠르게 적고 있다. 펜을 내린 은서는 종이를 위에서 아래로 두어 번 훑는다. 그리고 고개를 든다. 현수와 은서의 눈이 마주친다. ‘된 거야?’라는 현수의 눈짓에 은서가 고개를 끄덕인다.

“끝났다!”

손에 든 인형들을 내려놓은 현수가 먼저 바닥에 드러눕자 은서도 종이와 키보드를 밀어내며 탁자에 엎드린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어.”

현수가 길게 기지개를 켜자 마구잡이로 쌓여있던 커피 잔과 그릇들이 손가락에 부딪혀 위태롭게 흔들린다. 고개만 돌려 시계를 확인한 현수는 두 손으로 눈을 문지르며 말한다.

“벌써 두 시네.”

“졸린데 커피를 계속 마셔서 잠이 안 와.”

“그래도 가서 누우면 피곤해서 금방 잠들 거야. 먼저 자. 프린트는 아빠가 내일 아침에 할게.”

“응. 잘 자. 아빠.”

은서는 일어나 현수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고는 졸린 걸음을 끌며 방으로 들어간다. 방 앞까지 은서의 뒷모습을 쫓던 현수의 시선이 이내 널브러진 주변으로 퍼져나간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작업은 생각보다 훨씬 길어졌다. 어중간한 것을 싫어하는 두 부녀의 성격 탓이었다. 각색을 마친 후에도 작은 간이 무대를 만들고, 그동안 장식용이었던 집안 인형들까지 전부 꺼내와 동선을 맞추며 두어 번을 더 고쳐야 했다. 그러다 보니 자야 할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그릇들을 안아 들어 싱크대에 몰아넣은 현수는 소리가 나지 않게 물줄기를 얇게 튼다. 그리고 조심조심 설거지를 시작한다. 기계적으로 그릇을 닦으며 현수의 시선은 생각에 빠진 듯 멀리 뻗어나간다. 하루 종일 장사와 각색 작업을 번갈아 하고, 가게 마감 후 집에 오자마자 세 시간 동안 대사와 지문들과 씨름을 했다. 당연히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일 밝은 얼굴로 각본을 들고 갈 은서를 떠올리니 지금까지의 피로가 전부 풀리는 느낌이었다.

설거지는 금세 끝이 난다.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고 현수는 거실로 향한다. 키보드를 컴퓨터 앞에 붙여놓고 종이도 가지런히 정리해서 쌓아둔다. 조잡하게 만든 간의 무대도 TV 옆으로 밀어놓고, 바닥에 굴러다니는 인형도 한 손에 네 개씩 쥐고 은서 방으로 들어간다. 서랍장 위는 기다랗게 비어있다. 현수는 벽 쪽부터 인형을 채워나간다.

고등학생인 아이의 방에 웬 인형인가 싶지만, 은서는 현수가 술에 취해 한두 개씩 뽑아온 인형을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다. 덕분에 한 줄을 꼬박 채울 만큼 인형이 많아졌다. 허름한 두 인형은 그중 눈에 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파란색 아빠 인형과 노란색 아이 인형. 아까 인형극에서 아빠와 아이 역할을 한 인형이었다. 한 번도 험하게 다룬 적 없지만 지나온 세월만큼 두 인형에게도 해묵은 시간들이 쌓였다. 비록 은서가 어린이집을 갈 무렵부터 가지고 놀진 않았지만, 그 후로도 십 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 은서 방 한쪽에 늘 가지런히 붙어있었다.

현수는 은서 곁으로 다가온다. 잠이 오지 않는다던 아이는 십 분 만에 입을 벌린 채 잠이 빠져있다. 곁에 앉아 잠든 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이 아이를 위해 뭘 못해줄까. 목숨조차 아깝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이라는 생명은 이 아이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은서가 올바르게 자라도록, 약한 듯 강한 아이가 스스로를 돌보며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 도와주기 위해 하느님께서 자신을 이곳에 내려 보낸 것이라고. 이미 현수의 인생은 은서에게 맞춰져 있었다. 삶의 목표도, 의의도 모두 이 아이에게 바친 셈이었다. 스스로의 생활과 하고 싶은 일들도 그 앞에서는 전부 소용없었다. 아예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은서에 비하면 초라하고 하찮게만 보였다. 그러니 손톱만큼도 억울하지 않았다. 후회도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은서와의 행복을 그릴 때마다 비어있는 캔버스 한쪽에 늘 그늘이 졌다. 모두가 당연한 듯 양손에 쥐고 태어날 때 이 아이만 한쪽이 빈손이어야 했던 그 자리. 그럼에도 은서는 건강하게 자라났다. 그 빈자리는 내내 아쉬웠지만 지금 아이가 행복하다면 이제는 무시할 수 있는 명암이었다.

아빠는 지금도 충분히 행복해. 아니, 지금이 가장 행복해. 이 이상은 필요도 없고, 더 욕심부리고 싶지도 않아.

너도 그러니? 그늘진 곳에 하얀 물감을 덧칠하듯 현수는 마음으로만 되새기던 생각을 입을 통해 읊조린다. 튀어나간 말이 다시 귀로 들어와 마음 위에 새로운 캔버스를 덮어줄 수 있게.

현수는 잠든 은서의 머리를 가볍게 쓸어 넘긴다. 조용히 일어나 얕은 발걸음으로 밖으로 향한다. 거실에서 쏟아지는 불빛이 조심스레 닫히는 문에 점점 가려진다. 이내 문은 완전히 닫히고, 방에는 은서와 달빛만 남는다.


*

아침, 현수와 은서의 집

컴퓨터 전원 버튼을 누르며 현수는 긴 하품을 빼낸다. 어제 원래 해야 했던 몇 가지 일마저 끝내니 이미 네 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그제야 잠자리에 든 현수는 세 시간도 못 자고 일어난 것이다. 졸음에 겨운 눈으로 모니터에 뜬 프린터 모양의 아이콘을 누르자 곧 프린터가 덜커덕거리며 작동을 시작한다. 현수는 컴퓨터를 놔두고 은서를 깨우기 위해 방으로 들어간다. 은서는 창을 통해 떨어지는 햇살을 피해 베개를 덮고 있다. 현수는 웃으며 침대 한편에 빗겨 앉는다.

“이건 덮고 자는 게 아니라 베고 자는 거야.”

얼굴을 가린 베개를 치우니 은서는 눈살을 찌푸리며 뒤척인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이마에 들러붙은 앞머리 몇 가닥을 떼어내고 반듯한 이마에 입을 맞춘다.

“은서야. 이제 일어나야 해.”

은서의 뒤척임이 커진다. 이 나이 또래가 전부 그러는지 모르지만 은서는 유난히 아침잠이 많았다. 미간을 구긴 채 눈을 뜨지 못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현수는 일부러 은서의 머리를 마구 흐트러트린다.

“딸. 지금 안 일어나면 머리 못 감고 학교 가야 할 텐데.”

장난스러운 목소리였지만 뒤척이던 은서의 눈이 번쩍 떠진다. 이것도 또래 애들은 전부 그런가. 어느 날부턴가 학교 가기 전에 꼭 머리를 감는 은서의 버릇으로 인해 이 말은 둘 사이에 아침을 깨우는 키워드가 되어 있었다.

“몇 시야?”

“아직 오 분 정도 여유 있어.”

입으로 시간을 확인한 은서는 안도한 듯 웃는다. 그리고 현수를 향해 돌아누워 허리 어림을 꼭 끌어안는다.

“아빠, 굿모닝.”

작은 머리를 안아준 현수도 은서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얼른 씻고 나와. 아침 먹자.”

은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느릿느릿 걸어간 은서가 화장실로 들어가자 현수는 거실로 향한다. 끝났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프린터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모니터에도 원인을 정확히 설명해주지 않는 오류 메시지만 떠있다.

“요즘 계속 이러네.”

중얼거리던 현수는 메시지 창을 지우고 다시 프린트 버튼을 누른다. 하지만 잠시 기다려도 컴퓨터는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럴 땐 급한 성격이 늘 화가 된다. 조급해진 현수가 재촉하듯 컴퓨터 본체를 몇 대 내리친다. 그러자 갑자기 힘 빠지는 소리와 함께 컴퓨터의 전원이 꺼진다. 놀란 현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난다. 하지만 곧 “저장은 했으니까”에서 “은서 나오면 물어봐야겠다”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린다.

부엌으로 향한 현수가 그릇으로 작은 식탁의 절반쯤을 채워놓았을 때수건을 뒤집어쓴 은서가 화장실에서 나온다. 점점이 물방울을 흘리며 방으로 향하는 뒷모습을 보며 현수는 목을 길게 빼고 소리친다.

“은서야. 컴퓨터 또 꺼졌어.”

“또? 요즘 계속 그러네.”

대꾸와 함께 드라이어 켜지는 소리가 들린다.

“손 볼 때가 되었나 보다. 점점 느려지는 것 같고.”

귀 옆에서 울리는 소리 탓에 못 들었는지 은서에게서 대답이 없다. 현수는 마저 아침을 차린다. 잠시 후 떨어지는 물방울만 없앤 은서가 거실로 향하더니 곧 큰 소리로 현수를 부른다.

“아빠.”

“응?”

대꾸에도 은서의 대답이 없자 현수는 물 컵을 마지막으로 아침 준비를 마치고 거실로 향한다.

“딸. 왜?”

은서는 컴퓨터 앞에 서있다. 망연자실한 얼굴을 보는 순간 현수는 순간 불안감이 차오른다.

“아빠. 컴퓨터 안 켜져요.”

“응?”

“아까 탕탕, 그거 컴퓨터 두드린 소리죠?”

놀란 현수의 표정을 본 은서가 기겁하며 목소리를 높인다.

“아빠! 내가 컴퓨터 때리지 말랬잖아!”

“아니, 그게, 아니 그게.”

현수는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한다. 은서가 한숨을 내쉬자 현수는 애먼 손을 조몰락거린다. 은서가 손등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이것저것 만져보는 동안 현수는 뒤에서 초조하게 모니터만 바라본다. 몇 번 다시 전원을 켜도 똑같은 화면에서 작동이 멈추자 은서는 멀티 탭의 빨간 버튼을 꺼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완전히 갔다.”

은서의 선언에 현수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은서가 찌푸린 미간으로 아랫입술을 씹는 동안, 현수는 양 손으로 머리를 붙잡고 “어쩌지”만 연발하며 거실을 오간다. 까만 모니터를 내려다보며 고민을 하던 은서는 곧 별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거실을 빙글빙글 돌고 있던 현수의 팔을 붙든다.

“진정해요. 아빠.”

“어쩌지. 은서야, 어쩌지.”

“괜찮아. 다시 하면 돼.”

은서의 말에 현수의 고개가 시계로 향한다. 일곱 시 십 분. 여덟 시 삼십 분이 등교 시간이니 그 십 분 전에는 출발해야 한다. 다시 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다시 패닉에 빠지려는 현수의 양팔을 은서가 붙잡는다. 그리고 눈을 마주치고 진정시키듯 차분하게 말한다.

“어제 가게 컴퓨터에 뒷부분까지 해놓은 거 있잖아요. 한 번 했던 거라 마무리는 금방 다시 쓸 수 있어요.”

은서의 말에 현수는 고개를 끄덕인다. 마음 같아선 당장 달려가고 싶지만 아침을 먹는 건 현수가 정한 집안의 규칙이었다. 현수가 무슨 고민을 하는지 깨달은 은서가 웃는다.

“얼른 밥 먹고 가게로 가요.”

은서가 현수를 부엌 쪽으로 잡아끈다. 엄마 손에 잡혀 병원으로 끌려가는 아이처럼 현수는 은서를 따라 식탁으로 향한다. 의자에 앉는 현수는 문득 손 하나가 절실했다. 현수가 종이를 읽고 은서가 적는 동안 주먹밥 하나를 작게 뭉쳐 아이의 입에 넣어줄 손이.

힘없이 들린 현수의 숟가락 위로 김 한 장이 올라온다. 고개를 들어보니, 은서가 웃으며 빈 젓가락을 거둬가고 있다.


*


아침, 현수의 가게

가게 화장실에서 양치를 마치고 나왔을 때 현수는 누구와 통화 중이다. 칫솔 통을 가방에 챙기며 들어보니 상대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었다.

“네. 그래서 우리 은서가, 체기가 좀 있어서요. 네. 아니요, 심각한 건 아니고요. 바, 방금 화장실에서 좀 올리고 지금 나왔어요. 네. 아, 약 먹여서 바로 보낼게요. 네, 선생님.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예, 들어가세요.”

더듬으며 통화하는 현수의 뒷모습을 보며 은서의 얼굴에 낭패와 웃음이 교차한다. 진짜 거짓말 못해, 우리 아빠. 현수는 허공에 몇 번씩 인사를 하고 나서야 전화를 끊는다. 꺼진 화면을 내려다보던 현수는 창밖 도로에서 거칠게 울리는 자동차 경적소리에 놀라 고개를 든다. 돌아보니 은서는 등을 돌린 채 가방을 챙기고 있다.

“양치 다 했어?”

“응. 근데 누구예요?”

은서는 짐짓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묻는다.

“아! 은서 담임선생님.”

“왜?”

이쯤부터 현수의 얼굴에 약간의 뿌듯함이 떠오른다.

“아빠가 전화했어. 우리 은서가 아침에 체기가 심해서. 그래서 토하고 막 그러느라 좀 늦을 것 같다고. 약 먹여서 바로 보낸다고 했어.”

왠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마치 칭찬을 기다리는 듯한 현수의 말투에 은서는 참고 있던 웃음을 터트린다.

“왜? 왜 그래?”

“그래도 어차피 지각이야.”

“왜? 아빠가 선생님께 아프다고 직접 전화도 했는데?”

은서는 종이 뭉치를 가방에 넣으며 대꾸했다.

“그럼 병결 지각이지.”

“미리 전화하고 많이 안 늦으면 지각 체크 안 하지 않니? 아빠 때는 그랬는데.”

“다른 데는 모르겠는데 우리는 안 그래.”

은서의 말에 현수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진다. 곁눈질로 현수를 살피던 은서는 가방을 메고 다가간다.

“그래도 고마워. 아빠가 전화해줘서 혼나진 않을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이 섞인 은서의 말에 현수의 얼굴이 반쯤 환해진다.

“그래? 그럼 다행이다. 괜히 전화한 거 아닌가 했는데.”

병명이 하필 체기라서 오늘 점심은 못 먹겠지만요. 환하게 웃는 현수에게 은서는 뒷말을 붙이지 못한다. 대신 현수를 꼭 안아준다. 이마에 뽀뽀를 하고 받은 은서는 마지막으로 휴대전화를 챙겨 든다.

“다녀올게요.”

“우리 딸. 차 조심하고, 친구들이랑 싸우지 말고, 선생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은서가 웃는 얼굴로 말을 자른다.

“아빠. 딸내미 늦었어.”

“어? 어, 그래.”

현수의 대답을 들은 은서는 웃으며 가게 문을 열고 나간다. 한 칸, 두 칸 철제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은서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자 현수는 어정쩡하게 든 손을 내린다. 고개를 돌린 현수의 눈에 시계가 들어온다. 여덟 시 오십 분. 일 교시까지도 아슬아슬한 시간이다.

창밖은 조용한 북적임이 가득하다. 늦게 출근하는 직장인들과 일찍 개점하는 가게 주인들이 좌우에서 나타나 반대쪽으로 사라진다. 현수는 쓰러지듯 자리에 주저앉는다. 테이블 위에는 풀과 가위, 그리고 이리저리 잘린 종이 자투리로 넘쳐난다. 모두 한쪽으로 밀어버린 현수는 팔을 괴고 엎드린다. 정신없이 바쁘다가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진 순간 찾아오는 불안과 허전함. 의미 없는 시선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현수는 테이블에 이마를 쿵쿵 내리찍는다. 도와주지 못할 거면 가만히라도 있지. 머리를 쥐어뜯는 손짓에 뒤통수가 엉망으로 헝클어진다. 택시는 잘 타고 갔을까. 무사히 도착했나.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든 현수는 이내 테이블 위로 거칠게 던져놓는다. 그 충격에 테이블 외곽에 걸려있던 가위가 발치로 떨어진다. 날이 벌어진 채 나뒹구는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던 현수는 한숨을 내쉬며 가위를 주워 든다.

개점을 하기엔 아직 한참이나 이른 시간이었다.


*


아침, 현수의 가게 앞

은서는 웃으며 가게 문을 열고 나간다. 이미 여덟 시 오십 분이니 서두르는 건 의미가 없다. 가벼운 한숨을 내쉰 은서는 여유로운 걸음으로 좁은 계단을 내려간다.

“늦었네.”

뜻밖의 목소리에 은서는 고개를 든다. 어둡다 밝아지는 건물 입구에는 남학생이 한쪽 어깨에 가방을 걸친 채 서있다.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의 등장에 자연스레 은서의 고개가 좌우를 훑는다. 일층 분식집도, 맞은편 옷가게도 이 시간엔 당연히 닫혀있다. 은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건물 밖으로 나선다.

“지금 학교 가는 거야?”

“응. 오빠는 왜 여기 있어?”

“지나가다 창문이 열려 있어서. 누가 있나 싶어서 올라가 보는 길이야.”

남학생의 말에 은서는 고개를 돌려 가게를 올려다본다. 이층 통유리 한쪽으로 열린 창문에서 하얀 연기가 줄지어 나오고 있다. 아마 지금쯤 혼자 자책하고 있을 모습이 그려져서 절로 쓴웃음이 지어진다.

“일이 좀 있었어. 위에 아빠 계셔.”

“일?”

은서는 대답 대신 어깨를 민다.

“나중에 얘기하고, 일단 가자.”

“어딜?”

“어디긴. 학교 가야지. 오빠도 지금 지각이야.”

종종걸음으로 뛰어가 택시를 잡으려는 뒷모습을 보며 남학생은 실없이 웃는다. 길가로 다가가 은서를 인도 위로 올려놓고 자신이 택시를 잡는다. 곧 지각생 둘을 태운 택시가 가게 앞을 떠난다.


*


오전, 현수의 가게

“으이그. 화상아.”

여자의 말에 남자는 대꾸가 없다.

“도와주진 못할망정 방해나 하고.”

“그만하지?”

남자의 낮은 경고에 여자는 턱을 당기며 고개를 살짝 숙인다. 그리고 눈동자만 천장을 보고 양손으로 집게 흉내를 내며 말한다.

“어이구. 무서워라.”

“야!”

통유리로 떨어지는 햇살이 가게 안 쌀쌀함을 몰아내는 오전 11시. 텅 빈 실내에는 한 쌍의 남녀만 있다. 접시를 손에 쥔 현수가 아무리 매섭게 노려봐도 담배를 물고 있는 유경은 꼼짝도 안 한다. 그 모습에 현수가 한숨을 내쉬며 쥐고 있던 접시를 마저 닦는다. 유경은 재떨이에 담배를 끄고 휴지를 뭉쳐 현수에게 던진다.

“아, 진짜 하지 마!”

“이 놈 봐라. 이러다 한 대 치겠네.”

“진짜 맞는다.”

현수의 으름장을 유경은 코웃음으로 받아친다.

“네가 여자 때리는 놈이었으면 처음 만난 날 벌써 맞았겠지.”

“그때 눈 딱 감고 한 대 쥐어박는 건데”라며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며 유경이 새 담배를 꺼낸다.

“맹추야. 아침에 전화는 왜 한 거야?”

“그러면 지각 아닌 줄 알았다니까. 우리 때는 그랬잖아.”

“근데 왜 하필 체기야? 차라리 몸살 같은 걸로 하지.”

이거나 그거나 같은 거 아닌가 하는 의문이 현수의 얼굴을 스쳐 지나간다.

“아무튼 은서 오늘 점심 굶겠네.”

“뭐? 왜?”

“야. 지각할 정도로 아침에 체기가 심했는데, 4시간 만에 그 비싸고 맛없는 급식을 어떻게 먹어? 먹는 순간 ‘우리 아빠가 거짓말했어요’하는 거지.”

이번엔 아뿔싸 하는 낭패감이 현수의 얼굴 위를 지나간다.

“그리고 요즘은 지각 좀 했다고 혼내거나 하지 않아. 그냥 벌금 조금 내지.”

유경의 말에 설거지를 하던 현수의 손이 멎는다. 쏟아지는 물줄기가 컵을 가득 채우고 넘치는 동안 현수는 거품 묻은 고무장갑으로 자신의 눈썹을 비빈다. 저 놈 너무 멀리 가네. 유경은 얼른 휴지를 말아 현수에게 던진다. 하지만 어제와 다르게 반항 없이 맞는다. 그 모습에 유경은 김샌 표정으로 지갑과 휴대전화를 챙긴다.

“가게?”

“재미없어. 희주 올 시간도 되었고.”

“남의 불행이 당신 행복이유?”

“넌 반응이 재밌으니까.”

현수가 기가 찬다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자 유경은 나가기 전에 한 마디를 덧붙인다.

“혹시 밥 싸들고 학교 찾아가고 그러지 마라.”

저 여자가 무슨 요술을 부리는 거지 싶은 현수의 표정에 유경의 얼굴이 뜨악해진다.

“너 진짜 갈 생각이었냐?”

“어. 근데 왜?”

“야! 너 지난번에 학교 운동장에서 체육 선생 멱살 잡고 흔든 거 기억 안 나?”

현수가 억울한 듯 항변한다.

“그건 그 망할 놈이 몸살 걸린 애한테 윽박지르면서 장거리 달리기를 시켰잖아.”

“아무튼 그걸로 네가 은서 아빠인 거 전교생이 다 아는데, 네가 도시락 들고 가봐라. 그것도 급식 먹는 학교에. ‘나 거짓말했는데 수습하러 왔어요!’라고 광고라고 하게?”

현수는 묵묵부답이다. 그 모습에 유경이 혀를 찬다.

“멍청이.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 있어.”

현수는 충격을 받은 듯 가만히 서있다. 그 얼굴까지 확인한 유경은 악의 없는 미소를 남기고 가게 문을 열고 나온다. 계단을 내려오며 휴대전화에서 ‘동현’을 찾아 메시지를 보내던 유경은 순간 힐이 꺾이며 휘청거린다.

“젠장. 그대로 황천 갈 뻔했네.”

습관이란 게 참 무섭다. 이럴 때마다 매번 건물 계단과 이어진 뒷문으로 나가야지 다짐하면서도, 언제나 정신 차려보면 외부 계단으로 연결된 정문으로 내려가고 있다. 이따위 좁고 높은 철제 계단은 도대체 어떤 머리가 만들어놓은 건지. 급하게 손잡이를 잡아 구르진 않았지만 휴대전화는 이미 세 번을 튕겨 거친 아스팔트 위로 슬라이딩 중이다.

건물에서 나와 휴대전화를 주어들고 자신의 가게 쪽으로 향하던 유경은 건너편 횡단보도에서 누군가를 발견한다. 순간 뭔가 떠오른 유경은 바지춤에 닦던 휴대전화를 집어넣는다. 그리고 지갑에서 꺼낸 종이 두 장을 잠시 들여다본다. 그놈 뒤치다꺼리하다 등골 휘겠네. 중얼거린 말과는 달리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는 유경은 잠시 그 자리에서 기다린다. 보행자 신호로 바뀌고, 품에 커다란 봉투를 한껏 안은 채 횡단보도를 건너오던 여자는 건물 앞에 서있던 유경과 눈이 마주친다.

“언니!”

“올라!”

유경이 종이를 들지 않은 빈손을 흔든다. 여자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유경 앞에 선다.

“카페에 계셨어요?”

작게 고개를 끄덕인 유경이 “수진 씨는 그게 뭐야?”라고 되묻는다. 눈은 품에 안고 있는 봉투에 있지만 입은 묘하게 웃고 있다. 담긴 내용물에 대해 설명하려던 수진은 유경의 얼굴을 보고는 그냥 웃는다. 지금 유경은 궁금한 표정이 아니라 특유의 장난기 어린 얼굴이다. 수진이 넘어가지 않겠다는 얼굴로 마주 웃자 유경이 과장되게 한숨을 내쉰다.

“아무튼 수진 씨도, 사서 고생이야.”

“그러게요. 아무래도 전 평생 고생하며 살 팔자인가 봐요.”

젊은 아가씨가 유들유들하기는. 유경은 수진의 이런 성격이 싫지 않다. 하지만 상대적 약자를 골려줄 방법은 많다. 여유 있게 받아치는 수진에게 다가간 유경은 귓가에 은근하게 속삭인다.

“근데 지금 그 녀석한테 필요한 건 이게 아닌데 말이지.”

“네?”

놀란 수진이 한 걸음 물러난다. 유경의 짓궂은 표정은 ‘난 너의 약점을 알고 있으니 내가 승리자야’라고 하는 듯하다.

“아무튼 알고도 매번 당하네요.”

수진은 놀란 가슴을 다독이며 옅게 웃는다.

“이거 농담 아닌데.”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여전히 그 녀석 얘기만 나오면 표정이 싹 달라지네. 유경은 음흉하게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내리누르며 말한다.

“무슨 일? 있지, 그럼. 있고 맑고.”

“장난치지 말고요. 무슨 일인데요?”

수진의 진지한 눈동자를 보며 유경은 길거리에서 손짓 발짓까지 동원하며 어제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해준다. 그동안 수진의 표정은 걱정에서 의아로, 다시 안도와 고민으로 바뀐다. 설명을 마친 유경은 그런 수진의 모습을 보며 사람들 시선에 아랑곳없이 깔깔 웃는다. 수진은 자신의 귓불을 문지르며 최대한 단어와 문장을 골라서 말한다.

“이거 참, 큰일이 아니라서 다행이면서도 큰일이네요.”

“그렇지. 은서에 관련된 일이니까 그 녀석한테는 큰일이지.”

난감한 수진의 어조에 유경은 재미있다는 듯 팔짱을 낀다. 수진은 곁눈질로 유경을 살핀다. 그리고 곧 처음과 같은 웃음을 보인다.

“어쨌든 언니가 그렇게 즐기시는 걸 보니 이미 적당한 해결책이 있으신 거죠?”

이것 봐라 하는 유경의 눈빛을 보며 수진이 덧붙인다.

“그리고 그 해결책은 아마도 손에 든 그 종이일 테고요.”

“내가 이래서 수진 씨를 좋아해. 눈치가 엄청 빠르거든.”

“당연하죠. 언니같이 세심한 사람이 대책도 없이 사태를 즐길 리가 없죠.”

수진의 말에 유경은 입꼬리를 끌어내려 완고한 노인 같은 표정을 꾸미며 고개를 흔든다.

“그런 식의 예리한 점은 별로야. 별로 안 귀엽다고.”

“오빠야 눈치 유전자를 은서에게 전부 물려줬으니, 제가 좀 예리해도 어차피 눈치 못 채요.”

길거리에 선 두 여자는 서로를 마주 보며 소리 내어 웃는다.


*


점심, 학교 휴게실

“뭐해?”

고개를 돌려보니 남학생이 서있다. 휴게실로 드나드는 입구 한가운데 마치 수문장처럼. 오늘 저 사람이 저런 식으로 자주 등장하네. 은서는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들어 홀로 웃음이 터진다. 자신의 질문에 대꾸 없이 웃음을 터트리는 모습에 남학생의 표정이 이상해진다. 내가 어디 이상한가 하는 몸짓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뒤까지 돌아본다. 그 모습에 은서는 더 크게 웃음을 터트린다.

“왜?”

“아니야. 갑자기 다른 생각이 들어서. 음악 듣고 있었어.”

은서가 귀에서 이어폰을 빼자 남학생은 그제야 휴게실 안으로 들어선다. 교내의 햇볕이 가장 잘 드는 낮은 언덕 위의 휴게실에는 둘뿐이다. 점심시간은 이제 20분 정도 남았다. 은서는 아래쪽에 위치한 운동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남학생은 잠시 비어진 자리를 보다 은서와 적당히 떨어진 곳에 엉덩이를 붙인다. 그리고 들고 온 검정 봉지를 둘 사이에 내려놓는다. 은서의 시선이 봉지로 향하자 남학생은 짧게 내뱉는다.

“먹어.”

뭔가 싶어 입구를 살짝 열어보니 빵과 우유가 보인다.

“갑자기 웬 거야?”

“마녀, 아니, 엄마한테 문자 왔어.”

“뭐라고 왔는데?”

대답 대신 남학생은 휴대전화를 내민다. 액정에는 ‘은서점심사먹ㅇ’라는, 띄어쓰기도 마침표도 없고 어미가 이상하지만 의미 전달은 충분한 일곱 글자만 찍혀있다. 이모가 이걸 왜 보냈지. 아리송한 은서의 얼굴이 잠시 후 아차 하는 표정을 지나 결국 쌉쌀한 미소로 가라앉는다. 작은 손등이 이마를 문지르는 모습에 보며 동현이 묻는다.

“점심 안 먹었어?”

“응.”

“왜?”

“그럴 일이 좀 있었어. 오빠는?”

동현은 잠시 말이 없다가 뒤늦게 대꾸한다.

“나도 안 먹었어.”

“오빠는 왜?”

“나도 그럴 일이 좀 있었어.”

“그럼 같이 먹자.”

은서가 포장을 뜯어 빵 반절을 내민다. 망설이던 동현은 은서의 손가락에 자신의 손이 닿지 않게 조심스레 건네받는다. 그 순간 코끝을 스치는 냄새에 은서의 미간이 좁아진다. 덩달아 동현의 몸짓도 눈에 띄게 줄어든다. 동현의 소매에는 담배 냄새가 은은히 배어있다. 한 번 깨닫고 나니 각인처럼 계속 코를 스친다. 하지만 은서는 별다른 알은체 없이 빵을 씹으며 말한다.

“일광욕하기 딱 좋은 날씨다.”

빵을 들고만 있던 동현은 반대쪽 손으로 빵을 옮기고는 손을 주머니에 넣으며 대답한다.

“하루 20분 이상 하면 안 좋다는데.”

“어차피 점심시간은 길지 않으니까.”

은서는 주먹만 한 빵을 그새 다 털어 넣었다. 우유도 뜯어 한 모금 마신 후 길게 기지개를 켠다. 그 모습을 보며 동현은 약간의 위화감을 느낀다. 무슨 일 있었구나. 하지만 생각뿐이고 말로 나가지 않는다. 물어볼까 말까 고민하던 동현은 이내 마음을 꺼트린다. 그런 스스로의 모습에 동현은 속으로 혀를 찬다.

작년 추워질 무렵 처음 알게 되었고, 이제 구 개월 가량이 흘렀다. 부모끼리 가까워지는 만큼 둘 사이도 꾸준히 친해졌고, 이제는 서로를 꽤 스스럼없이 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생각은 분명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톱니에 이물질이 낀 것 마냥 잘 굴러가던 둘 사이가 덜그럭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건 말 그대로 이물감이었고, 일종의 위화감이기도 했다.

그 미묘한 변화를 아직은 동현 본인밖에 모를 테지만 시간이 지나면 상대 역시 눈치챌 수밖에 없다. 그럼 그동안 둘이 쌓아온 탑은 빠르게 무너지게 될 것이다. 그런 생각이 도리어 동현을 옥죄어왔다. 어느 순간부터 길게 이어지던 말이 점점 짧아지기 시작했고, 별생각 없이 하던 행동에 하나둘씩 의미를 담아갔다. 그게 결과적으로는 더 큰 변화를 만들고 있었기에 동현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초조해했다.

그런 동현의 속내와는 상관없이 은서가 먼저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신이 반에서 맡은 역할부터 어제와 오늘 아침의 일. 그리고 유경의 문자가 아마 어떤 경로로 오게 되었는지의 예측까지. 속사정을 듣는 동현의 얼굴이 점점 이상하게 일그러진다. 머릿속에서 단어를 고르던 동현은 은서의 말이 끝나고 한참 후에야 입을 연다.

“그거 참, 애매한 일이네.”

“그러니까. 사실 난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아빠는 전혀 그렇지 않으니까.”

“너에 관해서만 그런 거지만 ‘괜찮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시니까.”

“그래서 고민이야. 분명 집에 가면 멀리 서서 있는 눈치, 없는 눈치 다 보고 있을 텐데.”

“도자기 깨고 아버지를 맞이한 아이처럼 말이지.”

동현의 비유에 은서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동현이 서둘러 “조금 버릇없는 비유였나”하며 덧붙인다. 그 모습에 은서가 소리 내서 웃기 시작한다.

“아니야. 적절한 비유네.”

예전부터 그랬다. 은서가 사물을 분간하기 시작하고 남들보다 일찍 철이 들어갈 무렵부터, 아니 그전부터 그랬을 것이다. 현수는 은서에 관련된 일이라면 눈에 불을 켜는 사람이었다. 마치 세상에서 이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는 듯이. 물론 모든 아버지가 마찬가지겠지만 현수의 반응은 언제나 평범한 기준을 훨씬 상회했다.

“아빠는 아마, 만우절 날에 내가 오리 배를 타고 중국으로 밀입국하는 중이라고 하면 대경실색할 걸.”

그런 그에게 팔불출이라는 단어는 호사요 명예였다. 물론 은서로서는 자신에게 무조건적인 애정을 퍼부어주는 현수가 싫을 리 없었다. 하지만 비단 모든 것이 그렇듯 과하면 좋지 않음은 당연했다. 특히 이번처럼 현수가 은서에게 무언가 실수나 잘못을 했을 때 그 부작용은 극명하게 부각되었다. 엄마 없이 혼자 키웠다는 죄책감 때문인지, 혹은 현수 자신이 혼자인 만큼 무엇이든 두 배로 줘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쩔 때는, 아니 거의 모든 경우에 본인은 뒷전으로 미루고 딸에게 기우는 모습에 은서는 자랄수록 단순한 기쁨보단 걱정이 앞섰다. 좀 더 스스로를 돌보았으면 하는데. 좀 더 자신을 위해 시간과 정성을 들였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그런 은서의 마음은 언제나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주면서 그럼에도 부족해하는 현수 앞에 그 힘을 잃었다.

‘아빠도 이제 새 출발해야지. 내 또래만 아니면 어지간히 다 통과시켜줄 테니까, 아무나 좀 데려와 봐.’

어느 날인가 농담처럼 던진 말에도 현수의 표정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잠시 입을 다물고 심각하게 서있던 현수는, 이내 앉아 있던 은서와 눈높이를 맞추고 말했다.

‘은서야. 역시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지?’

‘그게 아니라, 나도 이제 어느 정도 컸으니까 아빠도 아빠를 위해 살아야지.’

은서의 말에 현수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크게 웃었다.

‘무슨 소리야. 아빠는 지금 그러고 있는데.’

기특하다는 듯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결국 먼저 손발을 들어버린 건 은서였다. 그 뒤로 은서는 직접 내색은 안 했지만, 현수를 생각할 때면 늘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공존하게 되었다.

“역시 뭐든 과하면 안 좋지.”

어느 하나에 이골이 난 사람의 옆모습을 보며 동현은 중얼거린다. 그러다 불현듯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른다. 둘 중 한 명은 나이답지 않은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다른 한 명은 나이답지 않은 편안한 웃음을 짓고 있다. 그 모습에 동현의 입 꼬리가 움찔거린다.

“이번에는 어쩌면 다를 수도 있겠지.”

불쑥 튀어나온 말에 은서는 이해 못한 얼굴이 된다. 막 되물으려는 순간 오 교시의 예비종이 울린다.

“일단 가봐. 의외로 예상과 다를지 누가 알겠어.”

애매모호한 말을 인사 대신으로 남기고 동현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은서는 멀어지는 동현의 등을 잠시 지켜본다. 최근 동현의 태도가 묘하게 달라진 것 같다. 나름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자신만의 착각처럼 느껴질 만큼. 처음에는 뭔가 실수를 했나 싶어 내심 마음을 끓였으나, 정확히 짚이는 게 없어 일단 기다리는 중이었다. 동현은 별다른 말을 않고, 미묘하게 어긋나는 느낌은 점차 무게를 더해가고 있었다.

요즘 동현의 태도와 방금 전의 말 사이에서 생각이 꼬여가고 있을 때 두 번째 종이 울린다. 두어 번 머리를 흔든 은서도 종종걸음으로 휴게실을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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