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매]
나는 상대와의 거리를 파악할 때 알고 지낸 햇수나 연락하는 횟수로 따지지 않는다. 오랜만에 연락했더라도 ‘서로 얼마나 반겨주느냐’로 따진다. 우리가 오랫동안 보지 못했고 한동안 연락조차 안 했지만 간만에 소식이 닿았을 때 여전히 반가워하며 서로를 맞이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가까운 사이다. 반면 우리가 오래 알고 지냈고 한때 매일 같이 얼굴을 봤더라도 어느 날 연락했을 때 별로 반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제 멀어진 사이가 된다.
나는 그런 성격이고, 나 역시 그렇게 상대를 대한다. 나는 언제나 모든 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을 할 수 있는 만큼만 상대에게 원하니까.
1년 전 어느 날, 나는 두 사람에게 오랜만에 연락을 했다. 20년 가까이 알고 지낸 가까운 지인이었고, 그동안 서로 많은 것을 나눈 사이였다. 문득 그들이 보고 싶어서 대뜸 전화를 했지만 상대의 반응은 마지막 연락 때와는 달랐다. 오랜만에 들은 내 목소리를 반기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웬일로 전화 했냐고, 어쩐 일이냐고, 특별한 용건이 있는 것이냐고 하는 듯했다. 당황한 나는 ‘그냥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연락했다’라며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혹시 상대에게 무슨 사정이나 급한 상황이 있었을 수도 있지. 일단은 깊은 짐작 없이 기다려봤다.
그리고 몇 달 후, 둘 중 한 사람에게 전화가 왔다. 받자마자 언제나 그랬듯 통통 튀는 어조로 내가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로부터 얼마 후에 만났다. 얼굴을 마주한 우리는 여전히 예전처럼 반가웠고, 어제도 본 것처럼 스스럼없이 즐거웠다. 상대는 지난 번 전화 받을 당시 일하던 중이었다고, 뒤늦게 생각해보니 그리 반응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요즘 일이 많아 정신이 없어서 연락도 늦었다고. 그에 나는 그럴 수도 있지, 오히려 당연한 것 아니냐, 라며 나는 웃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1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화가 없다.
서로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어도 관계가 아파 멀어지는 첫 번째 경우.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 하다 점점 자신의 안부만 궁금해 하느라 내가 밀어내는 두 번째 경우. 그리고 이번처럼 처음 서로가 생각하는 관계가 변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관계가 소멸하는 세 번째 경우. 끈끈했던 관계가 풀어지는 경우는 대게 이렇다. 특별할 것도 드물 것도 없이, 대부분 우리는 이렇게 누군가와 이별한다.
다만 이 흔한 일이 이번에 유난히 아쉬운 이유는, 이 상대에게 빚지고 갚지 못한 것이 많아서겠지. 가난하고 부족하게 살 때 상대에게 많이 의탁했었고, 심리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상대에게 위안을 많이 받았으니까. 때때로 미안하고 고맙다고, 꼭 갚겠다고 말할 때마다 상대는 자기 역시 나에게 그만큼을 받았으니 부채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했다. 허나 그게 어디 그런 말 한 마디에 사라질 리가 있을까. 시간이 따라 관계가 흩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어도 그것을 전부 갚지 못하고 연이 끝나는 듯해서 이것 하나는 아쉬웠다.
하기야 인연이라는 것이 원래 50대50으로 균형을 맞추며 끝나는 경우는 거의 없기는 하다. 다만 관계의 섭리가 아무리 그렇다 한들 그 말은 베푼 자의 입에서나 나와야 하지, 나처럼 빚진 자의 변명으로 나와서는 안 될 말이다.
2022. 08. 21.
이후 나는 몇 개월 간격으로 두 차례 카톡을 보냈다. 조만간 보자며 짧은 문답을 주고받다가, 어느 날부터 나도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았다.
2023. 09.
그러고부터 반년쯤 후, 어느 날 갑자기 카톡이 왔다. 생각나서 연락했다고, 날이 풀리면 보러 오겠다고 해서 알겠다고 답했다.
2024. 03.
그 후 지금까지 다시 연락이 없다. 어느 날부터 나도, 어디서든 잘 살고 있으면 됐지 싶다. 한때는 상대 반응에 서운함도 있었으나, 이제는 약간의 아쉬움만 있을 뿐 더는 서운하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 사이에 묶인 연은 지난 시간 동안 다 풀어냈을 수도 있으니. 그렇게 숙제를 끝낸 연에게 가장 좋은 것을 보내야 한다면, 또 보자는 손짓 대신 멀리서라도 상대의 평안과 안녕을 바라는 마음짓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2025. 03.
예전에 이 사람 집에 놀러가 뒤늦게 밀린 잠을 자고 있으면, 이 사람은 보통 내 입에 블록 아이스크림을 살며시 넣어주며 깨우고는 했다. 당시 나는 예민한 사람이었고, 자다가 큰 소리를 듣거나 물리적 충격을 받아서 깨면 몇 시간 동안 불안감에 휩싸였으니 나름의 배려였으리라. 일어나서 가장 먼저 묻는 질문은 허리가 아프지 않은지, 배는 고프지 않는지, 언제나 그렇게 나를 걱정하는 말부터였다. 지난 20년 동안 서로 많이 다투기도 했으나, 내게는 언제나 고마운 은인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돌려주지 못함이 더 미안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