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 트려면 아직 멀었는데, 당신 이야기나 좀 듣지 [23매]
확실히 예전에 쓰던 글과 요즘 쓰는 글은 다르다.
20대 때 쓰던 글은 결점과 모순투성이다. 당시 내게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았으니까. 열일곱에 첫 번째 개벽(세상이 뒤집힘)과 함께 첫 번째 시대가 시작되고 나서 스물다섯에 두 번째 개벽(하늘이 열림)이 올 때까지 나는 죽지 않기 위해 허덕이며 달리기만 했다. 그래서 당시 썼던 글은 결점도 많고 모순도 많다. 단지 앞과 뒤가 서로 다른 말을 하거나, 서로가 상대 논리를 부정하는 모순만이 아니었다. 그때 나는 시시때때로 이런 사람이었다가 곧 다른 사람이 되었고, 하나의 주제에 대해 오늘은 이렇게 생각했다가 내일은 저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급격한 환경 변화에 노출된 인간이 외부입력에 대응해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과도기 때 흔히 보이는 증상이다. 물론 항시 그렇지만은 않았다. 어느 때는 단순히 자신의 이기심이나 생각 부족에서 발생된 어긋남과 엇나감을 ‘나는 그때 그때 생각이 달라지는 중이니까’라고 포장하기도 했다. 이런 소우주적 모순이 장기적으로 괜찮은 행동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반대로 그래서 단 한 순간도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인가 하면 그것 역시 그렇지 않고. 세계관을 만들어가는 시기에는 그럴 수 있다. 그것을 나이 먹고도 여전히 하나뿐인 핑계로 삼는 일은 구차하겠지만 어렸을 때니 그러려니 했다.
각설하고, 그래서 당시 쓴 글을 보면 까끌까끌하지만 왜인지 따듯하다. 접시 안에 깔끔하게 담아놓은 예쁜 음식이 아니라 이곳저곳 조미료와 핏자국, 양념이 튀어있고 재료가 난도질에 가깝게 조리된 고기 요리 같다. 먹기 불편하고 맛도 향도 강하다. 조리가 덜 됐는지 실력 있는 수의사를 데려오면 다시 살려낼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어째선지 요리사가 어떤 마음으로 음식을 만들었는지는 쉽사리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솔직하다 못해 노골적이었으니까. 칼을 대고 썰면 고기 내부에서 피와 육즙이 질펀히 흐르지만 정말 잘 만들고 싶었구나, 내게 맛있는 요리를 대접하고 싶었구나, 좋은 요리사가 되고 싶구나, 라는 것을 그릇 밖까지 튀어나간 후춧가루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스물다섯 두 번째 개벽 이후 스물여덟에 세 번째 개벽(새로운 시대가 열림) 이전까지 몇 년 동안은 그 전에 비하면 안정적인 글을 썼다. 지금와서 보면 꽤나 어설프지만 나는 열일곱부터 쌓아온 재료로 스물다섯에 온전히 홀로 지은, 완성된 세계관을 가지게 됐으니까. 한 세계의 주인이었고, 한 나라의 왕이었다. 그래서 그때 쓴 글을 보면 온통 추상과 개념, 사유와 사상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마치 새로 생긴 나라의 헌법과 율법, 기조와 기치, 강령과 관습을 만들 듯 온통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무엇이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는지, 무엇에 환호하고 감동하는지, 무엇을 혐오하고 경멸하는지 등등. 이전만큼 모순적인가 하면 그렇지 않았고, 그렇다고 꽤 완숙했는가 하면 또 그렇지 않았다. 기반을 닦아가는 전형적인 모습. 그래서 이때의 글을 보면 딱딱하다. 치아를 걱정해야 할 만큼 단단하고, 왠지 어렵고, 읽다가 방지턱에 어러 번 걸린다. 독자로 하여금 반론할 여지가 없는 글. ‘이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는구나’라고 받아드릴 수밖에 없는 글. 설명이라기보다 표명. 드러나는 특징이라기보다 나타내고자 하는 표징. 설득이라기보다 주장. 그 모든 의지와 의도를 공격적인 단어를 가용하여 페이지 안에 꽉꽉 쑤셔 넣었다. 마치 법전처럼. 또는 사전처럼. 읽기 어렵다. 재미없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가르치려 드는 것 같다. 대부분 이때 들은 말이었다.
그리고 스물여덟에 새 번째 개벽이 있었다. 두 번째 시대가 열리며 그간 쌓아올린 모든 것이 무너지고 나는 열일곱 때처럼 다시 허허벌판이 섰다. 모르고 한 번은 할 만한 일이지만 알고 두 번은 못할 짓이 세계관을 다시 쌓는 일인데. 허나 삶이라는 것이 어디 하고 말고를 스스로 정할 수 있나. 인생이라는 것이 하고 싶은지와 싫은지가 상관이 있나. 하든가 말든가 뿐이지. 그에 한 번 해본 것이 자랑은 아니지만 어디 가는 것도 아니라서 첫 번째보다는 수월했다. 최소한 내가 어디서 자주 틀리고 넘어지는지는 스스로 알고 있으니까. 무엇이 부족했고 어떤 실수가 겹쳐서 이 지경이 됐는지 어렴풋이라도 느끼고 있으니까. 예전에 정신없이 해봤던 것을 설계도 삼아, 그 사이 사이 그때는 몰랐거나 그동안 생각이 달라진 점을 고쳐가며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 무렵 글은 재밌었다. 내가 무엇을 쓰고 싶은지 알 수 있어서 재밌었고, 무엇보다 내가 무엇을 쓰는 중인지 알 수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웠다. 이전의 나는 글을 온전히 쓰지 못했으니까. 어쩌면 글이 나를 쓴 일이 더 많았을 지도 모른다. 키보드에 두 손을 올려두고 깜빡 정신 차려보니 종이 위에 글이 있었거나, 다른 이야기를 쓸 생각으로 시작했으나 정작 마음속에서 나오는 글은 전혀 다른 내용이기도 했다. 그래서 글을 쓰는 일을 표현할 때 ‘쓴다’보다 ‘종이의 껍질을 벗기다’를 더 자주 사용하기도 했다. 글은 내가 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종이 안에 들어있는 무엇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을 가리고 있는 껍질을 벗기는 것뿐이라고. 그런 생각이 들만큼 이전 나는 글에 휘둘렸었다. 물론 지금이라고 그런 부분이 전혀 없지는 않다. 다만 예전보다 많이 줄었고, 무엇보다 스스로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즐거웠다. 이제는 내가 글을 쓰고 있구나. 종이의 껍질을 벗길 때도 더러 있지만, 이제 원한다면 종이에 글자를 새길 수 있는 글쟁이가 되었구나. 그간 내가 써왔던 한 문장 한 문장은 결국 나를 배신하지 않아서 어느덧 무수히 포개진 활자 위에 걸터앉은 모습이 되었다.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 보며 웃고 때로는 울지만 그 얼굴에 제법 여유가 보였다.
그리고 다시 10년이 지났다. 그간 나는 무너져내린 나라를 재건하고 세계관을 다시 완성했다. 스물여덟에서 서른아홉이 되는 동안 하루도 빼먹지 않고 열심히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길을 꾸준히 걸어왔다. 도중에 소소히 인정 받았던 일도 있었고, 쓴 글을 혼자만 보는 일과 만난 적 없는 이에게도 보이는 일을 함께 하게 됐다. 세계관을 가진 튼튼한 인간이, 오래 써오고, 그것이 혼자만의 만족이 아니다, 이 셋을 한 단어로 합치면 '그럴 듯하다'라는 의미였다. 그래서 요즘 쓰는 글을 보면, 조금 뭐랄까, 한편으로는 재미가 없다. 생각이 사유가 되는 과정, 그 사이 근거가 되는 관념, 적절한 단어의 선별, 개념을 보조하는 추상의 흐름 등등 너무 많은 부분이 안정적이다. 첫 번째 시대처럼 덜 익힌 피가 낭자하지도 않고, 두 번째 시대 초반처럼 숨이 막히게 스파이크를 쳐대는 라켓 같지도 않다. 적당히 익었으면서 적당히 부드럽고 적당한 간에 적당히 플레이팅을 한 단정한 음식 같다. 물론 ‘저게 어딜 봐서 단정한 음식이냐!’라고 격한 손가락질을 한다면 입이 두 개쯤 더 있어도 딱히 할 말은 없다. ‘하늘이 내려준 글에 대한 재능이 없는 것치고는 나름 괜찮지 않냐…’ 하고 작게 중얼거리기만 하겠지.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제 서른아홉이 된 나는 절대 완성된 인간도 아니고, 여러모로 뛰어난 인간도 아직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완숙한 인간이 되었다는 점이다.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어떤 시비와 가부와 호불호를 가지고 있는지, 정체성이 무엇이고 꿈은 무엇인지, 어떤 인생을 살고 싶고 어떻게 살아갈 건지 얼추 깨달았다는 점이다. 그 후 쓰는 글은 꽤나 다정하고 단정하다. 문단에 발표하는 글에는 조금 내숭도 떨지만 자유롭게 쓴 글은 예전과 다른 의미로 솔직하다. 예전에 쓴 글이 ‘우와앙 다 꺼져 ㅠㅠ’라는 솔직함이었다면 요즘 쓰는 글은 ‘난 이런 인간인데 어쩔?’이라는 솔직함에 더 가깝다. 이 일에 대해 나는 이렇게 생각해. 이번에 어떤 일이 있었는데 이런 감상이 들더라. 이 문제에 대해 나는 이런 입장이야. 예전에는 잘 모르겠어서, 한편으로는 불특정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다른 편으로는 스스로의 모자람을 감추고 싶어서, 마지막으로는 왠지 주장에 자신이 없어서 솔직하지 못했던 부분이 많았다. 다만 이제는 그때와 달리 솔직하지 않으려는 상황은 하나뿐이다. 괜히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내가 정치와 시사에 대한 글도 함께 쓰지만 그런 것은 굳이 올리지 않는 것처럼. 써놓은 중수필이나 몇몇 소설은 그 내용과 사상이 부끄럽지 않지만 의도를 설명하기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 발표할 생각이 없는 것처럼. 그것을 제외하면 이제야 새삼 솔직하지 못할 이유가 뭐 있을까 싶다. 나는 완성되지 않았고 분명 죽는 날까지 완성될 수 없겠지만 완성되기 위해 나아갈 것이고, 약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지만 지금껏 고쳐왔던 것만큼 앞으로도 계속 고쳐나갈 것이며, 우울증도 괴팍함도 예민함도 가지고 있지만 점점 지금보다 더 잘 다루게 될 것이며, 20년을 써도 여전히 더럽게 못 쓰는 글이라도 30년이 되고 40년이 되면 지금보다 분명 나아질 것이다. 새삼 부끄러워 감출 거리도 없고, 쑥스러워서 감출 이유는 더더욱 없다.
지난 몇 번의 개벽을 거쳐 오며 내가 글에 대해 얻은 가장 큰 자산은 어휘도 글 기술도 아닌 이 ‘솔직함’이다. 솔직해도 되는 상황에서 솔직하기. 솔직하지 않을 이유가 없으면 굳이 감추지 않기. 이렇게 머리로는 예전부터 받아드렸지만 몸으로는 체화하지 못했던 것을 얻기 위해 그간 그리 고생을 해왔나 싶기도 하다. 이 솔직함이란, 단지 마음가짐의 문제만이 아니라 실제 어찌 살아왔는지 그 역사도 함께 필요한 문제니까.
2025. 03.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