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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자이 :1의 사람들] 11

"아직 아무 일도 없었어."

by 이한얼

여기 물이 들어있는 작은 컵이 있다. 그 안에 티백을 넣어 우리면 차가 된다. 티백은 우리가 자라며 사회로부터 배우고 친구와 지인에게 물드는 부분이다. 어떤 티백을 넣느냐에 따라 다른 차가 되듯, 어떤 환경에서 누구와 함께 어울리며 무엇을 보고 자라는지에 따라 사람은 달라진다.

하지만 녹차든 홍차든 컵과 물은 바뀌지 않는다. 수돗물인지 정수인지, 유리컵인지 종이컵인지는 안에 어떤 티백이 담기든 변함이 없다. 그 컵이 부모의 유산이라면 그 물은 가정교육이다. 즉 입는 옷, 신는 신발, 바르는 화장품, 먹는 것까지는 얼마든지 바뀔 수도 있지만 태생, 천성, 생태는 변하지 않는다. 사람 밑바닥의 나쁜 버릇과 천장의 좋은 성격은 대부분 부모로부터 물려받고 가정교육이 완성시킨 것이 대부분이다.



열한 번째 주, 목요일


“할 말이 있어.”

마치 선언이라도 하는 것처럼 나는 크게 외쳤다. 곁에 나란히 앉은 둘의 얼굴이 내 쪽을 향했다. 해야 할 말이지만 솔직히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 벌써 공식적으로, 그리고 비공식적으로 하나씩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나만 입을 닦고 있을 없는 노릇이었다. 일주일을 고민했고, 다음 일주일은 고민을 다시 고민해야 했다. 그러다 결국 오늘, 나는 속으로 수백 번도 더 했던 말을 다시 한번 되뇌며 입 밖으로 내뱉었다.

“나는 말이지! 사실 속에 있는 말이 겉으로 튀어나와. 내 의사와 상관없이.”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중학교 이후로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던 비밀을 털어놓았다. 눈을 떴을 때 같은 표정이면 어쩌지. 예전 급우들이 그랬듯이 신발 닦는 칫솔을 입에 넣은 것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으면 어쩌지. 아마 그러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하기로 결심했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눈을 뜨기가 무서웠다. 말하지 말걸 그랬나. 그냥 숨겨둘걸. 아니면 차라리 다른 것을 실토하거나. 잠시 후 나는 한쪽 눈을 배꼼이 떴다. 내 옆에 앉은 아이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의 표정은 예상과 달랐지만 아이에게 늘 봐오던 표정이기는 했다. “그리고?”라며 다음 말을 기다리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내 되물음에 아이가 바로 맞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게 다였다.

“그게 다인데.”

그제야 아이의 표정이 고해실에서 스님을 만난 신부처럼 이상해졌다.

“그게 다라고?”

“응. 난 의지와 관계없이 속에 있는 말이 겉으로 튀어나와.”

땡중의 고해성사를 유심히 듣고 있던 아이가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무슨 비밀이야?”라고 말하면서 아이는 한참을 웃었다. 왜 웃지? 내 말이 어디가 웃긴 거지? 영문을 몰라 고개를 돌리다가 아이 너머에 앉은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평소와 같은 얼굴로 나를 보면서 입 끝을 작게 실룩거리고 있었다. 지난번에 봤던 쑥스러움이나 자조가 아니었다. 스님, 그건 다른 고해입니다. 한자가 달라요. 그런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너도 웃는 거야?”

“난 안 웃었는데.”

그는 그렇게 말하며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뒤통수가 두어 번 밭은기침을 내뱉은 동안 어느 정도 웃음을 그친 아이가 물었다.

“그거, 정말 말하기 어려운 거 대신 가져다 놓은 거 아니지?”

아까 후회한 것처럼 다른 것을 대신 말했으면 바로 걸렸을 것 같았다.

“아니야. 그럴까 했는데, 아니야. 이게 내 비밀이야.”

아이는 한숨을 내쉬며 웃었다.

“이 맞교환은 왠지 손해 본 기분이네.”

“왜?”

“보자마자 알 수 있었던 걸 비밀이었다고 하니까. 펜은 뒀다 뭐 하는 거야.”

거울 없이도 알 수 있을 만큼 내 표정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그때 아래쪽 스탠드에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우리로부터 약간 떨어진 무리들이 운동장을 바라보며 두 손을 흔드는 중이었다. 멀리 있는 골대 그물이 출렁이고 있었다. 노란색 형광 조끼를 입은 남학생이 만세한 자세로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그 뒤로 같은 복장의 대여섯이 기쁜 표정으로 남학생을 쫓았다.

“우리가 넣었나 보네.”

체육대회의 마지막 날, 계단식 스탠드의 마지막 줄에 우리 셋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응원단 앞까지 달려온 남학생은 그 자리에서 만세를 했다. 그 몸짓에 맞춰 응원단의 환호성도 덩달아 커져갔다. 남학생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곁에 앉은 아이가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자 남학생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그 모습에 뒤따라오던 다른 선수들이 앞 다투어 남학생에게 달려들었다. 장난스럽게 머리를 조이고 등을 두드리며 난리였다. 별 의미 없는 손짓일 텐데 뭐가 그렇게 좋을까. 아니, 그것보다. 그냥 이렇게 지나가는 거야? 난 평생을 간직해온 비밀을 털어놨는데. 내가 퍼뜩 깨달은 표정을 짓자 아이가 먼저 작은 손으로 내 손등을 두드려줬다. 괜찮다는 듯이, 신경 쓰지 말라는 듯이. 입술만 뻐끔거리며 그를 바라봐도 그는 도리어 뭐가 문제냐는 얼굴이었다.


시간은 또 그림 같이 흐르고 있었다. 아이의 집에 다녀온 지 벌써 한 달, 화장실에 갇힌 날로부터는 다시 2주가 흘렀다. 다음 달에 기말고사를 앞둔 학교는 지난 MT와 같은 타이밍으로 체육대회를 개최했다. 그때와 다른 점은 우리는 모두 불참을 선언했다. 우리 중 어느 여자도 운동을 잘하거나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이가 참석하지 않으니 그는 물으나마나였다. 지난번 MT 결원이 생각보다 많았는지 학과에서 체육대회에 출전하지 않는 학생은 스탠드에서 응원이라도 하라는 공지가 떴다. 이미 담당교수의 허가를 받아 출석체크를 운동장에서 하겠다고. 안 그런 듯 보여도 은근히 성적에 신경 쓰는 우리는 차마 빠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스탠드 그늘에 앉은 아이의 표정에 기본적으로 약간의 심통이 깔려있는 듯 보였다.

삼일 동안 열리는 체육대회의 마지막 날이었다. 우리 과는 몇 개는 떨어지고 몇 개는 준결승까지 가며 나름 선전하고 있었다. 오늘은 축구와 족구, 농구처럼 단체 구기종목만 남았다. 우리는 강의실과 가깝다는 이유로 축구경기가 있는 대운동장으로 참석했다. 세 군데로 쪼개진 탓에 스탠드에 학생이 얼마 없었다. 우리 셋과 여학생 열 명 정도였다. 남자는 오직 그뿐이었다. 소리는 다른 여학생들과 농구장으로 차출됐다.

한 점을 앞서며 전반전이 끝났을 때 선석에서 누군가 이쪽으로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습관적으로 아이를 돌아보니 아이도 그쪽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달려온 사람은 코치인 3학년 선배였다. 우리에게 한 선수가 아까부터 다리를 절고 있다고 했다. 그것만으로 우리는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우리 과는 개인종목보다 단체종목에 강했다. 그런 만큼 남학생들이 교체 선수조차 없을 만큼 뿔뿔이 흩어진 상태였다. 그 와중에 남아있는 것을 보면 그는 대단한 깍두기였다. 그를 바라보는, 정확히는 아이를 향한 코치의 눈길이 간절했다. 상황을 파악한 아이가 그를 돌아봤다.

“운동 좀 해?”

그는 “남들만큼”이라고 답했다. “보고 싶네”라는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일어났다. 주고받는 문답을 지켜보던 코치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는 응원용으로 입고 있던 하얀 조끼를 벗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휴대전화와 지갑을 꺼내 아이에게 내밀었다. 아이가 조끼와 물건을 받았다. 그는 코치와 함께 선수석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후반전이 시작되었다. 방금까지는 몇십 명의 사람이 공을 쫓아 우르르 몰려다니는, 마치 다른 나라끼리의 경기 같았다. 하지만 그가 들어가자 갑자기 우리나라 경기처럼 흥미로워졌다. 노란색 형광 조끼를 입은 그는 운동장 이쪽과 저쪽을 바삐 뛰어다녔다. 가끔 정말 다급하게 아이에게 달려오던 때를 빼면 저렇게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본 적이 없어서 나는 좀 신기하면서 재밌었다. 곁에 앉은 아이도 나와 같은 심정인지 우리는 한참 동안 공이 아닌 그의 꽁무니만 쫓고 있었다.

그때 뒤편에서 누군가 아이를 찾았다. 가끔 지나가며 봤던 학과 조교였다.

“교수님이 찾으시는데?”

“저를요? 지금요?”

영문을 모르겠는 얼굴이었으나 아이는 일단 끄덕였다. “잠깐 다녀올게”라고 말한 아이는 내게 그의 물건을 맡기고 일어섰다. 나도 따라갈 생각으로 덩달아 일어났다가, 너는 왜 따라오냐는 조교의 눈빛에 주춤거렸다. 아이를 보니 괜찮으니 앉아 있으라는 얼굴이었다. 왠지 같이 가고 싶었으나 전달자와 당사자가 저러는데 억지로 따라붙기 어려웠다. 주섬주섬 자리에 앉자 아이는 조교와 함께 사라졌다.

셋이었다가 혼자가 된 스탠드는 괜히 썰렁하게 느껴졌다. 25분인 후반은 이제 10분가량만 남겨두고 있었다. 그는 아이가 사라진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열심이었다. 그때 누군가 예고 없이 내 오른쪽에, 방금까지 아이가 앉아있던 자리에 앉았다. 아이가 벌써 왔나. 고개를 돌려보니 도마뱀이었다. 순간 허리부터 어깨까지 뻣뻣하게 굳었다. 경기장을 둘러보던 도마뱀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 내게 물었다.

“지난번에 우리 집에 왔다던 애가 너지?”

처음으로 코앞에서, 그것도 나를 향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 파충류가 밖에서는 단정한 이미지로 보이려고 하는구나. 예를 들어 학교 사람들이나, 혹은 사정을 알지 모를지 아직 확신할 수 없는 내 앞에서는 일단 신사적인 척 행동하는구나. 그걸 깨닫고 나니 가슴에 차가운 비웃음이 음습하게 번졌다. 언제고 짓던 아이의 비웃음이 어떤 색깔이었는지 지금 나는 명확히 알 것 같았다. 가증스러운 도마뱀 새끼. 아이의 노트에 적힌 그 단어가 어쩜 그리도 절묘하게 들어맞는지.

도마뱀의 말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런 표정조차 짓지 않았다. 이 파충류에게 아무것도 보여주고 싶지 않고, 들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저 무시와 외면으로 인식의 경계 밖으로 밀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그런 티를 내는 것이 잘하는 일일까. 너의 구린 상황을, 하수구 같은 속내를 내가 알고 있다고 표 내는 것이 아이에게 도움이 될까.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재빨리 표정을 뒤집어썼다. 당황한 눈빛에 난처한 표정. 그건 전형적으로 낯가리고 숫기 없는 스무 살 여자아이가 낯선 사람과 마주 했을 때의 얼굴이었다. 연기가 먹혔는지 모르겠지만, 도마뱀은 대답 없는 나를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대신 본인 뒤쪽을 향해서 손가락을 까딱였다.

“다른 건 아니고, 동생이 처음으로 친구를 데려왔다 들어서 궁금했어. 지금 뛰고 있는 저 친구도 동생 친구지?”

한창 공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그를 보는 도마뱀의 눈은 파충류처럼 요사스러운 빛을 뿜어냈다. 남들 앞에서 신사인 척 행동만 하면 뭐해. 눈깔 관리 안 되는데. 그리고 그와는 벌써 몇 번씩 다퉈놓고 뭘 모른 척 물어. 아, 하긴 너는 모르겠구나. 나는 이미 네가 도서관에서 꼬리 말고 도망친 것을 아는데. 강의실에서 툭탁거릴 때도 있었고. 내가 비웃는 사이 뒤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무거운 봉투를 든 다른 남자 선배가 내 앞에 서서 들고 있던 봉투를 내게 내밀었다. 봉투 곁에 맺힌 물이 무릎 위로 연달아 떨어졌다. 정말 낯선 사람의 등장에 그때부터 나는 진심으로 당황하기 시작했다. 맡아둔 휴대전화와 지갑을 왼편에 내려두고 우선 봉투를 품에 받았다. 얇은 비닐 너머로 온통 차가운 굴곡들이 느껴졌다. 낯선 선배는 그것만 전해 두고 그대로 등 뒤로 사라졌다. 돌아볼 새도 없이 도마뱀이 입을 열었다.

“음료수 좀 샀어. 학과비로 산 거니 부담 가지지 말고. 선수들 뛰고 오면 목마를 테니 대신 좀 나눠줄래?”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걸 계속 품고 있어야 하나, 아니면 아래 칸에 내려놓을까 고민하는 동안 도마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하는 김에 먹기 편하도록 미리 분류해놓으면 좋겠다. 난 족구장에도 가봐야 해서, 안 바쁘면 부탁해.”

그러며 봉투에서 두어 개를 꺼내 자신이 앉아있던 자리에 놓았다. 파란색 이온음료는 이쪽, 녹색 이온음료는 조금 떨어진 저쪽. 나는 누가 시킨 건지도 잊어버리고 반사적으로 손을 움직였다. 그때 문득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등 뒤에서 탁하고 끈적한 바람이 분 듯한 기분이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누군가 내가 내려둔 지갑과 휴대전화를 쥐고 있었다. 그는 펼친 지갑을 막 닫는 중이었다. 방금 내게 봉투를 건네고 사라졌던 선배였다.

“뭐하세요?”

의식보다 질문이 먼저 튀어나갔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아니, 이거 유실물인가 해서.”

상대는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나는 봉투를 집어던지다시피 내려놓고 다가가 지갑과 휴대전화를 낚아챘다.

“제 친구 거예요.”

그를 친구라고 칭하는 낯섦보다, 지금 나는 기분이 몹시 나빴다. 네가 이걸 왜 만져. 내 기세가 제법 서슬 퍼랬는지 상대가 뭐라 대꾸하지 못하고 서있자 등 뒤에서 도마뱀이 대신 타박했다.

“그러니까 남의 물건을 왜 함부로 만져. 물어보고 만져야지.”

반쯤은 농담 같이, 어쩌면 말속에 뼈가 있는 듯한 어투였다. 도마뱀의 말을 들은 상대는 그제야 여유를 되찾고 웃는 얼굴이었다. 양손을 흔들고 미안하다고 말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럼 음료수 부탁해.”

도마뱀의 목소리에 나는 다시 돌아봤다. 표정을 꾸밀 생각도 못하고 처음으로 도마뱀과 눈이 마주쳤다. 본능적으로 상대와 눈을 맞추면 안 된다고, 악의적인 1에게 내 속을 들여다보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늦었다. 아주 잠시 나와 눈을 맞춘 도마뱀은 순간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아주 짧게 스치고 지나가서 확신할 수 없었으나 정확히는 불쾌함과는 조금 다른, 언짢은 듯한 감정이었다. 뒤늦게 스스로의 반응을 깨달았는지 짧은 비웃음을 덮어썼지만 어쩐지 아까만큼의 진득한 악의 대신 허세뿐인, 부실한 가면처럼 보였다. 방금 분명 뭔가 지나갔음은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순식간에 지나간 감정의 단계를 제때 따라가지 못해 가만히 서있는 동안, 도마뱀은 그대로 등을 돌려 스탠드 위로 올라갔다. 물건을 만진 선배도 뒤를 따라 사라졌다. 멀어지는 두 사람을 보며 나는 아랫배에서 이유 모를 화가 끓어올랐다. 아까부터 심장이 쿵덕거렸다. 아이라면 방금 도마뱀이 무의식 중에 드러낸 표정이 무슨 의미인지 바로 알아챘을 텐데. 이왕 들킨 거 그것으로 상대의 약점을 찾거나, 못 해도 속 시원한 대꾸라도 해줄 수 있을 텐데. 나는 왜 이러지. 아이의 말대로라면 나도 1인데, 같은 1인데 나는 왜 이렇게 다른 모든 1에게 약자이기만 할까.

정신을 추스른 나는 우선 물건 확인했다. 휴대전화 버튼을 누르니 잠금 화면이었다. 이건 내 또래라면 보통 당연했다. 잠시 망설이다 지갑을 열어봤다. 주민등록증이나 카드, 약간의 현금 등 보통 지갑이 있어야 할 것들이 모두 있었다. 이쪽도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나는 지갑과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이미 내 물건이 들어있어서 자리가 없었지만 어떻게든 욱여넣었다. 잠시 멍하게 운동장을 바라보던 나는 팽개친 봉투를 들고 다시 음료를 분리하기 시작했다. 봉투 하나를 다 비웠을 때가 돼서야 깨달았다. 멍청하게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어. 나는 쥐고 있던 빈 봉투를 신경질적으로 구기며 아직 음료가 들은 다른 봉투를 옆으로 치웠다. 시키면 하는 이 버릇은 도대체 언제 버릴 건지. 나는 다시 앉아서 경기를 관람하기 시작했다. 어째선지 경기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심장이 여전히 쿵쾅거렸다. 자기 것도 아닌데 왜 손을 대. 누가 네 물건이야. 애써 눌러놓았던 화가 다시 치솟았다.

그때 운동장에서 와아 하는 환호성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또 골을 넣은 모양이다. 시계를 보니 곧 경기가 끝날 시간이었다.


경기가 끝난 것은 아이가 돌아온 직후였다. 아이는 의아한 얼굴로 왜 불렀는지 모르겠다며, 알 수 없는 근황만 잠시 주고받다 나왔다고 했다. 그 사이 땀범벅인 남학생들이 달콤한 냄새에 이끌린 벌처럼 음료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나도 모르게 아이 뒤에 숨어 내미는 손에 음료를 하나씩 쥐어줬다. 그는 한 발 뒤늦게 이곳으로 걸어오는 중이었다. 이제야 몸이 풀렸는지 어깨와 목을 돌리고는 했다. 아이는 수고했다며 음료와 맡아둔 물건을 건넸다. 그는 한 손으로 캔 마개를 따며 습관처럼 지갑을 폈다. 그리고 석상처럼 굳었다. 다른 선수들에게 음료를 나눠주던 아이보다 내가 먼저 그의 모습을 발견했다. 잠시 지갑을 내려다보던 그는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얼굴로 지갑을 닫았다. 음료를 들고 있던 손이 눈에 띌 정도로 떨렸다. 나는 덩달아 굳어버렸다. 뒤늦게 아이도 그의 이상을 눈치챘다.

“왜 그래?”

그는 대답 없이 일단 스탠드에 음료를 내려놨다. 생각에 빠진 듯 그의 표정이 잠시 골똘해졌다. 나와 아이는 묵묵히 기다렸다. 잠시 후 돌아선 그가 물었다.

“혹시 이거 누군가에게 맡겼어?”

그는 지갑을 내밀고 있었다.

“누가 날 찾아서, 그동안 화자에게 맡겼어.”

아이의 말에 그의 시선에 내게 향했다. 덤덤한 척 꾸몄지만 거세게 일렁이는 눈동자와 마주쳤다. 목이 졸리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들고 있다가 누가 음료를 줘서 옆에 잠깐 내려놨는데.”

순간 감전된 것처럼 혀가 굳었다. 내가 말을 하다 말자 그와 아이는 차분히 기다렸다.

“음료 받는 동안 뒤에서 누군가, 지갑과 핸드폰 들고 있어서, 왜 손대냐니까 유실물인 줄 알았다고 해서, 바로 뺐었는데.”

“누구야? 그 사람이?”

그가 물었다. 나는 아이와 그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그 선배랑 다른 선배가 왔어. 다른 선배가 음료를 줬고, 그 선배는 내 옆에 앉아서 나한테 뭘 물어봤고, 돌아보니 음료 준 선배가 지갑이랑 핸드폰을….”

“지금 혹시 어디 있는지 알아?”

“아까 족구장에 간다고.”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스탠드를 뛰어올라갔다. 음료를 마시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아까부터 내내 느꼈던 원인모를 불안감이 결국 정수리에서 폭발했다. 온몸이 심장으로 변한 듯 쿵쾅거렸다. “우리도 가보자”라며 먼저 출발한 아이의 뒤를 무작정 따라갔다. 족구장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을 얼마쯤 갔을까. 나는 참지 못하고 앞서가는 등에 말을 던졌다.


“자이야.”

아이는 발을 멈추지 않고 힐끗 돌아봤다.

“지난번에 바닷가에서, 나도 1이라 했잖아.”

뜬금없이 튀어나온 옛이야기에 아이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나도 1 맞아?”

무슨 말인지 내 얼굴을 살피던 아이는 다시 앞을 보며 말했다.

“맞아. 확실해.”

근데 난 왜 이럴까. 너희와 같은데, 같이 있으면 도움은커녕 피해만 주는 것 같을까. 그런 내 속내를 마치 아는 것처럼, 아이가 돌아보지 않고 말을 이었다.

“피기 전인 모든 꽃은 아직 봉오리야. 개화되기 전까진 어떤 색의 꽃잎을 가지고 있는지 아무도 몰라.”

돌려 말했지만 아이의 말은 내게 확신을 줬다. 내가 1인 것은 맞지만, 아직 온전한 1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타박하는 의미로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게는 그런 의미였다.

내가 아는 모든 1은 개화했다. 봉오리를 활짝 벌린 채 자신이 가진 꽃잎의 색과 개수를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아이는 당연하고, 아이의 어머님도 그랬다. 심지어 도마뱀마저 제 딴에는 온전히 개화한 상태였다. 확인하지 못했지만 분명 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니라면 아이의 곁에 그리 당당하게 서있을 수 없을 테니까. 내가 아는 모든 1중에 나만 아직 봉오리였다. 그럼 어떻게 해야 개화할 수 있을까. 온전한 꽃이 되어 너의 곁에 서려면 나는 무엇을 더 채워야 하나.

족구장까지 어떻게 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앞선 뒤꿈치만 보고 가던 중에 아이가 갑자기 멈춰 섰다. 저 멀리서 등을 돌리고 있는 그와, 그에게 멱살이 잡혀있는 도마뱀이 보였다. 우리가 다가갈수록 족구장 아래에 있던 다른 선배들도 모여들고 있었다. 그가 짐승처럼 팔을 흔들자 도마뱀은 인형처럼 딸려갔다. 뒷모습을 보이는 그의 표정은 볼 수 없었다. 다만 옷깃을 잡힌 도마뱀은 왜 이러는지 몰라 당혹스럽고 동시에 매우 불쾌하다는 얼굴이었다. 주변에 있던 다른 선배들이 달려들어 그를 떼어놓았다. 넘어질 듯 밀려난 그를 우리가 겨우 받아냈다. 금방이라도 다시 달려들 기세인 그는 새파랗게 타오르는 눈으로 도마뱀을 노려봤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무작정 이렇게 달려들면 어쩌나.”

정중한 척 빈정거리는 말에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태연한 얼굴로 느릿느릿 내뱉는 어조가 마치 연극 대사처럼 들렸다. 그의 턱 위로 근육이 씰룩거렸다. 옷깃을 털고 목을 양쪽으로 꺾은 도마뱀은 그를 잠시 노려봤다. 그가 화를 내고 도마뱀은 무표정한, 지난번 강의실과 반대의 상황이었다.

갑자기 왜 이러지? 혹시 누가 허락 없이 남의 것에 손이라도 댔나?”

대본을 읽는 것처럼 과장된 어투였다. 명백한 조롱에도 그에게서 뭐라 말이 나오지 않자 도마뱀은 보일 듯 말 듯 슬쩍 웃었다. 입은 웃고 있었으나 눈은 먹잇감을 앞에 둔 금수처럼 사납게 빛나고 있었다. 꽤 요란스럽게 나타났고 지금도 그의 바로 곁에 서있었기에 우리의 등장을 모를 리 없을 터였다. 지금까지 눈이 닿는 곳에 아이가 있으면 습관처럼 잠시라도 노려보던 도마뱀이었다. 그럼에도 어째선지 우리 쪽으로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 모습에 아이가 의아한 듯 눈썹을 구겼다.

서로만 마주 보며 말없는 대치가 잠시 이어졌다. 시간이 흘러도 그가 움직이려는 기미가 없자, 얼마 후 선배 쪽에서 먼저 다른 선배들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그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와 아이는 그대로 서서 눈을 떼지 않았다. 뒷모습이 사라지자 그는 한숨을 내쉬며 자세를 바로 했다. 신발 코를 바라보는 그에게 누구도 섣불리 말을 걸지 않았다. 잠시 후 아이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상념에서 빠져나온 듯 그의 고개가 올라왔다. 그리고 이쪽을 돌아봤다. 새파랗던 눈동자는 다시 원래처럼 맑아져 있었다. 아이와 나를 연달아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내가 착각했나 봐.”

아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곁에서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내가 무엇에 대해 사과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에게 말했다.

“미안해.”

내 말에 그는 그저 살며시 웃었다. 내가 본 이래로 가장 뚜렷한, 거짓말처럼 진한 미소였다.


이날은 이런 식으로 어영부영 헤어졌다. 하루 종일 그의 미소가 마음에 걸렸던 나는 다음 날 정문 앞에 내리자마자 그의 집부터 찾았다. 아이와 함께 나온 그는 그제와 같았다. 내가 밑도 끝도 없이 괜찮은 거냐고 물었더니 그는 무슨 소리냐는 듯이 평소처럼 반응했다.

“집에 빼놓고는 잃어버린 줄 알았나 봐. 어제 찾았어.”

아이에 말에 나는 다른 대꾸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말하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없었다. 이것도 그렇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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