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그냥 55,000원만 주세요."
시간의 흐름은 언제나 버겁다.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는 듯하면서 동시에 많은 것을 남기고 간다. 주시하면 느려지고 외면하면 빨라진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면 주변을 둘러봐야 할 만큼 먼 곳으로 나를 데려다 놓는다. 무엇을 얻었고 놓쳤는지 돌아볼 약간의 여유만 남기고서 말이다. 똑바로 보려 하면 발밑을 흔들고, 보폭을 맞추려 하면 저 혼자 달려가 버린다. 어린아이의 장난처럼 유치하고 고약하지만 늘 거기에 휘둘린다. 그러다 보니 이 나이였고, 이곳이었다.
세 번째 주, 화요일
나는 지금 정신이 반쯤 빠져있었다. 불과 1시간 전에 책상이 나뒹구는 액션 신을 봐서가 아니었다. 교수와 난데없는 눈싸움을 해서도 아니었다. 지금 나는 멍청하게 복도를 걸으며, 방금까지 열댓 번은 더 했을 행동을 다시 하는 중이었다.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그곳에 선명하게 찍혀 있는 ‘소리’라는 이름을 들여다보는 일.
누가 먼저 번호를 물어봤어.
걔였다. 어깨의 그녀. 겁이 많은 그녀. 호기심에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인 손가락 하나가 내게 상상 이상의 무엇을 돌려보내 줬다. 번호 알려줄래? 주섬주섬 건너온 것은 맹세코 휴대전화를 사고 나서 처음으로 들어본 말이다. 중학교 때는 번호를 주고받을 친구가 없었고, 고등학교 때 그나마 얘기하고 지내던 몇에게는 내가 먼저 달려가 번호를 뿌려댔다. 남자 친구는 고사하고 아는 남자도 없었다. 길에서 누가 말이라도 붙이려고 하면 그것이 우체국의 위치를 묻는 것이든 도의 존재를 찾는 것이든 도망가기 바빴다. 지금껏 그렇게 살았다. 그래서 몹시 창피하지만, 지금 내 또래에게 너무 익숙할 일에 혼자 이렇게 방방 구름 위를 걷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쪽에서는 이만큼의 의미부여 없이 가볍게 한 말이겠지만.
이 상황과 맞닥뜨린 것은 그래서였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좌우도 살피지 않고 걸었을 리가 없었을 테니까. 그렇다고 소리를 원망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 모든 죄는 다 나에게 있었다. 정신을 팔고 걸은 것도, 도서관에 가기 전 음료를 사러 휴게실에 들린 것도, 안에 누가 있나 살펴보지도 않고 무작정 들어온 것도.
외나무다리 위는 굳이 원수가 아니라도 누군가와 마주치기 좋은 장소는 아닌 듯싶다. 좌우로 통유리가 붙어있는 문이 하나뿐인 휴게실. 따듯한 보리차나 마실까 찾아간 곳에 그는 나보다 먼저 음료를 뽑고 있었다. 순간 문 앞에서 몸이 굳어버렸다. 동시에 머리에서 빨간 비상등이 정신 사납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쩌지. 도망칠까. 아니 내가 왜? 나도 이 공간을 이용할 권리가 있는데. 그래, 도망치자!
생각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왼발이 뒤로 빠졌다. 마침 고개를 돌린 그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대로 굳었고 그는, 별 감흥 없어 보였다. 마치 어제 보고 오늘 또 보는 눈빛이었다. 인사를 할까 말까 머뭇거리던 나는 도로 왼발을 집어넣으며 경례라도 하듯 손바닥을 번쩍 들었다. 내가 아는 척을 하자 그의 미간이 좁아졌다. 아까 일로 아직 기분이 안 좋은 걸까. 그냥 지나쳤어야 했나. 손을 내릴지 말지 고민하고 있을 때 그가 슬쩍 손을 들어 인사를 대신했다.
“커피? 콜라?”
설마 내 이름을 물어보는 것은 아니겠지. 난 카페인도 탄산도 좋아하지 않으니까.
“아니면 너도 알로에?”
“아니 난 보리차.”
무심한 박력에 나도 모르게 뽑으려 했던 음료 이름을 댔다. 말하고서 아차 했지만 그는 이미 커피도 콜라도, 심지어 알로에도 아닌 보리차를 누르고 있었다. 보리차를 마시면 취하는 체질이라고 거짓말을 할까. 말도 안 되는 핑계를 찾고 있는데 그가 눈짓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야구장에서나 봤을 법한 일렬의 의자들이 놓인 쪽이었다. 뭐 어쩌라고. 앉으라고? 됐어. 난 그냥 그것만 받고 갈 거야.
“고마워.”
어느새 의자에 앉은 나는 그가 내민 보리차를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았다. 그는 곧이어 수염 차와 알로에를 뽑고는 내 근처 어디쯤에 서서 수염 차를 마셨다. 알로에는 아이 것인가 보다.
“오랜만에 보네.”
뭐라고 대꾸해야 하지. 난 방금 봤는데. 아니 그런 거 말고. 무슨 말을 해야 하지. 굳이 앉힌 것을 보니 말이 길어질 모양이다. 내심 머릿속에서 예상 질문을 예닐곱 개쯤 뽑아냈을 때 그는 무난하게 대화를 시작했다.
“수업 지금 끝났어?”
“어, 응. 인문학, 저기 304호에서 하는.”
왜 변명하듯 말하고 있는 걸까. 과목과 교실까지 곁들여가면서. 내 말에 그의 눈에 잠시 이채가 돌았지만 확인할 새도 없이 금세 사라져 버렸다.
“그럼 이제 집에 가?”
“아니, 리포트가 많아서 도서관에 잠깐.”
그 문답을 끝으로 그는 말이 없었다. 주름 잡힌 시간이 조마조마하게 흘러갔다. 초초한 마음으로 보리차를 한 모금 넘겼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리포트 열심히 써.”
“어? 어, 너도.”
무난하게 시작된 대화는 그대로 끝이 났다. 긴장한 탓에 불쑥 내뱉어버린 ‘너도’라는 말에 그는 잠시 의아한 표정을 보였으나 이내 별 일 아닌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휴게실을 나갔다. 마치 뽑아놓고 챙겨가는 것을 잊어버린 음료수처럼, 멀어지는 등을 보며 나는 휴게실에 홀로 방치되었다. 설마 이게 끝? 내 심장을 조를 질문이나 엉뚱한 말도 없이? 1분 만에 10분이 흐른 기분이었다. 돌이켜보면 음료수를 하나 얻어먹고 몇 마디 한 것뿐인데 학과장과 면담이라도 한 것처럼 등이 축축했다. 난 도대체 뭘 기대한 걸까. 친하고 아니고를 떠나 그는 참 대하기 어려운 타입이었다. 결국 그가 준 보리차를 전부 비우고 나서야 휴게실을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한 번 틀어진 예상은 연달아 빗나갔다. 오늘은 더 이상 마주치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곧 다시 보게 되리라 생각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오늘 이 만남은 단순한 우연이었고, 막연히 나중 언젠가 또 보겠지 하고 넘겼다. 하지만 절벽처럼 서 있다가 파도처럼 떠난 그를 다시 본 것은, 정확히는 그를 대동한 아이의 그림자가 내 리포트 위로 드리워진 것은 그때부터 정확히 20분이 지난 후였다.
마치 다른 세계로 온 것만큼 긴 시간이었다. 지금껏 빠진 번호 없이 전철의 호선들을 고루 환승하며 살았지만 4호선의 마지막까지 온 것은 처음이었다. 이런 곳까지 연결되어 있나 싶게 창밖의 풍경은 계속 바뀌어갔다. 결국 역 하나가 이렇게 길어? 싶은 구간을 지나고 나서야 종점에 도착했다. 어제까지는 문자로만 알던 장소. 역을 벗어나니 당연한 말이지만 난생처음 보는 동네였다. 역사도 건물들도 멀쩡히 서있지만 왠지 허허벌판 같은 서쪽 땅의 끝. 역 앞 주차장에서 아이는 부는 바람에 코트를 여미고, 그는 습관처럼 아이 곁에 자리를 잡고, 나는 그냥 멍하니, 그렇게 우리 셋은 나란히 섰다.
“여기 와본 적 있어?”
“예전에 한 번.”
“바다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해?”
“버스가 있어.”
그의 손끝이 향한 방향으로 아이는 대뜸 출발했다. 서로 끈이라도 연결된 것처럼 연달아 그와 나까지, 나란히 섰던 우리는 일정한 간격으로 아이 뒤를 쫓았다. 작은 삼거리 건너편에 사람 몇이 모여 있는 버스 정류장이 보였다. 마침 버스가 들어오는 중이었다. 아이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몇 번?”
“저거.”
그가 지금 들어오고 있는 버스를 가리켰다. 아이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횡단보도의 신호는 아직 빨간색이었다.
“기다리는 거 싫은데.”
아이가 작은 혼잣말을 하며 무언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릴 때 그는 튀어나갔다. 내가 어어 하는 사이, 그는 빨간불을 밟으며 몇 없는 차들 사이로 건너갔다. 아니 쟤가 갑자기 뭐 하는 거야. 놀랄 새도 없이 그는 건너편에 도착했다. 그때 횡단 신호도 초록불로 변했다.
“가자.”
아이의 웃는 얼굴에 끌려 도로를 건넜다. 그는 버스 앞쪽 출입구에 한 발을 올려놓고 몸을 더듬는 중이었다. 학생 빨리 타. 기사의 고함 소리가 버스 꼬리까지 울렸다.
“어, 지갑이…….”
“아까 나한테 줬잖아. 세 명이요.”
그의 어깨를 가볍게 치는 아이의 표정을 보니 맹세코 저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기사의 마뜩잖은 표정에도 아이는 그저 생글거리는 얼굴인데. 결국 삑 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반쯤 꺼낸 지갑을 손에 쥐고 버스 안으로 떠밀렸다. 뿔난 기사의 급출발에 우리는 손잡이 대신 그에게 매달려 버스 맨 뒤까지 흘러갔다. 잔뜩 굳은 나를 먼저 구석에 밀어 넣고, 그 옆에 아이를 앉힌 그는 마치 안전봉처럼 통로를 막아섰다. 지금 내 현실은 비디오 빨리 감기 같았다. 또래 남자의 어깨를 처음 잡아봤지만 그것을 깨달을 틈도 없이 사건이 휙휙 지나가다 멈췄다. 갑자기 아이가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어? 왜?”
난가. 나 때문인가. 내가 뭐 잘못했나. 내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아이의 시선은 나를 튕겨서 그에게 향했다.
“갑자기 튀어나갈지 몰라서.”
아이의 웃음 섞인 대답에 그의 입에서 낮은 침음이 흘러나왔다.
“덕분에 안 기다리고 바로 가게 됐네.”
아이가 그의 소매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의 입 꼬리가 조금 내려갔다. 기분이 안 좋나. 곁눈질로 안색을 살피는데 그의 왼쪽 볼우물이 살짝 씰룩거렸다. 얇은 무표정 아래 숨겨놓은 진심이 순간 드러났다. 그는 지금 기분이 좋은 것이다. 자존심 센 고양이 같이. 그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재빨리 무표정 한 겹을 덮었다. 그 모습에 나 역시도 짧은 웃음이 터졌다.
버스는 금세 몇 정거장을 지나갔다. 그러다 뒤늦게 깨달았다. 버스를 탈 때부터 지금까지 아이의 손을 잡은 채였다. 알아차리고 나니 온 신경이 그쪽으로 쏠렸다. 어쩌지. 계속 잡고 있어야 하나. 슬쩍 뺄까. 그러면 기분이 상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계속 잡고 있는 것도 이상했다. 아이는 어떨까. 지금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살짝 물어볼까. 뭐라고 물어봐. 그게 더 궁색했다. 그냥 있을까. 아니면 자연스럽게 놓을까.
생각이 꼬리를 물고 뫼비우스의 띠로 이어졌다. 그러다 보니 시간은 훌쩍 지났다. 열 정거장쯤, 체감 상으로 20분 정도 흐른 듯했다. 다음이 내릴 곳이라는 방송이 나왔다. 그때까지 내릴 때와 내린 후의 손동작을 시뮬레이션하고 있는데 아이가 먼저 손을 놓았다. 왠지 안도와 아쉬움이 동시에 치밀었다. 아이가 내 손을 자신의 허벅지에 문지르기 시작했다. 내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땀났다”라며 내 손바닥에 촘촘히 박힌 땀을 닦아냈다. 그 웃는 얼굴에 부끄러움이 확 달아올랐다.
“아니 나 원래는 땀이 많은 체질은 아닌데.”
“계속 잡고 있어서 그런 거잖아. 나도 났어.”
아이는 태연한 얼굴이었다. 어느새 그가 내민 손수건을 건네받아 내 손을 꼼꼼히 닦았다. 쟨 이걸 또 언제 꺼냈는지.
“여기야?”
미지근한 어조에 그는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의 눈에 얼핏 스친 실망을 보았는지 약간 난처한 얼굴이었다. 양쪽 마음을 다 알 것 같았다. 나 역시 예상과 현실의 괴리에 당황하던 차였으니까. 서해 바다니까 시야가 트이는 갯벌에 낮은 파도가 밀려오는, 시간 상 황금 거북이의 등딱지 같은 해변을 생각했었다. 그리고 횟집이 좀 있겠지, 딱 그 정도.
하지만 막상 도착한 이곳은 마치 도심 한복판 같았다. 디귿 자로 꺾인 모든 곳은 아스팔트로 덮여있었다. 손발에 닿을 모래 한 줌 없었다. 도로와 바다 사이에 높게 올린 계단식 구조 탓에 버스에서 내린 곳에서 바다조차 보이지 않았다. 좁은 길 맞은편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휘황찬란한 횟집으로 가득했다. 그 뒤쪽은 주택과 빌라가 섞인 그냥 동네였다. 목가적이거나 전원적인 느낌은 전혀 없고, 어촌 특유의 맹숭맹숭한 너른 땅도 없는 도시의 끝자락. 단지 앞에 바다가 있을 뿐이었다. 아이가 느낀 것도 그런 점이었는지 주변을 둘러보는 얼굴이 아쉬움이 가득했다.
“좀 더, 갯벌이거나 바다일 줄 알았는데.”
그도 예전 기억과 많이 달랐는지 뭐라 대꾸가 없었다. 나란히 실망한 것은 똑같았지만 회복은 아이가 가장 빨랐다. 대낮부터 알전구가 번뜩거리는 간판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아스팔트 계단을 밟고 위로 올라갔다. 불어온 바람이 아이의 머리와 옷자락을 흔들었다. 냄새를 맡는 것처럼 아이는 숨을 크게 들이셨다.
“그래도 바다는 바다네. 올라와봐. 여기서 보면 좀 괜찮다.”
그가 먼저 움직이고 나도 뒤따라 올랐다. 끝까지 오르니 그제야 바다가 보였다. 오른 만큼 다시 내리막에 있고, 그 앞은 철제 차단 봉으로 막혀있었다. 그 너머 바다가 보였다. 그마저도 반대편에 송도가 보여서 강이나 호수 같았다. 뻘 위로 조금씩 밀려드는 바닷물이 아니었다면 차에서 자다 깬 사람은 바다인지도 모를 것 같았다.
하지만 만족하기로 했는지 아이의 표정은 맑게 풀려있었다. 아이가 먼저 멀리 보이는 하얀 나무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우리도 아이의 뒤를 따랐다. 아이와 그와 내가 일렬로 걷는 기차놀이. 말없이 앞장서던 아이는 바다가 아닌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까 우리가 올랐던 것과 같은 계단이 걸어가는 군데군데 있었다. 계단 아래쪽에 뚜껑이 열린 작은 우체통 같은 것이 보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담배꽁초가 꽂혀있었다. 아이의 시선이 거기에 멈춰있었다. 그걸 확인한 그는 홀로 계단을 내려갔다. 아이는 그를 두고 계속 걸음을 옮겼다. 나는 누구 곁으로 붙어야 할지 잠시 망설이다가 그냥 아이의 뒤를 계속 쫓았다. 걷다 보니 아이의 걸음이 조금씩 느려졌다. 앞서가던 등이 가까워지는 것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걸음을 늦춰 간격을 벌렸다. 그럼에도 아이의 등은 다시 다가왔다. 나도 보폭을 더 좁혔다. 잠시 후 우리는 걷는 건지 끌려가는 건지 모를 속도로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결국 걸음을 멈춘 아이가 이쪽을 돌아봤다. 잘못한 것은 없는데 움츠러드는 기분이었다. 얼마간 내 얼굴을 들여다보던 아이는 웃으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멈춰 선 내게 바짝 다가온 아이는 어깨를 붙여 나를 밀고 나갔다. 당황한 내가 어어 하는 사이 걸음이 빨라졌다. 우리는 어느새 어깨를 붙이지 않아도 보폭을 맞춰 나란히 걷고 있었다. 아이가 바다 쪽에, 내가 도로 쪽에 서서 얼마간 그렇게 갔을까. 멀리서 봤던 하얀 나무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실제 나무가 아니라 철제로 만든 모형이었다.
“갑작스러워서 놀랐지?”
내내 말이 없던 아이가 불쑥 물었다. 뭐에 놀랐다는 건지. 몸통뿐인 질문에 의식이 점점 이전으로 흘러갔다. 방금 보폭과 아까의 버스, 전철과 마을버스를 거슬러가던 생각은 도서관을 지나 강의실에서 멎었다. 아니, 거기는 너무 멀리 갔고. 나는 어찌 대답할지 망설이다가 그냥 내키는 대로 대꾸했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미안해.”
아이는 내가 아닌 정면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오히려 편했다.
“내가 약간 자기중심적인 부분이 있어서, 처음 만나는 사람은 종종 당황할 때도 있어.”
나는 두 가지 의미로 작게 수긍했다. 네 말에 동의한다는 점. 그리고 너처럼 예쁜 애들은 대부분 그렇다고 점.
“그래도 많이 참은 거야. 사실 그 날부터 너랑 친해지고 싶었어.”
“그 날?”
내 눈이 동그래지자 아이는 “환영회 때”라고 덧붙였다.
“너랑 같이 와서 좋다. 계속 바다가 보고 싶었거든.”
아이는 나무 주변으로 둥그렇게 둘러놓은 난간에 기대서 바다를 바라봤다. 나는 아이 곁에 서서 여기 오는 동안 서른 번쯤 고민했던 질문을 했다.
“오후에 수업 없었어?”
“오늘 오후엔 딱히 들을 게 없잖아.”
아이는 걸어온 길로 힐끗 시선을 던졌다. 그가 느린 걸음으로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아까 와서 알려주더라고. 너 도서관 갔다고. 그래서 너도 오후 수업 없구나 했어.”
그때 아이가 기대선 난간 아래에서 검은 물체가 휙 솟아올랐다. 날개를 활짝 펼친 품이 독수리처럼 거대한 갈매기였다. 코앞에서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온 그림자에 아이가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나도 모르게 옆으로 넘어지려는 아이를 안았다. 키 차이만큼 품에 옴폭 들어왔다. 달려온 그가 손을 저어 주변을 오가는 갈매기를 모두 쫓아냈다. 얜 어느새 여기까지 달려왔어. 아이는 근처에서 갈매기가 모두 사라지고 나서야 고개를 배꼼이 들어 올렸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진하게 웃었다.
“우와. 진짜 놀랐다.”
동그랗고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바로 앞에서 보니 괜히 마음이 두근거렸다. 같은 여자가 봐도 정말 예쁘구나. 주변 하늘을 살핀 아이는 “고마워”라고 말하며 품을 벗어났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멀어지려는 듯 난간으로부터 물러났다. 그는 뒤따르며 아이의 이곳저곳을 꼼꼼히 살폈다. 괜찮은지 열두 번쯤 묻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다.
“괜찮아.”
애 멀쩡해. 넘어지지도 않았는데. 괜찮네 마네 그러는 모습을 뒤따르며 나는 속으로 웃었다. 우리가 자리를 떠나자 그의 손에 날아올랐던 갈매기들이 아이가 있던 난간에 내려앉는 모습이 보였다. 원래 그들의 자리였나 보다.
참 묘했다. 처음에는 그저 첫눈에 반한 여자에게 들이대는 남자와, 그런 남자를 어장 관리하듯 곁에 두는 여자쯤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가까이서 본 둘은 그런 일반적인 관계와는 많은 것들이 달라 보였다. 몹시 가까운 것 같으면서도 서로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고, 일방적인 것 같으면서도 묘한 균형이 잡혀 있었다. 하지만 상반적인 요소들이 모두 자연스러움 위에서 이루어졌다. 바람을 맞으며 앞서 걸어가는 아이와 뒤를 경호하듯 따라가는 그에게 둘을 제외한 외부로부터 서로를 보호하는 관계가 고착된 것 같았다. 순간 그게 어떤 관계인지, 저 둘을 붙여놓는 것이 어떤 법칙인지 몹시 궁금해졌다.
멍하게 바라보는 사이 둘은 갈라졌다. 그는 인근 편의점 안으로 사라졌다. 내 옆으로 온 아이는 콘크리트 바닥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 행동에 거리낌이 없어서 나도 따라 쪼그려 앉았다. 사람이 없는 적막한 바다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바람과 씻어주듯 가슴을 긁어가는 파도만 가득했다. 이래서 사람들은 힘들 때 바다를 찾나 보다. 예민했던 촉을 무디게 하고 팍팍해진 마음을 적셔주는, 그래서 꺼내기 어려운 말도 쉬이 흘려보내며 타인과 묘한 동화를 도와주니까. 아이와 함께 휑한 바다에 시선을 던지며 내가 먼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첫날 말이야.”
계속 말하라는 듯 아이는 조용히 듣고 있었다.
“우리 처음 만난 날, 신입생 환영회 때. 그날 밤에 무슨 생각으로 따라간 거야?”
내 말에 아이는 갑자기 골똘해졌다. 그 문제에 대해 처음 생각해보는 것처럼. 혹시 아무 생각 없었던 것 아닐까. 점점 불안해하는 나와 달리, 조금씩 촘촘해지던 아이의 표정은 어느 순간 답을 찾은 듯 밝아졌다.
“아!”
“아?”
무심코 따라한 날 보며 아이가 배시시 웃었다. 그래, 방금 내 표정 굉장히 바보 같았을 거야.
“난 엄마한테 물려받은 재능이 하나 있는데.”
아이는 근처 작은 돌조각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설명을 도우려는 듯 바닥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돌조각이 지나가니 회색 바닥에 하얀 선이 생겨났다.
“난 사람을 구분할 줄 알아. 상대가 평소 어떤 사람인지, 무슨 생각인지 그런 건 몰라. 하지만 특정 상황에서 99의 대다수인지 1의 극소수인지를 알 수 있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선이 자연스레 그림 쪽을 향했다. 블록 초콜릿처럼 직사각형이 있고, 지금 아이가 덧 그리는 선이 한 귀퉁이를 조그맣게 잘라냈다. 마치 이빨로 모서리를 조금 떼어먹은 것처럼.
“사람을 유형별로 나누면 어느 유형이든지 간에 다수와 소수로 나뉘어. 처음은 둘 이상의 여러 유형들로 산재되지만, 이걸 또 비슷한 것끼리 계속 묶어 가다 보면 결국 99의 대다수와 1의 극소수만 남게 돼. 신기한 건 어떤 기준으로 나눠도 극소수는 반드시 생겨. 유형은 절대 100퍼센트가 될 수 없다는 말이야. 당연하지. 집단은 독립 객체들의 군상이지, 집단 자체로 단독 군체가 될 수 없으니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든 1이 아닌 99에 머물러. 90대 10에서는 10이던 사람도, 99대 1이 되면 99로 넘어가게 돼. 인간은 본능적으로 다수 쪽에 서도록 프로그램되어있고, 기본적인 교육 역시 그렇게 받으니까. 근데 드물지만 특정 상황에서 1인 사람이 있어.”
전부 한국말이고 모르는 단어는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설명을 듣는 내내 느낌표와 물음표가 교차되었다. 말을 더 이어가려던 아이는 울 것 같은 내 표정을 보더니 미안하게 웃었다.
“1인 사람은 극소수로 살아남기 위해, 생존이 필요한 재능을 하나씩 가지고 있어. 내게는 나와 같은 사람들, 즉 1의 극소수를 알아보는 능력이야. 50대 50이면 상대가 어느 쪽인지 몰라. 70대 30일 때도, 90대 10일 때도 모르고. 근데 99 대 1이라면 나는 상대가 어느 쪽 사람인지 알 수 있어.”
그게 어떻게 재능일까. 그런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아이는 말을 이었다.
“상황을 특정하면 99의 성향을 알 수 있거든. 그럼 1은 재밌게도 정확히 반대 성향을 보여. 그날 집에 가자고 말할 때 쟤는 그 1의 눈을 하고 있었거든.”
우리의 눈이 자연스레 옆으로 향했다. 그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람을 등지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펼친 지갑을 들여다보다가 바람의 방향이 바뀔 때마다 연기를 이쪽으로 보내지 않으려는 듯 팔을 휘젓는 모습이 보였다. 말수가 적다는 것과 아이에게 헌신적인 점을 빼면 나는 아직도 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 채였다. 아이가 말한 극소수란 무엇이고, 그는 어떤 기준에 의한 1일까. 아이는 그날 밤 짧은 시간 동안 그의 눈에서 무엇을 들여다본 걸까.
“쟤는 어떤 1이야?”
“그건 몰라. 내 능력은 나눌 뿐이지 집단에 이름을 붙이지는 못하거든.”
“그럼 극소수라는 이유만으로 따라간 거야?”
“그 상황에서 대다수의 남자가 어떨지 뻔하니까. 그 반대면 괜찮지 않을까 했지.”
처음 만난 남자의 집에 따라가기에는 너무 대충인 이유였다. 그런데 뭐랄까. 근거는 부족하지만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그런 1인 사람이 많아?”
“많은 게 아니라 어렸을 때는 전부 그랬어. 내가 본 모두가 어떤 상황에서는 1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지. 근데 나이를 먹을수록 99쪽으로 빠르게 넘어가서 이젠 꽤 드물어. 지금까지 1을 유지하는 사람은 상황에 따라 아주 나쁘거나 혹은 아주 좋거나 하니까, 난 그때그때 맞춰서 피하거나 다가가면 돼.”
“그럼 위험하지 않아?”
“위험?”
“보통 극소수는 좀, 위험하거나 그러지 않나?”
“꼭 그렇지도 않아.”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쥐고 있던 돌조각을 직사각형의 넓은 쪽에 내려놨다.
“좋고 나쁨도, 옳고 그름도 머릿수로는 나눌 수 없어. 오직 상황에 따른 거지.”
아이는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다.
“물론 모든 1은 다른 1에게 여러모로 위험한 존재지. 영역이 겹친 맹수들처럼.”
아이가 내민 손이 눈앞에서 멈췄다. “배고프다, 칼국수 어때?”라며 웃었다. 떨어지던 해를 등진 아이는 조금 낯선 표정이었다. 실루엣은 웃고 있지만 평소 반짝거리던 눈이 암울하게 가라앉은 듯 보였다. 역광이라 그렇겠지. 나는 조금은 불안하고 또 약간은 들뜬 마음으로 아이의 손을 잡았다. 날 일으킨 아이는 천천히 해안가를 벗어나 도로로 내려갔다. 그는 이미 아이의 뒤에 따라붙고 있었다.
“이렇게 설명해 보는 건 처음이야.”
얼마 먹지도 않은 배를 두드리던 아이가 불쑥 말했다. 나는 마침 음식점 앞에서 체기를 다스리던 중이었다.
“밥 먹기 전에 물어봤던 거. 그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었거든.”
명치 부근에 진액처럼 고여 있던 체기가 구슬 같이 뭉쳤다. 나 혹시 실수한 건가. 바다의 기세에 취해 평소답지 않게 굴기는 했다. 굳은 기운이 전해졌는지 아이는 금세 웃었다.
“아니야. 좋았어. 지금까지 내 주변은, 내가 무슨 말을 하건 다 좋다고 하거나, 상관없이 인정하거나, 아니면 이해 없이 받아들여주는 사람뿐이었거든.”
그게 뭐가 문제일까. 내 주변은 무슨 말을 해도 일단 부정하거나, 욕하며 비난하거나, 혹은 관심 없이 무시하는 사람뿐이었는데. 불시 들춰진 과거에 좌절할 틈도 없이 아까의 문답이 머릿속을 스쳤다.
“혹시 나도 그 1이야?”
아이는 당연하지 않느냐는 표정이 되었다. 그럴 리가. 나는 생존에 필요한 어떤 재능도 가지고 있지 않는데. 솔직한 심정이 얼굴로 번졌다.
“난 굉장히 이기적인 사람이라, 내가 관심 없는 쪽은 절대 손을 안 뻗어.”
다가온 아이는 양손의 검지를 세웠다. 웃는 표정을 만들 듯 내 양쪽 볼을 눌러 올리며 “그때 나 때문에 다시 돌아왔지?”라고 덧붙였다. 확신에 찬 말투였다. 알고 있었구나. 그럼 그때 나는 이미 이 아이에게 분류되었을까. 아이는 먼저 천천히 걸어갔다. 앞서는 등을 보며 여러 기억들이 떠올랐다. 다음날 아침에 봉두난발이던 나를 붙잡던 모습부터 다음 월요일 등장부터 누군가를 찾는 모습까지. 시선이 마주치면 달처럼 웃던 모습과, 내가 고개를 돌리면 굳이 와서 따지지 않던 모습까지. 그리고 오늘 도서관의 만남과 전철의 모습까지 연달아 떠올랐다.
‘친해지고 싶었대.’
‘왜?’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어깨를 움츠렸다. 조금 뒤에서 둘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전철에서 들었던 그의 말이 벌처럼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랑 친해지고 싶었다니, 왜? 평생 쌓기만 한 의문이 먼저 튀어나왔다. 나 같은 아이와 친해지고 싶은 마음은 어떤 걸까. 나는 남을 부러워하는 일 말고는 뭐 하나 잘하는 것 없는, 타산지석의 산주인일 뿐인데. 문득 손끝에 딱딱한 모서리가 걸렸다. 무심코 꺼내 습관처럼 버튼을 눌렀다. 오늘 하루 백번은 더 봤을 그 이름. 조금은 낯설고 약간은 쑥스럽게 손을 내민 소리의 얼굴이 떠올랐다. 왜인지 쥐고 있는 휴대전화가 따듯하게 느껴졌다. 소리의 행동도, 아이의 말도 어쩌면 가볍게, 별생각 없이 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반대로, 지금 나는 처음인 낯섦을 회피하기 위해 그들의 진심을 매도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내내 도망쳤던 버릇으로 소리의 의지를 무마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 것이 아니라고 미리 도장을 찍으며 아이의 마음을 곡해하고 있지 않을까. 휴대전화를 넣고 고개를 들었다. 숟가락을 내려놓자마자 사라졌던 그도 어느새 아이 뒤로 돌아와 있었다.
나는 지금 자신과 타인에게 정당한 평가를 받고 있을까. 지금껏 스스로에 대한 진단은 늘 잔혹하기만 했다. 타인의 선고는 그보다 못하지 않았다. 단점은 장점을 밝고 서있었고, 못난 부분이 예쁜 부분을 덮고 있었다. 만져질 듯한 주변의 칼날 같은 시선과 공공연한 냉대에 더 이상 상처 받을 자리도 없었다. 그렇게 인내와 양보를 강요받았다. 누구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뒷걸음질부터 했다. 사람만 만나면 고개든 어깨든 숙이고 들어가는 것을 미덕처럼 여기며 평생을 살아왔다. 그런 나는 스무 살의 별세계로 넘어와서도 여전하다. 속속히 들러붙은 습관들은 어쩌면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천성이라는 테두리 안에 굳어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휴대전화를 쥐고 있는 오른손이 따듯해서일까. 아니면 땀에 젖었던 왼손이 포근해서일까. 아니면 가끔이라도 눈이 마주치면 멸시나 비하 없이 곧게 바라보는 일자눈썹이 든든해서일까.
그 순간, 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어쩌면 여기겠구나. 지금 이곳이 갈림길일 수도 있겠다. 어제와 작년과 여전히 똑같던 오늘의 내가 내일 다를 수 있는 가능성은, 손 안과 눈앞에 있는 그들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미약한 깨달음이 알량한 변화를 일으킨다. 흔들리는 변화가 얇고 허술한 생각의 길을 만들어낸다. 오늘 소리와의 대화가 없었다면 번호를 주고받는 일도 없었겠지. 그 일이 없었으면 여기서 아이에게 한 마디도 묻지 못했을 거야. 아이의 재능을 듣기 전에는 무섭기만 한 그를 똑바로 마주 보지도 못했겠지. 그리고 처음 소리와의 대화를 만든 것은, 어깨를 찌른 내 손가락. 그 손가락이 스스로를 재평가하라며 나를 찔렀다.
‘생각만큼 못나지 않을지도 몰라.’
설마. 그렇게 일축했다. 하지만 아까부터 흔들리던 마음의 폭은 내가 억압받고 살아온 세월만큼 점점 넓어졌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수도 있지.’
거의 그렇겠지.
‘변수는 낯설어. 대비할 수 없어 두렵기도 하고.’
맞아. 그래서 지금껏 뒤로 걸어왔으니까.
‘그래도, 내내 원했잖아?’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기대를 가슴 깊은 곳에 숨겨두고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으며 살아왔는데. 아마 꺼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상자였는데. 근데 상자에 나도 모르는 투명한 끈이 달려 있고, 누군가 그 끝을 잡고 있다면? 상상도 못 해본 가정이었다. 하지만 실제 그 일이 벌어졌다. 없던 가정은 업힌 가능성이 되어 굳어버린 등에 마취제처럼 스며들었다. 얇은 종이 같은 생각이 켜켜이 쌓여 산이 되었다. 나는 정상에 마지막 생각을 깃발처럼 꽂았다.
“저기, 나도.”
머리는 아직 풀이조차 만들지 못했지만 혀뿌리에 이미 답이 올라탔다. 잠결에 취한 듯 몽롱한 목소리로 앞선 등을 불러 세웠다. 돌아선 둘에게, 나는 정상의 깃발을 불쑥 건넸다.
“나도 너희랑, 같이 다니고 싶은데.”
사소해 보이지만 내 세계에서는 무엇보다 커다란 첫걸음. 하지만 서로를 짧게 마주 본 그들은 내 거창한 행보를 사소하게 만들었다.
“어… 그렇지, 좋아.”
아이의 표정이 묘했다. 따라온 자체가 그러겠다는 뜻 아니었어?라는 얼굴이었다. 그는 대답조차 없었다. 쟨 이제 와서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런 눈빛이었다. 할 말이 궁색해진 내가 입을 다물었다. 아이도 드물게 아무 말이 없었다.
“아이를 챙기는 것만큼 너에게는 못할 거야. 그게 서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미안한 어조도, 미안하지 않은 어투도 아니었다. 거기까지 바라지도 않았다. 단지 너희가 어떤 사람인지, 함께 있는 내가 어찌 변할지가 궁금했을 뿐이었다.
“전혀. 이미 알고 말한 거야. 난 그냥… 그냥 구경꾼이라고 생각해줘.”
“안 돼. 구경꾼은.”
아이가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구경이 아닌 참여를 해. 친구니까.”
그렇게 당당하게 말하는 모습을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너는 알고 있을까.
“가자.”
아이가 먼저 출발했다. 그가 따라붙었고, 나 역시 뒤따라 걸어갔다. 몇 걸음 안가 나는 문득 뒤를 돌아봤다. 아이가 그렸던 초콜릿 그림이 멀지 않은 곳에 얼핏 보였다.
살다 보면 많은 것들이 시작되고 또 끝난다.
그중에 내 의지로 시작한 것도 있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시작되는 것도 있다. 끝 역시 마찬가지다. 머리와 꼬리는 그렇게 종종 나의 개입을 배제한 채 시작되거나 끝나기도 한다. 하지만 몸통은 여간해서 그렇지 않다. 어찌 시작되었다 한들 내 의지를 벗어난 진행은 드물다. 이미 시작된 길에 중간부터 올라탈 수는 있지만, 올라탄 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나아가지 않듯이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엇인가 시작되어 마음대로 진행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끝나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은 아니지 않을까. 적극적인 개입과 마찬가지로 방관 역시 본인의 의지일 테니까.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주변 모든 것들만 변한다. 그 변화 속에 내가 없을 뿐이다.
의지란 그런 것이다. 마음은 양쪽을 뾰족하게 깎은 연필과 같아서 도통 올곧게 서있기 힘들다. 중력이 우리 주위를 휘도는 흐름이라면, 어디로 쓰러질지 정하고 그 방향으로 떨어지는 것을 의지라 부른다. 방향을 정하지 않은 연필이 어디로든 쓰러지지 못하듯, 의지 없이는 주변 어떤 것도 나를 좌우할 수 없다. 핑계로 쉽게 붙이는 분위기나 상황은 우리의 결정을 대신 정해주지 않는다. 정한 결정을 뒤에서 밀거나 혹은 아직 정하지 못한 우리에게 빨리 결정하기를 종용할 뿐이다.
나는 지금 부유하며 떠돌고 있다. 크고 작은 주변 흐름에 몸을 맡기다 보니 어느새 처음 보는 여기까지 떠내려 왔다. 하지만 이 역시 내 의지였을 것이다. 시류에 몸을 맡긴 채 자신의 방향을 방치했으니까. 잠시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는 지금도 나는 당장 이 표류를 끝낼 수도, 계속 이어 갈 수도 있다. 몰살에 맞춰 팔다리를 더 빨리 젓는 것도, 벌떡 일어나 물 밖으로 나가는 것도 가능하다. 어떤 결정도 비난받을 수 없다. 단지 결과를 수용할 각오만 있으면 된다.
나는 젖은 손을 들어 그들이라는 배를 불러 세웠다. 다행히 아이는 내게 줄사다리를 내려줬다. 그는 선실은 몰라도 담요랑 어죽 정도는 주겠지. 그럼 갑판에 올라선 나는 어떤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될까.
“오랜만에 걸었더니 지치네.”
“5분 안에 온대.”
작은 삼거리에서 둘은 이해할 수 없는 대화를 하며 각자 편한 자세를 잡았다. 뭔가를 기다리는 폼이었다. 정류장은 저쪽인데. 안절부절못한 표정으로 그들과 정류장을 번갈아보고 있으니 아이는 태연하게 말했다.
“택시 불렀어. 금방 온대.”
잘못 들었나 싶던 내 얼굴이 곧 하얗게 내려앉았다. 아이는 왜 그러냐는 듯 환하게 웃었다. 도움을 구하고자 고개를 돌려도 그 역시 무슨 문제 있냐는 표정이었다.
생에 첫행보가 내디딘 지 5분 만에 미약한 후회를 동반할 줄이야. 건달에게 새치기라도 당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인 나도 결국 그들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