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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싸리나무 담장 0

0. 그렇게 우리는 가족이 된다.

by 이한얼


현준 / 오늘


아빠는 평생 동안 할아버지께 많은 생각과 기술을 배웠지만 시간이 지나도 가장 많이 떠오르는 하나는 이 울타리와 매듭에 대한 이야기야. 그리고 그 가르침은 그대로 우리 집안의 기조가 됐어. 지금 너희가 너무 잘 알고 있고, 매일 지키고 있듯이 말이다.

이 얘긴 삼 년 전, 유한이가 스무 살이 됐을 때 전부 말했단다. 유빈이도 스물이 됐으니 조만간 말할 생각이었어. 유리가 스물이 되면 또 그랬을 거야. 근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다섯이 전부 모이게 됐구나.

요 며칠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을 거야. 궁금하고 답답했을 거고. 어쩌면 충격받고 배신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상처를 받았다면 미안하다. 우리가 더 잘하지 못했어.

그래도 아빠 엄마를 기다려줘서 고맙다. 오빠를 믿어줘서 고마워. 누구도 크게 다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너희 덕분이야.


유리 / 내일


해가 스며드는 방 안에서 나는 마지막 매듭을 묶는다.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몸을 흔들며 어긋난 부분은 없는지 꼼꼼히 살핀다. 교복도, 머리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눈이 조금 부은 것 빼고는 평소와 같다. 그제야 가방을 메고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거실에는 이미 아무도 없다. 창밖을 보니 마당에 엄마 아빠와 언니 오빠가 모두 모여 있다. 나는 밖으로 나가다 말고 문득 현관 앞에 멈춘다. 할아버지와 마지막으로 함께 찍은 커다란 가족사진. 그리고 그 옆에 걸린 기다란 액자에는 지금껏 눈에만 익고 머리로만 이해하던 글귀가 적혀있다. 그 앞에 선 나는 처음으로, 첫 번째 줄부터 마지막 일곱 번째 줄까지 천천히 읽어본다.

“공정한 기준으로 규칙을 세운다. 규칙을 바탕으로 차별 없이 대한다. 동일한 방식은 정서를 만든다. 정서는 함께 하는 시간을 기억으로 바꾼다. 기억이 쌓이면 신뢰로 변한다. 신뢰는 서로를 연결하는 매듭이다. 그렇게 우리는 자신이면서 가족이 된다.”

그렇게 사람은 객체이자 집단이 된다. 각자의 삶을 사는 개별적인 구성원이면서 서로의 인생을 공유하는 가족이 된다. 사회의 기본 요소이자 인류의 가장 기초적인 단위. 함께 밥을 먹고 같은 정서를 공유하는 식구들끼리 가정을 이루었을 때야 비로소 만들어지는, 가족.

나는 신발을 신고 마당으로 나간다. 엄마는 오빠를 끌어안고 있다. 서로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고, 이마에 연한 입맞춤을 남긴 후에야 떨어진다.

“다녀올게요.”

언니와 나도 같은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대문 밖으로 나오게 된다. 대문 앞에는 오빠가 있었다. 오빠가 두 팔을 벌리자 언니가 쭈뼛거리며 안긴다. 조금씩 뒤로 빠지는 언니의 엉덩이를 지켜보며 나는 입을 가리고 웃는다. 언니를 놔준 오빠는 내게도 포옹과 입맞춤을 하며 “언니 너무 놀리면 안 돼”라고 속삭인다. 재빨리 끄덕였지만 웃음은 쉬이 멎지 않는다. 인사를 마친 오빠는 내리막으로 먼저 내려간다.

나도 뒤따라 내려가려는데 언니가 내 뒷덜미를 낚아챈다. 돌아본 언니는 두 팔을 벌리고 있다. 자매끼리는 처음이다. 언니에게 안기며 “오빠 따라 하게?” 하고 놀려본다. 우물쭈물하는 언니는 어색한 몸짓으로 내게 포옹과 입맞춤을 한다. 별 거 아닌데, 이마에 언니의 입술이 닿자 왠지 마음이 뭉클해진다. 괜히 쑥스러운 마음에 방금 언니처럼 엉덩이를 뒤로 빼본다. 좌우로 슬쩍슬쩍 흔들었더니 언니가 대뜸 엉덩이를 철썩 때린다.

“나는 너처럼 금방 되는 성격이 아니라고.”

투덜거리며 밀어내는 언니에게 “누가 금방 하래?”라며 퉁을 놓아본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예전처럼 되겠지. 지난주까지 우리가 그랬듯이. 지금껏 그렇게 가족이 되었듯이. 앞으로 그렇게 우리가 되듯이.

언니는 괜스레 옷을 털며 먼저 휘적휘적 걸어간다. 혼자 남은 나는 문득 뒤를 돌아본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회색 벽돌의 이층 집. 청록색 대문과 아담한 정원 안에 엄마 아빠가 있고, 언니 오빠가 함께 사는 그곳.

문득 오빠 방에서 이곳을 내려다보는 엄마와 눈이 마주친다. 엄마가 먼저 손을 흔든다. 마주 손을 흔든 나도 앞선 둘을 따라 언덕을 내려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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