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인정하지 않을 뿐이야 [23매]
0. 편의점에 도착하니 사장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 바깥 테라스 쪽에서 천장을 보며 무선 이어폰으로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잠시 기다렸지만 내가 온지 모르는 듯해서 ‘사장님’하고 손님이 왔음을 알렸다. 처음에는 대답 없이 계속 통화를 하기에 다시 한 번 부르자 그때서야 내 쪽을 돌아봤다. 눈이 마주쳐서 존재를 알린 후에 나는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중년 여성도 뒤따라 들어오더라. 카운터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는 ‘카드 수령하려 왔어요’라고 말했다. 동시에 중년 여성은 계속 통화를 하고 있었다. 수화기 너머 상대에게 뭐라 뭐라 말하고는 뒤이어 내게 ‘네? 뭐라고요?’라고 되물었다. 그러고도 다시 통화를 이어갔다. 허공 어딘가를 응시하며 전화 중인 상대를 나는 대답 없이 가만히 쳐다봤다. 나와 중년 여성의 눈이 1-2초간 잠시 마주쳤다. 그러자 중년 여성은 이어폰에 대고 ‘일단 끊어봐’라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나를 다시 봤다. 그에 나는 다시 ‘카드 수령하러 왔어요’라고 평온하게 말했다. 이후 몇 가지 절차는 금세 진행됐다. 중년 여성은 ‘앱카드의 바코드를 찍어야 하는데 왜 포스기를 찍고 있었지?’ 라며 자조적으로 웃었고, 나는 재밍 된 와이파이 탓에 한 번 꺼진 앱카드가 금세 켜지지 않아 ‘잠시만요’라며 웃었다. 우리는 어느 쪽도 상대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고, 누구도 고함을 치지 않았으며, 중간부터 끝까지 서로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고는 카드를 주고 받았다.
1. 굳이 상대에게 인상을 쓰거나, 악을 쓸 필요가 없다. 상대가 스스로 느끼기에도 무례하다 여길 법한 행동을 하고 있으면 그저 말없이, 잠시 가만히 주시하면 된다. 수준이 너무 떨어져 스스로의 행동을 무례라고 생각하지 않거나, 혹은 고집이 너무 강하거나 헛된 자존심 때문에 무례임에도 인정하지 않거나, 혹은 내 쪽에서 어떤 자격지심이나 피해의식이 있지 않으면 고래고래 고함을 치며 ‘내가 누군지 아느냐’를 시전 할 필요가 없다. 보통 상황에 따라 본의 아닌 실례가 불거지는 경우에는 그저 잠시 쳐다보면 된다. 평범한 수준의 자의식과 상식, 개념을 가진 이라면 주시하는 의미를 금세 파악하고 방금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볼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보기에도 걸맞지 않다 싶으면 방금처럼 일단 전화를 끊을 것이고, 아니면 통화 상대에게 잠시 기다려달라고 말한 후에 응대를 할 것이다. 무조건 전화를 끊어야 하거나, 무선 이어폰을 귀에서 빼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영업 중에 고객을 응대하기 위해 카운터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섰으면, 그 응대에 방해가 될 만한 일은 잠시 미뤄두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할 뿐이다. 응대와 통화를 동시에 하고, 그래서 명확하고 분명하게 전할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그래서 몇 번씩 되묻거나 다시 말해야 하는 일은 실례라고 여길 뿐이다. 급한 통화라면 나에게 잠시 기다려달라고 말한 후에 통화를 마저 하거나, 급하지 않은 통화라면 통화 상대에게 잠시 기다려달라고 말한 후에 응대를 먼저 하거나 둘 중 하나여야 한다. 허나 그것이 무례라 한들 나 역시 크게 기분 나빠하거나 고함을 지를 필요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되고. 뒤에서 불러도 한 번에 듣지 못하고, 카운터에 마주 서서도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그러고도 다시 통화를 이어가야 할 정도로 사태가 시급하거나 부대 상황을 잘하지 못한다면, 그저 통화가 끝나거나 스스로 끊을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면 된다. 물론 ‘두 가지를 동시에 잘할 수 없다면 둘 중 하나는 뒤로 미뤄놔야 할 것 같은데’라는 의미로 쳐다보겠지만 말이다. 그에 상대가 통화를 고집하건, 내가 뭘 잘못했냐고 도리어 성을 내건, 스스로 눈치를 채고는 통화를 끊건, 아니면 급한 통화니 내게 잠시 기다려달라고 양해를 구하건, 그 어떤 것이 되었건 내가 성을 내거나 고함을 지를 일이 아니다. 여기서 언성이 높아지는 일은 스스로가 부족함을 증명하는 꼴이니.
2. ‘나는 자격지심이 있고, 피해의식도 있고, 대접 받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다른 곳에서 받은 피해와 일상에서 받은 모든 스트레스를 순간적 상대적 약자처럼 보이는 너에게 모두 해소할 생각이다. 나는 옳고, 그러니 나만 옳다. 너는 틀렸고, 하여 내 앞에서 오체를 바짝 낮추고 엎드려서 나의 처벌을 겸허하게 기다려야 한다. 왜냐면 나는 똑똑하고 잘난 사람이고, 내 입장에서는 내 주장이 무조건 합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인이 실제 무례했건 아니면 나만 무례했다고 생각했건, 나를 정말 무시했건 아니면 무시당했다고 느꼈건, 그 무례와 무시를 지적하고 표현하는 방식으로 고래고래 악을 쓰는 것밖에 못하는, 겉늙은 얼간이다. 악을 쓰는 일이 일을 해결하는 데 건강하고 건설적인 해결법은 아니지만, 반대 입장이라면 나는 이런 취급을 받거나 당하면 절대 안 되지만, 나는 고작 이 정도 수준인 추레한 인간이라 우격다짐으로라도 이렇게 갈등을 해결하겠다. 내가 영업장에서 계속 난동을 부리면 이 한국 사회에서 네가 뭘 어쩔 거냐. 지난 수십 년간 온갖 대기업들이 서비스직의 직원들을 갈아 넣어서 이미 훌륭한 <꼬장 보증 시스템>을 만들어놨는데 네가 뭘 할 수 있겠냐. 받아라 내 고함 공격!’ 이럴 필요가 없다. 상대가 내게 무례했다면, 상대가 나를 정말 무시했다면, 그 행태가 사회의 상식과 기업의 절차에도 맞지 않다면, 그래서 명분이 분명하게 내게 있다면, 그 자리에서 천박하게 악을 쓰고 난동을 부리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인 방법은 적지 않게 있다. 이렇듯 가볍게 주시하는 일로 의사를 전하거나, 어떤 부분이 잘못되었다고 느꼈는지 조곤조곤 말을 하거나, 갈등이 심해지면 녹음을 하거나, 리뷰와 항의로 대중과 본사에 공분을 요청하거나, 그도 아니면 주변인에게 이용하지 말라고 전하거나, 그조차 아니면 그냥 내가 다시 가지 않으면 된다.
3. 다만 중요한 점은, 그리고 현재 가장 필요한 점은 이 모든 과정이 불관용이 아닌 관용의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사적 제재'의 영역이 아닌 '공적 제재'의 영역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건이 진행되고 과열되며 자질구레하게 들러붙은 모든 감정과 뉘앙스를 걷어내고 나서 본질만 살펴봤을 때, 영업장에서 벌어진 갈등의 고갱이가 결국 ‘너를 처벌하겠다’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후 불거진 감정의 잉여물일 뿐이다. ‘나를 무시하고, 내게 무례하게 대하고, 그것을 인정조차 안 하고, 그래서 내게 이 감정 소모를 일으킨 네가 미워서 어떻게든 피해를 주고 싶다’의 발로일 뿐이다. 핵심은 결국 ‘나는 이것이 잘못이라 생각하는데, 동의해?’ 이것뿐이다. 그러면 갈등 초기에 상대가 스스로 인정하건, 속해있는 기업이나 대중의 압박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하건, 아니면 끝내 인정하지 않건, 너를 개인적·감정적으로 처벌할 생각은 없다. 동의하면 ‘좋아! 그럼 이 문제는 끝! 잘 해결된 걸로!’ 하며 넘기는 것이고, 끝내 동의하지 않으면 나 역시 이용하지 않는 일로 너를 인정하지 않는 것뿐이다. 모든 윤리적·도덕적 불매의 시작이 그러하듯이. 대중의 상식에서 많이 벗어나 있어서 그런 불인정이 쌓인 기업이 자연스레 소멸하고, 그러지 않은 기업이 상대적으로 특수를 얻어 커지듯이.
4. 어째서 우리 사회는 윤리적 불매가 쉽게 되지 않을까. 왜 이리도 오래 걸릴까. 잠시 되었다가도 어째서 다시 시들해질까. 물론 그 원인이 하나는 아닐 테지만, 그중 하나로 이 ‘사적 재제’가 있는 듯하다. 시스템의 문제를 그 시스템을 대표하는 듯한, 사실은 희생양인 개인에게 추징하는 것. 사례가 쌓여 불매 같은 ‘공적 제재’가 되어야 하는데 그 전에 개인의 비난과 처벌 등 감정적인 ‘사적 제재’를 통해 사례와 동기와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 ‘나를 화나게 했으니 너는 망해야 해’가 아니라 ‘나는 우리 사회에 너 같은 집단이 존재하면서 이윤을 추구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아’로서 불매가 진행되어야 하는데, 사례가 소모되어 연료가 충분하지 않음에도 언론에 보도된 ‘한두 가지의 큰 사례’만으로 불타서 반짝이는 것. 결국 원인은 감정으로 발발된 사적 제재다. 나를 무시한 네가 미워. 내게 무례하게 대한 너를 처벌할 거야.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만 통용되어야 할 이런 감정의 흐름이 개인과 집단 사이에서도 촉발된다. 또 누군가에 의해 그러도록 유도된다. 일개 개인을 십자가에 매단 누군가가 우리 손에 돌과 횃불을 쥐어주고는 자신은 으슥한 골목 그림자에 숨어 이쪽을 지켜본다. 그러니 지금까지도 우리가 사는 여기에 저런 기업이, 저런 나라가 여전히 떵떵거리며 돈을 벌 수 있나 보다.
5. ‘네가 미운 것이 아니야. 너는 너의 방식을 추구하는 거잖아. 그건 알겠어. 단지, 나는 그 방식을 인정하지 않을 뿐이야.’ 언제고 이렇게, 우리의 불매는 성난 들불 같은 감정적 불매에서 고요하게 이글거리는 이성적 불매로 넘어가겠지. 윤리적·도덕적 불매가 소비자의 의사를 드러나는 가장 기본이자 기준이 되면 기업이 대상인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 영역으로는 자연스레 이성적인 유권자로 변모할 것이고. 그때가 되면 더더욱 개인인 종업원 앞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를 이유가 없어지겠지. 마치 상대를 복종이라도 시키겠다는 듯이, 여기서 자신만이 유식하고 이성을 가진 사람인양 견강부회하는 꼴을 볼 일도 줄어들겠지. 그때 우리는 무례한 종업원도, 천박한 고객도, 어느 쪽도 미워하지는 않지만 둘 다 인정하지 않을 테니까.
2025. 03.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