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버에 하나뿐인 전설 등급 아이템 [11매]
여보세요? 그래 오랜만이네. 뭐 사는 거 다 비슷비슷하지. 그냥 일하고 그러면서 지내고 있어. 누구? 담당? 사실 좀 별로야. 아니, 담당 안 바뀌었어. 응. 20년 전에 맡았던 그 인간. 아직 그대로야. 못 친해진 정도가 아니라 날 싫어해. 마라탕도 안 먹을 만큼.
아니 들어봐. 이 사람 좀 이상해. 이쯤 되면 꺾일 만한데 왜인지 안 꺾어. 심지어 요즘 점점 건강해지고 있어. 그동안 충분히 몰아붙였다 싶었는데 그때마다 뭔가 스스로 방식을 찾아내나 봐. 좀 이상한 인간이야. 이상한 점? 아니 그렇잖아. 한 번 생각해봐. 우울하고 괴로우면 보통 무기력해지잖아. 슬프면 회피하고 싶고, 그러면 의욕도 떨어지고, 매사 귀찮아하고,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되고, 건강도 안 좋아지고, 그렇게 스스로를 가두면서 병을 키우잖아. 이 인간이 사람을 자주 여럿 만나는 편도 아니고, 밖을 오래 돌아다니는 성격도 아니고, 출근처럼 외부 강제력이 개입되지도 않고, 부양할 가족이 있어서 의무감이나 책임감에 떠밀리는 것도 아니야. 그렇다고 매일 아무 일 없이 무사태평만 하지도 않고, 반대로 계속 자극적인 사건이나 도파민내 달달하게 풍기는 경험이 생기지도 않아. 이 인간이 그런 것을 찾아다니지도 않고. 그럼 아무리 찾아봐도 혼자 지내면서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공격적으로 지낼 원인이 없거든? 건강하고 또렷하게 하루를 보낼 근거도 없고. 그럼 하루씩 더 우울하고 괴로워야져 하는데, 아니 그러긴 해. 우울하고 괴로워는 하는데 도대체 왜! 무기력해지지 않는지 알 수가 없네. 생각이 부정적으로 변하지도 않고, 나태해지지도 않고, 게을러지지도 않아. 아니면 남 탓을 하거나 세상 탓을 하거나 누굴 탓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스스로를 탓하면서 자괴감과 자기비하에 빠져있지도 않아. 아니 세상에, 요즘에는 오히려 루틴을 더 늘려가고 있더라. 갑자기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에 푹 자고, 뭐가 신나는지 혼자 계속 중얼중얼 거리면서 사전 같은 걸 읽고, 게다가 평생 변비를 달고 살았던 인간이 얼마 전부터 똥도 매일 싼다니까. 반쯤 정신 나간 사람처럼 글을 매일 쓰고, 써놓은 글 정리도 하고, 틈틈이 새로운 공부도 해. 밥도 잘 챙겨먹고 설거지도 바로 해. 샤워도 매일 하고 왜인지 로션도 잘 바르고 가끔 마스크팩도 하더라. 옷도 거의 매일 빨고, 최근에는 눈썹까지 정리하더라. 저 인간이 지금까지 눈썹 칼 쓴 경우는 여름에 모기 앉은 느낌이랑 헷갈린다고 다리털 밀 때밖에 없었어. 올해부터는 썬크림도 바르겠다며 어디서 하나 얻어 왔어. 저러는 거 나 처음 봤다. 그나마 운동이라도 안 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이상한 인간이야. 제일 이상한 점? 밖을 나가거나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많은 시간이 필요한 일을 안 할수록 어째 혼자 더 바빠지는 게 가장 이상해. 그러다 잘 때쯤 보면 뭔가 분한가봐. 내가 보기에 하루 종일 뭔가 충분히 한 것 같은데, 지는 맘껏 하기 전에 졸음이 밀려오는 게 억울한가 보지. 아무튼 미친 인간이야. 그러더니 어쩔 수 없다며 킬킬 웃더니 금세 곯아떨어져. 한 48시간쯤 못 잔 것처럼 열심히 자. 어떤 의미로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분명 어디서 에너지를 끌어오는 것 같은데 그 출처를 모르겠다. 분명한 건 그냥 버티는 모습은 아니야. 어쩔 수 없이 견디거나, 방법을 몰라서 제자리를 유지만 하는 거면 7년째 혼자 살면서 절대 저럴 수가 없어. 누가 시킨 거도 아니고, 제 발로 계속 걸어가는데 벌써 20년을 봤어도 모르겠다. 뭐가 저 사람을 앞으로 이끄는 건지. 어딜 향해 가는 건지. 목적지가 있기는 한가 싶다. 어제와 같은 자리에 서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앞으로 가는 것 자체가 목적인 건지.
아무튼 요즘 그래. 대충 이렇게 지내고 있어. 나도 어느 순간부터는 좀 놔버린 점도 있어서, 그냥 언제까지 저러나 어디까지 가려나 지켜보는 중이야. 담당? 바꿀 수 있으면 슬슬 바꾸고 싶지. 아니 보람이 없잖아. 내 딴에는 열심히 하고 있는데 쟤 눈은 왜 퀭해지지 않고 점점 또렷해지냐고! 아 말하다 보니 빡치네. 어? 야 일단 끊어봐. 저 인간 또 뭐 하려고 그런다. 아니, 싯다르타에게 도대체 뭘 배웠다고 믿어서 저러는 거야. 만나본 건 나지, 지는 만난 적도 없으면서. 어이 거기 아저씨! 방금 든 그거 내려놔. 일단 내려놓고 우리 대화부터 하자. 갑자기 뭔 전설 등급 아이템이야? 그거 네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거잖아. 물론 그때보다 좀… 많이 밝아지긴 했네. 아무튼 일단 내려놔봐. 너 이미 다른 등불 쓰던 거 있잖아! 두 개나 뭐 하려고!
2025. 03.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