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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애로 가는 길

[25매]

by 이한얼






지하철역명이 아직 ‘신천’이던 2013년. 근처 버스정류장에 내렸을 때는 해가 건물 뒤편으로 몸을 숨길 무렵이었다. 나는 되도록 오른편을 보지 않는 자세로 횡단보도까지 갔다. 길 건너 패스트푸드점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유심히 살펴도 약속한 상대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전화가 걸려왔다. ‘어디야?’로 시작된 통화는 ‘어쩌다?’로 이어지더니 곧 ‘알았어’라며 싱겁게 끝났다.

보행신호에 사람들이 우르르 나서는 중에도 나는 여전히 서있었다. 그래서 4분도 아니고 40분을 늦으시겠다? 신호가 바뀔 때까지 제자리에서 방황하던 나는 문득 뒤를 돌아봤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이 아니었다. 페인트 벗겨진 자국이 회색빛 벚꽃처럼 찍힌, 누렇게 색이 바란 외벽도 아니었다. 거기 있는 것은 5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새것 같은 고층 아파트 군락이었다.

멀건 표정으로 이십 몇 층까지 세던 나는 잠시 후, 처음부터 그럴 예정이었던 것처럼 단지 안으로 들어갔다.


애증. 사랑과 미움을 어울러 이르는 말.

1989년부터 2000년까지 잠실동에서 11년, 2000년부터 현재까지 암사동에서 20년째. 그럼에도 누군가 내게 어디서 살았는지 물으면, 암사보다 잠실이 먼저 떠오른다. 아마 유치원부터 중학교까지, 어린 시절의 기억과 마음이 머무르는 ‘고향동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건물이 고목처럼 늙어가도, 주변 익숙한 가게와 시장이 사라져도, 이제 옆동네에 더 오래 살았어도 잠실의 이 아파트 단지는 내게 늘 ‘애’로 남아있었다.

그러던 2008년, 군복무 중에 새 아파트가 들어섰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재건축한다더니 결국 그렇게 됐구나. 군대를 전역하고 오랜만에 찾아간 나는 정류장에 내리자마자 우두커니 멈춰서야 했다. 늘 거기 있던 것이 없었다. 대신 처음 보는 것이 하늘을 가리며 가득했다. 그랬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내심 각오하고 왔건만, 그 자리에는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나는 홀린 듯 단지 안으로 들어섰다. 30층은 되어 보이는 새 건물. 차 없이 깨끗한 통행로. 보기 좋게 꾸며진 산책로와 놀이터. 정갈하게 배치한 나무와 잔디까지. 단지 입구에서 몇 걸음 떼지 않았음에도 그 모든 것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직접 확인한 순간, 나는 (내가 그런 감정을 느낄 줄은 몰랐지만) 격렬한 배신감으로 아찔해졌다. 머릿속에서 높게 솟는 분노와 낮게 떨어지는 낙담이 서로 파장을 만들며 들끓었다.

갈색으로 깨끗한 벤치에 앉은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넋 놓은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흐릿해지는 주변 너머로 내가 알던 기억들이 투명하게 겹치기 시작했다. 내가 걸어온 이 길은 어머니 손을 잡고 걷던 좁은 시장통로. 여기 이쯤은 인생 첫 성취였던, 아버지께 두발 자전거를 배우던 골목. 이 길을 따라가면 죽마고우와 주먹싸움을 벌였던 풀밭. 선약 없이도 기다리면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였던 공터. 첫 자가용인 르망을 세우던 주차자리. 열쇠가 없어 엄마를 기다리던 아카시아 벤치. 첫돌이 지난 동생이 뒤뚱뒤뚱 걷던 놀이터.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와 중학교. 봄과 가을에 하얗고 노랗게 물들던 가로수 하굣길. 가로등 아래 고즈넉이 자리하던 작은 파출소. 누군가의 음성메시지를 들으며 웃고 울던 공중전화까지. 그중 어느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껍질이 뜯긴 낮은 아파트와 녹슨 철창이 둘러진 허름한 단지가 아니라 새것으로 반짝이는 고층 군락이었다. 쓰리던 마음은 끝내 아리기 시작했다. 아무도 훔치지 않았지만 내 유년시절을 통째로 도둑맞은 기분이었다. 이 마음을 어떡해야 하나. 누구도 잘못한 사람이 없는데 누구에게 풀 수 있을까.

어린 시절의 추억이 시멘트 반죽과 함께 묻힌 것을 깨달은 순간, ‘애’였던 이 자리는 동전을 뒤집듯 ‘증’이 되었다. 하지만 미워할 대상이 없다는 것을 다시 깨닫자, 그때부터 나는 모든 것이 싫어졌다. 전부 싫다. 이 깨끗한 건물도 싫고, 이 편편한 화강암 바닥도 싫다. 주변을 듬성듬성 채운 예쁜 나무도, 흠집 하나 없는 이 벤치도 싫다. 심지어 서로 재잘거리며 걸어가는, 여기 사는 것이 분명할 저 죄 없는 부녀마저 싫다.

벌떡 일어선 나는 고작 십여 걸음 들어간 입구에서 도망치듯 나왔다. 그리고 아무것도 보지 않은 것처럼, 어떤 감정도 느끼지 않은 것처럼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로도 나는 잠실로 빈번히 놀러갔다. 하지만 그날부터 목적지에 가까워지면 되도록 오른편에 시선을 두지 않았다. 정류장에 내리면 곁에 뻔히 보이는 단지를 보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고, 그곳이 허공인 듯 애써 무시했다. 무관심으로 꾸몄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좋아했지만 이제 미워진 대상에 대한 성마른 반발이었다.


그렇게 5년이 지나 2013년이 되었다. 나는 몇 년이나 꾸준하게 외면하던 이곳으로 왜 들어왔을까. 지난 5년 동안 그랬듯이 무시하고, 늦는 일행은 근처 카페에서 기다리면 될 텐데.

정문에서 들여다본 단지 내부는 당연한 말이지만 낯설었다. 돌 하나와 바람 한 점까지 내 기억의 것이 아니었다. 안쪽으로 들어선 나는 보행로를 따라 천천히 한 바퀴를 돌았다. 졸업한지 20년이 지난 초등학교는 많이 변해서 학교명으로만 간신히 알아볼 수 있었다. 출신 중학교도 옛 터만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완전히 달라져있었다. 하지만 그때처럼 화가 나지는 않았다. 새삼 낙담할 것도 없었다. 마음 바닥에 쌉쌀함이 고이는 것을 느끼며 그저 구경하듯 걸었다.

그렇게 단지 후문까지 걸어갔다. 예전 공중전화가 줄지어 서있던 자리는 벤치 두 개만 덜렁 놓여있었다. 역시 사라졌구나. 하긴 요즘 누가 공중전화를 쓰겠어. 담배를 피울 요량으로 벤치에 앉았다. 멀리서는 몰랐는데, 새것이던 벤치는 5년 사이 꽤 많은 흠집을 달고 있었다. 이것만 다 피우면 나가자. 그때 양복을 입은 젊은 남자가 옆 벤치에 앉았다. 여자 친구와 통화라도 하는지 싱글벙글한 얼굴로 담배를 물고 있었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봤다. 어쩐지 익숙한 옆모습이었다. 휴대전화가 없는 시대였다면 여기 공중전화가 있었겠지. 그럼 당신도 눈앞에 쌓아둔 동전으로 그 통화를 연장하고 있었을까. 예전 나처럼.

그때, 주변의 가로등이 일제히 켜졌다. 꾸준히 검푸르던 단지가 일순간에 밝은 외투로 갈아입었다. 가로등 불빛만은 내가 살던 때와 똑같은 빛깔이었다. 나가려던 마음을 돌린 나는 담배를 끄고 단지 안으로 향했다. 잔디가 깔린 중학교를 지나고, 유치원과 신설 고등학교가 붙어있는 초등학교까지 천천히 올라갔다. 이상하게도 갑자기 단지에 사람이 많아진 느낌이었다. 가로등이 켜지면 나오기로 약속한 것처럼 누군가가 자꾸 나타나는 듯했다.

아니, 그럴 리가 있나. 사람은 아까부터 있었다. 단지 내가 보지 않았을 뿐.

여기에 사람이 산다는 그 당연한 사실을 자각한 순간, 방금까지 무덤 같던 단지가 천천히 살아나기 시작했다. 넉넉히 깔리는 가로등 불빛과 함께 까만 아파트에 하나씩 불이 커졌다. 이곳저곳에서 퍼지는 목소리가 그제야 들렸다. 고작 몇 십 걸음 만에 주변은 수많은 불빛과 소리로 가득했다. 중학생쯤의 남녀학생이 손을 붙잡고 다정히 걸어가고, 아이를 안은 어머니가 나를 스쳐가고, 천천히 산책하는 할머니, 그 곁을 우르르 뛰어가는 어린 아이들, 1층 거실에서 TV를 보는 부녀, 장바구니가 달린 자전거를 타는 아저씨. 공간에 사람이 얹히고, 불빛에 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렇게 각각이 함께로, 단지가 거주지로, 시간이 생활로 변할수록 내 걸음은 점점 느려졌다. 그러다 멀어지는 아저씨의 뒷모습을 보며 갑자기 웃음이 났다.

2013년에는 30층 아파트가 있고, 내가 어렸던 1993년에는 5층 아파트가 있었다. 그럼 저 아저씨가 어렸던 1973년에는 이곳이 뭐였을까. 내가 여기 살기 전에는 이 자리에 무엇이 있었을까. 집이든 밭이든 무엇인가는 이 자리에 있었을 것이고, 그때 누군가는 하얀 옷을 깨끗이 차려입은 새로운 아파트의 탄생 역시 지켜봤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전에도, 다시 그 이전에도 계속.

그렇게 누군가가 살다 떠난 터에 내가 살았다. 내가 소중히 여기고, 뺏긴 것 같아 분하던 내 ‘애’ 역시 이전 누군가의 ‘증’ 위에 쌓은 것이다. 나보다 먼저 떠난 이도 그랬고, 나보다 훗날 떠날 이도 분명 그럴 것이다. 앞으로도 누군가 떠난 자리에 누군가 오고, 묵힌 ‘증’ 위에 새로운 ‘애’를 계속 쌓아갈 것이다. 지금껏 고조선의 4천년 동안, 나아가 인류가 출현한 4백만년 동안 , 더 나아가면 지구의 40억년 동안 언제나 그래왔듯이.

그것을 깨달은 순간 나는 세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우선 허탈함이었다. 이 얼마나 덧없는 짓이랴. 나 역시 타인의 추억 위에 내 기억을 쌓았건만. 헛된 미움을 참 오래도 가지고 살았구나. 두 번째는 안도감이었다. 이것을 깨닫는 데 5년이나 걸렸는데, 이마저도 오늘 이 자리에 오지 않았으면 언제 깨우쳤을지.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기대감이었다. 비단 이 자리만의, 이런 상황만의 문제가 아니겠구나. 인간의 영혼 가장 안쪽에 박혀있는 두 단어가 ‘애’와 ‘증’이라면, 내가 사랑하고 미워하고 사랑했고 미워할 수많은 다른 것과 다른 상황 역시 이렇겠구나. 이렇게 받아들일 수도, 풀어낼 수도 있겠구나.


그로부터 다시 5년이 지난 2018년. 나는 이제 ‘잠실새내’가 된 이 자리를 다시 찾았다. 강산이 변한다는 시간이 흐른 탓일까, 제법 세월의 흔적이 눈에 띄는 이곳을 천천히 걸어봤다.

2008년 여기서 좋아하던 것을 미워하는 법을 배웠다면, 2013년부터는 미워하던 것을 좋아하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둘 다 애증임은 분명하나 같은 감정은 아니다. 분노에서 혐오로 가는 마지막 길목에 애민으로 빠지는 갈림길이 있듯이, 이 감정 역시 그럴 것이다. 애증에서 무관심으로 가던 중에 나는 마지막 갈림길에서 빠져나왔다. 처음 걷는 이 과정에 이름을 붙인다면, 나는 애증이 아닌 ‘증애’라고 부르고 싶다.

나는 더 이상 이곳을 미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 좋아지지 않은 것을 보니 증애로 가는 이 길은 아직 한참이나 남은 모양이다. 그런들 어떠한가. 이제 밉지 않다면 어쨌든 애증에서 멀어졌다는 것이고, 여전히 좋아하려 한다면 최소한 무관심에서도 멀어지는 중일 테니까. 이미 밉지 않은 이곳이 언제고 좋아지는 날이 오면, 나는 2018년 지금까지 여전히 미워하는 중인 다른 많은 것들마저도 끝내 증애하며 살 수 있지 않을까.




- 창작산맥 2019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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