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쉬움은 응당하나 충실함으로 가득했다 [24매]
왜 어렸을 때는 어떤 아이든 자신을 특별하다고 생각하잖아. 남들과는 다르다고,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잖아. 그러다 나이를 점차 먹고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게 되지. 사회생활을 하면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이 나뉨을 깨닫게 되고. 그리고 이미 오래전에 만들어져 유지되어 온 제도와 체계 안에서 남들과 다르게 사는 것보다 비슷하게 맞춰가는 것이 훨씬 편하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기도 하고. 그러고 나서 언젠가부터 더 이상 스스로를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고, 대단하게 여기지도 않게 되잖아.
그렇게 아이였던 이는 철이 들면서 어른이 돼. 이상하지도 않고 드물지도 않은 일이야. 나쁘지도 않고 잘못되었다고 할 수도 없어.
근데 어떤 이들은 어렸을 때 자신에게 느꼈던 그 특별함, 대단함,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고양감을 나이 먹고도 놓지 않기도 해.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마음이 있어도 몸은 현실에 적응하며 살기에 스스로를 계속 특별하고 대단하게 유지하려는 노력까지 뒤따르기 어려워. 그러며 점점 현실의 평범함과 마음의 특별함 사이에 괴리감이 쌓여가는 거야. 그러다 보면 결국 어느 한쪽으로 크게 쓰러지게 돼. 스스로가 아님을 알면서도 마치 아이가 생떼를 부리듯 자신은 여전히 특별하고 대단하다고 소리만 높이거나, 혹은 반대로 세상은 철들지 않은 이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면서, 상대가 얼마전 자신과 비슷한 어른이든 혹은 아직 철들 때가 되지 않은 아이든 아직 스스로를 특별하고 대단하게 생각하는 이를 과도하게 업신여기고 비난해. 마치 자신은 이루고 싶었지만 놓쳐버린 것을 남이 여전히 가지고 있는 일을 인정하기 싫다는 듯이.
그래서 철이 안 든 보통의 아이. 철든 보통의 어른. 그리고 철이 일찍 든 몇몇 아이. 철이 안 든 몇몇 어른. 그리고 철이 안 들고 싶어서 버둥거리는 어른과 철든 것이 인생의 업적인 양 으스대는 어른까지. 보통은 이렇지.
그렇다면 이 세상에 정녕 특별한 사람은 없을까. 대단한 사람은 존재할 수가 없나. 근데 그렇지 않잖아. 소수지만 우리는 어딘가에서 특별한 사람과 대단한 사람을 목도해. 특별하거나 대단한 사람은 누구나 주변에서 하나둘씩 보고 들을 만큼 드물지 않고, 특별하면서 대단한 사람은 매체나 멀리서 드물게라도 발견하지. 그러면 그들은 어떻게 특별하거나 대단하거나 혹은 특별하면서도 대단한 사람이 되었을까. 남들은 전부 빠져나가지 못한 그 ‘철듦’의 미로를 해치고서 말이야.
여기 어떤 사람이 있어. 이 사람도 어렸을 때는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했어. 커서는 대단한 사람이 될 것이라 믿었고. 그렇게 나이를 먹었어. 하지만 세상은 일개 인물이 특별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음을, 그리고 개인이 대단해지도록 돕지 않음을 자연스럽게 깨달아. 자라는 동안 평범해지라는 훈계와 강압을 내내 주입하다가도 구별과 선별을 위해 자신들이 필요할 때만 아주 잠시 개성을 드러내라고, 왜 그리 획일적이냐며 다그친다는 사실을 알게 돼.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말이야. 그에 이 사람도 다른 이와 크게 다른점은 없어. 지능지수도 거기서 거기고, 신체능력도 크게 다르지 않아. 주어진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고, 자라온 환경도 비슷하지. 다만 남들에 비해 약간 도드라지는 그 사람만의 특질이 있는데, 하나는 스스로의 말을 너무 잘 믿어버리는 성격이야.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남이 하는 말은 너무 믿지 않는 성격이야. 남들과 다른점은 고작 이 두 가지뿐인데, 시간과 세월을 곁들인 이 특질은 이 사람을 꽤 다른 장소에 가져다 놨어.
이 사람은 자신이 특별하고 대단하다고 여기는 마음의 소리를 너무 철썩 같이 믿어. 물론 평생 그에 대해 한 번도 의심하지 않은 것은 아니야. 오히려 드문드문 정말 그러한가 검증하듯 자문하는 편이야. 하지만 늘 자신은 특별하고 대단한 것이 맞다는 결론을 내려. 하지만 동시에 의아하지. 자신에 대해 ‘특별함과 대단함’이라는 결과는 분명 고정시켜 놨는데, 그에 해당하는 근거가 고정한 결과를 채울 만큼 풍성하고 다양하지 않음을 느끼는 거야. 철이 늦게 드는 보통의 어른이 느끼는 괴리감과 같아. 다만 그렇다고 ‘주장’하는 철 안 든 어른과 달리, 그렇게 ‘확신’하는 이 사람은 그 괴리감에 대해 두 가지 다른 해석을 내놔. 첫째는 ‘내 안에 있는데 내가 아직 찾지 못했다’라고. 그러니 시간과 노력을 들여 찾으면 나올 것이고, 그러면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라 아직 제자리에 일치시키지 못한 것뿐이라고 생각해. 둘째는 ‘지금 없는 것은 맞지만, 틀은 다 만들어 놓았는데 그 안에 내용물을 아직 못 채운 것이다’라고. 인간이 특별하고 대단해지는 과정은 시간과 노력이 정비례하지 않고, 노력과 수확 역시 정비례하지 않기에 꾸준히 노력했음에도 때에 따라 내가 얻는 결과가 아직 부족하거나 때로는 넘치거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또 세상사는 운이라는 요소에 많이 좌우되기도 하니까. 그래서 지금 결과에 비해 근거가 부족하다면 단지 지금 부족한 시기일 뿐이라고, 지금까지처럼 꾸준히 노력하면 언젠가 뒤따라 잡거나 오히려 넘치게 채울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 이 부분이 철이 안 든 보통의 어른과 이 사람 사이 가장 큰 차이야.
물론 이 모든 것은 근거 없는 믿음, 즉 맹신의 영역이야. 다만 앞서 말했듯 이 사람은 스스로의 말을 너무 잘 믿어버리는 성격이라서 이 맹신을 사실인 것처럼 철썩 같이 여겨. 그래서 이후 따라올 과정에 괴로움만 있지가 않아. 보통의 철이 안 든 어른은 가진 인내심의 길이만큼 괴리감에 대한 괴로움이 이어지다가 결국 특별함과 대단함을 포기하게 돼. 이 사람 역시 그 괴로움이 있어. 하지만 주장이 아니라 확신하는 만큼 괴리감의 부족분을 채우려고 궁리하고 노력해. 뭐가 부족하지? 내가 특별한 사람이기 위해서 무엇이 더 필요하지? 대단한 사람은 지금 나에게 없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있지? 그것을 찾아서 채우려고 해. 물론 쉽지 않은 과정일 거야. 결과가 고정되어 있어야만 가능한, 스스로를 특별하고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맹신해야만 그 길고 지루한 과정을 이어갈 수 있을 만큼.
동시에 이 사람은 남이 하는 말은 너무 믿지 않는 성격이지. 살면서 수많이 사람들이 이 사람에게 말을 했어. 걱정하면서, 혹은 걱정하는 척하면서, 아니면 대놓고 질시하면서, 질투하지 않는 척하면서, 또는 그냥 별 관심 없이, 그냥 간섭하고 싶어서, 상대적으로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서, 괜히 눈꼴시어서, 왜 너만 특별하려 하냐고 따지면서, 간혹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억울해하면서, 내가 너 같은 환경이었다면 그보다 잘했을 것이라면서, 너도 우리와 같아야 된다고 끌어내리면서. 정말 수많은 말과 조언과 그것을 빙자한 폭력을 한 사람에게 쏟아부어. 보통 사람이라면 질리다 못해 세뇌 당해 그들의 말을 따를 만큼. '내가 잘못 살고 있구나, 잘못하고 있구나, 시간 낭비하고 있구나, 이 방식이 아니구나'라며 스스로 걸어온 과정을 의심하고 부정하게 될 때까지.
하지만 이 사람은 어쩌다 보니 남의 말을 너무 믿지 않는 성격이잖아. 그렇게 태어났는지, 아니면 살다 보니 그렇게 만들어졌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그런 사람이 됐어. 그래서 매번, 족족, 질리지도 않고 그들에게 똑같이 대꾸해. ‘여기까지 해봤어?’라고. ‘네가 나로 살아봤어?’라면서. 간혹 너무 공격적인 말에는 이렇게도 답해. ‘내가 이렇게 사는 일이 너에게 무슨 부당한 피해를 줬어?’라고. 진심으로 걱정하며 따듯하게 조언해 주는 이에게는 이렇게 말해. ‘고마워. 그래도 난 여전히 이 길에 내 삶에 맞다고 생각해. 이 생각이 바뀌기 전까지는 할 수 있는 데까지 가보려고.’ 그리고 언제나 그 바늘 같은 시선과 폭력과 같은 언어에 노출되어 있는 자신에게는 이렇게 말했어. ‘누구도 나로 살아보지 못했어. 그들이 가진 것은 그들만의 정답이야. 내가 나만의 정답을 가지고 이 길을 걷고 있듯이.’
문득 이 사람의 결말은 어떨까 궁금해. 그는 결국 자신이 정한 결과에 맞는 근거를 찾아 비어있던 내용을 채웠을까. 아니면 도중에 고꾸라져 남이 안내하는 길로 합류했을까. 그도 아니면 걷던 도중에 어느 괴괴한 들판에서 쓰러져서 미미한 불꽃만 어스름히 일렁이다가 온데간데없이 사그라졌을까.
세상에는 분명 특별한 사람도 있고, 대단한 사람도 있고, 아주 소수지만 특별하고 대단한 사람도 있는데 그들은 거기까지 어떻게 도달했을까. 많은 이들이 정답이라고 말하는 길로 뚜벅뚜벅 걸어가서 도착했을까. 그렇게 정도를 걸어 거기까지 닿은 이들도 반드시 있겠지. 아니면 남들은 아니라고 하지만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길을 홀로 걷다 보니 결국 거기까지 닿게 됐을까. 이런 과정으로 도착한 이들도 마찬가지로 있겠지. 그렇다면 거기까지 가닿는 것은 어느 길을 걷는지의 문제인가. 아니면 거기까지 가고자 하는 의지의 문제인가. 아니면 '내가 훗날 어디까지 뻗어갈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오늘 하루 당장은 내가 하고자 정한 일을 묵묵히 채워가겠다'라는 생각이 거듭거듭 모이다 보니 어느새 닿았던 것일까. 보편과 공통과 보통이 모인 정도가 거기까지 가는 과정을 줄여주고 도와주는 길이라면 세상에서 특별하고 대단한 사람은 남이 말하는 대로만 걸어온 이가 더 많은가. 아니면 반대가 더 많은가. 아니면 거의 반반인가. 반반이거나 혹시 반대가 많다면 반드시 남이 말하는 대로 걸어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 그 이유가 없다면 ‘너를 위한다는’ 조언과 ‘걱정되어서 그래’라는 말 속에는 정말 위함과 걱정만 있는가. 그 무수한 우려와 조언 속에서 지금 이 사람은 어떤 길을 걷고 있을까. 스스로 정한 대로 여전히 걷고 있을까. 무슨 생각을 하며 그 길을 걷고 있나. 보통의 철든 사람과도, 철이 들지 않은 사람과도 조금은 다른 그 길을.
훗날 이 사람이 정말 특별하고 대단한 사람이 될지 나는 몰라. 다만 내가 궁금한 것은 그가 마지막 숨을 놓는 순간, 아쉬움으로 일그러진 얼굴임에도 과연 눈빛만큼은 충실함으로 웃고 있을지, 그 하나뿐이야.
2025. 04.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