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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싸리나무 담장 4

4. 정서는 시간을 같은 기억으로 남긴다.

by 이한얼


유리 / 오늘


그건 일어난 직후의 일이었다. 아직 동도 전부 트기 전인 새벽에 나는 창문을 통해 누군가를 발견했다. 그저께 집 앞에서 봤던 그 여자였다. 얇은 카디건을 걸친 여자는 옆집 골목에서 튀어나와 뒷마당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여자의 걸음이 멈춘 곳은 오빠가 통학용으로 타고 다니는 푸른색 스쿠터 곁이었다. 여자는 백미러 사이로 무엇인가를 꽂았다. 그리고 올 때처럼 두리번거리며 슬며시 골목으로 사라졌다.

숨죽여 지켜보던 나는 여자가 사라진 후에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푸르스름한 복도로 나서기 전에 맞은편 문부터 확인했다. 모두 닫혀있었다. 내려간 일층은 화장실에만 불이 켜져 있었다. 뒷마당으로 나가는 문을 열고 스쿠터로 다가갔다. 네모난 쪽지가 백미러 틈새에 억척스럽게 매달려 있었다. 적혀있는 주소를 보는 순간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오빠의 얼굴이 스쳤다. 식탁 앞에서 등지고 서있던 모습도 덩달아 떠올랐다. 놔둘지 가져갈지 망설이던 손은 결국 재빨리 쪽지를 챙겼다. 누가 지켜보는 것 같아 주변을 살피며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뒷마당 문을 통해 거실로 들어섰을 때 계단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나무 바닥에 맨발이 닿았다 떨어지는 소리였다. 이 시기에 맨발로 집안을 다닐 사람은 오빠밖에 없었다. 나는 그늘진 벽으로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잠옷 차림으로 등장한 오빠는 나를 발견하지 못했는지 그대로 앞마당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거실로 가로질러 현관으로 향한 나는, 오빠가 대문 밖으로 나간 것까지 확인한 후에야 조심스럽게 이층으로 올라갔다.

나올 때까지 푸르던 복도는 이미 노란 볕에 물들어있었다. 언니 방은 여전히 닫혀있지만 오빠 방은 급하게 나간 듯 문이 조금 열려있었다. 나는 쪽지를 든 채 주인 없는 방 앞에 섰다. 갈팡질팡한 마음은 확신이 없었다. 언제라도 오빠가 올라올 것 같아 여러 번 계단 쪽을 곁눈질했다. 나는 결국 쪽지를 주머니에 챙기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유한 / 오늘


새벽, 창밖은 조금씩 밝아오는 하늘로 푸르게 물들고 있었다. 저 멀리서부터 가로등이 꺼지며 노란색이 사라져 갔다. 한집씩 하얗게 잠에서 깨기 시작했다. 하루에 단 두 번만 푸르고 노랗고 하얀빛이 공존하는 모습. 나는 옷을 갈아입는 동네를 20분째 지켜보고 있었다.

“유리에겐 말하지 않을 생각이다.”

어제저녁 할머니와 어머니가 계신 자리에서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다.

“본 건 유빈이가 아니라 유리잖아요.”

내 말에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도, 할머니마저 같은 표정이었다.

“너에 대한 일만이 아니잖니.”

어머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가 입양되었다는 사실과 자신이 입양되었다는 사실은 전혀 다른 문제일 것이다. 벌써 열일곱이지만 아직 열일곱이기도 했다.

“그럼 유빈이는요?”

몇 달 전까지 미성년이었던 유빈도 오빠와 동생이 모두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어찌 받아들일지 자신이 없었다.

“다 말할 거다.”

아버지의 말에 나는 “알겠어요”라고 말을 맺었다. 두 분이 지금껏 힘겹게 쌓아 올린 일이었다. 되도록 존중하고 싶었고, 또 그래야 했다. 내 얼굴에 명확한 납득이 떠오르자 세분 역시 서로 시선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정 내 사정은 반드시 두 명 이상 알고 있어야 한다. 성인이 된 당사자의 일을 당사자 없이 결정하지 않는다. 이 두 가지 규칙으로 인해 자리가 만들어졌다. 나에 대한 일을 두 명 이상 알고 있고, 성인이 된 유빈의 일을 유빈이 없이 결정하지 않기 위해 모두 밝히기로 했다. 아마 이번 일이 없었으면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차근차근 말할 예정이었다. 이런 식으로 쫓기듯 말하고 싶지 않았고 그럴 만한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유리에 대한 얼버무림까지 필요했다. 둘러댄다고 납득할지 알 수 없었다. 그 생각에 사뭇 속이 쓰려왔다.

“어쨌든 생각이 정리되면 말해주렴. 그때 줄 게 있다.”

아버지의 말에 그게 뭐냐고 되물을 수 없었다. 말하는 아버지 표정도 마땅치 않아 보였으니까. 나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안색을 보며 그저 알겠다고만 대답했다.

어제의 기억을 되짚고 있는데 끌어당기듯이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대문 너머 아직 꺼지지 않는 노란 조명 아래 누군가가 있었다. 그 여자였다. 이 시간에 왜? 뜻밖인 놀람보다 의아함이 먼저 들었다. 얇은 카디건을 입은 여자는 행인처럼 집 앞을 지나쳤다가 잠시 후 다시 돌아와 대문 앞을 서성거렸다. 때론 안을 들여다보는 듯 고개를 빼고 이곳저곳을 살피기도 했다. 여자의 움직임에 맞춰 대문 위 센서등이 들어왔다 나가길 반복했다. 불을 켜지 않아서인지 이층 창안까지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어둠 속에 숨어 여자를 지켜봤다. 어쩌지. 나갈까 말까. 그때 여자가 품속에서 하얀 무엇인가를 꺼냈다. 여자가 대문에 바짝 붙었다 떨어졌을 때는 더 이상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여자는 그대로 자리를 떴고 텅 빈 대문을 비추던 센서등도 곧 꺼졌다.

여자가 내리막 아래까지 완전히 사라졌을 시간에 나는 집 앞으로 나갔다. 누군가 있는지 좌우를 먼저 훑고 대문 앞을 살폈다. 아무것도 없었다. 문득 대문에 달린 우체통에 손을 넣어봤다. 좌우로 휘저은 손가락 틈으로 작은 종이가 서늘하게 닿았다. 쪽지 안에는 짧은 주소 한 줄뿐이었다. 문득 굳은 표정의 아버지가 떠올랐다. 쓴 미소를 짓는 어머니와 할머니의 얼굴이, 놀란 유리의 몸짓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유빈의 눈빛까지 연달아 스쳐갔다. 헛웃음이 나왔다. 이제 와서 무슨. 나는 쪽지를 거칠게 쥐어뜯었다. 갈기갈기 찢은 미련 조각을 대문 옆에 내어둔 쓰레기봉투에 쑤셔 넣으려던 찰나, 원치 않던 그 여자의 얼굴까지 떠올랐다. 창백하고 퀭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눈빛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고 뇌리에 오래도록 맴돌았다. 구겨진 종잇조각에 시선이 머물렀다. 한 번 더 여자가 사라진 방향을 살핀 나는 감정 조각들을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유한 / 오 년 전


오 년 전, 뒷문을 통해 들어온 집은 텅 비어있었다. 거실에 놓인 찻잔 세 개에 김이 나고 있었으나 사람은 없었다. 그때 밖에서 고성이 울렸다. 다급히 다가간 창가에서 앞마당과 열린 대문 너머까지 훤히 보였다. 아버지께서 그리 화내시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어머니 곁에 선 할머니의 경멸 어린 표정도 그랬다. 거기에 낀 유리는 놀라서 울고 난리도 아니었다. 온통 처음인 낯선 상황이었지만 본능적으로 내가 끼면 안 되는 일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유리를 품에 안은 할머니가 마당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가방을 챙겨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골목에 비켜서 본 대문은 여전히 세 사람이었다. 입을 다무신 아버지 대신 어머니가 처음 보는 여자와 얘기 중이었다. 날카롭게 날이 선 어머니의 표정과 언뜻 들리는 단어들로 문득 깨달았다. 저 여자가 유리의 생모구나. 내내 뒷모습만 보이던 여자는 곧 사라졌다. 내려가던 등을 지켜보던 부모님도 문을 닫고 들어갔다. 뜨겁던 대문 앞이 텅 비고 나니 그제야 화가 나기 시작했다. 이제껏 뭐하다가 뒤늦게 나타나서 어쩌자는 건지. 치기 어린 나이였기에 무작정 내리막을 쫓아 내려갔다. 부모님께서 어련히 잘 전했겠지만, 얼굴을 마주 보고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으름장이라도 놔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한참 앞서 걸어가던 여자는 버스를 탔다. 나도 택시를 잡아 버스 꽁무니를 쫓아갔다.

여자가 내린 곳은 어느 식당 앞이었다. 아까의 송구한 표정은 어디 가고, 밝게 웃는 얼굴로 주인으로 보이는 내외와 대화 중이었다. 나는 입구 근처에서 서성이며 내부를 살폈다. 선뜻 들어가기 어려웠다. 대화만 끝나면 바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아니면 나오는 걸음을 잡아챌 작정이었다. 주제넘은 짓이었다고 소리쳐야지. 하지만 유리창 너머 웃는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던 나는 끝내 들어가지 못했다. 아까의 화는 어디 갔는지 왠지 마음이 답답해지며 오히려 뒷걸음질로 입구에서 물러났다. 결국 나는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다음에 또 찾아오면 그때 해야지. 그땐 진짜 해야지. 그렇게 얼마쯤 걸어왔을까. 문득 이번 일과 상관없을 기억이 떠올랐다. 잊고 살던 옛 기억들. 어렸을 때 어째선지 춥게 느껴지는 할머니 집. 유빈에 비해 유리에게 조금 냉담하게 대하는 할머니의 태도. 어린 마음에 그런 할머니를 미워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신 뒤로는 더 이상 유리를 나눠 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잊어버린 기억이었다. 그걸 떠올린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다시 그 여자 얼굴이 떠올랐다. 유리의 얼굴이 아니었다. 예전 할머니가 냉담하게 대한 상대는 유리만이 아니었다. 여자의 눈매는 사진에서 종종 보던 내 눈매였고, 할머니는 어렸던 내게도 그러셨다. 깨달은 순간 나는 왠지 알게 되었다. 여자가 찾아온 사람은 유리가 아니었구나. 더는 무엇을 떠올리려 하거나 고민하지 않아도 알아서 퍼즐이 맞춰졌다.

잠시 그 자리를 헤매던 나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느릿하게 나아가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뛰듯이 걸어 식당에 도착했고, 쿵쾅거리는 가슴을 다독이며 유리창을 들여다봤다. 여자는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아까 봤던 내외만 있었다.

“여기서 일했던 사람인데 이사 간다고 그만뒀어요.”

의문스러운 눈길을 뒤로하고 나온 거리는 아까와 다른 곳이었다. 여자가 떠난 거리를 한동안 눈으로 훑던 나는 왔던 길 반대쪽으로 무작정 걸어갔다. 곧바로 집에 갈 자신이 없었다. 거실에서 웃으며 나를 반기는 세 분과 마주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박서형(에이비형) / 오늘


강의가 모두 끝났을 때는 하루 중 가장 따듯하고, 또 가장 피곤한 시간이었다. 오전 내내 공복이던 배에 돈가스를 욱여넣고 나니 온몸이 나른해졌다. 나는 하품을 길게 던지며 목적 없이 오가는 칼질을 지켜봤다. 경주마 안경이라도 쓴 것처럼 그릇에 시선을 박은 유빈이 딱딱하게 튀겨진 돼지고기를 괴롭히고 있었다. 홀로 굴러다니던 빵가루가 깨작거리는 포크에 튕겨 옆으로 굴렀다. 다시 톡 하고 누르니 이번엔 그릇을 넘어 쟁반으로 떨어졌다. 얘는 뭐 하는 거야 정말.

사실 오늘 처음 보는 순간부터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구나. 저렇게 티를 내는데 모르기 힘들었다. 정도 이상으로 속내를 드러내는 애들은 하나 같이 피곤하지만 유빈은 그중에도 유난히 번거로웠다. 물어봐주길 기다리는 다른 애들과 달리 유빈은 이쪽에서 먼저 물으면 그때부터 작심한 듯 입을 다무니까. 결국 스스로 말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다 먹었으면 커피 가자.”

절반쯤 남은 돈가스 옆에 포크를 내려놓은 유빈이 작게 끄덕였다.

식당은 크지 않은 호숫가 곁에 있었다. 옆으로 따라붙는 구두 소리와 속도를 맞추며 자판기가 모여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커피를 뽑으며 안 그런 척 유빈의 눈치를 살폈다.

삼 남매 중에 유빈은 독특했다. 유리는 자주 보지는 못했으나 어렸을 때부터 조용하고 차분하다는 인상이었다. 말과 감정표현도 드물고 귀해 보였다. 유빈과 유한이 입을 모아 막내가 아니라 장녀 같다고 했다. 반면 유한은 감정표현만큼은 풍부했다. 말도 적지 않았고 웃음도 잦았다. 그런 면에서 유빈과 비슷했다. 하지만 정작 속내는 밝히지 않았다. 친구들과 모인 자리에서 이야기가 진지해지면 어느 순간부터 웃음으로 입을 덮고 저 혼자만 슬쩍 빠져나가는 인상이었다. 그런 면은 유리와 비슷해 보였다.

유빈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말은 많지 않지만 속내가 잘 드러났다. 스스로도 그것을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 경험 상, 사랑받는 일에 눈치 보지 않고 자란 애들은 보통 이런 모습이었다. 유빈이는 친자식이야. 언젠가 술에 취해 붉어진 눈으로 웃던 유한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마저도 내 사정을 먼저 밝히지 않았다면 듣지 못했을 말이었다.

“선배는 우리 오빠랑 언제부터 알았어요?”

난데없는 질문이 튀어나와서 자판기에 손을 넣은 자세로 고개만 돌렸다. 유빈은 양 손으로 커피를 쥐고 호수를 보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 만났지. 전에 말했잖아.”

“오래됐네요.”

나는 빈손으로 옆머리를 긁었다. 처음 만난 것은 그때였지만 중학교가 갈리며 자연스레 연락이 끊겼다. 그러다 대학에 와서 유빈을 통해 다시 연락이 닿았다. 그 과정을 뻔히 아는 애가 새삼 왜 이럴까.

“근데 갑자기 왜?”

유빈은 대꾸 없이 커피를 홀짝였다. 시선은 여전히 호수를 향해있었다.

“어렸을 때 우리 오빠 어땠어요?”

“야. 살면서 삼 년 빼고 내내 본 네가, 살면서 삼 년만 본 나한테 그걸 물으면 어째?”

웃으라고 한 말에 또 대꾸가 없었다. 조금 성질이 돋은 나는 바짝 깎은 손톱으로 옆통수를 북북 긁었다.

“야. 작작 좀 해. 너 오빠랑 싸웠냐?”

호숫가를 따라 천천히 걷던 유빈은 대답 대신 엉뚱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제 어떤 얘기를 들었어요. 사실 꽤 놀랄 만한 이야기였어요. 그 순간엔 저도 많이 놀랐고.”

나는 섣부른 대꾸 없이 앞서가는 등을 따라갔다.

“근데 또 금세 그래서 뭐? 그게 왜? 이런 마음이 들더라고요.”

얼마쯤 걸었을까, 유빈이 먼저 허름하고 좁은 벤치에 앉았다. 나는 앉지 않고 얼마쯤 곁에서 호수를 향해 섰다.

“근데 그 와중에 배신감을 느꼈나 봐요. 그건 이해나 납득하고는 다른 문제였어요. 알고 있었다면 왜 지금까지 말해주지 않았는지. 언제 말할 생각이었고, 말을 하긴 할 거였는지. 그런 생각이 겹치다 보니 지금껏 당연했거나 그러려니 넘겼던 행동들마저 전부 다른 의미로 다시 보여요.”

그제야 유빈이 지금 스물임을 떠올렸다. 그리고 유한이 역시 스물에 부모님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도. 에두르는 유빈의 말이 어떤 일에서 비롯됐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캐묻지 않았다. 지금 유빈에게 필요한 것은 대답이나 질문이 아니라 들어줄 누군가였다. 스스로 말을 하며 정리를 하는 동안 앞에 서있는 청자가 필요해 보였다. 나는 화를 풀고 계속 이어질 넋두리를 기다렸다. 하지만 거기까지 말한 유빈은 대뜸 다른 질문을 던졌다.

“선배는 여동생만 있었죠?”

“응. 근데 그 앞에 ‘지옥에서 기어 나온’을 붙여야 해.”

“동생이랑 잘 지내는 편이에요?”

어떤 대답이 좋을까. 잠시 적당한 단어를 더듬었다. 나는 유빈이 유한의 동생이어서가 아니라, 유빈 자체로 마음에 들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너랑 나랑 길게 가자.

“글쎄. 실컷 싸우다 보면 진짜 핏줄이 다르구나 싶을 때가 있긴 해.”

유빈의 얼굴이 아리송해졌지만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그래도 같은 기억을 계속 회상하다 보니 추억이 되더라. 서로 추억이 같다는 건 대단한 것 같아. 서로 친자매가 아니라는 것보다 힘이 센가 봐. 크게 싸우면 정말 다신 보기 싫은데, 며칠 지나 집에서 오가다 마주치게 되면 결국 실없이 웃게 돼. 워낙 어렸을 때 같이 살기 시작했고, 모든 추억이 그 자리에 쌓였으니까.”

앉아있던 유빈이 벌떡 일어섰다. 돌아본 얼굴은 하얗게 번져있었다. 예상보다 격한 반응에 오히려 좀 미안해졌다.

“우리 집 재혼했어. 너 몰랐구나.”

유빈은 당황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몰랐어요. 미안해요, 선배.”

“유한이가 아니까 너도 당연히 아는 줄 알았어. 신경 쓰지 마.”

나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며 도로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벤치 위에서 머뭇거리던 엉덩이가 끝내 주저앉았다. 우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호숫가를 따라 바람이 수면을 낮게 쓸고 지나갔다. 종이컵이 조금 눅눅해졌을 무렵에 유빈이 다시 말을 꺼냈다.

“이런 질문이 실례일지도 몰라요.”

호수 한복판에 반짝거리는 물결을 바라보며 나는 담배를 꺼냈다. 이런 말은 단지 도입부일 뿐이다.

“정말 크게 싸웠을 땐.”

그렇게 시작한 유빈은 잠시 말을 멈추고 커피 잔 테두리를 어루만졌다. 한 바퀴 두 바퀴 돌아가던 손가락이 멈췄을 때 유빈이 말했다.

“한 번이라도 내 동생이 아니라고 도장 찍은 적은 없었어요?”

도장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나는 어깨를 흔들며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어요?”

초조하게 기다리던 유빈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소리를 질렀다. 근데 어떻게 안 웃냐.

“너 지금까지 오빠랑 싸운 적 없구나.”

뭐라 덧붙이려던 입술이 내 말에 도로 닫혔다. 잠시 후 유빈은 “어렸을 땐 있었는데…”라며 작게 웅얼거렸다.

“너 지금 오빠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지?”

유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못하고 있는 거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지금까지 싸운 적이 없다고? 심지어 세 살 터울 남매가?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어떤 노력과 수고가 갈려 들어갔기에 가능한지는 원래 수혜자만 모른다.

“그냥 네 성격대로 해.”

“어떻게요?”

“가서 소리를 꽥 질러버려. 방금 나한테 했던 것처럼. 그 뒤는 오빠가 알아서 하게 두고.”

알아들었는지 대답이 없는 유빈을 보며 나는 피우던 담배를 빈 종이컵에 넣었다. 우리는 다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래, 어찌 너만 수혜자겠냐. 단란한 관계는 양쪽의 노력이 모두 갈려있어야 가능하니까. 다만 네가 유리에게 알고도 져주듯, 백조 가족 속에 홀로 오리인 네 오빠 역시 너와 유리가 상상하지도 못한 양보를 하며 여기까지 왔겠지. 타인과 가족이 되는 모든 과정이 그렇듯이.

각자 생각에 잠긴 채 걷다 보니 호수 반대편이었다. 이 한 마디를 물어보고 듣기 위해 멀리도 왔구나. 어서 유빈을 보내고 유한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 멍청한 놈! 뭐 하고 있냐! 고생 많겠다! 그렇게 시원하게 고함이라도 지르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네 오빠 아직도 너 끌어안고 뒤통수에 뽀뽀하고 그러냐?”

내려갔던 유빈의 고개가 퍼뜩 올라왔다. 고개를 끄덕이는 얼굴은 묘한 웃음을 달고 있었다. 마치 내 뒷말이 무엇인지 아는 것처럼.

“걔도 걔지만 너나 유리도 신기하네. 내버려두는 거 보면.”

“그냥 익숙해요. 하도 어렸을 때부터 매일 그랬더니, 사람 만나면 인사하는 것처럼 당연하게 됐어요.”

“초등학교 때도 그러더니. 아무튼 걔도 확인받는 거 참 좋아한다니까.”

반사적으로 웃으려던 유빈의 표정이 도중에 멈췄다.

“무슨 확인이요?”

너무 많이 들어갔나 싶은 걱정이 들었지만, 어차피 내친걸음이었다.

“나도 예전에 좀 그랬거든.”

“선배도 동생 끌어안고 그랬어요?”

“아니. 어렸을 때 내가 그렇게 동생 손을 잡고 안 놨대. 약간 집착처럼 보여서 걱정될 만큼. 몇 년 지나선 자연스레 그만뒀지만.”

“왜요?”

“나는 걔가 너무 좋았는데, 걔는 어떤지 몰라서.”

어렸을 때라 기억은 가물가물했다. 부모가 이혼을 하니 아빠가 사라졌고, 다시 재혼을 하니 새아빠와 여동생이 생겼다. 처음 만난 날만큼은 또렷이 기억한다. 새아빠 뒤에 반쯤 숨은 여동생은 천사처럼 귀여웠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 아이가 좋았다. 나는 여덟 살이었고, 여동생은 여섯 살이었다. 내내 외동이던 나는 동생과 빨리 친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같은 물건을 사고, 같이 놀고, 같이 자며 종일 붙어 다녔다. 그러다 보니 금세 가까워졌던 걸로 기억한다. 덕분에 새아빠와도 오래 데면데면하지 않았고.

하지만 어렸던 나는 내내 불안했다. 잘 모르겠으니까. 나는 얘가 너무 좋은데 얘는 어떨까. 내가 좋아하는 만큼 나를 좋아할까. 그냥 같이 살게 됐으니까, 두 살 많은 언니니까, 좋지는 않지만 싫지도 않으니까, 혹은 싫어도 그냥 맞춰주는 것은 아닐까. 그런 걱정이 늘 가슴에 있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손을 잡았다. 얘가 나를 좋아하는지. 최소한 싫어하지는 않는지 확인하기 위해. 손을 잡으면 그 작은 손도 내 손을 맞잡아줬다. 잡힌 상태로 그냥 걸쳐있는 것이 아니라 힘을 주어 마주 잡아오는 압력이 내 불안을 흩날려 보냈다. 작용에 대한 반작용으로 상대의 마음을 가늠하고 싶었다.

그 불시점검은 한동안 은밀하게 이어지다가 언젠가 조용히 끝이 났다. 몇 년이 지나 가족인 모습이 익숙해지기도 했고, 무엇보다 동생이 자라며 우리가 다투기 시작한 탓도 있었다.

옛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유빈은 내내 묵묵히 서있었다. 호수에 번지는 윤슬에 시선을 뒀지만 그보다 더 먼 곳을 보는 듯했다.

“슬슬 가자.”

“조금만 있다가요.”

유빈은 여전히 호수를 향한 채 말했다.

“차로 와.”

이만하면 유한의 친구로서, 또 유빈의 친구로서 할 만큼 했다. 종이컵을 버리고 먼저 차로 돌아왔다. 뒤로 젖힌 의자에서 설핏 잠이 들까 싶었을 때, 유빈이 조용히 조수석 문을 열었다. 그새 점심시간이 끝났는지 한산해진 호숫가에는 바람에 떠밀린 수면만 조용히 일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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