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매]
서른셋이 되었다.
이제 고작 삼분의 일쯤 지났을 텐데 어째 삶은 갈수록 팍팍해지기만 한다. 이십대 내내 쫀쫀하던 주변 사정은 서른을 변곡점으로 조금씩 나아지고 있지만 펴지는 것은 물리적 풍요뿐, 심리적 빈곤은 계속 강파르는 듯하다. 재작년보다 작년이 그랬고, 올해는 더 그랬다.
해가 뜨기 전인 이른 시각, 아직 쌀쌀한 새벽 거리를 행선行禪하듯 걷던 중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마주 보는 거울 속처럼 이 세상 같은 평행차원이 무수히 있다면, 그래서 다른 차원에도 ‘나’가 살고 있고 우리가 소통할 수 있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요즘은 그들에게 에너지를 조금씩 나눠받고 싶다. 더 힘든 ‘나’가 있다면 오히려 보내주기도 하고. 마치 여러 사람이 모은 돈을 아픈 사람에게 사용하는 보험처럼, ‘여유 있는 나’들이 ‘여유 없는 나’를 도와주는 시스템. 어느 누가 먼저 필요할지는 모른다. 이곳의 나일수도 있고 다른 곳의 나일수도 있다. 지금의 나일 수도, 예전이나 나중의 나일 수도 있다. 그런들 어떠한가. 설령 다른 차원이라도 교환의 대상이 스스로라면 받아도 미안하지 않고 줘도 아깝지 않을 테니. 힘든 순간마다 그런 식으로 스스로 도우며 견딜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먼 훗날이라면 모르겠지만 아직 불가능한, 상상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다들 같은 차원의 다른 사람과 서로 기대며 살아가는 중이고.
하지만 만약 그 교환이 가능하다면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 어느 날을 잡고 모이는 것이다. 모임의 목적은 아무래도 좋다. 누군가에게-어느 시간대의 나에게- 축하할 일이나 위로할 일이 생겼을 수도 있다. 생일이거나 기념일이거나, 그도 아니라면 어떤 사유 없이도 괜찮다. 약속한 날짜와 장소에 스물인 나와 서른인 나, 마흔과 쉰, 그리고 예순인 나까지 다섯 명이 모이는 것이다. 그럼 ‘차가 있는 나’가 차를 가져오고,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나’가 음식과 물건을 준비한다. 어려서 ‘차도 돈도 없는 나’는 짐이라도 든다. 그렇게 한 차에 모여타고 캠핑장으로 떠나는 것이다. 도착해 내리는 면면들을 보면 참 기괴하다. 차 밖으로 한 사람씩 나올수록 같은 얼굴이 빠르게 늙어가는 것 같다. 하지만 전부 나이기에 젊은이는 아버지뻘의 노인과 친구처럼 말을 주고받으며 텐트를 치고 숯을 굽는다. 고기를 구우며 반주를 곁들인다. 달밤에 커피를 마시며 별자리를 살핀다. 죄다 똑같이 생겼지만 각자 달리 늙은 남자들 다섯이 모여서 말이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이상한 풍경일 것이다.
이 모임의 가치는 첫 만남이 아닌 그 다음 만남부터 드러난다. 나는 스물에 다녀온 캠핑을 십 년이 지나면 다시 한 번 참석해야 한다. 그때 서른인 나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마흔과 쉰, 예순 때도 한 번씩. 즉, 다섯 명이 모였으니 나는 살면서 한 번의 캠핑을 다섯 번 반복하게 된다. 그러는 동안 스물에 기억하던 그날은 마흔과 예순에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서른과 쉰이 마주 앉아 나눈 대화는 서른 때와 쉰 때에 서로 다른 감상으로 남는다. 그러며 나는 하나의 사건을 반복적으로 여러 번 배우게 된다. 비단 이 모임뿐만이 아니다. 다른 날에 가게 된 나들이나 여행, 간단한 산책이나 식사까지도, 우리가 함께 있던 순간은 모두 그렇다. 나는 더 살아낸 내 모습을 보며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때로는 덜 산 나와 대화를 하며 알던 것을 다시 배우기도 한다. 일생을 그런 순간들로 채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최소한 지금 생활보다 덜 메말랐을 텐데.
하지만 상상이 여기까지 흘러왔을 때, 나는 익숙한 기시감을 느꼈다. 재밌게도 나는 이 불가능한 차원여행을 이미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살아가는 동안 사진으로, 일기로, 기억으로, 누군가와의 대화로 지난 나를 다시 만난다. 이루고 싶은 꿈을 그리며, 나아갈 방향과 계획을 세우며 앞으로 올 나와 스치기도 한다. 단지 물질적으로 마주서지 않을 뿐 스스로를 거울로, 스승으로, 때로는 학생으로 삼아 많은 것을 배워간다. 그렇게 마주하는 대상이 ‘나’가 아닌 경우는 더 많다. 나와 만나는 상대가 남일 때도 있고, 내게 영향을 주는 대상이 현상이나 섭리일 때도 있다. 심지어 미물이나 물건인 상황도 있다. 실제 평행차원을 여행할 수 없지만, 나는 이미 남에게 나를 비추고 내 마음에 상대를 띄우며 많은 것을 배우고 있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나고, 달리 어떤 것이 남일까. 교류가 이어질수록 모든 것은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 그리고 타산지석他山之石과 반면교사反面敎師. 세상만사에 배우지 못할 것이 없고 업신여길 것 하나 없을 것이다. 깨달음은 도처에 씨앗처럼 심겨있고 누구에게든 배울 점이 있다. 나는 나에게 혹은 남에게, 좋은 것에 때로는 나쁜 것에 배우고 깨닫고 느끼며 끝없이 변해간다. 이는 곧 역지사지易地思之와 결자해지結者解之로 연결되며, 그 과정을 거듭하다 보면 결국 나와 남 사이의 경계가 사라지는 물아일체物我一體로 귀결된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자타 구분 없이 배움을 얻는 것이다.
상대가 사람이 아닌 한낱 미물이면 어떻고, 사물이면 뭐가 다를까. 지금 내가 앉아있는 의자가 예전의 나였다면, 예전 의자였을 때 내가 베푼 은혜를 지금 내가 얻고 있는 셈이 된다. 오늘 내가 발로 찬 이 돌이 미래의 나라면, 훗날 나는 과거의 내가 뻗친 악행에 몸이 치이는 피해를 입을 것이다. 그렇기에 사필귀정事必歸正,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나를 위해 바르게 행동해야 하고, 동시에 모든 것은 나에 의해 올곧게 돌아가게 되며, 그것은 곧 다반향초茶半香初라는 초심으로 회귀한다. 그러면 다시 처음으로, 새로운 삼인행필유아사로 시작하는 것이다.
그쯤에서 나는 행선을 멈췄다. 정처 없이 내딛던 걸음을 붙잡고 바닥에서 구르던 시선을 거둬 올렸다. 저 멀리 산자락 너머에서 푸른 박명을 밀어내며 노란 빛줄기가 떠오르고 있었다.
저 모습처럼 이 깨달음도, 내가 가진 것도 그렇게 순환循環하나 보다. ‘내민 것은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 이것이 순환이 가진 핵심이지 않을까. 배움이 돌고 돌아 다시 내게로 오듯 선善과 악惡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행한 선은 그저 선이지만, 남을 거쳐 언젠가 나에게 돌아오면 선순환이 된다. 그 순환은 선악후선先惡後善, 내게 머물러있는 악을 밀어내고 나를 선으로 채운다. 언젠가 내가 행했던 좋은 일은 언제고 고비를 맞이한 내게 돌아와 고난을 밀어내고 좋은 일을 불러온다. 결국 남에게 선을 내미는 행위는 내 안의 악을 내쫓고 나에게 선을 머물게 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선을 내민 남은 정녕 남인가. 선이 되돌아온 나는 오직 나이기만 한가. 이쯤 되면 차원여행이 왜 필요할까. 주고받는 대상이 나든 남이든 어찌 아까울까. 커다란 순환에 속해있다면 나는 이미 수많은 ‘나이자 남’인 이와 마주하고 있는 셈인데.
끝내 능선을 기어오른 붉은 빛이 창백한 보도블록을 한 줄씩 따듯한 색으로 물들이고 있다. 눈을 감고 잠시 기다려본다. 눈꺼풀 위로 내리쬔 훈훈한 기운은 서서히 발끝까지 스며든다. 지난 순환이 끝나고 새로운 순환이 시작되는 어느 순간. 눈을 뜨니 새벽이던 주변은 어느덧 아침이 되고, 나는 새로운 하루와 마주 보고 있다.
내내 팍팍하던 마음에 물기가 느껴진다. 깨끗한 물로 씻어 말린 것처럼 의식도 보송보송하다. 분명 외부로부터 선한 에너지를 건네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지금 내게 온 이 선은 어느 시간의 내가 보낸 것일까.
- 계간 수필 2019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