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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적 창작물의 최고 등급

by 이한얼






“거기 누구 담배 있으면 하나 줘라. 보자… 일단 감독님께 충분한 시간과 넉넉한 돈부터 쥐어드리고, 끝났다고 할 때까지 기다려봐. 어디 가둬놓을 수 있으면 더 좋고.”


- 미키17




1) 여기가 정점일까 싶다가도, 아직 다른 방향으로는 팔다리를 끝까지 뻗지 않은 느낌이 있다. 지난 작품이 너무도 훌륭했고, 이번 작품도 더없이 즐거운데, 다음 작품마저도 기대가 된다. 그럼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님에게 그렇듯,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님에게도 그렇듯,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님에게도 그러 하듯, 봉준호 감독님이 평생 찍을 영화를 볼 수 있음에 기쁘고 감사하다.


2) 그동안 돈이 부족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충분한 돈을 쥐어주니 이런 결과물이 나와서 행복했다. 전작인 <괴물>을 봤다면 더더욱. 수백 체의 ‘괴물’이 한 화면에 나오는데 실제 사람과 크게 구분되지 않아서 그 자체만으로 눈이 즐거웠다.


3) 아니 주연 배우를 얼마나 쥐어짰는지 아니면 서로 즐겁게 수다만 떨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다 이렇게 됐대요? 주연뿐만 아니라 조연까지도 이제껏 알던 그 배우들이 아닌 것 같은데요?


4) 저런 구도에 저런 느낌의 음악, 충분히 익숙하다. 근데 이 구도와 음악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안 익숙하다. <설국열차>까지는 감독님이 헐리우드 영화를 대신 맡아서 만든 느낌이 강했는데, 이번에는 감독님이 만든 영화를 헐리우드에서 지원해준 느낌이 더 강했다.


5) 나는 감독님 특유의 (긍정적인) ‘구질구질’한 느낌을 좋아한다. 그 구질구질한 느낌 안에는 예스러운 꾀죄죄함이 있고, 가동가서한 구차함이 있고, 이해가 가는 좀스러움이 있으며, 무엇보다 성향마다 다른 결정을 내릴 절박함이 존재한다. 그 절박함에 어떤 선택을 내리느냐에 따라 좀스러움도 구차함도 꾀죄죄함도 친근히 느낄 수 있고, 불편하게 느낄 수도 있다. 평소 스스로를 ‘구질구질’하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일수록 영화가 구질구질하다고 느낄 법 하고, 평소 스스로가 구질구질할 때도 있다고 여기는 사람일수록 영화가 ‘구질구질’하다고 느낄 법도 하다. 실제 완벽에 얼마나 가까운지 그 완성도를 떠나, 자신을 완벽하다고 여기는 이는 재미를 떠나 혀부터 찰 것 같다. 나는 내가 얼마나 완벽한지, 그 완성도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어느 누구와도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런 만큼 나는 아직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고, 완성도 높은 세계관을 만들어가고 있지만 완성까지 아직 멀었으며, 그래서 이따금 구질구질한 감정으로 비스듬한 행동을 하고, 종종 자신이 만든 찌질한 함정에 빠져 오해하고 미워하고 토라지기도 한다. 그래서 나와 비슷한 실수를 하고 근처에서 넘어지며 그럼에도 절박함으로 생을 갈구하는 이들을 보면 그 ‘구질구질’함이 가련하고 사랑스럽다. 반대로, ‘구질구질’하지 않은 상대를 홉뜬 눈으로 흘겨보면서도 ‘내가 저 상황과 입장이라면 실제 어땠을까?’와 ‘어떻게 하고 싶은가?’를 계속 생각한다. ‘구질구질’하지 않은 누군가가 영화를 보며 ‘저건 내가 아니야. 저들은 나와 격이 달라’라며 선을 긋는 동안에 말이다. 내가 감독님 영화에 등장하는 그 긍정적인 ‘구질구질’함을 좋아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사실 정말 구질구질한 쪽이, 그들이 구질구질하다 생각하는 이를 보면서, 비웃고 차별하고 멸시하고 분리하고 소모하려는 모습을, 아직 구질구질해지지 않은 상대에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것을 목도한 이는 구질구질의 장벽을 넘어가고자 하는 희망자와 그것을 무너트리려는 저항자로 나뉜다. 그리고 그 저항의 모습과 과정을, 저들이 구질구질하다고 여기는 방식을 통해 이룩한다. 기존의 상식과 질서가 수립한 구질구질함을 무너트리는 데, 기준을 정한 그들이 가장 혐오하고 기피하던 기준이 적용된 것이다. 그로서 그들이 생각하는 구질구질함과, 실제로 이들을 통해 드러나는 ‘구질구질함’은 같지만 다른 모습이다. 그래서 저쪽으로 가고 싶었으나 가지 못했든, 갔다가 쫓겨났든, 처음부터 갈 생각이 없었든, ‘구질구질’한 그들의 꾀죄죄함도, 구차함도, 좀스러움도 더럽거나 못나 보이지 않는다. 절박함마저 웃기거나 헛되어 보이지도 않는다. 스스로를 특별하다 생각하지 않아서 부족하고 불안정한 우리는 이들과 우리 사이에 선을 긋지 않기 때문이다. 꾀죄죄함은 거울로 종종 보던 우리 얼굴이고, 구차함과 좀스러움도 어제나 그제쯤에 하거나 당했던 일들이다. 절박함조차 같은 상황이었다면 충분히 그럴 법하고. ‘구질구질’이란 생물의 한계와, 제도와 체제의 부족함과, 무리 사회의 단점과, 계급을 나누려는 갈등이 있음을 우선 인정하는 것이다. 거기서 더 나아지기를 포기하지 않고, 부족한 채로 만족하는 일을 저항하기로 결심하고 실행하는 것이다. 그럴 때 필연적으로 입가와 눈가에 따라붙는 먼지그을음, 소매가 헤진 셔츠, 땀 냄새가 나는 신발 같은 것이다. 다섯 걸음쯤 떨어진 자리에서 그것을 보며 더럽다며 얼굴을 찌푸리고, 한 손으로 코를 막고 다른 손으로 내쫓는 손짓을 하는 이가 하나. 그리고 일을 하다 보면 먼지 그을음으로 얼굴 군데군데가 검어지고, 셔츠 소매는 헤지고, 양말에 땀이 차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상대의 반응을 의아해하며 똑바로 서있는 이가 또 하나. 그리고 자신의 얼굴과 신발 상태를 부끄러워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이가 마지막으로 하나. 이 세 부류가 뒤섞였을 때 발생하는 화학반응과 파열음, 그 결과물에 대해 아마 세상에서 가장 정확하게 인지하고, 그것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분명하게 조합하고, 무엇보다 재미있게 그려낼 수 있는 감독일 것이다.


6) 하물며, 영화를 보며 각자 느끼는 바가 다르겠지만, 설령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한들 내용 자체만으로 충분히 재밌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하다.


7) 미키1과 미키17에 대해, 기계와 벽돌에 대해, <프레스티지>와 <더 문>, <아일랜드>와 <채피>와 연결시켜 하고픈 말은 더 있지만 이쯤부터는 스포가 되니까. 보고 온 이들끼리는 떠들어도 글로 남기는 것은 반년은 이르겠다.


8) 첫째, 인물과 배우. 둘째, 소재와 서사. 셋째, 연출과 묘사. 넷째, 보고 나서 여운이 남는지와 다시 보고 싶은지의 기억과 반복. 네 가지 항목 모두 별을 주고 싶다.


9) 리클라이너 좌석에 거의 누운 듯한 자세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등받이가 점점 바로 세워지고, 발받침대가 점점 내려가더니, 영화 절정 무렵에는 바른 자세로 똑바로 앉아서 보다가, 영화가 끝날 쯤에는 무릎에 팔꿈치를 괴고 상체가 한껏 앞으로 나가 있었다. 팝콘도 음료도 절반 이상 남겼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모습을 보며 박수를 쳤다. 상영관을 나서며 생각했다. 이런 창작물에 행복과 질투가 동시에 일어나서 더없이 기쁘다고.


10) 재밌었다. 상업적 창작물에 대해 내가 사용하는 최고의 칭찬으로 표현한다면, '시간과 돈이 전혀 아깝지 않았던' 두 시간의 경험이었다.





2025. 03.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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