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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만나러 간다

[15매]

by 이한얼






지하철 한성대역에서 버스로는 오 분, 바람이 선선한 봄가을에 구불구불한 언덕길을 천천히 걸어가면 이십오 분쯤 걸릴 것이다. 성북동의 높다란 담벼락을 따라 오르다 보면 갑자기 절이 나타난다. 경내로 들어서는 정문보다 주차장 뒤 거대한 지장전이 먼저 보이는, 북한산 정릉 근처에 위치한 길상사吉祥寺라는 절이다. 몇 년 전 누군가를 따라 처음 방문했던 이 절을, 근처로 이사한 후부터 종종 찾아가게 되었다. 아침 산책 삼아, 혹은 식사 후 운동 삼아 걸어 오르기 적당한 거리였다. 집 근처에 아파트만 가득한 동네에서 평생을 살아왔으니, 현관부터 걸어갈 수 있는 산과 절이란 얼마나 매력적인지. 그렇게 목적지가 있는 아스팔트 산행은 이사하고 삼 개월도 지나기 전에 생활의 일부로 물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심란한 마음 탓에 범경梵境을 몇 바퀴째 걷던 중이었다. 대웅전 옆 오솔길에 흐드러지게 핀 상사화를 따라가던 나는 예닐곱 개의 작은 건물들 앞에서 문득 멈춰 섰다. 스님들이 수행하는 참선장參禪場이었다. 하나같이 좁고 단출하게 지어놓은 흙집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주변 나무와 적당한 간격을 두고 있는 다른 참선장에 비해 한 집은 나무와 유난히 가까웠다. 흙벽과 나무 사이에 주먹 하나가 겨우 들어갈 정도였다. 당연히 벽보다 튀어나오는 처마가 나무와 닿을 수밖에 없었다. 올려다본 처마는 네모난 구멍이 뚫려있었다. 나무 몸통이 위치한 자리를 비워둔 채 주변을 둘러 마감을 해놓았다. 마치 지붕이 나무를 품은 것 같기도 했고, 혹은 나무가 지붕을 붙잡은 것 같기도 했다. 아니면 그 둘이 원래부터 하나였던 모습 같기도 했다. 나무를 품고 있는 흙으로 빚은 건물. 이것이 왜 이리 내 시선을 잡아챘을까. 불쑥 솟아올랐던 의문은 오래지 않아 사라졌다. 대신 작은 경탄이 튀어나왔다. 나는 부지불식간에 불교 진의眞意의 한 조각을 엿본 듯이, 절에 어울리는 아주 멋진 모습이라고 새삼 깨달았다.

저 지붕에 있는 나무 몸통 크기의 네모구멍은 그것만으로 하나의 작은 종교였다. 응당 내가 누려야 할 것이라며 의지에 반하는 것을 무조건 배타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조율하고 양보할 수 있는 선에서 각자 피해 없이 에둘러 돌아가는 현명함이 거기 있었다. 인간이 이 자리가 필요해지기 전부터 저 나무는 이곳에 자리를 잡고 서있었으리라. 집이 먼저 있었다면 굳이 지붕을 뚫어가며 저 자리에 나무를 심을 이유가 없으니까. 그렇다면 후객後客인 우리는 선객先客인 그를 존중해야 한다. 우리가 그로 인해 그늘을 얻고 그에게서 잎들이 몸을 비비는 청량한 소리와 맑은 산소를 얻었다면, 우리도 응당 그에게 무엇인가를 돌려줘야 한다. 가진 것이 부족해 마땅히 줄 것이 없다면 최소한 감사하는 마음으로 인사하고, 되도록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실상은 어떤가. 대부분 그러지 않는 경우가 잦지 않은가. 그에게도 명확한 생명이 있는데, 나름의 생각과 언어가 있을 텐데, 우리와 다르고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너무 쉽게 물건으로 취급한다. 우리 마음대로 생명도 의지도 없는 존재로 격하한다. 필요하면 써먹고, 필요가 사라지면 다른 용도로 재활용한다. 불편하면 거침없이 잘라버리고, 관심이 없으면 내버려 둔다. 그는 속절없이 당한다. 그는 어쩔 수 없다. 인간이 그의 팔에 전기톱을 들이대는 순간 그것을 막을 힘이 없으니까. 그들은 그렇게 필요한 것을 내어주다 소리 없이 사라진다.

우리가 그들을 도구로서 대하면 우리 역시 도구가 된다. 그들이 우리에게 필요한 무엇을 주는 도구라고 규정하면, 우리는 그들에게 해악만 끼치는 도구가 된다. 우리가 상대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우리 가치도 결정된다. 당연한 일이다. 인간 역시 인간의 가치를 그리 매기지 않던가. 도움이 되면 친구고, 피해를 주면 적이라고. 그들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 우리가 짧은 안목과 이기심으로 격하하는 것은 그들의 가치가 아닌 우리의 가치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보통의 사람뿐만 아니라 만물을 사랑하라는 종교도, 자연과 상생하라는 종교마저 그리한다. 다른 교회도, 또 다른 절도 필요 이상의 무엇을 취하고 버리면서 원하는 것을 쌓아 올린다.

범신론의 관점으로 본다면 세상 만물은 모두 신이다. 토테미즘의 의미로 보면 저 나무도 하나의 신앙이리라. 그를 신이라 친다면, 곁에 있는 집은 신앙의 주물呪物로서 인간을 상징한다. 나무와 집이 나란히 붙어있다. 바람에 밀려 넘어지려는 나무를 집이 받혀주고, 비에 쓸려가려는 집 아래 지반을 나무가 움켜쥔다. 뿌리째 뒤집어지지 않게 집이 바닥을 눌러주고, 강한 볕에 흙벽이 갈라지지 않게 나무가 두 팔 벌려 가려준다. 당신과 인간이 나란히 함께 하며, 인간은 당신에게 머물 발판을 만들어주고 당신은 인간에게 쉴 자리를 마련해주는 모습. 이 얼마나 내가 막연하게 생각하는 신앙과 일치하는가.

종교는 종교 그 자체로 있을 때만 존중받을 수 있으며 모든 문제는 그것을 다루는 이가 어떤지에 달려있다. 당신이 당신만으로 존재하면 모두를 위한 당신이 된다. 하지만 당신이 인간의 손안에 들어오면 그것을 다루는 사람만을 위한 당신이 된다. 그러니 부리는 것이 아니라 따르는 것이다.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그냥 존재하는 것이다. 당신을 어찌하는 것이 아니라 어찌하지 않는 것이다. 당신 그대로를 존중하는 것이다. 이것이 종교가 없는 나의 종교론이자 피조물로서 당신을 대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눈에 쉽게 띄는 많은 종교와 종교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나무를 안은 저 참선장의 모습이 가슴에 깊이 박혔나 보다. 백 마디 경전이나 몇 시간의 설교보다, 얼마의 시주나 헌금보다, 당신에게 더 다가서는 모습으로 보여서.


오늘도 나는 작은 물통을 하나 들고 당신을 만나러 간다. 올려다본 당신은 화창하다. 큰 호흡으로 당신을 들이켜 본다. 나는 나를 신고, 당신을 디디며 구불구불한 당신을 올라간다. 들고 있던 나를 열어 찰랑거리는 당신을 마신다. 그렇게 만난 우리는 여전하다. 나와 당신은 여전히 주먹 하나 간격이다. 당신이 불자 당신은 청량하게 흔들린다. 그럴수록 심란했던 나는 점차 경건해지고, 결국 차분한 마음으로 당신을 내려온다.

온 곳에 당신이 있어 참 감사할 따름이다.




- 좋은 수필 2019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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