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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자이 :1의 사람들] C

Closing Credit Cookie :5분의 2의 기억

by 이한얼



#1


요즘 자이가 이상했다. 요즘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으나 엄마로서 자이가 평소 같지 않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몇 번은 돌려서, 때로는 직설적으로 물어봤으나 자이는 아무 일도 없다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한동안 유심히 지켜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이는 이 집에 같이 사는 경준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듯했다.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 했다. 자이는 내내 외동으로 자랐으니까. 한창 예민한 나이에 불쑥 생긴 형제기에 쉽게 적응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물며 그것이 또래의 남자라면 더더욱.

새 남편이 된 사람은 보통 사람이었으나 그의 아들인 경준은 보자마자 1퍼센트의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지금도 경준이 무슨 1인지 모르겠다. 어떤 행동을 봐야 해당 상황을 알 수 있고, 상황을 알아야 특정 성향을 유추할 수 있으니까. 그러기에는 경준과는 서로 마주치는 일도, 나눈 대화도, 눈을 깊게 들여다볼 시간도 없었다. 경준은 우리를 불쾌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에게 실수할 만한 일 자체도 없었고, 그렇다고 굴러들어 온 모녀라며 특별히 해코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 역시 자이만큼은 아니어도 내심 경준이 꺼려졌다. 평생을 단련해온 감각은 어떤 1인지 파악하기 전까지 경준을 가까이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경준에 대한 자이의 기세가 심해졌다.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고, 함께 있어도 쳐다보지 않았다. 바깥 일로 바쁜 새 남편마저 은연중에 낌새를 느낄 정도로, 자이가 내뿜는 분위기는 나처럼 모르는 1을 경계하는 것치고는 과했다. 그제야 나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정말 둘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나. 아니면 별일 없어도 상성 자체가 극히 나쁜 관계인가. 1인 사람끼리는 그런 상성이 있으니까. 그래도 대학에 가면 지금보다 더 많이 마주칠 텐데.

그러던 어느 날, 회사의 옛 직원과 오랜만에 연락이 닿았다. 다른 직원들의 근황을 듣던 중에 우연찮게 자이와 같은 대학에 들어가는 아이가 있음을 알게 됐다. 그 아이였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공장에 자주 놀러 왔던 동화. 첫눈에 자이에게 반해 주변에서 맴도는 모습이 얼마나 귀여웠는지. 생산 파트장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아주 근면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거짓을 모르고, 꼼수를 쓰지 않고, 성격이 강직해서 종종 다른 파트장과 갈등이 있기도 했지만 죽은 남편이 가장 믿고 의지하던 직원이었다. 동화는 외모뿐만 아니라 성격까지 그의 아버지를 닮았다. 어려서부터 봐왔기에 그대로 자랐다면 충분히 믿을 만한 아이였다. 최소한 이 집 아들보다는 훨씬.

나는 그들을 수소문했다. 콩나물 공장에서 일하는 그의 아버지는 궁핍하지 않지만 넉넉하지도 않은 형편인 듯했다. 나는 동화가 학교 앞에서 자취를 했으면 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왠지 자이에게 선택의 여지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지금 집이 아닌 머물 수 있는 다른 장소. 처음에는 아예 자취시킬까 생각해봤지만 그건 새 남편이 반대할 것이다. 필요할 때만 머물 빈방을 만들어놓는 것 역시 왠지 내키지 않았다. 혼자 말고, 누군가 함께. 그때 떠오른 것이 동화였다. 엄마로서 미친 거지. 딸을 남자 방에 머물게 하다니. 하지만 나는 1의 재능을 가지고 있고, 그 감각을 믿는 편이다. 이 감각은 논리를 기반으로 돌아가지 않아서, 상식과 감각이 상충할 때면 나는 늘 감각을 따라 살아왔다. 자이가 지금 무슨 마음인지 모르겠으나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없어도 최소한 심적으로 궁리에 몰려있음은 분명했다. 누군가와 트러블이 있든, 아니면 그저 혼자서 새로운 가족에 적응을 못하든. 집에 있는 것보다 학교에 있는 것이, 혼자 다니는 것보다 누군가와 함께 지내는 것이 낫다고 감각이 속삭였다. 설령 내가 지원한 동화의 방에 자이가 가는 일이 없어도 괜찮다. 지금껏 그의 아버지에게 그만큼 신세를 졌으니 아깝지 않았다.

멀리서 통학을 할 거라는 말에 넌지시 운을 떼어보았다. 감사와 답례로 포장해도 즉각 거절하던 그는, 내가 일편이나마 속내를 드러내고 부탁했을 때야 비로소 처음으로 침묵했다. 이런 사람들이었다. 부유한 자의 답례는 거절해도 어려운 자의 부탁은 잘 거절하지 못하는. 그도 내심 평택에서 매일 몇 시간씩 오갈 동화가 마음에 걸렸는지 끝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승낙을 받은 나는, 마침내 귀가한 동화를 만났다. 작고 뼈마디가 가늘던 어린아이는 그새 성인이 됐다. 키가 컸고 어깨가 벌어졌으며, 운동선수처럼 단단한 몸을 하고 있었다. 작은 자이는 등 뒤에 서면 보이지도 않을 만큼, 최소한 우리 애 정도는 능히 지켜줄 수 있는 것 같았다. 동화는 나를 알아봤는지 사모님이라 부르며 인사를 했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돌아오는 길인지 눈가에 피곤이 눌어붙어있었지만, 여전히 선량하고 정직한 눈빛이었다.

아버지가 허락했다는 말에 동화는 긴 고민 없이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얼굴은 무표정했으나 어째선지 기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자취 비용 지원에 대한 것은 자이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첫 등교를 하기 전날, 나는 으슥한 밤에 부엌으로 자이를 불렀다. 자이는 휴대전화를 쓰지 않겠다는 말뿐 나머지는 여전히 입을 다물었고, 나도 더 캐묻지 않았다. 말할 마음이 들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다. 다만 모든 일이 해결될 때까지 손을 놓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 후회는 남편이 죽고 1년 동안 충분히 했으니까.


#2


화자는 둘의 눈치를 보며 쭈뼛거리는 발걸음으로 화장실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문고리가 잠기는 소리까지 연달아 들렸다. 작은 물소리가 울리는 화장실을 등지고 자이와 동화는 함께 수프를 만들기 시작했다. 사실 말만 함께였지, 자이는 곁에 서서 조금씩 도울뿐 대부분은 동화가 했다. 잠시 후 노란 수프가 담긴 그릇 세 개가 탁자 위에 놓였다. 그 곁에 후추와 수저가 있었다. 자이가 가방과 옷을 챙기는 동안, 동화는 한 입에 넣기 좋을 정도로 작게 썬 샐러드를 가져왔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아침 준비가 끝났다. 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끊어진 것을 보니 화자가 곧 나올 터였다. 자이는 더 꺼낼만한 것이 있는지 냉장고를 들여다보는 동화에게 말했다.

“덕분에 잘 잤어.”

동화는 대꾸 없이 작게 끄덕이기만 했다.

“신세를 졌으니 답례는 해야지. 어떤 게 좋아? 먹을 거? 물건?”

자이는 양 허리에 손을 올리며 당당하게 요구했다. 말만 하면 당장 수표라도 꺼낼 표정이었다. 그에 동화는 긴 고민 없이 짧게 대꾸했다.

“그것 말고 바라는 건 있어.”

“뭔데?”

“세 개야.”

“그러니까 말해봐.”

동화는 자이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첫째, 옆에 있는 것. 둘째, 필요한 것을 말하는 것. 셋째, 내가 주는 것을 받는 것.”

세 개가 펴진 손가락을 보며 자이의 눈썹이 좁게 구겨졌다.

“예를 들면?”

“같이 있다가 목이 마르면 물을 달라고 해. 그럼 내가 주고, 넌 마시면 돼.”

“그게 다야? 다른 건?”

“그게 다고, 그런 의미를 벗어난 건 없어.”

자이는 하필 지금 없는 지폐를 요구받은 것처럼 잠시 뜸을 들였다. 하지만 이내 근처 현금인출기의 위치를 떠올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왜인지 알려주면.”

물론 단서는 달았다.

“그러고 싶다. 네가 어떻게 해석하든.”

자이는 발음이 익숙지 않은 단어를 더듬듯 물었다.

“뭐, 날 좋아하거나, 그런 거야?”

직설적인 말에 동화의 표정이 두루뭉술해졌다. 생각에 빠진 듯 바닥을 보던 동화는 잠시 후 자신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잘 모르겠어. 지금 여기에 어떤 확고한 것이 방향을 가진 채 나아가고 있지만, 그걸 너에게 설명하거나 납득시킬 수 없어.”

자이는 팔짱을 꼈다. 동화의 눈을 바라보며 잠시 후, 작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볼게. 우리 엄마 알아?”

“알아. 만나기도 했었고, 너에 대한 부탁도 들었어. 사모님의 부탁은 수용했어. 하지만 이건 그거랑 상관없어.”

“엄마랑 어떻게 알아?”

동화는 잠시 뜸을 들이다 답했다.

“아버지가 네 아버지 공장에 다녔어. 나도 어렸을 때부터 사모님께 신세를 많이 졌고.”

자이는 옛 기억 속에서 떠오르는 얼굴들을 추스르며 물었다.

“성함이?”

“최, 규 자, 선 자.”

이름을 듣는 순간 한 얼굴이 떠올랐다. 공장에서 놀다 돌아갈 때면 늘 손에 사탕을 쥐어주며 웃던 얼굴이. 초등학생 때부터 그랬던 일은 자이가 중학생이 되어서도 여전했다. 알고 나니 동화는 그 선한 눈매와 많이 닮아있었다. 더불어 그때 공장에서 종종 봤던, 가까이 오지는 않으면서 항상 근처에서 어물거리던 빼빼 마른 남자아이도.

“너… 혹시 그때 그 꼬맹이?”

“그때도 너보단 컸어.”

동화의 조금 불퉁한 어조에 자이는 촉촉한 웃음을 머금었다. 모두 날아가버린 시절이라 여겼는데, 이렇게도 닿는구나.

“그래. 아무튼 이해했어.”

임금협상을 막 끝낸 후의 정적처럼 둘은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자이가 먼저 악수하듯 말을 꺼냈다.

“그럼 잘 부탁해.”

“나야말로. 잘 부탁해.”

협상이 만족스러웠는지, 동화의 일자 눈썹은 묘하게 들떠있었다.


#3


“방금 걔 봤어.”

화장실에서 나온 자이에게 동화가 손수건을 내밀며 말했다.

“누구?”

“음… 환영회 때.”

“화자?”

“그런 이름이었나. 아무튼 걔. 이제 도서관에 간다던데.”

자이는 물기를 닦으며 생각에 잠겼다. 손은 이미 말랐는데 움직임이 금세 멎지 않았다. 잠시 후, 자이는 젖은 손수건을 돌려주고 알로에를 받으며 말했다.

“가자.”

“어딜?”

“화자 데리러. 같이 바다에 갈 거야.”

“나도 가?”

“너도 가.”

동화는 일어섰다. 납득하지 못했지만 이견 없는 얼굴로. 자이는 돌아서려다 멈춰서 다시 동화를 봤다.

“집주인이 되어줄 사람이 필요해.”

그제야 동화의 얼굴에 납득이 피어났다. 그 모습을 보며 자이가 물었다.

“어쩌면 때때로 머물 수도 있어. 괜찮아?”

동화는 웃지 않았다. 다만 늘 그랬듯이, 만질 수 있을 만큼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원하거나 필요하면 어떤 거든.”

동화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자이는 문득 생각했다. 우리 엄마가 너희 아버지와 재혼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큰 집이 아니어도, 부유한 환경이 아니어도 괜찮으니 너 같은 이복형제가 있었으면. 그럼 너는 분명 좋은 오빠이자 남동생이 되었을 것이고, 동시에 내 첫사랑이었을 것이다.

“가자.”

자이는 돌아섰다. 언제나처럼 바싹 따라붙는 인기척이 벽처럼 든든했다.


#6


외투를 집어 든 순간,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본 입구에 경준이 소리 없이 서있었다. 머리가 굳은 것은 순간뿐, 생각보다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자이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옆에 있는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동시에 경준도 자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문을 잠그는 소리와 경준이 몸으로 문을 들이받는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철컥. 철컥. 간발의 차이로 문은 제대로 닫혔다. 경준이 잠긴 문고리를 거듭 돌리며 말했다.

“얘기 좀 하려는데 왜 숨어.”

자이는 최대한 문으로부터 멀리, 샤워부스가 있는 곳까지 물러났다. 이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동화였다. 그리고 화자. 심지어 친하지 않은 소리마저 생각이 났다. 쾅쾅. 경준은 계속 문을 두드렸다. 누가 좀 도와줘. 누구든 좋으니 와줘.

“그냥 얘기 좀 하자니까. 나와 봐.”

가볍게 두드리던 소리가 점점 빠르고 과격해졌다. 쾅쾅쾅. 그러더니 제 분에 못 이기는 것처럼 어느 순간 미친 듯이 후려치기 시작했다. 문이 부서질 듯한 충격음이 귀가 아닌 몸으로 스며들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망치질이 멎고 격한 숨소리만 건너왔다. 자이는 입을 가린 채 불쑥 튀어나온 정적과 대치했다. 얼마쯤 지났을 때, 어느 정도 숨을 되찾은 경준이 갑자기 킥킥,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틈으로 낮게 속삭였다.


“거기도 자물쇠 달았어?”


그 속에는 웃음기가 있었고, 나긋함마저 있었다. 막힌 문제에서 힌트를 발견한 희열까지 느껴졌다. 그리고는 다른 말없이, 그대로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 같더니 곧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열쇠를 가지러 간 걸까. 그렇다면 이틈에 얼른 도망쳐야 했다. 자이는 문고리를 잡았다가 덜컥 멈췄다. 혹시 안 가지 않았을까. 나간 척하고, 그럴 거라 생각한 자이가 스스로 나오기를 방안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문 너머 인기척을 최대한 살폈다. 모르겠다.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자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세면대 앞을 방황했다. 어떡해야 하지. 지금 나가야 할까. 망설이는 사이 돌아오면 어쩌지. 그때 정처 없이 휘날리던 외투 자락이 세면대에 부딪혔다. 툭 하고,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그제야 깨달았다. 지금 동화의 휴대전화와 지갑을 가지고 있음을. 자이는 허겁지겁 전화를 꺼내들었다. 동화… 동화…. 아무리 찾아도 동화 번호가 없었다. 아니지, 이건 동화 전화잖아. 화자… 화자… 찾았다. 화자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제발… 제발…. 자이는 변기 뚜껑 위에 앉아 지금 숙소로 와달라는 문자를 보냈다. 체중에 눌린 플라스틱 뚜껑이 미약하게 휘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이어졌을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톡. 톡.

경기하듯 일어선 자이는 문으로부터 멀어졌다. 뚜르르… 뚜르르…. 숨 막히는 공간에 신호음 소리만 연달아 울렸다. 뚜르르… 뚜르르… 뚝.

“누구, 있어?”

아.

작고 가느다란 여자 목소리였다. 그리고 익숙한, 계속 그리던 목소리기도 했다. 온몸의 물이 모조리 발바닥으로 빠져나가는 기분에 자이는 전화를 쥔 두 손에 이마를 묻었다.

“화자야?”

너 맞지. 그렇다고 해줘.

“나야.”

너였구나. 한계까지 졸려 있다가 한순간에 풀어진 마음이 눈물을 울컥 내뱉었다. 자이는 재빨리 수도꼭지를 올렸다. 소리 없는 울음 대신 수돗물이 쏴아 하고 배수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6


슈퍼에서 나오던 자이가 불쑥 내뱉었다.

“사이다.”

하지만 동화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작은 거?”

“아무거나. 그리고 먼저 가있어.”

자이의 말에 돌아서려던 동화의 걸음이 멈췄다. 자이를 보는 눈동자에 묘한 의문이 서려있었다.

“잊은 일이 생각났어. 통화하고 들어갈게.”

“같이 가.”

“아니야. 사이다 사서 먼저 들어가 있어.”

동화가 저러는 이유는 알지만 지금은 괜찮았다. 방금 엄마와 통화했을 때, 경준이 집에 들어왔음을 넌지시 확인했으니까.

“길어질 것 같으면 이메일 보낼게.”

자이는 단호했다. 저런 모습이면 설득이 되지 않음을 아는 동화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자이에게 자신의 휴대전화를 넘기고 슈퍼로 들어갔다. 동화가 냉장 코너 쪽으로 꺾는 모습을 본 자이는 정문 안으로 달리듯 걸어갔다. 언덕을 조금 올라갔을까. 저 멀리 처진 어깨로 느릿하게 걸어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역시 화자였다. 집에 간다던 애가 이 시간에 왜 여기 있지. 피곤한 얼굴로 마을버스 타는 것까지 봤는데. 의문이 연달아 떠올랐으나 자이는 섣불리 화자를 부르지 않았다. 단지 시야에서 놓치지 않을 곳에서 조용히 뒤를 쫓았다.

얼마쯤 따라갔을까. 부지 꼭대기에 있는 대운동장 스탠드에서 정처 없는 발걸음을 반복하던 화자는 이내 수업을 듣는 건물 쪽으로 향했다. 중앙현관에서 얼마간 내부를 기웃대더니 불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 시간이면 보안업체에 의해 잠겨있을 텐데. 자이의 뇌리에 순간 여러 생각이 스쳤다. 불안함과 흥미로움이 배덕감으로 빠르게 뒤섞였다. 중앙현관 앞에서 자이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따라 들어갈까. 아니면 그냥 못 본 척 돌아갈까. 이 건물에는 강의실뿐만 아니라 셋이 속해있는 학과의 사무실과 담당 교수실까지 모두 모여 있었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고등학생 때 아르바이트를 권했던 급우가 문득 떠올랐다. 마치 학교괴담처럼, 해가 떨어진 늦은 밤에 담당 교수실을 찾는 여학생이 있다는 소문도 바람결에 들은 적이 있었다. 설마 화자는 그런 1퍼센트였나. 아직 개화 전이라 화자의 성향을 온전히 파악하지 못한 자이는 순간 아찔해졌다. 그럴 리 없겠지만 화자가 그런 학생이라면, 화자가 가진 재능이 그런 쪽이라면 들어간 곳에서 혹시나 원치 않은 장면을 보게 될지도 몰랐다. 그러면 내일부터 화자를 어떤 얼굴로 봐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뒤로 물러나 건물 전체를 둘러봤다. 일단 켜진 불빛은 없었다. 드문 표정으로 현관 앞을 오가던 자이는 결국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찌 되었든 뒤에서 이리저리 고민만 하는 것은 성격에 맞지 않았다. 다른 동기였다면 자이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각자 생존하는 법이 따로 있을 거라며 넘겼겠지. 하지만 화자는 이 학교에 오직 둘뿐인, 아니 자이 본인에게 오직 둘뿐인 친구였다.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나쁜 것도 모두 얼굴을 마주한 채 해결하고 싶었다.

휴게실과 화장실, 강의실만 있는 1층과 다른 과인 2층은 건너뛰고 3층부터 살피기 시작했다. 3층의 교수실은 밖에서 봤을 때처럼 모두 꺼져있었다. 4층은 학과 사무실과 강의실뿐이라 갈 데도 없었다. 그럼 화자는 어디 간 거지. 그때 머리 위에서 나무와 바닥이 부대끼는 소음이 들렸다. 서둘러 4층으로 올라갔다. 소리가 들린 곳으로 조용히 다가가 보니 화자는 커다란 커튼을 들고 있었다. 잠시 커튼을 문지르던 화자는 이내 창가로 붙인 테이블 위에 커튼을 펼쳤다. 그리고 위에 올라탔다. 옆에 세안 도구와 수건을 꺼내놓고, 돌아오는 버스에서 받았던 주스를 마시면서 무릎을 끌어안은 채 창밖에 시선을 고정했다.

집으로 돌아간 화자가 지금 왜 학교에 있는지. 그것도 늦은 밤에 아무도 없는 빈 강의실까지 왔는지. 처음 중요하던 의문들은 어느새 잊혔다. 어깨와 등을 동그랗게 말고, 떨어지는 달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창밖을 바라보는 뒷모습과 마주한 순간, 알 수 없는 감정이 자이의 가슴을 서늘하게 적셨다. 그건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동질감이기도 했고,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가슴 울렁임이기도 했다.

강의실 안을 훔쳐보던 자이는 한참을 망설였다. 지금 말을 거는 것은 선택지에 없었다. 달이 낳은 아이처럼 오롯이 앉아있는 저 풍경을 본다면 누구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냥 돌아가는 수밖에 없나. 자이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돌아섰을 때, 앞에 검은 그림자가 서있었다. 반사적으로 비명이 터지려는 입을 투박한 손이 덮었다. 익숙한 감촉과 체취에 눈만 올려보니 동화였다. 뒷골이 땅길 정도로 쿵덕거리는 와중에 웃음이 나왔다. 하긴, 먼저 가있으라고 들을 네가 아니지. 자이의 호흡이 가라앉자 동화는 손을 뗐다. 세운 검지를 자신의 입술에 대며 말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낸 동화는 연이어 자이의 허리춤을 가리켰다. 외투 주머니 쪽이었다. 그제야 자이는 주머니 속 휴대전화를 떠올렸다. 혹시라도 자취를 놓치면 전화해볼 요량으로 받아왔지만 오는 사이에 있다는 자체를 잊어버렸다. 평소에 가지고 다니질 않으니 쉬이 익숙해지지 않았다. 이거다. 속으로 쾌재를 부른 자이는 휴대전화를 꺼내 들며 입모양으로만 말했다. 1시간. 동화는 외투를 벗어 자이에게 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추워, 30분. 본인이 춥다는 말이 아니었다. 잠깐 나온 길이라 얇게 입고 나온 자이와, 아무리 덧입을 옷이 있어도 차가운 테이블 위에 앉아있는 화자에 대한 말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자이도 고집부리지 않았다. 자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동화는 열쇠를 추가로 맞춰야겠다고 중얼거리며 중앙계단 쪽으로 향했다. 동화의 드문 투덜거림에 자이는 킥킥, 소리 죽여 웃었다. 분명 사이다 전에 산 것 때문에 저러겠지. 동화는 자판기 옆 벤치에 장바구니를 내려두고 자리를 잡았다. 앉은자리에서 중앙 계단은 물론 좌우측 계단까지, 4층 전체를 볼 수 있는 위치였다. 동화의 동선을 확인한 자이는 옆 강의실로 조용히 들어갔다.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닫고, 커튼을 끝까지 열고, 지금 화자가 보고 있을 학교 풍경을 눈에 담았다. 처음이라 낯설기만 할 줄 알았던 밤의 학교는 생각보다 정겨웠다. 아마 수문장 같은 동화가 있어서, 그리고 화자와 같은 것을 보고 있어서 그렇게 느끼지 않았을까 싶었다.

자이는 화자의 번호를 찾아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흐르는 동안 창 너머를 눈에 담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가로등이 가지 뒤로 숨거나 나타나며 별처럼 반짝거렸다. 달은 아주 천천히, 광막한 공간에서 몸을 굴리고 있었다. 신호음과 숨소리만 들리는 이 공간과 시간이 마치 우주 어디쯤 같았다. 이 세상에 자신과, 화자와, 그리고 동화만 있는 것 같은 기묘한 기분이 온몸을 채웠다.

화자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 화자 성격에 그럴 리 없었다. 무슨 대답을 할지 생각하다 타이밍을 놓쳤다는 것이 더 그럴듯했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역시 오래 걸리지 않아 통화가 연결됐다.

“여보세요.”

여리게 떨리는 목소리를 듣는데 두근거리는 심장이 귀 아래까지 올라왔다. 날갯죽지가 간지럽고, 발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자이는 최대한 담담한 척 대꾸했다.

“나야.”

목소리를 확인한 수화기 너머에서 잠시 숨을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 어디야?”

나는 지금 네 옆이야. 동화랑, 녹기 시작한 아이스크림도 있어.


#12


먼저 가방을 챙긴 동화가 칠판을 지웠다. 화자는 의자 줄을 맞추고 있었다. 자이는 점심 메뉴를 고민하며 뒤늦게 가방을 싸는 중이었다. 아까 지나며 얼핏 본 한식 정식이 갈치였던 것 같은데.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생선이었다. 차라리 양식 정식을 먹을까. 그런 고민 중인 자이 곁에서, 소리는 이미 다 싼 것 같은 가방을 자꾸 뒤적이고 있었다. 자이의 촉이 소리에게 가 닿았다. 평소라면 누구보다 먼저 가방을 챙긴 후에 교실 정리를 거들었을 텐데. 손은 가방 안에 두고 곁눈질로 자이를 힐끔거리는 모습에 확신이 들었다. 가방을 다 챙긴 자이는 일어나지 않고 그대로 앉아있었다. 자이의 손이 멎은 것을 본 후에야 소리는 반걸음 정도 곁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넷이 함께 다닌 후 처음으로, 먼저 말을 걸었다.

“저기.”

서두가 어쩜 이리 화자와 똑같은지. 자이는 웃음을 감추고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 화자랑 쟤 방에 가지?”

뜻밖의 질문에도 자이는 금세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전에 잠깐 시간 좀 내줄 수 없을까?”

“언제?”

“수업 다 끝나고.”

내내 여리던 목소리가 마지막 말만큼은 단호했다. 자이는 소리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잘게 떨리고 있었지만 안에 들은 의지만은 굳건해 보였다.

“알았어. 도서관 열람실로 와.”

그렇게 대화가 끝났다. 정리를 마친 화자와 동화가 이쪽으로 돌아왔다. “가자”라고 말한 자이가 먼저 앞장섰다. 동화는 자이의 뒤에, 조금 떨어져서 화자와 소리가 뒤따라 강의실을 나갔다.


#13


사위는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소리는 가방 세 개를 품고 끙끙 대며 계단을 내려왔다. 일층 현관 앞에 섰을 때 시야 한 편에 화자의 모습이 보였다. 크게 소리쳐야만 들릴 거리였다. 울창한 나무 아래서 화자는 마치 누군가 두고 간 인형처럼 벤치에 놓여있었다. 표정 없는 얼굴이 낯설었다. 소리는 쭈뼛거리며 다가섰다. 지척까지 다가온 소리의 발을 보고야 화자의 고개가 퍼뜩 올라왔다. 그리고 “소리야”라고 불렀다. 인적 없는 골목에서 엄마를 만난 듯한 목소리였다.

“걔들은?”

소리의 물음에 화자는 대답 대신 주변을 둘러봤다. 그제야 화자는 소리의 품에서 자신의 가방을 발견했다. 자이의 가방은 챙겼으면서 정작 자신의 가방을 내버려뒀다. 자판기 앞에 팽개쳐졌을 동화의 가방도, 화장실 어딘가를 굴러다녔을 동화의 휴대전화마저.

“미안. 고마워.”

화자는 급히 가방과 휴대전화를 넘겨받았다. 그리고 소리가 옆에 앉을까 어쩔까 하며 눈치를 보는 사이에 “애들은 금방 올 거야”라고 말했다. 잠시 화자를 살피던 소리가 “괜찮아?”라고 물으니 “응”이라고, 잠시 후 소리가 다시 “진짜 괜찮아?”라고 물으니 “괜찮아”라고 대답했다. 소리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화자는 괜찮다고 대답할수록 괜찮지 않아 보였다. 바람이 지나가는 짧은 시간이 흐르고, 화자는 가만히 서있는 소리에게 “난 애들 가방 주고 갈게”라며 웃었다. 소리는 잠시 화자 앞에서 머뭇머뭇거리다가 “그럼 내일 봐”라고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네게는 내가 없다. 마음에도, 눈에도 내가 비치지 않는다. 그렇게 느낀 소리는 걸음을 되돌려 먼저 계단을 내려갔다. 서운하지는 않았다. 그저 안쓰럽고, 도움을 줄 수 없어 속상한 마음뿐이었다. 지금 화자는 평소라면 닿을 수 없는 어느 능선을 오르는 중일 것이다. 친구로서 도울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최소한 방해라도 말아야 했다. 소리는 그렇게 곁에 머물고 싶은 욕심을 억지로 접었다.

계단을 내려가던 중에 문득 2주 전 일이 떠올랐다. 소리는 뒤늦은 죄책감으로 괴로워졌다. 스스로 밝히지 않은 일을, 아마 스스로 인지하지도 못했을 일을 대신 말한 것이 잘한 걸까. 그때는 동화와 사귀지 않으면서 곁에 두는 아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둘을 보며 이유 모를 마음을 끓이는 화자가 안쓰러웠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 한들, 그걸 아이에게 말한 것은 잘한 걸까. 그것도 내가.

소리는 후회 섞인 눈으로 계단 위를 돌아봤다. 화자는 처음 모습 그대로 벤치에 앉아있었다.


#13


중앙 현관으로 나오던 자이와 동화는 자신들의 가방이 벤치에 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화자가 자이의 볼과 가슴을 쓰다듬었던 자리였고, 동화가 화자에게 열쇠를 넘겨줬던 자리기도 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내리막으로 까만 뒤통수가 사라졌다. 화자는 홀로 내려가고 있었다. 중앙 현관으로 나오는 둘을 발견하고는 가방을 두고 걸어 내려갔을 법한 거리였다. 자이는 가방 위에 올라타 있는 휴대전화를 들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손가락이 이내 화면을 도로 꺼트렸다. 쉽지 않았을 화자의 배려를 곱씹으며 멀어지는 등을 애써 불러 세우지 않았다. 다만 자이와 동화는 벤치 옆에 서서, 정문 밖으로 멀어지는 키 큰 등을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15


화자를 태운 버스가 출발하고, 소리를 실은 버스마저 떠나니 편의점 벤치에 남은 것은 둘뿐이었다. 그제야 동화가 입을 열었다.

“방금 소리한테 뭐라고 했어? 정류장에서.”

자이는 우유 마개의 끄트머리를 손톱으로 튕기며 대답했다.

“내가 끼어들 관계는 아니지만, 방학 중에 연락 오기 전까지 연락 안 하는 게 나을 거라고. 화자를 위한다면.”

“그랬더니, 뭐래?”

“아무 말 안 하더라. 노려본 건지 그냥 본 건지 모르겠지만 잠깐 보기만 하고.”

그 성격에 노려본 것은 아니겠지. 하물며 요 며칠 유독 죄지은 것처럼 굴던 애가. 동화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틱. 틱. 얇은 마개가 손톱을 스치는 소리만 연달아 울렸다. 잠시 후, 동화가 물었다.

“그건 어떻게 됐어?”

“살았어.”

자이는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 뒷말을 기다렸지만 자이는 그대로 입을 다무는 듯했다. 동화는 자이가 내내 쥐고 만 하는 우유를 부드럽게 뺏었다. 아직 불편한 손으로 뚜껑을 반쯤 열고, 마시기 편하게 앞으로 돌려주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자이가 우유를 한 모금 들이켰다.

“뛸 용기는 있어도 죽을 용기는 없었나 봐. 옥상도 아니고 이 날씨에 다리라니.”

자이는 피식 웃었다. 아쉽다는 웃음도 아니었고, 잘됐다는 웃음도 아니었다. 이제는 시야에서 한 뼘쯤 밀어낸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예정대로 바로 군대 간대.”

“그리고?”

“그 뒤는 몰라. 관심도 없고.”

동화는 자이의 표정을 찬찬히 살폈다. 말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았다. 경준의 이야기를 할 때 자이가 어떤 감정에 휩싸여있는지만 관찰했다. 동화가 본 이래로, 울분과 수치심에 휩싸이지 않고 이토록 덤덤하고 감흥 없이 말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 사건이 있고 나서 이틀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자이의 예상과 달리 자이의 엄마는 큰 액수의 위자료와 함께 이혼하는 것으로 짧은 재혼을 마무리했다. 더러운 돈이라 안 받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자이가 무엇 때문에 반년 가까이를 참고 견뎠는지 알게 되어서인지 상대가 제시한 전부를 받겠다고 했다. 대신 엄마는 그간의 과정을 속속들이 알게 되면서, 아빠가 죽었을 때부터 버텨오던 마음이 완전히 꺾였다고 했다.

“엄마는 지방에 가고 싶은가 봐. 이모네 근처로 알아보더라.”

동화의 표정이 우려로 물들었다. 하나뿐인 이모와는 빚 문제로 한때 사이가 안 좋았다고 들었다.

“돈 문제만 아니면, 그래도 가족이 친구보다 낫다고 하더라고. 빚도 다 갚았고.”

그리고 사실, 엄마는 지금 나를 보는 게 좀 그런가 봐. 자이는 뒷말을 삼켰다.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마 미안하고 참담한 심정일 것이다. 자이는 내심 엄마가 곁에 있어줬으면 했지만, 부러진 마음을 말릴 수도 없었다.

그리고 경준은 제적 처리하기로 합의한 날, 즉 어제저녁에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렸다. 충동적으로 결심한 거면서 그 와중에 택시 타고 거기까지 가다니. 역시 맥락 없는 허세로 살아온 스물한 살다웠다. 순식간에 구조돼서 병원에서 깨어났고, 그 뒤로 다시 시도하려는 낌새는 없었다. 무엇이 그를 뛰어내리게 했는지는 조금도 관심 없었다. 자이 말대로 이젠 남이니까.

자이는 엄마에게 위자료를 주고 동화를 맞고소하지 않는 조건을 달아, 고소 대신 제적만으로 이 사건을 마무리했다. 거기에는 본인은 모르겠지만 화자의 역할이 컸다. 자이가 말하길, 화자는 경준으로서는 처음 만난 천적 같은 존재였다. 모든 1은 일반적인 상식이나 잣대로 나눌 수 없는 상성 관계가 있다고 했다. 가지고 있는 조건이나 일신의 힘과는 관계없이 근원적으로 억눌리는 상대가 있다고. 경준의 경우 그 상대가 하필 화자였던 것이다. 이번 일에 얽힌 이가 화자 없이 자이와 동화뿐이었다면, 어제 경준은 필시 길길이 날뛰었을 터였다. 동화에게 만신창이로 얻어맞은 후였어도 학과장실에서 동화를 두려워하는 기색은 없었으니까. 반대로 그렇게 만신창이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면, 화자와 눈을 맞추고 서로의 관계를 알아챘어도 경준이 이만큼, 혼백이 나간 것 마냥 찌그러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목덜미를 물리기 전까지는 천적 앞에서도 일단 꼬리를 치켜드는 것이 허세가 가진 유일한 강점이니까. 경준이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면 분명 상황은 여러모로, 모두에게 나빠졌을 것이 뻔했다. 하지만 그날 유성처럼 하얗게 타오르던 화자에게서 무엇을 본 건지, 경준은 갑자기 모든 의지를 놓은 것처럼 본인 내부로만 웅크렸다.

“잘은 모르겠지만, 진짜로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생명을 잃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을걸. 그게 천적의 의미니까.

결국 경준은 자이로부터-사실은 자이 곁에 있는 화자로부터- 도망치는 것을 택했다. 자이 역시 그쯤에서 경준과의 악연을 정리했다. 물론 이것으로 경준에 대한 모든 감정을 털어냈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 별다른 일이 없는 한 자이는 경준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이고, 앞으로는 점점 나아질 일만 남았다는 것이다. 동화는 오직 그것이 중요했다.

“그래.”

한참 만에 동화는 추임새처럼 말했다. 그리고 잠시 후,

“네 어머니도, 누구도, 무엇 하나 네 잘못이 아니야”

라고, 문득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다시 얼마 후,

“다 끝났다. 고생했어”

라고 덧붙이듯이 말했다. 잠시 허공을 머금던 자이는 조그만 우유 뒤로 조용히 이마를 묻었다. 그리고 기포가 끓어오르는 듯한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대신 등짝 좀 때려줘.”

무슨 말인지 의아한 표정도 잠시, 동화는 후려치듯 말했다.

“미련하게 왜 참았어.

그런 말과 다르게, 투박한 손끝은 자이의 등을 가볍게 다독이기만 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이제 괜찮아.”

초여름의 눅눅한 바람을 타고 주변 소음이 둘 사이를 맴돌았다. 방학을 맞이한 학생들이 왁자하게 떠드는 소리, 버스가 엔진을 울리며 출발하는 소리, 질 나쁜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소리, 코를 훌쩍이는 소리, 앙금이 비어져 나오는 소리 등이 연달아 지나갔다. 잠시 후 자이는 고개를 들고 남은 우유를 한 입에 털어마셨다.

“이제 자주 못 보겠네.”

동화가 의식하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자이는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지금처럼 네 집에서 매일 자거나 하진 않겠지.”

왜냐하면 지금 네 집은 다음 학기부터 내 집이 될 거니까. 옆방도 비었지만 자이는 지금 집이 좋았다. 혹시 화자가 바로 돌아오지 않아도, 설령 동화가 군대를 간다 해도, 셋이 있던 그 장미 벽지의 좁은 방이라면 자이는 둘 중 하나가 돌아올 때까지 혼자 잠들 수 있을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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