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5분의 3의 기억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있구나. 전철은 한산했다. 운행하지 않을 때 몰래 올라탄 것처럼 차내에 우리 말고 아무도 없었다. 지하를 벗어나는 듯 창밖이 점점 밝아지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좌우가 시원하게 트였다. 일렬로 늘어선 창으로 서늘한 노란빛이 쏟아졌다.
빛의 파장이 길어지는 늦은 오후. 나는 느닷없이 어딘가로 가는 중이다. 일곱 자리 중 왼쪽 끝자리에 앉은 나는, 흘러가는 풍경을 보다가 문득 한숨이 튀어나왔다. 내가 지금 왜 여기 있는 거지. 방금까지 학교 도서관이었는데. 고개가 자연스레 주동자 쪽으로 돌아갔다. 아이는 중간 자리에서 등받이에 무릎을 대고 창문과 마주 보고 있었다. 의자 밖으로 튀어나온 작은 발이 신이 난 듯 위아래로 흔들거렸다. 꼭 케이크 가게의 쇼윈도라도 들여다보는 모습이다. 창밖은 들판 사이로 금빛을 머금은 강이 전철과 나란히 흐르고 있었다. 아이의 머리카락에서 번지는 빛과 같은 색이다. 강 근처에 사는 내게는 하등 신기할 것 없는 풍경이었다.
시선이 머문 시간이 길었는지 아이가 이쪽을 돌아봤다. 눈이 마주치자 윤슬 같은 눈동자에 백합처럼 웃음이 피어났다. 그래. 내가 저 미소에 속았지.
‘지금 바빠?’
‘어? 나 리포트….’
‘바다 보러 갈래?’
‘어? 나 리포트….’
‘가자. 같이 가고 싶어.’
한 시간 전의 문답이었다. 직후 나는 도서관에서 마을버스로, 다시 전철로 옮겨졌다. 멍하게 있는 동안 배경만 바뀐 셈이다. 딱 잘라 거절하지 못한 나도 문제지만, 쟤 성격도 참 평범하지 않다. 갑자기 웬 바다냐고. 그것도 굳이 나랑. 하지만 뒤늦게 따지기에는 이미 멀리 와버렸다. 이유라도 알아야겠다 싶어 입술을 떼는 순간, 아이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묻기도 전에 퇴자 맞은 느낌이네. 불러서라도 물어볼까, 말까.
“친해지고 싶었대.”
생각을 자르듯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맞은편 자리에서 책을 보던 그는 고개도 들지 않고 그리 말했다. 내가 가만히 쳐다보니 뭘 보냐는 듯 태연히 책장마저 넘겼다. ‘아니 그래도 초대 방법이 좀 그렇지 않아?’라고 묻지 않았다. 내 소심한 성격보다는 그와 친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변명해본다. 실제로 직접 대화한 것은 이번이 세 번째였다. 분명 세 번 이상 봤고, 심지어 그의 방에서 하룻밤 머물기도 했는데 말이다.
“아.”
그러니 할 수 있는 대답은 이 정도뿐. 내 반응을 예상한 것처럼 그는 말없이 한 장을 더 넘겼다. 나는 다시 상황 속에 방치됐다. 주기적으로 덜컹거리는 진동과 함께 풍경은 끊임없이 바뀌어갔다. 세상에 셋만 남은 것처럼 텅 빈 객차 안도 여전했다. 한 명은 창밖을, 다른 한 명은 책을, 나머지 한 명은 둘을 바라보는 구도는 그 뒤로도 한동안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