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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자이 :1의 사람들] 2

2. "화장실 간 것 같습니다."

by 이한얼






오늘 일만 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아 보이지만, 나는 누구 못지않게 소심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심해야 하는 성격이었다. 그렇게 태어나지는 않았으나 그렇게 자라왔다. 그런 만큼 처음 보는 사람을 따라가는 일도, 첫 방문인 집에서 잠이 드는 일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웬걸, 멀쩡한 정신으로 누웠는데 어째선지 순식간에 술기운이 돌았다. 따듯한 바닥과 편한 옷, 푹신한 이불 덕에 뱃속에 켜켜이 쌓아놓은 알코올이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덕분에 잠드는 것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재빠르게 잠들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빠른 것은 소문이었다. 내가 잠든 속도 따위와 비교할 수 없게 세상 어떤 새보다 빨랐다. 알고는 있었으나 이렇게 빨랐구나 하고 체험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고 할까.









첫 번째 주, 금요일



끊어진 필름을 연결하듯 잠에서 깼다. 처음 느낀 것은 위장의 따끔함이었다. 뒤이어 술 냄새가 은은하게 올라왔다. 몽롱한 눈동자로 주변을 둘러봤다. 여긴 어디지. 지금 몇 시지. 중요하지 않은 의문들이 연달아 떠올랐다.

모르겠다. 좀 더 자자. 깨려는 뇌를 재우듯 다시 눈을 감았다. 그때 작은 코골이가 들렸다. 코를 곤다기보다 미약하게 고릉 거리는 소리였다. 반쯤 감기던 눈이 번쩍 떠졌다. 맞다, 여기 우리 집 아니잖아! 튕기듯 상체를 일으켜 주변을 살폈다. 아직 검푸른 하늘 탓에 방안은 어둑어둑했다. 침대에는 아이가 벽과 마주한 채 자고 있었다. 방문이 닫혀있어서 거실의 모습은 알 수 없었다. 어느새 고릉 거리는 소리는 끊겨있었다. 졸다 깨보니 처음 보는 종점인 기분이었다.

나는 앉은 채로 기억의 공백을 차곡차곡 맞추기 시작했다. 신입생 환영회와 2차. 술집 앞의 대화와 여기까지 따라온 일. 그리고 지금이었다. 기억에 빈틈은 없었다. 근데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무슨 생각으로 따라와서 어쩌려고 잠까지 들었을까. 기억 속의 여자는 낯선 사람이었다. 환영회가 시작되고부터 내 모습을 하고는 이해 못 할 행동만 일삼았다. 그제야 깨달았다. 이게 내 주사구나. 취하면 이런 짓까지 하는구나. 거슬거슬한 베개에 얼굴을 묻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너는 앞으로 술 마시지 마라. 혹시라도 취할 것 같으면 신발이 벗겨져도 돌아보지 말고 집까지 달려가라. 그렇게 다짐을 하고 나서야 뒤늦게 숙취가 몰려왔다. 게워낼 정도는 아니었지만 왠지 따듯한 국물 생각이 간절했다. 아니 그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일단 여기서 탈출하자.

천천히 이불을 걷으며 일어났다. 최대한 조심히 움직여도 섬유가 부대끼는 소리는 어쩔 수 없었다. 아이가 잠시 뒤척였지만 이쪽으로 돌아눕지 않았다. 문고리를 잡고 부드럽게 돌렸다. 손마디만큼 열린 틈으로 거실을 정찰했다. 그는 거실 한복판에 정자세로 누워있었다. 자세만큼 표정도 단정했다. 거실로 나오던 중에 문득 자는 얼굴에 시선이 멎었다. 막 밝아오는 이른 박명에 봐서 그런가, 그의 이미지는 기억과 사뭇 달랐다. 어두운 술집 조명 아래에서 본 무서운 무표정이 아니었다. 술집 앞에서 취기로 달아오른 얼굴을 찬바람에 식히는 싸늘한 안색도 아니었다. 우리에게 렌즈 통과 스킨로션을 보여주며 왠지 칭찬받고 싶어 하는 수컷 고양이 같은 눈빛마저 아니었다. 기억 속 어느 이미지도 저 얼굴과 달랐다. 짧은 머리와 각진 일자눈썹이 특징적인, 이제 갓 성인이 된 남자아이였다.

아니지, 내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나는 까치발을 한 채 베란다로 향했다. 담배와 온갖 안주 냄새로 절인 코트들이 예쁘게 걸려있었다. 조용히 외투와 가방을 챙겼다. 이제 남은 문은 두 개뿐이다. 알루미늄으로 된 주방문을 조심스럽게 당겼다. 더없이 천천히 당겼음에도 경첩이 짓눌리는 소음이 조그맣게 울렸다. 그 순간 등에 소름이 돋았다.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뒤에서 이불이 스치는 심리적인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설마 하며 돌아보니 그는 소리도 없이 상체를 들고 나를 보고 있었다.


“으악!”


특유의 무표정과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비명을 질렀다. 쾅. 손에 든 것도 놓치며 쓰러진 곳은 하필 주방으로 나가는 문이었다. 속이 비어 소리만 요란했지 통증은 없었다. 다만 마음이 몹시 아팠다. 머리를 싸매고 웅크렸지만 낯 뜨거워서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소리가 요란하기는 했나 보다. 덩달아 일어난 아이가 어느새 내게 달려왔다.


“괜찮아?”


작은 손으로 머리를 쓸어줬다. 넌 부스스한 머리마저 참 예쁘구나. 잠긴 목소리로 고맙다고 주억거렸다. 소리가 들리지도 않았을 텐데 아이는 환하게 웃었다.


“배고파?”


완전히 이불 밖으로 나온 그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아이에게 물었다.


“아니. 근데 속은 좀 쓰리네.”

“그럼 해장하자. 콩나물 있는데 맑은 거? 매운 거?”

“난 수프.”


질문과 대답 사이에 간격이 없는, 합이 잘 맞는 문답이었다. 수프라. 아이의 말을 낮게 따라 읊조리던 그는 곧 지갑을 챙겨 나갔다. 나가는 뒷모습을 지켜보던 아이가 불쑥 물었다.


“우리 엄마 알아?”


웬 엄마? 난 어제까지는 너도 몰랐는데. 나는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이는 예상한 것처럼 고개를 몇 번 주억거렸다. 알아야 했을까. 모르면 안 되는 사람인가. 유명한 배우라든지 아니면 우리 과 교수라든지. 내 걱정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아니야. 신경 쓰지 마”라며 웃었다. 내 머리를 몇 번 더 쓰다듬은 아이는 머리끈을 챙겨 화장실로 들어갔다. 웅크린 나만 방향 없이 방치되었다. 난 뭘 해야 하지. 미리 물이라도 올려놔야 하나. 두리번거리던 시야에 내가 던져버린 가방이 들어왔다. 그래. 난 도망가자!

급히 외투를 꿰고 가방을 둘러맸다. 물소리가 나는 화장실을 보며 아이에게 인사를 하고 갈지 그냥 갈지 고민했다. 결론이 나기도 전에 그가 현관을 열고 들어왔다. 문지방 위에 서있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간 지 3분 만에 뭐 벌써 오냐. 편의점 봉투를 내려놓는 그는 내 외투와 가방을 유심히 보다가 다시 나를 봤다. 내 동공이 심장처럼 쿵덕거렸다.


“가려고?”


그러고 싶다. 그렇다고 말은 못 하겠지만. 그때 물소리가 끊기고 물기 젖은 앞머리의 아이가 나왔다. 방금 그가 한 행동을 좀 더 빠르게 마친 아이는 내 뒤를 점거했다. 졸지에 불법주차에 앞뒤로 끼인 앰뷸런스 같은 상태가 되었다.


“가게? 1교시 공통 수업이잖아. 먹고 같이 가자.”

“그래. 수프 먹고 가.”


아이와 그가 미리 짜 놓은 대사처럼 연달아 말했다.


“혹시 수프 싫어해? 다른 거 먹을래?”

“콩나물 있어. 맑은 거? 매운 거?”


그 와중에 얘는 아직도 콩나물에 미련을 못 버렸다.


“맑은 게 낫지 않을까? 수프 내가 할게.”

“내가 같이 하면 돼.”


두 사람은 나를 네트 삼아 탁구를 하듯 말을 퍼부었다. 첫마디도 대답 못했는데 이미 자기들끼리 대화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변한 나를 세워두고 그는 냉장고를 열어 물방울이 맺혀있는 투명한 봉투를 꺼냈다. 그러니까 너는 아스파라긴산에서 좀 벗어나라니까. 나는 매듭을 풀려는 그를 급히 말렸다.


“아니! 아니야. 난 수프도 괜찮아.”

“그럼 수프로 통일하자.”

“딱 3인분 사 왔어.”


그래. 내가 졌다. 너희들 마음대로 해라. 나는 가방을 도로 바닥에 내려놓았다.


“일단 음….”


아이는 서두를 꺼내며 두 번째 손가락을 세웠다. 어디로 향할지 잠시 갈팡질팡하던 손가락이 곧 허공을 빙글빙글 감았다. 절대 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듯이.


“씻고 옷부터 갈아입어.”


퍼뜩 고개를 돌려보니 전신 거울에는 회색 운동복 바지와 연두색 티셔츠 위에 감색 코트를 엉성하게 걸친 여자가 서있었다. 부리나케 달려간 화장실 거울에서 만난 눈이 붓고 뒷머리가 삐친 여자는 더 가관이었다. 머리를 벅벅 긁으니 김치찌개 냄새가 풀풀 풍겼다.

다시 한번 되물었다. 내가 왜 여기에 있을까.






그래서 나는 어쩌다 텅 빈 객차에 실려 바다로 가게 되었나. 개별적인 인과를 거슬러 올라가면 아마 이쯤까지 와야 할 터였다.

시작은 환영회의 다음 날인 금요일 1교시, 신입생 공통 수업이었다. 수업 시간 직전에 뒷문이 우렁차게 열리는 소리에 시선이 모였다. 가장 먼저 눈에 띈 사람은 어제 환영회의 주인공이자 깔깔한 성격을 유감없이 드러내며 하루 만에 과의 뜨거운 감자로 자리매김한 아이였다. 그리고 아이에게 손목이 잡혀있는 사람은 거기서 안주나 나르던, 저런 애도 있었나 싶은 나였다. 마지막으로 아이의 뒤에 서있는 그까지. 어제와 옷차림이 같은 두 명과 갈아입었지만 거기서 거기인 한 명의 등장은 이목을 집중시킬 만큼 요란하긴 했으나 그때까지만 해도 다들 그러려니 넘어가는 듯했다. 각자 어디선가 묵었던 그들이 우연히 만나 같이 들어온 거겠지.

금요일은 화요일처럼 오전 수업뿐이었다. 수업이 끝나자 사람들은 아이에게 우르르 몰려들었다. 잘 들어갔어, 어제 번호를 못 물어봐서, 앞으로 수업 같이 듣자 등등 아이는 여전한 인기를 구가하며 같은 학번끼리만 할 수 있는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그때 사람들은 본인 입으로 직접 듣는 어제의 후기나 주머니 속에 들은 휴대전화 번호 따위가 중요했을 것이다. 아이의 옆과 뒤에 비치된 우리는 이미 시선에서 벗어난 지 오래였다. 약간의 의아함은 있겠지만 그들 입장에서 우리 셋은 어떤 접점도 없었으니까. 나는 복작거리는 틈을 봐서 조용히 빠져나왔다. 뒤통수에 누군가의 시선이 따라붙는 것 같았지만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정문까지 도망쳤다.

그리고 의아함이 위화감으로 바뀐 것은 그다음 주, 월요일 2교시 신입생 공통 수업에서였다. 일찍 도착한 나는 구석진 자리에 혼자 앉아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동기들은 대부분이 무리였다. 고작 일주일 만에-환영회로부터는 나흘 만에- 벌써 무리를 짓기 시작했다. 무리와 무리 경계쯤에 끼어있을 때 뒷문으로 아이가 등장했다. 등 뒤에 그를 대동한 아이는 누군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렸다. 혹시라도 눈이 마주칠까 싶어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아이는 창가 뒷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당연히 아이의 곁에 앉았다. 그제야 그를 주목하는 몇몇 동기가 나타났다. 그러다 어느 순간, 선배들과 술자리가 잦았던 신입생 몇으로부터 카더라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신입생 환영회에 마지막까지 남은 신입생은 몇 없었다 카더라. 그중 한 명은 누군지 기억이 안 나는데(내 존재감을 알만한 대목이었다) 두 명은 쟤들이라 카더라. 그때 있던 선배가 그러는데 셋 다 돌아간다 해서 남겨두고 먼저 갔다 카더라. 걔들 다음 날 나란히 같이 왔잖아. 쟤도 있었어, 말은 안 하면서 2차 끝날 때까지 남아있던 애. 기억력 좋은 한 여학생이 나를 발견하면서 나마저 구설의 중심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때부터 카더라 통신이 소문이라는 날개를 달고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어쩜 그리 상상력들이 뛰어나신지. 시간이 지날수록 스토리는 다양해졌고, 얘깃거리가 아닌 일이 구설수로 변하기 시작했다. 끝내는 아침 드라마처럼 온갖 유추와 억측마저 범람했다. 그럴수록 내 고개는 점점 책상과 가까워졌다. 좋든 나쁘든 소문의 중심이 되는 일은 내게 불방석에 올라앉은 것처럼 부담스러웠다. 나는 언제나 조용하길 원했다. 그래 너라는 아이도 있었지 정도의 존재감을 가진 채 3군 라인에 서고 싶었다.

그때부터 나는 의식적으로 그들을 멀리하게 시작했다. 마주칠 만한 상황 자체를 피하려 했다. 어쩔 수 없이 마주칠 때면 되도록 짧은 인사로 대꾸했다. 잠시 어긋난 내 첫인상을 되돌리기 위해, 원래 내게 익숙한 위치를 찾기 위해 나는 열성적으로 도망쳤다. 그런 노력 덕분인지 소문은 점차 나를 제외한 둘에게만 집중되었다. 한 주가 더 지나니 아이 쪽에서도 내게 특별히 말을 걸지 않았다. 아이가 그러니 그도 당연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나를 배려한 셈이다. 나는 누가 봐도 알 만큼 뒤로 물러나려 했으니까. 말을 걸 때마다 노골적으로 시선을 돌리는 내 모습이 그들의 눈에 어찌 보였을지 뻔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소문은 무르익었다. 내가 빠진 만큼 가짓수는 줄었지만 깊이는 점점 진해졌다. 둘이 나란히 걸어가면 동기뿐 아니라 선배들끼리 수군거릴 때까지 일주일이면 충분했다. 그럼에도 아이는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줄 어떤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흘러갈 강물을 바라보듯 소문을 대했다. 아마 본인들에게 쉬쉬하는 것이 소문의 특성이기도 했지만 남에게 휘둘리지 않는 아이의 성격이 주된 요인이었을 것이다. 그도 원래 성격이 그런지 개의치 않아 보였다. 둘이 입을 다물자 이번에는 내게 둘의 사이를 묻는 상황도 생겼다. 그때마다 나는 무조건 모르쇠로 일관했다. 기껏 나왔는데 다시 휘말릴 수는 없지. 모든 정보가 막히자 사람들은 결국 저 둘이 사귄다는 방향으로 의견을 수렴했다. 흑심이 있는 몇은 끝까지 아니라고 했지만 대세는 그랬다. 그렇게 학기 초를 들썩이게 했던 에이스 스캔들은 어느 정도 잠잠해졌다. 비슷한 시기에 연달아 생긴 다른 커플에게 관심이 흩뿌려진 탓도 있었다. 나 역시 둘로부터 벗어나 혼자만의 학교생활에 적응해나갔다. 그러면서 그들에 대해 점점 잊어가기 시작했다.

세 번째 주쯤 되니 나는 거의 내 자리로 돌아왔다. 수업에 적응하느라 바쁘기도 했고, 공통 수업 외에는 그들과 거의 마주치지 않은 것도 있었다. 사실 신입생이 움직이는 동선은 거기서 거기라 지나가는 길에 종종 마주치기도 했다. 그때마다 내 쪽에서 먼저 그들을 피했다. 보통 아이는 개선장군처럼 앞만 보며 씩씩하게 걸었고, 그는 마치 경호원처럼 뒤에 붙어 따라왔으니 발견하기 전에 피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주사가 빚어낸 낯선 경험으로부터 2주가 지나갔다.





세 번째 주, 화요일



누군가 그랬다. 낮잠 15분은 밤잠 두 시간의 값어치를 가졌다고. 특히 햇살 아래서 엎드려 자는 쪽잠은, 특히 지루하고 알기 어려운 오전 수업 끝에 쓰러진 책상 위라면 어떤 후식보다 달콤했다. 함께 수다를 떨 친구가 없는 것도, 마땅히 할 일도 없이 빈둥거리는 것도 들키지 않으니 쉬는 시간을 보내기에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소매에 이마를 대고 설핏 잠이 들었을 무렵이었다. 체감 상 5분이나 지났을까. 책상 나뒹구는 소리가 먼저 울렸다. 강의실을 가득 메운 남자의 고함소리는 그보다 늦게 들렸다. 나는 경기하듯 잠에서 깼다. 서둘러 이어폰을 빼고 뒤를 돌아보니 사태는 이미 한창이었다. 강의실 뒤쪽에 일정 반경으로 아이들이 몰려있었다. 사람은 자신의 분란은 싫어하면서 남의 분란은 어찌 그리 관심이 많은지. 그러는 사람을 욕하는 나조차도 말이다. 졸음에 눌리는 눈을 억지로 잡아 뜨며 슬금슬금 사건의 중심으로 목을 뺐다. 큰 키는 이럴 때 좋다. 굳이 비집거나 양해를 구하지 않아도 되니까.

설마 하는 기분으로 아이들 뒤에 섰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이 교실에서 이만큼 큰 소동이 나면 왠지 다른 사람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아이들의 만든 야구장에 아이는 2루수였다. 그는 투수였고, 타석에는 환영회 때의 그 선배가 있었다. 또 저 사람이었다. 서글서글한 탈을 썼지만 파충류처럼 불쾌한 눈빛을 가진 사람. 마치 도마뱀 같은 사람. 주로 문제를 다시 만드는 사람은 전에 문제를 시작한 사람이라니까. 진상을 알기도 전인데 나는 단 두 번에 상대가 지겹다고 느꼈다. 나는 마음으로 도마뱀 선배를 이미 악당으로 점찍었지만 정황을 모르면 방관할 수 없는 성격이라 누군가에게 사정을 물어야 했다. 나는 뒷모습으로 사람들을 감별하기 시작했다. 되도록 말 걸기 쉬운 사람. 비웃지 않을 사람. 대답해줄 것 같은 사람. 나쁘게 한 마디로, 만만한 사람. 안타깝게도 그런 사람들은 나처럼 서있는 자세만으로 티가 났다. 나는 한쪽에 선 여학생에게 다가갔다. 여학생은 키가 크지 않아 경기장이 보이지 않는데도 앞선 사람들을 비집지 못하고 상체만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키가 크지 않았으면 나 역시 딱 저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나는 여학생의 어깨를 가볍게 찔렀다.


“무슨 일이야?”


어깨가 흠칫 올랐다가 내려왔다. 돌아선 얼굴을 본 순간, 나는 왠지 웃음을 터질 것 같았다. 화들짝 놀란 몸짓이나 당황한 표정까지 익숙한 모습이었다. 다른 사람의 눈동자에 비칠 내 행동. 사람 하나는 제대로 골랐구나. 나를 올려다본 여학생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달싹이는 입술은 아마 자기도 잘 모르겠다는 말을 하고 싶을 것이다. 내가 뭐라 되묻기도 전에 다시 우당탕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의 눈이 도로 경기장으로 향했다.


“손대지 마요.”


곧고 낮은 목소리였다. 타자였던 선배는 포수석쯤에 넘어져있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선배가 벌떡 일어났다. 흥분하지 않은 척 표정을 숨기지만 움켜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선배는 상대를 노려보면서도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선배가 움직이지 않으니 상대도 가만히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이가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됐어. 그만해.”


그가 아이를 돌아봤다. 아이는 차분한 척하는 얼굴이었다. 본심이 아니라 꾸며낸 것임을 나는 왜인지 알 것 같았다. 선배에게 힐끗 시선을 던진 아이는 고개를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가자.”


가방을 챙긴 그는 아이를 등에 달고 군중을 비집으며 자리를 떴다. 두 사람이 사라지니 경기장은 와해되었다. 뒤늦게 남학생 몇이 선배에게 다가갔다. 울긋불긋 얼굴색이 변하는 선배를 데리고 그대로 교실을 나갔다. 쫓아가는 건가. 순간 걱정이 들었지만 내 앞을 스쳐간 기척은 이미 껍데기만 남은 허세뿐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으로 남아있는 좁쌀 같은 자존심이라도 챙기려 하는, 이해할 수 있는 옹졸함이었다. 담배라도 피우러 갔겠지. 후배들이 데려가지 않았으면 창피해서 어떻게 나갈 생각이었을까.

난장판이 된 교실에 구경꾼들만 남았다. 몇몇 남학생들이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때 뒤늦게 들어온 학생이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다른 학생에게 사건의 전말에 대해 물었다. 질문을 받은 남학생은 여기저기 안 끼는 일이 없는 과의 마당발이자 정보통 같은 학생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몇이 남학생 곁으로 몰려들었다. 나도 은근슬쩍 그들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내가 어깨를 찌른 여학생도 내 근처에 슬그머니 앉았다. 그때부터 남학생이 꺼낸 이야기는 네가 외면했던 그들의 2주 전으로 되돌아갔다.


너도 알다시피 저 둘 그동안 소문이 많았잖아. 삼각관계부터 시작해서 둘이 사귄다 아니다, 사실 사촌이라는 둥, 무슨 하인이냐는 둥. 환영회 날 무슨 일이 있었느니 없었느니. 아무튼 이런저런 말이 많았어. 둘 다 이렇다 할 해명이 없어서 더 그랬고. 원래 그렇잖아. 이런 학과라는 울타리는 반쯤 폐쇄된 곳이라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빨리 퍼지는 거. 결국 친해진 몇몇이 아이한테 물어봤나 봐. 둘이 무슨 사이냐고. 아이는 아무 사이 아니라고 했대. 그럼 왜 그렇게 붙어 다니냐니까 그럴 일이 있다고만 했다는 거야. 남자 쪽은 뭐 대꾸도 잘 없고. 아이야 예쁘고 성격도 좋고, 누가 봐도 친해지고 싶은 타입이지만 쟤는 딱 봐도 사교성이 제로잖아. 왠지 말 걸기도 어렵고. 그래서 아이 말고는 인맥도 전혀 없대. 아무튼 시간이 지나면서 소문은 대충 그렇게 수습됐어. 아무리 물어도 아이는 같은 말만 하고, 쟤는 아무 말도 안 하니까. 사귀는데 안 밝히는 거다, 안 사귀고 그냥 같이 다니는 거다, 이렇게 둘로 갈라진 채. 뭐 여자들은 좀 낫지. 걔가 따라다니는 게 좀 불편하긴 하지만 아이와 얘기하는 데는 문제 없으니까. 문제는 남자들이지. 좀 거슬렸나 봐. 아이한테 접근하려는 애들이 많았는데 수문장처럼 지키고 서있으니까. 확실히 사귄다고 하면 포기라도 하겠는데 그것도 아니라고 하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계속 눈치만 보는 거야. 그래도 어쩌겠어. 걔가 일방적으로 따라다니는 게 아니라 아이가 거의 달고 다니는 분위기인데. 그래서 지금 여자애들은 친해지고 싶어도 약간 껄끄럽고, 남자애들은 아주 껄끄러운 상태야.


남학생의 말이 문득 끊겼다. 앞문을 본 학생들은 서둘러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새 쉬는 시간이 끝났는지 교수가 들어오고 있었다. 뒤늦게 교실 상태가 떠올랐다. 철렁한 마음에 돌아보니 교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멀쩡해졌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누군가가 치운 모양이었다.

나는 안도와 아쉬움이 섞인 마음으로 자리로 왔다. 남학생의 회고는 어느 정도 예상 범위 안이었다. 여학생들은 그렇다 쳐도 남학생들은 몸이 달았을 텐데 용케 참았네. 밤에 모여 술을 마시며 얼마나 그를 욕했을까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정작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못 들었는데. 그때 익숙한 등이 눈에 들어왔다. 우습게도 작고 동그란 등은 내 대각선 앞,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있었다. 그 여학생이었다. 아까까지는 배경이었는데 말 한마디 나눴다고 아는 등이 됐다. 나는 어떤 생각을 하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그 등을 찔렀다. 흠칫 놀란 어깨가 위로 솟았다. 겁먹어 돌아보는 폼은 여전했다. 하루에 두 번이나 미안. 나는 최대한 사교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저기 미안한데, 혹시 아까 일 처음부터 봤어?”


여학생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작게 끄덕였다.


“나도 완전 처음부터는 못 봤는데.”


여학생의 회고를 재구성하면 이랬다. 그 선배는 십 분 전쯤 갑자기 뒷문으로 나타났다. 내가 잠든 직후였던 것 같다. 그때 그는 자리를 비워서 아이 혼자였다. 아이 앞에 선 선배는 대뜸 같이 나가자고 했다. 아이는 고민도 없이 거절했다. 둘이 얘기하는 것을 들어보니 전에도 몇 번 그런 적이 있던 것으로 보였다. 처음은 둘 다 웃는 얼굴이었는데 점점 분위기가 안 좋아졌다. 아이가 계속 거절하니까, 선배가 갑자기 아이 손을 잡고 일으켰다.

거기까지 들었을 때 입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우리 도마뱀 선배께서 용기와 민폐를 혼동했나 보다. 여기서부터는 왠지 구차한 남자에게 어울릴 법한 뻔한 스토리였다.

다시 회고를 이어가면, 그때는 쉬는 시간 초반이어서 대부분 나가고 몇 명 없었다고 했다. 게다가 뒷자리여서 앞쪽 애들은 다들 자거나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고. 그때 그가 들어왔다. 선배와 아이를 발견한 그는 처음 가만히 서있었다. 분위기를 파악하려는 듯이 잡힌 손목과 얼굴을 번갈아 살폈다. 혹은 무엇을 기다리는 사람 같기도 했다. 선배는 처음에 넌 뭐냐는 식으로 쳐다봤지만 그가 가만히 있으니 금세 무시하고는 아이에게 다시 나가자고 했다. 그때 처음으로 아이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굳은 얼굴로 한 마디, ‘놔’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남자애가 선배를 발로 차 버렸어.”


여기까지 들으니 전체적인 그림이 맞춰졌다. 오늘은 일단락된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문제는 왠지 줄어들지 않고 점점 커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선배가 생각보다 그릇이 작지 않다면 일을 크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다만 보통 그런 사람은 상상보다 훨씬 밑돌기 마련이니까.

여학생이 진술을 마쳤을 때, 그간 출석부를 쥐고 자리를 훑던 교수가 안경을 추켜올리며 말했다.


“두 자리가 비는데, 어디 갔나?”


순간 분위기가 잔뜩 쪼그라들었다. 돌아보니 선배를 데리고 나갔던 애들은 이미 돌아왔다. 아이와 그의 자리만 비어있었다. 나가는 품새를 보아 다시 돌아올 것 같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모르니 누군가 일단 화장실이라도 갔다고 말해주지. 나는 초조하게 다른 얼굴들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대꾸가 없자 교수가 뭐라 말을 덧붙이려고 했다. 그때 누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교수와 눈이 마주쳤다. 당황한 마음에 주변을 둘러봤다. 앞에 앉은 여학생이 왜 일어났냐는 눈으로 나를 돌아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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