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거울 앞에 서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하얀색 머리끈에 잡힌 꽁지는 고작 손가락 두 마디도 안 되어 보였다. 체감 상 그런 거겠지만 목에서 어깨로 내려가는 이쯤은 유난히 자라지 않는 구간이었다. 방학 전에는 묶이지도 않던 것을 겨우 묶을 만큼 길렀으나 조금만 뛰거나 고개를 흔들면 금세 풀어질 것 마냥 위태로웠다. 나는 꽁지머리를 잡고 머리끈을 뒤통수 쪽으로 한 번 더 잡아당기는 것으로 나갈 채비를 마쳤다.
거울 앞에는 아침저녁으로 선선해진 날씨 덕에 청바지와 얇은 긴팔 셔츠를 입은 여자가 서있었다. 이상한 부분은 없었다. 막 가방을 들었을 때, 방문이 벌컥 열리며 교복을 차려입은 여동생이 대뜸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여러 수사가 덧대어 있었으나 요지는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나오라는 뜻이었다. 알았어. 소리 좀 지르지 마. 말없이 웃는 얼굴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손이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몸살 중인 문을 열고 나가니 거실은 이미 아무도 없었다. 일부로 쿵쿵거리는 발걸음을 뒤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이미 시동을 건 차에는 아빠와 새엄마가 앞자리에, 뒷자리는 남동생 옆 두 자리가 비어있었다. 누가 태워주는 일은 낯선 일이었다. 난 버스 타고 가면 되는데. 차가 출발하자 여동생은 또 구시렁거리기 시작했다. 이번 주제는 굳이 좁게 왜 타고 가냐는 것이었다. 아빠와 새엄마도, 남동생도 매일 봐서 별 감흥 없는 얼굴이었다. 귓가에서 끝날 듯 끝나지 않고 비명처럼 찔러오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너도 엄청 꽥꽥거리는구나.”
불쑥 튀어나온 말에 여동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런 말을 들을 줄 몰랐는지 “뭐?”라고 되묻는 목소리에 아까 같은 표독함이 없었다. 나는 누구처럼 그저 말없이 웃어줬다. 나머지 셋은 여전히 아무 말 없었다.
남동생이 가장 먼저 내렸고, 조금 더 가서 여동생이 나를 노려보며 차에서 내렸다. 내리기 편하게 차 밖으로 피해 줬는데, 기어코 내 어깨를 치고 지나간 뒷모습이 조금 귀여웠다. 나 역시 역 앞에서 내렸다. “다녀오겠습니다”라는 내 인사에 새엄마는 “그래”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아빠는 대답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2학기의 첫날, 두 달 만에 학교로 가는 길이었다. 지금의 나는 뭐랄까, 사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한산한 전철에서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다가, 점점 들어차는 사람에 밀려 손잡이에 매달린 상태로 도착했다. 거기서 다시 마을버스를 타고 정문으로 와서 오랜만에 보는 언덕을 누구처럼 큰 걸음으로 올라갔다.
강의실로 향하던 중에 학과 게시판 앞에서 발걸음이 멎었다. 학과의 2학년 임원 한 명이 변경되었다는 공지였다. 아래에 보험약관처럼 아주 작은 글씨로 사유가 적혀있었다. 전임자 제적. 자퇴가 아닌 제적이라는 두 글자가 깨알 같은 크기임에도 왠지 부리부리하게 보였다. 공지를 조금 더 들여다보던 나는 곧 시선을 거뒀다.
일찍 도착한 강의실은 아직 빈자리가 많았다. 그중에서도 창가 뒷자리는 여전히 눈에 띄었다. 와인색의 후드 티셔츠를 입은 그와, 무늬가 예쁜 하얀 셔츠의 아이가 그림 같은 모습으로 나란히 앉아있었다. 뒷문 앞에서 둘을 잠시 지켜보던 나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그들에게 걸어갔다. 그가 먼저 나를 발견했다. 곧이어 아이의 고개도 내 쪽을 향했다. 나는 평범하게 대화할 수 있는 거리에서 별처럼 반짝이는 눈과 마주 섰다.
두 달 만에 두 사람을 본 순간, 내가 처음 느낀 것은 안도였다. 아이는 그대로였다. 그도 그대로였다. 둘이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도 여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을 바라보는 내가 여전한 것 같았다. 학교에 가까워질수록 조금씩 굳어갔던 마음이 순식간에 형체도 없이 흩어졌다. 대치는 단지 몇 초였다. 하지만 체감 상 꽤 긴 시간 같았다. 나는 일단 웃었다. 광대를 슬쩍 밀어 올리고 입 꼬리를 짧게 늘리며 웃었다. 아이는 종종 그랬던 것처럼, 깊은 눈길로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런 탐색이 이전처럼 긴장되지 않았다. 지금 아이의 어깨 위를 맴도는 감정이 너무도 선명하게 보였으니까. 밝은 노랑과 분홍이 몽글몽글 자리를 섞으며 짙은 파랑을 밀어내는 모습이었다. 잠시 후, 아이도 마주 웃었다. 여전히 보름달 같은 미소였다.
“옆에 앉아도 돼?”
나는 그렇게 물었다. 아이가 대답 대신 내 시선이 닿은 의자를 빼줬다. 엉덩이를 붙이고 가방을 올려놓는 동안 아이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태연했다.
“점심 뭐 먹을래?”
나를 향한 아이는 그가 있는 곳은 보지도 않았다. 이 역시 여전한 모습이라 입술 안으로 웃음을 삼켰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어제도 본 사람처럼 무표정했다. 다만 잠시 나를 지긋이 바라보는 얼굴이, 마치 어서 오라는 듯이 짧게 끄덕일 뿐이었다. 그 모습에 마음 바닥에 남아있던 마지막 물기가 완전히 증발하는 것을 느꼈다.
아이와 그가 저녁 메뉴로 말을 나누는 동안, 내 눈이 문득 뒷문으로 향했다. 열린 문 앞에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소리는 나를 보고, 내 옆에 앉은 둘을 봤다가, 다시 나를 봤다. 나를 발견한 순간부터 양 어깨 위로 분노와 안도가 동시에 차오르게 보였다. 내가 먼저 미안한 웃음을 보이자 소리는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왔다. 진해지고 옅어지기를 반복하던 붉은 기운이 점점 분홍에 가까워졌다. 그제야 소리는 시선이 맞은 아이와 그에게 작게 인사하며 내가 빼준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아이와, 그리고 동화와 얼굴을 맞대고 나니 그제야 나는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두 달의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들을 보지 않았던 방학 동안 나는 살이 빠지거나 찌지도 않았고, 뒤늦게 키가 더 크지도 않았다. 갑자기 젖살이 빠져 얼굴이 갸름해지지도 않았고, 연한 쌍꺼풀이 깊어지며 예뻐지지도 않았다. 옷이 세련돼 지거나 좋은 가방이 생길 일도 없었다. 2학기가 되었다고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하지도 않았고, “쟤가 걔야?” 하며 주변의 놀라운 시선을 잡아끌 만큼 크게 변신하지도 않았다. 아빠에게는 지금도 애물단지일 뿐이고, 새엄마에게는 지금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려운 새 딸이었다.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나쁜 말을 시원하게 내뱉는 여동생과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만 보는 남동생도 여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물 평생을 달고 살아온, 속마음이 불쑥 튀어나오는 버릇도 고작 두 달 만에 고쳐질 리 없었다. 아직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은 무섭고, 피하고 싶도록 어렵고, 타인과 얼굴을 마주 하는 것은 여전히 떨리는 일이었다.
나는 그렇게 여전했다. 그리고 창문을 등지고 앉아서 아이를 바라보고 있는 동화도 마찬가지였다. 예나 지금이나 단정한 얼굴에, 크고 단단한 체격에, 그려놓은 듯이 무뚝뚝한 표정이었다. 고개를 숙인 채 살며시 치켜뜬 눈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는 소리의 버릇도 여전히 귀여웠다. 그리고 아이는, 역시 아이였다. 여전히 작고 마른 체구에,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예쁘고, 물 위로 떨어지는 달빛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를 가진 내 친구. 다만 예전처럼 막연히 대단하거나 멍하니 우러러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 마음은 이제 없었다. 지금 나를 또렷이 바라보는 아이는 그냥 아이였다. 만난 지 반년이 지나서야 너를 제대로 마주 본다는 생각에 인생 첫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 더 먼 길을 돌아왔어야 했을까. 너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앞으로 있을 수많은 어느 고락에서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게 되었을까.
그게 다른 누군가가 아닌 너라서, 너와 만나서 다행이다.
아이의 단정한 눈매를 바라보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앞문이 열리며 교수가 들어왔다. 빈손으로 휘적거리며 교탁 앞에 선 교수는 이번 학기 커리큘럼은 이렇고, 교재는 무엇이고, 시험과 리포트는 언제인지를 무심한 판서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들어온 지 10분도 지나지 않아 수업이 끝났음을 선언하고 가장 먼저 강의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우르르 일어서는 다른 학생들처럼 우리도 가방을 챙겼다. 소리는 연달아 다른 수업이 있다고 했고, 아이와 그는 오늘 이게 유일한 수업이라 했다. 나 역시 그랬다. 복도에서 소리를 보내고 중앙현관으로 나온 우리는 앞질러 걷고 뛰어가는 다른 학생들을 먼저 보내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벌써 무슨 말이라도 나왔을 법한데 모두 약속한 것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이는 생각에 빠진 듯했다. 그는 평소 같았다. 곁눈질로 둘을 지켜보던 나는 문득 생각난 것처럼 말을 꺼냈다.
“저기.”
내 서두에 둘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내가 방학 동안 뭘 발견했어.”
나는 아이를 거쳐 그를 바라봤다. 그는 ‘쟤가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지?’ 싶은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물론 겉으로는 아무 표정도 없었지만, 왠지 저 무표정이 이제는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버섯고기볶음에 필라델피아 치즈를 넣으면 짠맛이 부드러워지면서 단맛도 깊어지더라.”
내게 있던 아이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없어. 그리고 장도 봐야 해. 집에 콩나물만 있어.”
그놈의 콩나물. 내가 속으로 깔깔거릴 때 아이의 눈이 도로 내게 넘어왔다.
“내일 1교시지?”
아이의 질문에 나는 내려가던 길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 대꾸했다.
“첫날부터 자고 가라고?”
불쑥 튀어나온 말에 나는 입을 가리는 대신 멋쩍게 웃었다. 아이는 기숙사 사감 같은 눈웃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물어본 거고, 그러니 어쩔 거냐는 투명한 눈빛이 직선으로 전해졌다. 나는 머릿속으로 가방 속 물품을 되짚었다. 펜을 꽂아놓은 노란 노트. 혹시 하며 챙긴 속옷과 양말. 칫솔과 안경. 나는 슬그머니 그를 돌아봤다.
“자고 가도 돼?”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묘한 무표정이었다. 저게 무슨 뜻이지? ‘그럴 필요가 없을 텐데?’ 저런 표정이 갑자기 왜 나왔을까 궁리하는데 그가 뒤늦게 생각난 듯 말했다.
“방 옮겼어.”
“어디로?”
“옆방으로.”
거기로 갈 거면 뭐 하러 옮긴 거지. 쓸데없는 질문은 대답하지 않을 테니 굳이 묻지 않았는데 그가 먼저 말을 이었다.
“구조가 거울처럼 반대야.”
우리는 그럼 가구는 그대로인지, 화장실 입구가 또 방에 있는지, 냉장고는 좀 커졌는지, 지난번 냉장고는 냉동실이 너무 작았어, 등을 말하며 내리막을 내려갔다. 실상 그동안 어찌 지냈냐는 거나, 방학 동안 뭐했냐는 등의 지나간 이야기는 없었다. 나는 1학기 마지막 날에 왜 그냥 간 건지, 동화는 방학 동안 어째 연락이 없었는지, 아이의 일은 결국 어찌 되었는지 등도 묻지 않았다. 때가 되면 스스로 자연스럽게 나올 것들에 대해 아무도 섣불리 당겨 묻지 않았다. 대신 지금과 오늘에 대해 말했다. 걷다가 불쑥 생각나면 입을 열었다. 대답하고 싶은 사람이 즉흥적으로 답했다. 중요할 것 없는, 그날이 지나가면 곧 잊어버릴 이야기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괜찮다고 느꼈다. 1학기 끝자락과 2학기 앞자락을 연결하듯 오늘처럼 내일을, 다시 모레를 이어 붙이면 충분했다. 그러면 올해 초, 추운 날씨가 풀리기 전에 맺어졌던 인연이 다음 겨울과 봄에도, 다시 여름과 가을까지 무리 없이 이어질 것 같았다.
내리막 아래로부터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물결처럼 밀어닥친 공기는 봄 때와는 조금 다른, 메마르지만 무르익은 냄새가 났다. 사람처럼 계절에도 시간이 쌓이며 푸르던 잔디가 차츰 누렇게 변하고 있었다. 뻣뻣하던 잎들도 조금씩 연해지기 시작했다. 이러다 곧 낙엽이 지고,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추워져 있겠지.
“고기는 저녁에 먹을 거잖아.”
내 시선이 어디에 머물렀는지 확인한 아이가 말을 받았다.
“살 거지?”
힐끗 돌아보는 시선에 나는 대답 대신 지갑을 툭툭 두드렸다. 멀리서부터 빵이 구워지는 노릇한 냄새가 풍겨왔다. 아이는 빨간 간판을 향해 개선장군처럼 걸어갔다. 그는 앞서가는 등을 쫓으며 아이의 머리끝에 달라붙은 얇은 이파리를 떼어냈다. 나는 한 걸음 뒤에서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따라갔다. 불어오는 바람결에 아이의 샴푸 냄새와 함께 이른 가을의 향기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