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자이 :1의 사람들] 13

13. "지금 너희가 보고 싶어."

by 이한얼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많은 것들을 가지고 이곳에 온다. 가지려고 하지 않아도 이미 손안에 쥐고 있는 것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이미 내 것인 것들.

시간이 흐르고 자랄수록 사람은 쥐고 있던 것을 하나씩 놓친다. 놓친 것들은 내게서 멀어진다.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동안 아득하니 사라져 버린다. 왜 모든 것은 나를 떠나기만 하는지. 왜 내게 머물지 못하는지. 뒤늦게 울며불며 쫓아갔더니 멀어진 그것은 처음 그 자리 그대로. 멀어진 것은 그것이 아닌 뒷걸음질 쳤던 스스로였다.

그렇게 되찾는다. 하지만 얼마 못가 또 놓치고, 다시 찾는다. 한 번이라도 놓쳤던 것은 되찾아도 계속 놓치게 되며, 그 과정을 반복하는 동안 결국 영영 잃어버린다. 이제 다시는 찾지 못할 거란 예감으로 그 빈자리만 더듬는 동안, 그것은 정말 닿지 못할 곳으로 사라져 버린다.

사람은 그렇게 잃어버린 잔향으로 멀어진 것을 기억한다. 살아간다는 것은, 나이를 쌓아간다는 것은 처음 가지고 태어났던 것의 빈자리를 하나씩 늘려가는 과정이다. 살아감에 따라 새로이 얻어가는 것들 사이에서 무의식적으로 지금껏 잃은 것을 내내 그리다가, 처음 가지고 태어난 것들 중 마지막으로 내게서 멀어지는 것과 함께 이곳을 떠난다.



열다섯 번째 주, 수요일


기말고사도 이제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기말고사 2주차 수요일. 우리 셋은 지금 편의점 앞에서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가 울었던 다음날, 금요일 수업을 마치고 우리는 각자 집으로 흩어졌다. 나는 당연했고, 아이도 금요일이라 돌아가야 했다. 주말이 지나고 기말고사 첫 주가 시작되었다. 월요일 아침에 우리는 평소처럼 그의 방 앞에서 모여 강의실까지 함께 올라갔다. 아이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두 사람 뒤를 따라갔다. 간혹 지나가는 소소한 잡담으로 길게 이어지려는 침묵을 잘라내며 오전 공통 수업의 시험을 함께 봤다. 점심을 먹은 후에 나는 소리와 함께 시험을 봤다. 아이와 그는 다른 과목 시험을 보러 갔다. 그렇게 오후도 순식간에 지나갔다.

버스정류장에서 소리를 보낸 나는 정문 앞에서 둘을 기다렸다. 그의 방에서 묵고 가지 않더라도 시험기간에는 잠시 얼굴이라도 보고 헤어졌으니까. 얼마쯤 기다렸을까. 멀리서 걸어 내려오는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손을 흔들던 나는 이내 굳어버린 손을 천천히 내렸다. 아이는 혼자였다. 다가간 내가 왜 혼자인지 물었더니 아이는 오늘 집에 가야 해서 먼저 나왔다고 했다. 평소처럼 웃는 아이의 얼굴이 내 마음에 얇은 흠을 내고 지나갔다. 하지만 겉으로는 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지. 그런 날도 있겠지. 먹먹하게 젖어오는 불안을 웃음으로 덮었다.

“시험기간에 오가려면 힘들잖아.”

아이가 말했다. 무슨 뜻인지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내 고개가 퍼뜩 올라왔다. 짧은 말이었지만 담긴 의미는 명확했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지난 중간고사 때도 두 번째 주에는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연달아 2박을 하기도 했으니까. 갈아입을 속옷 문제가 아니었다면 수요일 밤마저 묵었을 수도 있었다. 이제와 그도 새삼스럽게 불편해하며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셋이었다. 너도 없는데? 나는 불쑥 솟아오르던 말을 삼켰다. 그저 웃으며 고개만 저었다. ‘이런 분위기에, 너도 없는데, 나중에 너도 있으면….’ 못한 말들이 내 얼굴 안에 모두 담겨있었는지 아이 역시 마주 웃기만 했다. 조금 힘이 없어 보이는 미소였다.

“내일 봐.”

아이는 손을 흔들며 마을버스를 탔다. 멀어지는 버스 꽁무니를 배웅한 나는 조금 더 그를 기다렸다. 잠시 후 털레털레 걸어 내려온 그도 내가 들은 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아이에게 들었다고 했다. 일이 있어서 집에 가. 시험기간인데 별일 없으면 화자는 자고 가라고 하지? 아이에게 들었던 말을 되풀어하던 그는 말미에 “그럴래?”라고 덧붙였다. 나는 곧장 고개를 저었다. 그도 예상한 듯했다.

다음날인 화요일은 오전 공통 수업뿐이었다. 비슷한 시간에 시험을 끝낸 우리 넷은 나란히 정문으로 내려왔다. 소리를 배웅하려고 마을 버스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아이도 소리 옆에 섰다. 일이 있어 집에 가야 한다고 했다. 이번 주, 그리고 어쩌면 다음 주도 그의 방에 가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덧붙이며 아이는 웃었다. 그때서야 내 마음속의 불안이 선명한 윤곽을 드러냈다. 내 곁에 선 그도 다른 의미로 심각해 보였다. 소리는 안 그런 척하며 아이를 힐끔거렸다. 붙들어둘 명분이 없었기에 아이를 태운 버스는 금세 떠났다. 소리가 탄 버스도 곧 뒤따라갔다. 멀어지는 꽁무니를 보며 그는 드물게 먼저 나를 잡았다. 혹시 뭐 아는 것이 있는지, 혹시 자기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묻는 그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은 궁색했다.

다음날인 수요일은 각자 끝나는 시간이 달라서인지 아침에 언질만 남기고 아이는 돌아갔다. 매주 다 같이 묵었던 목요일은 소리와 내려와 보니 아이는 이미 없었다. 금요일 역시 넷이 내려와 우리를 남기고 아이는 버스에 올랐다. 그런 식으로 한 주가 끝났다. 주말 내내 책상에 앉아 책을 펴놨지만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갑자기 달라진 아이의 행동만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아이에게 집에 가야 할 일? 물론 생겼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가 집에 가고 싶을까? 그렇게 물어보면 장담하는데 그럴 리 없었다. 결국 월요일 아침에 나는 새엄마에게 통보하듯 말하고 일주일치 짐과 함께 학교로 왔다. 내가 강의실에 도착했을 때, 내 뒤로 매달려있는 보스턴 백을 본 둘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번 주 신세 좀 지자!”

오면서 마음속으로 수백 번 연습한 말을 우렁차게 외치며 그에게 짐을 던졌다. 물론 그는 멋진 포즈로 받아냈고, 어째선지 포즈보다 더 멋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간해서는 움직이지 않던 일자눈썹이 기분 좋게 일렁였다. 나와 그의 시선을 연달아 받은 아이는,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가 잠시 후 쓰게 웃을 뿐이었다.

결국 그날 아이는 집으로 가지 않았다. 늘 앞장서던 아이답지 않게 뒤따라오기는 했으나 다른 말없이 그의 방까지 따라왔다. 작은 발이 하얀색 슬리퍼를 신고 나서야 내 손이 아이의 손목을 놓았다. 그 후로 평소처럼 저녁을 먹고, 각자 공부를 하다가 잠을 잤다. 그리고 다음 날인 화요일, 그러니 어제도 같은 노선으로 움직였다. 내내 함께 있는 아이는 말수가 조금 줄었을 뿐 평소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이었다. 오후에 세 사람의 수업이 계단처럼 겹치며 늦게까지 이어진 날. 언제고 내가 그의 집 화장실에 갇혔던 날과 같은 요일. 수요일 마지막 시험을 마친 나는 두 사람을 기다릴 겸 빈 강의실에서 내일 시험공부를 하는 중이었다. 웬일인지 소리도 먼저 가지 않고 함께 남았다. 십 분이 지나자 옆 강의실에서 시험을 마친 아이가 왔다. 삼십 분이 더 지나자 건너편 강의실에서 시험을 끝낸 그가 왔다. 전부 모였을 때는 이미 해가 길어지는 시간이었다. 잠시 화장실에 간 아이를 제외하고 강의실에는 느릿하게 가방을 챙기는 우리 셋만 남아있었다. 그 강의실이었다. 내가 밤새 달을 봤던 곳.

잠시 후 아이가 돌아왔다. 우리 넷이 복도를 나서자 건물에는 우리만 있는 듯 조용했다. 시험 기간이었으니 그럴 법도 했다. 교수실도 굳게 잠겨있을 터였다. 학과 사무실에나 겨우 몇 사람이 남아있을까. 우린 조용해진 계단을 내려와 중앙현관으로 나왔다.

1학기는 이제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방학 때도 만나려면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학기가 끝나지 전에 이 위태위태한 분위기를 풀어내고 싶었다. 생각에 빠져 졸지에 소리와 함께 앞장서고 있는데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끊겼다. 돌아보니 그가 등을 보인 채 서있었다. 그 너머에 아이가 멈춰있었다. 잠시 도서관 쪽으로 시선을 두던 아이가 말했다.

“학과 사무실에서 뭐 받았어야 했는데, 깜빡했다.”

“내가 갔다 올게.”

그가 나서려 하자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집이랑 관련된 거라 내가 직접 가야 해.”

아이는 그와 나를 번갈아보며 말했다.

“먼저 가있어. 그것만 받아서 갈게.”

그는 아이를 놔두고 먼저 가는 것이 내키지 않는 듯 머뭇거렸다. 하지만 아이의 눈은 벽처럼 단단했다. 그냥 같이 가도 될 텐데. 지금까지 그랬듯이 아이가 일을 보는 동안 그는 밖에서 기다리면 되니까. 하지만 지난주부터 아이는 그와 단 둘이 있지 않으려고 하는 듯했다. 아니, 정확히는 나까지 셋이 있어도 되도록 그와 함께 있지 않으려고 했다. 소리마저 있을 때는 그의 곁에 서지도 않고, 중간에 꼭 나를 끼운 상태로 움직였다. 아이의 어깨 위에서 넘실대는 색 없는 아지랑이를 살피던 나는 결국 그의 가방을 잡아당겼다. 그가 내민 휴대전화를 아이가 받아 들었다. 그제야 그도 원치 않는 걸음으로 내려갔다. 가는 도중 몇 번이나 돌아봤지만 아이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우리를 배웅하고 있었다. 마치 몰래 뒤따라가지도 못하도록.

그리고 지금이었다. 정문 앞 편의점 의자에 앉은 그가 초조한 기색을 내비치며 언덕길을 살폈다. 시간이 갈수록 나도 덩달아 불안해졌다. 소리도 불편한 공기를 감지했는지 가슴이 죄인다는 표정이었다. 물건만 받아올 시간은 이미 지났는데. 이야기가 길어지나. 전화를 해볼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의 눈이 마주쳤다. 지금 그는 사람 많은 거리에서 엄마를 놓친 얼굴이었다. 시린 걱정을 삼킨 무표정이 곧 울음을 터트릴 듯했다. 나는 진정하라는 듯 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길게 이어졌으나 받지 않고 끊어졌다. 다시 걸었으나 훨씬 빨리 끊어졌다. 못 들은 것이 아닌 수신 거부였다. 그 즉시 그가 테이블 위에 올려둔 지갑을 움켜쥐었다. 일어서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말리지 않았다. 나 역시 왜인지 불안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지금 그는 아이의 목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듣지 않을 얼굴이었다.

그가 빠른 걸음으로 앞서 올라갔다. “내일 보자”라는 내 말에 소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자신과 관계되지 않는 일이라면 혹시 민폐가 될까 봐 잘 끼지 않으려던 소리가 웬일인지 따라가겠다는 뜻을 보였다. 우리도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조금씩 뒤처지는 소리에게 천천히 오라고 말한 나는 한참 앞선 등을 최대한 따라붙었다. 내려올 때에 비해 올라가는 길은 한 걸음이었다. 사람 하나 없는 건물은 왠지 고요했다. 강의실은 모두 텅 비어있었고, 우측 계단 쪽에 있는 학과 사무실은 열려있었으나 아무도 없었다.

“벌써 돌아간 거 아닐까? 엇갈려서.”

그는 대답이 없었다. 겉으로 명확히 드러날 만큼 아까부터 그는 이상할 정도로 불안해하는 중이었다. 마치 아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 거라 확신하는 것처럼 굴었다.

“일단 다시 내려가 보자. 어쩌면 올라오던 소리와 만났을지도 몰라.”

그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학과 사무실 바로 옆에 있는 우측 계단으로 내려가지 않고 왠지 중앙 계단 쪽으로 향했다. 우측 계단으로 내려가려던 그도 내 뒤를 따라왔다. 자판기와 비상등을 등지고 내려가려는 찰나, 어디선가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부터 전해져 오듯이 울리는 소리였다. 우리가 왔던 곳의 반대편인 좌측 복도 쪽이었다. 이윽고 “화자야”라며 나를 부르는 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려가려던 걸음을 되돌려보니 좌측 계단에서 헐떡거리는 소리가 걸어오고 있었다. 뒤늦게 따라온 소리는 중앙 계단이 아닌 오르던 길에서 가까운 좌측 계단으로 올라온 모양이었다.

뒤늦게 생각해보면 신기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애당초 여기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의 말을 듣고 집에서 얌전히 기다렸겠지. 그가 나 없이 혼자 왔다면 중앙 계단이 아니라 올라온 우측 계단으로 내려갔을 것이다. 그리고 소리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그대로 중앙 계단으로 내려갔을 것이다. 이 일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던, 그렇게 되어야 했던 일이었다.

우리를 발견한 소리가 환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그때 쾅. 소리가 지나쳐온 뒤편에서 가볍지만 큰 소리가 났다. 강의실과 좌측 계단 사이의 여자 화장실 쪽이었다. 둔탁한 소리였지만 왠지 알 수 있었다. PB합판으로 된 칸막이나 문에 무언가 부딪혔을 때 나는 소리였다.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는 벌써 저만치 달려가고 있었다. 그는 굳어있는 소리를 지나쳐 화장실로 들어갔다. 쾅. 쾅. 이번에는 철문이 부딪히는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뒤늦게 내가 소리 옆까지 왔을 때 그는 화장실 입구를 발로 차고 있었다. 철문은 잠긴 것이 아니라 무언가에 막힌 듯 좁은 간격으로 덜컹거렸다. 곧이어 나무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가 안으로 뛰어들었다. 금세 화장실 안에서 누군가 구르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비명소리가 들렸다. 아이의 목소리였다.


내가 화장실로 갔을 때 도마뱀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는 도마뱀에게 등을 보인 채 주저앉은 아이를 감싸고 있었다. 몇 개가 풀린 아이의 블라우스 단추가 눈에 들어왔다. 그때 넘어져있던 도마뱀이 무언가를 손에 쥐고 일어났다. 문이 열리며 부서졌던 밀대 자루였다. 내가 소리치기도 전에 도마뱀은 그대로 그의 뒤통수를 내려쳤다. 답답한 신음과 함께 그와 아이가 엉켜 넘어졌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도마뱀은 번들거리는 눈으로 괴상한 고함을 질렀다. 이성을 가진 언어가 아닌, 말 그대로 비명과 같은 짖음이었다. 화장실 천장에 반사된 파충류 울음소리가 복도까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도마뱀은 소리를 지르며 쉬지 않고 나무 자루를 내리쳤다. 아이의 비명이 커질수록 그는 몸으로 꼼꼼히 아이를 덮었다.

화장실 입구에는 그 장면을 마주한 내가 있었다. 그때, 거기에, 내가 있었다. 그 도마뱀을 보는 순간, 그리고 풀어헤쳐진 아이의 블라우스 앞섬을 보는 순간, 내내 견고하게 서있던 마음속 사각석탑이 쩍 하고 갑자기 무너져 내렸다. 와르르 쏟아지는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멈췄다. 손과 발이, 심장이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여기가 어디인지,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나는 잊어버렸다. 곁에 떨고 있는 소리가 있다는 것도, 그보다 내가 더 떨고 있다는 것조차 알 수 없었다. 오직 머리만 새하얗게 타올랐다. 온몸이 사라지고 목 위만 남은 것처럼 모든 신경이 안면부로 쏠렸다. 건물도 화장실도 보이지 않는 하얀 세상에 오직 나와, 비명을 지르는 아이와, 아이를 감싸고 얻어맞는 그와, 나무 자루를 휘두르는 도마뱀만 있었다. 다른 두 사람에 비해 도마뱀은 크게 보였다. 점점 커지고, 더욱 선명해졌다.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그 자리에만 안경이 있는 것처럼 도마뱀은 뚜렷해졌다. 이내 세상에 나와 도마뱀 둘만 남았다.

나는 도마뱀이 미웠다. 아이를 울리고 그를 때리는 것을 보며 걷잡을 수 없이 화가 치밀었다. 마음속 아이와 함께 만든 화단을 짓밟던 발 그림자의 주인처럼 느껴졌다. 흔한 고리도 없이 몸통만 있는 열쇠를 망가트리는 망치처럼 보였다. 손에 돌이라도 있다면 이 자리에서 머리를 향해 냅다 던져버리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도마뱀은 나무 자루를 치켜든 채 그대로 멈췄다. 아니다. 모든 것이 멈춘 것처럼, 동영상을 한 프레임씩 넘기는 것처럼 아주 조금씩 움직였다. 그때부터 왜일까. 이상하게도 나는 더 이상 저 사람이 밉지 않았다. 대신 다른 정체모를 감정이 가슴 밑바닥에 피어났다. 이런 감정을 느껴본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나는 단지 의아했다. 네가 어째서 이 세상에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 눈앞에 네가 서있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순수하게, 다른 어떤 이해나 사심 없이, 저 사람을 이 세상에서 지우고 싶었다. 온몸으로, 모든 마음을 다해 저 존재를 부정하고 싶었다. 단언컨대 이 감정은 미움이 아니었다. 원망도 아니었다. 그제야 나는 처음 느껴보는 이것의 정체를 깨달았다. 이것은 증오였다.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에 내게서 완전히 벗어난 것, 조금의 섞임 없이 내가 완전히 밀어낸 것이었다.

살아오며 지금까지 느꼈던 모든 기쁨도 슬픔도, 미움도 괴로움도 모두 그 안에 내가 있었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내게 있었고, 내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아주 일편이라도 나와 연관된, 관계있는, 상호작용하는 것들이었다. 미움이라고 모두 남의 것이 아니었다. 기쁨이라고 오롯이 내 것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어떤 것과도 달랐고 그렇기에 처음인 감정이었다. 불순물 없이 깨끗이 타오르는 증오는 상대를 더는 미워하지 않게 만들었다. 단지 같은 공간에, 같은 하늘 아래 너와 내가 함께 있다는 것이 어찌 생각해도 용납되지 않을 뿐이었다. 그 부정은 마치 생존 욕구와 비슷했다. 물속에서 숨을 쉬고 싶은 마음과 흡사했다. 미움을 넘어 너를 증오하는 순간, 네가 여기 물질세계에 존재하고 있고 스스로 움직인다는 자체만으로 내게 위협으로 다가왔다.

의식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나는 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시선이 닿은 물건들만 하얀 공간 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은 걸레 머리 부분과 플라스틱 휴지통밖에 없었다. 휴지통을 잡았지만 너무 가벼웠다. 던져버리고 바로 뛰쳐나갔다. 발치에 익숙한 가방이 걸렸다. 이것도 너무 작았다. 무시하고 지나갔더니 눈앞에 문이 나타났다. 열었더니 6인용 테이블과 두툼한 나무의자가 나타났다. 나는 나무의자를 번쩍 들었다. 무거운 줄도 몰랐다. 플라스틱 휴지통보다 훨씬 가볍게 느껴졌다. 그대로 들고 온 나는 저 사람이 그러고 있는 것처럼 뒤통수에 의자를 내리찍었다. 뒤통수를 향해 넘어졌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분명할지도 모르겠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둔탁한 느낌이 빗나가지 않았음을 알려줬다. 미친 사람처럼 나무 자루를 휘두르던 그 사람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옆으로 쓰러졌다. 나뒹구는 의자 옆으로 나무 자루가 외로이 바닥을 굴러갔다. 그 사람은 아직 꿈틀대고 있었다. 나는 유모차를 놓친 엄마처럼 손을 뻗었다. 너는 움직여서는 안 돼. 너는 더 숨을 쉬면 안 돼. 내 손끝이 의자의 등받이가 아닌 뾰족하게 꺾인 나무 자루에 닿았다. 자루를 단단히 쥐고 웅크린 등을 향해 다가갔다.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그 사람 안의 여러 감정 중 가장 커다란 하나와, 내 안의 단 하나뿐인 감정이 순식간에 서로에게 닿았다. 그 순간 그 사람 어깨에서 청색과 자색이 뒤섞인 대량의 색방울이 울컥 튀어나왔다. 이상하다. 저 사람은 왜 날 두려워하지.

그때 하얀 안개를 찢으며 누군가의 손이 들어왔다. 군데군데 붉은 상처를 달고 있는 커다란 손이었다. 손이 보이자 그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아아.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나왔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처음 만난 그 모습으로. 늘 아이의 곁에 서있는 그 모습으로. 급출발한 버스에서 매달렸던 그 모습으로. 밥을 먹고, 길을 걷고, 수업을 듣고, 표정으로 대답을 하고, 낮고 곧은 목소리로 드문 의사를 밝히는 그 모습으로. 잠든 아이를 조용히 내려다보고, 이불을 덮어두고, 그제야 뒤늦게 잠이 드는 그 모습으로. 아이를 바라보는 옆모습으로. 창가를 내려다보는 뒷모습으로. 새벽녘 곱게 잠이 든 그 모습으로. 잠이 덜 깨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그 모습으로. 그 모습으로 그는 거기 서있었다. 그를 알게 된 지난 시간들 속에 내가 알고 있는 그 모습으로, 그리고 오늘에서야 처음 보게 된 그 모습으로 그가 서있었다.

너였구나.

그렇게 되뇌는 순간 마음속에 점처럼 박혀있던 그의 모습이 꽃처럼 피었다. 물속에 잉크가 퍼지듯, 허공에 천이 나부끼듯, 피어난 꽃잎이 폭죽처럼 터져나갔다. 하나가 개화하자 다른 수많은 점들이 연달아 곳곳에서 피어나고, 터져버렸다. 그래. 너였구나. 나는 뒤늦게 너를 봤다. 그리고 나를 인정했다. 그러니 그제야 네가 제대로 보였다.

그 순간, 그날 이후 위태롭게 서있던 삼각석탑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달을 보던 날에 하나, 그리고 지금 여기서 연달아 두 개. 세 개의 석탑은 모두 주저앉았다.

그는 멍하니 서있는 나를 향해 감싸고 있던 무엇을 두 팔로 밀어냈다. 무엇은 다가올수록 사람 형상이 되고, 곧 모습이 또렷해졌다. 둘에서 셋이 된 하얀 세상에 마지막으로 아이가 나타났다. 여기가 아닌 과거 어딘가에 빠져있는 눈동자와, 현재 나풀거리는 앞섬과, 미래에 점점 푸르게 멍이 들 왼쪽 뺨이 눈에 들어왔다. 너는 소나기처럼 온 세상에서 온몸으로 쏟아져 내렸다. 나는 나무 자루를 떨어트리고 그대로 너를 받아냈다. 두 팔을 벌리고, 가슴을 열어 작은 몸짓을 받아들였다. 품에 안기자 아이의 모습을 한 너는 아이가 되었다. 자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는 그제야 비로소 자이가 되었다. 하얀 공간에 네 사람이 모두 등장했다. 그제야 하얗던 세상은 속속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달뜬 공기가, 쉭쉭 대는 숨소리가, 노을에 붉게 물든 벽과 바닥이 하얀 세상 위로 달려왔다. 나는 화장실에 서있었다. 내 앞에는 그가, 그의 앞에는 뒤로 넘어진 도마뱀이, 내 품에는 아이가, 내 뒤에는 소리가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의자에 후려 맞은 도마뱀이 넘어져서 다시 일어서는 사이에 벌어졌다. 내가 아이를 제대로 받아냈음을 확인한 그는 돌아섰다. 두 팔을 들고, 막 상체를 일으키던 도마뱀을 향해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몸통을 들이받는 무거운 소리와 함께 둘이 벽 쪽으로 뒤엉켜 굴러갔다. 다행히 그가 먼저 일어났다. 그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품 안에서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움직임을 느꼈다. 아이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내게 고개를 묻고 있었다. 복도 저편에서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이의 등을 천천히 다독이며 풀려있는 블라우스 단추부터 채우기 시작했다. 가슴께로 손이 다가오자 아이는 잠시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손을 밀어내지는 않았다. 단추를 모두 채웠을 때쯤 몇 사람들이 소리의 등 뒤로 등장했다. 그때 문득 내 눈이 아이의 손에 닿았다. 아이는 네모난 무언가를 쥐고 있었다. 주먹 밖으로 비죽 튀어나온 것은 젊은 부부와 어린 남자아이가 있는 가족사진이었다. 공장 앞에서 활짝 웃고 있던 그 아이.

부부의 품에 안겨있는 작은 아이도 역시 너였다.


“그만해.”

아이의 목소리가 높은 천장을 공허하게 울렸다.

“그만해.”

지켜보는 누구도 선뜻 말리겠다고 나서지 못했다. 그만큼 지금 이곳의 분위기는 위압적이었다. 둔탁한 소리마다 어깨가 삐죽삐죽 솟았고 다리는 못 박힌 듯 굳었다. 담이 약한 소리는 이미 귀를 막고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인 심정이었다. 온몸이 떨렸지만 끝까지 지켜봐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시선만 떼지 않고 있었다. 내 품을 벗어난 아이만 나보다 한 걸음 앞에서 공허한 목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그만해.”

놔두면 곧 사그라질 것 같은 목소리마저 지우려는 듯 유리창에 핏방울이 튀겼다. 말이 전해지지 않자 결국 아이는 한 걸음씩 안으로 걸어갔다. 그 와중에도 몇 번이나 더 들렸는지 모르겠다. 둔탁하게 부딪히는 소리에 반응하는 미약한 신음소리. 그리고 이제 낮게 흐느끼기 시작하는 소리.

“이제 그만해.”

아이는 울고 있었다. 아이가 작은 손으로 그의 어깨를 짚었다. 그제야 그는 전원을 뺀 것처럼 멈췄다. 스르륵. 벽을 타고 도마뱀은 느리게 쓰러졌다.

“괜찮으니까 그만해.”

그의 어깨에 매달려 아이는 고개를 떨어트렸다. 아이를 매단 그의 시선은 멍하니 창밖을 향해 있었다. 곧 그의 고개가 뻣뻣하게 돌아왔다. 떨고 있는 아이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은 갖가지 감정을 눌러 담아 천천히 썩어가는 휴지통 같았다.

“고개 들어.”

굳어있는 목에서 나올 리 없는 또렷한 목소리였다. 누구도 시킨 적 없는 행동에 내뱉은 나도 깜짝 놀랐다. 내 목소리에 아이의 고개가 퍼뜩 올라갔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 모습을 보며 이 저주받은 천성이 처음으로 고마웠다. 어쩌면 이 순간을 위해, 오늘 이 자리에서 나도 모르게 말을 내뱉기 위해 그간 내게 머문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아이를 내려다보던 그는 이내 질끈 눈을 감았다. 안 돼. 그 마음 놓지 마. 붙들고 있어. 나는 둘 모두에게 그리 빌었다. 잠시 그를 올려다보던 아이가 그의 소매를 잡았다. 눈을 뜬 그는 아무것도 놓지 않은 눈빛이었다. 서로를 지탱하며 둘은 한 걸음씩 화장실을 벗어났다. 나와 소리, 그리고 모인 사람을 지나쳐 좌측 계단으로 향했다. 계단 코너를 꺾기 전에 아이는 이쪽을 돌아봤다. 나와 눈을 맞췄다. 말도 표정도 없었지만 눈빛이 있었다. 이제야 너의 눈말을 알 것 같았다. 눈물로 대신하는 대화를 지금에서야 이해할 것 같았다. 마주 눈물이 솟았으나 나는 애써 억눌렀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리고 둘은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화장실에서 아이의 가방을 챙겨 들었다. 도마뱀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미처 다 인지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아픈지 찡그린 얼굴에 순간 침이라도 뱉고 싶었다. 이상했다. 더 이상 그가 증오스럽지 않았다. 하얀 세상에 그와 아이가 연달아 나타났을 무렵부터였다. 지금은 단지 미울 뿐이었다. 나는 절벽 위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듯 시선을 던졌다. 도마뱀이 벌겋게 터진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앞에 서있는 것이 나임을 확인한 도마뱀은 내 손에 든 가방을 보고는 비명으로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조금이라도 멀어지려는 듯 엉덩이를 뒤로 밀었다. 엉망진창이 될 때까지 때린 것은 그인데 왜 나를 보며 저러는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관심도 없었다. 나는 피떡이 된 정수리에 침 대신 말을 뱉었다.

“우리 중에서 네가 제일 불쌍하다.”

그제야 사람들이 화장실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말만 하고 나는 돌아섰다. 그들이 내려갔던 계단으로 향하며 생각했다. 둘은 지금 어디까지 갔을까. 어느 마음쯤에 멈춰 섰을까. 부디 내가 너무 빠르지도 늦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등 뒤로 따라붙는 발소리에 문득 걸음을 멈췄다. 돌아본 곳에 소리가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소리 역시 어째선지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맡겨야 할지 모르겠으나 왠지 믿음직했다. 울고 있던 아이에게도 내 얼굴이 저렇게 보였을까.

가슴이 시큰하게 저미는 느낌에 나는 서둘러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학생들이 돌아간 일층은 고요했다. 파장이 길어진 석양에 길게 늘어선 복도도, 텅 빈 강의실도 붉게 멍울져 있었다. 일층까지 내려온 나는 잠시 그들의 자취를 쫓았다. 그대로 방으로 돌아갔을까. 그의 몰골도 그렇지만, 순간적인 아이의 기지를 생각해보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직 이 건물 안에 있을 터였다. 갔을 법한 곳을 찾아 계단과 복도의 경계에서 서성일 때, 문득 웅얼거리는 작은 목소리가 음울한 공기를 타고 넘어왔다. 흘러오는 소리를 한 뼘씩 되짚어 가보니 일층의 남자 화장실이다. 지금 내가 가면 방해겠지. 하지만 휴지나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머리가 걸음을 막아서는데 마음이 등을 밀었다. 한걸음은 나가고 반걸음씩 물러나다 결국 화장실 입구에 비켜섰다. 화장실 안은 창을 통해 들어온 노을로 모든 사물의 윤곽이 붉게 아롱지고 있었다. 그 세면대 앞, 거울에 비친 아이는 축축한 눈으로 수도꼭지를 여는 중이었다. 그는 문틀에 가려 손만 보였다. 흐르는 물에 그의 손을 둔 아이는 젖은 휴지로 그의 앞섬을 찍어 눌렀다.

“왜 그랬어.”

옷을 닦아내며 아이가 말했다.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잠시 그의 가슴 어림을 노려보던 아이는 붉어진 휴지를 자신의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새로 휴지를 뜯어와 물에 적시고 한참 더 그의 옷을 닦다가 “왜 그랬어”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왈칵 흐르던 것이 발치에 점점이 떨어졌다. 거울에 비쳐 보이는 아이의 왼쪽 얼굴은 아까보다 더 푸르게 번져 보였다. 그는 멍한 눈으로 부은 뺨을 보다가 “미안”이라고 했다. 그리고 공연히 반대쪽 뺨을 만지며 다시 “미안” 하고 덧붙였다. 그의 말에 아이는 고개를 숙였다. 눈이 아닌 입으로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그는 벌겋게 물든 휴지를 쥐고 있는 아이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나는 돌아섰다. 손톱만 한 바늘을 한 움큼 집어삼킨 듯 목 안이 아팠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비릿한 통증이 척추를 타고 내려갔다. 천천히 도망치는 내 뒤로, 점점 커지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쫓아왔다.


어린아이의 내면은 주변으로부터 세 가지를 삼켜야 자라난다.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물드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과 밀어내는 것. 우정과 사랑과 증오. 그 각각에 마음을 찔린 어린아이는 그때부터 어른이 될 준비를 하며, 그것을 조금씩 극복할수록 어른이 되어간다.

그러나 끝내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한없이 어른에 가까운 어른아이인 채로 생을 멈춘다.


나는 평생 그럴듯한 친구조차 없었다. 친구가 없었으니 누굴 좋아하는 마음도 몰랐다. 좋아하는 마음이 없으니 사랑하는 마음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누굴 사랑한 적이 없으니 증오하는 마음 역시 알지 못했다. 당연한 연관관계였다. 하지만 우습게도 누군가를 증오하고 나니 그를 미워할 수 있도록 만든 누군가를 내가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깨달은 후에야 네가 정말 좋아졌다. 그제야 진정으로 너를 친구로 느낄 수 있었다.

아이를 떠올리자 연달아 그가 생각났다. 그리고 도마뱀도 떠올렸다. 반대로 도마뱀을 떠올리자 연달아 그가 생각났다. 그리고 아이도 떠올렸다. 그 순환 속에서 나는 괴로워했다. 문득 아이가 미웠다. 그가 좋아하는, 그를 받아주지 않는 네가 미웠다. 아아. 하지만 나는 네가 좋았다. 예쁜 두 눈동자가, 그보다 빛나는 너의 영혼이 좋았다. 마음속에서 썩어 문드러지려는 대답을 하지 못해 머뭇거리는 나를 보며, 태어나 처음으로 내 눈앞에서 25초를 묵묵히 기다려준 너를 나는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좋았다. 처음으로 오랫동안 가까이서 지켜본 남자인, 진지하고 자상한 네가 정말 좋았다. 하지만 네가 밉기도 했다. 아이를 좋아하고 나를 밀어내는 네가 미웠다. 하지만 나는 너를 사랑한다. 왜 이제야 알게 되었는지 모를 만큼 내 마음에는 온통 너뿐이었다. 아이를 좋아하게 해 준 너를 나는 사랑한다. 이 마음을 깨닫게 해 준 도마뱀이 고마울 정도로 나는 너를 사랑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내가 미웠다. 그를 미워하고 아이를 미워하는 내가 못나게 미웠다. 하지만 아이를 좋아하며 그를 사랑하는 그런 내가 스스로 사랑스러웠다.

나는 선 채로 넘어졌다. 꼿꼿한 채로 무너졌다. 누구도 원망할 이가 없다는 것이 가장 괴로웠다. 아무도 원망할 리가 없다는 것이 가장 슬펐다. 미우면서 좋은 사람. 그런 사람들. 한 사람 위에 상반된 두 감정이 쌓이고, 각자는 다른 이에게 상반된 감정을 느꼈다. 서로를 조금 미워하면서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하고 있다. 그런 셋이 함께 있는 이 관계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하게 다가왔다. 든든하게 느껴졌다. 문득 밉고도 좋은 그들이 보고 싶었다.


첫 걸음을 들인 갈림길에서, 나는 이제 막 입구를 벌린 꽃봉오리를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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