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실수로 차를 놓쳐서."
거미집은 두 종류의 줄로 만든다고 한다. 끈끈한 점액이 묻어있는 가로줄과 접착성이 없는 세로줄. 먹이를 휘감는 것은 팔각형을 만드는 가로줄이고, 거미가 발을 딛는 곳은 기둥 역할을 하는 세로줄 위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먹이를 잡으러 가다 본인 역시 먹이가 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게 치면 거미 입장에서 세로줄이란 안전이 확인된 징검다리인 셈이다.
사람의 마음도 이 거미집과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밟아도 괜찮은 마음과 아닌 마음. 안전이 확인된 감정과 버릴 수는 없어도 외면해야 할 것의 경계가 뚜렷하다면. 하지만 세상이 만만치 않은 것이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 거미줄이 정방형 팔각 구조라면 마음은 다방형 복잡 구조인 셈이다. 그래서 사람은 대신 마음의 줄에 일일이 임의의 확인 도장을 찍는다. 이건 안전해. 이건 위험해. 그렇게 난잡한 세상 속에 주관적 기준을 세워 자아라는 줏대를 유지하려 애쓴다.
하지만 정말 문제인 것은 확신하며 찍은 그 도장이 실제로 안전성이 매우 떨어진다는 점이다. 안전하다 찍힌 곳이 움푹 꺼진다던가, 믿고 뒤를 맡긴 것에 뒤통수를 맞는다던가. 그래서 사람은 종종 함정처럼 자기 마음에 발목을 빠트린다.
아홉 번째 주, 수요일
아침까지만 해도 오늘은 평범한 수요일, 수업이 두 개인 지난주와 같은 하루일 거라 믿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모든 수업이 끝났을 때까지도 변함없었다. 평소처럼 아침에 그의 방 앞에서 모여 남들이 보기에 기묘한 등교를 거치고, 3.5명이서 오전 수업을 같이 들었다. 그대로 점심을 먹고 그 후 둘과 둘로 흩어졌다. 모든 것이 다 똑같았지만 내 일상에 이변이 생긴 것은 오후 수업이 끝난 후였다. 정문에서 소리를 먼저 보낸 직후였을까. 갑자기 아랫배에서 급한 신호가 올라왔다. 점심에 먹은 닭갈비에 무슨 문제라도 있었는지. 원인은 모르겠으나 낭패였다. 인내심으로 버틸 수준이 아니라 길게 고민할 시간도 없었다.
갈등이 시작됨과 동시에 머리는 빠르게 계산에 들어갔다. 그는 아직 수업 중이었다. 끝나려면 아직 한 시간이 남았다. 아이는 지금쯤 끝났겠지만 꼭대기 건물에서 여기까지 내려오는데 10분 정도는 걸릴 터였다. 아이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바로 그의 방으로 향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가서 일을 해결하면 아슬아슬하게 스쳐갈 수 있겠다는 예측에 도달했다. 사실 그대로 뒤돌아 가장 가까운 강의실 건물로 들어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일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득실거리는, 더욱이 삼삼오오 모여 10분씩 수다 떠는 공간에서 일을 보는 것은 그냥 바지에 실례하는 것만큼 싫었다. 그렇게 최선이라 여긴 답안지를 손에 든 나는 걷듯이 그의 방으로 달려갔다.
사실 처음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모든 것이 계획처럼 순조로웠다. 그의 집에 도착해 스페어 키로 문을 열었다. 지난주에 받을 것을 이렇게 빨리 쓰게 될 줄이야. 바닥에 외투와 가방을 던진 나는 바로 방을 거쳐 화장실로 들어왔다. 일은 시원하게 해결했다. 손을 씻고 가벼운 마음으로 화장실에서 나왔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외투와 가방을 챙겨 신발을 신는데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멀리서부터 가깝게, 점점 또렷해지는 소리에 맞춰서 복도에 달린 센서등이 켜졌다. 아뿔싸. 아이의 수업이 생각보다 빨리 끝났나 보다. 당황했지만 머리는 제멋대로 돌아갔다. 의외의 순간에 만난 것이겠지만 그래도 슬쩍 문을 열어주며 “왔어?”라고 하면 된다. 그 모습이 턱없이 이상해도 아이 성격상 분명 마주 웃어줄 것이다. 그럼 나는 소소한 잡담 몇 마디를 나누다 그가 오기 전에 슬쩍 일어나 집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으면 된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동선을 정하며 현관문을 잡았을 때 문밖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졸려.”
혼잣말을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멋진 성격. 그래, 저래야 저 아이답지. 근데 열쇠를 꺼내는 소리와 함께 “눈 좀 붙여”라며 들리면 안 되는 목소리가 함께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신발을 신은 채 거실로, 다시 방으로, 결국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 와중에 문고리를 소리 나지 않게 잠그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니 쟤가 지금 여기 왜 있어. 아직 끝나려면 한 시간이나 남았는데. 화장실에는 아직 일을 치른 냄새가 은은하게 남아있었다. 잠시 나갔다 들어왔더니 더 선명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몰래카메라에 당한 것처럼 허둥대고 있는데 집안으로 들어온 둘은 친절하게도 내 의문을 풀어줬다.
“근데 매번 이렇게 일찍 나와도 돼?”
“출석도 했고, 요령껏 잘 빠져나왔어.”
“그래도 교수님은 다 아신다고. 나 먼저 와있으면 되는데.”
“혼자 보내기 좀 그래.”
그래. 그는 분명 저런 성격이다. 마치 지상 최대의 과제처럼, 아이에 관련된 일은 그에게 언제나 일 순위였다. 특히 MT 이후로는 유난히 심해져서 사람이 많건 적건 아이 혼자 두지 않으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시간이면 강의실부터 정문을 지나 그의 집 앞까지 어디 하나 사람이 북적이지 않는 곳은 없었다. 그럼에도 수업 중에 빠져나올 줄이야. 잠시 그를 얕본 자신에게 좌절하며 변기 같은 포즈로 굳어있는데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화자는 아직 안 끝났나?”
“그쪽이 한 시간 먼저 끝났을 텐데.”
“연락해봐.”
아이의 말에 나는 소리가 나지 않게 외투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화면 밝기를 최저로 낮추고, 벨소리를 무음으로 바꾸자마자 그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아직 학교야?’ 뭐라고 답을 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화면을 꺼버렸다.
그래서 이 결과다. 졸지에 난 남의 집 화장실에 갇혔다. 그것도 나갈 타이밍을 완전히 놓친 상태로 말이다. 차라리 처음에 나갔으면 나았을 텐데. 그 긴가민가한 순간을 보내고 나니 아까 그것이 막차라는 상황이었다. 그 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나갈 수 없게 되었다. 세상 너는 왜 나한테만 이래. 변기에 얼굴을 박고 그렇게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손에 술병도 없이 그럴 수 없었다. 일단 억지로나마 사태를 주어 삼킨 나는 아주 조심히, 조금씩 편한 자세를 잡았다. 본능이 이 싸움은 매우 길어질 것이라고 속삭였다. 둘 중 한 명이 여기로 들어오거나, 아니면 그전에 인내심이 폭발한 내가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가거나. 그도 아니면 정말 운 좋게 두 사람이 장을 보러 나가거나. 아마 첫 번째가 가장 유력하겠지. 이런저런 가정을 하며 화장실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면서도 호기심은 때와 장소가 없어서 내 귀는 점점 문 쪽으로 붙었다. 울고 싶었지만 그것도 지금은 무리였다.
혹시 인기척이 새어나가지 않았을까 조심히 분위기를 살폈다. 조용한 방안이 불안을 부채질했다. 둘만 있을 때는 원래 저런가. 아까 그 문답을 마지막으로 달리 말이 없었다. 그들은 방과 거실에서 각자 옷을 갈아입고-물론 그가 거실로 갔다- 침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 후 간혹 튀어나오는 말은 거의 일방적이었다. 물 줘. 베개. 다른 거 보자. 그런 식으로 아이의 요구뿐이었다. 그럼 그는 대꾸도 없이 움직였다. 아이의 요구에 비해 계속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것을 보니, 아마 말하기 전에 이런저런 것을 챙겨주는 듯했다. 창문을 열고, 의자를 끌어와 발 받침대를 만들어 주고. 보통 적당한 간격을 두고 앉는 그가, 웃을 때 옆 사람을 때리는 아이의 버릇에 예능 프로그램일 때는 가까이 붙어 앉았다. 팔이나 손을 주물러주기도 하고 물도 떠다 주는, 불투명한 실루엣 너머지만 둘의 모습은 너무도 쉽게 그려졌다. 일련의 상황에 아이는 딱히 고맙다는 말도 없이 당연하듯 받아들였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둘만 있을 때의 분위기구나. 이런 극적인 상황이 아니면 볼 수가 없으니 처음 알았지만 말이다. 둘이건 셋이건 그는 평소와 비슷했다. 여전히 말수가 적고 조용했다. 다만 아이는 뭐랄까. 나와 있을 때와는 달리, 아니 나뿐 아니라 어느 누구든 같이 있을 때와는 달리 말도 웃음도 거의 없었다. 무대에서 대기실로 내려온 배우 같았다. 어찌 보면 그도 없이, 마치 혼자 있는 것도 같았다.
평소부터 둘만 있으면 어떨지 궁금했다. 함께 자란 쌍둥이 같은 모습일까. 아니면 오랜 부부 같은 모습일까. 물론 그런 분위기도 있었다. 반면, 다른 느낌도 있었다. 어찌 보면 싸운 직후의 친구 같기도 했고, 혹은 너무 오래 사귄 연인 같기도 했다. 두 사람에게 상반된 여러 분위기가 예쁘게 뜬 손뜨개처럼 얽혀있었다. 또는 이가 하나 나간 두 개의 톱니바퀴처럼 맞물려있었다. 자연스러우면서 자연스럽지 않은 분위기는 그 후로도 계속되었다.
그렇게 주변의 소리가 가라앉을수록 나는 옷을 갈아입는 장면을 훔쳐보는 것처럼 마음이 불편해졌다. 어쩌면 나는 지금 저들에게 죄를 짓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 성격 탓에.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자괴감이 정수리를 강하게 짓눌렀다.
와르르 쏟아지는 웃음소리가 둘 사이의 공백을 메웠다. 둘이 TV를 보기 시작한 지 한 시간하고 20분이 지났다. 내 다리는 저리다 못해 이제 감각이 없었다. 그 사이 그에게서 하나의 메시지를 더 받았다. ‘소리랑 있어? 아직 학교면 연락 줘’ 다른 메시지가 오지 않게 답장이라도 보내고 싶은데 혹시 소리가 날까 목석처럼 있을 뿐이었다. 방 안 역시 깜빡이며 소리가 바뀌는 텔레비전만 빼면 모든 것이 정지화면이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두 개의 진중한 목소리가 섞여 들어가는 시사 프로그램에서 아이 옆에 앉아 있던 그가 불쑥 입을 열었다.
“전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평소와 같은 낮고 담담한 목소리였다. 빠르지도 않고 묘한 어조도 없었다. 하지만 무언가 알 수 없는 기운이 솜털 사이로 흘렀다. 육감이 지금부터 무슨 일이 있을 거니 집중하라고 속삭였다.
“난 네가 좋다.”
지금 들리는 이명의 출처가 불분명했다. 텔레비전을 보던 아이의 눈이 뒤늦게 그를 향했다. 아이와 그의 실루엣이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아이는 분명 우리가 처음 만난 그날 밤, 그를 들여다보던 눈을 하고 있을 것이다. 사람의 진심과 말의 진위를 꿰뚫어 보는 눈빛으로. 그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피하지 않고 못을 박았다.
“이성으로.”
이명의 주파수가 점점 높아졌다. 도플러에 따르면 출처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다. 시간은 얼마간 더 흘러갔다. 사람의 숨을 조르는 정적. 당장이라도 집 밖으로 도망치고 싶지만 이미 다리는 굳었고 귀도 붙어버렸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더 갈 수 없을 정도로 문에 바짝 붙었을 때쯤, 아이는 시선을 거둬갔다. 그에 맞춰 그의 고개도 브라운관 쪽으로 돌아갔다. 둘의 시간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시 흘러갔다.
한 사람이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 바치는 마음의 고백. 그 장면을 아무 방해와 외적 요건 없이 구경할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행운을 온전히 누릴 수가 없었다.
고백 자체는 그리 충격적이지 않았다. 언제라도 분명 일어날 일. 어쩌면 지금 내 상황이 너무 궁색했기에 보통 여자아이들이 고백의 현장 변두리에서 호들갑을 떠는 그런 평범한 반응을 내보일 수 없었다. 다만 의외였던 것은 어떤 대답이든 선뜻 대꾸할 아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왜 그랬는지 무슨 마음인지 궁금했지만 나중에 넌지시 물어볼 수도 없고. 이래서 뭐가 되었든 당당하지 못한 것은 여러모로 괴로웠다.
“나는.”
이 주제에 대해 더 말이 없겠구나 싶을 정도로 오랜 시간 후에, 내내 말이 없던 아이가 입을 열었다.
“네가 싫지 않아. 오히려 좋아해.”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던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단지, 지금 나는 남자를 좋아하지 않아.”
마찬가지로 덤덤한 아이의 목소리에 가슴이 시큰했다. 그는 왜냐고 묻지 않았다. TV에서 광고 한편이 지나갔다. 들릴 듯 말 듯 사그라지는 목소리로 아이가 말했다.
“좀 더 나중에 만났거나, 차라리 네가 여자였다면 모르겠지만.”
당연히 그는 아무 대꾸가 없었다.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이도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는지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이명이 사그라지는 동안 광고 한두 편이 더 흘러갔다. 이제야 정말 대화가 끝났는지 그는 어색한 분위기를 해소하려는 듯 일어났다. 안 돼. 이쪽으로 오지 마. 지금이야 말로 최악의 타이밍이었다. 당황한 나는 허리가 쑤시는 것도 잊은 채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화장실 앞에 선 그는 문을 열지 않았다. 그렇다고 되돌아가지도 않고 그저 한동안 서있기만 했다. 그쪽에서는 아마 컴컴하기만 할 안쪽을 들여다보는 듯이. 제발. 제발. 차라리 기절이라도 하면 편하련만. 불투명한 유리 너머에 비친 그의 실루엣은 마치 저승사자 같았다. 가위눌린 사람처럼 주기도문을 반쯤 외웠을 때 문고리에서 소리가 났다. 아주 살며시 잡은 것처럼 작은 소리였지만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 있던 내게는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듯 세상이 느리게 느껴졌다. 느리게 회전하던 문고리는 어느 순간 무엇에 걸리듯이 멎었다. 그리고 더 느리게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왜 그래?”
화장실에 들어갈 줄 알았던 그가 문 앞에 서있기만 하자 의아함을 느낀 듯 아이가 물었다. 그는 돌아서며 대답 대신 다른 질문을 했다.
“몇 시지?”
평소라면 직접 확인했을 그가 웬일로 시간을 물었다. 아이의 시선이 그에게 슬쩍 넘어왔다. 그는 여전히 화장실을 등지고 서있었다. 아이가 그의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8시 6분.”
잠시 TV에 시선을 두던 그가 물었다.
“배고파?”
“아니.”
“목은?”
“생각해보니 목보단 배가 고파.”
엄청 제멋대로였다. 근데 그런 점이 역시 저 아이다웠다.
“먹고 싶은 건?”
“글쎄. 김밥?”
“난 과자도 좀 당기는데.”
아이가 먹고 싶다면 무조건 사다 주던 그가 웬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아. 그러고 보니 나도.”
“가서 사 올 건데, 참치 마요랑 딸기 우유?”
“응.”
“과자는?”
계속 즉답하던 아이가 처음으로 입을 다물었다. 리모컨을 쥐고 고민에 빠진 모양이었다. 아이는 이내 TV를 끄며 일어났다.
“같이 가. 과자는 보고 골라야겠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이미 아이의 코트를 들고 있었다. 팔을 꿰어주고 아이의 단추를 잠가준 후에야 자신도 외투를 입었다. 천천히 끼익. 빠르게 쾅. 문이 닫히는 소리에 그제야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복도 쪽으로 난 화장실 창문 너머로 센서등이 켜졌다. 발소리가 천천히 멀어졌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앞으로 일요일에 일찍 일어날게요. 문고리를 십자가마냥 부여 쥔 채 기도했다.
“넌 뭐?”
창문에서 낮은 목소리가 불쑥 넘어왔다. 순간 심장이 골반까지 떨어졌다. 솟았던 땀이 없었던 듯 숨어버렸다. 설마. 무너지려는 다리를 문고리로 버티고 있는데 다시 “평소처럼 아무거나?”라며 도장을 찍어줬다. 미처 연산할 시간도 없이 대꾸가 장에서 바로 튀어나갔다.
“알고 있었어?”
“모른 척하려다, 그러면 안 돌아올 테니.”
정답이었다. 이대로 몰래 도망쳤으면 학교 정상에 있는 대운동장까지 쉬지 않고 달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쓸데없이 자상하단 말이다. 나 같은 멍청이는 불 꺼진 강의실에서 지난번에 못 잔 새우잠을 자봐야 정신을 차린다고. 하지만 자책할 시간도 없이 그는 뭐에 급한지 서둘러 말을 맺었다.
“그럼 아무거나 사 온다.”
“아니, 저기.”
나는 일단 그를 불러 세웠다. 움직이던 기척이 다시 멈춰 섰다. 불러놓고 보니 할 말이 없었다. 나는 그를 왜 세운 걸까.
“뭐해!”
아래층에서 들리는 아이의 재촉에도 그는 일단 자리를 지켰다. 5초가 5분 같이 흘렀다. 나는 더 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머릿속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을 댔다.
“나, 나는 숯불갈비로.”
숯불갈비는 개뿔. 먹는 것을 보기만 했지 직접 먹어본 적은 없었다.
“알았어. 오 분쯤 걸릴 테니 시간 계산하고 전화해.”
그 말을 끝으로 발소리가 빠르게 멀어졌다. 아마 현관 앞에 선 아이는 미간을 잔뜩 접은 채 팔짱을 끼고 있을 것이다. 그는 거기에 또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겠지.
허벅지를 주무르며 두 시간 넘게 잠겨있던 화장실 문을 열었다. 뻑뻑한 경첩에서 끼익 하고 소름 돋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쯤 신선 칸 앞에 서있을 그들의 흔적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세 개의 베개가 쌓인 등받이와 의자 위의 발받침용 수건. 둘 사이 거리가 딱 아이의 다리 길이만큼이다. 그리고 곁에 초승달처럼 말린 담요는 그의 흔적. 아마 유독 차가운 아이의 손을 주물러주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왜인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울컥 목이 멨다. 오늘따라 그의 배려가 속이 쓰리게 고마우면서도 동시에 죽을 만큼 부끄러웠다.
입지도 못한 외투와 가방을 팔에 걸치고 현관을 나섰다. 시계를 보니 8시 9분이었다. 9분 차이로 막차는 탈 수 없게 됐다. 이미 아무도 없는데 소리 나지 않게 현관문을 닫은 나는 전에 한 번 숨은 적 있던, 오는 길이 잘 보이는 주차장 쪽으로 향했다. 달이 유난히 밝은 밤이었다. 어설프게 숨었다간 누구 눈에 띌지 몰랐다.
체한 것 같은 가슴을 두드리며 몇 걸음 걷던 나는 문득 둘이 사라진 방향을 돌아봤다. 근데 걔는 내가 거기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나는 좀 더 걸어가다가 다시 돌아봤다. 너는 내가 돌아오지 않을지 어떻게 알았을까. 나는 다시 걸어갔다. 그리고 다시 돌아봤다.
“내가 왜 돌아봤지.”
신트림 같은 혼잣말이 목구멍을 비집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