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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령 얘기 하려다가 갑자기 내 얘기만 실컷 했네. 아까 하던 얘기 마저 해줘요.”
“무슨 얘기?”
“판에 올라갈 때 ‘왜?’를 먼저 염두에 둔다면서?”
“맞다. 그런 말 하고 있었지. 다 먹었다. 잘 먹었어요.”
“벌써 다 먹었어? 게 눈 감추듯 없어졌네. 밥 먹기 전인데, 괜찮겠어요?”
“고기 배는 따로 있으니까 문제없음. 음, 그럼 얘기를 마저 해서, 아까 어디까지 했더라.”
“판. 이 아저씨 몇 번째야.”
“맞다. 아무튼 그 말 그대로예요. 오늘 같은 날에 빗대어 보자면, 나는 일단 오늘 어떤 과자도 안 사요. 내가 지금 국산 과자 불매 중인 것과 상관없이, 나는 그냥 오늘은 어제의 내일이고, 내일의 어제라고만 생각해요.”
“그럼 누가 주면?”
“주는 건 당연히 받지. 알맹이가 뭐든 그게 정성으로 포장되어 있는데, 집어치우라고 손사래 칠 수는 없잖아.”
“그럼 어쩔 수 없이 받는 거예요?”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남이 주는 것은 내 개인적 가치관과 별개로 생각한다는 말이에요. 주는 것에 대해서 그냥 ‘감사합니다’ 하면서 고맙게 받아요. 정확히는 ‘오늘에 맞춰 이것을 내게 줘서 감사합니다’가 아니라 그냥 ‘이것을 내게 줘서 감사합니다’인 거죠. 그리고 나는 어떤 이유로 이걸 사지 않는지 간략하게 설명해요. 이해하든 못 하든, 납득만 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리고 다음에 다른 걸로 보답을 하죠.”
“어떤 거?”
“아무거나. 아무 날도 아닐 때 아이스커피 기프티콘을 보낸다던가, 아니면 대뜸 불러내서 밥을 산다던가. 그게 내 나름대로의 보답이에요.”
“아, 그런 식으로.”
“내 기억에 십 년 전 오늘은 사실 아무 날도 아니었어요. 내게는 그저 베프의 생일 전날이라 문자를 12시에 보낼까 내일 아침에 보낼까 고민하는 그런 날이었죠. 그러다 언제부턴가, 오늘이 막대과자 데이래요. 마치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역사와 유래가 있는 날처럼 말 그대로 어느 날 갑자기 딱! 하고 나타났어요.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이제 별짓을 다한다고 코웃음을 쳤던 걸로 기억해요. 사실 그 무렵쯤에 어떤 풍조가 만연했냐면 2월과 3월 14일을 위시해서 매월 14일마다 ‘무슨 데이’들이 만들어지고 있던 때였어요. 사람들도 각자 사연 있는 날에 어떠한 의미라도 욱여넣고 파트너 혹은 스스로가 그것을 충족하는 행위로 상대와의 관계가 보다 견고해지고 자신의 가치가 높아진다고 여겼죠. 그리고 그 과정과 결과를 주변에 자랑하고 타인의 행사와 비교하는 일로 스스로를 증명하고 싶어 하던 때였으니까. 하긴 그건 요즘도 그런가? SNS 등장으로 더 심해진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때는 무슨 자장면 먹는 날도 있었고, 반지나 장미꽃이나 인형을 주는 날도 있었고. 그런 식으로 점차 경쟁이 과열된다 싶더니 결국 온갖 종류의 기념일들이 비 맞은 죽순들처럼 마구잡이 생겨났어요. 아주 난리도 아니었죠. 그러더니 하다 하다 이제 14일이 아닌 다른 날까지 번지는구나. 왜? 가래떡이나 젓가락 회사들은 뭐하나. 이러다 구월 구일은 아이스크림 사 먹겠네 싶었어요.”
“아니 언제 적 사람이야, 이 아저씨. 나랑 몇 살 차이도 안 나면서.”
“지금이야 차이가 없어도, 그 무렵 고딩과 초딩 차이면 크지. 요즘 같지 않으니까.”
“그렇게 들으니 격세지감 확 난다.”
“아무튼 그땐 그랬어요. 근데 다른 붐업처럼 시간 지나면 금방 가라앉겠지 싶었던 이게, 아니 갈수록 진짜 장난이 아니게 되는 거야. 마치 1111년 11월 11일부터 있었던 날처럼 해가 지날수록 사람들이 이 날에 열광을 하는 거야. 말 그대로 유행이었죠. 이러다 크리스마스처럼 ‘막대과자 데이 이브’라도 생기는 줄 알았다니까. 안 그래도 한글날이 평일로 끌려 들어가서 슬퍼 죽겠는데, 크리스마스나 핼러윈도 모자라서 이상한 날까지 날뛰는 거야. 그때 나는 그런 행사에 대해서 대부분 염세적인 태도로 대했어요. 사실 나는 죄다 싫었거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어렸던 탓에 겉멋도 있었고, 그전에 기념일이니 무슨 날이니 전쟁 같이 챙기는 일에 너무 시달렸던 것도 있고. 그래서 이 문제로 그 무렵 여자 친구들과도 여럿 다퉜어요.”
“그 무렵… 여럿?”
“중복 아닙니다. 순차적이에요.”
“…아무튼.”
“그래, 아무튼. 그래도 그때 나는 고등학생이었고 이것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가졌을 때가 아니기에 그냥 주면 받고 안 주기 뭐해서 적당히 눈치껏 사주고 그랬어요. 그러면서 생각을 했지. 어쩌다가 이런 날이 생겼을까. 첫 번째는 제과 업체에서 시류에 맞춰 정말 기가 막히게 기획하고 홍보했구나. 그리고 우리나라 특유의 쏠림 현상 정말 대단하네. 그것까지 예측하고 분위기를 몰아간 영업 전략에 승리로구나! 그냥 그렇게 결론을 내렸지. 그리고 그 열광적이었던 첫 해가 지나가고 마치 예전부터 그래 왔던 것처럼 매년 연례행사로 굳어가는 것을 보면서 어느 순간, 겁이 덜컥 나는 거야. 우리가 휩쓸리는 사회적인 분위기와 흐름, 대세라고도 하고 시류라고도 하고 혹은 팬덤이라고도 하죠. 그게 참 우스우면서도 동시에 무섭다고 느꼈어요. 아니 무슨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민초의 덕은 풀이요’도 아니고 말이지. 고작 제과업체 하나가 몰아간 바람에 없던 것이 만들어지고, 허상이 실재가 되고, 사람들이 이리도 휩쓸리며 난리를 치는데 그 바람을 부는 것이 일개 업체가 아닌 더 큰 공룡이고 나아가 국가가 되고 전 세계가 되면? 그에 우리는 어떤 소용돌이 속에서 가라앉는지도 모른 채 익사하는 중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소름이 끼치는 거야. 고작 과자 하나 팔아먹는 날을 두고 생각이 너무 멀리 간 것도 있지. 근데 정말 소수의 위정자가 다수인 군중을 조종하는 가장 쉽고 효과적인 방법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어요. 어쩌면 전 세계 모든 위정자들과 고위 관계자들이 입을 맞추면 전혀 없던 것도 생기고 있는 것이 없어지는 건 일도 아니겠더라고. 막말로 지구가 동그랗고 달이 지구 주위를 돈다는 것도 뻥일 수도 있겠다 했어요. 물론 비약적인 비유지만, 사실 나도 당신도 주변 누구도 실제 지구 밖에 나가본 적 없으니까. ‘절대 그럴 수 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주변엔 없지. 왜냐면 ‘왜 그럴 수 없는데?’라는 질문에 ‘그들이 그리 말했고 저들도 그랬으니까…’라는 말 이외에 할 수 없을 테니까.”
“우와. 도령 말대로 진짜 멀리 갔다.”
“그렇죠?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나는 ‘지구평면론자’도 아니고 천동설을 믿는 15세기 사람도 아니고 이건 말 그대로 비유일 뿐이에요. 중요한 것은 그때 내가 이제껏 허상에 휘둘리면서 살고 있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는 거예요. 어느 정도냐면 실재하는 것조차 허상이라고 여겨질 만큼.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나? 내 눈에 보이는 이 사람들은 진짜 사람인가? 내가 정말 살고 있는 건가? 뭐, 쉽게 공감받을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그때부터 나는 그런 모든 것에서 한발 물러났던 것 같아요. 아, 갑자기 다른 소리지만 솔직하게 답해줘요. 혹시 지금 나 약간 또라이 같아요?”
“아니. 전혀요.”
“다행이네. 내가 말을 하다 너무 내 안으로 들어왔나 싶어서.”
“전혀 아니에요. 그런 생각하지 마요.”
“그럼 말을 다시 이어서, 아무튼 그때부터 한 발 물러났어요. 어떤 일이 있으면 염세적인 시선으로 일단 의심부터 하고 봤죠. 물론 ‘그것이 비약일 수도 있다’는 전제를 깔아 두고. 그렇지 않으면 내 의식은 너무 많은 것을 의심하게 되니까. 그럼 풀리지 않는 의심은 비관이 되고, 다시 근거 없는 비난으로 번져서, 결국 모든 것을 부정하게만 될 테니까. 그러다 보니 이런 식으로 어떤 ‘바람’이 불면 내가 가장 먼저 하는 것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는 낮게 바라보는 거예요. ‘이게 도대체 뭘까?’라고, ‘이게 왜 생겼을까?’라고, ‘이 현상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라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것으로 결국 누가 득을 보게 될까?’까지. 보통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져서 그것을 헤쳐 보면, 그 일로 이득을 보는 누군가의 의도인 경우가 많으니까. 직접 꾸미지 않았더라도 방조하거나 부추기기라도 하죠. 뭐, 일단 그런 것들을 따져보게 되었어요. 그러다 대충 의문이 풀렸으면 나한테 맞춰 보는 거고, 내가 알 수 없는 것이다 싶으면 계속 한 발 물러난 상태로 이게 어디로 흘러가는지 끝까지 지켜보는 편이에요. 그러는 도중은 거기에 안 들어가려고 하고.”
“그럼? 이번 경우도 그런 거예요?”
“그렇지.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나는 이 날이 싫어요. 어떻게 생겨났고 어쩌다 이렇게까지 퍼진 건지. 사람들이 왜 열광하고 이것으로 누가 이익을 보는지. 이것을 누가 어떻게 이용할 수 있고 그 영향이 어느 정도일지. 그 정도는 대충 정리할 수가 있었어요. 그리고 사실 이런 행사의 취지가 시류에 큰 악영향은 없다고 생각해요. 단지 어떤 문화나 개념을 형성하는데 일조하는 정도지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활용도로 보자면….”
“활용도는 뭐야?”
“이런 날이나 분위기를 이것과 전혀 상관없는 다른 어딘가 써먹는 거 있잖아.”
“그런 게 있어?”
“그렇게 치면 연예인 스캔들이랑 정치 이슈랑 무슨 상관이겠어?”
“아. 그런 말이구나.”
“그렇게 쳐도 사업적 이익을 제외하고는 다른 어디에 이용하기도 딱히 어렵고. 차라리 앞서 말한 연예인 스캔들 한두 가지가 낫지. 그래서 나는 이것을 적극적으로 타파해야 하거나 배척해야 한다고 주창하는 편은 아니에요. 좋은 사람들은 알아서 즐기면 돼. 그것은 그들의 자유니까. 하지만 앞에서 말했던 저런 모든 것들이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물론 아까 당신이 말했듯이 순기능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그 순기능보다 부작용이 더 많다고 판단되는 거야.”
“무슨 부작용?”
“아까 이것이 어떤 문화나 개념 형성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조한다고 말했죠?”
“네.”
“나는 그 ‘특정 문화와 개념 의식’을 굉장히 싫어하거든. 그래서 그것에 일조하는 이 날도 싫은 거야.”
“아. 대충 뭔지 알겠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사실 이게 가장 큰 이유인데…. 이건 그냥 내 개인적인 생각이니까 너무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지금까지 말한 것들 전부 도령 사견인 거 아니까 걱정 말아요.”
“나는 오늘이… 뭐랄까, 소수가 가진 약점과 취약점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빠.”
“이건 또 뭔 말이래?”
“그러니까, ‘우리는 당신들이 휘두르는 만큼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잘 휘둘려요! 그러니 다른 것으로도 맘껏 휘둘러주세요!’라고 광고하는 것 같다고.”
“어… 이거… 무슨 말인지 알겠고 공감도 되지만 쉽게 오해 살 수 있는 말이겠네. 이 말 혹시 다른 곳에서 하다가 싸움 난 적 없어요?”
“왜 없었겠어.”
“좀 꼬였다는 말도 많이 들었겠다.”
“그런 말도 많이 들었지.”
“우리 도령 속상했겠네. 그런 게 아닌데.”
“내가 자초한 일이지. 옛날에 나는 자리 구분 못하고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사는 사람이어서 이것뿐만 아니라 각종 말들로 트러블이 많았었지. 아무리 ‘니들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고!’라고, 그리고 ‘내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렇게 생각 안 하는 너희를 무시하거나 자신의 기준으로 이 날을 즐기는 사람을 비난하는 게 아니야!’라고, ‘누구 생각이 틀린 게 아니라 그냥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것뿐이야!’라고 외쳐봤자, 이미 화난 사람들 귀에는 안 들리지.”
“그렇겠지. 도령이 그걸 즐기는 다수를 싸잡아 무시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으니까. 보니까 옛날에는 은근히 말하는 요령이 없었나 봐.”
“묘하게 즐거워 보이는데. 내 착각이죠?”
“아니, 제대로 봤어요. 이런 점은 의외라 재밌네요.”
“뭐… 맞는 말이니까. 그래서 나이 좀 먹고 나서는 내 이야기를 듣고 ‘나는 나, 너는 너’를 구분할 수 있거나, 최소한 오해하기 전에 한 번쯤 되물어볼 사람이 아니면 이런 말을 잘 안 하게 되었어요. 앞서 말했듯이 그들이 그것을 즐기는 것은 상관 안 해요. 내가 관여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다만 내가 그걸 즐기지 않는 이유가 어떤 가치관에 의거한 건지 말했는데 그게 전달법에 의해서 ‘니들이 멍청한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구나!’라는 말처럼 되어버리더라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 도령의 뜻도 알겠고. 하지만 이건 그들이 오해했다고 무작정 뭐라 할 수도 없는 문제 같은데?”
“내 생각도 그래요. 내 표현법이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해. 근데 나는 표현법을 여럿 가진 사람이 아니라서. 이건 ‘시비’의 문제가 아니라 ‘가부’의 문제니까. 이 날을 즐기는 것은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니잖아. 그럴 건지 그러지 않을 건지의 문제니까. 각자의 기준에 따라서 즐기거나 싫어하거나 하면 되잖아요. 가부의 문제에서는 어떤 가치관이 다른 상대에게 영향을 줄 수 없고, 어떤 기준이 다른 기준을 공격하는 무기도 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너는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해. 그리고 땡끝. 그래서 거리낌 없이 생각을 말했는데 듣는 입장에서는 그렇게 들리지 않겠지. 내가 간접적으로 자신들을 욕한다고 생각했을 거야.”
“아무튼, 나는 오해 안 했어요.”
“다행이네.”
“항상 느끼는 거지만 복잡하게 사네.”
“스스로를 좀 곤궁하게 만드는 성향이 있어요.”
“내려요. 도령 얘기 듣다 보니 30분 뚝딱이네.”
“오랜만에 왔네. 어디로 가지?”
“아니, 내 동네냐고. 도령이 알겠지.”
“고기 먹을 거죠?”
“갈매기에 소주.”
“갈매기? 소고기는 어디 가고?”
“도령 이야기 듣다 보니 마음이 바뀌었어. 오늘은 갈매기.”
“내 이야기 어디에 돼지를 부르는 주문이 있었던 거야.”
“얻어먹는 사람 마음이에요. 난 지금 갈매기가 먹고 싶고, 더 이상의 이견은 받지 않겠어.”
“알았아요. 그럼 거기로 갑시다. 거기 오소리감투 진짜 맛있어.”
“뭐예요, 그게? 갈매기는 어디 가고?”
“갈매기랑 같이 나오는 거 있어. 이상하게 생겼는데 맛난 거.”
“껍데기 같이?”
“아니야. 그에 비하면 껍데기는 앙증맞지.”
“뭐야, 그럼 나 안 먹을래.”
“맛있어. 그거 다 먹으면 과일빙수 사줄게.”
“…치사하네.”
“다 먹고 봐. 치사가 감사로 바뀔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