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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내용없음

by 이한얼






오늘 글은 쓰고 싶지 않다. 근데 글이 아닌 뭔가는 쓰고 싶다. 그럴 때 의미 없이, 내용 없이, 그저 손가락으로 장난을 치듯 타자를 타각거리며 주절거리는 무엇. 카페에 앉아서 빈 의자를 하나씩 둘러보며. 때때로 우중충한 하늘을 멀거니 들여다보며. 아무렇게나 적은 잡설.




카페는 그날그날 손님층이 다르다. 매일 오는 단골손님도 당연히 있지만 시간에 따라, 계절에 따라, 특정 월에 따라 주 손님층이 달라지는 편이다. 지난 3년 동안 매일 오다보니 분석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알게 됐다. 날이 풀리기 전인 1월과 2월에는 남자 손님이 많다. 각자 책이나 노트북을 들고 와 공부를 하거나 시험 준비를 하는 듯하다. 아마 3월과 4월에 있을 시험을 대비하는 거겠지. 그러다 4월이 되고 5월로 접어들면 남자 손님은 점차 줄어들고 그 자리를 여자 손님이 채운다. 고등학생이나 대학생, 아니면 직장인. 각자 공부를 하거나 노트북으로 작업을 한다. 이 역시 옆 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으면 상대의 탁자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자연스레 알게 된다. 의외인 점은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들도 꽤 온다는 점이다. 보통 혼자 오지 않고 둘셋이 와서 수다를 떨거나 공부를 한다. 반면 남자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그 나이에는 남자 친구들끼리 모여 카페에 오는 문화는 드물겠지. 성인이 되어도 그리 늘지 않을 테고. 보통 남자는 혼자서 공부나 간단한 일처리를 위해 카페를 오는 경우는 많아도, 둘셋이 와서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성격은 드무니까. 그런 면에서 나나 내 주변인들이 소수였다. 그러는 우리도 내가 카페에 터를 잡고 하루 종일 머물렀으니 으레 내가 속한 카페로 모이게 된 것이지, 내가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면 일주일에 7일씩 카페에 죽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카페에 남자 손님은 여자 손님에 비해 적은 편이다. 드물지는 않다. 혼자 공부를 하러 오거나, 와서 일을 하거나, 아니면 할아버지 아저씨 또래 남성들이 와서 잠시 목을 축이고 수다를 떨거나, 아니면 여자친구와 함께 오거나, 또는 동성과 이성이 뒤섞인 친구들과 함께 오기도 한다. 남자가 적은 이유는 단순하다. 어리든 젊든 나이가 있든 여자 혼자 오거나, 여자끼리 둘셋 오는 경우는 많다. 그 반대가 많지 않아서다. 남자는 보통 여자와 함께 온다. 주요 시험이 모여 있는 시기가 아니라면. 성별이 아니라 직업군으로 손님층은 나뉜다. 보통은 어떤 일을 하는지 대부분 알 수 없지만 그중에 쉽게 눈에 띄는 몇 개 군은 있다. 학생과 보험설계사, 그리고 근처 직장이나 공장에서 나온 단체 같은 경우가 그렇다. 학생은 앳된 얼굴이나 교복만으로 이미 학생임을 알 수 있다. 주로 다중이용업소이자 공공장소인 카페에서 의자에 누워 있다면 대체로 미성년 학생일 경우가 많다. 이런 점은 내가 카페를 처음 다니던 2000년 초반보다 심해졌다. 공공장소에서 함부로 누우면 예의가 아니라는 점을 알려주지 않는 가정이 점점 많아지는 듯하다. 아니면 예전 나처럼 그런 교육을 받고도 눕던 철부지거나. 물론 간혹 20대나 30대로 보이는 성인도 카페 거상(벤치나 소파처럼 여러 명이 앉을 수 있는 긴 의자)에 누워있기도 한다. 오늘은 딸과 함께 온 50대로 보이는 성인도 의자에 누워있는 모습을 봤다. 어르신이 누워있는 것은 처음 봐서 많이 피곤하셨나 보다 싶었다. 재밌게도 의자에 눕는 사람이 남자인 경우는 못 봤다. 최소한 이 카페에서 누워있는 사람은 나이와 관계없이 전부 여자였다. 그리고 혼자 와서 눕는 일도 없다. 보통 맞은편에 남자 친구가 앉아 있거나, 동성이든 이성이든 친구와 함께 있을 때뿐이다. 아무래도 여럿이면 혼자라면 못 할 일도 하게 되는 용기가 생기다 보니 그런 듯하다. 두 번째 직업군인 보험설계사는 목소리가 커서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도 있지만, 보험설계사가 있는 자리에서만 느끼지는 독특한 분위기 덕도 있다. 어떤 느낌이냐면, 전혀 친하지 않은데 마치 꽤 친근한 것처럼 구는 듯한 태도와 분위기다. 상대도 그것이 불편하면서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나 역시 2년이 안 되는 시간 동안 보험설계사 일을 해봤으니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분위기다. 양쪽 모두 불편하지만 서로 원하는 바가 있으니 함께 어우러지는 관계에서 스며나오는 독특한 느낌. 친절하고 또박또박한 인사말을 들으면 왠지 보험설계사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내 일을 계속 하고 있다 보면 탁자 밖으로 툭툭 튀어나오는 특수한 단어로 인해 짐작이 맞음을 알게 된다. 그러다 보면 가끔은, 이제 그만 둔지 한참이나 지났지만 내가 일을 하던 당시와 현 시세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요즘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보험 가입을 하는지, 사세를 떠나 저 설계사가 얼마나 양심적으로 정직한 사람인지 등을 속으로 가늠해보기도 한다. 세 번째 직군은 아마 점심이나 저녁 회식 이후 단체로 들어오는 직장인 무리다. 정확히 어느 회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직급과 위계라는 것은 단지 사내에서만 통용되는 것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대화를 듣지 않고 겉으로만 봐도 누가 상급자인지, 누가 막내 쪽인지, 사무실에서도 누가 대화를 주도하는지, 누가 자질구레한 잔일을 주로 도맡아 하는지, 심지어 간혹은 누가 누구를 싫어하는지, 상사로 보이는 저 사람이 사내에서 부하 직원들에게 얼마나 인정과 지지를 받고 있는지, 대부분이 겉웃음만 지으며 분위기에 맞춰 교식하는 중인데 왜 그런지 충분히 알 것 같을 때도 있다. (이렇게 의식적으로건 은연중에건 사람과 관계에 대해 살피고 파악하려는 버릇은 10대 후반에 글을 쓰면서 시작됐다. 스물둘부터 행사 일을 하러 전국을 돌며 10년쯤 다양한 사람을 구경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몸에 익었고. 그리고 20년쯤 글을 쓰다 보니 더 강화됐다.) 근처에 공장이 많아서 국적도 다양한 편이다. 한국인만 있거나, 한국인과 외국인이 섞여 있거나, 혹은 외국인만 오기도 한다. 직장과 관계 없이 외국인 단독 손님도 꽤 되는 편이다. 지역도 다양하다. 아무래도 동남아시아나 서아시아로 추정되는 외국인이 많은 편이지만, 중동이나 서인도, 남미나 동유럽으로도 보이는 외국인도 있다. 혼자서든 여럿이서든 카페에 오는 외국인은 대체로 조용하고 정중하다. 난동을 피우지도 않고, 큰소리를 내지도 않는다.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고 낯설다 보니 귀에 콕 박히는 순간이 있지만, 그렇다고 들어보면 목소리 자체는 크지 않다. 오히려 한국인 아저씨와 아줌마가 그들보다 세 배는 크다. 대부분 조용히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스마트폰을 하거나, 동료 직원으로 보이는 몇끼리 함께 와서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가 간다. 물론 한국인 진상이 있듯, 외국인 진상도 더러 있다. 둘 다 동남아 쪽으로 추정되는 얼굴이었다. 짧고 부족한 한국어 실력 탓인지, 아니면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 것인지 반말로 사장이나 직원에게 한참을 따지다가, 자리에 앉아서는 마치 들으라는 듯 카페 안에 모든 손님이 쳐다볼 정도로 고래고래 혼잣말을 한다. 그때는 자국어로 하거나 혹은 영어로 하는데, 한 번은 내 바로 옆자리여서 내가 물끄러미 쳐다본 적이 있다. 전화기에 대고 한참 동남아식 영어로 이야기하다가 내 눈길을 알아채고는 왜 쳐다보냐고 묻더라. 나는 무례든 결례든 실례든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이에게 따져 묻지 않는 성격이다. 소용이 없으니까. 함께 큰소리를 내지도 않는다. 역시 필요가 없으니까. 그럴 때 나는 잠시 더 지그시 쳐다보다가 주로 ‘너 어느 나라에서 왔어?’라고 묻는 편이다. 한국어로든 영어로든. 재밌는 것은, 이 카페에서는 단 두 번뿐인 일이었는데 내 질문을 들은 상대는 마치 평소에 자기들끼리 그렇게 말하기로 짠 것처럼 ‘나는 미국 사람이다’라고 답했다. 영어를 들으면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이는 절대 아닐 듯했다. 서양이든 동양이든 어떤 인종이어도 미국에서 자랐다면 그 나라 원어민처럼 말하니까. 동남아식 영어를 사용하면서도 미국인이려면 둘 다 미국이 아닌 자신의 나라에서 살다가 미국인과 결혼을 했거나 이민을 가서 영주권을 땄을 텐데, 그런 이가 마침 한국에서 살고 있다? 그럴 수도 있는데 하필 두 사람이 전부? 이러한 것을 따질 필요도 없다. 그렇게 맞춘 듯한 거짓말(이라 나는 추정한다) 이후 보인 표정이 내 입장에서는 정말 재밌었으니까. 마치 ‘내가 미국인인데 네가 어쩔 거야?’라는 뉘앙스. 그것은 바꿔 말하면, ‘너도 미국이라는 나라를 경외하지? 우러러 동경하면서도 무섭지? 나랑 내 나라는 미국이 그렇거든? 한국인인 너와 한국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렇지? 그러니까 내가 미국인이라고 하면 뭐라고 더 못하겠지?’라는 듯한 일종의 의기양양함이 엿보였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는데, 나는 상대의 그 내심 떨리면서도 당당한 척 하는 태도와 표정에서 찰나 간에 저런 의식을 읽었다. 물론 내가 읽은 것이 무조건 정답이라 장담할 수는 없다. 동남아 국가 출신으로 추정되는 아줌마 둘 다 정말 미국인이었을 수도 있고, 간혹 데려오는 아이들 두 명과 세 명이 다들 혼혈 느낌은 조금도 없이 동남아인처럼 생겼지만 하필 미국 남편의 유전자가 하나도 발현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니면 미국 남자와 결혼하지 않고 그저 이민을 가서 영주권이든 시민권이든 땄을 수도 있겠지. 그러다 하필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 가족이 여럿 사는 공장 근처 동네에 살고 있을 수도 있겠지. 물론 그럴 수도 있고 나 역시 속사정까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정말 그럴 가능성보다 거짓말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그런 의식을 읽었다고 느꼈다. 그래서 재밌었다. 굳이 미국이 얼마나 슈퍼파워를 가진 초강대국인지, 경제력과 군사력이 어떤지, 국제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이 있는지, 하지만 내부로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총기와 마약과 채권과 인종 갈등 때문에 어떤 홍역을 앓고 있는지, 코로나 때의 대처를 보건 국민의 평균적인 지식과 의식 수준으로 보건 미국이라는 나라 안에서도 수준이 얼마나 천차만별인지, 그래서 예전처럼 서양이라고 선진국이라고 강대국이라고 막연히 우러러보는 사대주의가 얼마나 많이 사라졌는지, 게다가 내가 그런 막연한 사대주의와 마치 그들에게 인정이라도 받으려는 듯 반응을 살피는 영상을 얼마나 혐오하는지, 앞뒤사정도 모른 채 무슨 일이 생기면 태극기와 함께 성조기를 무작정 흔드는 행태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지, 그런 것들을 일일이 끌어와 설명할 필요가 없이,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 바가 재밌었다. 내가 미국인이라고 답하면 네가 뭐 어쩔 수 없겠지? 내가 지금 공공장소에서 고래고래 악을 쓰고 있지만 미국인이라고 말한 나에게 뭐 어쩔 건데? 라는 사대주의에 찌든 의식이 보여(졌다고 생각해)서. 실제 나도 저렇게만 물어본 후 대답을 듣고는 피식 웃고 더는 쳐다보지 않았으니까. 속으로는 ‘잘도 그렇겠다’라고 생각했지만 굳이 더 말을 섞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런 내 반응 때문인지, 상대도 더 고함을 지르지 않았다. 몇 분 혼자 씩씩대다가 곧 조용히 사라졌다. 아니 그렇게 거짓말 하고 상대에게 믿게 만들고 싶으면 다음에 다시 카페에 오지 말았어야지. 그것도 남편과 애 세 명을 전부 데리고 오면 어떡해. 사계절이 있는 나라가 아니라 건기와 우기가 있는 더운 나라에서 지금 막 여행 온 일가족처럼 보이잖아. 그리고 드물지만 간혹, 근처 학교에서 반 아이들을 데리고 카페에 오는 선생님들도 있었다. 카페에 앉아 있는데 저 멀리서부터, 1층 복도 입구로 추정되는 곳에서부터 와글와글 목소리가 먼저 카페에 도착했다. 상대적으로 조금 낮거나 더 높을 뿐 하나 같이 음이 높은 목소리, 그리고 한 사람씩 말하지 않고 여럿이 동시에 말하는 소리, 게다가 각자 하고 싶은 말만 하는 듯한 대화소리였다. 듣자마자 상대가 몇 살쯤인지, 어디 소속인지 알 수 있는 합창이었다. 곧 카페 유리문이 벌컥 열리며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열다섯 쯤의 아이들이 연달아 들어왔다. 나는 여전히 신기하다. 어떻게 저렇게 각자 자기 말만 하는데 대화가 될까. 저렇게 일곱이 모여 앉은 자리에서 다섯 정도가 동시에 떠드는데 어떻게 그 각각의 내용과 의미를 갈래갈래 알아들을 수 있을까. 어린아이가 떠드는 소리는 불쾌하지 않고 신비롭다. 글을 쓰다가도 나도 모르게 그들이 나누는 대화 같지 않은 대화를 막연히 듣게 된다. 그리고 15명 뒤로 따라 들어오는 어른 둘. 아이들에게 하는 말과 태도를 보니 응당 담임선생님일 것이다. 나는 처음 반 하나가 전부 몰려온 줄 알았다. 한 반에 열다섯쯤의 학생들, 그리고 담임선생님과 부 담임선생님까지. 근데 당시 곁에 있던 사촌 누님이 아닐 것이라고 했다. 아마 한 반에 일곱 여덟 명씩 두 반이고, 각각의 담임선생님일 것이라고. 현재 초등학생 아이를 키우는 누님이라 신뢰가 갔다. 그렇게 한 무리의 아이들이 들어오면 카페는 온통 그 아이들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된다. 나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쓰게 웃으며 쓰던 글을 내려놓는다. 카페는 본디 사람과 사람이 떠드는 장소다. 글을 쓰건 공부를 하건 일을 하건 조용히 있고 싶은 마음, 일행과 자유롭고 편하게 대화를 하고 싶은 마음, 이 두 마음이 상충된다면 당연히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우선되어야 한다. 애당초 카페의 본류가 스터디카페 같은 경우가 아닌 일반 카페라면 말이다. 카페에서 우선되어야 하는 자유를 구분하지 못하고 ‘여기 3층은 원래부터 조용한 게 불문율...’ 같은 소리를 하면 업장의 속성과, 권리의 우선권과, 자유의 역침해를 구분하지 못하는 모지리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처음부터 스터디카페로 만들어진 업장이 아니라면, 카페 업주가 공식적으로 ‘정숙’이 카페 기조이자 내규임을 밝혀놓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의 모든 기본 형식의 카페에서는 조용히 있을 권리보다 (정상적인 범주의 소리와 내용으로) 조용하지 않을 권리가 우선된다. 그래서 종종, 저것이 민폐인지 아닌지 모호한 크기의 목소리로 대화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는 공공장소에서 남들이 듣을 수 있도록 떠들어도 되는 내용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대화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무지한 것은 그럴 수 있다. 모름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자랑스러울 것도 없지만. 내가 왜 알아야 하냐며 도로 역정을 낼 일은 더더욱 아니고. 다만 묘하게 외설적이거나 비속어가 과한 편이면 듣기 불편하다. 그렇게 크기든 내용이든 놔두기에는 거슬린데, 막상 가서 따지기에는 조금 모호한 딱 그 정도. 그럴 때면 별 수 없다. 카페는 원래 떠들라고 있는 장소이기에, 누가 봐도 명확하게 따져 물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면 속으로는 ‘좀 그렇네’라며 불편함을 느낄 수야 있어도 그뿐이다. 가서 ‘괜찮으면 목소리를 조금 줄여 줄 수 있는지’ 정중하게 양해를 구할 수야 있어도 역시 그뿐이다. 선을 명확히 넘지 않았다면 최소한 카페에서는 강요할 수도 없고 불편함을 노골적으로 내비치는 것도 내 자유가 아니다. 누군가 자신은 조용히 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저쪽 목소리가 커서 거슬리던 와중에 아까보다 더 커졌으니 잘 걸렸다는 식으로 온몸으로 째려보면, 그와 같은 불편함을 느끼며 곁에 조용히 앉아있던 내 마음이 더 불편하다. 카페의 조용함이란 사람이 없을 때라 ‘운이 좋은 것’, 또는 그러지 않아도 되는 타인이 우리를 위해 작게 말해주는 ‘배려’다. 배려의 영역인 ‘조용함’을 ‘떠듦’이라는 권리와 동일시한다면 앞으로 공부족은 카페에서 점점 자리를 잃어갈 것이다. 단지 머무는 시간, 커피 한 잔, ‘콘센트 어딨어요?’라는 외적 형태가 아닌 내적 행태로.




생각해보니 지난 70일 동안 40편의 수필 초고를 이 자리에 토해내듯 남겨뒀다. 하나 당 15매인 것도, 20매나 25매인 것도 있으니 얼추 수필집 한 권 분량이다. 그러다 보니 올해 1월부터 너무 각을 잡고 글을 써왔나 싶다. 이런 글 저런 글을 다양하게 내키는 대로 쓰지 않고 머릿속에서 이미 개념과 개론이 완성된 것을 규칙과 틀에 맞게 꺼내놓는 일에만 집중했다는 자각이 들었다. 지금 이것을 쓰기 시작할 때는 오늘 왜 이러나 싶다가도 다 쓰고 나면 결국 이유가 있었구나 싶은 것. 이런 것 역시 글이겠지. 아니지, 어쩌면 본디 이것이 내게는 더 글에 가까웠다. 쓴 글을 혼자만 볼 때는 늘 이랬으니까.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등단 역시 좋은 점만 있을 수는 없다. 세상에 글을 공식적으로 드러내는 일은 내가 쓴 글을 나와 면식조차 없는 이가 읽을 수도 있고, 내가 모르는 곳에서 그들끼리 논하고 평할 수도 있음을 뜻한다. 내가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내 작품을 포스팅한 곳에 달린 댓글을 처음 발견하는 순간처럼. 그에 영향을 받지 않으려 해도 무의식중에는 나도 모르게 어깨와 손가락에 남을 의식한 과한 힘이 들어가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어느덧 생각의 과정과 여과의 틀, 그 결과물까지도 꾸떡꾸덕해진 느낌이 들어서 모든 과정을 다시 한 번 휘젓는 느낌으로 주절거려봤다. 적당히 숙성되어야 치즈지, 말라버리면 그냥 응고된 단백질, 흘러내릴 정도로 너무 풀어지면 그저 구진해진 우유니까. 어제 살다가 처음으로, 음식에서 나는 달걀 비린내를 비린내가 나지 않는 달걀로도 잡을 수 있음을 알았다. 지금까지 달걀의 비린내를 잡기 위해서는 후추나 맛술, 소스처럼 구성과 속성이 그와 정반대되는 것만 가능하다고 머릿속에서 규정해놨기 때문이겠지. 마찬가지로 내용 있는 글을 쓰면서 생긴 꾸덕함과 답답함을 해소하는 방법 또한 글이 아닌 다른 것에서만 찾을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달걀 비린내 나는 프라이가 들은 샌드위치에 비린내가 나지 않는 에그 마요를 추가하는 것처럼, 같은 구성이지만 반대 속성. 그럼 내용 있는 글로는 풀리지 않던 답답함을 내용 없는 글뭉치로는 풀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 뭉치를 처음 적을 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시작하지는 않았다. 다 쓰고 나서 지난 행위에 이유일 법한 근거를 가져다 붙이는 것이지. 뭐, 여행하고 비슷하다. 간혹 이유도 모른 채 터미널에 가서 뭐에 홀린 듯 버스표를 덜컥 사버린 후에, 정처 없이 낯선 동네를 떠돌다가,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야 내가 왜 그랬는지, 그래야 했는지 깨닫게 되는 일처럼.






2025. 04.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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