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중편] 싸리나무 담장 1

1. 선험 기준으로 후험 규칙을 세운다.

by 이한얼












정유한(오형) / 그제



그 여자는 집 앞에 있었다. 마당으로 들어가는 청록색 대문에 한 걸음 비켜서. 옷감이 허름한 걸 빼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차림이었다. 엄마 또래, 그보다 조금 많을지도 모르겠다. 움푹 들어간 눈언저리와 튀어나온 광대가 정확한 나이를 짐작하기 어렵게 했다. 언제고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누군지 곧바로 떠오르지 않는 낯선 얼굴이기도 했다.

내가 얕은 내리막을 내려오는 동안 여자는 마당에 시선을 둔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조금씩 팔을 주무르는 몸짓이 힘없어 보였다. 누군가를 오래 기다린 듯 허공을 붙잡던 시선이 곧 내게 멎었다. 서로 눈이 마주치고, 얼마쯤 떨어진 곳에 멈춰 선 나를 훑었다. 여자의 얼굴이 비대칭으로 일그러지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기다리던 이가 나였음을. 동시에 알 수 없는 감정이 가슴을 쓸고 지나갔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그건 불쾌함이었다. 보다 정확히는 두려움에 가까웠다. 누군지 모를 객이 가져올 파란을 예감이라도 한 듯 저 시선이 불편했다. 밝아지는 표정이 반갑지 않았다. 우리가 오래전에 만났다는 어스름한 기억과 함께 여자의 정체가 떠올랐다. 나는 못처럼 자리에 붙박였다. 오히려 물러난 쪽은 여자였다. 반가운 얼굴과 반대로 무엇에 떠밀리듯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질금질금 후퇴하던 뒤꿈치가 멈췄을 때, 여자가 입술을 열었다.


“유한아.”


하얗게 튼 입술보다 더 갈라 터진 목소리가 익숙한 이름을 발음했다. 단연코 처음 들어보는 낯선 억양이었다.

모든 이름은 억양을 가지고 있다. ‘유한아’하는 세 글자에는 내리막도 오르막도, 언덕과 파도까지 모두 들어있다. 부모님, 할머니, 선생님, 하물며 동네 어르신까지 모두 다른 억양으로 이름을 불렀다. 그건 호칭과 따로 드러나는 의미였다. 말하자면 상대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가장 직감적인 장치와도 같았다. 그렇기에 듣자마자 나는 알 수 있었다. 저 여자와 나는 타인이라고. 설령 전에 어디서 만났건 무슨 연으로 묶였건 우리는 모르는 사이였다. 그리고 모르는 이의 과도한 친밀감은 누구에게나 부담으로 다가왔다. 나는 다정한 목소리만큼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철문을 젖히는 소리가 들렸다. 열린 문으로 나타난 이는 아버지였다. 잔뜩 찌푸린 아버지 뒤로 어머니가 따라 나왔다. 서로 시선이 엉킨 여자가 먼저 고개를 숙이자 아버지 대신 어머니가 마주 인사했다.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오늘은 쉽게 지나갈 수 없겠구나.

고개 숙인 여자 뒤쪽에서 누군가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땅을 보며 걸어오던 유리는 우리를 발견한 위치에서 그대로 멈춰 섰다. 의문을 담은 동그란 눈과 마주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유리(오형) / 그제



난 전에도 이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같은 장소에 거의 같은 사람들. 각자 서있는 자리마저 같았다. 오늘과 다른 점은 지금처럼 가로등이 하나씩 켜지며 어둠을 몰아내는 시간이 아니라 밝은 한낮이었고, 오빠 대신 할머니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날 아빠는 누군가를 향해 무섭게 소리치고 있었다. 집 앞이 온통 화난 기운으로 넘실거렸다. 나를 향한 감정이 아니었음에도 그걸 지근거리에서 뒤집어쓴 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할머니가 그런 나를 품에 숨겨서 집안으로 데려갔다. 경기 같은 떨림은 잠시 후 미안한 표정인 아빠와 마주할 때까지 멎지 않았다. 고작 열두 살이었던 그 나이까지, 아빠가 그리 화를 내는 것은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앞에 마주 앉은 아빠는 울고 있는 나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커다란 손으로 내 손등을 천천히 다독이며 차분한 어조로 설명을 했다. 그건 우리 집 중요한 규칙 중 하나였다. 설명은 짧았고, 그리 중요한 내용도 없었다. 어린 나이였기에 세세히 설명하지 않았고 설명했어도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알아야 하는 요소는 전부 들을 수 있었다. 어떤 이유로 화를 냈고, 그건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으며, 그로 인해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까지. 나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는 거듭 손등을 두드리고 머리를 쓰다듬다가 방으로 들어갔다. 그 사이 간식을 들고 온 할머니가 내 곁에 앉아 아까처럼 등을 두드려줬다. 몇 개의 빵과 우유를 다 먹었을 무렵, 그제야 엄마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었다.

그리고 오늘이다. 아마 오 년쯤이 지난 시간.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고등학생이 될 만큼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장면과 마주하자마자 옛 기억을 끄집어냈다. 아빠는 그때처럼 화를 터트리않았다. 단지 좁게 홉뜬 눈으로 분노를 낮게 내리깔 뿐이었다. 어머니와 눈을 맞춘 오빠가 나를 데리고 들어왔다. 오늘 나는 울지 않았다. 울기 바빴던 그때는 아빠가 누구에게 그리 화를 내는 살필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처음 보는 여자의 옆을 지나쳐갈 때 나는 알 수 있었다. 눈가가 거뭇하고 깡마른 저 여자가 그때의 상대였을. 나는 잠시 여자를 눈에 품다가 오빠를 따라 마당을 가로질렀다.

현관 안에서 눈이 마주친 오빠는 페이지가 뒤섞인 책을 보는 표정이었다. 내게 웃으며 말을 걸었으나 왠지 울고 싶은 목소리 같았다.


“우리 막내. 일찍 왔네.”


할 말이 궁색했는지 이미 아는 것을 묻는 오빠에게 “오늘 학원이 없었어”라고 대꾸했다. 오빠는 소파를 짚은 채 잠시 말이 없었다. 이쪽을 향해 내민 등은 시간이 필요한 듯 보였다.


“먼저 올라갈게.”


현관 앞에 쓰러진 오빠의 가방을 집어 들며 되도록 차분히 말했다. 낮지 않은 천장에 내 목소리만 공허하게 울렸다. 더는 오빠의 정신을 뺏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대답이 없는 이유도 그래서일 것이다.

나무계단을 차곡차곡 밟으며 이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이렇게 컸던 적이 있었던가. 닫힌 방문 앞에 오빠 가방을 내려두고 옆방 문을 조금 열어봤다. 언니는 아직 안 온 모양이다. 문을 닫고 반대편 방으로 들어왔다. 찰칵하며 손끝에 문고리가 걸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제야 메고 온 보따리를 풀어내듯 긴 숨이 튀어나왔다. 고작 현관에서 내 방으로 올라온 것뿐인데, 언덕길을 급히 올라온 것처럼 숨이 찼다.

가방을 벗고 심호흡을 크게 했다. 괜찮다. 나는 생경한 것에 잘 적응하는 성격이니까 처음 보는 모습에도 그러려니 할 수 있다. 낯선 표정의 가족들도, 한 번도 불편한 적 없던 집에 괴로운 공기가 흐르는 것도, 그런 분위기 하나로 익숙하던 가구와 벽지가 심장을 옥죄는 것도 괜찮다. 시간이 지나면 함께 지나갈 것들이다. 언제나처럼 엄마 아빠는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줄 테고, 상황을 이해하고 나면 오빠가 내 머리를 다독일 것이다. 곁에 선 언니는 바보 같거나 얄미운 표정 중 하나를 띄우고 있을 것이다. 늘 꾸준했던 가족들을 믿고 기다리다 보면, 그럼 다시 내가 알던 장소가 될 것이다.

진정된 가슴을 두드리며 창가로 다가갔다. 현관이 내려다보이는 곳은 언니 오빠 방 쪽이었다. 내 방에선 좁은 뒷마당만 보였다. 현관에서 내 방이 보일 리 없지만 걸개를 풀어 커튼을 내렸다. 그것만으로 불 켜지 않은 방은 어둡게 내려앉았다. 나는 침대에 앉아 금방 올라올 엄마를 기다렸다.












이유빈(에이형) / 그제



집 앞 버스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자정이었다. 몇 분 차이로 통금 시간이 지났다. 나는 하루 종일 흘러내리는 가방을 다시 추켜올리며 언덕을 올랐다. 얕은 오르막이 길게 뻗어있는 직선 길. 우리 집은 그 절반쯤, 가로등 여덟 번째와 아홉 번째 사이에 있었다. 이 시간이면 아빠와 유리는 이미 자고 있을 것이다. 일층은 거실만, 이층은 오빠 방만 불이 들어와 있을 터였다.

대문에 다가가니 머리 위에서 하얀 센등이 켜졌다. 하지만 비밀번호를 누르며 힐끗 올려다본 오빠 방 창문은 컴컴했다. 마당에서 본 거실도 어두웠다. 엄마는 그렇다 쳐도 오빠까지 벌써 잘 리가 없는데. 아직 안 들어왔으면 모를까.

열린 현관 내부는 낯선 분위기가 가득했다. 불이 꺼져서가 아니고, 이 시간에 아무도 없어서도 아니었다. 오늘따라 왠지 공기가 팽팽하게 느껴졌다. 선뜻 발을 들이기 꺼려지는 기분에 나는 눈으로 먼저 안쪽을 훑었다. 닫힌 안방과 화장실. 꺼진 텔레비전과 거실 전등. 어둡게 내려앉은 거실 너머에서 옅은 인기척이 들렸다. 부엌이었다. 작게 달그락거리는 유리 소리와 함께 두런두런한 말소리도 함께 새어 나왔다. 신발을 벗고 가까이 다가갈수록 식탁과 잔이 부딪히는 소리 사이로 가느다란 목소리가 섞였다. 먼저 엄마의 팔이 보였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은 오빠의 어깨가 나타났다. 뒷문 유리창으로 들어온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술을 마시는 모습이었다.

부엌 안으로 들어서자 엄마와 오빠가 놀란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아마 나타나기 전까지 내가 온지도 몰랐던 것 같았다. 나는 식탁에 늘어진 접시를 보며 물었다.


“나 빼고 둘만 마시고 있었어?”


엄마가 “늦었네”라고 해서 나는 “고작 14분이잖아” 하고 대꾸했다. 그새 다가온 오빠는 나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늦은 건 늦은 거지.”


큰 키로 고개를 숙였을 때 닿는 옆머리에 입을 맞추며 오빠가 말했다. 타박이 아니었다. 왠지 다른 말 대신 가져다 놓은 것처럼 행간에 틈이 느껴졌다.


“뭐해? 불도 안 켜고.”


내 말에 둘의 반응은 왠지 묘했다. 쓴웃음을 걸어놓은 얼굴로 서로 시선을 맞췄다.


“언제 왔어?”


엄마가 잔에 남은 술을 털어 넣으며 물었다.


“언제긴. 방금 왔지.”


내 말을 들은 엄마는 마지막 남은 치즈 조각을 식탁에 내려놓고 접시를 치우기 시작했다. 오빠가 치즈를 까서 벌어진 내 입술 사이로 밀어 넣었다.


“엄만 먼저 잔다.”

“그만 마시게?”


엄마는 손만 흔들고 그대로 부엌을 나갔다. 치즈를 씹으며 잡아봤지만 오빠가 “주무세요”라는 말로 잘라냈다. 안방으로 들어가는 발걸음을 쫓던 나는 오빠와 시선을 맞췄다.


“왜 이럴까. 평소 같았으면 의자를 빼줬을 사람들이.”


내 추궁에 오빠를 어깨를 으쓱거렸다.


“14분만 일렀으면 그랬겠지. 얼른 씻고 자.”


오빠가 한쪽 팔을 벌렸다. 나는 의문스러운 마음으로 오빠를 안았다. 마당에서부터 느꼈던 찜찜한 감정이 두 사람을 만난 후 더욱 기세를 키워갔다. 하지만 명분은 내게 없었다. 이 집에서는 작은 약속이어도 어기면 조그마한 반작용이 따라왔다. 그 반작용은 술자리 끝 무렵에 끼워주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조금 유치하지만 약속을 사소하게 여기지 말라는 나름의 벌칙이었다. 나는 수상한 마음을 애써 추스르며 오빠의 등을 두드렸다. 어렸을 때부터 하루도 빼놓지 않은, 하루의 끝을 책임지는 인사.


“잘 자. 오빠.”

“우리 둘째도 잘 자. 좋은 꿈 꾸고.”


이마에 가벼운 입맞춤을 남긴 오빠는 먼저 계단으로 사라졌다. 나는 불 꺼진 부엌에 우두커니 서서 뒤꿈치가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정익수(에이형) / 삼 년 전



“예전에 강 건너에 땅이 좀 있었어. 솔직히 값나가는 자리는 아니었다. 지금이야 아스팔트로 덮였지만 그때는 그 일대가 죄다 임야였으니까. 나무를 베지 않으면 달리 쓰기도 어려웠고, 평지라고는 좁은 땅뙈기가 전부여서 그냥 고팡 하나를 지어놓고 텃밭으로 썼지. 그마저도 현준이 대학 갈 때 팔아버렸지만. 왜인지 값이 제법 올라서 등록금을 빼도 꽤 남았어. 그래서 가진 것을 죄다 털어 작은 주택 두 채를 올렸다. 하나는 붉은색 벽돌에 주황색 대문이고, 다른 하나는 회색 벽돌에 청록색 대문으로. 부모님께 땅을 받아 두 아들에게 집으로 물려주니 이만하면 나도 괜찮게 산 것 아니겠냐며 그땐 웃었다. 근데 얼마 안 있어 강 건너마저 난개발이 됐어. 산을 깎더니 터널이 뚫리고, 길이 깔려서 건물이 들어서더라. 네 할머니가 지금도 종종 그런다. 그때 조금만 더 가지고 있었다면 주택 대신 빌딩을 올렸을 거라고. 근데 현준아, 내가 유한이한테 이 얘기를 했었나?”

“열 번 정도요. 그만 하고 빨리 오세요. 형님네 기다리니까.”

“매년 찍는 가족사진 뭐 급하다고. 근데 무슨 얘기 중이었더라.”

“텃밭이요. 할아버지께서 아버지와 같이 울타리 만드신 거.”

“맞다, 그랬지. 그때가 언제였냐면 아마 현준이가 고등학생쯤이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