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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백 중 일

[그데담 039] 왜?라고 먼저 물어보면요.

by 이한얼

[3/3]





“알고 하는 거랑 모르고 하는 게 얼마나 다르다고 생각해요?”


“뭘 알고 있는데요?”


“아니, 내가 지금 뭘 알고 있다는 게 아니라, 어떤 행동을 할 때.”


“그러니까 그 행동을 할 때 ‘알고 하는 것’이 뭘 얼마만큼 알고 있는 거냐고.”


“…글쎄. 뭘 얼마만큼 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내가 보기엔 그 두 행동의 차이가 딱 그 정도인 것 같은데. 뭘 얼마만큼 인지 모르겠는 정도.”


“…괜히 물어봤다. 더 헷갈리네.”


“그렇지? 너무 내 식대로 말했어. ...아까 그런 말을 했죠? 특정일을 이런저런 용도로 활용한다고?”


“응.”


“그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당신처럼 특정일을 그런 식으로 활용할까?”


“글쎄, 잘은 몰라도 대부분 그렇지 않을까?”


“맞아요. 대부분 그래. 크리스마스를 단지 어떤 선구자의 탄신일로만 여기는 사람은 드물듯이 오늘 같은 날도 대부분 당신처럼 여러 가지 생각을 가지고 여러 가지를 나누면서 보냈을 거야. 그렇죠?”


“그렇겠죠.”


“그럼 그 사람들에게 ‘오늘은 당신에게 어떤 날이었어요?’라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할까? ‘이 기념일이 당신에게 무슨 의미예요?’라고 물어보면? 대부분이 자신의 생각과 의도를 아까 당신처럼 그 자리에서 명확하게 정리해서 그만큼 자세하게 말할 수 있을까?”


“글쎄.”


“내 경험 상 그런 사람은 많지 않았어. 그러니 그런 거지. 당신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고 다들 비슷한 삶을 살아. 비슷한 환경에서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고, 비슷한 의도로 비슷한 행동을 하면서 살지. 하지만 평소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본 사람과 그러지 않은 사람은 같은 질문에 대한 결과값이 달라. 스스로의 생각, 의도, 행동에 대해 미리 여러 번 자문하고 고민하고 정리해 놓을수록 상대의 질문에 정확히 조응하는 답을 내놓는 거야. 물론 질문부터 작은 범위를 콕 집어 물어보면 비슷한 대답이 나오겠지. 예를 들어 ‘오늘 과자를 주는 날이었는데, 그 과자를 주고받는 과정으로 인해 인간관계에서 어떤 상호작용이 일어나고, 당신이 그 과자를 주면서 했던 가정과 의도로 발생되는 기대치는 무엇이 있을까요?’라는 식으로.”


“길다, 길어.”


“길지. 그래도 그렇게 물으면 아마 당신과 비슷한 생각으로 비슷한 행동을 했던 사람은 아까 당신이 했던 대답과 비슷한 답을 내놓을 거야. 반면 당신은 ‘오늘은 어떤 날이에요?’라는 짧고 범위가 넓은 질문에도 아까 같은 답을 내놓을 수 있고. 알고 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것은 그만큼의 차이예요. 전자는 짧은 질문에도 길고 명확한 답을 내놓을 수 있고, 후자는 길고 명확한 답을 내려면 질문 역시 길고 협소해져야해. 그래서 나는 이것에 대한 기준을 당신과 달리 잡아요.”


“어떻게?”


“나는 이것에 대한 경계를 알고 모르고의 ‘인지’를 나누지 않고, 행위에 대한 ‘정립’으로 나누어요. 그러니 ‘알고 하는 거랑 모르고 하는 거’를 내 식대로 바꾸면 ‘정리한 행위와 정리하지 않고 하는 행위는 얼마나 달라요?’야. 다른 단어일 뿐 당신과 같은 뜻이야. 그리고 내 대답은 아까 말했던 대로예요. 물어봤을 때 대답의 명확함이 달라진다.”


“그렇게 들으니 생각보다 큰 차이는 아닌 것 같네.”


“1회로 따지면 그렇지. 하지만 그것이 계속 쌓이다 보면 차이가 생겨요. 사람에게는 매일 수백수천의 질문이 주어지고 우리는 매 순간 그 질문에 답을 하며 살아야 하는데, 우리가 언제나 답을 하기 최적의 상태로만 살 수는 없으니까. 내가 여유가 있거나 질문이 어렵지 않으면 별 차이 없을 거예요. 근데 예상 못한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혹은 내가 평소처럼 정상적인 판단을 하기 어려울 때, 혹은 아직 내 수준에 조금 어려운 질문일 때,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이 항상 생기잖아. 그럴 때 당신 표현대로라면 알고 하는 이는, 내 표현대로면 평소 자신의 생각과 행동 원리에 대해 미리 정립해놓은 이는 그런 비정상적 외부 요건에 영향을 덜 받아요. 내가 어떻게 하려고 했는지 알고, 근데 실제로는 어떻게 했는지도 알고, 이상과 현실 사이에 얼마의 간격이 있는지도 알고, 그래서 결국 무엇 때문에 일이 이렇게 틀어졌는지도 금세 파악할 수 있으니까. 당연하지. 지금껏 내가 어찌 해왔는지에 대한 ‘정립 기록’을 이전부터 가지고 있었는데 어떻게 몰라. 근데 ‘모르고 하는 거’는 그런 게 없지. 평소 마음에서 행동이라는 값을 도출해냈을 때 어떻게 이런 값이 나오게 됐는지 검산이라는 정립을 안 했잖아. 그럼 나중에 값이 틀렸음을 깨달았을 때 식이랑 풀이를 어떻게 찾을 거야. 그걸 달리 말하면 ‘물어봤을 때 대답의 명확함이 달라진다’예요. 누군가 중간 검산을 요구했을 때 풀이 기록을 바로 내놓을 수 있는지 없는지.”


“그러니까 알고 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것은 평소에는 별 차이가 없다는 말이죠?”


“맞아요. 뭔가 문제가 생기기 전까지는 큰 차이가 없어요. 둘을 구별하기 힘들어서 그걸 구분하는 방법이 따로 있을 정도니.”


“그 구분법은 물어보면 대답의 자세함? 그런 것으로 티가 나고?”


“정확히는 대답의 명확성. 두루뭉술하게 자신 없는 대답이 아니라, 상대 질문의 요지를 파악한 후에 내 안에서 해당구역을 정확히 찾아서 그것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꺼낼 수 있는지. 논술 면접이라 생각하면 이해가 쉬워요.”


“그 정도면 별 차이가 없는 게 아니잖아요?”


“평소에는 잘 안 드러나지. 우리가 일상을 논술 면접하듯 사는 건 아니니까.”


“그러다 뭔가 문제가 생겼을 때야 차이가 드러나고?”


“그렇죠. 사람을 혼란하게 만드는 문제들은 대부분 원인을 찾는 길목에서 ‘왜?’를 건너야 하는 것들이니까. 나는 왜 그랬을까? 걔는 왜 그럴까? 저것은 왜 저럴까? 등으로. 그 순간, 그것에 대한 스스로의 답을 찾든 비록 찾지 못했든, 알든 모르든, 문제가 일어나기 전인 평소에 그 ‘왜?’에 대한 정립을 해봤다는 자체만으로 다양한 결론에 길을 댈 수 있거든.”


“찾았다면 모르겠는데 못 찾았을 때는 왜?”


“아까 당신이 말한 ‘그데담’ 첫글에도 적어놨지만, 사람은 모른 채로 있으면 불편함을 느끼게 설계되어 있어. 인간은 미지를 같은 무게의 공포로 치환하여 받아들이는 생물이니까. 그래서 질문 자체를 인지하지 못했을 때라면 모를까, 일단 질문을 품었다면 자신의 심리적 안위를 위해서라도 무조건 그에 대한 답이 있어야 해. 그게 맞는 답이든 틀린 답이든 일단 있어야 되는 거야. 거기서 ‘이게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이렇게 않을까?’라고 임시의 답이라도 정립한 이와, ‘아이고 모르겠다 주문’으로 답을 가장한 껍데기를 놔둔 이는 양쪽 다 자신이 만든 답으로 인해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는 있어. 대신 문제가 생겼을 때 임시답을 가진 이와 껍데기를 가진 이의 대처가 다르겠지.”


“만약에 임시의 답이 틀린 경우라 그 오답 때문에 일이 더 꼬일 경우도 있지 않아요? 껍데기만 가진 사람은 늦었지만 처음부터 답을 찾아갈 수 있는데 오답을 든 사람은 오답을 들고 한참을 헤매다가 틀렸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게 되잖아.”


“그럴 수도 있지. 나는 오히려 반대라고 생각하지만.”


“어떻게?”


“나는 이런 문제를 ‘소거법의 문제’라고 불러요. 어떤 문제가 생겼어. 원인을 찾는 길목에 ‘왜?’가 나타났어. 이 문제는 그 ‘왜?’에 대한 답이 없기에 벌어진 문제예요. 그럼 이 문제는 왜 생겼을까? 몇 가지 경우의 수 중에 아닌 것부터 지운 후에 옳은 답을 유추해야 해. 그것도 되도록 빨리. 그때 설령 오답일지라도 임시의 답을 정립해놓은 이는 하나씩 맞춰보며 오답일 가능성을 줄여나가면 돼. 반면 정립 대신 껍데기만 들고 있던 이는 다른 일부터 해야 하거든.”


“무슨 일?”


“여기가 좀 웃긴 부분인데, 임시의 답조차 가지고 있지 않던 이가 ‘왜?’의 답을 찾기 위해 오답 맞추기를 하려면, ‘애당초 나는 왜 임시의 답조차 없었을까?’부터 시작해야 하거든.”


“그게 뭐야. ㅋㅋ”


“ㅋㅋ 해야 할 일이 많은 건 오답이라도 들고 있는 쪽이 아니야. 그 오답조차 가지고 있던 쪽에서 해야 할 일이 더 있는 거야. ‘이 안에 답이 있겠지?’라며 상자를 열었는데 텅 비어있어. 당연하지. 그건 껍데기니까. 그럼 ‘왜 이게 비어있지?’ 당황하다가, ‘그럼 답이 어디 있지?’ 혼란스러워하다가, ‘나는 왜 답을 미리 찾지 않았지?’ 뒤늦게 괴로워하다가 그러고 나서야 문제에 대한 검산을 시작하는 거야. 반면 평소 임시의 답을 가졌던 사람은 익숙한 만큼 과정이 빨라. 여러 가정 중에 임시 답의 개수만큼 재빨리 맞춰보고 소거할 수 있거든. 소거법의 문제는 시간과의 싸움이에요. 문제가 생기면 당황하고, 해결하려고 시간을 끄는 만큼 문제 해결은 점점 어려워져. 어느 정도 길어지다 보면 결국 해결을 포기하는 일도 생기지. 문제가 터진 후에야 여러 가정들을 떠올리고 경우의 수와 하나씩 맞추며 귀납적으로 검증하는 사람과, 이미 가진 임시의 답으로 몇 개를 연역적으로 소거한 후에 남은 경우의 수만 검증하는 사람은 문제 해결 속도가 달라. 그러니 평소에는 차이가 없는데 문제가 터졌을 때는 삼중으로 큰 차이가 생기는 거야. 첫째는 나는 왜 평소에 미리 검산을 안 했을까 괴로워해야 하고, 둘째는 검산 과정이 익숙치 않으니까 느리고, 셋째는 처음부터 일일이 다 맞춰봐야 해. 보통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쯤에서 지쳐서 이 문제를 당장 해결하지 않고 일단 미루둬. 그중 어떤 이들은 문제 해결을 아예 포기하기도 하고. 아마 살면서 종종 그런 이들을 봤을 거야. 모든 문제를 뒤로 미루다가 너무 많은 문제에 둘러싸여서 어느 순간부터는 해결하기를 아예 포기하고 사는 사람들. 스스로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너무 벅차다 느껴서 시도할 엄두를 못 내고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모면만 하면서 위태롭게 살고 있는 사람들.


“듣는 순간 떠오르는 사람이 내 주변에도 몇 있네요.”


“그래서 어떤 사태의 원인이 될 법한 경우의 수가 네 개쯤인 문제가 생겼다면 그들은 그 네 가지 경우의 수에 둘러싸여 헤매고 있을 거야. 반면 당신은 이미 가진 오답으로 두 개 정도 쳐내고 남은 두 개만 살피면 돼. 평소 정립해놓은 임시의 답이 충분하다면 단 하나의 경우만 남았을 수도 있고. 그럼 그게 원인이겠지.”


“…이건 나중에 적어놓은 거 다시 봐야겠다.”


“정리하면 나는 어떤 행동을 왜, 무슨 생각으로 하게 되었는지 평소에 정리해보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그 정리가 정답이든 오답이든. ‘왜?’와 관련된 문제는 원인을 찾는 과정이고, 빨리 찾으려면 경우의 수를 지우는 것이 핵심이니까. 그럴 때 평소에 정립해둔 답이 훌륭한 지우개가 되어줄 거예요. 그래서 나는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몰랐던 행위에 대해서 뒤늦게라도 ‘왜?’라고 생각해보는 것을 권장해요. 이건… 옳고 그름이 없는 일종의 삶의 방식 중 하나인데, 일단 나는 그래요. 당시에는 귀찮고 번거로워도 나중에는 결국 이게 편해. 평소에는 좀 힘들어도 문제가 생겼을 땐 말할 수 없이 든든해. 평소에 머리를 가만두지 않고 이곳저곳에 계속 ‘왜?’를 붙이고 미리 정립을 해두면 어느 날 예상 못한 문제가 생겼을 때 잠시 굳는 거야 어쩔 수 없다 해도 당황하는 마음도 시간도 많이 줄어들어. 이건 마치… 독립문역을 내비에 찍고 바로 출발하는 것과, 출발하기 전에 전체 노선과 교통 상황을 미리 한 번 훑어보는 것의 차이와 비슷해요. 암사에서 호기롭게 진입한 올림픽도로가 생각보다 훨씬 막히는 상황이어도 나는 그리 놀라지 않을 거야. 천호대교로 빠질까 말까 고민하는 시간도 확실히 줄어들겠지. 아무것도 모르고 출발했으면 왜 여기가 막힐까, 사고 났나, 기다리면 뚫릴까 계속 고민하고 있었을 거야. 근데 출발 전 확인한 바로는 잠실부터 영동까지 막힌다고 했어. 그럼 이건 사고가 나서 잠깐 밀리는 것이 아니라 교통 정체가 여기까지 밀려온 거지. 그럼 길게 고민할 필요 없잖아. 한남대교를 건너려던 오답을 지우고, 올림픽대로가 막히는 것을 본 순간 잠실대교로 건너려던 오답도 버리고, 천호대교로 빠져서 강변북로와 북부간선도로 중에 결정하면 돼. 그렇게 천호대교를 건너다 강변북로마저 브레이크 등을 늘어서 있으면 그 오답마저 지우고 북부간선대로를 타는 거야. 그럼 처음 고민하느라 올림픽대로 위에서 잠실까지도 못 가고 아직 질금거릴 시간에, 나는 이미 하계IC를 지나고 있겠지.”


“......음. 서울 도로로 예를 드니 오히려 더 헷갈리는데.”


“미안해요. 요령 없는 사람이라, 어떻게 달리 말 못 하겠다.”


“괜찮아요, 어차피 어딘가에 적혀있을 테니까. 어쨌든 결론은 도령은 무슨 일을 해도 되도록 알고 하는 것이 좋다는 뜻이죠?”


“그렇죠. 하기 전이든 이미 하고 난 후든. 사람이 스스로의 행동에 전이든 후든 정리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정립하는 것은 너무 과하지만 않으면 늘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되도록이면 알고 행동하고, 모르고 했다면 그 뒤라도 알았으면 해요.”


“그리고 그건 모르고 하는 것과는 많은 격차가 있고?”


“나중에 보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정도로.”


“사실 별생각 없이, 아니 생각 없이는 아니고 그리 무겁지 않게 물어봤는데,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어.”


“그건 미안하네. 사람이 너무 진지해서.”


“아니에요. 그런 사람인 거 이미 알고 있었고. 이런 게 도령이 가진 희소성이잖아. 가벼운 것보다 훨씬 나아.”


“그리고 사실 이 주제 자체가 굉장히 어려운 개념이에요. 게다가 당신 질문도 되게 개똥에 박힌 반쪽짜리 콩 같았고.”


“아, 표현을 해도. 밥 먹고 있는데.”


“사장님! 여기 불 빼주시고 공기 밥이랑 된장찌개 주세요!”


“혼자 다 먹어. 난 안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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