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중편] 싸리나무 담장 2

2. 규칙을 바탕으로 공정하게 대한다.

by 이한얼


유리 / 어제


커튼 사이로 푸름이 비어 들어왔다. 시계의 두 바늘이 숫자 육 위를 느리게 달리고 있었다.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깼다. 어제 저녁을 먹고 침대에 누워 있다가 일찍 잠든 탓인 듯했다. 잠결에 설핏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누군가 내 방에 들어와 커다란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은 감각도 남아 있었다.

목까지 이불을 덮어쓰고 한동안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던 중에 문득 요의가 느껴졌다. 이불을 걷어내자 싸늘한 공기가 발목부터 허리까지 비집고 들었다. 찬 바닥을 점점이 밟으며 나선 복도는 묵직하게 어두웠다. 맞은편 문은 모두 닫혀있었다. 오빠도 언니도 일어날 시간이 아니었다.

아직 새벽은 제법 쌀쌀한 날씨였다. 습관처럼 이층 화장실로 가려다가 비데가 고장 났음을 뒤늦게 떠올리고는 일층 계단으로 향했다. 소리를 내고 않고 조심해서 내려갔다. 안방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거실을 반으로 갈라놓고 있었다. 웅얼거리는 음성이 들리는 것이 엄마 아빠는 벌써 일어난 듯했다. 안방과 나란히 붙은 화장실에 가까워질수록 불빛에 얹혀 나오는 음성의 뭉치가 점점 언어로 뚜렷해졌다. 차분한 목소리와 낮은 목소리가 연달아 오갔다. 화장실 문고리를 잡으려던 순간, 어느 우려 섞인 언어와 마주친 내 몸이 덜컥 굳었다. 그대로 얼마간 말소리를 주어 삼켰다. 가슴이 쿵쿵 뛰었고, 뒤통수에서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울리는 동안에도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그대로 뒷걸음질 친 나는 안방으로부터 도망쳤다. 계단 가장자리를 소리 없이 밟으며 허겁지겁 도착한 이층 복도에서 나는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길을 잃은 듯 방황했다. 내 발바닥이 복도 바닥을 스치는 소리만 무서운 침묵 속에 연달아 들렸다. 어느새 요의는 사라져 있었다. 어제 그 여자는 오빠를 만나러 온 사람이었다. 그럼 나는? 누군가 날 찾아온 적은 있었나. 그 사람도 왔다가 그 여자처럼 돌아갔을까. 아니면 아예 오지도 않았을까.

이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이상하게도 언니였다. 그럴 리 없겠지만 제발 일어나 있기를. 닫힌 문 앞에 서서 기도했다. 사실 자고 있어도 상관없었다. 가슴팍이라도 때려 깨울 셈이었으니.

문고리를 비틀자 천천히 문이 열렸다. 들어가기도 전에 훈훈한 공기와 익숙한 냄새가 코를 건드렸다. 나와 같은 화장품을 쓰지만 언니만의 독특한 체취가 섞인, 어느 때는 짜증 나도 어느 때는 안심되는 그런 마음의 향이었다. 지금은 다행히 후자였다. 오늘 눈을 뜨고 느낀 것 중에 따듯함이었다. 차가운 복도에서 얼었던 목젖이 녹으며 코끝이 찡해졌다. 이 순서라면 곧 눈언저리가 습하게 떨릴 것이다. 하지만 열린 문 앞에서 나는 눈물 대신 피식 웃고 말았다. 이불 대부분은 침대 아래로 쓸려 내려갔고, 아직 떨어트리지 않은 끄트머리로 간신히 배만 덮은 채 웅크려 떠는 모습이라니. 어쩌면 꿈에서 냉장고 속을 헤매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방금 까무러치게 놀랐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자고 있는 모습이 비틀렸던 모든 감정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나는 가만히 다가가 침대 곁에 걸터앉았다. 근처에 온기를 느꼈는지 언니는 돌아누웠다. 그리고 내 허벅지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붙기 위해 몸을 꿈틀댔다.

“소 같기는. 누가 업어 가도 모르겠다.”

바닥에 떨어진 이불을 제대로 덮어줬다. 이러고도 안 깨는 것을 보면 신기했다. 언니는 고맙다는 인사 대신, 입맛을 다시는 것으로 대꾸했다.

잠든 얼굴을 들여다보는 동안 널뛰던 심장이 점차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귀에 거슬리던 윙윙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한 번 진정하고 나니 지금껏 두피 근처를 맴돌던 생각들이 머릿속으로 하나씩 들어왔다. 아주 많이 놀랐을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잠시 후 다른 가족과 마주쳐도 웃으며 인사할 수 있을 만큼. 놀라움을 구겨 압축하는 만큼 평소부터 품어온 의아함이 대신 풀리기 시작했다. 작은 가족들 사이에 혼자 껑충 컸던 모습. 운동과 연이 없는 아빠와 달리 땀에 젖은 수건이 어울렸던 그 모습. 엄마와 달리 숫자에 젬병이던 모습. 홀로 유난히 감성적이던 모습. 혼자 목소리가 우렁찼던 모습. 어딘가 모르게 혼자 떠도는 듯했던 모습. 어릴 적 할머니 집에 가면 괜히 불편해 보였던 모습. 그동안 내 머릿속에 있던 오빠들이 일제히 내게 달려들었다. 그 곁에 선 나도 오빠들 다음으로 뛰어들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잠든 언니를 한참 동안 내려다봤다. 중간중간 도로 차내는 이불을 다시 덮어주고 방을 나섰다. 차가운 복도에 발이 닿으니 사라졌던 요의가 다시 나타났다. 별 수 없이 이층 화장실로 향했다. 얼음 같은 변기 시트에 앉으니 허리 근육이 땅길 만큼 꼬리뼈부터 소름이 돋았다. 날뛰던 감정이 가라앉으니 명치 근처가 쑤시기 시작했다. 화장실에서 나온 나는 오빠 방 앞에 섰다. 노크를 할까 하다가 한 번도 해본 적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조용히 문고리를 돌렸다. 역시 특유의 냄새부터 문틈으로 뛰쳐나왔다. 언니만큼 풍성하지 않고 밋밋하지만 그래서 항상 안심을 주던 체취였다. 하지만 코를 맴돌던 향은 왜인지 금세 사라졌다. 열이 많은 오빠의 방은 사계절 내내 온도가 낮았지만 오늘따라 더 냉동고처럼 느껴졌다.

손끝으로 천천히 밀어낸 문 너머에 대자로 자고 있는 오빠가 보였다. 이쪽 이불은 아예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저런 건 내력인지 버릇인지. 모르는 사람을 깨우러 가는 것처럼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런 마음으로 오빠 방을 걷기는 처음이었다. 절반쯤 갔을 때 인기척을 느꼈는지 오빠는 덜 깬 눈을 배꼼이 떴다. 나는 방 한가운데서 그대로 굳었다. 허공을 찬찬히 짚어오던 눈길이 내게 멎었다. 나는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잠시 얼굴을 알아보려던 눈빛은 부드럽게 녹았다. 나를 잠시 올려다보던 오빠 “우리 막내”라며 불렀다. 영어권에서 인사 대신 이름을 부르는 것처럼, 호칭이 아닌 인사였다. 의아함이 아니라 반가움이었다. 그 네 글자를 집어삼킨 순간, 내게 무엇이 번개처럼 내리 꽂혔다. 정수리를 통해 들어온 그것은 귀 안쪽에 가둬 둔 네 글자를 붙잡아 아랫배 근처쯤 던져버리고는 순식간에 발바닥으로 빠져나갔다. 네 글자가 품은 오빠의 어감이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다. 그건 일종의 깨달음이었다. 나를 향한 저 동그란 눈동자에 내가 평생 보아온 익숙한 시선과 난생처음인 낯선 시선 함께 있었다. 지금껏 피부로만 닿아왔던 오빠라는 사람이 그 순간 마음속으로 스며 들어오는 감각. 뿌연 김이 서린 안경을 벗고 처음으로 말끔하게 마주 보는 듯해서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쉬 마려워서 일찍 깼어.”

열일곱인 고등학생이 이 사람 앞에서는 늘 네 살처럼 행동했다. 이 사람도 나를 여전히 그 나이인 듯 대했다.

“화장실은 다녀왔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오빠는 “그럼 이리 와” 하며 침대에 자리를 만들었다. 나는 평소처럼 곁에 눕지 않고 엉덩이만 걸쳐 앉았다가, 오빠가 의아한 얼굴은 한 후에야 천천히 오빠 곁에 누웠다. 그러자 오빠는 내가 기억하는 첫 순간부터 그랬듯이, 팔베개를 하고 내 머리를 다독였다.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체취에 굳어있던 어깨가 먼저 풀렸다. 괜찮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구나. 가라앉았다고 여겼던 마음이 생각보다 훨씬 들썩이고 있었구나. 사실 지금도 가슴속은 성난 기포를 내며 끓고 있었다. 무슨 말이냐고, 어떻게 된 거냐고 따지듯 묻고 싶었다. 혹은 내가 들었다고, 나는 알고 있다고 방금 들은 이야기를 보풀이 일어난 소매에 눈물과 함께 쏟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오빠도 알고 있다는 확신이 있기 전까지는 내가 뒤집어쓴 이 물벼락을 섣불리 뿌릴 수 없었다. 하물며 당사자 중 한 명에게는 더더욱.

눈을 감고 옆머리를 다독이는 손길에 집중했다. 들끓는 마음과 혓바닥을 다스리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그때 문득, 지금쯤 다시 이불을 차내고 떨고 있을 언니가 떠올랐다. 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 지금껏 내게 뭔가를 캐물을 때마다 그랬던 ‘자매는 원래 비밀이 없는 거야’라는 말을 오늘에서야 되돌려줄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베고 있는 팔에 귀를 완전히 붙였다. 그 사이에서 울리는 내 심장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유빈 / 어제


“우리 오빠, 아니래.”

잼을 바르다 불쑥 끼어든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내가 다른 생각을 하다 대화를 놓쳤나? “응?” 하며 되묻는 내게 유리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방금 말을 반복했다.

“우리 오빠, 친자식이 아니래.”

손끝에 올려놓았던 빵이 떨어졌다. 그리고 찰진 소리가 되돌아왔다. 설마 하며 확인한 바닥은 역시 잼을 바른 쪽이 아래로 향해있었다. 외간 헛소리에 내가 시선을 내리깔고 정신을 추스르는 동안 유리는 태연했다. 떨어진 빵을 집어 들어 새로운 빵과 겹쳤다. 그리고 더럽다고 말리기도 전에 베어 물었다. 발로는 근처에 굴러다니는 수건을 끌어와 바닥을 문지르면서. 일련의 행동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는데 하얀 자국이 남은 유리컵이 눈앞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반사적으로 우유를 따라줬다. 유리는 걸레질을 마친 발을 까닥까닥 흔들며 우유를 마셨다.

유리가 조숙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한데. 나는 재빠르게 주위를 둘러봤다. 엄마는 마당에 나갔고, 아빠는 아직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계단으로 내려와 현관 앞에 섰다. 나갈 채비를 마치고 신발을 신는 오빠였다. 매일 봐온 우리 오빠인데, 저 사람은 누구지. 마침 고개를 든 오빠가 이쪽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난데없는 거부감을 느꼈다. 마치 골목길에서 모르는 사람과 마주쳤는데 그 사람이 지나치지 않고 나를 똑바로 바라볼 때 느낄 법한 기분이었다. 내가 보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돌리자 오빠는 이쪽을 향해 “와서 인사해야지”라고 소리쳤다. 우렁찬 목소리에도 내가 엉덩이를 떼지 않고 꾸물거리는 동안 유리가 먼저 달려가 안겼다. 오빠가 나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고 나서야 나도 엉거주춤 일어나 비어있는 나머지 품으로 들어갔다. 유리와 내가 함께 안겨도 덩치 큰 품은 넉넉했다. 다만 평소와 다르게 엉덩이가 자꾸 뒤로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오빠는 우리 머리에 각각 입맞춤을 하고 나서야 팔을 풀었다. 그리고 나를 향해 묘한 표정을 보였다.

“우리 둘째. 오늘 좀 이상하네.”

코끝에서 땀이 났다. 내가 대답 없이 가만히 있으니 유리가 “언니 남자 친구랑 헤어졌대”라며 끼어들었다. 오빠의 눈썹이 높게 올랐다가 내려왔다.

“그랬어? 위로주 마셔야겠네.”

아니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오빠는 웃는 얼굴로 내 머리를 다독였다. 그리고 “다녀올게”라며 현관을 나섰다. 바로 돌아서는 유리와 달리 나는 한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창문 너머 마당에서 호스를 든 어머니와 오빠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엄마와 포옹을 하고 이마 언저리에 입맞춤까지 한 오빠는 대문을 나섰다. 늘 보아왔던 내 가족의 풍경이었지만 나는 지금 ‘다음 중 과일은?’이라는 객관식의 보기가 ‘1번 시계’ ‘2번 빗자루’ ‘3번 슬리퍼’인 문제를 풀어야 하는 심정이었다. 창문 곁에 빗겨선 나는 마당과 화장실의 움직임을 살핀 후 식탁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그리고 식빵을 물고 있는 유리에게 고개를 한껏 숙여 낮게 속삭였다.

“누가 그래?” “엄마 아빠가.” “언제?” “아까 새벽에.” “너한테?” “안방에서 하는 얘기 엿들었어.” “네가 들은 거 엄마 아빠도 알아?” “모를 걸.”

다급한 질문과 태연한 대답이 여러 차례 오갔다. 나는 허리를 펴고 의자에 주저앉았다.

“오빠는? 오빠는 알고 있어?”

“몰라. 본인 일이고 성인이니 아마 알고 있지 않을까.”

몇 달 안 됐지만 나도 성인이야. 근데 난 처음 듣는단 말이야. 처참하게 중얼거리는 나와 달리 유리는 말끔한 얼굴로 빵을 씹었다. 오물거리는 작은 입을 잠시 지켜봤다. 차라리 동생이 울거나 호들갑을 떨었다면 좀 더 빨리 진정했을 텐데. 마치 별거 아닌 일에 나 혼자 안달 내는 것 같아 낯설었다.

“근데 넌 왜 그렇게 태연하냐?”

불쑥 튀어나온 속마음에 우유에 떠있던 시선이 내게 올라왔다. 잠시 나를 바라보던 유리는 이내 얇은 미소를 내비쳤다.

“언니가 냉장고를 헤매는 동안 난 다 끝냈어.”

“무슨 말이야?”라는 내 말에 유리는 손바닥을 터는 것으로 대꾸했다. 빈 그릇 위로 빵가루가 우수수 떨어졌다. 일어난 유리는 가방을 메고 현관으로 향했다.

“아빠 나올 때 됐어. 얼른 표정관리 안 하면 있지도 않은 남자 친구랑 헤어진 거 온 가족이 다 알아야 할 걸.”

그 말만 툭 던져놓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빈그릇과 함께 멍하니 방치되었다. 가족 일이 어찌 저렇게 태연할 수 있지? 이럴 때면 같은 식구가 맞나 싶다. 어찌 보면 가족 중 유난히 도드라지는 것은 오빠가 아닌 유리인데.

그때 화장실에서 물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화들짝 일어나 가방을 챙겨 현관으로 달려 나갔다. 엄마와 하는 둥 마는 둥 인사를 하고, 저 멀리 앞서가는 유리의 등을 따라갔다. 오빠가 친자식이 아니라면 그럼 나는? 쟤는? 세 살 무렵 엄마의 부른 배를 본 적이 있었던가.

생각이 길어질수록 혼란스러워질 뿐이었다. 비슷한 속도로 걷는 유리의 등이 점점 멀게 보였다.


정현준(오형) / 삼 년 전


아내를 처음 만난 것은 29년 전이었다. 나는 회사를 다니고 있었고, 그때만 해도 결혼에 대한 큰 생각이 없었다. 할 수도 아닐 수도 있는 딱 그 정도. 그렇기에 어머니가 권하는 선자리나 점심시간 후 책상에 놓여있는 쪽지도 무심하게 지나칠 수 있었다.

그러다 아내를 만났다. 아내는 그해 들어온 여러 신입사원 중 한 명이었다. 가운데 서있는 아내를 보는 순간 생전 처음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저 여자와 결혼하겠구나. 그건 일종의 계시처럼 마음 깊이 박히는 어떤 확신이었다.

그로부터 삼 개월이 지났을 무렵 나는 아내와 사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일 년 하고 이 개월이 지났을 때 우리는 결혼을 했다.

아내는 결혼 전부터 아이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기대와 계획마저 풍부했다. 둘 혹은 셋은 낳고 싶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지만 그때마저도 나는 별 생각이 없었다. 있으면 좋겠지. 아내가 원하면 나도 좋다. 반드시 낳아야 한다는 마음 없이 여전히 그 정도뿐이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머릿속에서 아버지가 된 내 모습을 그릴 수가 없었다. 그때 나는 아이보다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솔직한 마음으로, 직장에서 인정받고 위로 올라가고 싶은 욕구가 더 강했다.

그래서인지 딱히 피하지 않았음에도 아이가 들어서지 않았다. 모두가 여유 있게 굴던 첫 해와 다음 해가 금세 지났다. 세 번째 해가 되니 다들 조금씩 조급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내의 농담 섞인 걱정이 자주 등장했고, 어머니도 후사에 대한 언급을 눈에 띄게 드러냈다. 말이 없는 것은 아버지와 나뿐이었다. 그렇게 한 해가 더 흘렀다. 네 번째 해에는 어머니와 아내 사이의 따끔함이 표면적으로 불거졌다. 지금 내 나이쯤이었던 어머니는 후사가 없는 것을 그냥 넘기지 못했다. 어머니는 시간이 지날수록 며느리의 시어머니에서 내 어머니로, 결국 당신 본인으로 입장을 바꾸어갔다. 그에 맞춰 아내와 나 사이의 다툼도 조금씩 늘어났다. 이 무렵부터는 나 역시 조급해졌다. 직장은 어느 정도 정체기였으며, 집안의 갈등은 이미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덩치를 키운 후였으니까.

다시 한 해가 흘렀다. 결혼한 지 다섯 번째 해는 소강기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다툼은 사라져 있었다. 이제는 부모님도 별다른 말이 없었고, 아내 역시 그 문제로 나와 다투지 않았다. 모두가 포기한 듯 그 일 자체를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코 안정된 상태는 아니었다. 아내는 그늘에 놓인 화분 같았다. 언제 시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불안정한 떨림을 내뿜으며 간신히 살아갈 뿐이었다. 그런 날들이 쌓이면서 나 역시 아이가 간절했다. 아이만 생긴다면, 지금 불꽃을 피우고 있는 모든 문제가 단번에 해결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아내와 함께 병원을 꾸준히 다녔고, 어머니와 아내 사이를 오가며 양쪽 등을 다독였다. 하지만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 병원에서는 부정적인 전망만 거듭 전해왔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는 더 이상 병원에 가지 않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희망을 내려놓았음을 알 수 있었다. 아이가 없는 삶도 나는 괜찮았다. 하지만 나만 괜찮았다. 퇴근하고 돌아왔을 때 거실에 멍하니 앉아있는 아내를 발견하는 일이 늘어났고, 자다 깨서 홀로 몰래 우는 뒷모습을 지켜보는 일이 잦아졌다.

그렇게 다시 팔 개월이 흘렀다. 해가 바뀌고 봄이 되기 얼마 전, 우리는 입양을 했다. 줄지어 누워있는 아이들 중에 오형인 아이를 찾았고, 정유한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유한을 데리고 돌아온 첫날, 낯선 집에서 우는 아이를 보며 아내는 울음을 터트렸다. 나 역시 그 곁에서 눈물을 흘렸다.

“앞으로는 잘 살자. 이제는 우리 울지 말자.”

이제 식구가 된 셋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오랫동안 그 말을 반복했다.

매거진의 이전글[중편] 싸리나무 담장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