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좋아하는 것에 대해 맹목적이지만 난 그 정도가 심하다. 여름에 태닝을 하는 사람은 있어도 애써 일광욕을 하는 사람은 드무니까. 하나의 감정이 상대적인 환경에 의해 저울질되는 일상 속에, 전연 영향을 받지 않고 고유의 가치를 유지하는 감정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인간 공통적인 측면에서 보면 호기심과 공포가 그렇고, 개인적으로는 기대와 상상이 그렇다. 나를 제외한 주변 모두가 입을 모아 아니라고 해도 손에 쥐지 못한 환상에, 곧 내게 올 미래에 대한 기대는 늘 머리보다 한참이나 앞서있다.
입학을 얼마 앞두고 막연히 상상을 하고는 했다. 대학에 가면 무엇이 달라질까. 그 당시는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을 장님 손끝처럼 더듬다 보면, 어쩌면 그것을 알게 될 즈음에는 손안에 들어와 있지 않을까 하며.
네 번째 주, 금요일
MT의 첫날은 무난하게 지나갔다. 아이가 제안한 목요일 숙박에 대해 아직까지 명확한 답을 하지 않았지만 MT를 핑계로 어제 그의 방에서 세 번째 밤을 보냈다. 1박 할 짐을 챙겨 아침 일찍 향한 정문에 이미 학생들과 버스가 서있었다. 시간이 흐르자 나머지 학생들도 속속 모이기 시작했다. 남학생들이 짐을 싣는 동안 아이는 여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서로의 가방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확인 중이었고, 나와 소리도 한 걸음쯤 떨어져 대화에 슬쩍 올라타 있었다.
두 시간하고 삼십 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서해의 어느 섬이었다. 독채 두 개를 통째로 빌려 성별로 방을 나눴고, 교수진은 개별 방을 받았다. 짐을 풀자마자 곧 조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거창한 일은 없었다. 점심은 싣고 간 도시락으로 때우면서 오후 내내 조와 관련된 이런저런 행사들이 있었다. 우리 넷이 모두 한 조였던 것이 가장 다행이었다. 어쩌면 미리 모종의 언약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해가 질 무렵에 다시 모여 조별로 구호를 외치고 발표를 하는 등 시끄러웠다. 저녁과 함께 장기자랑이 이어졌다. 술병과 테이블 사이로 신입생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가운데 우리 넷은 조금 한가했다. 어울리고 싶으면 어울렸고, 빠져나오고 싶으면 빠져나왔다. 먼저 다가오는 사람은 많았으나 아이가 웃으며 고개를 저으면 다들 쉽게 물러났다. 누구 하나 불편하게 구는 사람 없이, 마치 학회장보다 학번이 높은 복학생 같은 대우였다. 우리는 아이 곁에 붙어서 장기자랑을 구경하거나, 한창 게임 중인 곳을 구경하거나, 교수와 선배들이 있는 테이블을 구경하기도 하며 조용히 술을 마셨다. 문득 시선이 느껴져 돌아보면 도마뱀 선배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눈이 마주치면 곧 사라졌기에 나도 금세 잊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첫날이 지나갔다.
네 번째 주, 토요일
어제 늦게까지 이어진 술자리로 인해 둘째 날 아침식사는 꿈속에서 먹어야 했다. 다들 일어난 시간은 오전 11시였다. 아침 겸 점심을 차린다고 조별로 모여 서툰 칼질을 하다 보니 다시 두 시간이 훌쩍 흘러갔다. 결국 학과 행사의 공식 시작은 오후 1시가 되었다. 하루 중 가장 따듯할 때 전부 바닷가로 나간 사람들은 아직 물이 들어오지 않은 갯벌에서 작은 운동회를 했다.
이곳에 와서 내가 놀랐던 것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아이에 대한 거였다. 평소 사람들을 멀리 하고 그와 둘이서만 조용히 지내는 모습을 봐서는, 와서도 깍쟁이처럼 행동할 거라 생각했다. 오기만 했을 뿐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다른 학생들이 하는 모습을 구경하겠지. 하지만 웬걸. 아이는 어제부터 대부분의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조별 회의 때도 의욕적이었다. 발표도 직접 했다. 술 게임을 같이 하고 장기자랑을 보면서 박수를 치며 즐거워했다. 술만 거의 마시지 않을 뿐이었다. 오늘도 그랬다. 아이들과 같이 요리를 하고, 작은 운동회의 몇 종목에 참여했다. 그에게 업혀 머리띠를 뺏는 게임과 이어달리기에도 나갔다. 배턴을 쥐고 갯벌을 달리던 도중에 앞으로 고꾸라져 머리에 온통 진흙이 묻었음에도 놀라 호들갑 떠는 사람들에 비해 아이는 별일 아니라는 것처럼 진흙을 털어냈다. 그저 남자아이처럼 소리 내어 웃고 넘기는 등, 내게는 온통 낯선 모습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도 역시 아이에 대한 거였다. 예상보다 많은 행사에 참석했지만 모든 행사에 참석한 것은 아니었다. 그때마다 다른 학생들의 반응이 놀라웠다. 은연중에 눈치채고 있었으나 이만큼 예쁜 애들이 밖에서 어떤 대접을 받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웃으며 고개를 젓기만 하면 끝이었다. 자신 없다고 말하면 나머지는 다른 학생들이 전부 알아서 해줬다. 불참과 대타뿐만 아니라, 소수의 비난조차도 그들이 막아섰다. 그 모습에 나와 소리는 새삼 세상이 불공평하다며 웃어야 했다.
반면 그는 정확히 예상대로 행동했다. 아이가 하면 같이 하고, 아이가 하지 않으면 그도 하지 않았다. 아이가 하라면 했고, 별말이 없으면 하지 않고 아이 곁을 지켰다. 학과 사람들에게 그는 뭐랄까, 아이의 깍두기였다. 그도 일종의 특수권력을 누리는 중이었다. 그 점은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아이가 데려온 세 개의 깍두기. 눈에 띄기는 싫지만 은근히 즐기고 싶었던 나와 소리에게 적합한 위치이기도 했다.
중간중간 쉬어가며 몇 종목을 하다 보니 어느덧 해가 길어지고 있었다. 몇 시간째 맞은 바닷바람 탓에 앉아만 있던 사람들은 조금씩 추워했다. 운동회는 이제 막바지로 접어들며 남자 씨름이 진행 중이었다. 아이가 나가길 원해서 그도 아이에게 휴대전화와 지갑을 맡기고 출전했다. 마땅히 넣을 주머니가 없던 나도 아까부터 소리의 지퍼 달린 주머니에 휴대전화를 맡겨두었다. 우리 셋의 응원을 받으며 그는 첫판을 가볍게 이겼다. 가까이서 보는 씨름은 꽤 흥미진진했다. 넘어가는 발끝에서 하늘을 향해 진흙이 치솟을 때마다 나와 소리는 입을 가린 환호를 지르기 일쑤였다. 그래서였을까. 다른 학생의 경기도 유심히 지켜보던 중에 뒤늦게 아이가 보이지 않음을 깨달았다. 주변을 둘러봐도 나처럼 씨름경기에 푹 빠져있는 소리만 있었다. “아이는 어디 갔어?”라고 물으니 소리가 “추워서 옷 가져온대”라고 대답했다. 듣고 보니 나 역시 꽤 쌀쌀했다. 털어냈어도 머리와 소매에 진흙이 그대로일 아이는 아마 더했을 터였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씨름 경기는 이제 막 물이 올랐지만, 옷 하나 가져오는데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아이에게 휴대전화가 있다면 내 옷도 가져다 달라고 하겠지만 아이에게는 휴대전화 자체가 없었다. 나는 결국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소리의 시선이 따라왔다.
“나도 춥네. 옷 입고 올게. 네 것도 가져다줄까?”
“같이 갈까?”
나는 왜인지 “내가 얼른 가져올게”라고, 일어나려는 소리를 다시 앉혔다. 그대로 돌아서려다 문득, 여전히 나를 올려다보는 소리가 눈에 잡혔다. 순간 소리가 없었으면 어땠을지 생각해봤다. 그와 아이가 나란히 무엇인가를 할 때, 혹은 지금처럼 그는 경기 중이고 아이는 잠시 사라졌을 때, 나는 아마 군중 사이에 껴서 멍하게 앉아있었을 것이다. 누구 하나 말 붙일 사람 없이 아이가 돌아오기를, 또는 두 사람이 어서 일정을 끝내고 곁을 만들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아이뿐만 아니라 소리라는 존재 덕분에 지금 나는 이 시간을 빈틈없이 즐기고 있었다. 그 점이 갑자기 마음 깊이 고마웠다.
내가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으니 소리의 얼굴이 점점 의문스러워졌다. 뒤늦게 다시 일어나려는 듯이 엉덩이를 들썩였다. 나는 재빨리 어깨를 누르며 말했다.
“소리야. 즐거워?”
밑도 끝도 없는 말에 소리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이목구비로 ‘뭐가?’라는 문자를 만들다가 곧 환하게 웃었다.
“응. 생각보다 재밌어.”
그리고 잠시 말을 끊었다가 쑥스럽게 웃으며 다시 말했다.
“근데 너 없었으면 좀 외로웠을 것 같아.”
이번에는 내가 웃었다. 소리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나 보다. 그럼 나 역시 소리의 빈틈을 채우고 있었다는 뜻일 것이다.
“고마워.”
내 말에 소리는 대꾸 없이 웃었다. 충분한 대답이어서 나는 “금방 다녀올게”라며 혼자 숙소로 향했다. 대부분 바닷가에 나가 있었기에 숙소에는 교수진과 어제 술이 과했던 환자 몇몇만 있을 터였다. 나는 나갈 때와 달리 썰렁해진 길을 따라 숙소에 도착했다. 그때 누군가 여자 숙소에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도마뱀 선배였다. 나도 모르게 수풀 뒤로 몸을 숨겼다. 불쾌한 얼굴로 잠시 두리번거리던 선배는 금세 교수가 있는 별채 쪽으로 사라졌다. 저 사람이 왜 저기서 나와. 지금 여자 숙소에 있을 아이를 떠올리자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선배가 사라진 쪽을 거듭 확인하며 허겁지겁 숙소 계단을 올라갔다.
숙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갈 때와 같은 모양새였다. 둘이 엇갈렸나.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목적을 떠올려 소리와 내 외투를 챙겨 그대로 현관으로 향했다. 그러다 문득, 나는 멈춰 섰다. 왜인지 모르겠다. 알 수 없는 느낌에 화장실 쪽으로 시선이 갔다. 나무로 된 화장실 문은 닫혀있었다. 신발을 신던 나는 도로 벗어버리고 화장실 앞으로 다가갔다. 뻗은 손끝이 괜히 떨렸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문고리를 돌려보니 철컥. 잠긴 걸쇠 소리가 가슴 시리게 울렸다. 안에 누군가 있었다. 그때부터 무릎이 떨리며 가슴 밑바닥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집어삼키며 나는 한 번, 두 번 노크를 했다. 너무 크지도 않고 너무 빠르지도 않게. 주먹이 아닌 손톱 끝으로 천천히, 최대한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도 모든 곳이 여전히 조용했다. 반응은 없었지만 분명 소리 없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문틈 가까이 얼굴을 붙였다. 몇 번의 호흡 끝에 겨우 토씨 하나씩 밀어냈다.
“누구, 있어?”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문 너머에서 마치 썰물이 밀려나는 듯한, 높게 끓어올랐던 기운이 한순간에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불안이 내뿜는 냄새가 사라지고, 눈에 보일 듯 선명한 안도가 소리 없이 전해졌다. 그 침묵에 어째서인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다시 한번 노크를 할까. 아니면 “아이야 너니?”하고 이름을 불러볼까. 저울추가 좌우로 오가는데 안에서 작은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화자야?”
얇은 잎이 바르르 떨리듯이,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아이의 목소리였다.
“나야.”
최대한 힘을 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부터 물소리가 들렸다. 세면대 수도꼭지를 올린 것처럼 일정하게 쏟아지는 물소리였다. 주변은 그대로 침묵했다. ‘뭐해?’라고 물을까, 아니면 ‘괜찮아?’라고 물을까. 나는 우두커니 서서 고민했다. 평소였다면 어느 질문도 화장실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볼 말은 아니었다. 화장실에서 뭘 하겠어. 변비가 괜찮은 것도 아니고. 하지만 두근거리는 마음이 섣불리 입을 열지도, 자리에서 떠나지도 말라고 거듭 말해줬다. 문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말이 없었다. 비어 가는 공백 속에 물소리만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씨름 끝났어?”
아이가 작게 물었다.
“나도 다 못 보고 왔어. 추워서 옷 좀 챙기려고.”
“먼저 내려가 있을래? 금방 나갈게.”
나는 대답 없이 문을 짚었다. 내 손이 무심코 닿은 자리는 무엇에 찍힌 듯 표면이 손톱만큼 으깨져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미친놈처럼 두들긴 것 마냥. 울어? 왜 울어.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커질수록 물어볼 수 없는 마음도 함께 커졌다. “괜찮은 거야?”라니 “괜찮아”라고, “내가 먼저 나가 있는 게 나을까?”라는 말에 “금방 나갈게”라는 말이 되돌아왔다. 나는 결국 문에서 손을 떼고 숙소를 나섰다. 외투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입구를 지키듯이 바다를 바라보는 섰다. 그때 건물 옆쪽에서 발걸음이 일었다. 발소리는 거침없이 가까워지다가 나를 발견한 듯 코너에서 우뚝 멎었다. 수풀 너머라 누군지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수풀 아래로 삐죽 튀어나온 남성용 운동화와, 손이 든 열쇠뭉치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입구를 막아섰다. 얼굴이 튀어나오자마자 교수들이 있는 별채까지 들릴 만큼, 몇 년간 해본 적 없는 커다란 비명을 지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운동화는 나타나기 무섭게 사라졌다. 떠나는 발소리는 없었으나 인기척이 점점 멀어졌다.
대면조차 없는 대치였지만 그 짧은 순간만에 나는 창자가 꼬이는 것처럼 몸이 떨렸다. 주저앉으려는 무릎을 억지로 붙들고 있을 때,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누군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내딛는 걸음마다 아이의 모습이 발치부터 층층이 드러났다. 외투에 팔을 꿰는 아이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평소처럼 웃고 있는 말끔한 얼굴이었지만 내게는 추상화마냥 일그러져 보였다. 눈물 없이 우는 것 같기도 했고, 어디론가 떨어지는 중인 것도 같았다. 나도 모르게 앞에 선 아이의 팔을 그러쥐었다. 놓으면 사라질 것 같아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와 눈을 맞추고 나니 아이의 표정이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눈썹은 조금씩 내려왔고, 한쪽 입 꼬리가 더 올라가는 만큼 다른 쪽은 오히려 약간 쳐졌다. 이상한 얼굴이었지만 한 편으로 명확한 얼굴이기도 했다.
“무슨 일 있었어?”
내 물음에 아이는 고개를 저으며 “없었어”라고 말했다. 약간의 틈을 두고 연달아 “괜찮아”라고 다시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나는 아이가 엉성하게 걸치고 있던 외투를 제대로 추슬렀다. 아이는 자신의 목깃을 여미고 지퍼를 올리는 내 손을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이의 말대로 지금은 아무 일도 없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건 내가 여자여서도 아니고, 소심한 만큼 눈치가 빨라서도 아닌, 이 자리에서 아이와 마주 서있기에 알 수 있는 어떤 예감이었다. 직접 말해주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없었다. 그것이 아이가 내민 질문이었고 내가 풀어낸 해답이었다.
“가자”라며 아이가 내 손을 가볍게 잡았다. 지난주 바닷가로 가던 버스에서, 그의 방 침대 위에서, 그리고 오늘이 세 번째인 접촉. 나도 가볍게 마주 잡아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정체를 확인한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설명하기 어려운, 정말 굉장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얼굴로 이쪽을 향해 전력질주 중이었다. 놀라운 속도로 달려온 그가 우리 앞에 설 때까지, 우리는 손도 놓은 채로 눈물이 날 만큼 웃어야 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는 영문을 모르는 눈빛으로 우리를 번갈아봤다.
“무슨 일 있었냐고 묻지 마.”
찌를 듯 내민 내 손가락이 막 벌어지던 그의 입술을 붙들었다.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내가 아이의 보며 그렇게 말하자 아이는 이제야 평소처럼 웃어줬다. 그는 붕어처럼 입술을 몇 번 뻐끔거리다가 결국 입을 닫았다. 그가 들이닥치는 모습이 너무 거창해서 미처 몰랐었는데, 저 멀리에서 누군가 아직도 달려오는 중이었다. 작고 여린 체구를 보아하니 틀림없이 소리였다. 뛰지 말고 걸으라는 의미로 손을 흔드니 어째 속도가 아주 조금 빨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동안 아이가 그를 보며 물었다.
“씨름 이겼어?”
그는 아이와 나, 그리고 본인 뒤편에서 휴대전화를 쥐고 달려오는 소리를 번갈아봤다. 그리고 아이를 향해 조용히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 직관적인 표현에 아이와 나는 마주 보며 마음으로 웃었다. 그 어떤 말보다 멋진 손가락이었다.
열쇠가 없음을 깨달은 것은 집 앞이었다. 보스턴백의 겉 주머니에 아무것도 없었다. 기억이 분명하다면 열쇠뿐만 아니라 이어폰과 동전까지 있어야 했다. 손을 넣어 한참을 헤집고 나서야 주머니 구석에 가방 내부로 뜯어진 구멍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현관 앞 복도에 쪼그려 앉아 엉망진창으로 정리되어 있는 가방 속 내용물들을 모두 꺼냈다. 다행히 젖은 수건 사이에서 이어폰은 찾을 수 있었다. 바닥 곳곳에 눌려있는 동전들도 보였다. 하지만 속옷 주머니까지 털어 봐도 열쇠는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아마 주머니에서 내부로 빠진 상태에서, 물건을 꺼낼 때 함께 딸려 나와 숙소 방바닥에 떨어졌을 것이다. 누군가 발견해서 어딘가 위에 올려두었을 수도 있고, 아무도 보지 못한 채 우리가 떠난 자리를 청소하는 관리인 손에 들어갔을 수도 있다. 어쨌든 지금 현관 앞에서 온 짐을 풀어헤친 내게는 도움이 되지 않을 가정이었다.
초인종을 다섯 번 연달아 눌렀다. 문 너머에서 벨소리가 조용히 사그라지는 것을 확인한 나는 어쩔 수 없이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단축번호 1과 2 사이에서 오래 고민한 끝에 결국 1번을 길게 눌렀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받은 사람은 남자가 아닌 여자였다. 단축번호 2번의 주인이었다. 2번은 1번과 함께 있고, 1번 지인의 부친상 소식에 장례식장에 왔으며, 무엇보다 지방이라 했다. 내일 새벽에나 올라가서 동생들은 할머니 집에 가있다고 했다. 당연하게도 처음 듣는 소식이었다. 열쇠를 잃어버렸다고 말했더니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시끄러운 배경음 사이로 “멍청한 것”하는 1번의 목소리도 얼핏 들렸다. 할머니 집에 가거나 아니면 사촌 언니에게 가라는 2번의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나는 휴대전화를 내리기도 전에 어디로 가야 할지 마음을 굳혔다. 이 집에서야 그나마 인간대접을 받지, 2번의 엄마에게 나는 변기 닦는 솔보다 못한 존재였다.
벌써 달이 뜨기 시작했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반대편 정류장에서 버스를 잡아탔다. 가는 동안 사촌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별일이 없다면 언니는 분명 자취방에 있을 터였다. 하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사촌이고 같은 대학에 다니지만 불쑥 찾아갈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두어 번 더 시도해도 통화는 끝내 연결되지 않았다. 집에 있겠지. 대안이 없었던 나는 그리 생각했다. 어쩌면 씻느라 못 받았을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으로 선약 없이 찾아가는 실례를 무마하려 했다. 사정을 설명하면 갑자기 왔다고 싫어할 리가 없어. 부재중 전화도 찍어놨고. 피곤했던 나는 문자라도 미리 보낸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어둠 속에 잠긴 들판을 바라보다가 곧 역에 도착했다. 이 시간에 학교로 가는 것은 처음이었던지라 익숙한 길도 왠지 생경하게 느껴졌다. 마을버스를 타고 정문 앞에 내렸을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사촌 언니였다. 나는 아주 좋은 타이밍에 피곤함에도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좋아졌던 기분은 10초 만에 바닥으로 추락했다.
“전화했었네.”
“언니, 잤어?”
“아니야. 나 아직 바닷가야.”
“왜?”
당돌한 내 질문에 언니는 잠시 말이 없었다. 나는 빈손으로 허벅지를 내리치며 속으로 외쳤다. 언니 과도 1박 2일 아니었어?라고 했어야지. 내가 전전긍긍하며 숨을 죽이고 있자 언니는 잠시 후 “하루 더 있다 가려고 남았어”라며 대꾸했다. 그때 수화기 너머에서 왁자한 웃음소리가 터졌다. 언니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더 있는 듯했다.
“왜 전화했어?”
“아니야. 언니 잘 올라왔나 해서.”
내가 말끝을 흐리자 “빨리도 찾는다”라며 언니는 웃었다. 혹시 열쇠가 집 앞에 있는지 물어볼까 말까. 그런 고민을 하는 사이에 누군가 멀리서 언니를 불렀다. 지금 한창 즐거운 와중이었나 보다.
“피곤할 텐데 쉬어. 나중에 보자.”
언니는 그 말만 남기고 바람처럼 전화를 끊었다. 내가 “쉬어”라고 대꾸할 틈도 없이. 나는 기름기가 묻은 검정 화면을 망연히 내려다보다가 소매로 쓱 닦아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연락처를 뒤져봤다. 언니는 ‘가족’ 카테고리였기에 ‘대학교’ 카테고리에는 단 둘, 그와 소리뿐이었다. MT를 다녀왔다고 행여나 번호가 늘어나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불현듯 그의 자취방이 있는 쪽을 돌아봤다. 시선만 향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그쪽으로 걷고 있었다.
아래서 올려다본 창문은 컴컴하게 어두웠다. 그는 분명 이곳으로 왔을 것이다. 언니처럼 아이와 어딘가로 놀러 간 것이 아니라면 그의 자취방이 비어있을 가능성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이 꺼져 있다면 두 가지 경우였다. 아이와 잠시 어딜 나갔거나, 아니면 이미 잠들었거나. 사정을 설명하고 하룻밤 신세 지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고작 세 번 만에 그의 집은 꽤 편해진 상태였다. 아이가 먼저 일주일에 하루라도 묶고 가기를 권했다는 것과, 그의 승낙이 있었다는 점도 부담을 덜어내는데 한몫했다. 하지만 선뜻 연락하기 어려웠다. 오늘 아이의 소재를 모르기 때문이었다. 보통 주말이라면 아이는 집에 갔을 테니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다만 토요일 밤이었다. 1박 2일 일정에 피곤한 아이가 그대로 주저앉았을 수도 있었다. 만약 전화를 하거나 문을 두드렸는데 아이 없이 그만 있는 상황이 가장 두려웠다. 그렇다고 그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가 오늘 자고 가는지 떠볼 수도 없었다. 지친 몸으로 집에 간 내가 갑자기 전화해서 평소에 물을 리 없는 것을 물어본다? 말수는 없으면서 눈치만 빠른 그는 분명 꼬치꼬치 캐물을 것이다. 그럼 나는 또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너희 집 앞이라는 말을 불쑥 내뱉고 말겠지. 여기에 서서 창문으로 내려다보는 그와 눈이 마주치는 것은 노숙보다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나는 잠시 주차장 구석에 몸을 움츠렸다. 혹시라도 잠시 나갔던 둘이 돌아오지 않을까 기대하며, 돌아오는 이에게 보이지 않을 장소에 숨어 길가를 살펴봤다. 하지만 30분이 지나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점점 추워져서 10분에 하나씩 옷을 덧입던 몸도 이젠 한계였다. 기다리기를 포기한 나는 굳었던 다리를 두드리며 길가 쪽으로 나왔다. 이젠 어디를 가야 할까. 모텔 같은 숙박업소는 선택지에 넣지도 않았다. 가본 적도 없었고, 느낌 상 밝은 길가보다 더 무섭게 느껴졌다. 그럼 찜질방? 아니면 피시방? 여자 혼자 밤을 지새울 수 있는 장소를 떠올리려 하면서도 내 걸음을 착실히 학교로 향했다.
둘과 함께 야식을 사러 왔을 때 빼고는 이 시간의 학교 앞은 처음이었다. 정문을 지나 언덕길을 천천히 올랐다. 자정까진 멀었지만 이미 꽤 늦은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학교에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있었다. 불 켜진 도서관을 중심으로 뒤늦게 집에 가는 듯 바삐 걸어 내려오는 학생도 종종 보였다. 물론 맨 정신이 아닌 것 같은 사람도 더러 있었다. 시계를 확인해보니 도서관이 닫을 시간이었다. 열람실이 24시간 열리는 시험기간도 하필 내일부터였다. 나는 도서관을 지나 계속 위로 올라갔다. 올라갈수록 불 켜진 건물도 줄어들고, 인기척도 점점 사라졌다. 언덕 끝은 가로등 외에는 온통 컴컴했다. 대운동장을 가운데 두고, 올라가는 길을 뺀 삼면을 강의실 건물들이 둘러싼 모양새였다. 그중 오른쪽 건물이 우리 학과가 있는 건물이었다. 이곳까지 오니 어느 건물도 불 켜진 창문은 하나도 없었다. 내가 여기까지 왜 올라왔을까. 운동장 둘레에 경기장처럼 층층이 경사진 스탠드에서,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누가 있는지도 모를 구석의 한 커플 빼고는 오직 나뿐이었다. 나 역시 그곳에 사람이 있는지 모르고 스탠드를 서성이다가, 서로 한 몸처럼 겹쳐진 커플을 발견했다. 당황한 표정의 남녀와 눈이 마주친 후에야 서둘러 스탠드를 벗어났다. 놀라 정신없이 걷다 보니 우리 과 건물 앞이었다. 환한 낮과는 전혀 다른 인상이었다. 강의실뿐만 아니라 학과 사무실, 담당 교수실까지 있어서 사람이 모두 나간 밤에는 보안업체에 의해 잠긴다고 들었다. 불 켜진 곳이 없으니 당연히 잠겨있겠지. 확인 차 밀어본 중앙현관문이 쑤욱 열렸다. 나는 깜짝 놀라 유리에서 손을 뗐다. 아직 잠길 시간이 아닌 건가.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더 늦으면 잠길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갑자기 든든해졌다. 피시방의 허름한 의자보다, 찜질방의 칸막이 없는 수면실보다 곧 잠길 강의실 건물이 더 안전하게 느껴졌다. 나는 다시 한번 문이 열리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혹시 지켜보는 누가 없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린 후에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
보름달 덕분인지 불 꺼진 내부는 그리 어둡지 않았다. 왠지 무섭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살면서 귀신이나 유령이 무섭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언제나 사람이었다. 그래서 인기척 없이 고요한 실내가 무서움보다 편안함으로 다가왔다. 계단을 타고 4층까지 올라가자 자판기와 비상구 표시판의 불빛만 외로이 켜져 있었다. 왼쪽 복도로 접어들었다. 하루 중 절반 이상 머무르는 강의실들이 보였다. 강의실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그 안을 들여다봤을 때 나는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커다란 유리창 덕에 커튼 사이로 떨어진 달빛이 강의실 바닥에 좁지만 선명한 길을 만들고 있었다. 홀린 듯 그 길을 밝으며 창 앞에 섰다. 길게 펼쳐진 커튼을 한쪽으로 모았다. 강의실 안으로 환한 달빛이 가득 들이쳤다. 달빛이 너무 밝아서 책상과 의자 아래로 그림자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낮에는 절대 볼 수 없는 몽롱한 분위기였다. 나는 경탄에 휩싸였다. 좋다. 이거 너무 좋다. 사람들이 모여 수업을 듣는 한낮의 이 공간과 지금 이 공간 사이에 사람을 홀리게 하는 매력적인 간격이 있었다. 오늘 여기서 자자. 책상 위를 하얗게 물들이는 달을 올려다보며 나는 그렇게 결심했다.
내가 밤을 보내기로 결심한 이곳은 6인용 테이블이 아홉 개 놓여있는 크지 않은 강의실이었다. 다른 강의실들은 전부 의자에 작은 책상이 붙어있었다. 여기만 유일하게 테이블과 의자가 별개였다. 조별 위주인 수업 때 사용하는 강의실로, 책상 위에 적당히 깔아 둘 것만 있으면 앉거나 누워 잠을 잘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했다. 짐을 풀어 깔개 대신으로 쓸 옷가지를 찾던 나는 문득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왠지 커튼이 눈에 들어왔다. 취한 것이 달빛인지 분위기인지 모르겠으나 지금 나는 평소보다 용감했다. 어디서 그런 의지가 솟았는지 나는 의자를 치우고 테이블을 창문 쪽으로 밀기 시작했다. 바닥에 테이블 다리 긁히는 소리가 조용한 강의실을 크게 울렸다. 창틀에 테이블을 완전히 붙인 나는 신발을 벗고 테이블 위로 올라갔다. 길게 뻗은 손끝에 커튼 고리가 닿았다. 됐다. 큰 키가 이럴 때 도움이 되는구나. 닿지 않으면 의자까지 놓을 생각이었는데. 나는 천천히 하나씩, 오른쪽 커튼을 붙잡고 있는 고리를 빼어냈다. 점점 기울던 커튼은 마지막 고리를 빼내자 테이블 위로 완전히 떨어졌다.
커튼을 떼어낸 창은 마치 스크린 같았다. 화면 위쪽은 남청색 하늘과 동그랗게 달무리를 뿌리는 커다란 보름달이 있었고, 화면 아래쪽은 아직 불이 꺼지지 않는 도서관 건물과 가로등이 어두운 운동장과 수풀 사이에 듬성듬성 서있었다. 건물 바로 앞 계단부터 저 멀리 정문까지 파노라마처럼 한눈에 보였다. 우리 과가 주로 사용하는 이곳은 가장 높은 지대에 있는 건물 중 하나였다. 등교할 때는 최악이었지만 창을 통해 바라보는 풍광만큼은 그림 같았다. 커다란 블록 장난감 세계 같기도 했고, 서서히 움직이는 하나의 화폭 같기도 했다.
창밖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몸을 움직여서인지 3월 말의 차가운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아직 매달려 있는 왼쪽 커튼이 나풀거리며 옅은 먼지 냄새를 풍겼다.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양면의 색이 다른 이 커튼도 그랬다. 부드러운 검정 쪽과, 조금 뻣뻣한 느낌의 빨간 쪽을 손가락으로 문질러봤다. 검정 쪽에서 미세한 먼지들이 만져졌다. 나는 책상 위에 검정 쪽을 아래로 해서 깔았다. 그 위로 올라타서 가방을 뒤져봤다. 먹다 남긴 과자와 아직 열지 않은 주스 몇 개가 나왔다. 덮을 옷도 많았고 먹을 것도 있었다. 평소라면 없었을 세안 도구와 수건까지 있었다. 이 정도면 오늘 밤은 충분했다. 경쾌한 소리로 뚜껑을 땄다. 술 대신 주스로, 과자를 안주 삼아, 무릎을 끌어안고 눈앞에 펼쳐진 어두운 교내를 구경했다.
그때 테이블을 빠르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천이 깔리지 않은 곳에 둔 휴대전화가 진동하고 있었다. 화면에 그의 이름이 보였다. 이 시간에 웬일이지. 혹시 아까 집 앞에서 나를 본 건가. 아니면 걸어가던 나와 스쳐가기라도 했나. 어느 것이든 아까라면 모를까 이제와 전화하는 것은 이상했다. 전화의 진의를 가늠하며 생각의 꼬리를 잡는 동안 전화가 끊겼다. 아차. 나는 당황해서 서둘러 휴대전화를 손에 쥐었다. 부재중 통화 1개. 어쩌지. 내가 다시 걸어볼까. 하지만 고민이 길어지기 전에 전화는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화면에 손가락을 댔다.
“여보세요.”
“나야.”
낮고 얇은, 아이의 목소리였다. 역시 같이 있었구나. 하지만 아까만큼 아쉬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 아무도 없는 영화관이 더할 수 없이 마음에 든 차였으니까.
“지금 어디야?”
아이의 질문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습관적으로 전화기를 들지 않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입은 벌써 반쯤 벌어져있었다. 지금 불쑥 강의실이라고 내뱉으면 고작 10분 만에, 그를 대동한 아이가 등 뒤의 문으로 등장할 것이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대답했다.
“집이야. 방.”
아이는 잠시 말이 없었다. 거짓말에 마음이 불편해진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놀랐어.”
“왜?”
“아니, 이 시간에 웬일인가 해서.”
잠시 대꾸가 없던 아이는 잠시 후 “나인 줄 몰랐겠구나”라며 웃었다. 맑은 웃음소리가 마치 넓은 공간에 있는 것처럼 울렸다. 복도나 화장실치고 울림의 폭이 컸다. 목이 잠긴 내가 주스를 한 모금 들이켰다 내려놨을 때야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거기서 달 보여?”
달? 보이다 마다. 지금 내 머리 위에 곧 떨어질 것처럼 크게 떠있는걸. 창틀이 만들어낸 달그림자가 내 좌우를 격벽처럼 나눠놓고, 나를 밝은 네모 안에 고스란히 가둬놓은 채였다.
“보여.”
내 대답에 아이의 목소리는 기쁜 듯 조금 높아졌다.
“나는 지금 달을 보고 있어. 아주 크고, 둥글어.”
“나도 보고 있어.”
“지금 혼자 보고 있는데, 누군가와 같이 보고 싶더라. 문득 네가 생각났어.”
나도 저 달을 보며 가장 먼저 아이를 떠올렸다. 나는 보는 이도 없는데 고개를 끄덕이며 “응” 하고 답했다
“떨어져 있어도 같은 달을 보고 있으니까, 꼭 같이 있는 것 같다.”
수화기 너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옷이 서로 부대끼는 소리였다. 곧이어 “영차”하는 작은 기합소리와 함께 작은 숨이 길게 뻗어 나왔다.
“지금 바쁜 거 아니지?”
“응.”
“나도 자리 잡았어. 달 같이 보자.”
그 말을 끝으로 아이는 말이 없었다. 나도 섣부르게 대꾸하거나 말을 걸지 않았다. 이상했다. 평소와 달리 무슨 말을 해야겠다는 강박관념이 생기지 않았다. 말이 없어 불편함도 없었다. 수화기를 넘어온 아이의 기운이 그런 생각을 모두 날려 보냈다. 나는 그저 손에 든 전화기를 귀에 대고, 다른 손으로 종종 주스를 마시면서 달을 올려다봤다. 저쪽에서도 아이의 낮고 작은 숨소리와, 간혹 불어오는 바람소리만 들려왔다.
모든 것이 멈춰있고 달만 천천히 밤하늘을 걸어가는 시간. 휴대전화가 뜨거워지는 만큼 잡념들이 점점 사라졌다. 다른 감정들도 뒤로 밀려났다. 이 세상에 나와, 아이와, 저 달만 있는 것 같은 기묘한 기분이 온몸을 채웠다. 그래서인지, 몇 백 미터 너머 그의 집에 있을 아이가 마치 곁에 나란히 앉은 것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살면서 누군가를 이리 가깝게 느껴본 적이 있었던가. 내가 아닌 타인을, 다른 존재를 이렇게 코앞에, 아니 마치 서로의 존재가 일부나마 겹쳐있는 것처럼 실감했던 적이 있었을까.
그때 어디선가 건물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밖인가 봤더니 마음 안이었다. 원형으로 된 석탑이 있었던 흔적만 남긴 채 돌무더기가 되어있었다. 나도 모르게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쓰러진 돌덩이들이 마음 바닥을 후려쳤지만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손이 등허리를 단단히 받쳐주는 듯한, 이런 안도감 섞인 마음으로 혼자서도 외롭지 않게 운 것은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