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단작 [14매]
문득 그럴 때가 있다. 무심코 스쳐본 장면이 화인처럼 뇌리에 박히는 순간이. 또는 길을 걷다 듣게 된 의미 없는 음이 그 후로도 귓가에 오래 남아있는 것처럼. 살다 보면 그런 경험이 있다. 당시는 왜인지 모른 채 넘어가게 되지만 없던 듯 잊고 살다보면 훗날 불현듯 이유를 깨닫고는 한다. 그 현상은 보통 가족이나 연인, 친구처럼 나와 가까운 사람과 관련된 경우가 많다. 다른 테이블에서 혼자 밥을 먹는 누군가의 등이 유난히 신경 쓰일 때. 말할 때 습관적으로 입술을 삐죽이는 모습에 왠지 친근함이 들 때. 나중에 되새겨보면 집에서 자주 보던 어머니의 뒷모습이었거나 예전 사귀던 사람의 버릇이었음을 기억해낸다.
점차 쌀쌀해지는 어느 날이었다. 해가 낮아질수록 여름이 물러나고 가을이 성큼 다가오는 오후에 나는 카페에서 글을 쓰는 중이었다. 내가 자주 찾는 카페는 2층이었다. 외벽이 온통 통유리여서 밖을 볼 수 있는 창가자리를 특히 좋아했다. 창밖 노란 잎들과 아래 길가뿐만 아니라 저 멀리 삼거리와 버스정류장까지 시야에 들어와 눈이 시원한 장소였다. 그 자리에서 세 시간쯤이 지났을까. 잎 사이로 부서지는 햇살이 눈에 띄게 붉어지기 시작했다. 저녁이 오는 신호였다. 그때 집중이 풀어지며 바쁘던 손이 멎었다. 그건 자연스럽지 않은 끊김이었다. 그리고 왠지 그래야 할 것처럼 고개를 돌려보니 저 멀리 삼거리에 누군가가 있었다. 황색 코트와 검은색 머플러, 왼손에 노트북가방을 든 아버지였다. 아침에 배웅했던 모습 그대로 누군가를 기다리시는 듯했다. 이곳에 다니고 십 년이 넘도록 이런 식의 마주침은 처음이었다. 놀라움과 반가움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리치며 손을 흔들면 충분히 닿을 거리였다. 하지만 부르려던 입은 어째선지 도로 닫혔다. 벌떡 치켜들었던 손도 천천히 내려왔다. 그리고 물끄러미, 단단하게 각진 그 분의 옆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던 나는 어느새 울고 있었다. 입술에 닿기 전까지 흐르는지도 모르는 조용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에 우두커니 서계신 아버지의 모습은 사진처럼 눈이 아닌 가슴에 박혔다.
(왜 이 장면이 눈이 박혔는지는 훗날 이 글을 쓰다가 알게 된다. 지금은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주차를 하고 걸어 내려오는 모습을, 그리고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늘 집 앞 너른 마당 삼거리에 지켜보고 계셨다.)
서른과 예순을 막 넘긴 아버지와 아들. 이제 서로에게 남은 시간보다 지나간 시간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했던 것보다 아직 하지 못한 것들이 훨씬 많이 남았다. 함께 먹을 수 있는 음식보다 없는 음식이 많아졌고, 같이 갈 수 있는 곳보다 갈 수 없는 장소가 점점 늘어났다. 언젠가는 더 이상 낙지볶음에 소주 한 잔을 할 수 없게 될 것이고, 다음날 일찍 일어나 함께 산을 올랐다가 뜨거운 증기에 사우나를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휴가 중 일출봉 앞에서 무릎을 매만지며 고민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고, 족구장에서 1세트가 끝나자마자 가슴을 두드리며 벤치에 앉는 모습을 점점 많이 봐야 할 것이다. 하려면 할 수 있는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반드시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시간이 온다. 그때가 되면 나는 그간 하지 못했음이 아니라 하지 않았음에 서러워 눈물짓게 될 것이다. 지금 나는 그걸 알고 있다. 하지만 알면서도 지금껏 하지 않았던 일이 갑자기 하는 일로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저분은 어떠셨을까. 자식이 태어나면, 아들이 자라면 함께 무엇을 하고 싶으셨을까. 내가 처음 어머니의 뱃속에 자리 잡았다는 말을 들으셨을 때, 무사히 태어났다는 의사의 목소리를 들으셨을 때, 잠든 어머니와 나를 두고 대문 밖에서 하늘을 보며 담배를 태우셨을 때, 무슨 생각과 결심을 하셨을까. 그 아이였던 내게 바라는 점이 있으셨을 것이다. 분명 언젠가 함께 이루고자 하는 바도 있으셨을 터. 과연 얼마만큼 이루셨을까. 그분께서 들어 올린 손바닥을 보며 나는 몇 번이나 마주 손바닥을 내밀었나. 나 역시 자라기 바빴고 앞가림에 쫓겼다지만 효도할 궁리는 하면서 어찌 사랑받을 준비는 안 했나. 드려야 하는 것을 해드리는 일이 자의적 효라면, 반대로 자식을 원활히 사랑할 수 있게 돕는 일은 타의적 효가 될 텐데. 나는 결국 효도도 사랑받음도 반푼이인 채로 서른이 넘어버렸다. 스스로 큰 효는 못했어도 불효도 없는 자식이었다고 여겼다. 하지만 내 역할은 자식으로서의 효, 과연 그것뿐이었을까. 나는 저분에게 자식을 떠나 한 사람의 괜찮은 인간이었는지. 같은 지붕을 이고 살만 한 괜찮은 가족이었는지. 또는 인생의 삼분의 이를 함께 할 괜찮은 동반자였는지. 물론 당신께서 원하신 바가 그런 것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과한 생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식은 늘 누군가의 불효자일 수밖에 없어서 이런 하릴없는 상념들이 계속 입안을 짜게 적셨다.
그렇게 몇 분 정도 지났을까. 말없이 바라만 보던 나는 끝내 휴대전화를 들었다. 비어있는 까만 네모 안을 무슨 말로 채울까 잠시 고민하다가 ‘아버지. 저녁 맛있게 드세요. 파이팅입니다!’라고 밖에 쓰지 못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더는 적지 못하고 전송을 눌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손에 든 휴대전화를 한참이나 내려다보셨고, 나 역시 그런 모습을 오랫동안 훔쳐보았다.
잠시 후, 꺾어진 코너에서 나타난 차가 비상등을 켜고 아버지 앞에 멈춰 섰다. 조수석에 아버지를 태운 차는 이내 차선 흐름에 따라 시야 밖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그 짧은 10초의 장면이 내게는 마치 향후 30년을 압축시켜 놓은 동영상 같았다. 늘 가까워지고 싶었으나 일정 이상 다가가지 못했던 한 사람을, 나와 참 많이 닮았지만 그래서 숱한 평행선을 그렸던 당신을 그저 바라보는 것으로 작별인사를 대신하며 보내야하는 마음으로.
모두 그리 왔다가, 그리 살다가, 그리 가겠지. 지금 내 뒷모습이 할아버지를 바라보던 당신의 뒷모습과 닮아있듯이, 나 역시도 언젠가 그렇게.
어느 저녁 날 삼거리의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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