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하게 살아라. 모두가 그것을 무시하더라도 선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의 삶은 일생동안 얼마만큼의 선을 전파하는지에 가치가 매겨진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그러려면 살아야 한다. 길 위에서 도중에 포기하면 안 돼. 무슨 일이 있어도 살고, 울어도 웃어도 산 채로 해야 한다. 살다가 문득 죽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죽고 싶지 않을 때까지 살고, 언젠가 더 살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순간이 올 때까지 죽지 마라. 모든 선행과 이야기는 그 위에서, 살고자 하는 의지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자이야. 하루하루를 죽어가지 말고 살아가라. 되도록 선하게, 너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
그렇게 말한 아빠는 죽었다. 마흔여덟 살, 오십도 되지 못한 이른 나이에.
자세한 기억은 남아 있지 않다. 그때 나는 어렸고, 아빠라는 테두리 밖에서 아빠를 이루고 있는 요소들까지 관심이 닿지 않았으니까.
아빠는 아마 사업체를 운영했던 것 같다. 의류에 관련된 작은 공장이었고, 어렴풋한 기억에 꽤나 적지 않은 직원이 있었던 듯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빠의 모습이 언제나 양복 대신 작업복인 것을 보니 공장 역시 오래되었을 것이다.
공장 사정은 꽤 괜찮았다고 기억한다. 외동이었던 나는 한 번도 무엇에 굶주려본 적이 없었다. 넓은 집에서 먹고 싶은 음식을 먹고, 필요한 물건을 가질 수 있는 삶이었다. 엄마는 늘 곁에 있었다. 아빠도 한가하지 않았지만 서로 소외감을 느낄 만큼 바쁘지도 않았다. 때로는 공장에 놀러 가서 일하는 아저씨들과 같이 밥을 먹기도 했고, 거기서 친해진 아저씨가 매번 챙겨주는 사탕을 손에 쥐고 돌아오기도 했다.
견고한 톱니바퀴처럼 규칙적으로 흘러가던 일상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 것은 내가 중학교에 들어갔을 무렵이었다. 자세히는 알려주지도 않았고 알 수도 없었으나 아빠의 취침시간이 늦어졌다. 해가 떨어지면 저녁을 먹고 열한 시도 되기 전에 잠들던 아빠가 밤늦게까지 깨어있는 날이 많아졌다. 학원을 다녀오면 어두운 거실에서 엄마와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하고 있거나 조그만 조명 아래서 홀로 술을 마시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었다. 어렸던 나는 그 신호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단지 요즘 경기가 안 좋다는데 아빠 공장도 조금 어렵나 보다. 그렇게만 생각했다.
“괜찮아. 우리 딸은 걱정 안 해도 돼.”
그때 아빠와 엄마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으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시간이 흐를수록 아빠의 일상이 들쑥날쑥 뒤틀리는 것이 보였다. 한가할 때는 하루 종일 집에만 있기도 하고, 바쁠 때는 며칠씩 집에 못 들어오기도 했다. 일렁거리는 아빠에 맞춰 엄마도 함께 흔들리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튼튼하지 않던 몸은 조금씩 허약하게 말라갔다. 혈색 없는 얼굴로 잔병치레를 겪는 일이 많아졌다. 하지만 평소에 견고하게 쌓아놓은 가정일수록 위기일 때 쉽게 흔들리지 않듯이 아빠와 엄마가 싸우는 일은 없었다. 두 분 다 끝까지 내게 웃음을 잃지 않았고 서로에 대한 독려도 잊지 않았다.
“돈의 액수가 당신의 가치가 되어선 안 돼. 돈을 벌어오는 행위 자체를 존중하는 거지.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가져오는 돈이 줄어들수록 당신의 가치 역시 줄어드는 거잖아.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아. 가져오는 액수가 얼마인지가 아니라, 우리 가족을 위해 밖에서 노력하고 애쓴다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훌륭한 가장이야.”
네 개였던 방과 넓은 거실이 모두 사라지고 작은 다세대 주택으로 이사했을 때, 바닥을 쓸고 있던 아빠에게 포장된 그릇을 풀던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물론 액수가 줄어들어 불편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당신을 원망하지 않아. 적은 것보다 많은 게 당연히 좋지. 하지만 그게 지금 우리가 행복하지 않을 이유도 아니고, 당신이 우리에게 그렇게 미안해할 이유도 아니야.”
엄마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아빠는 비질을 멈추고 창밖을 보고 있었다. 나도 화장실에서 누렇게 변색된 타일 사이를 닦다 말고 아빠의 등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다가간 엄마는 느린 손길로 아빠의 등을 쓸어내렸다.
“당신이 우리 모두를 부양하지 못할 수도 있어. 괜찮아. 계획대로만 살 수 없는 게 인생이니까. 단지 부양하려는 의지만은 포기하지 마.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야. 우리는 액수가 아니라 그 의지에 기대어 살고 있으니까. 얼마를 가져오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노력하는지가 가장의 가치일 거야. 모자란 부분은 나라도 보충할게. 만약 우리 둘이서도 부족하다면, 그땐 그냥 거기에 맞춰서 살자. 못해도 자이 하나 정도는 키울 수 있겠지. 작은 일에도 크게 웃고, 불편한 건 우리끼리 웃어넘기면서, 예전처럼 어디든 보내고 무엇이든 다 해주지 못해도, 스스로 찾아서 노력할 수 있는 아이로 키우자.”
엄마의 말은 아빠에게 하는 것임과 동시에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또 내게 하는 말이었다. 궁지에 몰린 부모가 눈을 질끈 감고 문드러지는 마음으로 자식에게 넌지시 내미는 손길이었다. 나는 그것만으로 족했다. 화장실에 욕조도 없고 배수구에선 시궁창 냄새가 올라왔지만 참을 수 있었다. 종종 뒤틀린 벽 틈으로 바퀴벌레가 나왔고 한 그릇에 음식을 담아 끼니를 때워야 하는 일이 늘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엄마가 저렇고 아빠가 여전하면, 셋이서 조금만 참고 살다 보면 우리는 언제고 다시 예전처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전 같은 부유함이 아니라, 그 규칙적으로 안온하고 보장된 것처럼 탄탄했던 행복함을 다시 되찾을 거라고.
하지만, 가을에 들어간 그 집에서 다음 가을도 되기 전에 아빠는 죽었다. 병도 아니었고 자살도 아닌 교통사고였다. 마음과 자존심 빼고는 아픈 곳 하나 없는 건강한 사람이 한순간에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버렸다. 그 소식을 들은 나는 교실에서 그대로 쓰러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병실이었다. 담임선생님과 친한 친구가 내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대로 지하로 내려가니 휑한 빈소에는 엄마만 앉아있었다.
그 뒤로는 정신없는 시간들이었다. 아빠의 죽음과 함께 몇 년 간 걸려만 있던 공장과 재판이 가장 먼저 날아갔다. 그 자리에 출처 모를 빚더미가 내려앉았다. 상속포기로 그중 대부분은 차감되었지만 친척들에게 빌린 돈만큼은 그대로 엄마에게 남아있었다. 그때부터 엄마는 일을 시작했다. 나도 학교를 그만두고 일하겠다고 대들다 처음으로 따귀를 맞았다. 그 후 우리는 더 작은 단칸방으로 이사해야 했다. 300에 25인 반지하, 집안을 나누는 벽은 화장실뿐인 곳에서 아침마다 나는 학교로, 엄마는 식당으로 나갔다.
자려고 불을 끄면 곰팡이로 변색된 벽지 위로 길 건너 간판이 푸르게 떠올랐다. 파란 조명 아래 누운 엄마의 기침소리가 잦아졌다. 엄마에게 특별한 병은 없었으나 허약한 몸이 나날이 나빠지고 있었다. 벽에 어슴푸레 떠있는 뒤집힌 BAR와 마주 누워 있다가 처음으로 깨달았다.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은, 숨을 쉬고 잠을 자며 하루를 보내는 일은 모두 돈이구나. 인간은 살아가는 자체만으로 무언가를 소모해야만 하는구나. 그걸 충당하는 이는 오직 엄마뿐이었고 나는 아니었다. 미성년이자 학생인 나는 생존을 위한 재화를 만들어내는 쪽이 아니라 그저 소모하는 쪽이었다. 등교하다 돌아본 엄마의 뒷모습에서 그 무게를 짐작한 나는 그때부터 아침에 눈을 뜨고 밤에 눈을 감는 일 말고는 모든 것이 사치로 보였다. 친구와 수다 떠는 일도, 어디로 놀러 가는 일도, TV나 영화를 보는 것도 모두 배부른 일이 되었다. 남들 다 가진 휴대폰조차 필요 없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된 나는 기계처럼 공부만 했다. 식사 시간외에는 해가 떠서 전구를 끌 때까지 책상 앞에만 앉아있었다. 오래 알고 지낸 친구들, 고등학교에서 새로 사귄 급우들은 전부 뒷전이 되었다. 학생인 내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로 하루를 가득 채우는 것. 오직 그것만이 일로 몸을 깎아가는 엄마 앞에서 차마 고개를 들게 했다.
편의점 삼각 김밥도 그 무렵 처음 먹어보았다. 대부분의 식사는 엄마가 식당에서 얻어온 음식으로 해결했지만 간혹 어쩔 수 없이 밖에서 사 먹어야 할 때는 오직 삼각 김밥 하나로 끼니를 때웠다. 괜찮은 음식이었다. 어디서나 사기 쉽고 가격이 쌌다. 무엇보다 1분이면 먹을 수 있어서 라면보다 훨씬 간편했다. 칼로리는 높지 않았으나 작은 체구인 내게는 하나만으로도 포만감이 있었다. 편의점 테이블에 앉아 김밥을 씹다가 종종 목이 막힐 때는 신선 칸에 진열된 딸기 우유로 눈이 가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우유를 사지 못했다. 삼각 김밥보다 더 비싼 우유를 사는 일이 잘못처럼 느껴졌다. 마치 우유를 사면 그만큼 엄마의 목에 기침 세포가 늘어날 것 같았다.
엄마가 기침으로 잠들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성적은 가파르게 올라갔다. 어느덧 반에서 1등이 되었고, 또 전교에서 가장 앞자리가 되었다. 선생들은 벌써부터 이 성적에 어디가 좋을지 여러 대학의 이름을 줄 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성적이 닿는 가장 좋은 대학에 갈 생각이 없었다. 장학금을 받으면서도 과외를 할 수 있는 적당히 좋은 대학. 지금 공부를 하는 이유는 오직 그것 때문이었다.
그렇게 겨울이 되고 2학년이 끝났다. 방학 도중에 엄마는 내게 누군가를 소개했다. 눈이 부리부리했고 턱이 각진 어떤 아저씨였다. 만나자마자 나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엄마 입에서 무슨 말을 나올지 미리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나는 남자의 인사 하나, 엄마의 말 한마디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몇 번 얼굴을 마주치며 천천히 말할 생각이었던 엄마는 그런 내 반응에 포기한 듯 그대로 본론을 꺼냈다.
“이분이랑 결혼할 거야.”
나는 그대로 눈앞에 놓인 접시를 손바닥으로 밀쳐냈다. 조용하던 식당에 유리 나뒹구는 투박한 소리가 가득 울렸다. 정체 모를 면요리가 붉은 카펫 위에 허옇게 흩뿌려졌다. 아빠 1주기가 고작 몇 달 전이었다. 그렇게 금슬 좋던 엄마가 1년 만에 다른 누군가와 재혼을 하겠다고 했다. 엄마가 그러는 이유는 명확했다. 곁에 앉은 저 남자를 사랑해서? 웃기는 소리. 본인이 힘들어서? 그것 역시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럼 도대체 뭐가 엄마에게 생전 느리던 삶의 속도를 서두르게 만들었을까. 누구 때문에, 누굴 위해서 엄마는 지금 안 맞는 신발을 신고 춤을 추는 사람 같은 표정일까. 결국 나였다. 오직 나 때문이었다. 하나뿐인 딸, 주변 몇 개 학교를 모아도 일등인 딸, 오직 딸 때문에. 돈만 있으면 벌레 부스럭거리는 소리 없이 잘 수 있다. 돈만 있으면 주워온 앉은뱅이책상 앞에서 뒷목이 굽어가며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 굳이 국립대가 아니더라도 돈만 있다면 유학도 보낼 수 있다. 돈만 있으면, 그 돈만 있으면 최소한 우리 딸은 이렇게 고생 안 하고 살 수 있다.
내팽개쳐진 그릇이 아닌 내 눈을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에서 엄마의 생각이 고스란히 보였다. 그대로 뛰쳐나온 나는 모르는 길을 하염없이 헤매기 시작했다. 육교의 커다란 계단을 헛디딜 정도로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나 때문에 엄마가 팔려간다. 아직 마음속에 아빠가 고스란히 들어있을 텐데 다른 남자의 집에서 같은 침대를 쓰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뛰쳐나온 나 역시 엄마의 재혼을 끝까지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야만 엄마가 기침 없이 잠들 테니까. 고된 식당일을 하지 않아야 뒹굴 자리도 없는 좁은 방에서 돌아누울 때 날갯죽지에서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울리지 않을 테니까. 엄마는 직접 일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지탱하고 받쳐주는데 재능이 있는 사람이지, 스스로 나가서 움직이는 것은 무리였다. 육교 위에서 눈이 내리는 하늘을 지켜보던 나는 발끝이 온통 젖었을 무렵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들였고, 나는 이틀 동안 감기몸살로 앓아누웠다.
결국 그 추위가 다 가시기도 전에 결혼식 없는 합가가 이뤄졌다. 당사자끼리만 상견례를 했다. 조용한 한식당에 네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았다. 이쪽은 엄마와 나였고, 반대쪽은 아저씨와 내 또래의 남자아이가 있었다. 아저씨에게도 아들이 있다고 들었을 뿐,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인사해. 앞으로 네 오빠가 될 경준이야.”
엄마의 말에 우리는 서로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아무 표정 없이 나를 바라봤다. 그때 마주 보는 내 표정이 어땠는지 알 수 없지만,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직관적으로 깨달았다. 얜 1이다. 어떤 분류인지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분류법으로 나누면 분명 극소수로 들어가는 놈이다. 순간 생각했다. 이 도마뱀 새끼가 정말 마음에 안 든다고. 그의 눈은 파충류의 것과 똑 닮았다. 무심한 표정과 달리 번들거리는 눈동자는 식사 내내 종종 나와 엄마를 훑고 지나갔다.
“엄마.”
상견례를 끝내고 돌아가는 택시에서 엄마는 나를 돌아봤다. 나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그동안 생각해오던 일이 대해 차분히 설명을 하고, 두 가지 부탁을 했다. 이미 결혼은 기정사실이었다. 엄마도 이제 아빠의 아내가 아니라 새아빠의 아내가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아빠의 딸이고 싶었다. 합가 후에도 최 씨가 아니라 여전히 백 씨이고 싶었다. 그게 내 첫 번째 부탁이었다. 말만 부탁이지 실상 요구였다. 엄마에게 먼저 허락을 받았고, 다음에 아저씨를 만났을 때 면전에서 직접 말했다. 아저씨는 의외로 쉽게 수락했다. 어쩌면 사춘기 시절의, 치기 어린 오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나중에라도 설득해 바꾸면 된다고 여겼을지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아직 백 씨였다.
그리고 두 번째 요구는 아저씨와 상관없는 우리만의 일이었다. 나는 되도록 빨리 ‘아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겠다고 말했다. 최소한 합가 전에 서류를 넣고 싶었다.
“자이야.”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엄마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자이라는 이름은 오직 아빠와 엄마, 그리고 내가 선택한 사람에게만 불리고 싶었다. 아저씨와, 무엇보다 그 도마뱀의 입으로는 절대 듣고 싶지 않았다. 몇 분의 대치 끝에 엄마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구청에 가서 개명 신청을 했고, 개명이 되건 되지 않건 그때부터 남들에게 아이라 불러 달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두 달 후, 나는 새로운 주민등록증을 받았다.
상견례 이후 두 번의 식사를 더 하고, 우리는 알량한 짐 꾸러미를 챙겨 그 집으로 들어갔다. 아저씨의 집은 예전 우리 집보다 두 배는 넓었고, 세 배는 고급스러웠다. 아예 다른 세계인 것처럼 수준이 달랐다. 엄마는 당연히 일을 그만뒀다. 뿐만 아니라 고용인의 시중도 받기 시작했다. 하루아침에 고용인에서 고용주의 신분이 되었다. 나는 3학년이 되었고, 화장실이 딸린 내 방을 다시 가지게 되었다. 이층이었고, 오빠 된 사람의 맞은편 방이었다.
처음 한 달은 꽤나 맹숭맹숭하게 흘러갔다. 아저씨는 회사 일로 바빠 이른 아침이나 저녁 늦게만 볼 수 있었고, 아들은 이제 대학생이었기에 낮이건 밤이건 집에 없기 일쑤였다. 낮은 주로 엄마와 나, 그리고 몇몇 고용인뿐이었다. 고용인들은 모두 공손하고 착하게 굴었다. 중간에 굴러들어 온 모녀라고 대놓고 업신여기지도 않고 뒤에서 수군거리지도 않았다. 그저 철저히 고용인 입장으로 우릴 대했다. 오히려 그게 편했다. 무시하는 것도 싫었지만 반대로 너무 가깝게 다가오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그런 식으로 다시 한 달이 훌쩍 지나갔다. 이제는 아침에 일어나도 경사진 지붕을 보며 낯설다는 생각이 없었다. 잠결에 불을 켜지 않고도 화장실을 자유롭게 오갔다. 사람이 새로 적응하는 능력에 매번 놀라면서도, 사람이 그런다는 사실만큼은 영 익숙해지지 않았다.
당장 닥친 현실을 순응하고 선입견까지 한 꺼풀을 벗고 보니 아저씨는 꽤 괜찮은 사람이었다. 아니 사람 자체만 보면 훌륭하기까지 했다. 나이답게 체신이 있었고 공정했다. 우리에게 과하게 다가오지도 않고 차근차근 거리를 좁히려는 노력이 눈에 선히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느 누구도 차별하지 않았다. 우리가 들어오기 전부터 아저씨의 집에는 내규가 있었고, 우리가 들어온 지금은 조금 고쳐졌을 뿐이지 여전히 존재했다. 집안에서 통용되는 그 규칙은 이 집에 사는 모두에게 동일하게 작용했다. 규칙을 만든 아저씨는 물론이고 엄마와 나, 그리고 아저씨의 아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든 어기면 페널티가 있었다. 서로의 가치관이나 영역이 충돌하는 일이 있으면 규칙에 맞춰 사태를 처리했다. 개인적으로 공감이 안 되거나 불편할 수는 있어도 공평하지 않아 납득이 안 되거나 차별받아 억울한 점은 없었다. 평생 함께 살아도 여전히 부대끼는 것이 가족이었다. 내내 남으로 살아온 우리야 오죽할까. 하지만 초반이 있을 법한 많은 갈등과 잡음은 그 규칙 덕에 대부분 해결되었다.
그리고 이 집에 들어와서야 알게 된 다른 것은, 아저씨는 생각보다 더 부자였다는 점이었다. 그냥 부자가 아니라 많이 부자였다. 커다란 의류업체의 오너인 아저씨는 포털 사이트에 이름을 치면 얼굴이 나오는, 사장님과 회장님의 중간쯤이었다. 고용인을 통해 알고 나서야 뒤늦게 엄마에게서 숨겨진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어느 드라마처럼 아빠의 공장을 공격하거나 뺏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와줬고, 무너질 때도 더 크게 무너지는 것을 막아줬으며, 부도 후 일부 설비와 직원을 인수해 고용을 이어갔다고 했다. 게다가 친척에게 진 빚도 대신 갚아줬고, 무엇보다 엄마와도 꽤 예전부터 알고 지낸 아빠의 친구였다고 했다. 내용만 보면 아저씨는 기도 속에서 튀어나온 슈퍼맨과 같았다. 다른 것은 그렇다 쳐도 아빠 친구였다는 말은 왜 진작 하지 않았는지. 그것만으로도 첫 만남에서 파스타 그릇을 뒤엎지는 않았을 텐데.
앞서 말한 세 가지가 한데 섞이면서, 아저씨와 나 사이에 낀 얼음은 빠르게 녹기 시작했다. 처음은 그저 엄마를 사가는 장사꾼이었지만, 이 집에 들어왔을 때는 꽤나 공정한 부자 아저씨였고, 이제는 아빠의 친구이자 집안의 은인이었다. 모르는 장사치와 아빠 친구를 바라보는 눈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늦은 밤에 안방을 노려보는 일이 없어졌다는 것을 꽤 나중에야 깨달았다. 서로 나누는 아침과 밤 인사에도 무표정 대신 옅게 미소가 끼어드는 날도 점점 늘어났다.
점차 나아지는 아저씨와의 관계에 비해 아저씨 아들과는 여전했다. 애당초 서로 마주칠 기회가 드물었다. 나는 새벽에 등교했다가 밤늦게 귀가하는 고3이었다. 주말마저 독서실 붙박이였으니, 현관이나 주방을 오갈 때만 겨우 스쳐가고는 했다. 내가 아저씨와 아직 호칭 없이 대화하듯, 그도 우리와 본론만으로 대화했다. 우리를 굴러온 거지새끼처럼 취급하지도 않았고, 유산을 노리고 기어들어온 도둑고양이처럼 보지도 않았다. 그저 종종 마주치며 깊은 관계를 맺지 않는 동거인처럼 대했다.
그렇게 시간은 바람에 날리는 달력처럼 훌렁훌렁 넘어갔다. 춥던 날씨가 풀리고 봄을 지나 조금씩 더워지기 시작했다. 어느덧 낮이 길어지고 밤이 짧아지는 계절이었다. 이제 나는 새집에 대한 적응을 마치고 어느 정도 마음이 풀어진 상태였다. 그동안 쌓아놓은 것이 아까워 오기처럼 1등만 간신히 쥐고 있었다. 폭염으로 모처럼 방과 후 자습이 없는 날, 나는 오랜만에 해가 떠있을 때 집에 왔다. 대문에서 벨을 누르니 장바구니를 든 고용인이 문을 열고 나왔다.
“장 보러 가세요?”
이제 제법 친해져서 말을 거는 일이 어색하지 않았다.
“날이 더워져서 사장님께서 사모님이 기운 날 만한 걸 드셨으면 하시네요.”
“엄마는요?”
“볼일 때문에 잠깐 나가셨어요.”
엄마를 위한 마음 씀씀이는 언제라도 나쁠 것 없었다. 조심히 다녀오라며 배웅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밖이 폭염이든 한파든 집안은 언제나 쾌적한 온도였다. 그때 식탁 앞에서 편한 차림으로 물을 마시고 있는 그와 마주쳤다.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했다. 의외였지만 대수로울 것은 없었기에 서로 짧은 인사와 근황만 주고받았다.
“웬일이야? 수업 있는 날이잖아.”
“술이 안 깨서 못 갔어. 너는?”
“폭염이라 일찍 끝났어.”
마치 친하지 않은 반 친구와 동네 도서관에서 만난 듯한 대화였다. 그는 마저 물을 마시고 나는 손부채질을 하며 방으로 올라왔다. 샤워부터 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오늘 치 공부를 할까 아니면 잠시 눈을 붙일까. 고민이 길어지기 전에 똑똑. 노크소리가 들렸다. 집 안에 둘 뿐인데 노크? 지금껏 그가 내 방문을 두드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새 엄마가 돌아왔나. “들어와”라고 대꾸했다. 문은 열리지 않고 “잠깐 괜찮아?”라는 그의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나는 누웠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무슨 할 말이 있나.
“응. 들어와.”
내가 승낙하자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그는 문을 닫기 전에 문고리의 걸쇠 단추부터 눌렀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문을 닫았……밀쳐내자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나뒹굴었다.
일곱 번째 주, 금요일
정신없이 읽어가던 나는 노트에 바짝 붙였던 고개를 뒤로 물렸다. 문장이 이상했다. 잔뜩 경직된 뒷목을 주무르며 방금 구절을 다시 읽어봤다. 자세히 살펴보니 ‘문을 닫았’의 다음 장이 없었다. 찢어낸 흔적만 있었다. 노트가 접히는 부분에 오돌토돌하게 남은 종잇조각이 찢어낸 것은 두 장임을 알려줬다. 노트를 덮은 나는 의자를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슴을 뒤흔드는 여러 감정들이 파도처럼 수차례 몰려왔다. 이 뒤를 봐도 될까. 솔직한 심정으로는 보고 싶지 않았다. 읽을수록 내가 알던 아이의 모습이 갈려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동경하고 바라 마지않던 백화점 코트가 안쪽을 뒤집어보니 불에 타 그슬려서 실밥이 풀어헤쳐진 느낌이었다. 내 머릿속에 멋대로 지어놓은 아이와의 화단에, 땅울림과 함께 커다란 발 그림자가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아이는 어째서 이걸 줬을까. 아이라면 이걸 읽던 내가 중간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리고 읽기를 계속 이어갈지 그만둘지 예상했을 것이다. 어쩌면 끝까지 읽은 내가 어떤 심정일지까지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아이는 내게 왜 노트를 줬을까.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며, 어떤 행동을 하리라 생각했을까.
나는 노트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빨간 표지가 왠지 땀과 기름으로 얼룩진 것 같았다. 어쩌면 눈물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노트를 쥐고 책상이 아닌 침대로 들어갔다. 등받이에 베개를 대고, 허리 어림까지 이불을 덮었다. 세운 무릎 위에 노트를 펼친 나는 찢어진 다음 장부터 읽기 시작했다.
……밀쳐내자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나뒹굴었다. 엉덩이부터 넘어져 그대로 뒤로 한 바퀴 구르며 바닥을 향해 엎어졌다. 그 사이 나는 책상으로 달려가 가방을 뒤졌다. 곧 손에 접고 펼 수 있는 자그만 나이프 하나를 쥐었다. 내가 그를 향해 날 끝을 내밀자 어깨부터 시작된 떨림이 칼끝까지 이어졌다. 그는 넘어진 자세에서 소리 내어 웃었다.
“그건 어디서 났어?”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나 역시 비틀어진 교복 상의를 바로잡으며 억지로 소리 내어 웃었다.
“요즘 인터넷에는 별별 걸 다 팔아. 몰랐어?”
나는 두 손으로 칼자루를 쥐고 한 걸음 다가갔다. 그는 서둘러 한 손을 내밀었다. 웃던 얼굴은 진작 사라져 있었다. 먹혔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또박또박 말을 뱉어냈다.
“잘 생각해. 나한테 더 요구하면 그땐 정말로 널 죽이고 나도 죽을 거야.”
말이 끝날 무렵 내 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나는 정말 그럴 생각이었다. 처음부터 이러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이렇게 조금씩 끌려가다 보면 답이 없었다. 조금은 그 이상이 되고, 그러다 보면 결국 끝까지 가게 될 것이다. 나는 자신과 상대 모두에게 최후통첩을 했다.
“이 짓을 계속하면 정말 널 죽일 거야. 지금이든, 씻고 있을 때든, 냉장고 앞에 서있을 때든, 잠들어 있을 때든 반드시 널 찌를 거야.”
말하다 보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단어 중간에 숨을 들이켜고 내쉴 때마다 턱이 덜덜 떨려왔다. 내가 다시 한 발을 앞으로 내밀자 그는 화들짝 일어나 뒤로 물러났다. 두 손바닥을 나를 향해 벌리고 조금씩 문을 향해 뒷걸음질 쳤다. 그가 문으로 향하는 속도보다 내가 다가가는 속도가 더 빠르다고 느꼈는지 그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기다려!”
그의 외침에 둘 다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얼굴에 억울함과 분노를 담은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너희 모녀를 들이기 위해 아버지는 돈과 불명예를 희생했어. 나 역시 집안의 공간과 유산의 일부를 포기해야 했고. 그 여자도 매일 밤 아버지에게 시달려야겠지. 너 하나 잘 키우겠다고 말이야. 이 조합을 위해 모두가 무엇인가를 희생했어. 근데 넌? 넌 뭘 희생했어? 너 빼고 다들 희생하는데 넌 그 여자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이 집에 들어와서 우리 아버지 돈으로 호의호식하면서 이 정도 희생도 못해?”
말하다 보니 화가 치미는지 그의 목소리는 어느 순간부터 떨리지 않았다.
“네가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는다면 넌 그저 우리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일 뿐이야. 그 여자는 너 하나 고생 안 시키겠다고 들어왔는데 넌 이 정도도 싫어? 입 다물고 가만히만 있으면 넌 내 지지를 얻을 수 있어. 잘 생각해봐. 내가 매일 그 여자에게 눈을 부라리고, 욕을 내뱉으면 어떨 것 같아? 고용인들을 동원해서 교묘하게 괴롭히면? 지나가다 발로 차면? 그래도 그 여자야 참겠지. 네가 자립할 때까지는. 근데 너만 참으면 최소한 내가 그 여자를 공격하는 일은 없을 거야. 어때? 괜찮은 거래 아니야?”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비릿하게 웃으며 다가오려 했다. 나는 그의 얼굴 쪽으로 손을 뻗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칼날에 그는 온 만큼 다시 물러났다.
“오늘 저녁에 당장 아저씨한테 말해볼까? 아저씨가 널 가만히 둘 것 같아?”
내 협박에 그의 눈이 독사처럼 번들거렸다.
“말하고 싶으면 말해. 아버지 성격 상 아마 큰일이 나겠지. 하지만 나는 하나뿐인 아들이야. 이 집 유일한 적자! 그 화는 절대 끝까지 가지 않아. 근데 그 여자가 알면 어떨까. 미천한 주제에 자존심만 센 그 여자가 과연 여기 계속 있을 것 같아? 너를 데리고 나가서 또 그 벌레 같은 체력으로 일을 하겠지. 더러운 식당에서 남이 먹은 접시나 닦으면서 말이야. 우리 아버지가 생활비를 지원해준다고 해도 그 여자가 받을 것 같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아버지가 주는 돈을? 가슴 좀 만지는 게 뭐 어때서? 닳는 것도 아니잖아. 말할 거면 해. 그 여자가 집 같지도 않은 거지 같은 방에서 앓아 죽는 꼴을 보고 싶으면.”
“그래. 말 안 할 거야. 하지만 여기까지야. 지금 이 칼이야 너도 뺏을 수 있겠지. 그러고는? 언제 어디서 다른 칼이 튀어나올지 하루 종일 긴장하고 살 수 있으면 어디 해봐.”
우리는 그대로 대치했다. 손에 든 것은 필통보다 가벼울 텐데 마치 벽돌만큼 무겁게 느껴졌다. 땀 때문에 미끄러져 놓칠 것 같았다. 내가 손잡이를 고쳐 잡자 그는 방문을 열고 도망치듯 나갔다. 곧 쿵쾅거리며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열린 방문을 한동안 노려보던 나는 문부터 잠갔다. 걸쇠가 걸리는 쇳소리에 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일시에 긴장이 풀리면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는 그 뒤로 한동안 접근하지 않았다. 몇 번 남몰래 내 방 앞을 서성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가방을 더듬기만 해도 언제 있었냐는 듯 자기 방으로 사라졌다. 나는 학교에서 최대한 늦게 귀가했다. 집에 있을 때는 엄마나 고용인과 늘 함께 있었다. 여의치 않을 때는 문고리를 걸고 방 안에만 있었다. 혹시 열쇠라도 있을까 봐 나는 용돈으로 업체를 불러 안쪽에서만 잠그고 열 수 있는 자물쇠도 설치했다. 역시 그는 여벌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문고리 걸쇠를 따고 문을 열려고 하다가 자물쇠를 확인한 후로 다른 시도는 없었다. 그렇다고 포기했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하루빨리 엄마를 데리고 이 집에서 도망쳐야 했다. 그러려면 돈이 필요했다. 최소한 엄마가 일하지 않아도 두 사람이 먹고살 수 있을 만큼의 돈. 스무 살이 되면 엄마와 아저씨에게 사실을 밝히고 나갈 생각이었다. 이 상황에 대학은 이미 무리였다. 어디라도 취직한다면 최소한 두 사람은 먹고살 수 있겠지.
그날부터 나는 휴대전화로 틈틈이 일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뒷자리에서 내 화면을 들여다본 여자애가 내게 돈이 필요하냐고 물어봤다. 내가 그렇다고 하니 자기가 일하는데 가볼 거냐고 물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학생도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했다. 학교를 마친 나는 옷을 갈아입고 여자애를 따라나섰다. 저녁 어스름한 시간에 여자애가 멈춰 선 곳은 아직 오픈 전의 유흥가 골목이었다.
“너 정도면 달에 오백, 아니 육백도 찍을 수 있을 거야. 민증은 내가 줄게.”
나는 어깨를 당기는 여자애의 손을 쳐냈다. 헛웃음이 나왔다. 그 도마뱀에게 벗어나고자 몸을 팔자니. 개도 안 웃을 일이었다. 비단 상관관계뿐만 아니라 긍지의 문제였다. 여기서 일하는 것이 도마뱀 앞에서 스스로 옷을 벗는 것과 뭐가 다를까. 달에 오백? 돈이라면 그 집에서 무사히 대학교를 졸업하고 아저씨 회사에 취직하는 게 사회적으로 인정도 받으며 훨씬 많이 벌 수 있었다.
“장소 때문에 그래? 여기서 일하는 거 아니야. 큰 언니가 주선만 해줄 거야.”
“넌 얼마나 벌어?”
나는 고개를 돌려 여자애를 봤다. 여자애는 웃으며 손가락을 폈다. 네 개. 자랑스럽게 웃는 얼굴이 도마뱀만큼 역겨웠다. 나는 어떻게든 기어 나오려고 발버둥을 치는데, 너는 애써 들어가고 있구나.
“돈 필요한 거 아니야?”
“맞아.”
필요하지. 살고 싶은 만큼.
“그럼 이 일만큼 빠르게 버는 것도 없어.”
대답 없는 내가 망설이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여자애는 나를 설득하려 했다.
“사람은 무언가 잃어버릴 각오가 섰을 때 어른이 되는 거야.”
소실을 겪어야만 어른이 된다. 원하고 노력하면 가질 수 있었던 것을 갖지 못했을 때 아이는 비로소 어른이 될 준비를 한다. 나도 동의하는 말이다. 다만.
“네가 할 말은 아니지.”
“뭐?”
“네가 이 일을 안 하면 누군가의 목숨이 위험해?”
아니라면 너는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버리는 거잖아. 내가 목숨 다음으로 버리지 않으려는 것을. 나는 그대로 돌아섰다. 모두가 나 같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파는 사람이 있고, 사는 사람도 있다. 다른 어딘가도 도마뱀 같은 축생이 있고, 나와는 달리 사태를 받아들이며 사는 사람 역시 있을 것이다. 모두가 나 같지는 않다. 아니, 어쩌면 나 밖에 없나. 다들 이런 식으로 변한 환경과 닥친 상황에 적응하고 수긍하며 살아가는데 나만 이런가. 내가 이상한 걸까. 생각이 길어질수록 어딘가로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점점 어느 것도 알 수가 없게 되는 듯했다. 이 세상에 마치 나뿐인 것처럼, 사람 많은 이 거리가 바다처럼 황량하게 외로웠다. 어서 돌아가서 엄마가 보고 싶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나를 향해 웃음 짓는 그 얼굴. 그리고 그 옆에 선 아저씨. 우리를 집에 들인 순간부터 매사 공평하게 대하려는 그 애정과 노력도 그리웠다. 그리고……. 내 얼굴은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 도마뱀만 없으면, 그 도마뱀이 차라리 여자였다면. 나를 식충이, 벌레, 먹다 남은 생선뼈처럼 취급해도 좋으니 차라리 우리가 자매였으면.
집까지 걸어오는 길은 짧지 않았다.
졸업 후에 어떻게 할지 완전히 정하지 못한 채 다시 한 달이 흘렀다. 언제부터인가 도마뱀은 다시 외박하기 시작해서 나는 약간이나마 숨을 쉬며 살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네 명이서 저녁을 먹어야 할 일이 있었다. 모두가 모여 있으면 문제는 없을 터였다. 나는 낮부터 고용인 곁에 붙어서 같이 음식을 준비했다. 저녁에 되어 아저씨가 돌아와서 네 명은 오랜만에 한 식탁에 모였다.
마주 앉은 면상을 최대한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인 채 밥을 먹고 있을 때, 어느 정도 식사를 마친 아저씨가 내게 말했다.
“아이야, 대학은 어딜 생각하고 있니?”
갑자기 튀어나온 대학 문제에 나는 바로 답할 수 없었다. 내 침묵을 미정으로 생각했는지 아저씨는 다시 말했다.
“지금 성적이면 어디든 문제없이 들어갈 수 있지?”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곁눈질로 본 아저씨는 그런 나를 마치 자기 딸처럼 자랑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물론 나중의 일이지만, 내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너 역시 회사에 한 자리를 맡아주길 바란다. 물론 특별히 원하는 다른 일이 없다면 말이다.”
거기까지 말한 아저씨는 잠시 내 반응을 살피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려면 되도록 네 오빠가 다니는 대학에 같은 학과로 진학했으면 한다.”
나는 일그러지는 표정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더 숙였다.
“그 학교가 내 모교이기도 하지만 우리 회사와 프로그램으로 연결되어 있어. 거기 부총장이 내 사촌이라 다니기도 편할 거고, 졸업 후에 뒷말 없이 입사하기에 가장 좋은 코스가 될 거야. 네 오빠도 그래서 거길 들어갔다. 올해를 마치면 군대에 갔다가 바로 교환학생을 갈 거니, 네가 거기 진학한다 해도 아쉽게도 남매가 캠퍼스에서 만날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아저씨의 말에 내 눈이 번쩍 뜨였다. 잠시 햇수를 계산한 끝에 하나의 그럴듯한 그림이 그려졌다.
“교환학생을 간다고요?”
내가 되묻자 관심이 있는 줄 알고 아저씨의 목소리가 한층 밝아졌다.
“그래. 입학 때부터 정해진 일정이다. 높은 자리에 오르려면 단지 어학뿐만 아니라 그런 경력도 필요하지. 원한다면 너도 그러면 좋고.”
예전보다 성적이 조금 떨어졌지만 그래도 다른 괜찮은 대학의 전액 장학금 정도는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엄마와 둘이 사는 생활비가 있었다. 문제는 또 돈이었다. 학자금 융자에서 받는 생활비 대출로는 부족했다. 과외도 하겠지만 성적이 떨어졌으니 예전만큼 좋은 대학은 아니어서, 끊이지 않고 과외를 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다른 일을 한다 해도 장학금과 아르바이트 사이에서 외줄 타기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럼 엄마는 분명 일을 하겠지. 아무리 말려도 그럴 것이다. 반면 아저씨가 말하는 대학에 가면 엄마는 3년 동안 편히 지낼 수 있다. 나도 학점과 자격증에만 집중할 수 있다. 4학년 때 취업과 동시에 모든 것을 밝히고 나오면 된다. 도마뱀과 내내 같이 다녀야 했다면 논할 가치도 없었다. 하지만 아저씨 말대로 같은 학교일 뿐 만나지 않는다면? 나는 잠시 고민을 하는 척하며 그림의 구성을 잡아갔다. 내년에 입학하면 내가 2학년을 마칠 때까지 도마뱀은 군대에 있다. 3학년과 4학년 다닐 때는 도마뱀은 교환학생과 어학연수를 간다. 그럼 도마뱀이 돌아오기 전에 나는 이미 졸업을 했을 것이다. 1년 만에 돌아온다 해도 괜찮았다. 4학년이 되자마자 어디든 취업을 하고 취업계를 내면 되니까. 이 학교라면 과할 정도로 충분할 학벌이었다. 그 학벌에 몇 개의 자격증이라면 엄마와 둘이 먹고살 만큼 돈을 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물론 나중에 사정을 알게 된 엄마는 화를 내겠지. 왜 그랬냐며 한스럽게 울겠지. 그러나 나는 엄마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기침으로 잠들지 못하는 엄마를 보고 싶지 않다. 나만 잘 피해 다니면, 조금만 더 참으면 엄마가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엄마를 봤다. 엄마는 다른 욕심은 없어 보였다. 회사의 한 자리 같은 것은 엄마에게 의미가 없었다. 내가 원하면 그러고 아니면 말라는 식이었다. 나는 원하는 일이었다. 물론 아저씨가 생각한 그림과 전혀 다른 결말이겠지만.
엄마의 안색을 확인한 나는 아저씨를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갈 구멍을 발견해서 들떴었는지, 맞은편에 있는 도마뱀의 안색을 살피지 못한 것이 실수였다.
그런 내 계획은 삼 개월쯤이 지나서 도마뱀의 한 마디에 뒤틀리기 시작했다. 수능이 끝나고 더는 야자도 없어 가족끼리 저녁을 먹는 횟수가 많아졌다. 아저씨는 기뻐 보였지만 나는 죽을 맛이었다. 도마뱀과 마주 앉아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언제나처럼 고개를 숙이고 먹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 저녁식사가 끝나갈 무렵, 도마뱀이 선언하듯 말했다.
“한 학기 더 다니고 입대할까 합니다.”
수능이 끝나고 원하던 대학도 붙었다. 학과 수석이었다. 사실 그만큼 수능을 잘 본 것 같지는 않았는데, 어쨌든 수석이라니 기분은 좋았다. 하지만 합격을 축하하는 자리에 도마뱀은 폭탄을 던졌다. 마치 엿이나 먹으라는 듯, 말을 하고 나를 보며 씩 웃기도 했다. 거칠게 노려보던 나는 엄마의 시선을 느끼고 급히 고개를 숙였다. 음식물을 포크로 저미면서 온 신경은 귀에 쏠려있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
“마음 같아서는 1년 더 다니고 싶어요. 유학도 중요하지만 지금 학교 인맥도 중요하니까요. 곧 졸업할 사람들과 유의미한 인맥을 쌓기엔 아무래도 1년 가지고는 조금 부족하다고 느꼈어요.”
“그건 그렇지” 하며 아저씨는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미약하게 끄덕였다.
“그렇다고 2학년을 다 마치기엔 시기가 어중간하고요. 차라리 1학기 끝나고 군대에 다녀와서 코스모스로 복학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뭐, 나는 둘 다 상관없다 싶지만.”
아저씨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투로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아저씨를 보고 있었음에도 도마뱀과 눈이 마주친 것 같아 속이 울렁거렸다.
“동생이 자리 잡게 도와주고 싶어요. 아무래도 동생 혼자 선배들과 친해지는 거랑 제가 다리를 놔주는 건 다를 테니까요. 그리고 같은 과에 다니면서 한 학기도 함께 못 다니는 것도 좀 아쉽고요.”
도마뱀은 그렇게 말하며 말끔하게 웃었다. 저 미소만 보면 다른 사심 없이 그 이유만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제야 아저씨는 좋은 생각이라는 듯이 강한 긍정을 내비쳤다.
“그건 좋은 생각이구나. 그럼 그렇게 해라.”
아저씨의 승낙이 떨어지자 도마뱀의 얼굴이 내 쪽을 향했다. 보지 않아도 아마 세상에서 가장 자상한 이복오빠의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 뻔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전화했었는데.”
도마뱀은 덤덤한 말투로 내게 말했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이지. 대꾸조차 하기 싫었지만 다른 눈들도 있어서 억지로 입술을 뗐다.
“무음이라서 몰랐어.”
고개 숙인 내 대꾸에 아저씨가 의아한 듯 나를 봤다. 계획이 어긋나 거의 패닉 상태였던 나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포크를 휘적이고 있었다. 훈훈하던 분위기가 삐걱거리려던 찰나, 나 대신 엄마가 말했다.
“얘 공부할 때 습관이에요. 핸드폰 울리면 집중 끊어진다고. 거기에 익숙해져서 아직 그러나 보네요.”
“무슨 일로 전화했는데?”
아저씨의 말에 도마뱀이 물을 마시며 말했다.
“소식 듣고 축하한다고 말해주려고요. 그리고 시간 되면 점심이나 같이 먹을까 했죠. 아까 동생네 학교 근처였거든요.”
“그래. 너도 놀러 다니지만 말고 동생 맛있는 것도 사주고 그래라. 너만 입이냐?”
“안 그래도 학교 근처에 맛집 많으니까, 입학하면 자주 먹으려고요.”
“그래. 그러면서 선배들과 안면도 트고 하면 좋지.”
반년 넘게 가까워질 기미가 없던 남매 사이였는데, 아들이 먼저 노력하는 듯하자 아저씨는 기분이 좋은지 큰 소리로 웃었다. 도마뱀도 따라 웃었고 엄마도 분위기에 맞춰 조용한 미소를 지었다. 나만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슬쩍 추켜올린 눈썹 너머로 도마뱀과 짧게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도마뱀이 왜 난데없는 짓을 하는지 깨달았다. 저건 시위였다. 무슨 계획인지 훤히 보인다고. 그대로 놔둘 것 같냐고. 앞으로 전화 무시하지 말라고.
지난번 아저씨와 내 대화를 들은 도마뱀도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성인이 되자마자 뛰쳐나갈 것 같던 내가 겹치지 않는다는 것을 듣고서 자신과 같은 과를 간다니. 바보가 아닌 이상 무슨 계획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기다렸다가 오늘에서야 저 말을 꺼낸 것이다. 그럼 한 학기 동안 내가 분명 학교에서 자기를 피해 다니겠지. 오전은 모두 신입생 공통 수업이다. 자기의 오후 수업이 알아내서 그것만 피하면 최소한 같은 수업을 들을 일은 없었다. 학과 행사도 모조리 빠지고 점에서 점으로 이동하면 학교에서 찾아내기 쉽지 않을 것이다. 피해 다니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입학하고도 내가 전화를 안 받으면 이런 자리에서 또 말을 꺼내겠지. 같은 학교 같은 과인데도 동생과 만나기 어렵다고. ‘전화는 받지? 아버지가 우리 관계를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앞으로의 네 계획에도 좋지 않을 텐데.’ 방금 도마뱀이 말한 세 문장은 그런 뜻이었다.
즐거웠던 기분은 이미 전부 사라져 있었다. 조금 전부터 아랫배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나는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그릇에 놓인 고기를 포크로 강하게 내리눌렀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베개 아래 칼을 쥐고 자면서 매일 밤 수백 번을 더 생각했다. 차라리 여자였으면. 나와 자매였으면. 나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않고 내 정수리에 뜨거운 차를 부어도 저 도마뱀이 여자였으면. 도마뱀의 노림수대로 이제와 재수도 반수도 할 수 없으니 입학은 정해졌다. 아저씨와 엄마, 고용인과 자물쇠가 있는 집보다 학교가 더 위험했다. 다른 수업을 듣고 학과 행사를 빠진다 해도 오가는 어느 동선에서 마주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쩌면 이미 학교에 자기 사람들이 가득할 수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방금 도마뱀이 말한 전화는 그냥 전화가 아니었다. 받고 몇 마디 대꾸한 뒤에 끊어버리면 되는 그런 간단한 통화가 아니었다. 내게 그렇게 보이고 싶은 뿐, 저건 함정이었다. 받는 순간 방금과 같은 상황이 연달아 이어질 것이 뻔했다. 아저씨의 눈치를 구실 삼아 전화를 받게 하고, 아저씨의 인맥을 구실 삼아 학교에서 거절하기 어려운 자리에 참석하도록 하고, 사람들과 억지로 인맥을 연결시켜 그로부터 내 행동, 동선, 상황을 옮아 매려는 의도. 학교에서의 내 이점과 내가 취할 수 있는 선택을 줄이려는 노림수였다. 우리 관계를 아저씨가 눈치채면 내 계획이 어그러질 테니까. 가깝지는 않지만 나쁘지도 않게 보이기 위해 나는 거기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본인 역시 외줄 타기겠지만 학교에 도와주는 사람이 많다면 분명 내가 먼저 떨어질 외줄이었다. 전혀 쥐덫처럼 보이지 않는 동굴 입구에 놓인 치즈가 전화였다. 동시에 깨달았다. 넌 단순히 내 몸만 목적이 아니구나. 하긴, 그 재력에, 그 학벌에, 겉모습은 멀쩡하니 여자가 궁할리가. 지금 너는 게임 중이구나. 난이도 있는 퍼즐을 풀 듯, 쉽게 굴복하지 않은 짐승을 길들이듯 나를 대하고 있구나. 너는 결국 네가 이길 거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러니 이런 구멍이 뚫려 있는 그물도 가벼운 마음으로 던져보는 거고. 방심해줘서 고맙네. 덕분에 대처가 가능하니. 다행히 난 이것의 해결법을 안다. 아마 초등학교 때부터 당연하게 쥐고 컸을 도마뱀은 상상조차 못 해봤을 방법일 것이다. 나는 중3부터 이 집에 들어오기 전까지 그렇게 살았다. 그래도 아무런 불편 없이 살 수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게다가 도마뱀의 수작을 초장부터 뭉개고, 누가 적일지 모르는 학과 사람들과 거리를 두기에 가장 좋은 명분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학교를 오가는 동선 중에 나를 보호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다행히 내게는 사람의 영역을 알아보는 재능이 있다. 1퍼센트인 여자, 아니 1퍼센트기만 하다면 남자여도 괜찮았다. 어쨌든 학교에서 저 도마뱀으로부터 나를 둘러싸줄 누군가가.
쑤시던 아랫배는 금세 가라앉았다. 계획이 조금 틀어졌지만 아직은 감수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엄마의 건강과 생활비를 위해서라면 한 한기만, 딱 삼 개월만 버티면 되는 일이다. 이후 휴가나 귀국 때는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다. 그럼 이 한 학기가 인생에서 도마뱀과 마주치는 마지막 삼 개월일 것이다.
그리고 개강 전날 밤, 나는 엄마와 주방에서 조용히 마주 앉아 있었다.
“내일부터 핸드폰 안 쓸 거야.”
“왜?”
“수능 보기 전까진 무음이라 괜찮았는데, 안 쓰던 걸 쓰려니까 신경 쓰여서 몇 달째 잠을 제대로 못 자.”
“잘 때 꺼놓으면 되잖아.”
“그게 아니라 그냥 있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야. 전화받고 문자 오고 전부 미치겠어. 불면증 나을 때까지 몇 달만 그러겠다고 아저씨한테 말 좀 잘해줘. 작년에 환경 바뀌고 공부하느라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아직 예민한 것 같다고. 이 집 들어오기 전에 몇 년 동안 핸드폰이 없기도 해서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엄마는 잠시 나를 가만히 보기만 했다. 그리고 얼마간 담아둔 질문을 꺼내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혹시 엄마한테 말 못 할 일이 있니?”
“무슨 말이야? 없어, 그런 거.”
나는 웬 이상한 말을 하냐는 표정으로 퉁을 놓았다. 지금까지 참았는데 이 시기에 말할쏘냐.
“아니면 지금 생활에 적응이 어렵니?”
“아니야. 나름 잘 지내고 있어. 이제 아저씨랑도 별로 안 불편하고. 아줌마들하고도 다 친해졌고.”
나중에, 아주 나중에 다 말할게. 다 꺼내놓고 엄마한테 등짝 맞으면서 그때 나 엄마 붙잡고 펑펑 울게. 내뱉고 싶은 많은 것들을 뚱한 무표정으로 거듭 감쌌다. 마주 놓은 차 한 잔이 온통 식는 동안 엄마는 나를 말없이 바라만 봤다. 나 역시 입을 열지 않고 식탁 어딘가에 시선을 뒀다.
“엄마 아는 사람도 거기 입학했어. 믿을만한, 좋은 면에서 1인 아이야.”
끝내 내게 시선을 거둔 엄마는 차를 들며 그렇게 말했다. 바로 이해하지 못해 엄마를 잠시 지켜보았다. 차를 내려놓는 엄마의 얼굴은 여러 감정이 뒤섞인 채였다.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의지 하렴. 무슨 일 있으면 그 아이 전화로 연락하고.”
아마 아무것도 알지 못할 엄마의 눈은 이미 많은 분위기를 아는 듯이 나를 보고 있었다. 어쩌면 엄마는 일편이나마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왜인지는 모르나 딸이 이 집에서 함께 사는 남자아이를 끔찍이도 싫어한다는 사실을.
“누군데?”
내 물음에 엄마는 웃었다.
“찾아보는 것도 재밌지 않을까?”
하나도 재미없을 것 같았지만, 나도 그냥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곱 번째 주, 금요일
계속 일정하던 펜이 여기서부터 바뀌기 시작했다. 파란색이었다가 다시 검정이었다가, 단락마다 글씨 굵기도 제각각이 되었다.
개강을 했다. 짧은 수업 개요와 교재 소개뿐인 첫 주 수업만으로는 엄마가 말한 사람을 찾지 못했다. 나는 교수가 설명하는 칠판보다 강의실에 모인 면면들을 차분히 살폈다. 떠드는 학생, 경청 중인 학생, 다른 생각 중인 학생, 그 개개인과 짧게라도 눈을 맞췄다. 눈을 맞추고 그 너머를 잠시라도 들여다봐야 구분할 수 있으니까. 모두와 맞춘 것은 아니었다. 줄곧 응시해도 이쪽을 바라보지 않은 몇몇도 있었다. 나는 억지로 말을 걸지 않았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그 몇을 제외하고 나머지 대부분은 나와 눈이 마주치면 자기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당황하다가, 곧 시선을 피했다. 그 뒤로는 힐끔거리며 내 시선을 신경 쓸 뿐, 나와 곧게 눈을 맞춰오는 사람은 없었다. 일주일 내내 오전은 모두 신입생 공통 수업이었다. 이번에 입학한 신입생이 전부 모이는 자리였다. 엄마가 말한 사람은 분명 이중에 있을 것이다. 아예 출석하지 않았으면 모를까.
그러던 목요일 날, 신입생 환영회에 참석했다. 술집에는 신입생뿐만 아니라 학과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여기서도 고개를 숙이고 있을 수는 없을 테니 엄마가 말한 친구를 찾을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웃는 얼굴로 곁에 앉은 사람부터 하나씩 살펴보았다. 중간에 도마뱀이 등장해 내 앞에 앉은 남자 신입생을 빼내고 앉았다. 지난 삼 일간 점에서 점으로 움직였기에 학교에서는 처음 마주친 거였다. 미리 말을 맞추지 않았지만 우리는 서로를 초면처럼 대했다. 남들 눈에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집에서나 밖에서나 여전히 새는 바가지였다. 예의 있는 척, 멀쩡한 척 가면을 쓰고 있지만 시시때때로 번들거리는 눈동자는 개 버릇 남 못 주듯 틈새로 새어 나왔다. 지금껏 다양한 1퍼센트의 사람을 만나왔지만 내 인생 최악의 인물. 분위기를 살피던 나는 내내 벼르던 기회를 잡아 눈앞에서 도마뱀을 쫓아냈다. 모멸감을 숨기지 못하고 도망치듯 자리를 뜨는 뒷모습에 속이 다 시원했다.
나 때문에 일렁거렸던 분위기는 금세 가라앉았다. 환영회의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이곳저곳에서 넘어오는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한 명씩 말을 나눌수록 선명하던 눈코입이 점점 흐릿해져 갔다. 그러다 이내 완전히 사라져 달걀귀신처럼 되었다. 나는 확인을 마쳐 이목구비가 없어진 매끈한 얼굴 위에 99라는 빨간 도장을 찍었다. 넌 아니야. 너도 아니야. 이 테이블은 없어. 엄마가 말한 친구는 쉬이 나타나지 않았다. 혹시 오늘 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 점점 얼굴 없는 사람들 속에서 웃고 있을 무렵, 매끈한 얼굴들 사이로 여전히 또렷한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도 둘이나. 남자아이는 장례 중인 표정으로 앞 접시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자아이는 강아지 같은 눈으로 이쪽을, 정확히는 나를 힐끔거리며 훔쳐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행동을 보니 여간해서는 눈을 맞추기 어려워 보였다. 틈을 보다가 도마뱀과의 문제로 모든 시선이 내게 몰렸을 때 여자아이의 눈길을 잡아챘다. 우리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찾았다. 대다수가 아닌 극소수, 1퍼센트의 사람이었다. 너였구나. 나는 남들이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저 여자아이가 일어날 때까지 자리를 지킬 생각이었다.
엄마가 말한 사람은 여자가 아닌 남자아이였다. 정확한 사정을 모르는 엄마니 성별은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나도 괜찮았다. 아니, 사실 걱정은 됐다. 하지만 그와 마주 서서 두 눈 너머를 들여다본 순간 확신했다. 그는 무해하다. 나는 그의 성별 때문에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남자기보다 1퍼센트의 사람이었다. 대다수의 남자와 다른 남자. 엄마도 그의 이런 성향을 들여다봤으니 의지하라고 했겠지. 그럼 그는 괜찮을 것이다. 오래 붙어있어도 나를 위협하지 않고, 그의 방에 머물러도 내가 원치 않는 일을 진행하지 않을 것이다. 들여다본 눈 속에 아직 알 수 없는 다른 감정도 있었으나 내 본능은 그것을 경계하지 않았다. 어떤 감정인지 그는 쉽게 털어놓지 않겠지만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알게 될 일이었다.
그와 함께 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다. 근처를 서성이던 도마뱀은 번번이 그에게 막혀 다가오지 못했다. 그는 조용하지만 기세가 사나운 인물이었다. 평생을 맥락 없이 살아왔을 도마뱀 따위가 치기로 덤벼들 상대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신입생 환영회 다음 주, 도서관 자료실에서 한 번 맞부딪친 일로 확인했다. 그는 나를 보호하듯 서서 가만히 노려보기만 했으나 도마뱀은 제풀에 꼬리를 감추고 도망쳤다. 기사님 납셨다며 비웃으며 떠났지만 나는 도마뱀이 내심 겁먹었다는 것을, 정확히 표현하자면 시쳇말로 ‘쫄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유치하다고 생각했던 남자들 사이의 기세 싸움도 마냥 쓸데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를 봤지만 사정을 알지 못하는 엄마로서도, 사정을 알지만 그를 보지 못했던 나로서도 그는 정확한 인선이었다. 그가 있은 한 학교에서는 쉽게 다가오지 못할 것이다. 내가 그와 떨어지는 순간은 화장실 정도뿐이니. 스스로 켕기는 일인 만큼 그와 억지로 다투면서까지 일을 크게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학교가 해결되니 이제 집이 문제였다. 혼자 자취하는 것은 호랑이굴로 들어가는 셈이어서 아예 그의 방에 머물기로 했다. 본가는 아저씨나 엄마 둘 중 한 명이 늘 있는 주말에만 돌아가기로 했다. 막상 자취 아닌 자취를 하려니 엄마보다 아저씨가 문제였다. 핑계가 필요했다. 방주인이 되어줄 여자아이. 신입생 환영회에서 봤던 강아지를 닮은 여자아이가 바로 떠올랐다. 나를 피하는 것 같아 멀리서 지켜만 보고 있었지만 더는 그럴 수 없었다. 나는 그를 대동한 채 무작정 만나러 갔다. 그리고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어떻게든 바닷가로 데려갔다.
낮에 그와 다니고, 밤에 그의 방에서 묵었다. 일주일에 한 번 화자도 함께 묵었다. 본가는 주말에만 갔고, 아저씨에게는 화자네 방에서 지낸다고 말했다. 물론 엄마에게는 사실대로 말했다. 엄마는 걱정스러운 눈치였으나 말리지는 않았다. 그 눈빛이 왠지 나보다 그를 더 믿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그렇게 한 달 만에, 도마뱀으로부터 나를 보호할 구조가 완성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두 달이다. 기말고사까지만 버티면 이 인재지변도 전부 끝이다.
일곱 번째 주, 금요일
이다음 장 첫 줄에는 ‘외투를 집어 든 순간’이라고 적혀있었다. 그리고 지우는 것처럼 그 문장 위에 삭제 선을 덧 그어놨다. 무슨 이야기를 쓰려다 만 것인지 그 장에는 적었다 지운 그 한 줄뿐이었다. 그다음 장도 마찬가지였다. ‘슈퍼에서 나오던 내가 불쑥 내뱉었다’라는 한 문장뿐이었고, 그 위에도 삭제 선이 있었다.
…이런 내 생각이 명확해진 때는 MT 둘째 날, 숙소로 쫓아 들어온 도마뱀이 화장실 문을 미친 듯이 두드리다 나간 후에 화자를 만났을 때였다. 그리고 그래야겠다고 확신한 순간은 그날 밤 화자와 함께 달을 봤던 순간이었다.
중간고사가 끝나면, 화자를 집에 초대하기로 했다. 엄마와 아저씨에게 인사시키고, 내가 사는 집과 방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돌아가는 화자에게 이 노트를 줄 생각이다.
일곱 번째 주, 금요일
내가 등장하는 장면부터 같은 굵기의 검은색으로 글씨가 균일해졌다. 하나의 펜으로 적은 듯하다.
나는 문득 홀더에 꽂힌 펜으로 눈길이 갔다. 0.5mm-black. 물건은 사람과 달리 만들어진 규격을 알기 쉽게 등에 적어 놨다. 겉모습이 말끔하든 허름하든 적혀있는 대로 색과 굵기가 나왔다. 얇은 것처럼 보이는데 두껍게 나오거나, 검정 같아 보이는데 빨강이 나오지 않는다. 물건은 의외가 없으니까. 예외는 불량품뿐이니까.
나는 펜을 뽑아 다른 종이에 짧게 선을 그어봤다. 내친김에 마지막 줄을 따라 적었다. ‘화자에게 이 노트를 줄 생각이다.’ 역시 후반 몇 단락은 이 펜으로 쓴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아이에게 노트를 받았다. 그럼 내용을 쓴 이 펜은 왜 여기 있을까. 아이는 내게 왜 이 펜까지 함께 준 걸까. 그냥 꽂혀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