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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대로 처먹어

[10매]

by 이한얼






1992년인가 3년인가, 미국 출장을 다녀오신 아버지께 한글 자막도 없는 <알라딘>과 <미녀와 야수> 비디오테이프를 선물로 받았을 때부터, <미녀와 야수>는 당시 왠지 어둡고 무서운 분위기 탓에 두 번 정도만 보고 어딘가 던져 놨지만 <알라딘>은 TV 앞에 붙어 앉아 테이프가 완전 늘어날 때까지 보고 또 돌려보다가 첫 대사부터 마지막 대사까지 온통 외워버렸을 때부터, 조금 더 지나서는 1994년에 잠실 롯데시네마에서 <라이언킹>의 오프닝을 봤을 때부터, 웅장한 노래가 나오다가 쾅 소리와 함께 검은 화면에 붉은 글씨가 찍히는 그 장면을 본 순간부터, 나는 심각한 디즈니덕후였다.


그리고 2008년 5월에 영국 피카델리 거리에서 에드워드 노튼의 <헐크> 포스터를 봤을 때부터, 더 나아가 같은 해 한국에서 <아이언맨>을 눈물콧물을 흘리며 봤을 때부터, 나는 과몰입할 정도로 마블빠가 됐다.


<알라딘>은 기억 상 100번쯤, <Wall-E>는 80번쯤 봤다. 아직도 <라이언킹>과 세 편의 <토이스토리> 시리즈와 <인사이드 아웃> 중에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고르라고 하면 고민 끝에 못 고른다. 노래는 이게 좋다. 오프닝은 이게 최고고, 시리즈로는 이게 최고인데. 빌런과 주인공 커플의 완성도는 이게 최고지. 여주는 이 사람이 가장 좋고, 남주는 저 사람이 가장 좋다. 몰입은 이 작품이 최고지만 보면서 가장 많이 운 것은 저 작품인데. 스토리는 이 작품이 가장 좋지만 마무리는 저 작품이 최고라서.


마블은 디즈니처럼 몇 십 단위로 다시 보지는 않았지만 드라마, 유튜브, 나무위키, 찌라시, 카더라 등등 마치 공부하듯이 MCU에 대한 모든 것을 핥았다.


근데 둘이 만나게 되니 둘 다 팬이 아니게 됐다. 둘이 만났기 때문은 아니다. 만약 만나지 않았으면 아마 마블은 여전히 빠였겠지. 그러니 이것은 마블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 자식의 잘못이 부모 책임이듯이. 그렇다고 내가 디즈니 특유의 여성 서사를 좋아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진취적이고 능동적인 여주인공을 좋아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랬다면 <라푼젤>, <뮬란>, <겨울왕국>, <주토피아> 등을 좋아하지 않았겠지. 특히 <겨울왕국>은 여덟 번쯤 본 후에 여덟 장(여덟 쪽 아님)짜리 눈물 콧물 범벅의 감상문을 적지도 않았을 것이다. 엘사가 장갑을 벗어던지고 얼음계단을 달려 올라갈 때, 3차 관람 중인 상영관 맨 뒷자리에서 입을 틀어막고 오열을 하지도 않았겠지. 뮬란이 얼굴의 반쪽만 화장을 지울 때도, 라푼젤이 거울 조각으로 꿈결 같던 자신의 머리칼을 자를 때도, 겁먹을 때마다 코를 움찔거리던 주디가 닉이 있는 굴다리를 찾아가 트라우마를 이겨내는 자기 고백을 할 때도 따라 울지 않았겠지.


이쯤에서 넷플릭스와 디즈니의 가장 큰 차이점이 드러난다.


넷플릭스는 ‘자 여러분! 이것이 다양성입니다! 여러분께도 소개하고 싶으니 와서 한 번 보세요! 요즘 우리는 이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아주 푹 빠져있어요! 그리고 모두가 우리처럼 이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아, 지금은 관심이 많지 않으시다고요?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고요? 하핫!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요. 그래도 다시 찾아주시길 기다리겠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여기 있어요!’라며 너스레를 떠는 느낌이다.


반면 디즈니는 ‘야 이게 다양성이니까 닥치고 봐. 안 봐? 미친 너 인성에 문제 있냐? 차별주의자야? 파시즘의 싹수가 검붉게 보이네. 더 썩기 전에 시상하부와 해마 사이에 <우리의 올바름>을 쑤셔 넣어줘야겠어. 선택하긴 뭘 선택해, 이게 현 시대의 흐름이고 내가 콘텐츠 공룡인데. 입 다물고 입 벌려라, 버티면 이빨 나간다. 뭐? 편향성? …그건 몰라. 우린 비영리 사회단체가 아니라 영리를 추구하는 사기업이란 말이야.’라고 소리치는 느낌이다.


어쩔 때는, 정치적 올바름을 반대하는 세력이 벌이는 고도의 이간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2022.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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