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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자이 :1의 사람들] 15

15. "네가 봐줬으면 좋겠다."

by 이한얼

모든 이야기의 끝은 언제나 희망이 있어야 한다.

설령 베드엔딩이어도, 그 안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이야기는 행복한 순간에 끝나야 한다.

분명 다시 불행해질지라도, 그것은 다음 이야기의 시작이어야 한다.



열다섯 번째 주, 금요일


금요일의 유일한 수업이자 기말고사의 마지막 시험이었다. 방학식이 따로 없는 대학생에게는 한 학기의 마지막 날이기도 했다. 시작 전 교수는 다 풀면 시험지를 제출하고 먼저 나가도 좋다고 말했다. 운이 좋았는지 남들보다 빨리 풀 수 있었다. 바람에 시험지가 날리지 않게 잡은 채로 필통과 가방을 챙겼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주변의 시선이 이쪽으로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중 대부분은 금세 돌아갔지만 몇몇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나는 애써 돌아보지 않고 교탁을 향해 일직선으로 걸어갔다. 교수가 눈짓으로 가리킨 곳에 시험지를 올려둔 나는 그대로 앞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학기의 마지막인 만큼 소리와 인사를 나누고 싶었다. 아니, 마음으로는 아이와도, 그와도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러고 싶지 않았다. 싫은 것이 아니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눈앞에서 아이가 웃든 혹은 울든, 어떤 표정이든 그 달빛 같이 또렷한 눈동자와 마주하면 억지로 쥐고 있던 무엇이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이것은 아직 놓치면 안 되는 것이었다. 풀이를 마치고 스스로 내려놓기 전에 다른 이유로 놓아서는 안 되는 각오였다. 그와도 마찬가지였다. 내게 인사는 어제 차 앞에서, 그리고 그의 방에서가 마지막이었다. 소리가 그들보다 먼저 나온다는 보장이 없었기에 벤치에서 잠시 서성이던 나는 혼자 계단을 내려왔다.

도서관을 지나 정문쯤 도착했을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보지 않아도 왠지 누군지 알 수 있는 그런 전화였다. 나는 손바닥으로 진동을 삼키며 정문을 나섰다. 진동은 곧 끊어졌고 다시 울렸다. 그리고 또 끊어졌다.

정류장에서 마을버스를 기다리던 중에 건너편 편의점이 눈에 들어왔다. 언젠가 소리와 헤어지고 아이와 그가 튀어나왔던, 셋이 처음으로 삼각 김밥을 샀던, 며칠 전 우리가 아이를 기다리던 그 편의점. 문득 아이의 노트가 생각났다. 노트 홀더에 꽂혀있는 펜도 떠올랐다. 아이는 내게 왜 펜을 준 걸까. 내가 본 아이는 의미를 담은 행동을 허투루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역시 의미가 있을 텐데, 무슨 의미일까.

‘펜은 뒀다 뭐 하는 거야.’

비밀을 고백했을 때 아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혹시 아이는 그때부터 지금을 예상하지 않았을까. 노트를 받은 내가 언젠가 노트를 온전히 갖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지, 아직 개화하지 않은 내가 언젠가 그 꽃을 온전히 피우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아이는 알았을 것이다.

나는 무엇에 홀린 듯 편의점으로 들어가 노트 하나를 짚었다. 아쉽게도 빨강색이 아닌 노란색이었지만 아무렴 어떨까. 마음을 전하는데 펜의 종류가 상관없듯이, 각오를 드러내는데 표지의 색 역시 아무 문제가 없었다. 계산을 마치고 나왔을 때 마침 마을버스가 도착했다. 올라탄 버스는 나뿐이었다. 문득 바닷가로 가던, 셋뿐인 텅 빈 열차가 떠올랐다.

버스는 앞문을 연 채로 사람이 더 들어차기를 기다렸다. 그때 정문으로 아이와 그가 나타났다. 그들 뒤로 소리의 모습도 보였다. 셋 중 아이만 나를 발견했다. 얇은 유리 너머로 눈이 마주쳤다. 꽤 멀었지만 목소리가 닿지 않을 거리는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뛰어오면 버스를 잡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 역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때 버스가 앞문을 닫고 천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나는 조금씩 멀어지는 그들을 지켜봤다. 지금이라도 창을 열고 이름을 외치고 싶었지만, 이제라도 뛰어내려 그들 앞에 서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 맞교환은 왠지 손해 본 기분이네.’

비밀을 고백한 순간, 스탠드에서 들은 아이의 말이 떠올랐다. 어찌 들어도 농담이었지만 지금 내게는 더없는 진담이었다.

‘피기 전인 모든 꽃은 아직 봉오리야.’

‘자이의 말을 빌리면 그게 1인 내가 가진 재능이야.’

족구장으로 가던 중에 들은 아이의 말과, 어젯밤에 들은 그의 말도 떠올랐다. 절대 나를 탓하는 말이 아니었음에도 어떤 말보다 마음을 깊게 찔렀다. 나는 우선 정리해야 했다. 그저께의 깨달음을 온전히 소화하려면 그전부터 있었지만 이제야 막 발을 들인 갈림길부터 지나야 했다. 그들과 공평하게 마주 보려면 그들은 이미 개화시킨, 나는 이제야 입을 벌린 봉오리부터 활짝 피워야 했다. 그리고 그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고민을 들고, 그들이 현재 서있는 자리까지 스스로 걸어와야 했다. 그래야 진정한 맞교환이었다.

내일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쏟아내는 통곡보다 오늘 내 모습이 한심해 흘리는 눈물이 낫다. 부끄럽다고 헛된 합리화로 지금 자신을 외면한다면, 훗날 더 큰 모욕 속에 진짜 소중함을 토해내야 하니까.

버스에 속력이 붙을수록 세 사람의 모습이 점점 멀어졌다. 아이와 눈이 마주친 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둘 사이 거리를 넘어 상대의 생각이 선명하게 보이는 듯했다. 오늘 아이는 무표정했지만 어제 애써 웃음 짓던 얼굴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 무엇 하나를 끝낸 사람처럼, 일단락이 된 장막처럼 단정한 서있었다. 그 모습에 가슴 한편에 안도감이 차올랐다. 지금 이렇게 도망가는 일이 조금 덜 미안하게 느껴졌다. 아이 역시 지금 내 상태를 알고 있을 것이다. 방금 아이는 예전 편의점 앞에서 나를 향해 달려오다 멈췄을 때와 전혀 달랐으니까. 그래, 오히려 현관에서 노트를 내밀던 때와 비슷했다. 고민 끝에 어떤 결론이 나든 기다리고 있겠다고 등을 밀어주는 눈빛이었다.


멍하게 있는 동안 배경이 바뀌더니 곧 집이었다. 도착하자마자 땀이 난 몸부터 씻었다. 그리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책상 앞에 앉았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내가 아이와 처음 친구가 됐다고 느꼈던 순간은, 아이의 노트를 들고 벤치에서 마주한 날이 아니라 강의실에서 같이 달은 본 날이었다. 아이의 말처럼 서로 모든 것을 알아야만 친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이의 노트를 받기 전부터 우리가 친구였던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내 노트를 보여주고 싶었다. 나를 오롯이 꺼내 네게 던지고 싶다. 그때 너도 이런 마음이었겠지.

노란 노트의 맨 앞장을 펼쳤다. 처음을 어떻게 시작할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아이가 준 펜으로 ‘둘을 처음 만난 것은 대학 신입생 환영회였다’라고 적었다. 첫 문장을 쓰고 펜을 들여다봤다. 투명한 몸통 내부에 잉크가 5분의 4쯤 차있었다. 너를 비우기 전에 나를 채울 수 있을까. 되도록 내가 먼저 찼으면 좋겠다. 페이지를 채운 나는 아이에게, 잉크가 남은 는 그에게 넘기고 싶으니까.

고개를 돌려보니 창밖은 어느덧 여름이 시작되고 있었다. 더운 날에 지난겨울 끝자락부터 봄까지 다시 살아내야 하는 내게는 짧은 여름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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