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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자이 :1의 사람들] 9

9. "이게 아닌데."

by 이한얼

목표와 목적이 있는 마음은 갑자기 나타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홀로 존재하는 마음과 달리 누군가를 향한 마음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차 반투명해진다. 그러다 어떤 확인을 하는지에 맞춰 존재를 선명히 드러내거나 홀연히 사라지는 것이다.

조금씩 반투명하게 옅어지던 마음이 어느 날 어떤 사건을 계기로 여기가 끝이라고 깨닫는 것처럼, 반대도 마찬가지다. 조금씩 반투명하게 드러나던 마음을 어느 순간 사소한 계기를 통해 이미 시작되었다고 명확히 인지하기도 한다.

목적을 가진 마음에 대상이 생기는 순간, 그 마음은 이름을 가진다. 애정이거나 사랑일 수도 있으며, 또는 증오일 때도 있다.



일곱 번째 주, 금요일


글은 거기서 끝나 있었다. 찢어진 것까지 열여덟 장, 단편소설 분량의 일기였다. 노트를 덮은 나는 멍하니 옷장을 응시했다. 멈춰버린 나 대신 초침이 째깍째깍 제 길을 가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불현듯 명치 어림에서 붉고 뜨거운 꽃이 피어났다. 마음 바닥을 잔잔하게 흔들며 피어난 그 싹은, 자라고 다시 자라 울대에 줄기를, 콧잔등에 이파리를, 눈가에 활짝 그 꽃잎을 피웠다. 일렁이는 꽃잎이 불꽃처럼 뇌의 하부를 자글자글 졸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부터 노트를 끌어안고 울기 시작했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노트에 고개를 파묻고 입을 다문 채 오랫동안 끙끙거렸다. 중간에 울음소리가 새어나갔는지 문이 벌컥 열리며 “왜 오밤중에 질질 짜고 지랄이야!”라는 새된 고함소리가 들렸다. 나는 서둘러 눈가를 훔치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도끼눈을 뜬 여동생이 사라졌고, 그 뒤로 머리 두 개가 연달아 문가로 나타났다. 무표정한 남동생과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새엄마였다. 아빠는 나타나지 않았다. 새엄마가 문을 닫으니 방은 다시 어둠 속으로 침잠했다. 나는 노트로 입가를 막은 채 한동안 더 웅크려있었다. 그 자세로 울다가 잠시 잠들고, 깨서 다시 울기를 반복했다. 어느덧 창가로 푸름이 스며들어왔다. 닿으면 아플 듯 아주 시리고 푸른 새벽빛이었다. 정신을 차린 내가 품속부터 살폈다. 아이의 노트는 온통 구겨지고 젖어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접힌 부분을 바로 펴고 뜯어져 나간 곳을 맞춰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나는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떼며 화장실로 향했다.


여덟 번째 주, 월요일


월요일 오후 아이와 그의 수업은 나와 소리의 수업보다 1시간이 늦었다. 소리를 먼저 보낸 나는 중앙현관 앞 벤치에서 아이를 기다렸다. 기다린 지 30분도 안 된 것 같은데 수업이 끝났나 보다. 뭐에 급한지 학생들이 우르르 달려 나왔다. 아이와 그는 무리의 뒤쪽에 있었다. 내가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는 사이 그를 어딘가로 보낸 아이만 혼자 내 앞에 섰다. 올려다보는 나와 내려다보는 아이의 눈이 마주쳤다. 처음 눈이 마주친 환영회에서도, 함께 갔던 바닷가에서도, 그의 방에서 보낸 두 번째 밤의 침대에서도, MT 때 숙소 앞에서도, 아이의 집 현관에서도 우린 이 자세였다. 그늘진 얼굴은 같지만 눈만은 매번 다르게 보였다. 나는 노트는 매만지며 말했다.

“노트가 젖었어. 조금 찢어진 부분도 있고. 정말 미안해.”

아이는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상관없어. 빌려준 게 아니라 준 거니까.”

“소중한 거 아니야?”

“소중한 거야. 그러니까 가지고 있어 줘. 처음부터 너 주려고 쓴 거거든.”

아이의 시선이 얼룩덜룩한 노트의 표지를 쓸었다.

“널 만나기 전엔 나중에 누군가에게 줄 생각으로 썼고, 그게 너일지 그때는 몰랐지만, 어쨌든 이젠 네 거야. 뒷부분은 펜이 달랐지? 거긴 널 알고 나서 최근에 쓴 거야.”

나는 생각난 듯 홀더에서 펜을 뽑아 아이에게 내밀었다. 아이는 잠시 펜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마찬가지야.”

“펜은 왜 준 거야?”

아이는 달리 대꾸하지 않았다. 나도 더 묻지 않고 다시 꽂아두었다. 바람의 궤적을 살피며 잠시 뜸을 들이던 내가 물었다.

“나한테 왜 보여주고 싶었어?”

“그러게.”

아이는 수긍인지 의문인지 불분명한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서로 모든 걸 알아야만 친해질 수 있다고는 생각 안 해. 다만.”

잠시 단어를 고르던 아이는 곧 말을 이었다.

“네가 알아줬으면 했어. 내가 어떻게 컸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슨 마음인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싶은 것만 적었어.”

보여주고 싶은 것만. 그 말에 중간에 찢어진 두 장이 떠올랐다. 그리고 뒤에 문장 위로 덧 지웠던 한 장도 떠올랐다. 궁금했으나 묻지 않았다.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면 나도 보려고 하면 안 된다. 내가 다른 말이 없자 아이는 잠시 발치를 살피다 내게 물었다.

“끝까지 다 읽었어?”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에게 목적을 가지고 접근했어.”

아이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나는 고개를 들었다. 아이를 똑바로 올려다봤다. 발치에 머물러 있던 아이의 눈이 내게 올라왔다. 그 눈과 마주하며 말했다.

“난 그래도 너와 함께 지내고 싶어.”

“내가 목적을 가지고 너에게 접근했어도?”

“그건 합당한 목적이야. 나에게 부당한 이익을 갈취하려고 했을 때가 접근이야. 네가 한 건 생존이야. 너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내게 손을 뻗은 거야. 네가 여전히 날 친구라고 생각한다면, 난 잡고 싶어.”

아이는 눈을 감았다. 눈꺼풀 너머에 어떤 영상들이 떠돌고 있을까. 지금 아이는 무엇을 보고 있을까. 나는 아이가 건너는 시간들을 묵묵히 기다렸다.

“내 이름은 자이야. 백자이.”

그렇게 말하고 아이는 눈을 떴다.

“알아. 읽었어.”

“지금 나를 자이라고 부르는 건 엄마뿐이야.”

“그것도 알아.”

“너도 자이라고 불러줬으면 좋겠어.”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머리가 아닌 마음이 내 손을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뻗은 손끝에 아이가 있었다. 아이의 턱에 손끝이 닿았다. 전조도 없이 맞닿은 접촉에 아이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굳어버렸다. 순식간에 표정이 사라지고 눈동자 안에서 천둥이 일렁이는 듯했다. 지금 내 표정이 어떤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몸과 마음을 빼앗긴 것처럼 나는 의지 없이 움직였다. 턱에서 코, 눈썹으로 올라가 볼을 타고 내려오는 손가락. 뭉개지기 쉬운 점토를 만지듯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내 손길에 아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내 마음은 지금 아이가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지 않는 것을 파악했다. 그제야 내 두 손이 천천히 아이의 양 볼을 덮었다.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눈꼬리가 있는 부분부터 입술까지, 마치 진흙을 닦아내듯, 주름을 펴듯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손바닥으로 아이의 체온이 한껏 느껴졌다. 고르게 부풀었다 줄어드는 호흡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무표정 아래 맥박은 조금 빠르게 뛰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얼굴을 문지르고 다독였다. 어릴 적 누군가 내게 그리 해줬던 것처럼, 나 역시 온 마음을 담아 내가 가진 안정을 전하려고 애썼다.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조금 나왔다. 사람들은 이 작은 아이에게 도대체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작고, 여리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어린아이였다. 가진 거라고는 본인은 그다지 바라지도 않을 예쁜 얼굴과 눈매뿐인 아이였다. 이 얼굴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이 조그만 생물에게 무엇을 바라는 걸까. 어떤 굴레를 씌우고 무슨 필터를 끼워서 이 아이를 바라보고 있는 걸까. 키가 160도 안 되는 이 조그마한 어린애에게 도마뱀은 무엇을 원했던 걸까. 자신의 엉덩이를 주무르는 것과 뭐가 달라서 아직 젖살도 빠지지 않은 작은 인간에게 자신의 추악한 감정을 쏟아붓고 있을까.

눈앞에서 얕게 오르내리는 가슴에 손바닥을 얹었다. 나는 지금 다른 것은 모두 잊어버렸다. 오늘이 며칠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내가 누구고 상대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하고 있고 상대가 어떤 반응인지 모조리 의식 너머로 날려버렸다. 이 세상에는 나와 아이만 서 있었다. 공허한 하늘 아래 우리만 있었다. 이 순간 나는, 이 아이가 가여웠다. 불쌍하고 또 안쓰러워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손을 떼는 순간 작은 아이가 세상에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내가 울고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다.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아이를 만졌다. 만지고, 어루만지고, 끊임없이 아이를 건드렸다. 사라지지 말라고, 바람에 촛불이 꺼지듯 세상 뒤편으로 없어지지 말라고.

괜찮아. 자이야 괜찮아. 너희 어머님이 알았으면 분명 이렇게 해줬겠지. 말할 수 없었을 테니 내가 대신할게.

그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어느 순간 나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잊고 있던 호흡이 한꺼번에 돌아오며 나는 다급하게 공기를 들이켰다. 그와 함께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몸의 주체도 되찾았다. 내 손바닥은 아이의 가슴을 감싸 덮고 있었다. 화들짝 손을 거뒀다. 어느덧 눈물을 말라있었다.

“아니, 저기, 그게….”

내가 성급하게 말을 주워 삼키려 하자 아이는 그러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나는 괜한 손을 꼼지락거리며 아이의 눈치를 살폈다.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도 아이의 표정은 묘했다. 기분 나쁜 얼굴은 아니었다. 놀란 얼굴도 아니었다. 다만 양 볼이 조금 발그스름한, 평소 아이의 얼굴이었다.


아이는 거울을 보고 온다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여자화장실로 향하는 것을 확인한 그는 뒤따르다 말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내가 앉은 벤치까지 다가온 그는 문득 생각난 듯 주머니를 뒤졌다.

“안 그래도 전부터 주려고 했는데.”

그는 내게 삐죽한 뭔가를 내밀었다. 고리도 없이 몸체만 달랑 있는 열쇠였다. 그가 주는 열쇠라면 열 수 있는 자물쇠는 하나뿐이었다. 이게 뭐냐는 듯이 바라보니 그는 덤덤하게 말했다.

“필요하든 아니든 가지고 있어. 물론 아무 때나 써도 되고.”

나는 열쇠를 만지작거리다 문득 그를 올려다보며 다른 소리를 내뱉었다.

“아이는 왜 나 같은 애랑 친구가 되고 싶었을까?”

나는 바닷가로 가는 전철에서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을 기어코 꺼냈다. 그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눈빛은 왜 자신을 비하하는지에 대해, 얼굴은 왜 그런 것이 궁금한지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익히 알다시피 그는 과할 정도로 진지한 사람이라 이런 듣고 버려도 되는 질문마저 친절하게 답해줬다.

“내 말이.”

자괴감에 빠져야 할지 아니면 화를 내야 할지 고민하는 동안 그는 벤치 빈자리에 앉았다. 아이가 있을 건물을 보던 그가 이어 말했다.

“사람이 살면서 필요한 게 백 개라면, 저 아이는 그중 구십팔 개는 있을 거야.”

그건 나도 동의했다. 무엇이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본 아이는 이미 거의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없는 둘은 뭐야?”

“몰라. 내가 아는 건, 없는 둘 중 하나를 네가 가지고 있어.”

“그럼 그게 뭔지도 모르겠네?”

그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너는 백 중에 둘…”까지 말한 그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열 개가 있는데 구십 개가 없는 사람이고.”

“다섯 배나 늘려줘서 참 고맙다.”

“중요한 건 아이에게 없는 건 네게 있고, 네게 없는 건 아이에게 있어.”

그의 눈은 뭐가 문제냐는 듯이 의아해 보였다.

“내가 줄 수 있는 건 하나뿐인데, 아이가 주는 건 못해도 오십 개는 될 텐데. 그걸 친구라고 할 수 있을까?”

“어떤 하나는 오십 보다 클 수도 있으니까. 그게 없는 이에겐 더 그렇고. 퍼즐을 가지고 있는데 다 맞추고 한 피스만 없는 것과 처음부터 절반쯤 없는 것 중에 뭐가 더 아쉬울까?”

“그건…….”

뭐라 대꾸하려던 나는 천천히 입을 닫았다.

“퍼즐만 해도 그런데, 사람 사이에서 주고받는 건 더더욱 개수로 따질 수 없는 문제잖아. 중요한 건 내게 없는 게 상대에게 있냐는 거지. 모든 관계가 그렇듯이.”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손 안의 열쇠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 마치 떠날 것처럼 등을 보인 그가 불쑥 물었다.

“나는 어떤 것 같아?”

내 고개가 퍼뜩 올라왔다.

“나는 백 중에 몇이나 있어 보여?”

열쇠에 시선을 둔 채 잠시 생각에 빠졌던 나는 “모르겠어” 하며 고개를 저었다.

“만약 내가 백 중에 단 하나만 가지고 있고 구십구 개가 없다 하면, 그렇게 보여? 상대가 몇 개를 가지고 있든, 그 사람이 내게 무엇이 몇 개가 필요하든, 가진 게 하나뿐이라 누구에게도 하나밖에 줄 수 없는 그런 사람이라면.”

그는 아이가 들어간 건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길게 늘어진 해가 1층 강의실 안으로 붉은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줄 수 있는 유일한 하나가 공교롭게도 아이에게 없고 너도 주지 못한 나머지 하나라면 어때? 네 기준에 나는 함께 다닐 자격이 있을까.”

그가 나를 돌아봤다. 나는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는 입 꼬리를 움직이며 내 앞에서 처음으로 웃었다.

“가지고 있어. 그 열쇠가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유일한 하나이기도 하니까.”

그 말은 듣는데 어디선가 얇은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머리를 묶은 아이가 중앙현관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는 벌써 저만치, 아이의 곁으로 다가가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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