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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후에 오는 것들

[15매]

by 이한얼






현재 시간은 02월 11일. 오후 09시 18분. 이 글을 쓰는 동안 점점 더 흘러가겠지.


지금 이 순간의 이 장소, 현존재의 감정과 상태를 간직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좋을까. 특정 순간이 어떤 매개체를 통해서 방금 있었던 일처럼 고스란히 살아난다면 우리의 삶은 보다 단단하고 풍족해졌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순기능만 있지는 않겠지만 모든 것은 누구의 손에서 어떤 의도로 운용되는지의 차이니까.


방금 나는 배가 고파 연거푸 과자를 집어먹는다. 그에 발맞춰 커피도 빠르게 줄어든다. 담배를 피우는 순간만큼은 머리가 아프지 않지만 기도 안에서 가릉거리는 가래 때문인지 한 번 들어간 연기는 평소보다 냄새를 오래 남긴다. 약간 어지럽지만 열은 고스란히 내렸다. 오히려 이젠 몸살보다 후유증으로 인한 허리가 더 고달프다. 섣불리 삼킨 과자로 끄윽 트림을 하면서 허리를 최대한 꼿꼿이 펴고, 이마가 간지러워 벅벅 긁다가 코 안쪽에 눌러 붙은 통증을 거슬려하면서 글을 쓰고 있다. 담배는 벌써 열다섯 개가 훌쩍 넘었고 새로 사온 담배도 든 자리보다 난 자리가 많아졌다. 이 와중에 눈이 멀쩡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허리야 꾸준히 아프니까 점점 익숙해진다 해도, 코 안쪽은 따끔거림이 간헐적으로 튀어나와 오히려 더 신경이 쓰인다. 나열된 것을 제외하고는 딱히 큰 이상은 없는 몸 상태다. 굳이 한두 개를 더 꼽자면 여전히 배가 고프다는 것과 입술이 죄다 터졌다는 것.


지난 사흘하고 절반을 누워있는 동안 나는 많은 것들과 무던히도 싸워야했다. 내 몸과 싸우다가, 그 안에 침투한 감기 바이러스와도 싸우다가, 끓어오르는 열과 씨름하다가, 딱딱한 바닥하고도 다퉜다. 깔깔한 입맛과 더부룩한 속과 단단하게 굳어오는 배와 싸웠고, 약한 불로 졸이는 듯한 머리와 아릿하게 녹아내리는 허리와도 싸웠다. 달랑 세 시간 잠들었을 때는 꿈에서 퍼즐과 도형으로 싸웠고, 어젯밤 꿈에는 지압을 위해 촘촘히 박아놓은 자갈길 위에서 네 시간 동안 포복을 하다가 눈을 떴다. 잔뜩 뭉친 온몸의 근육은 삐걱거리는 다른 관절과 다퉜고, 나는 그들을 달래며 욕조와 계단과 싸웠다.


또 코 안쪽이 아릿하다. 점심에 먹은 카레는 풍성한 재료에 비해 아무 향도 나지 않았다. 내가 지금 씹고 있는 것이 쌀인지 감자인지, 햄을 씹고 있는 건지 혀를 씹고 있는 건지 애매했다. 결국 개수대에 내버린 그릇에는 절반 이상이 남아있었다. 마지막 남은 약을 털어 마시고 찬바람을 피하며 담배를 피운다. 코가 막힌 상태에도 냄새는 기도에 남아서 안 해도 되는 기침을 하며 집으로 들어온다. 방에는 국화로 장식된 관처럼 반씩 젖어있는 휴지더미 아래 와인 빛 장판과 보라색 이불이 있다. 들어가서 누우면 곧 누군가가 뚜껑을 닫고 포장을 해서 밸런타인 선물이라고 건네줄 것 같다. 들뜬 기분에 선물을 열어본 사람은 안에 머리가 잔뜩 헝클어진 채 걸은 기침을 하는 남자를 보고는 기겁을 하며 상자를 내던지겠지. 상상만 해도 흥겹고 처참하다. 눕자마자 습관처럼 코를 푼 나는 또 반쯤 다른 어딘가로 스며든다. 어떤 방식으로 누워도 허리가 아프다. 오늘부터는 등과 어깨도 베기는 것이, 그래서 어제 자갈밭에서 포복하는 꿈을 꿨나 싶었다. 한 자세로 몇 분도 못 있고 돌아눕는 나는 멀리서 보면 맥반석 위의 오징어 같다. 콜록 콜록. 토하는 듯한 기침은 그 와중에도 여전하다.


다행인 것은 비몽사몽간에는 시간이 제법 잘 간다는 것이다. 나는 눈을 감고 이명을 음악 삼아 방에서 부유한다. 이 단계가 되면 초콜릿처럼 녹아내리는 허리도, 자갈을 박아 넣은 등도 감각에서 한 걸음 멀어진다. 이때부터는 다른 것과 싸우기 시작한다. 요즘 주마등마냥 눈앞에 과거의 편린들이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일이 많아졌다. 그 장면들이 쌓일수록 그것을 보던 나는 두 명이 되고 세 명이 되고 결국 네 명까지 된다. 그때부터 나는 다른 것이 아닌 나와 다툰다. 싸움은 항상 1대3이다. 벌떡 일어난 세 명이 밖으로 나가려는 것을 나보다 약간 큰 문 앞에 서서 온몸으로 막는다. 이명이 커지고 몸의 감각이 멀어질수록 싸움은 치열해진다. 잡고 끌고 물고 늘어지는 몸싸움은 결국 네 명 모두 만신창이가 된 채로 끝이 난다. 그 중 내 몰골이 가장 처참하다. 문이 하나였으니 망정이지, 사실 막았다기보다 맞았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리라. 하지만 결국 버티다 보면 셋은 어느 순간 멈춰서고 곧 사라진다. 그리고 그 모든 피로는 나에게 쏟아진다. 사 인분을 뒤집어 쓴 나는 이쯤 되면 완전히 너덜너덜하다. 눅눅한 베개에 얼굴을 박고 한참을 훌쩍이다 코를 풀고 일어난다. 치우고 치우다 어느 순간 치울 힘이 없어 머리맡은 백합 같은 휴지로 가득했다. 그 위에 한 송이 더 던져놓고 기어가다시피 밖으로 나가면 이미 상체 따로 하체 따로 같은데 용케 같이는 움직인다. 잠시 나가서 물을 마시고 담배마저 태우고 나면 더 이상 있을 곳도 받아주는 사람도 없어 도로 방으로 쫓겨난다. 그리고 다시 처음부터.


그래도 오늘은 좀 괜찮았다. 어제처럼 먹을 것이 없어 죽을 사먹거나 하지 않았고, 원하지 않는 외부 소리도 들리지 않아 마음이 편했다. 끙끙거리는 외출이었지만 그래도 움직여서 등의 자갈들도 태반이 빠져나갔다. 이제 코가 막히는 것과 잔기침과 녹아내리는 허리만 나으면 몸은 예전만큼 돌아갈 것 같다.


하지만 보고 싶은 사람은 여전하고, 그래도 그리운 마음은 그대로이다. 1대3으로 싸우던 나는 그 세 명은 막아도 결국 나는 막지 못한다. 보채고 달래고 불안해하다가, 자책하고 아쉬워하고 보고 싶고 그리워하다가, 사진을 보고 히히 웃고 지난 대화 목록을 보고 엉엉 울다가, 내던진 휴대전화처럼 나는 또 어딘가에서 이유 없이 떨어진다. 다른 어딘가에 잠시 충돌하며 멈췄다가 다시 떨어지기 전까지, 내가 왜 어디로 떨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이유는 늘 충돌 이후에 드러나고, 그 깨달음은 다음 추락 때나 밝혀진다.


누군가와 헤어진 지 이제 일주일이 지났다. 납득만 할 수 있고 인정할 수 없는 이별을 겪고 난 이들에게 오는 것들. 수많은 시간들이 지나면 결국 우리에겐 무엇이 남겨질까.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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