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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자이 :1의 사람들] 14

14. "만약 나를 먼저 만났으면."

by 이한얼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좋은 것이든 좋지 않은 것이든 과거의 내가 보낸 것들이다. 이제부터 내가 가질 것들은 지금의 내가 미래로 보낼 것들이다. 지금 수중에 아무것도 없다고 느낀다면 분명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무엇이 있는지 꼼꼼히 세어보지 않았거나, 과거에 아무것도 보내지 않았거나. 그렇게 자신에게 없는 것을 확인했을 때 사람의 반응은 세 가지로 나뉜다. 멍청한 사람은 없는 것을 괴로워하고, 똑똑한 사람은 없는 것을 만들려 하고, 현명한 사람은 없는 것을 찾으려 한다.

지금까지 나는 그저 멍청하게 살았다. 이제라도 만들려고 하지 않았고, 정말 없는지 찾아보지도 않았다. 그저 없는 것을 괴로워하며 있는 것만으로 알량하게 살아왔다. 하지만 아이처럼 현명하진 못해도, 소리처럼 똑똑하지 않더라도, 더는 멍청하게 살고 싶지 않았다.



열다섯 번째 주, 목요일


어제 나는 한순간도 잠들지 못했다. 노트에서만 봤던 현장, 피가 튀는 폭력, 그리고 연이어 깨달은 마음까지 무엇 하나 처음 아닌 것이 없었다.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모르게, 정신 차려보니 이미 내 방 침대 위였다. 그때부터 시작된 릴레이는 해가 뜰 때까지 끊이지 않았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니 아이가 걱정됐고, 아이를 걱정하다 보면 그가 생각났다. 그를 생각하다 보면 시험이 걸렸고, 공부를 하다 보면 다시 아이가 걱정됐다. 아이를 떠올리면 아랫배가 아팠고, 그를 떠올리면 심장이 아팠고, 시험을 생각하면 머리가 아팠다. 결국 나는 어느 쪽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어느 것도 놓지 못한 채 아침을 맞았다. 뜬 눈으로 보낸 일분일초가 마치 꿈결처럼 지나갔다.

몽롱한 정신으로 첫 번째 시험을 마치고 나왔을 때, 학과 게시판에 종이 한 장이 붙어있었다. 어제 사건 당사자들은 오후에 학과장실로 오라는 호출이었다. 철권통치 중인 나이 많은 여교수는 형식적인 것을 좋아하는 듯했다. 분명 전화로 직접 불렀을 텐데 이렇게 보란 듯 종이까지 붙인 것을 보면 말이다.

시험이 끝난 오후에, 학과장 사무실에는 세 명의 사람이 모여 있었다. 방의 주인이자 이번 대질 면담의 주최자인 학과장과 사건의 당사자 둘. 아이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어제의 사건은 휴대전화를 건너뛰며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널리 퍼졌다. 학과장실 앞 복도는 새어 나오는 소리라도 들으려는 동기들로 북적였다. 기다리던 학과장이 전화라도 해보라고 닦달했다. 그때 몰려있던 사람들 뒤로 아이가 등장했다. 한 번 봤던 아버님과 어머님, 그리고 처음 보는 남성도 있었다. 웅성임 속에 그는 스스로 변호사라고 밝혔다. 어째선지 아버님을 어려워하는 학과장은 초대하지 않은 불청객을 내치지 못했다. 약간의 실랑이 끝에 아버님과 어머님은 나와 함께 복도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변호사만 들어가겠다고 했다. 어머님은 내 곁에 앉았다. 아버님은 얼마간 떨어진 곳에서 등을 보이며 섰다. 마주 잡은 어머님 손은 차가웠고, 계속 떨리고 있었다.

결국 셋을 부른 학과장실에 넷이 들어갔다. 학과장은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별다른 수도 없어 보였다. 결국 변호사는 개입 없이 참관만 하겠다는 확약을 받고서야 학과장의 4자 면담이 시작됐다. 조교의 통제에 아쉽게도 안의 내용은 엿들을 수 없었다.


아이는 면담이 끝나자마자 아버님, 어머님과 함께 차에 올라탔다. 도마뱀은 변호사와 다른 차를 타고 돌아갔다. 운전대를 잡은 아버님의 부리부리한 눈동자 탓에 제대로 된 인사조차 하지 못했다. 몸이 불편한 그와 나란히 서있던 나는 막 차에 탄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나를 보며 웃었다. 옅은 미소였지만 그조차도 온 힘을 다했음을 알 수 있었다. 지금 아이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아까 내 곁에서 닫힌 학과장실을 바라보던 어머님의 표정처럼, 아이의 표정 역시 모진 충격으로 꺾여있었다.

아이를 태운 차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우리는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잠시 후, 가방을 가지러 강의실로 올라왔을 때 마침 학과장실에서 조교가 나왔다. 조교는 전에 있던 종이를 떼고 다른 종이를 붙었다. 어제 사건에 대해 언급과 전파를 금지한다는 짤막한 내용만 있었다. 몇 시간 만에 당장 무슨 결과가 나올 수는 없었다. 나온다 한들 학생들에게 말해줄 리도 없을 터였다. 멀건 종이를 들여다보던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정문을 향해 내려갔다.

이때부터 나는 속으로 나를 욕하기 시작했다. 원래 이런 것이라 들었지만 이만큼 이런 것일 줄은 몰랐다. 방금 아이의 헤어지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아이와 눈이 마주치고 옆구리가 자잘하게 터서 갈리지는 기분을 느낀 것도 방금 전이었다. 무력감과 걱정에 위장이 벌건 유리처럼 뭉개진 것도 조금 전이었다. 하지만 네가 사라지자마자 이게 뭔가. 지금 나는 그와 함께 내리막을 걷고 있었다. 힐끔 올려다본 그는 처참한 얼굴이었다. 하얗게 매듭진 손의 붕대보다 마음이 더 희게 뜬 듯이 보였다. 저런 얼굴을 보면서도 둘만 남게 되자마자 이게 뭔가. 그와 관련된 나를 깨닫고 처음 단 둘이 있는 자리였다. 지금 나는, 정말 비참할 정도로 가슴이 떨렸다. 주책을 넘어 죄책감을 느낄 만큼, 내 정신은 온통 곁에서 나란히 걷는 그에게 팔려있었다. 분명 내리막은 전부 내려왔는데 중력이 이상하게 작용하는 것 같았다. 정문 앞 평지에서도 여전히 내리막인 것 같았다. 가만히 서있어도 잠시 정신을 놓으면 상체가 그가 서있는 방향으로 돌아가 있었다. 발가락에 힘을 주고 버텨도 자꾸 뒤꿈치가 들렸다. 사람 심장소리가 이렇게 컸구나. 심장이 이만치 세게 뛰면 눈이 쑤시는구나. 너를 좋아하고부터 모든 것이 달라 보였다. 온 풍경이 숨이 막힐 정도로 내게 달려들었다. 괜찮다면 이 자리에서 너에게 사랑한다고 외치고 싶었다. 그럴 수 있는 버튼이 있으면 당장이라도 누를 생각이었다. 그런 스스로가 너무 처참했다. 지금 너를 사랑하는 내가, 이렇게 정신 못 차리는 내가 더할 수 없이 부끄러웠다. 아이를 생각하는 마음은 조금도 줄지 않았는데, 여전히 걱정되고 보고 싶은데, 친구라는 나는 지금 이러고 있었다.

우리는 버스정류장에 잠시 서있었다. 멀리서 마을버스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오른손에 붕대를 감은 그가 내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히 가라는, 그만의 인사였다. 나는 대꾸 없이 잠시 그의 오른손을 내려다봤다. 아이는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는 이제 혼자인 방으로 돌아가 무엇을 하게 될까. 저 손으로 문을 열고, 밥을 먹고, 옷을 갈아입을까. 우리가 없는 방에서, 방보다 더 황량한 눈으로 어느 허공을 움켜쥔 채 아침을 맞이하게 될까. 아이가 없는 빈 침대에 개와 늑대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가로등 불빛이 내려앉고, 시린 박명이 번지고, 아침 햇볕이 떨어지고, 밤새 응축된 고되고 눅진한 침묵이 고일 텐데, 그때 그는 저 붕대뿐인 손으로 이불 위를 털어내고 있을까.

대답 없는 내 모습에 그의 표정이 의아하게 변할 때쯤, 내가 말했다.

“오늘 자고 가도 돼?”

고저 없는 담담한 내 말에 그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가타부타 다른 말도 없었다. 단지 약간의 틈이 지난 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전공서적을 뒤적거리던 내가 책을 덮고 TV를 켰다. 볼륨 소리가 없었음에도 잠시 후 그도 덩달아 책을 덮었다. 볼륨을 올린 나는 침대 안쪽에, 그는 바깥쪽에 앉았다. 중간에 한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자리를 비워둔 채 우리는 평소처럼 TV를 봤다. 와르르 쏟아져 나오는 웃음소리가 둘 사이 공허한 간격을 메웠다. 하지만 한 사람의 빈자리만은 오롯했다. 그렇게 TV를 보기 시작한 지 한 시간하고 20분쯤이 지났다. 어느덧 8시가 넘었다. 창밖은 이미 깜깜했다.

“동화야.”

말없이 브라운관에 시선을 두던 내가 그를 불렀다. 대답이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지금 나는 머리보다 몸이 훨씬 빠르니까.

“나도 네가 좋다.”

TV를 보던 눈이 내 쪽으로 돌아왔다. 나는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다만 전해오는 기운으로도 그의 시선을 읽을 수 있었다. 곧게 뻗어오는 시선은 그의 성격 그대로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다. 미안하다고 소리치며 운동장까지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칼은 이미 밖으로 나왔다. 너를 썰든 도리어 내가 썰리든, 혹은 맥없이 허공만 가른다 해도 지금 휘두르지 않으면 모든 것이 끝이다.

나는 TV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그와 눈을 맞췄다. 비명을 지르는 심정으로 그 시선에 못을 박았다.

“이성으로.”

이건 어디 패러디야. 인터넷 방송에서도 이런 패러디는 안 쓰겠다. 하지만 그렇게 우습고 후회되고 처참한 상황임에도, 놀랍게도 그렇게 말한 순간부터 심장이 정말 크게 뛰기 시작했다. 마치 상체가 전부 심장이 되어버린 것처럼 방 안은 쿵쾅거리는 진동으로 가득 찼다. 좋아하는 마음을 아주 꽁꽁 숨겨놓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말을 하자마자 자길 불렀냐며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어느새 TV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기계소리 같은 이명만 윙윙거렸다.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차라리 무슨 말이라도 해줘. 그런 생각이 들 때쯤 그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고개를 거뒀다. 눈이 다시 TV로 돌아갈 때까지 시선을 피하지 않은 내가 대견했다. 음소거를 해제하듯 방안에 다시 웃음소리로 가득 차올랐다. 우리는 여전히 함께 TV를 보고 있지만 내게 다가오는 분위기는 아까와 전혀 다른 물결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와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를 향한 아이의 마음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같은 반응의 그는 내게 어떤 마음일까. 멍하게 보고 있는, 브라운관에 비친 사람들의 미소가 순간 애처롭게 보였다.

“사람에게 필요한 백 개의 톱니바퀴에는.”

한참이 지난 후, 그는 TV에 시선을 둔 채 차분히 말을 꺼냈다.

“그와 모양이 맞는 백 개의 열쇠가 있어. 그래서 사람은 가진 열쇠만큼만 톱니바퀴를 돌릴 수 있어. 하나든, 열이든, 아흔여덟이든. 백 개가 전부 돌아야만 제대로 살 수 있는 건 아니야. 하나의 톱니는 하나의 마음이라, 사람은 움직이는 마음만으로 어떻게든 살아가니까. 마음이 적게 돌면 그만큼 후회하고, 많이 돌면 그만큼 만족하면서.”

나 역시 여전히 TV를 보며 그에게 귀를 기울였다.

“수십 개씩 가진 다른 사람들과 달리, 내가 가진 열쇠는 하나뿐이야. 지금껏 무슨 수를 써도 늘어나지 않았어. 그건 내가 돌릴 수 있는 톱니바퀴도 하나라는 거야. 대신 내 열쇠는 모양이 없어. 어떤 톱니도 이 열쇠로 돌릴 수 있어. 자이의 말을 빌리면, 그게 1인 내가 가진 재능이야. 상대가 원하는 어떤 마음이든 단 하나는 들어줄 수 있는 것.”

커다란 톱니바퀴가 천천히 돌아가는 것처럼, 사라졌던 이명이 어느새 다시 나타났다.

“그런 재능을 가진 내가 원하는 건 하나뿐이야.”

이명은 아주 멀리서, 긴 파장을 가진 채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충족. 누군가 내게 아흔아홉 개를 줄 수 없으니까, 하나가 모자란 사람을 내가 채우는 거야. 아흔아홉이나 가지고도 여전히 없는 하나라면 분명 누구도 채우기 어려운 마음일 테니, 내가 가진 것으로 그것을 채우는 일.”

그는 여전히 TV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제야 나는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돼. 지금껏 누구에게도 부족한 사람이었지만, 태어나 처음으로 부족하지 않고, 비어있지 않고, 결함 없는 사람이 될 수 있어.”

그의 시선이 먼 곳을 향했다. 나도 따라 눈길을 돌렸다. 그는 거실에 있는 베란다 창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수많은 사진 중 하나, 어린 그가 서있는 공장 사진이었다.

“어렸을 때 만난 자이는 내가 본 사람 중에 처음으로 아흔아홉 개를 가진, 내가 온전히 채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어. 하지만 그때는 우리의 거리가 너무 멀다고 생각해서 다가갈 수 없었어. 그러던 중에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됐고. 그러다 신입생 환영회 때 자이를 만났는데 하나가 더 없는 거야. 아흔여덟 개뿐이었어. 좌절감이 들더라. 이젠 나로는 채울 수가 없구나. 나는 누구도 온전히 채우지 못하는구나. 하지만 자이는 너를 찾아냈지. 너와 함께 있으면 다시 아흔아홉 개일 거고.”

그는 사진에서 시선을 거둬 다시 TV 앞에 걸어놓았다.

“지금 내가 절실한 사람은, 퍼즐 절반이 없는 사람보다 마지막 하나가 없는 사람일 거야.”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듣기만 했다. 지금 네가 절실한 사람. 그 말대로라면 지금 너를 절실히 원할 사람도, 지금 네가 절실히 원하는 사람도, 그것이 나는 아닐 것이다. 그래 봤자 열 개가 열하나로 될 뿐이니까. 하지만 네가 그랬잖아. 사람의 마음은 개수로 따질 수 없는 문제라고. 자신에게 없는 것이 상대에게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지금 나한테 없고, 내가 원하는 것을 네가 가지고 있는데… 아니. 아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이어지려던 생각을 잘라냈다.

그대로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TV에서 하나의 프로그램이 끝나고 광고도 지나 다음 프로그램이 시작됐다. 나는 조용히 일어났다. 화장실에 들어가려다가 왜인지 문 앞에 멈춰 섰다. 그는 TV를 끄고 책상으로 돌아갔다.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잠시 컴컴한 화장실 내부를 들여다봤다. 이 문을 열면 누군가 기도하듯 문고리를 잡고 있을까. 그럴 리 없겠지만 만약 지금 이 너머에 누가 있다면, 그 사람은 작고 예쁜 159도 아니고 크고 단단한 179도 아니라, 웅크린 채 울상을 짓고 있을 169일 것이다. 나는 누구도 무안하거나 창피하거나 당황하지 않도록 문을 열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얼굴로 문 앞에 잠시 서있다가 자리로 돌아왔다. 침대에 기대앉아 낮은 탁자를 배까지 끌어당기고 전공 책을 폈다.

애당초 벽으로 들이받은 마음이었다. 작정하고 바닥으로 뛰어내린 고백이었다. 예전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직 소화할 수 없는 커다란 것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지금 그것을 도로 꺼내는 중이다. 그래서 마음이 이런가 보다.

아이가 없는 첫 밤은 그렇게 조금씩, 꾸준히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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