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오늘 자고 가."
이리 오라 하면 오고, 저리 가라 하면 가는,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그렇게 뜻대로 되어도 고충은 있겠지만 보통은 원하는 대로 할 수 없어서 고생할 때가 더 많으니까.
마음이 그렇다. 어디에 스프링이라도 달아놨는지, 던지면 꼭 엉뚱한 방향으로 튄다. 내 안의 것인데도 마치 남의 것처럼 낯설고 어려운, 가까운 적일 때도 있고 때로는 먼 동지가 되기도 한다.
세 번째 주, 수요일
앞서 말하겠다. 나는 지금 엄청난 후회 중이다. 호기롭게 빈손으로 나왔다가 폭우를 만난 소금장수 같은 모양새였다.
“뭐해?”
으악! 뒤에서 불쑥 찔러온 질문에 나는 만세한 자세로 마음먹고 뛴 것보다 멀리 와있었다. 돌아보니 그런 나보다 더 놀란 얼굴이 보였다. 소리는 심장 부근을 누른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니 왜? 무슨?”이라고 당황하면서 말이다.
이곳은 수요일 아침 9시 무렵, 강의실 뒷문이다. 다시 한번 말하겠다. 지금 나는 엄청난 후회 중이다. 실제 날씨는 아주 화창하지만 현재 내 얼굴 날씨는 매우 우중충할 것이다. 벌써 한 시간 넘게 머릿속은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구름이 몰려오고, 손발은 미약한 지진과 해일주의보가 진행 중이었다.
어제 무지막지한 택시비를 토해놓고 내린 곳은 선릉이었다. 멀리 삐죽 솟은 고층 건물이 보일 때부터 금액은 이미 내 일주일치 생활비를 넘긴 상태였다. 내 몫으로 얼마를 내야 할까. 올라가는 요금마다 3으로 나누던 것이 무색하게 아이는 나와 기사 아저씨 사이로 카드를 내밀었다. 반쯤 지갑을 꺼내던 내가 그를 돌아봤다. 그는 됐으니 넣어 두라는 식으로 고개를 저었다. 어렸을 때부터 내 몫에 대해 주입식으로 배우며 자라왔기에 나는 끝내 지갑을 넣지 못한 상태로 택시에서 내려야 했다. 아이는 손수 내 지갑을 도로 넣어줬다. 웃는 얼굴로 내일 보자며 내 손을 두드렸다. 그 자리에서 아이는 횡단보도로, 그는 버스 정류장으로 각자 흩어졌다. 나도 방금 넣은 지갑을 다시 꺼내 전철에 몸을 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하루 동안 스쳐갔던 모든 일들이 마치 꿈처럼, 현실감이 진한 잔향 같았다. 미약한 불안함과 후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대부분은 기특하다고 머리를 쓰다듬고 싶은 대견함이었다. 타인 앞에서 그렇게 강하게 의지를 표현한 적이 언제가 마지막이었을까. 누가 시키지도 않고 어떤 압력도 없이 말이다. 집에 가까워질수록 요목조목 따져본 하루는 후회를 흐릿하게 지우며 가슴을 달뜨게 했다. 덕분에 들어서자마자 쏟아지는 구박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집에서 기분 좋게 잠들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기분은 오늘 아침까지 여전했다. 저혈압의 멍한 정신은 어느 날과 마찬가지였지만 씻고 나오기까지 다른 날보다 훨씬 짧았다. 머리를 감으며 두 사람이 보고 싶다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하지만 모든 기분이 반전된 것은 버스에서 전철로 환승한 이후였다. 학교에 가려면 버스에서 전철로, 다시 학교 앞 마을버스로 두 번의 환승을 해야 했다. 집 앞 버스는 사실 버스를 탄 건지 사람을 탄 건지 알 수 없는 정도여서 차분히 생각하는 자체가 사치였다. 그저 타인의 무자비한 뒤꿈치로부터 발을 지키는 것에, 각종 향수와 체취로부터 비위를 다스리는 것에 전력을 다해야 하니까. 그러다 군데군데 빈자리가 남은 한산한 객차에 도착했다. 그제야 미뤄놨던 상념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지금 학교 가는 길이지. 당연히 둘을 만나겠네. 아이는 웃으며 인사할 것이고, 그는 말은 없어도 눈으로 알은체를 하겠지. 아이는 내 손을 잡고 자기 옆자리에 앉힐 거야. 큰일 났다. 어떻게 만나지! 손톱만 한 구멍에서 미약하게 트인 물꼬는 역이 하나씩 지나고 회상의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이내 물먹은 둑처럼 무너져 내렸다. 결국 안도의 한숨으로 탔던 객차에서 비명과 함께 뛰쳐나와야 했다. 가서 어떻게 보지. 어제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개찰구 앞에서 왔다 갔다, 새로운 열차가 두 번 더 사람들을 쏟아낼 때까지 나갈 수가 없었다. 이래서 사람은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고 하나 보다. 할 수만 있다면 무효로 돌리고 싶었다. 그렇다고 학교를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꼭 욕조로 끌려가는 고양이처럼 마을버스에게 학교로 끌려왔다. 그리고 머플러에 선글라스만 없을 뿐이지 드라마 속 누군가처럼 강의실로 향한 것이 지금이었다.
“괜찮아?”
간지러운 목소리가 울렁거리는 회상에서 날 건져냈다. 그래, 네가 있었지. 사실 어제는 소리 일 하나로도 충분히 대사건이었다. 하지만 이후 너무 많은 일들이 벌어져서 정작 소리는 떠올리지도 못했다. 원래라면 지금 한껏 어색했을만한 소리가 그리 어렵지 않은 것은 그래서일까. 소리에게 미안할 일이 결과적으로 우리의 심리 간격을 좁힌 셈이다.
“별 일 아니야. 이제 와?”
“응. 근데 뭐해?”
“그냥. 먼저 들어가. 화장실 갔다 올게.”
“같이 갈까?”
아니야. 미안한데 제발 좀 먼저 들어가 줘. 차마 말은 못 하고 고개만 저었다. 어떻게 좋게 돌려 말할 수 없을까. 궁리를 하는 도중에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그냥 좀 가.”
듣는 소리보다 말한 내가 더 놀랄 내용이었다. 아침 내내 잘게 떨리던 명치가 쩍 하고 갈라졌다.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소리는 당혹스러운 듯이 눈동자를 굴렸다. 마치 울상 같은 얼굴이었다. 그러다 뒤늦게 깨달은 것처럼 표정이 밝아졌다. 어째선지 미안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인 소리는 뒷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문득 뒤를 돌았다.
“혹시 물티슈나, 다른 거 필요해?”
가방에 손을 넣으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소리는 “그럼 있다 봐”라며 안으로 들어갔다. 가슴 앞에서 두 주먹을 쥐며 힘내라는 신호도 잊지 않았다. 졸지에 악성 변비를 가지게 됐지만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소리에게는 정말 미안했지만 일단 다른 일이 우선이었다.
멀어지는 등 너머로 강의실을 둘러봤다. 다행히 둘은 아직 오지 않았나 보다. 나는 화장실 쪽으로 뒷걸음질 쳤다. 사실 언제든 만날 건데 이게 무슨 소용일까. 하지만 조금이라도 미루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니 말이다. 애당초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면 이렇게 살지도 않았겠지.
“보고 걸어야지.”
으악!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돌아보니 아이가 서있었다. 당연히 그도 뒤에 있었다.
“안녕.”
아이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죄가 있어서인지 환하게 웃는 얼굴이 처음으로 무서웠다. “언제 왔어?”라는 내 말에 아이는 잠시 천장을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으악! 할 때?”
“방금?”
그나마 다행이다. 변비가 광고할 일은 아니니까. 실제 변비도 없고.
“아니. 아까 으악! 할 때.”
내 어깨가 바르르 떨렸다. 그에 아랑곳없이 아이는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가자.”
어딜? 묻기도 전에 가방을 내민 아이는 나를 화장실 쪽으로 끌고 갔다. 아이의 가방을 받아 든 그는 내 가방마저 뺏어서 먼저 강의실로 들어갔다. 여전히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동기들의 얼굴이 환영회 다음날처럼 이상해졌다. 아이 곁에 그는 이제 당연하다 쳐도 반대쪽 두 명은 누구지?라는 표정이었다. 물론 직접 물어보지는 않지만 바늘 같은 시선이 우리에게 박혔다. 덕분에 나와 소리의 얼굴은 시간이 갈수록 까맣게 죽어갔다.
마렵지 않은 화장실에 갔다가 강의실로 들어갔을 때 두 부류가 우리 앞에 섰다. 아이를 찾아온 동기들과 날 마중 나온 소리였다. 그는 이제는 놀랍지도 않게, 이미 아이의 뒤에 있었다. 뒷문 앞에서 묘한 삼각형이 만들어진 순간 나와 소리의 눈빛이 복잡하게 엮였다. 마음으로는 소리와 아웃사이더의 그늘이라는 복도 쪽 중간 자리에 구겨져서, 있는 듯 없는 듯 조촐하게 수업을 듣고 싶었다. 소리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문제는 아이에게 단단히 잡힌 내 손이었다. 모두 불편한 몇 초가 지나갔다. 잠시 상황을 살피던 아이가 “너도 같이 앉자”라며 대치를 와해시켰다. 그때부터 투명한 바늘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소리는 자기가 왜 여기 앉아서 이런 주목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나도 그런 소리와 아이 사이에 껴서 나름대로 죽을 맛이었다. 어제 분위기에 취해 불쑥 내뱉어버린 말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결국 간간히 들리는 아이의 질문에 기계적으로 답하다가 수업이 끝났다.
“점심 뭐 먹을래?”
아이가 가방을 챙기며 당연하다시피 물었다. 순간 호기심과 무심함과 난처함이 섞인 시선이 내게 모였다. 주변 동기는 물론 그와 소리까지 나를 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겠다. 가방끈을 그러쥔 나는 벌떡 일어나 외쳤다.
“나 저기, 좀, 잠깐 볼일이 있어서!”
그리고 소리의 손을 잡고 그대로 뒷문으로 도망쳤다.
지난번부터 궁금했지만 휴게실에 왜 야구장 의자가 있는 걸까. 이걸 납품하는 업체가 따로 있나. 아니면 총장 친인척이 이 사업이라도 하나. 아니다. 지금 내가 현실도피할 때가 아니었다. 나는 곁에 앉은 소리에게 고개를 숙였다. 한사코 아니라고 손을 내저어도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딱 봐도 괜찮은 얼굴이 아니었으니까.
층이 달라 아는 얼굴 하나 없는 다른 과 휴게실에서, 친구도 남도 아닌 애매한 간격으로 앉은 우리는 바람 같이 흘러간 오전을 각자 상기하고 있었다. 내 손에는 보리차가, 소리의 손에는 생수가 들려 있었다.
“미안. 불편했지?”
“조금.”
작게 대답한 소리는 얼른 뒷말을 붙였다.
“그렇다고 싫은 건 아니야. 너랑 친해지고 싶어서 어제 번호 물어본 거고. 오늘 같이 수업 듣고 밥도 먹자고 그럴 생각이었거든.”
소리는 무엇에 쫓기듯 와르르 말을 쏟아냈다.
“그럼 아이가 좀 불편해?”
“아이도 좋아. 기회가 되면 친해지고 싶고.”
“그럼 시선이 너무 몰려서?”
좁은 질문에 단말적인 대답이 여러 차례 오갔다. 스무고개를 하듯 몇 번 범위를 좁히고 나서야 소리는 작게 본심을 드러냈다.
“다른 것보다 아이 옆에 있는 걔가 좀….”
그제야 소리의 성격을 알 것 같았다. 어디에나 이런 친구가 있었다. 집단에 불편한 사람이 하나라도 있으면 개개인으로는 만나도 다 같이 모일 때는 나오지 않는 그런 사람. 소리가 딱 그랬고, 초등학교 때 알던 애들도 이랬다. 경험 상 이런 성격은 나와 잘 맞았다. 둘이 만나면 상대에게 집중했다. 함께 있으면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거나 통화를 오래 하지도 않았다. 본인이 그런 성격이기에 다른 친구를 부르거나 억지로 자기 친구를 소개하지도 않았다. 깊은 우물을 파듯 서로에게만 몰입할 수 있는 관계. 아이나 그와는 이런 관계를 만들 수가 없었다. 그런 만큼 소리는 내게 아주 소중한 인연이 될 터였다.
“점심 먹으러 가자.”
“걔들한테 안 가도 돼?”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사실, 아직 좀 복잡해서. 걔들이랑.”
소리는 이유를 되묻지 않았다. 왜냐고 묻고 싶겠지. 하지만 아마 참고 있을 것이다. 이런 점도 나와 잘 맞았다. 물어봐도 나도 아직 모르니 대답할 수 없었다. 내가 침묵하고, 그런 나를 보고 상대도 침묵하면 우리 같은 성격들은 회복까지 오래 걸렸다. 그러니 묻지 않아서 고마웠다.
“가자. 뭐 먹을래?”
내가 먼저 일어났다. 나를 본 소리도 허겁지겁 생수 뚜껑을 닫고 일어났다. 그 모습이 참 나를 닮았다. 지금 먼저 일어나는 내 모습도 누군가와 비슷한 듯했다. 벌써 은연중에 영향을 받고 있는 걸까. 아이와 오래 지내다 보면, 나도 그 아이처럼 변할 수 있을까. 소리와 계속 있다 보면, 소리의 눈에 내가 그 아이처럼 보일까.
아직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점심은 학식 대신 학교 밖에서 파는 돈가스였다. 지금 학식을, 정확히는 학생식당을 꺼려하는 것은 소리도 마찬가지였다. 꼭 이럴 때 둘과 마주치고는 하니까. 정문을 벗어나 시내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다음 수업까지 시간이 남아 카페도 들렸다. 소리는 말수가 적은 아이가 아니었다. 필요 이상으로 남 눈치를 보고 겁이 많을 뿐이었다. 나와 소심함의 방향이 좀 달랐다. 우리는 카페에서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중간에 끊지 못해 오후 수업에 뛰어올라갈 정도였다. 오후 수업은 다행히 둘과 다른 수업이었다. 소리와의 수다는 수업 중에도 계속되었다. 둘 다 어제 처음 만났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마치 오랜만에 만난 동창처럼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소리는 잘 웃었다. 아이와는 좀 다르지만. 그리고 말을 할 때의 행동과 들을 때의 반응이 풍부했다. 함께 대화하기 즐겁고 편한 상대였다. 대화만 잘라보면 이런 애가 왜 혼자 다니지 싶었다. 하지만 소리 역시 나처럼, 본인만의 흉금을 품은 아이였다. 중의적인 표현이 나왔을 때, 내가 다른 생각에 빠져 잠시 입을 다물 때마다 소리는 수풀 너머에서 발소리를 들은 토끼처럼 행동했다. 카페 문이 벌컥 열릴 때, 다른 학생들 무리에서 큰 소리가 났을 때, 작은 벌레가 강의실 안으로 들어왔을 때, 그때마다 놀란 사슴처럼 펄쩍 뛰었다. 나는 매번 의미를 설명하거나, 침묵을 해명하거나, 괜찮다고 손바닥을 내밀어야 했다.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좋게 말하면 귀엽고, 나쁘게 말하면 답답하고 귀찮게 느낄 터였다. 하지만 나는 전부 좋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소리와 함께 있으면 나는 보통 사람처럼 말할 수 있었다. 마치 집안의 장녀가 막내를 대하는 것처럼 행동하게 됐다.
난 지난 십 년간 전후좌우로 쪼그라든 상태였다. 어쩌면 소리와 있을 때 앞뒤로, 아이와 함께 있을 때 좌우로 펴지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연달아 후회했다. 오늘 오전에 내가 한 행동은 누군가에게 분명 상처였을 것이다. 나는 스스로를 이겨내지 못해 작년과 재작년에도 했던 실수를 다시 반복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모든 수업이 끝났다. 어디에나 공평한 것이 시간이라지만, 누구보다 편파적인 것도 시간이었다. 절대적인 기준을 사람의 주관적인 관점으로 손쉽게 재단하니까. 고작 하루가 마치 일주일처럼 길게 느껴졌다. 첫 주부터 그래 왔던 것처럼 같이 수업을 듣고 화장실을 가고, 수다를 떨고 나란히 음료수를 사서 마셨다.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수업이 끝나고도 저녁을 같이 먹었고, 집에서도 오고 가는 메시지로 휴대전화를 놓을 새가 없었다. 수단이 혀에서 손가락으로 바뀌니 대화가 세 배는 쉬워졌고 그만큼 빨라졌다. 연결된 기계 두 대가 서로 동기화하듯 엄청난 속도로 정보를 주고받았다. 그렇게 밤늦게까지 이어진 수다는 다음날 학교에서 다시 이어졌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강의실에 도착했다. 소리도 그랬다. 그늘진 곳에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강의 시작 직전에 아이와 그도 뒷문으로 들어왔다. 둘의 등장에 우리는 잠시 움츠렸다. 하지만 아이는 나란히 앉은 우리를 힐끗 눈에 담았을 뿐이었다. 이쪽으로 오거나 말을 걸지 않았다. 덕분에 다른 수업으로 갈라지는 오후까지는, 마음이 조금 불편하기는 했어도 사람들의 눈초리를 피해 갈 수 있었다.
어제오늘 지켜본 소리는 나만큼 서투른 아이였다. 나와 비슷한 곳에서 당황하고 내 근처에서 헤매는 나 같은 아이. 그런 모습을 보며 문득 소리에게 동지애를 느꼈다. 세세한 것은 아직 알 수 없지만 너도 이 나이까지 쉽게 오지 않았겠구나. 동시에 기특했다. 그럼에도 여기까지 왔구나. 소리의 성장에 뭐 하나 도움 준 것 없는 내가 괜히 고마웠다. 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떠나보내고 불 꺼진 방에서 홀로 울었을까. 지는 밤과 뜨는 해와 싸우던 어디쯤에서 그렇게 웃는 법을 배웠을까. 마치 색을 입힌 거울을 보는 듯했다. 그렇게 치면 어제 내게 떨리는 손으로 휴대전화를 내민 소리의 행동은 그녀의 세계에서 얼마나 큰 걸음이었을까. 얼마나 가슴 터질 듯 벅찬 용기였을까. 그것을 자칫 그저 그런 걸음으로 무시할 뻔했다는 것에 새삼 미안함이 들었다. 동시에, 고작 이틀 만에 함께 자라온 자매 같은 익숙함마저 느꼈다.
우리가 이상한 것이 아닐 거야. 잘못하고 있는 것도 아니야. 이제 고작 스물이니까. 스무 살은 보통 그렇잖아. 첫 기억으로부터 십오 년도 안 지났고,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십 년도 안 지났는걸. 이게 당연한 거야. 저마다 다른 거지 누가 틀린 것이 아니야. 서른쯤 할 수 있는 것을 지금 못한다고 자책할 필요 없어.
정문으로 내려가던 중에 나란히 걷는 소리를 돌아보았다. 소리는 발치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잠시 단정한 옆얼굴을 지켜보던 나는 나직하게 소리를 불러보았다.
“소리야.”
내 목소리에 소리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마침 다른 생각 중이었나 보다.
“나 불렀어?”
“응.”
“혹시 몇 번 불렀는데 내가 대답 안 했어?”
그 말을 듣는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소리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게 네가 가진 마음의 구멍 중 하나구나. 무의식 중에 드러낸 소리의 어둠을 본 나는 억지로 더 웃어 보였다.
“아니야. 처음 불렀어.”
그리고 작게 안도하는 소리의 손을 잡았다.
“소리야. 우리 친하게 지내자.”
흠칫 놀랐던 손이 잠시 후 내 손을 힘주어 맞잡아줬다. 따듯한 체온이 뭉클했다. 불쑥 맞닥뜨린 스무 살에서 처음으로 이 나이가 좋다는 생각을 했다. 격변한 세상에 낯선 것들만 있지는 않아서.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잡은 손에 힘을 줬다. 갑자기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나는 어린아이들이 그러는 것처럼, 소리의 손을 잡고 팔을 앞뒤로 힘차게 흔들며 큰 걸음으로 내리막을 내려갔다. 으하하. 바보 같은 웃음이 늘어진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물론 소리가 창피하다고 얼굴을 붉혀서 금세 그만두긴 했지만, 말리지 않았으면 ‘스무 살 만세’라며 소리까지 질렀을지도 모르겠다.
세 번째 주, 목요일
학교 앞 마을버스는 두 종류였다. 소리와 나는 버스가 달랐다. 집 방향까지 같았다면 둘 다 몇 시에나 집에 들어갔을지.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소리를 먼저 보냈다. 그 자리에서 다른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정문 앞 편의점에서 두 사람이 불쑥 튀어나왔다. 좁은 길을 사이에 두고 나와 마주 섰다. 몰래 연애하다 부모에게 걸린 고삼처럼 나는 뻣뻣하게 굳었다.
“이제 집에 가?”
아이는 환하게 웃었다. 그를 놔두고 내 쪽으로 걸어왔다. 소리와 있던 시간이 깨알 같아서 둘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직 정리 못한 생각 탓인지, 아니면 잠시 잊어버렸다는 미안함 때문인지. 다가서는 보폭에 맞춰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런 내 행동에 아이는 벽에 막힌 듯 자리에 못 박혔다. 그 상태로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네가 싫어서 피한 것이 아니야. 그냥 습관적으로. 나도 모르게. 지금껏 이 한 마디를 못해 다가오려던 친구를 얼마나 많이 떠나보냈는지. 뒤늦게 후회해도 떠난 그들은 내 앞에서 보란 듯이 다른 친구와 어울렸다. 그때마다 나는 보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혼자 돌아가는 귀갓길은 천리불길이었다. 내딛는 걸음마다 자책과 후회가 가시처럼 박혔다. 시간을 되돌린 상상들이 낙석처럼 쏟아졌다. 하지만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교복을 입었을 때나 지금 사복을 입었을 때나. 심지어 방금 전까지 만세를 부르던 스무 살의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당황한 표정을 조금도 숨기지 못했다. 곧 울음이 터질 것처럼 얼굴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런 나를 표정 없이 지켜보던 아이가 불쑥 물었다.
“엊그제 네 말, 내가 잘못 해석한 거 아니지?”
아이의 차분한 목소리가 좌우로 찌그러지던 나를 압착기에서 빼냈다. 얼굴과 눈이 평소처럼 가라앉았다. 새삼 아이의 질문을 되새겨봤다. 그저께 내 말? 그때 나는 어땠을까. 그래, 분명 분위기에 휩쓸린 경향은 있었다. 낯선 배경에 취한 부분도 있었다. 아마 예전의 나였다면 그렇게 핑계를 찾고 그 길이 유일한 정답인 것처럼 달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곰곰이 생각해봤다. 바닷가에서 나는 평소보다 들떴을지언정 거짓은 없었다. 없던 말을 지어내거나 상황에 몰려 빈말을 하지도 않았다. 지금 눈앞의 아이는 그것을 묻는 듯했다.
하지만 원치 않을 때 제멋대로 튀어나오는 속마음은 이럴 때는 왜 나오지 않는지. 잠깐만 기다려줘. 혹시 내가 이상한 소리를 해도 그걸 재차 해명할 수 있는 기회를 한 번만 줘. 나는 잠긴 문을 두드리듯 마음속에서 소리쳤다. 굳게 닫힌 울대를 흔들었다. 다행히 아이는 차분했다. 그제와 같은 표정으로, 3주 전과 여전한 눈빛으로 내 발버둥을 지켜봤다. 저 자리에서, 본인이 서있을 곳에 서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억지로 침을 한 번 삼켰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한 번, 두 번 속으로 되뇌었다. 그리고 눈을 떴다. 쿵쿵 울리는 심장소리를 곁에서 들으면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하지만 최대한 또박또박 입술을 열었다.
“아니야.”
한 마디만 겨우 뱉어냈다. 혹시라도 다른 말이 나가지 않도록 혓바닥을 입천장에 힘주어 붙였다. 힘이 들어간 침을 삼키니 목 근육이 경직된 것처럼 뻣뻣해졌다. 나는 말라서 달라붙는 목구멍을 억지로 떼어내며 말을 이었다.
“그런 게 아니야.”
결국 말했다. 나는 말했다. 아이는 기어코 25초를 모조리 기다려줬다. 단 두 마디로 표정 없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달 같은 미소를 보며 나는 다시 깨달았다. 그래. 나는 저 아이가 좋다. 저 표정이 사랑스럽다. 만약 내가 남자였다면 너를 원 없이 사랑했을 것이다. 물론 너는 소리와는 다르다. 나와 사는 세계도 성격도 뭐 하나 맞는 것이 없다. 그래도 네가 좋다. 너는 예쁘다. 친해지고 싶다. 옛날부터 손만 뻗어준다면 가장 먼저 달려가 간도 쓸개도 다 빼줄 수 있는, 하지만 단 한 번도 먼저 손 내민 적 없었던, 그런 누구나 친해지고 싶은 반짝반짝한 사람이다. 그런 아이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바보 같이 쳐냈음에도 거듭 손을 뻗어줬다. 한사코 태어나 처음인 제의였다. 내 몸 일부가 햇빛에 드러나 타들어간다 해도 더 이상 너의 손을 밀쳐낼 용기는 내게 없었다.
“수업 다 끝났어?”
아이가 물었다. 나는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뒤늦게 나를 버리지 말라며 울고 싶었으나 겨우 참았다.
“그럼 이제 뭐해?”
“집에 가야지.”
당연한 것을 왜 물어봐. 나는 왠지 불안해졌다. 스며 나왔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나와는 반대로 아이의 표정은 점점 묘해졌다. 얇게 휜 눈웃음으로 나를 지긋이 보는 폼이 마치 규칙을 어긴 기숙사생에게 무슨 벌칙을 줄까 고민 중인 사감처럼 보였다.
“요리 잘해?”
지금 뭔가 들으면 안 될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더듬이가 서는 느낌에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했다. 대신 들기름으로 볶은 북엇국 마지막에 참기름을 넣을지 말지, 아이는 고기볶음 요리에 마늘과 후추 중 무엇을 더 많이 넣는 것을 좋아할지 등을 생각했다.
그의 방은 확연히 달라져있었다. 고작 3주 만에 방의 성격과 성별마저 뒤바뀐 상태였다. 텅 빈 거실에 가구가 늘어났다. 의상실에 있을 법한 검고 낮은 이동식 행거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키가 큰 은색의 고정식 행거가 설치되어 있었다. 팔꿈치로 짚으면 흔들리고 체중을 실으면 삐걱거리던 오래된 나무 식탁은 튼튼해 보이는 검은 식탁으로 변해있었다. 여기까지는 그럴듯했다. 하지만 하얗던 빈자리에 화장대까지 있었다. 행거에 걸린 옷가지도, 화장대 위에 진열된 화장품도 어떻게 봐도 그의 것은 아니었다. 깔끔했지만 엄연히 남자 방이던 곳은 안 본 사이에 여자 방이 되어있었다. 원래 그의 방에 아령이나 재떨이 같은 것이 굴러다녔으면 모를까, 이렇게 보니 남녀가 같이 지내는 곳이 아닌 마치 자매가 함께 쓰는 곳 같았다.
“뭐해? 들어와.”
눈앞의 갈색 러그를 밟을지 피할지 고민하다가 그냥 밟고 들어갔다. 주방에 그릇과 접시, 컵과 수저가 두 개씩, 발치의 슬리퍼도 쌍으로 있었다. 그가 양보한 슬리퍼를 신었다. 왠지 오지 말아야 할 곳에 들어온 것 같았다. 처음 만난 날을 미루어 아이가 종종 그의 방에 머물 거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거의 같이 사는 꼴이었다. 내가 혹시 동거하는 연인의 방에 잘못 들어온 건가 싶어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래서 차마 방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먹고 잠시 쉬었다가 하자.”
식탁 곁은 하얀 의자 두 개뿐이었다. 아이가 그중 방석이 있는 하나를 꿰찼다. 그는 화장대 의자를 끌고 왔다. 어디 앉아야 할지 고민하던 나는 자연히 아이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가 식탁 위로 봉투를 뒤집자 우르르 내용물이 쏟아졌다. 그는 참치마요네즈와 볶음제육이 붙어있는 행사상품을 먼저 뜯었다. 참치마요네즈와 딸기우유는 아이에게 주고, 볶음제육과 바나나우유를 내 앞쪽으로 밀었다. 그리고 그는 숯불갈비와 딸기 우유를 가져갔다. 방금 전 각자 편의점에서 고른 간식들이었다.
정문 앞에서 아이는 우선 허기부터 채우자며 나왔던 편의점으로 다시 들어갔다. 죄인처럼 따라 들어갔더니 아이와 그는 조리식품이 진열된 신선 칸 앞에 있었다. 일렬로 늘어선 삼각 김밥을 가리키며 무슨 맛을 먹을 거냐는 아이의 질문에 나는 아무거나 상관없다고 답했다. 그 옆에서 무슨 우유를 마실 거냐는 그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다 익숙한 바나나 우유를 마시겠다고 말했다. 편의점 신선 칸을 둘러보던 그는 잠시 후 내게 볶음제육도 괜찮은지 물어봤다. 나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세트 상품 하나와 단독 상품 하나, 그리고 딸기 우유 두 개와 바나나 우유 하나를 쥐고 계산대로 향했다. 병아리마냥 그의 뒤를 따르며 신선 칸을 살피던 나는 걸음이 멎었다. 딸기 우유 두 개를 사면 공짜로 하나 더 준다는 라벨이 붙어있었다. 당황한 내가 황급히 딸기 우유를 쥐고 카운터로 달려가려는데 내내 날 지켜보던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려놓으라는 손짓도 함께였다. 오른편에서 쏟아져 나오는 냉기를 받으며 멍청하게 서있던 나는, 결국 그가 계산을 마치고 나를 돌아봤을 때야 딸기 우유를 내려놓고 어정거리며 그들 곁으로 갔다. 미안. 문에 달린 종소리를 들으며 작게 말을 붙였다. 두 쌍의 눈이 내게 돌아왔다.
“나도 딸기 우유 골랐으면 하나 공짜인데.”
그의 무표정이 조금 들썩였다. 그가 아이를 봤다. 아이는 입을 가리고 있었지만 눈이 예쁘게 휘어져있었다.
“우유는 종류 상관없이 투 플러스 원이야.”
내가 몰랐다는 얼굴로 바라보자 아이는 결국 소리 내어 깔깔 웃었다. 다른 때 같으면 놀림당한 것 같아 얼굴이 달아올랐을 텐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재밌어하고 있음이 느껴졌으니까. 그 후 슈퍼에 들려 장을 봤다. 배고프니까 빨리 가자는 아이를 쫓아 도착한 곳이 여기였다. 뒤늦게 떠올렸더니 귓가로 부끄러움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게다가 잠시 잊고 있던 것도 있었다.
“근데, 나 돈 안 냈는데.”
내 말에 막 포장을 벗기는 그도, 이미 한 입 씹고 있는 아이도 모두 하던 일을 멈췄다. 둘은 나를 먼저 보고, 자기들끼리 한 번 마주 본 후에, 엉뚱한 표정이 되었다. 마치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발상을 들었을 때의 얼굴이었다. 액수가 짝수로 나와서 그런가. 내 나름대로 아까 얼핏 스쳐봤던 액수를 계산해봤다. 잠시 고민하는 표정으로 김밥을 씹던 아이가 입속에 있던 것을 삼킨 후에 대답했다.
“그러게. 생각도 못했어. 일단 우리는 돈 문제는 없어서.”
내가 무슨 뜻이냐는 얼굴로 앉아있으니 아이는 우유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우린 계산은 내가 해.”
“전부?”라고 눈으로 물으니 한 입 더 베어 물은 아이가 “전부”라며 눈썹으로 답했다. 나는 차마 고개는 돌리지 못하고 곁눈질로 그를 봤다.
“너는 뭐하고?”
보기만 하지 않고 물어도 봤다. 내뱉어놓고 망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인 내게 아이가 대신 답했다.
“좀 사정이 있는데, 얘는 일단 짐을 들고, 그리고 요리를 해.”
김밥을 씹으며 잠시 천장을 바라보던 아이는 이내 “그리고 청소와, 빨래와, 설거지와” 하다가 다시 잠시 후 “아무튼 돈 쓰는 것만 빼고 다 해”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시 한 입을 더 베어 물었다. 나는 그냥 둘만의 이해관계가 있나 보다 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둘의 사정과 나는 별개였다.
“그래도 나는….”
“그러니까 너는 앞으로 토스트를 사.”
“무슨 토스트?”
“정문 앞에 있는 토스트. 나 그거 좋아해서 점심으로 자주 먹거든. 같이 있으면 너는 토스트, 나는 토스트를 제외한 계산, 얘는 그 둘을 제외한 나머지. 공평하지?”
케이크를 정확히 삼등분한 표정으로 아이가 활짝 웃었다. 그게 어디가 공평해. 요즘 마트에서 저녁거리만 좀 사도 이만 원은 훌쩍인데. 식당에 셋이 가도 그 정도고. 나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드물게도 그는 입 다물고 수긍하라는 표정이었다. 왠지 주눅이 들었다. 아이는 어느새 삼각 김밥을 모두 해치우고 우유의 마지막 모금을 마셨다. 퍼뜩 고개를 돌려보니 그도 마지막 조각만 들고 있었다. 나는 아직 한 입도 먹기 전이었다. 어쩌지. 다시 포장할까. 바스락거리는 김밥을 들고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손을 턴 아이가 말했다.
“천천히 먹어. 꼭꼭 씹어서 체하지 않게.”
그러면서 턱 아래 손등을 괴며 나를 또렷이 쳐다봤다. 지금 아이의 자세는 상대가 체하길 바랄 때 하는 공식적인 자세였다.
“그렇게 보고 있으면 어떻게 먹어?”
불쑥 튀어나온 내 말에 아이는 정말 어린아이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혼자 휘적휘적 방으로 들어가더니 곧 품에 옷가지를 안고 나왔다. 그리고 행거를 뒤적이다가 우리를 돌아봤다.
“그러고 보니 키가 몇이야?”
아이의 물음에 대꾸하려고 서둘러 밥알을 삼키는 중에 그가 먼저 말했다.
“179.”
덤덤한 목소리였다. 아이의 고향이 충청도가 아닐까 하며 내 눈이 그에게 박혔다. 그는 김밥을 씹으며 나를 봤다. 왜 그러냐는 시선에 나는 변명하듯 대꾸했다.
“아니 의외여서.”
“뭐가?”하고 아이가 대신 물었다.
“우리나라에 178, 179인 남자는 없다고 들었거든.”
내 말을 곰곰이 되뇌던 아이는 잠시 후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네. 그 정도면 다들 180이라고 하지. 너는?”
“난 169.”
앉아있는 나를 잠시 위아래로 훑어본 아이가 다시 물었다.
“공식적으로?”
“아니 정말 169.7이야.”
“더 크게 봤는데. 공교롭게 다들 10씩 차이나네.”
아이는 159인가 보다. 아이는 잠시 서서 그의 턱이 멈추길 기다렸다. 나라도 대신 일어나야 되나 고민이 들 때쯤 그는 김밥을 삼켰다. 점점 불안해하는 내 표정을 확인한 그가 뒤를 돌아봤다. 아이는 그제야 그를 향해 행거 한쪽을 가리켰다. 벌떡 일어난 그가 옷걸이 하나를 내려줬다. 문득 아이 팔에 걸려있는 회색 바지가 몹시 익숙했다. 분명 봤는데 어디서 봤는지는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술 냄새와 속이 매슥거리는 느낌만 살아났다. 하지만 그가 행거에서 연두색 티셔츠를 내렸을 때 회색 바지의 존재도 명확하게 기억났다. 내가 씹는 것도 잊은 채 멍하게 아이를 바라보고 있으니, 환한 얼굴로 돌아선 아이는 내가 이미 한 번 입어본 티셔츠와 바지를 내게 내밀었다.
“내일 1교시지?”
옷을 받아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하늘색 티셔츠와 검은색 바지를 챙겨 작은방으로 들어갔다. 그사이 그도 자신의 옷을 챙겨 주방으로 나갔다. 이윽고 거실에는 옷을 든 나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