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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강전랑인후랑

人江前浪引後浪 [20매]

by 이한얼






내가 군 생활을 한 곳은 천안과 대전 사이에 있는 후방부대였다. 후방부대 모두를 일반화할 수 없지만 최소한 그곳은 훈련이 많지 않았고, 교툥편이 나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그리 춥지 않았다. 광역시 근처 부대의 지리적 장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체로 훈련이 고되지 않을수록 내무생활이 고달파지는 것에 비해) 나는 군 생활 중에 치가 떨리는 말종도, 사람 피를 말리는 독종도 만나지 않았다. 당시에는 이런저런 상황으로 싫고 미울 때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전부 상식적인 수준 안에서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좋기만 한 곳이 어디에 있을까. 의지와 상관없이 끌려간 곳은 모두 각자 있던 자리가 가장 힘든 장소였을 텐데. 괜찮아 보이는 그곳 역시 일개 사병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단점이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일거리 자체가 많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내 나이만큼 노후한 장비, 전방에는 있지만 후방에는 없는 설비, 그리고 규칙적이지 않은 신병 보충이 안 그래도 많은 일거리를 한도 끝도 없이 늘려놓았다. 삼시세끼에 간식까지 눈에 띄는 대로 집어삼켰음에도 6개월 만에 28kg가 빠질 만큼.

그렇게 입대한 지 10개월쯤 지난, 2007년 1월의 아주 추운 겨울날이었다. 대포 견인 트럭을 운전하고 정비하는 수송 운전병이던 나는 곧 상병인데도 후임이 두 명뿐이었다. 그중 한 명도 몇 달 전 행정실로 넘어가는 바람에 결국 한 명만 남았다. 후방이라 그런지, 정해진 기간에 신병이 들어오지 않아 생겨난 인원 공백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대대에 유일한 정비병마저 후임 정비병 없이 전역을 했다.

그때 고작 스물두 살이었으니, 끝도 없는 작업이 사람을 그렇게 진 빠지게 하는지 처음 알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어제 하루 했던 것보다 더 많은 일거리가 새로 쌓였고, 피로감에 다들 예민하게 달아올랐으나 신경질을 낼 기운조차 없어 기계처럼 일을 할 뿐이었다. 상황에 맞춰 조금 여유로워질 때도 있었으나 그 여유의 혜택은 위에서부터 분배됐기에 아래서 두 번째였던 나는 수송부에서도, 내무실(생활관)에서도 정신없이 뛰어다녀야 했다.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눈을 감을 때까지 눈코 뜰 새 없는 하루였고, 특히 수송부에서는 새로 들어오지 않는 정비병을 대신해서 정비병 작업까지 병행하게 되었다.

앞서 밝혔듯이 아주 추운 겨울날이었다. 곧 혹한기 훈련을 앞둔 우리는 하루에 8시간씩 정비창에서 차량 정비를 했다. 일병이라 함은 그냥이든 손이 시려서든 주머니에 손을 넣는 것은 꿈도 못 꿀 계급이었다. 장갑을 껴도 처음만 도움이 될 뿐, 곧 기름이 스며들며 얼음 장갑으로 변할 때까지 5분이면 충분해서 어쩔 수 없이 맨손으로 정비를 해야 했다. 그러니 차 밑에 들어가 얼음보다 차가운 쇠와 기름을 만지고, 다음 차가 들어오는 동안 미친 듯이 두 손을 비비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쯤이 지나자 양손 세 번째와 네 번째 손가락 끝부터 파랗게 물드는, 동창이 진행되었다. 감각 없이 저릿저릿 안쪽부터 아려오는 그 손가락으로 내무실에서도 차가운 물에 걸레를 빨고 있노라니 참 울고 싶었다. 군 생활 중 신체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때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기계처럼 정비를 하고 손을 비비고 있는데 저 멀리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좋은 일이니 실명을 쓰겠다. 내 계급이 일병 마지막쯤이었으니 그때 내 아버지 군번(나보다 1년 앞선 군번. 보통 다른 선후임 사이보다 깊은 유대가 생긴다)이었던 감창인 병장이 수송부의 최고참이었다. 참 속이 깊은 사람이었고, 나를 유난히 챙겨두던 사람이기도 했다. 나 역시 동갑이지만 어른스럽고 살뜰하게 챙겨주는 김 병장을 잘 따랐다. 날 부른 사람은 그 사람이었다.

“아들! 아들!”

지금이면 왕고로서 화목난로에서 불이나 쬐고 있어야 할 양반이 날 왜 부르지. 반사적으로 스패너들을 내던지고 달려가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근데 일병이 뭔 생각을 해. 헐레벌떡 화목난로가 있는 방풍벽 안으로 들어갔더니 김 병장은 때깔 좋은 몰골로 앉아 환한 얼굴로 날 반겼다. 그 무렵 김 병장은 마지막 휴가가 며칠 남지 않은 말년이었기에 둘만 있을 때는 어느 정도 격의 없이 지내던 때였다.

“아부지, 왜? 나 지금 되게 바쁜데.”

불러서 왔지만 계속 정비창 쪽을 힐끔거리며 눈치를 살피고 있자 김 병장은 우선 본인이 앉아 있던 의자에 나를 앉혔다. 그리고 정비창 쪽으로 목을 빼고 소리쳤다.

“뭐 시킬 거 있어서 얘 십 분만 빌릴게!”

“김 뱀! 되도록 빨리 보내줘!”

그렇게 십 분을 번 김 병장은 시킬 일이라는 말에 일어날까 말까 들썩이는 내 어깨를 누르면서 곁에 세워둔 쇠막대를 집어 들었다. “잠깐 앉아 있어.” 그렇게 말하며 우글우글하게 뭉쳐있는 숯을 헤집고 뭔가를 꺼냈다. 쇠막대를 손잡이에 걸어서 바닥에 내려놓은 것은 껍질이 다 벗겨져 얼룩덜룩한 반합. 쇠막대 끝으로 뚜껑을 톡톡 올려치자 벌렁 뒤집어진 뚜껑 아래서 뿌연 김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연달아 맡아지는 매콤한 냄새. 반합라면이었다.

놀란 내가 벌건 국물을 들여다보는 사이 김 병장은 나무젓가락을 짝, 소리 나게 쪼개서 내게 내밀었다. ‘이거 내 거야?’라고 눈으로 물으니 ‘그럼!’이라고 눈으로 대답해줬다. 떨리는 손으로 젓가락을 받아들었다. 손이 곱아 몇 번 만에 겨우 면발을 집어 한 입 머금었다. 알싸하게 퍼지는 매운 맛. 그리고 위장에서부터 추위를 밀어내는 따듯함. 그 순간 나는 등을 웅크리며 고개를 깊게 숙였다. 속에서 치밀어 오른 뭔가가 목울대와 코를 때리고는 눈을 통해 국물 속으로 떨어졌다. 젓가락을 쥐고 가만히 있는 내게 등을 돌린 김 병장은 쇠막대로 화목난로 안을 뒤적였다.

“아들. 힘들지?”

숯이 이리저리 부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그 한 마디가 톡 하고 끼어들었다. 마치 혼잣말 하듯 잔잔한 어조였다. 나는 뭐라 대답하지 못했고, 김 병장도 더는 묻지 않았다. 서로 등 돌린 스물둘 어린아이 둘을 두고, 다시 오지 않을 시간만이 언제고 또 올 것처럼 천천히 흘러갔다.

뭉친 숯이 재가 되어 스러지고, 뽀얀 김을 뿜어내던 라면이 먹기 좋게 식을 때가 돼서야 나는 목을 가다듬으며 대꾸했다.

“지금 시기엔 다 힘들지. 아부지 빼곤.”

“그렇지. 나만 빼고.”

버릇없는 말에도 김 병장은 털털하게 웃었다. 끝내 이쪽은 돌아보지 않고 이미 바스러진 숯만 계속 뒤적였다.

“얼른 먹어. 다 식겠다.”

그제야 나는 허겁지겁 면발을 들이켰다. 평소라면 손도 안 댈 다시마 조각과 바닥에 남은 조미료 찌꺼기까지도 다 긁어먹었다. 빈 반합을 치운 김 병장은 그제야 나와 마주 앉았고, 나란히 담배 한 대를 피운 후에야 내 엉덩이를 툭툭 두드리며 나를 보내주었다.

“아들 힘내. 이렇게 힘들 날도 얼마 안 남았어.”

“지금 아부지 전역일 얘기하는 거 아니지?”

“이놈 새끼! 전역하고 면회 안 올까 보다.”

그리 킬킬거리던 나는 방풍벽을 나서다 말고 멈춰 섰다. 그리고 마치 문득 생각난 것처럼, 김 병장을 돌아봤다.

“근데 아부지, 갑자기 웬 라면이야?”

쇠막대를 쥔 김 병장도 숯을 뒤적이며 마침 생각난 듯이 대꾸했다.

“그냥. 작년에도 이렇게 추웠거든.”

그렇구나. 고개만 끄덕인 나는 다시 정비창으로 돌아와 남은 일과를 마쳤다. 어째선지 그날 하루는 그리 춥지 않았다. 파랗게 먹어 들어가던 동창도 그날 이후 신기하게도 더는 심해지지 않았다. 그 겨울이 채 끝나기 전에 김 병장은 전역을 했고, 곧 겨울마저 끝나고 봄이 왔다.

그리고 강물이 흐르듯 시간도 흘렀다. 후랑추전랑,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듯이. 전랑인후랑, 앞 물결이 뒷물결을 끌어오듯이. 그렇게 일 년이 지나 김 병장이 앉아있던 철제 의자에 병장이 된 내가 있었다. 조금 억울한 점은 나는 그때까지도 여전히 차 밑에 기어들어가서 HB오일과 엔진오일의 맛을 강제로 맛보고, 기어오일 질감이 좀 텁텁한데 따위를 중얼거려야 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종종 김 병장 생각이 나서 엄한 애들을 불러다가 반합라면을 끓여주고는 했다. 나처럼 우는 친구가 없는 것은 좀 아쉬웠지만, 그래도 다시 내년 이맘때가 되면 이곳에 앉은 그들 중 한 명쯤은 누군가에게 짜게 졸여진 반합라면을 끓여주겠지.




- 인간과 문학 2019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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