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중편] 싸리나무 담장 6

6. 매듭은 충격으로부터 집단을 지킨다.

by 이한얼


익수 / 삼 년 전


간밤에 비가 많이 내렸다. 밤새 창문이 덜컹거렸다. 나는 비가 그치자마자 둘째와 함께 트럭에 올라탔다. 도착한 텃밭은 난장판이었다. 바구니가 굴러다니고, 장화에 물이 차있고, 날아간 마대자루가 나무줄기에 피부처럼 들러붙어 있었다. 땅에 박아둔 기둥과 그 축은 그대로 서있었지만 매어놓은 나뭇가지들은 전부 바닥에 누워있었다. 몇 개는 구르다 흙 위에 덮어놓은 비닐을 찢어놓기도 했다. 쓰러진 담장은 둘째가 맡은 오른쪽뿐이었다. 물먹은 끈이 너풀거리며 춤추고 있었다. 둘째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다가가 끈을 매만졌다. 자세히 보니 끊어진 것이 아니었다. 단 두 개뿐인 매듭 중 하나가 풀어져서 잡혀있던 나뭇가지들이 우르르 쏟아진 것이다. 둘째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내가 손을 댄 왼쪽 담장은 그대로였다. 만져보니 매듭 하나가 흔들거리기는 했으나 나머지 매듭들은 여전히 단단했다. 나는 유일하게 흔들거리는 매듭을 다시 조여 맸다. 그것만으로 담장은 어제와 같은 상태가 되었다. 둘째는 유난히 촘촘히 맺어놓은 매듭을 눈에 담다가 나를 봤다. 마치 이제부터 혼나겠구나 하는 얼굴이었다. 그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내게는 둘째를 혼낼 생각도, 그럴 이유도 없었다.

내가 엎어진 바구니를 줍자 둘째도 장화를 뒤집어 물을 빼냈다. 주변을 정리한 우리는 어제 챙겨둔 끈을 꺼내와 다시 담장을 세우기 시작했다. 나뭇가지 서너 개를 붙여 매듭을 짓고, 다시 두어 개를 세워 매듭을 묶었다. 둘째도 젖은 끈을 들고 나를 따라 했다. 양쪽에서 시작된 보수작업은 금세 끝이 났다. 사실 굳이 이렇게까지 많은 매듭은 필요하지 않다. 다섯 개에 하나씩 묶어도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더 세우고 싶은 것은 담장보다 둘째의 마음이었다.

둘째는 힘주어 묶느라 붉게 달아오른 손을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담장을 몇 번 흔들어보더니 나를 돌아봤다. 눈이 마주친 나는 손바닥과 팔꿈치를 타래 삼아 남은 끈을 감으며 웃음을 보였다.


현준 / 오늘


꽃이 든 플라스틱 대야를 끙끙 대며 내려놓았다. 별 것 아닌 듯 보여도 물이 제법 들어있어 여간 무거운 것이 아니었다. 나는 셔츠가 젖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대야를 밀어뒀다. 뻐근한 허리를 두드리고 있을 때 아내의 전화가 울렸다. “어머님”으로 시작된 통화는 “저희 오늘 모임이 있는데 어쩌죠”로, 다시 “내일 찾아뵐게요”로 끝이 났다. “왜 그래요?”라는 질문에 아내는 난감한 얼굴로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어머님 지금 집 앞이시래요.”

“우리 집이요?”

끄덕이는 아내의 모습에 나 역시 침음을 삼켰다. 아무래도 미리 연락이 되지 않아 동선이 꼬인 듯싶었다.

“그래서요?”

“본인이 연락 없이 온 게 잘못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차 한 잔 하고 가신 대요. 내일 다시 오신다고.”

그럼에도 아내는 마음이 쓰이는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모임을 취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머니 말대로 선약이 없었으니 너무 담아두지 맙시다.”

아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가지의 이파리를 잘라내기 시작했다. 이때 다시 전화가 울렸다. 어머닌가 싶은 화면에는 ‘아들’이라는 이름이 떠있었다.

“아들!”

항상 차분하던 목소리는 이때만 높게 올라갔다. 나한테도 좀 그래 주지. 장난스럽게 툴툴거리는데 통화 중인 아내의 표정이 점점 심상찮아졌다. 나는 수건을 문지르며 곁의 의자에 앉았다. ‘한 뼘 통화’ 버튼을 누른 아내가 전화기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쪽지 말인데요, 좀 생각을 해봤어요.”

유한의 말을 들은 아내와 내 눈썹이 동시에 ‘무슨 쪽지?’하며 올라갔다. 당신 쪽지 줬어요? 내 입모양에 아내가 고개를 저었다.

“사실 저도 하나 가지고 있었거든요. 대문 우체통에서 발견했어요. 찢어버리긴 했지만요. 어쨌든 그걸 주셨다는 건 제 선택에 맡기신다는 뜻이죠?”

그 순간 물기를 훔치던 내 손길이 잠시 멈췄다.

“그래서 지금 만나러 가는 길이에요. 아무래도 한 번은 봐야 할 것 같아요.”

내가 참지 못하고 뭐라 대꾸하려 하니 아내가 급하게 손으로 막았다. 아내가 잠시 생각에 잠겨있으니 전화기 너머에서 “어머니 듣고 계세요?”라는 유한의 목소리가 재차 울렸다.

“알았어. 조심히 다녀오렴.”

침을 한 번 삼킨 아내가 말했다. “네”라는 대답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 조심히 다녀와. 이미 끊긴 전화에 대고 아내는 저도 모르게 다시 중얼거렸다.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여자에게 받은 쪽지는 아내 핸드백에 여전히 있었다. 흩어진 퍼즐 조각을 맞추듯 아내의 시선이 먼 곳에 있는 동안 나 역시 생각에 빠졌다.

“유한이가 그 여자를 만나러 가나 봐요.”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전화 초반에 이런 얘기도 했어요.”

“무슨 얘기요?”

“어제오늘 유빈이가 이상하다고. 뭐 마음에 걸리는 거 없냐고.”

듣지도 못한 쪽지의 배달경로를 찾던 내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무래도 유빈이가 우리 얘기 들었나 봐요. 쪽지도 그렇고.”

말해서 아는 것과 말하기 전에 알게 되는 것은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일이 온통 뒤틀린 느낌에 나는 마른세수를 했다. 말없이 마주 않은 채 시간이 흘렀다.

“늦겠어요. 얼른 준비해요.”

이내 먼저 일어난 아내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아내에게 외투를 입히고 있을 때 드르륵 하고 철제 미닫이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유리가 서있었다. 나도 아내도 움직이던 손이 멎었다.

“학원 가?”

나보다 조금 빨리 아내가 입을 열었다. 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사복인 옷차림이 눈에 들어왔다.

“집에 들렀다 나왔어?”

다시 고개를 끄덕인 유리는 방금까지 내가 있던 의자에 앉았다. 아내는 연달아 벌어지는 일에 당황했는지 “근데 왜 여기로 왔어?”라는 말을 내뱉었다. 그 말에 유리는 아내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봤다. 나는 서둘러 유리 곁에 다른 의자를 끌어와 앉으며 아내의 말을 다듬었다.

“엄마 아빠는 곧 모임 가는데.”

유리는 나란히 앉은 우리를 번갈아 바라봤다. 유리는 아직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아내는 무언가 직감한 듯 주먹을 쥐었다.

“유리야.”

유리와 아내의 눈이 마주쳤다.

“어제 아침에 엄마 아빠가 하는 얘기 들었니?”

잠시 후, 유리는 조용히 끄덕였다.

“어디까지 들었어?”

약간 다급한 내 어투를 아내가 눈으로 저지했다. 나 역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니, 유리야. 아빠는 다른 뜻이 아니야. 그냥.”

“다른 뜻 아닌 거 알아.”

유리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아주 차분한 목소리였다. 나는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나보다 먼저 진정한 아내가 “놀랐지?”하고 묻자 유리는 다시 끄덕였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라는 말에는 고개를 저었다.

“어디까지 들었니?”

“오빠가 친자식이 아니라는 거랑.”

아내가 가지런히 묻자 유리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엊그제 찾아온 사람이 오빠 생모인 거.”

조용한 꽃집 안에 유리의 찬찬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나도 친자식이 아니라는 거.”

순간 눈앞이 아찔해졌다. 하나가 아니라 두 가지 모두, 유빈이 대신 유리가 알게 됐다. 입 안이 버석하게 말라갔다. 아내 역시 침착하려는 듯 손등으로 손바닥을 문지르는 중이었다. 무슨 말을 이어야 할지 헤매는 우리를 유리는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오늘 생각해봤어.”

우리의 시선은 작은 입으로 모였다.

“이틀 동안 여러 생각이 들었는데.”

그렇게 말한 유리는 잠시 후, “결국 달라지는 건 없었어”라고 말을 맺었다. 그 말에 그대로 시간이 멈췄다. 흐르던 공기가 그 자리에 머물렀다. 잠시 후, 아내는 손바닥으로 눈가를 가렸다. 고개 숙인 아내의 어깨를 붙들고, 다른 손으로 유리의 손을 쥐었다.

“유리야. 엄마 아빠는 모두의 엄마 아빠야. 유한이, 유빈이, 유리 너까지 누구 하나도 다른 사람 없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절박한 어조에 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나도 엄마 아빠는 엄마 아빠고, 언니 오빠도 여전히 언니 오빠야. 나도 그래.”

작고 차가운 손가락이 내 손을 마주 잡았다. 손바닥으로 되돌아오는 압력에 가슴속에서 뜨거운 열기가 치밀어 올랐다. 유리는 남은 손으로 아내의 손을 덮었다.

“그저 알게 됐을 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어.”

아내는 손등을 덮은 작은 손을 힘주어 잡았다. 얼굴을 가린 손목을 타고 눈물이 떨어졌다. 유리는 아내의 팔뚝을 타고 흐르는 방울을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 아빠도 내가 유리라서 사랑하는 게 아니잖아. 유리가 아니라 유진이었으면 안 사랑할 거 아니잖아.”

그 말을 하는 유리의 눈가도 잘게 흔들렸다. 내내 맑았던 눈동자 위로 불그스름한 습기가 번졌다.

“그냥 나라서 사랑해주는 거니까. 나도 그래.”


유한 / 오늘


세 시간 후 나온 곳은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좁은 골목이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와보지 않았던 동네. 골목을 따라 낡은 다세대 주택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곳이었다. 어둡고 허름한 방 안에서 세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별다른 말이 없었고, 그저 식사 한 끼를 함께 했다. 소소한 근황을 물어봤고 대답은 주로 내가 했다. 그러다 보니 이미 건물 뒤로 해가 넘어가 있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즐겁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세 시간은 그저 오롯이 세 시간처럼 지나갔다.

낯선 얼굴과 마주 앉아있던 내내 할머니의 말이 머릿속을 헤치고 날았다. 오 년 전 골목에서 훔쳐본 멀쩡하던 얼굴과 지금 눈앞의 얼굴이 계속 교차되었다. 온종일 손끝으로 매만졌던 쪽지 조각의 감촉도, “유한아”라던 낯선 억양도, 새벽녘 내려다봤던 푸르스름한 뒷모습도 끊임없이 나타나고 사라졌다. 처음 맛보는 김치의 맛도, 가까이 앉아있기에 느낄 수 있는 특유의 숨 냄새도 쉬이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나란히 일어섰다.

지금 내게 어머니는 한 분뿐이었다. 나를 낳아준 사람이라 한들 이제와 내게 불현듯 엄마가 되지는 않았다. 버리고 갔다는 미움 같은 것은 이미 말라 바스러진 지 오래였다. 나는 어느 하나 빠짐없는 집에서 부족함 없이 자라왔으니까. 내가 화가 났던 것은 불쑥 찾아온 걸음이 지금 우리 집을, 내 동생들을 다치게 할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마주 선 저 여자는 어떨까. 내게 어머니가 아닌 저 여자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할머니 말처럼 이제 와서 나를 자식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배 아파 낳은 아들로, 제 핏줄로 여길까. 모를 일이었다. 방금 세 시간 동안 단 한 번이라도 나를 아들, 혹은 자식이라 칭했으면 나는 아니라며 바로 고개를 저었을 것이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삭힌 미소를 쥐어짰을 것이다. 하지만 저 여자는 한 번도 나를 부르지 않았다. 마주 앉아있는 동안 나를 뜻하는 어떤 호칭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저 말을 걸었다. 배는 고픈지. 몸은 건강한지. 하고 싶은 것은 있는지. 동생들과 사이가 좋은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지 등등. 보통 엄마가 아들에게 물어볼 법한 그런 것들.

좁은 현관을 나서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가슴 바닥에서 뜨거운 무엇이 낮게 끓기 시작했다. 이제 고작 몇 개월뿐이라고 들었는데. 이제와 집 앞까지 찾아올 만큼 염치없는 여자가 왜 아들이라고는 못 부를까. 고작 몇 시간일 뿐인데 지금만큼이라도 왜 제 욕심으로 온통 채우지 않나. 그랬다면 나 역시 미련 없이 돌아설 수 있었을 텐데. 문득 한 번도 본 적 없는, 고개를 젓는 여자의 모습이 그려졌다. 이미 충분한 욕심이었다고. 이걸로 족하다고. 막판에 와서 스스로 욕심을 무너트리는 모습에 나는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정말 그걸로 족할지. 우리는 이것으로 됐을지. 이렇게 헤어지면 서로 만족할 수 있을지. 어쩌면 모든 엄마는 다 똑같지 않을까. 한 개만 얻고 남은 아홉 개는 감춰두는 것. 자식을 위해 아홉 개는 없는 셈 치는 것. 그 엄마가 이십삼 년 차든, 아니면 고작 삼일 차든.

대문 앞에 선 나는 문득 할머니가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생각해봤다. 대체 무엇을 전하고 싶어서 나가던 나를 붙들고 그런 언질을 전하셨는지에 대해. 잠시 망설이던 나는 돌아서 여자를 마주 봤다. 작은 문 앞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더 작은 여자에게, 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낳아주셔서.”

서두만 듣고도, 발치를 향한 여자의 숱 없는 머리칼이 바르르 흔들렸다.

“고맙습니다.”

질끈 내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말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거였구나. 아까 할머니가 그러신 것은 이래서였구나.

“원망은 안 해요. 이제라도 낳아준 분을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말할 수 없게 되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해보라고. 돌아오지 못할 순간을 화가 난 채로 그냥 보내지 말라고. 그것은 저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하물며 지금의 나를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 말씀은 삼십 년쯤 후에 어쩌면 오늘을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를 나에게 보내는, 시간을 뛰어넘는 할머니의 사랑이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나오지 않고 울대에 달라붙는 마지막 단어를 나는 억지로 끄집어냈다. 내 말에 여자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다. 괜히 머쓱해진 나는 “어쨌든 당신도 엄마잖아요” 하고 덧붙였다. 그 말에 여자가 고개를 흔들었다. 바람결에 잔잎이 흔들리듯 아주 미약한 움직임이었다. 나는 여자가 고개를 끄덕인 건지 저은 건지 구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잠시 후 올라온 얼굴은 회한의 굴곡이 옅어져 보였다. 거뭇한 얼굴에 눈가만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모습에 대답은 됐다고 생각했다. 불편하면서 편한 마음이 명치를 맴돌았다.

“갈게요.”

짧게 머뭇거리던 나는 이내 망설임을 버렸다. 지금뿐이었다. 30년은커녕 1년만 지나면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것이다. 할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보고 싶었다. 그건 눈앞의 여자가 아닌 할머니를 향한 보은이었다. 나는 여자의 새끼손가락 언저리에 슬쩍 손가락을 댔다. 머리로 생각했으면 하지 못했을 일이었다. 누가 시켰어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흘러가는 물결에 자연스레 떠밀려가듯 손을 뻗었다. 마른 뼈마디에 서툴게 닿은 손끝을 여자가 마주 잡았다. 이마저도 두 손으로 옴팡 덮지도 못하고, 손마디를 암팡지게 잡지도 못하고 겨우 손가락 두어 개만 감싸 쥐었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손가락끼리만 맞잡은 깍지. 등 뒤에서 다가온 차가 우리를 지나쳐 골목 끝으로 사라질 동안 이어진 짧은 접촉이었다. 내 손가락이 여자의 손바닥에서 빠져나왔다. 두 손을 모으고 죄인처럼 서있는 여자를 보며 두어 걸음 뒷걸음치던 나는 그대로 돌아섰다. 혀뿌리에서 단단한 쓴맛이 치밀었다.

집 앞부터 대로까지는 왔을 때처럼 금방이었다. 택시를 기다리면서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다. 돌아본 그 자리에 여자가 있어도 없어도 마음이 좋지 않을 것 같았다. 곧 택시 한 대가 멈춰 섰고, 문을 열던 나는 결국 돌아봤다. 여자는 그대로였다.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채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손은 가슴에 얹고, 다른 손을 얼굴 곁에 들고 있었다. 잔뜩 찡그린 표정이 어딘가 아파 보였다. 철렁한 마음에 다시 돌아가려는 걸음을 손짓이 막아섰다. 어서 가. 아파서 그러는 거 아니야. 조심히 가. 들어 올린 손끝을 아래에서 앞으로 거듭 밀어내며 그리 말하는 듯했다.

택시에 올라타 문을 닫았다. 연한 선팅 너머 여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손을 흔들고, 다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며 조심히 가라고 나를 보내는 몸짓으로.

택시가 출발하자 회색 담벼락이 여자의 모습을 가렸다. 슈퍼, 가로수. 미용실, 가로수. 부동산, 가로수. 식당, 가로수. 바람에 흔들리는 모든 가지들이 여자처럼 내게 손을 흔드는 것 같았다.

매거진의 이전글[중편] 싸리나무 담장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