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공기)+(따듯한 햇살) [15매]
나는 이런 날씨를 좋아한다. 공기는 찬데 햇살은 따듯한 딱 오늘 같은 날씨. 그래서 10월과 3월을 좋아한다. 한 달 내내 거의 이런 날씨니까. 그중에 10월을 더 좋아한다. 미세먼지가 적기 때문이다. 이런 날씨는 밖을 돌아다니기 좋다. 햇살이 따듯해서 어디를 가도 춥지 않고, 공기가 차가워서 여간 돌아다녀도 땀이 나지 않는다. 3월에서 5월까지, 9월에서 11월까지 딱 그렇다. 그중 10월을 더 좋아하는 다른 이유도 있다. 내 생일이 있어서 유독 기분이 좋다. 음식이 더 맛있는 시기기도 하고, 꽃과 단풍을 모두 볼 수 있는 계절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지긋지긋한 여름이 드디어 끝났다는 실감도 있어서 좋다.
그래서 내게 1년은 6개월씩, 좋아하는 달과 덜 좋아하는 달로 나뉜다. 3, 4, 5, 9, 10, 11월처럼 여름과 겨울을 피한 달들을 좋아하고, 1, 2, 6, 7, 8, 12월처럼 여름과 겨울에 접어든 달들을 덜 좋아한다. 그렇게 치면, 원래 10월과 4월을 좋아해야 한다. 각자 봄과 가을의 한 가운데니까. 근데 4월보다 3월이 더 좋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도래한 느낌이라서 그런 듯하다. 3월이 되어야 비로소 한 해가 시작된 느낌이라서 그런 듯도 하다. 물론 4월도 좋아한다. 정확히는 3월부터 4월까지 좋아한다고 해도 어폐가 없다. 그렇게 치면 가을에도 10월보다 9월을 더 좋아해야 한다. 물론 9월도 좋아하지만 그래도 10월이 더 좋다. 아까 말한 이유도 있고, 요즘은 여름이 길어져 9월임에도 여전히 덥다고 느끼는 경우가 늘어난 것도 있다.
11월은 곧 닥칠 겨울을 대비하는 곰처럼 음식도 많이 먹는다. 그리고 겨우내 마치 곰이 겨울잠을 자듯 나 역시 칩거하는 편이다. 한 해 동안 쌓이다가 결국 단단히 굳어버린 감정의 찌꺼가를 천천히 녹이는 시간이기도 하고, 그러다 우울증이 와서 괴로워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유난히 주변인과 트러블도 잦아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트러블이 잦아져서 더 혼자 지내는 건지, 내면의 괴로움이 많아지니 그만큼 트러블도 생기는 건지, 선후와 인과를 따질 필요는 없다. 결국 돌고 돌아 무엇이 먼저인지 따질 수 없을 만큼 뒤섞여 있으니까. 다만 나는 최소한 겨울에는 누군가에게 크게 상처 받지 않으려고 하고, 누군가에게 지울 수 없는 말을 내뱉지 않으려고 한다. 다른 계절은 몰라도 최소한 날이 매섭고 모든 사물과 감정이 건조할 때는 행동도 말도 평소보다 조심하려고 애쓴다. 이때 의도와 어긋나 크게 다툰 이와는 보통 결말이 좋지 않았다. 속눈썹에 서리가 내린 듯 강파르고 강퍅해진 나는 타인의 말과 눈빛에 다른 때보다 쉽게 살이 터진다. 흐르는 피를 인지하면 마치 얇은 얼음 같은, 어느 때보다 훨씬 날카로운 말을 되던지고. 그것을 알기에 겨울에는 더 동굴 속으로 숨는 경향도 있다.
그래도 가장 덜 좋아하는 한 달을 꼽으라 하면 12월이 아닌 8월이다. 12월은 단지 우울하고 괴로울 뿐이다. 타인을 만나면 더 조심하느라 훨씬 피곤할 뿐이다. 유독 자주 눈물이 나고 마음이 아플 뿐이다. 여느 때라면 깊게 생각하지 않고 흘려보낼만한 것을 유난히 오래 붙잡고 여러 번 곱씹을 뿐이다. 뭐든 좋다고 할 수 없지만, 뭐 하나 이유가 없지는 않다. 그 이유가 이해되지 않거나 납득되지 않거나 감수할 수 없지도 않다. 내가 1년 중 가장 괴팍하고 날서있어서 눈빛이 형형하다 못해 흉흉할 때지만, 그 행위를 뜯어보면 뭐 하나 말이 안 되는 근거는 없다.
근데 8월은 다르다. 그냥 짜증이 난다. 근데 그러는 자신이 잘 이해되지도 않고, 납득되지도 않다. 그 근거가 너무 얄팍하고 허술해서 하찮다 못해 웃음이 난다. 8월의 나는 꽤 유쾌하다. 공격적이지도 않다. 더위 먹은 개처럼 혀를 내밀고 헥헥 대고 있지만, 누구에게 짜증을 내지도 않고 꼬장을 부리지도 않는다. 근데 내면은 다르다. 이 더위 때문에 오만 것이 짜증이 나고, 이 날벌레 때문에 모든 것에 꼬장을 부리고 싶고, 금세 쉬어 냄새를 풍기는 음식물 때문에 고함을 왁왁 지르고 싶다. 단지 거기로부터 파생된 어떤 행동도 스스로를 이해시키거나 납득시키지 못하기에 참을 뿐이다. 한여름의 나는 겉으로는 방긋방긋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걸걸한 육두문자를 기관총처럼 내뱉고 있는 사람이다. 한겨울의 나는 가까이 손을 뻗으면 손가락 끝이 베일 듯 예민하고 어려운 사람이지만 속으로는 그저 울고 있을 뿐인 어느 위태로운 영혼일 뿐이다.
여름과 겨울은 계절 그 자체보다 내가 어떤 상태인지가 더 중요하다. 그 상태로 덜 싫고 더 싫은 계절로 나뉠 뿐이다. 겉으로 냉기를 뿜지만 모든 행동원리가 이해되는 그 겨울 아이를 나는 그리 싫어하지 않는다. 겉으로 겅충겅충 달리며 웃지만 그 속내를 납득할 수 없는 여름 아이가 나는 여전히 어렵다. 그래서 겨울보다 여름을 조금 더 싫어한다. 아마 주변인과 반대 감상일지도 모르겠다. 허나 나는 객아든 타자든 무엇인가를 받아드리기 위해서 이해와 납득이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속을 알 수 없고, 알아도 납득하기 어려운 웃는 얼굴보다 거슬거슬하고 날선 말투지만 그러는 이유가 명확하게 이해되는 무표정을 더 좋아한다. 내가 보는 나든, 아니면 나를 보는 남이든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나는 말을 들을 준비를 항상 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누구건, 대부분의 어느 때건, 이야기를 하면 나는 들을 것이다. 둘이 오래 대화를 주고받으면 서로 무슨 생각인지, 어떤 의도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대부분 이해하거나 납득할 수 있다. 아니면 이해는 못해도 납득은 할 수 있게 된다. 그도 아니면 이해도 납득도 어렵지만 용인은 하게 된다. 그마저 아니면 최소한, 이해도 납득도 용인도 안 될지언정 받아드릴 수는 있게 된다. 그조차 안 되면 그때부터는 아마 범죄의 영역이겠지. 그러니 나는 상대와 어느 선까지 대화할 것인지만 정하면 된다. 이해와 납득을 할 것인지, 납득만 할 것인지, 아니면 동의할 수 없어도 용인만 할 것인지, 그도 아니면 ‘그렇구나’ 하고 받아드리기만 할 것인지.
이것을 하기 좋은 때도 봄과 가을이다. 그래서 역시 3월과 10월이 좋다. 누군가와 멀어지기는 어려워도 가까워지는 좋은 시기. 문득 한동안 왕래가 없던 몇몇 사람이 보고 싶어지는 계절. 누군가 저 멀리서 개제한 차림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이면 흐뭇한 미소와 함께 그가 어서 내 앞에 도착하기를 기다리게 되는, 그런 공기와 햇살의 거냉한 조화가 가득한 오늘 같은 날씨.
2025. 03.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