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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하나를 더하다

[15매]

by 이한얼






이삿짐을 정리하다 눈에 띄는 보자기 꾸러미를 발견했다. 먼지 앉은 싸개는 엉성하지만 단단하게 묶여 있다. 이게 여기 있었구나. 저건 이상하게도 발견할 때마다 나를 뜨끔 놀라게 한다. 가슴을 다독이며 짧은 손톱으로 매듭을 풀자 종이 묵은내부터 밀려온다. 그리고 가지런히 꽂힌 열이 넘지 않은 책들. 포스트잇으로 표시해 놓은 장을 펼치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한자와 한글이 저것이었다. 44대손, 자, 이한얼.

족보를 보고 처음 놀랐던 것이 언제였던가. 어린 나이에 처음 보게 됐을 때는 막연히 신기했다. 내 부모님, 조부모님, 친척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이름이 처음 보는 책에 적혀 있었으니까. 익숙한 성과 낯선 이름들 사이에 있는 저 한 줄은 꽤나 생경하면서도 익숙했고 무엇보다 마음 밑바닥을 간질이는 기묘함이 있었다. 그러다 세월이 조금 흘러 두 번째로 봤을 때는 그저 재밌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친척의 이름을 찾아보거나 직계 조상의 계보를 따라가며 내가 보지 못한 분들은 어땠을까 상상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봤을 때는 조부모 집에서 우리 집으로 그 책들을 넘겨받을 때였다. 조부모 집에서 들 때는 가볍다 싶었는데 우리 집 책장 아래 내려놓을 때는 이상하리만치 무거웠다. 그것을 찬찬히 들여다본 것도 그때였다. 아는 이름은 그 장뿐, 한 장만 넘겨도 모르는 이름이 가득하고, 다시 넘겨도 그렇다. 마치 끝이 없을 것처럼 넘기는 장 족족에 온통 모르는 이름뿐이다. 그러다 문득 묘한 방향성을 발견했다. 원류를 따라 올라갈수록 가야 할 길은 단순해졌다. 마치 강의 시작이 작은 개울이듯, 잔가지의 시작이 하나의 뿌리이듯. 당연하게도 전체적으로 보면 우리는 모두 피라미드의 일부니까. 불현듯 손에 든 이것이 조금 무서워졌다. 어떤 기분이었냐면, 조금씩 흩날리는 나뭇잎을 맞으며 저 멀리서 다가오는 태풍을 기다리는 듯했다. 언젠가 당신도, 나도, 그리고 내 아이도, 지금껏 그랬듯 앞으로도 그렇게 우리는 얇은 가지 끝에 매달렸던 흔적만 남긴 채 모르는 이름이 되어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영영 사라지게 되나. 그렇다면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지. 나는 그저 수많은 이파리 중 하나인가. 부모에게 생명을 받아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에 어떤 의의가 있을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그 전과 그 후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데, 그냥 나 하나 잘 먹고 잘 살다 가면 되지 않나. 어차피 우리 모두 언젠가는 반드시 부스러질 가냘픈 이파리들인데. 피라미드의 조그마한 벽돌 하나일 뿐인데 과거에 미련을 두고 미래를 걱정해 무엇할까. 제행무상. 그리고 일체개고. 문득 싯다르타의 말씀이 떠올랐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렀다. 그것을 네 번째로 펼친 날은 상복도 벗지 못하고 홀린 듯 꾸러미 앞에 앉았던 그날이었다. 이제 이름 석 자와 기억으로만 남은 조부의 영정 앞에서 나는 그것을 꺼내 펼쳤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다른 어디도 아닌 조부의 성함 석 자만 들여다봤다. 그리고 증조부의 석 자도.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석 자도. 이상하다. 그곳에는 이제껏 알던 피라미드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역 피라미드뿐이다. 나를 낳아 준 이는 부모님이지만, 나는 두 분 손으로만 자라지 않았다. 부모님, 그리고 조부모님과 외조부모님, 그리고 다른 친척 어른들까지 태어나 자라나는 내게 시간을 들이고, 재물을 붓고, 정성과 관심을 쏟고, 애정과 사랑을 전했다. 아이 하나를 온전히 키우기 위해 여러 사람의 손길이 닿아 있었다. 아이의 모습은 곧 여러 의지의 집합체였다. 그 모습은 마치 뒤집힌 나무, 역 피라미드의 모습이다. 나도, 내 동생도, 내 부모님도, 부모님의 부모님도 모두 그랬다. 결국 내가 지금 들고 있는 이것은 단순히 피라미드가 아니었다. 피라미드이기 위해 그 모습이 된 것이 아닌, 무수히 많은 역 피라미드가 모이다 보니 결과적으로 피라미드의 모습을 한 것뿐이었다.

순간 눈물과 함께 탄식 섞인 웃음이 났다. 아이고, 고작 이파리 하나를 틔우기 위해 왜 그리 애쓰셨어요. 나는 나를 피라미드에 있으나 마나 한 작은 벽돌로 여겼는데, 이 좁은 별에 70억씩이나 있는 생명체 중 하나로 취급하며 살아왔는데 그런 애를 어찌 그리 애지중지 보살피셨나요. 어찌 끌어안고 입 맞추며 등을 다독이고 밥숟갈 위에 김치를 찢어주고, 어찌 편지를 쓰고 전화를 걸고 아픈 몸을 이끌고 내 방에 장판을 깔아주러 오셨나요. 나는 단지 당신들께서 몇십 년 동안 키운 아이일 뿐인데. 여기에 적힌 것만 하면 여든여덟 분께서 아이를 낳고 키우기를 포기하지 않은 결과물일 뿐인데. 더 나아가 400만 년 동안 잇고 또 잇고 계속 이어서 전달한 하나의 기적일 뿐인데. 그 누구도 포기하지 않고 아래로 미래로 계속 보냈기에 겨우 도달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대물림의 결과일 뿐인데, 어찌 그리.

그쯤 되니 내가 들고 있는 것은 더 이상 단순한 책이 아니게 됐다. 오래되어 케케묵은 종이 곰팡이 냄새의 모르는 이름들이 아니라 하나의 그림이 됐다. 그 그림은 아주 오래전, 누군가 일생 단 하나의 선을 긋고 다음 사람에게 넘긴 그림이다. 그럼 다음 사람도 한번, 그다음도 한번, 그렇게 400만 년 동안 모두 한 번만 붓을 그었고, 그동안 누구도 그 일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그렇게 수십만 개의 선이 담긴 그림이다. 그것이 결국 나에게까지 왔고, 내 손에는 단 한 번 그을 수 있는 붓이 있다. 이걸 앞에 두고 나는 붓을 내던질 수 있을까. 의미가 없다며, 살기 힘들다며, 내 한 몸 편히 지내자며 지금 이곳이 종착지가 아닐 이 그림을 과감하게 찢을 수 있을까. 아니, 절대 그럴 수 없다. 내가 이걸 깨닫기 전이라면 모를까, 내 부모와 조부모께서 붓 한 번을 긋기 위해 일평생 얼마만큼의 정념을 들이셨는지 보지 못했다면 모를까, 지금 나는 그럴 수 없다.

다만 나는 그림을 받고 붓을 키운 자는 붓을 쓸지 말지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림을 받았기에 반드시 붓을 그어 다음에게 넘겨야 한다고 여기지 않는다. 붓을 꺾고 그림을 찢기 원한다면 누구의 비난도 받지 않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자리가 마지막이라는 자각과 그 책임을 감수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여기 우리가 이렇게 많은 것도, 세상이 힘든 여러 이유 중 하나도 타의와 상황에 의해 붓을 그은 결과라고 생각하니까. 단지 나는 그럴 수 없을 뿐, 내 선택만이 정답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부디 붓을 꺾기로 한 사람도, 이미 붓을 그은 사람도, 훗날 붓을 그을 사람도 모두 스스로의 선택을 긍정하며 살기를.




- 좋은 수필 2021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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