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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자이 :1의 사람들] 12

12. "나도 할 말이 있어."

by 이한얼






누군가가 그랬다. 고칠 수 있는 것은 습관이지만 고칠 수 없는 것은 천성이라고. 그 말의 진위는 상관없다. 습관이든 천성이든 사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매한가지니까.

사람의 영혼이 물이라면 몸은 그릇이다. 처음 영혼에는 어떤 법칙도 없다. 하지만 몸이라는 그릇에 담기는 순간부터 몸의 방향에 따라 흘러간다. 계속 달라지는 몸에 의해 영혼은 위에서 아래로, 때로 아래에서 위로, 혹은 제자리를 맴돌기도 하고, 가만히 고여 있기도 한다. 그러면서 몸의 기억은 영혼의 기억이 된다. 몸이 정한 노선을 영혼이 외우기 시작하면서 둘은 떨어질 수 없는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천성이고 무엇이 습관일까. 바꿀 수 없는 습관도, 바뀌게 되는 천성도 생겨나지 않을까. 설령 그간의 구별이 확실하다 한들, 나는 추상적인 것을 분류할 능력이 없다. 결국 천성인지 습관인지 나누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럴 필요도 없다. 애써 나눔으로써 어쩔 수 없다는 위안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반면 바꿀 수 있음에도 천성이라 치부하며 포기하는 것 역시 많아질 것이다. 무엇이든 장단점은 공존하지만 이 경우는 장점보다 단점이 더 끈질기다.

차라리 스스로를 지배하는 법칙을 변화의 가부보다는 호불호의 취향으로 나누는 것이 낫지 않을까. 좋은 것과 싫은 것. 좋은 것은 유지하되 싫은 것은 바꾸면 된다. 바뀌면 좋고, 설령 바뀌지 않으면 절대 안 되는 일이 아니라 아직 못 바꾼 것뿐이라 여기면서. 언젠가 바뀔 것이라 믿으면서 말이다.

나는 지금껏 그렇게 살았다. 물론 앞으로도 그럴 셈이고.








생각해보면 난 늘 혼자였다. 천애고아도 아니건만 내 마음은 늘 허허벌판의 가시나무에 홀로 걸려있었다. 사방으로 휘저은 손에 바람 한 점 걸리는 일 없이, 함께여도 혼자여도 외로움 속에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그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면서 오히려 아무도 없는 것이 더 편했다. 혼자라면 괜한 기대는 하지 않아도 되니까.

사람의 마음은 여러 부위로 나눠진다. 다른 곳보다 단단한 부분이 있는가 하면, 말랑한 부분도 있고, 금이 간 부분도 있다. 사람은 단단한 부분에 자리 잡은 감정에 잘 견디고, 말랑한 부분의 감정에 마음을 쉽게 허락하며, 금이 간 부분의 감정에 유독 취약하다. 사람마다 그 자리에 놓인 감정들은 다를 것이다. 내 경우 인내심에 강하고, 동정에 쉽게 마음을 허락하며, 외로움에 유독 약하다. 보통 금이 간 부분은 마음의 구멍이 된다. 그렇게 치면 내 마음의 구멍은 외로움인 셈이다.

특히 혼자 있을 때보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느끼는 외로움은 시간이 지나도 전혀 견딜만해지지 않았다. 혼자라면 기댈 구석이 없으니 이성으로 감성을 재단할 수 있지만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 어쩔 수 없이 상대에게 바라게 된다. 날 봐줘요. 날 혼자 두지 마요. 하지만 그런 기대들은 대부분 빗나갔고, 그럼 혼자일 때보다 더욱 상처 받고 움츠려야 했다. 상처가 쌓일수록 마음에 흉터 없는 자리가 점점 사라졌다. 다가오는 사람을 밀어내고 모든 것을 혼자 하려는 경향이 생긴 것은 그때, 아마 고등학교를 입학할 무렵이었다. 1학년 때는 무시하는 애. 2학년 때는 애늙은이. 결국 3학년 때는 독한 년.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이런 멸칭을 달고 다니는 고등학생. 그때부터 나는 쭉 혼자였고, 그러다 성인이 되었다.

그로부터 고작 오 개월이 지났다. 그 사이 무엇이 달라졌기에 최근 삼 개월은 늘 누군가와 함께인 걸까. 일어날 때도 혼자 학교를 올 때도, 수업과 식사 시간은 물론 집에 돌아가는 길마저도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맨손이 되었지만 두터운 장갑을 꼈던 옛날보다 따듯했다. 마음으로 누군가와 마주하는 법을 배운 후부터, 장갑 낀 손으로 상대의 소매에 매달리는 것과 맨손으로 악수하는 것의 차이를 알게 되었다. 감정이 전류로 치환되어 마주 댄 손바닥 사이를 비집고 흐르는 찰나의 쾌감. 그리고 은은히 남아있는 따듯한 잔향. 나는 고등학생일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날 향한 주변도 옛날과 다름없다. 단지 장갑을 벗고 손가락으로 어깨를 한 번 두드렸다. 성인이 된 내가 한 일은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그 작은 차이로 주위 풍경은 겨울에서 봄이 되었다. 상반된 세상은 이렇듯 아주 사소한 갈림길에서 나누어진다.

그런 내 앞에, 성인이 되고 두 번째로 맞는 갈림길이 나타났다. 멀리서 조금씩 가까워지는 표지판은 왠지 낯설지 않았다. 성인이 되기 전부터 미리 수십 차례나 지나온 길. 매번 저쪽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끝내는 이쪽으로 왔던 길. 그래서 매번 다시 나타나는 길이었다.

지금의 나는 처음으로 저쪽 길을 갈 수 있을까. 아니면 이번에도 그러지 못해서 다음에 다시 되돌아오게 될까.





열세 번째 주, 목요일



정문은 늘 누군가와 함께 통과했다. 월요일과 목요일은 소리와 둘이, 수요일은 아이와 둘이, 오전 공통 수업뿐인 화요일과 금요일은 넷이 다 함께 내려왔다. 소리와 지날 때는 정문에서 조금 떨어진 마을 버스정류장에서 헤어졌다. 아이 쪽과는 보통 정문 옆 슈퍼에서 갈라졌다. 그들은 그대로 장을 보러 들어가고 나는 마을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하룻밤 자는 목요일에는 곧장 그의 방으로 가는 편이었다. 수요일에는 소리를 먼저 보내고 강의실 앞 벤치에서 아이를 기다렸다가 함께 내려가게 됐다. 그는 유일하게 아이와 수업이 갈리는 수요일에 절대 아이 혼자 보내지 않으려고 했다. 불안한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매번 수업 도중에 나오게 할 수 없어서 차라리 내가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는 온전히 안심한 얼굴은 아니었지만 아이 역시 나와 같은 뜻이어서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 그 뒤로 그는 중간에 나오지 않았다. 다만 집에 잘 도착했다고 답장을 보낼 때까지 계속 메시지를 보냈다. 물론 끝나자마자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것도 당연했다.


“먼저 내려 가. 난 다른 약속이 있어서.”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 가방을 챙길 때 소리가 낯선 말을 꺼냈다. 다른 약속? 순간 ‘내가 모르는 무슨 약속…’이라는 말이 불쑥 튀어나오려고 해서 급히 삼켰다. 설령 사실이어도 실례인 말이잖아. 소리라고 어찌 개인적인 사정 하나 없을까. 미안한 마음에 평소보다 과한 애정표현으로 내일 보자는 인사를 전했다. 대뜸 껴안은 것이 부끄러운 듯 엉덩이를 빼면서도 소리는 나를 밀쳐내지 않았다.

오늘은 목요일, 기말고사 준비 주였다. 체육대회도 2주 전으로 흘러가버렸다. 그때는 무슨 일이라도 곧 터질 것 같더니만, 의외로 다음 날도 다음 주도 훌렁 지나가버렸다. 고질적인 성격 탓에 밤새 끙끙거린 나와 다르게, 그는 그대로였다.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세 걸음에 한 번씩 둘러봐도 도마뱀 역시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이 주쯤이 흐르자 혹시 하며 쥐고 있던 마음의 귀퉁이를 놓아버렸다. 물론 주름은 좀 남았지만 말이다.

최대한 천천히 걸어간 정문에서 나는 익숙한 편의점 의자에 앉았다. 혹시 뒤늦게라도 소리가 내려올까 잠시 기다려봤지만 정문으로 나타나는 것은 수십 명의 타인들. 같은 여자가 봐도 화끈거리는 복장의 여자애들과 욕이 절반인 남자애들의 고함소리뿐이었다. 금세 내려올 것 같지 않아 나는 일단 그의 방으로 향했다. 솔직히 심한 허기를 느끼던 중이기도 했고.

낮에 점심을 부실하게 먹어서 그런지 배가 고팠다. 학식은 주로 한식 세트를 먹었는데 오늘은 메인 메뉴가 하필 갈치였다. 좋아하는 생선이지만 나는 손이 느렸다. 그에 비해 아이는 밥 먹는 속도만큼은 몹시 빨랐고. 남들이 다 먹는 동안 절반도 못 먹어 끙끙거리기 싫었다. 식권 자판기 앞에서 양식 세트와 라면을 번갈아 보고 있으니 지켜보던 그가 지나가는 말투로 말했다.


“되도록 라면은 먹지 마. 정 먹고 싶으면 두 개 시키고.”


그런 그의 손에도 갈치 정식이 들려있었다. 학식인 만큼 역시 바르기 어려운 작은 갈치였다. 결국 나는 라면 식권을 샀다. 먹지 말라고 하니 왠지 더 먹고 싶어 졌다. 호기심이었는지 덩달아 거의 갈치로 정한 소리와, 이미 갈치 식권을 산 아이까지 식권을 도로 바꿔 라면으로 넘어왔다. 물론 그가 빈말을 할 성격은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점심으로 라면 두 개를 시키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그때 우리처럼 라면을 기다리는 학생들이 한 팀 더 있었다. 우리 셋에 그 팀까지 합하면 총 여덟 명이었다. 여덟의 배곯은 학생들이 젓가락을 쥔 채 일렬로 줄을 섰는데 식당 아주머니는 끓는 냄비에 라면을 다섯 개만 넣었다. 저쪽 먼저 주려는 건가. 양쪽 다 그러려니 하던 표정들은 이내 생면 다섯 개가 여덟 그릇의 라면으로 변하는 마법을 본 후 모두 경악으로 대체되었다. 김이 올라오는 라면 그릇을 들고 어이가 없으면서도 거봐라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젓는 그가 참 얄미웠다. 결국 발끈해서 따지려는 아이와 지갑을 들고 추가 라면을 주문하러 가는 그를 소리와 내가 각각 말리면서 반쪽짜리 라면으로 점심을 때웠다. 그러고 나서 다섯 시간 삼십 분이 지났다. 뱃속은 이미 전쟁터였다. 아까 둘의 대화를 얼핏 들어보니 오늘 저녁 메인은 고기라던데. 상상만으로도 위장이 진동했다. 우리보다 한 시간 먼저 끝났으니 둘 다 방에 있겠지. 아이도 나만큼 배가 고플 테니 어쩌면 이미 식사 준비를 하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기대로 날듯이 방에 도착했다. 문을 열면 그의 손맛이 담뿍 담긴 저녁이 한상 차려져 있을 거란 상상하면서.

하지만 개선장군 마냥 문을 연 너머는 무릎 꿇은 그밖에 없었다. 그는 냉장고 앞에서 막 쇼핑봉투를 열던 참이었다. 실망감으로 왈칵 솟은 위산을 그나마 두툼한 봉투를 보며 다독였다.


“조금 늦었네.”


그는 평소 같은, 아니 평소보다 훨씬 냉막한 무표정으로 나를 반겼다. 배가 고파서 그런가. 넌 갈치 먹었잖아. 위장이 땅기던 나는 은근한 기대에 버무려 그의 말을 받았다.


“일이 좀 있어서. 혼자 장 봐온 거야?”

“들어와.”


그는 굳이 필요가 없는 말에 잘 대꾸하지 않았다. 보면서 뭘 물어봐. 그렇게 꾸짖는 것 같아 처음에는 마음 상할 때도 있었지만 요즘은 꽤 익숙해져서인지 저건 말이 아니라 방귀라고 넘길 수 있게 되었다. 새로 구입한 갈색 슬리퍼를 신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근데 묘하게 기분이 이상했다. 곰곰이 이유를 더듬다 문득 뒤늦게 의문이 들었다.


“근데 아이는?”

“일이 있다고 먼저 가래.”


방 안까지 들어선 후에야 알았지만 공복감에 놓친 위화감의 정체는 아이의 부재였다. 그제야 깨달았다. 평소보다 불퉁해 보이는 그는 지금 불안상태였다. 어지간하면 떨어지지 않으려는 그가 혼자 집에 왔다고? 아이의 의지가 아니고서야, 그것도 아주 강력한 의사표현 없이는 그럴 리가 없는데. 나도 모르게 돌아본 신발장에는 그의 운동화와 내 단화뿐이었다. 러그 곁에 아이의 하얀색 슬리퍼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어?”


주방과 거실 경계에 서있던 내가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내뱉자 버섯 팩을 쥔 그가 나를 돌아봤다. 눈이 마주쳤다. 아무 일 아니라고 손을 내저으며-사실 거의 버둥거리며- 나는 식탁으로 도망쳤다. 생각해보니 이 방에 그와 둘뿐인 것은 처음이구나. 그 점을 의식한 순간부터 갑자기 공기가 달라졌다. 불안할 만큼 모든 것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괜히 자세를 고쳐 앉게 되고 필요 이상으로 두리번거렸다. 아까 바람이 많이 불던데 머리는 산발이 아닌지, 현관문은 잠겼는지 열렸는지, 해는 얼마나 졌는지. 그러고 보니 아이는 무슨 일일까. 가만히 있으면 더 어색해질 것 같아 물어보려는데 까만 뒤통수가 “금방 온대”라며 내 입을 막았다.


“독심술이냐, 너는.”


그는 또 대답이 없었다. 그 반응에 삐죽 벌어지던 입은 서둘러 다른 말을 꺼냈다.


“도와줄까?”

“괜찮아.”


그는 이쪽은 보지도 않고 쇼핑봉투를 풀어 벽돌처럼 냉장고 안을 채우고 있었다. 평소처럼 매정한 뒤통수였다. 성냥개비를 이어 붙이는 대화지만 그거라도 해야 분위기가 좀 나아질 텐데. 마지막 시도까지 거절당해 무안해진 나는 한동안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방안을 몇 바퀴 돌았다. 베란다에서 떨어지는 해를 구경하다가 끝내는 몇 번씩 본 사진들을 다시 한번 훑어봤다. 문득 귀퉁이에 있는 사진에 시선이 멎었다. 아이가 종종 유심히 들여다보던, 공장처럼 보이는 장소에 작은 남자아이가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몇 번이나 본 사진인데 오늘따라 왜 눈에 띄었을까.


“이거 혹시 너야?”


식칼을 씻던 그는 고개만 돌려 내 손가락이 가리킨 곳을 확인했다. 그는 잠시 사진을 봤다. 보일 거리가 아님에도 마치 눈앞에서 보는 얼굴이었다.


“어릴 때.”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냉장고 정리와 저녁 재료 준비를 끝냈다. 그리고 방 안으로 들어오던 그와 마침 베란다에서 나오던 내가 맞닥뜨렸다. 또 눈이 마주쳤다. 굳어버린 날 빤히 쳐다보던 그는 문득 떠올랐는지 “옷…”이라고 중얼거리며 서랍 쪽으로 향했다.


“아니! 아이 오면 같이 갈아입을게!”


최선을 다해 손을 내저었지만 옷은 이미 손 위에 있었다. 내 몫의 회색 바지와 연두색 티셔츠. 옷은 깨끗이 빨아 정갈하게 포개져있었다. 문득 주말 혼자뿐인 방에서 이것을 갰을 그의 모습이 쉽게 그려졌다. 그 순간 왜인지 아랫배가 아릿해졌다. 나는 일단 건네받은 옷을 식탁 한 편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는 화장대 의자에 나는 식탁 의자에 앉아서 다시 1분가량이 흘렀다. 제발 빨리 좀 와줘. 마중을 나갈까 진지한 충동이 들었을 때 마침 복도의 센서 조명이 차례로 점등했다. 동시에 그와 내가 벌떡 일어났다. 그 역시 나만큼 아이를 기다렸나 보다. 물론 이유는 나와 좀 다르겠지만 말이다.


“왔어?”


나는 버선발로 달려 나가 아이를 반겼다. 현관을 들어오던 아이는 나를 보더니 잠시 멈췄다. 마치 있는지 몰랐던 것처럼. 그러다 이내 웃었다.


“일찍 와있었네.”


말투는 평소 같았으나, 너무 오래 삶은 파스타면처럼 목소리 내부에 심지가 없었다.


“소리가 오늘 개인적인 일이 있다고 배웅 안 해줘도 된다고 해서.”


반가운 마음에 미주알고주알 서두를 꺼냈다. 아이는 웃으며 작게 끄덕였다. 그 순간 평생 예민하게 단련해온 더듬이가 움찔거렸다. 어디 아픈 건지 아니면 피곤한 건지. 상대의 티 내지 않으려는 의지가 느껴져서 나는 열던 수다를 도로 잠갔다. 내가 입을 다물자 아이는 실내화를 신으며 잠시 그와 눈을 맞췄다. 지금 아이는 화가 났다. 왠지 그를 보는 아이의 등에서 나는 그런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화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지금 아이의 내부에서는 여러 감정들이 휘도는 중이고, 그것들이 뭉쳐 화의 껍질을 뒤집어썼을 뿐이었다. 혹시 방금 혼자 오는 길에 무슨 일이 있었나. 나는 더럭 겁이 났다. 하지만 아이의 감정은 특정한 한 사람을 향한 것은 아닌 듯했다. 어쩌면 주변 모두에게, 어쩌면 누구보다 스스로에게 느끼는 감정 같았다. 불신, 분노, 슬픔, 괴로움, 부정, 체념, 반발, 두려움 등이 각각의 색을 뽐내며 아이의 어깨 위를 넘실거리는 듯 보였다. 과학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나는 어째선지 느낄 수 있었다. 이게 뭐야? 갑자기 왜 이런 게 보이지? 나는 허둥거리며 두 눈을 여러 차례 비볐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니 허공에 떠있던 색방울들은 없던 듯 사라져 있었다. 배가 고파서 헛것을 봤나. 반면 그는 내가 느낀 것을 감지하지 못했는지 평소 같았다. 퇴근한 집사를 만난 고양이처럼 무표정하게 아이를 반겼다. 아이는 그대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말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지나치는 등 뒤로 그의 고개도 살짝 기울어졌다.


“저녁은?”

“생각 없어.”


뒤따르던 그의 말에 아이는 자르듯 내뱉었다. 의외의 대답이었는지 아이와 있으면 늘 물 흐르듯 움직이던 그가 잠시 굳었다. 예상 목록이라도 이미 뽑아놓은 것처럼, 혹은 미리 언질이라도 받은 것처럼 자신 있게 냉장고를 열던 손도 도중에 멎었다. 이유를 물어볼까, 말까. 그런 고민을 하던 얼굴이 결국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하고 내게 넘어왔다.


“너는?”


그런 눈으로 물어보면 내가 뭐라고 해. 지금 먹겠다고 하면 안 될 분위기인데. 애당초 모두가 노 할 때 혼자 예스하는 성격도 아니어서 나 역시 어색하게 본심을 숨겼다.


“나도 별로.”


그는 복잡한 얼굴로 조용히 냉장고 문을 닫았다. 그 사이로 얼핏 까놓은 양파와 고기가 보였다. 저녁은 버섯고기볶음이었나 보다. 메뉴를 확인하자 빈속이 들끓었지만 이미 배는 떠났다. 닫힌 냉장고만 한참 노려보다 고개를 들었을 때 그와 눈이 마주쳤다. 왜? 되물을 수도 없이 그의 표정은 뭐라도 잘못 먹은 것 마냥 낯설었다. 그가 어정쩡하게 바라보는 곳은 방이었다. 아이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 끄트머리에 인형처럼 앉아있었다. 이쪽은 더 낯선 모습이었다. 내가 다시 그를 보니 그는 말없이 턱짓으로 종용했다. 무슨 뜻인지 눈치챈 나는 울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제 눈짓으로 강요했다. 알았어! 알았다고. 끝까지 버티지 못한 나는 그에게 입모양만 던져놓고 방안으로 살며시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이야.”


대답이 없었다. 이쯤에서 포기하고 싶지만 뒤에서 전해지는 압박이 더 무서웠다. 방 안으로 들어선 나는 문을 반쯤 닫고 아주 작게 속삭였다.


“자이야.”

“응?”


눈이라도 뜨고 잤는지 아이의 얼굴이 퍼뜩 이쪽으로 돌아왔다.


“옷 안 갈아입어?”

“아. 갈아입어야지.”


침대 위에 번듯이 놓여 있는 옷을 찾아 아이는 온 방을 헤매기 시작했다. 허둥대는 아이를 도로 앉혀놓고 늘 입던 검정과 노랑을 작은 품에 안겼다. 그런 후, 나 잘했어?라는 얼굴로 돌아보니 그는 이미 방문을 닫고 있었다.

오늘 다들 왜 이럴까. 소리도 그렇고 그도 그렇고, 아이마저 죄다 안 하던 행동을 하면서.






침대를 벤치 삼아 엉덩이 셋이 나란했다. 삼인용 극장처럼 어느 순간부터 TV을 시청할 때면 늘 이런 배치였다. 다만 앉은 순번만 달랐다. 평소라면 아이는 대장처럼 중간, 그리고 안쪽은 나, 바깥은 그였다. 오늘은 어쩐 일인지 내가 대장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침대 앞 낮은 탁자에 음식이든 간식이든 없는 것도, 무릎 위에 있다가 어느 순간 말려 사라질 담요가 침대 한쪽에 고이 있는 것도 평소 같지 않았다. 그리고 각자의 표정까지도.

채널은 코미디와 예능을 거쳐 결국 다큐 프로그램까지 넘어갔다. 위치 상 엄청 맞겠거니 우려했던 것과 달리 좋아하던 코미디 쇼에도 아이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는 원래 별 반응이 없으니 나 혼자 웃는 것도 한두 번이고, 다른 채널의 코미디와 예능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도 다큐에서 채널을 멈췄다. 처음부터 계속 긴장하고 있던 내 왼팔은 이제 잔잔한 내레이션 속에 잘게 떨리는 중이었다. 그렇게 저녁도 거르고 TV를 보던 중에 내내 조용했던 아이가 불쑥 말을 꺼냈다.


“하는 게임 있어?”

“나?”


돌아본 내가 무색하게 “지금은 없어”라고 리모컨을 손에 쥔 그가 짧게 답했다. 이래서 이런 자리 배치는 좋지 않다. 가운데에 끼어서 양쪽이 하는 대화를 듣는 것은 그 순간뿐이라도 이 자리에 스스로가 불필요하다 생각하게 되니까.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은 그가 웬일로 강하게 밀어서 엉겁결에 앉기는 했지만 이건 뭐 영국인과 미국인 사이에서 통역하는 것도 아니고. 나는 슬쩍 엉덩이를 뒤로 빼며 그들의 시야 선상에서 내 머리를 치웠다.


“그럼….”


허공에 시선을 띄운 아이는 잠시 뜸을 들였다. 배고파서 그런가.


“배고파?”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내 마음 같지 않은 아이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내 적당한 문장을 찾은 듯 아이가 그를 보며 말했다.


“우리 지난번에 보다 만 프로, 그거 다 보고 나한테 얘기 좀 해줘.”


마치 옆의 쿠션을 집어 달라는 가벼운 어투였다. 늘 느끼는 거지만 이들의 대화는 너무 빠르면서 엉뚱했다. 아이의 말에 손 안에서 리모컨을 돌리던 움직임이 어느 순간 멈췄다. 나는 무슨 말인지 아직 맥락도 잡지 못했는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외투를 챙기기 시작했다.


“어디 가게?”

“피시방 다녀올게.”


내 말에 그의 대답은 언제나 요점만 짤막했다.


“지금?”

“응.”

“혼자?”

“응.”


휴대전화와 담배, 그리고 지갑 순서대로. 그는 대답 하나에 물건 하나씩을 챙겼다. 멍청한 물음과 간략한 답이 오가는 우문즉답. 얘가 갑자기 왜 이래. 불안해진 내가 아이의 눈치를 슬쩍 봐도 아이의 시선은 TV에 닿아 있었다.


“잠깐 다녀올 테니 같이 있어줘.”


뒤따라 거실로 나갔을 때 그가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뭐라 대꾸하기 전에 아이가 방에서 나왔다. 그를 따라 나와 배웅하는 것도, 신발을 신고 돌아선 그의 외투 지퍼에 아이의 손이 닿은 것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지퍼를 다 채운 아이는 내려다보던 그와 마주 봤다. 낯설어하는 나와 달리 그는 무표정한 아이를 보며 말했다.


“그때 밥 먹으면서 봐서 그런지 생각이 잘 안 나네. 처음부터 보고 올게.”


담담한 목소리에 그제야 아이는 살짝 웃었다. 고마워, 미안해, 역시, 어쩌면. 감사와 사과, 흐뭇함과 불안함이 작은 눈동자 안에서 교차했다.


“다녀올게.”


아주 조금 더 아이를 내려다보던 그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돌아서 나갔다. 쿵. 평소보다 무거운 문소리가 우리만 남은 그의 방을 울렸다.

그리고 그날 밤을 난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가 지나가며 켜졌던 복도의 점멸등이 다시 꺼졌다.


“할 말이 있어.”


그때까지 멀뚱히 서있는 내게 돌아선 아이는 그렇게 말했다. 마주 본 아이의 눈동자는 가을 새벽의 가로등처럼 조용했다. 그리고 잠시 후, 안개나 습기도 없이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눈가가 가득 젖었을 때야 아이가 울고 있음을 눈치챘고, 잔뜩 일그러트린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린 후에야 주저앉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놀란 내가 무너진 아이를 받아 안았다. 그로부터 어르고 달래기를 한 시간. 그동안 아이는 끝내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계속 울다 멈추고, 다시 울기만을 반복했다. 어쩌면 아무 말도 못 한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말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알아주기를 바라지만 나는 절대 알 수 없는 언어로, 말이라는 그릇에 차마 담을 수 없어 눈물이란 수단으로 대신 표현한 것 같았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당황하다가, 달래다가, 물어도 보다가, 결국 안겨있는 작은 등만 말없이 쓸어내렸다. 아직도 울다 잠든 아이의 얼굴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 아이가 무슨 마음이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저 그 순간을 떠올리면 젖은 앞섬이 가슴을 먹먹하게 내리누르는, 그런 묵직한 느낌만 남았을 뿐.

그가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이 지난 후, 아이의 숨소리가 잦아들고 십분 쯤이 지났을 때였다. 편의점 봉투를 들고 있는 그의 안색은 피시방에 있었던 것치고는 너무 차게 식어있었다.


“자?”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외투며 봉투며 무엇 하나 내려놓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있었다. 내게 안겨 잠들어있는 아이만 한동안 내려다봤다. 낮게 가라앉은 그의 눈빛만큼 내 마음도 덩달아 심해로 떨어졌다.


“놔둬. 아직 깊게 잠들진 않았을 거야.”


침대에 눕히려는 손을 말로 밀어내니 그는 순순히 물러났다. 손에 든 것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때까지 혼자 켜져 있던 TV를 껐다. 형광등은 여전히 밝았지만 그것만으로 방 안은 순식간에 밤처럼 되었다.


“불 끌게.”

“먼저 자. 난 조금 있다가 아이 제대로 눕히고 잘게.”

“알았어.”

“잘 자.”

“너도.”


탁구공이 오가듯 건조한 밤 인사. 바닥에 널브러진 봉투. 스위치가 내려가는 소리. 전등에서 달빛으로 바뀐 조명. 차디 찬 얼굴을 하고 거실로 나간 그. 울다 기절하듯 잠든 아이. 그리고 혼자 우뚝 앉아 있는 나.


‘아이고. 못난이들.’


달을 올려다보며 조용한 숨소리를 듣고 있을 때, 꺼진 TV 속의 내가 그리 말했다.


‘나?’

‘셋 다.’


억울한 듯 올라간 내 눈썹은 금방 억지로 끌려 내려왔다. 달리 대꾸할 말이 없었다. 문득 그가 사 온 봉지가 눈에 띄었다. 얜 이걸 또 두고 갔어. 평소라면 칼 같이 냉장고에 넣었을 그가 두고 나갔다면 둘 중 하나. 챙길 정신이 없었거나 아니면 따로 이유가 있거나. 문득 어느 누구도 저녁을 먹지 못했음을 떠올렸다. 그리고 우리 점심이 반쪽짜리 라면이었던 것도 그는 알고 있었다. 처음 느껴보는, 혀뿌리가 탁하게 아려오는 배려였다. 위장 대신 명치가 쓰려왔다. 봉지를 들춰보니 삼각 김밥과 우유가 세 개씩 들어있었다. 참치 마요네즈에 볶음김치가 붙어있는 원 플러스 원 행사상품과 숯불갈비 단독 상품. 그리고 우유는 언제나처럼 딸기 두 개에 바나나 하나. 오늘 내 몫은 볶음김치였다. 행사상품만 달라질 뿐 언제나 같은 구성에 가슴을 넘어 울대까지 알싸했다. 서로 안겨있듯 스티커로 붙어있는 행사상품을 한동안 바라보다 침대 안쪽에 아이를 곱게 눕혔다. 그리고 침대 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참치 마요네즈와 볶음김치를 이어주는 스티커를 떼어냈다. 볶음김치를 집으려던 손이 중간에 멈췄다. 헤매던 손이 결국 들고 온 것은 홀로 떨어져 있던 숯불갈비였다. 우유도 바나나 대신 딸기를 집어 들었다. 껍질을 까 한입 깨무니 특유의 짜고 매콤한 향이 입안에 퍼졌다. 익숙하면서도 생경한 맛에 서둘러 우유를 들이켜도 소용이 없었다. 베어 문만큼 마음속 굳건했던 삼각석탑도 함께 흔들렸다.


“나도 사실 참치 마요네즈 좋아한다고.”


우물거리며 밥알 섞인 중얼거림을 내뱉으니 TV 속의 내가 말없이 나를 지켜봤다. 그래서 한다는 반항이 고작 딸기 우유냐, 라는 눈빛으로.

결국 숯불갈비와 딸기 우유는 다 먹지 못했다. 마음속 삼각석탑도 마찬가지. 흔들려 깨지긴 했으나 금 간 탑은 여전히 서있었다. 망연히 뒤를 돌아보니 창틀에 재단된 달빛이 아이를 반으로 갈라놓고 있었다. 벽 쪽으로 어둡게 가라앉은 등판과, 하얀빛무리 아래 울다 잠든 얼굴. 그리고 젖은 앞섬까지. 비추는 곳도 아닌 곳도 전부 너인데. 근데 넌 왜 아니려고 하니.

달빛 아래 아이는 눈이 부어도 참 예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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