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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서 반가워요.

저는 빅... 나는 이한얼이야. [19매]

by 이한얼






1. 2023년이다. 새해가 되었다. 한 살을 더 먹었으니 서른아홉이 되었어야 하는데 서른일곱이 됐다. 올해부터 만 나이를 쓴다고 한다. 만 나이로는 서른일곱, 해 나이로는 서른여덟, 태어난 순간 한 살인 한국 나이로는 서른아홉. 서른일곱을 방금 끝냈는데 서른일곱이 아직 열 달이나 남았다니 이득 본 기분이다. 나이가 줄어드는 일을 이득이라 생각한다면 나이를 꽤나 먹었다는 뜻이다.


2. 예전부터 ‘2023’이라는 숫자가 좋았다. 왠지 좋은 일이 많이 생기는 한 해일 거라는 예상이 들었다. 반면 2025년은 좀 걱정됐다. 2003년, 2014년, 그리고 2025년, 이렇게 11년 주기로 커다란 힘듦이 오지 않을까 하고. 아마 이제 내 인생에 2003년과 2014년만큼 괴롭고 숨 막히는 날들이 다시 오지는 않을 듯하지만 그렇다면 그게 파도의 높이가 낮아져서가 아니라 내가 그만큼 해닳고 갈려서 그렇지 않을까. 2003년과 2014년에 온 고난도 외부에서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리 큰일이었나 물으면 그렇지는 않았을 테니까. 단지 내가 예민한 사람이라 만물을 너무 촘촘하고 세세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라서, 게다가 생각을 멈추는 방법을 몰라서 뇌를 쉬게 두지 못하는 성격이라서 그렇게 밭은 숨을 토하며 개똥밭을 데굴데굴 구른 것이니.


3. 그리 해지고 닳았다고 앞으로의 인생이 그저 무미건조하기만은 않겠지. 아마 무난한 사건사고와 적당한 고난이 계속 밀어 닥칠 것이다. 그에 나는 여전히 사태에 무방비로 치일 테고, 나를 휩쓸고 지나간 모든 것을 하나하나 세세하게 꼬집으며 털갈이 하겠지. 그런 인간으로 태어난 지는 알 수 없어도 어느덧 그리 자라나 굳어버렸으니까. 그래도 지난 두 번의 11년을 헤치고 견딘 만큼 3번째 시대에는 예전보다 더 자라있겠지. 아니면 매우 곤란하니.


4. 예전에 막연히 이때 즈음 결혼을 할 것 같다, 왠지 그런 느낌이 든다, 하고 외부에 공표한 나이가 서른일곱이었다. 올 초 서른여덟이 되면서 나는 그들에게 거짓말쟁이가 되었지만 굳이 우기자면 아직 10개월쯤이 남았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얼마 남지 않은 기한이 문제가 아니라 다른 이유로 가능성이 낮아 보이지만 또 모르지. 사람 일이든 세상 일이든. 나는 한 번도 스스로 결혼을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본 적은 없다. 물론 못할 수야 있겠지. 세상에는 아무리 애를 써도 혼자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 있으니. 다만 예전 <선 하나를 그리다>를 썼을 무렵부터, 어쩌면 그 이전에도 나는 400만년 넘게 이어진 그 오래되고 끈질겼던 인류의 대물림과, 인간의 의지와, 무엇보다 내 선조들의 노력을 무시하고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이다. 깨닫지 못했으면 모를까, 이미 깨달았다면 그것만큼은 내 손으로 찢을 수 없는 그림이다.


5. 새로운 해에는, 조금 더 가벼운 사람이 되고 싶다. 생각의 무게에서도, 정서적 분위기에서도, 물론 실제 몸무게에서도. 그리고 무엇보다 좋아하는 사람과 사물에 대한 집착에서도. 나는 나를 사랑하고 존중한다. 내 삶의 과정과 이룩한 세계도 자랑스럽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이가 내 곁에 있어야만 반드시 행복하고 내 손이 닿아야만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나만의 교만임을 자주 되뇌어야 한다. 내 곁에 가까이 있는 것보다 내게 거리를 두는 것이 감정적, 정서적, 관계적으로 손해일 거라는 믿음이 헛된 자만임을 까먹으려고 할 때마다 계속 되새겨야 한다. 나는 물론 대단한 사람이지만, 모든 사람에게 대단할 수 없다. 무엇보다 모든 사람에게 대단해서도 안 되고. 자연스럽게 떠나려고 하는 것들을 순리대로 놓고, 보내고, 배웅하는 한 해가 되자. 그것으로 내가 가진 모든 집착과 불안을 일소할 수는 없지만 그런 까만 방에서 한 걸음 떨어져 있는 사람이 되기를. 올해는 좀 더, 가벼운 사람이기를.


6. 예전부터 알았지만 최근 더욱 명확하게 깨달은 점 하나는, 나는 창이 있는 곳에서, 정확히는 창밖을 내다볼 수 있는 자리에서 글을 써야 한다는 점이다. 내가 글을 쓰는 과정, 내 표현법에 따르면 ‘삶 속에 내가 가장 행복해하는 행위’를 단계별로 분류하면 1) 생각을 정리한다. 2) 글을 쓴다. 3) 글을 다 쓰고 창밖 어딘가를 멍하니 내다본다. 이렇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생각을 정리할 때는 사실 거의 스스로와 싸우는 듯한 분위기라서 기쁨 같은 감정이 있어도 끼어들 틈이 없다. 정작 글을 쓸 때는 무아지경 속이라 머리에서 손가락을 통해 쏟아지는 잉크를 종이 위에 주워 담기 바빠서 행복 같은 감정이 생겨도 느낄 새가 없다. 그럼 과정과 순간마다 피어난 기쁨과 행복은 생각을 하고 글을 쓰는 동안 가슴 중앙에 씨앗처럼 응축되기만 한다. 그러다 글을 마치고 문득 습관처럼 창밖을 내다본 그 순간, 그곳이 눈이 시리도록 퍼런 하늘이거나 혹은 빨려들듯이 깜깜한 밤하늘이거나, 그 어느 지점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노라면 지금까지 ‘생각 정돈’와 ‘글 쓰기’라는 단계에서 99%까지만 정리된 ‘무엇’이 이윽고 밝은 빛과 따듯한 열을 내며 비로소 100%로 실체를 드러나며 완성된다. 씨앗에서 꽃이 피어나듯, 한 과정의 완성이다. 생각의 완성이 아니다. 생각에는 완성이 없으니까. 마치 편지 마지막에 이름을 적듯이, 편지 봉투에 밀랍 도장을 찍듯이. 그럼 그때, 내내 응축되기만 했던 기쁨과 행복의 구슬이 가슴 중앙에서 온몸으로 지근지근 퍼져 나간다. 나는 살아있구나. 이게 살아가는 거구나. 행복하다. 뒷목 연수와 입천장 목젖 사이에서 찌르르한 감동이 터진다.

그래서 새삼 깨달았다. 나는 창가 바로 곁에서, 창밖을 내다볼 수 있는 곳에서 글을 써야 하는구나. 어쩌면 글뿐만 아니라 내 삶도, 그 삶을 사는 사람인 나도 그렇겠구나. 그 너머로 무한히 열린 듯하지만 일정 부분 닫혀있는 종이 위와, 코앞에서 닫힌 듯하지만 그 너머 한없이 열려있는 창밖을 번갈아 거닐어야 행복을 느낄 수 있겠구나.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체감할 수 있겠구나. 하루씩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루 더 살아가게 되겠구나. 언젠가 더 살고 싶어도 더 이상 그럴 수 없는 날이 올 때까지.

글쟁이는 이것이 문제다. ‘글쓰기를 좋아한다’로 가든한 여덟 글자를 온갖 표현과 감상을 동원해 가득하게 늘려놓으니.

그러고 보니 지금 내 집 작업실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가 없다. 그래서 이사 후 그 자리에서 글을 잘 안 썼나 보다. 글은 집 앞 2층 카페에 나와서 저 멀리까지 내다보이는 창가에 앉아 쓰고, 집 작업실에서는 글을 고치거나 읽기만 했던 것이 이런 이유였나 싶었다.


7. 큰 부귀영화나 높은 명예와 거대한 권력도 오히려 거추장스럽다. 가져보지도 않고 그런 말 한다고, 막상 손 안에 들어오면 다를 거라고, 꼭 못 가져본 애들이 그러더라고 하면 할 말은 없다. 그래, 그럼 모르니까 하는 헛소리라 치고, 나는 그런 것은 됐다. 지금껏 짧은 시절이나마 누려봤던 알량한 부귀영화도, 낮은 명예와 소꼬리만한 권력도 내게는 결국 부질없고 거추장스러웠다.

앞에 앉은 사람을 사랑하며, 옆에 앉은 사람을 아끼며, 건너 앉은 사람을 도우며, 나는 여기 이렇게 앉아서 생각하고, 고민하고, 다투며 글이나 쓰고 싶다. 걸으며, 달리며, 가끔 데굴데굴 구르며 ‘당시 너는 왜 그랬을까?’ ‘그때 나는 왜 그랬을까?’ ‘여기는 왜 이럴까?’ ‘이것은 왜 그럴까?’ 이런 거나 궁금해 하며 살고 싶다. 주변인과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커다란 영화나 권력이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으니까. 사람을 살리기 위한 돈과 사람이 살기 위한 돈, 그리고 내 마당 정도만 지킬 몽둥이 하나면 됐다.


8. 팔자 좋은 소리 하고 있네. 근데 팔자 좋은 소리 하고 싶네.


9. 반갑다. 나는 1985년, 푸른 소의 해에 태어났지만 2003년에 세상을 연 이한얼이야. 나는 다양한 나이를 가지고 있어서 누구와도 쉽게 친구가 될 수 있는 만큼, 처음 만난 너와도 분명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0. 올 한해도 친하게 지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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