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악인의 장례식 [17매]
최초 우리는 만들어진다. 다른 둘이 만나 새로운 하나가 되고, 정제하지 않은 소통과 함께 세상에 첫 모습을 드러낸다. 직접적인 입력에 노출된 우리는 처음 반사적인 반응만 보이지만 다양한 입력이 반복될수록 점차 이성적인 반응, 출력으로 변해간다. 신뢰할 수 있는 출력은 일회적이지 않은, 지속적인 소통의 시작이다. 출력에 반응하는 입력을 다시금 받아드리는 소통을 통해 우리는 길들여짐에 대해 처음 배운다. 무엇에 길들여질 준비가 끝나면 그제야 비로소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간이 된다.
백지 상태인 인간에게 시간은 한 획씩 무엇을 긋고 지나간다. 투명한 물이 가득한 잔으로 세상은 어떤 것을 한 방울씩 던져 넣는다. 마치 무작위처럼 보이는 행위지만 오묘한 법칙이 있고, 그 법칙은 인간이 속한 환경의 조건, 그리고 마주하는 타인의 의지에 따라 일종의 패턴으로 만들어진다. 그것이 반복되다 보면 인간 안에서 패턴에 의한 틀이 생기는데, 이것이 삽입된 길들여짐이다.
길들여짐은 존재와 성향에 입각하여 조화를 향해 나아가고, 그 사이에 다양한 인간군상을 만들어낸다. 인간의 존재는 길들이려는 타와, 길들여지지 않으려는 자의 부딪힘이다. 존재의 성향은 길들여짐의 삽입과 방출의 다툼으로 만들어진다. 성향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길들여지지 않으려는 의지지만, 존재로 살아간다는 자체가 길들여지는 과정이라 무작정 탈피하려다가는 오히려 타성他性에 더 젖기도 한다. 각자의 기질에 따라 타성보다 탈피가 약한 인간은, 타성으로 불필요한 길들여짐까지 쌓는다. 반대로 타성보다 탈피가 강한 인간은 필요한 길들여짐까지 무조건 배제하려고 한다. 그럼 전자는 무기력해지고 후자는 계속 문제를 야기한다. 이것이 소인小人, ‘후천적後天的 반골反骨’이다.
그래서 길들여짐이 필요하다고 인정하고, 흐름에 따라 주어지는 길들여짐을 삽입하거나 방출하게 된다. 여기까지 할 수 있고 여기서 끝나면 그제야 성인成人, ‘후천적 정골正骨’이 된다. 편하지만 건조하고, 문제는 없지만 그것뿐이다.
여기서 나아가서 길들여짐을 겪을 수밖에 없다면 주어진 우연이 아닌 자신이 만든 법칙에 길들여지려고 하는 인간이 있다. 이미 삽입된 길들여짐을 방출하고, 찢어서 분석하고, 흐름에 따라 패턴을 바꾸고, 가치관에 의해 성형한 틀을 스스로에게 신념으로 삽입한다. 이 과정을 타인과 관계 맺는데 문제없을 만큼 거쳐내면 위인偉人, ‘후천적 합골合骨’이 된다. 자성資性을 기반으로 타성惰性을 밀어내고 길들여짐에 대해 타성他性과 자성自性을 모두 아울러 재정립한 인간이다.
이렇게 성향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성향은 매우 미묘한 균형 위에 놓여있어서 작은 비틀림으로도 쉽게 변형된다. 그래서 인간은 조율하기 쉽도록 구역을 나눠서 분류해놓는다. 성향 안에서 우선 조율할 수 없는 일부를 천성으로, 고칠 수 있는 나머지를 성격으로 분류한다. 성격 중에 자성資性과 타성他性에 의한 길들여짐은 성질이 되고, 자성自性과 타성楕性의 길들여짐은 습관으로 굳는다. 남들과 비슷한 부분을 일반성이라고, 다른 부분을 개별성이라 이름 짓는다. 확연히 다른 것은 개인성, 그중 효율적인 것을 특성이라 부른다. 바꿀 수 있고 그래도 되는 부분을 취향으로, 바꿀 수 있으나 그러고 싶지 않은 부분을 고집으로, 바꿀 수 없지만 그러고 싶은 부분을 아집으로 규정한다. (아집이 내부로 향하면 구생적 아집, 외부로 향하면 분별적 아집이 된다) 이 모든 것을 합쳐야 존재의 성향이 된다.
성향을 이루는 요소를 서로 비틀리지 않게 바로잡고,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상호보완하듯 일정한 흐름으로 나아간다면 조화가 된다. 반대로 요소가 누락되고, 서로 어긋나서 뒤틀려있으면 부조화가 된다. 즉, 조화는 성향 안에 천성, 성질, 습관, 일반성, 개별성, 개인성, 특성, 취향, 고집, (구생적) 아집 등이 전부 어우러져야 가능하다. 조화로운 성향을 가지기 매우 어려운 이유도, 그런 사람을 보기 힘든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극소수를 제외하면 처음부터 조화로운 사람도 없고, 완전히 조화로운 사람도 없다. 노력으로 점차 조화로운 성향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반골의 함정을 피하는 것이고, 다음은 길들여짐을 인정하여 정골을 거쳐, 스스로의 성향으로 합골이 되는 것이다. 조화는 섭리의 영역이지만, 조화롭기 위해 성향을 조율하는 일은 인의의 영역이다. 주어진 길들여짐으로 만든 정골의 성향보다 스스로를 길들임으로 만든 합골의 성향이 조율에 용이하다. 먼저 자신을 길들이며 성향을 만들고, 그것을 조율함으로서 조화에 다다르는 셈이다. 그것이 진정한 후천적 합골이며, 합골이 되고자 하는 이유도 조화로운 인간이 되기 위함이다.
여기까지는 범인凡人, 즉 평범한 사람의 경우이다.
간혹, 태생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조화로운 성향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이 있다. 그의 성향에는 이미 여러 길들여짐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있고, 모두 비슷한 물결과 흐름을 품고 있으며, 일관적인 맥락 하에 놀라운 상호보완을 하고 있다. 그런 만큼 남들과 비교할 수 없을 속도로 조화의 영역에 다다른다. 이것이 성인聖人, ‘선천적 정골先天的 正骨’이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그 모양과 속도가 비범한 만큼 자라날수록 범인과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인다. 다름은 조화와 인의의 영역에 모두 걸쳐있기에 받아들이는 이에 따라 전혀 다른 ‘호불호’로 드러난다. 좋거나 싫거나. 게다가 그 다름이 미약하지 않고 완연하다면 그의 가치 역시 극단적인 ‘가부’롤 가진다. 훌륭하거나 위험하거나. 그리고 그 가치에 대한 범인들의 평가 역시 ‘시비’로 갈라진다. 선하거나 악하거나. 그러면 마지막으로, 대처마저 평가를 따라간다. 하늘 위로 떠받들거나 혹은 발밑으로 처박거나.
그래서 환경(선천적 정골)과 조건(주변의 대처)을 모두 섭렵하고, 성향을 조화로운 쪽으로 이끌어 가면 그는 선인善人, ‘선천적 합골合骨’이 된다. 하지만 선천적 정골로 태어난 그를 주변이 배척하고, 자신마저 그 대처에 휩쓸리게 되면 그는 ‘선천적 반골反骨’, 악인惡人이 된다. 선천적 반골은 태어날 때부터 반골이라는 뜻이 아니다. 선천적으로는 정골로 태어났지만, 이후 반골이 되었다는 뜻이다. 개인적인 사상에 의해 반골로 태어나 반골로 자란, 태생적 반골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섭리에 의해 태어나면서부터 악행의 업을 가지고 태어나는 이는 있지만, 그 영혼의 여정을 전체적으로 보면 그 역시 악인은 아니라고 믿는다. 단지 이번 생에 악인이었던 것뿐이라고, 전생이나 후생에는 그 악행만큼의 선행을 세상과 사람들에게 베풀 것이라고 믿고 있다.
오늘 어느 악인이 죽었다. 사망 소식을 한동안 되뇌다가, 그를 비난 없이 고이 보내기로 했다. 생전 그의 과오를 용서해서가 아니다. 그의 사상에 찬동하거나 악행을 무마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선인이 아닌 악인에게도, 살아있을 때는 욕을 해도 죽으면 고인의 례로 보내고자 한다. 심지어 명복마저 빈다. 그 명복으로 다음 생에는 선천적 정골로 태어나 선천적 합골인 선인으로 자라서, 이미 쌓은 업만큼 새로운 덕을 쌓으라는 의미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